데지레 클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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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지레 클라리는 1777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인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약혼했으나 파혼 후 프랑스 육군 장군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와 결혼했다.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위 계승자가 되면서 1811년 스톡홀름으로 이주했으나 현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파리로 돌아갔다. 1818년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여왕이 되었지만 프랑스에 머물렀으며, 1823년 아들과 함께 스톡홀름으로 돌아와 1829년 스웨덴 여왕으로 대관했다. 1844년 남편이 사망한 후에는 여왕 모후로서 괴팍한 행동으로 알려졌으며, 1860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여러 소설, 영화, 만화 등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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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레 클라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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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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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스웨덴 왕비 겸 노르웨이 왕비 |
재위 기간 | 1818년 2월 5일 – 1844년 3월 8일 |
대관식 | 1829년 8월 21일 |
배우자 | 칼 14세 요한 (1798년 결혼, 1844년 사망) |
자녀 | 오스카르 1세 |
가문 | 베르나도트 가문 (결혼으로) |
아버지 | 프랑수아 클라리 |
어머니 | 프랑수아즈 로즈 소미스 |
출생명 | 베르나르딘 외제니 데지레 클라리 |
출생일 | 1777년 11월 8일 |
출생지 | 프랑스, 마르세유 |
사망일 | 1860년 12월 17일 |
사망지 | 스웨덴, 스톡홀름 궁전 |
매장일 | 1861년 1월 11일 |
매장지 | 스톡홀름, 리다르홀름 교회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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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스웨덴어 | Eugenia Bernhardina Desideria (에우게니아 베른하르디나 데시데리아) |
프랑스어 | Désirée Clary (데지레 클라리) |
2. 생애
2. 1. 어린 시절
1777년 11월 8일, 데지레 클라리는 프랑스 마르세유의 유복한 실크 상인 프랑수아 클라리와 그의 두 번째 아내 프랑수아즈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3][18] 데지레는 평생 동안 친가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가장 나이가 가까운 언니 줄리에게 강한 애정을 쏟았다.[18] 그녀의 아버지는 이전에 1751년 4월 13일 마르세유에서 가브리엘 플레숑과 결혼했다. 클라리 가(家)는 원래 아일랜드 이민자 집안이었다.데지레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프랑스 혁명은 부유한 상인들에게도 위협적이었다. 많은 상인들이 그들의 재산때문에 체포되었으며, 데지레의 가족들 역시 혁명에 불안함을 느꼈다.
어린 시절 클라리는 혁명 전 프랑스의 상류층 딸들에게 일반적으로 제공되던 수녀원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가 11살이 채 안 되었을 때 프랑스 혁명 (1789년 시작)이 일어나 수녀원이 폐쇄되었다.[4][19] 클라리는 부모와 함께 돌아와 그 후부터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나중에 그녀의 교육은 피상적이었다고 묘사되었다.[5] 여러 역사학자들은 클라리가 평생 동안 그녀의 출생 가족에게 헌신했다고 지적했다.

혁명 전, 그녀가 11살 때 마르세유의 친가에서 훗날 남편이 될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한 병사가 그녀의 집에 숙영할 수 있는지 물어왔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병사가 내는 소음을 싫어해서 거절했다. 후년에 데지레는 "이때 돌려보낸 병사가 나중에 나의 남편이 되고, 왕이 될 베르나도트였다"고 회고했다.[20]
클라리에게는 평생 매우 가깝게 지낸 누이와 남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누이인 줄리 클라리는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결혼했고, 후에 나폴리와 스페인의 여왕이 되었다. 그녀의 남동생인 니콜라 조제프 클라리는 클라리 백작이 되었다. 그는 안 죈 루에르와 결혼하여 제나이드 프랑수아즈 클라리라는 딸을 두었다.
2. 2. 나폴레옹과의 만남과 파혼
1792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데지레의 언니 줄리 클라리의 혼인이 결정되면서 데지레는 나폴레옹과 알게 되었고, 이후 약혼하였다.[21] 1793년 나폴레옹은 툴롱 공략전에서 큰 공을 세워 명성을 얻었으나, 데지레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결혼은 하지 않았다. 1794년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나폴레옹이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1796년 파리에서 왕당파의 폭동을 진압하면서 다시 명성을 얻었고, 이때 조제핀 드 보아르네를 만나게 된다.[21]1794년 아버지 프랑수아가 사망한 후, 오빠 에티엔이 클라리 가문의 가장이 되었지만, 혁명 전에 그의 아버지가 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이유로 혁명 정부 당국에 체포되었다.[21] 데지레는 오빠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만나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다.[21] 처음에는 데지레와 조제프가 약혼했지만, 나폴레옹의 제안으로 조제프는 줄리와, 나폴레옹은 데지레와 결혼하기로 하였다.[21] 조제프와 줄리의 결혼 후, 1795년 4월에 나폴레옹과 데지레는 약혼했지만, 양가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1]
1795년부터 1797년까지 데지레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어머니, 언니 부부와 함께 살았고, 보나파르트 가문도 그들과 합류했다. 데지레와 나폴레옹은 연애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나폴레옹으로부터의 답신은 점차 끊어졌다.[22] 결국 1796년, 나폴레옹은 데지레에게 알리지 않고 조제핀과 결혼하면서 파혼하게 된다.[21] 데지레는 나폴레옹에게 감상적인 내용의 편지를 보냈지만, 제노바로 이주한 후에는 드물게 편지를 보냈다.[22]
1797년, 조제프가 교황령의 대사로 임명되면서 데지레도 언니 부부와 함께 로마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나폴레옹의 중재로 마튀랭 레오나르 뒤포 장군과 결혼 이야기가 오갔지만, 뒤포가 로마에서 반란 분자에 의해 살해되면서 파혼되었다.[23] 후년에 클라리는 뒤포와의 약혼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강력히 부인했다.[3]
2. 3. 베르나도트와의 결혼과 스웨덴 왕비 즉위
1798년, 데지레는 프랑스 육군의 장군이자 나폴레옹의 라이벌인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후의 스웨덴의 칼 14세 요한)를 만났다.[6] 나폴레옹의 형제들과 친분 관계를 쌓았던 베르나도트를 가족들이 데지레에게 소개시켜 준 것이었다. 베르나도트 역시 여러 이점 때문에 데지레에게 청혼했으며, 데지레는 그와 결혼한다. 데지레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 훗날 스웨덴에서 자신의 시종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 사람들이 그가 나폴레옹과 대적할만하다고 이야기한후 (결혼을) 결정했다."[24] 이 결혼에 따라 베르나도트는 클라리 가를 통해 보나파르트 가와 간접적인 인척(姻戚)이 되었다. 이 배경에는 나폴레옹의 형제들이 유능하고 민중의 지지도 있던 베르나도트를 데지레를 통해 어떻게든 아군으로 끌어들일려고 노력한끝에 이루어진 결과가 아닌가라는 연구도 있다.[24] 실제로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통령정부를 수립할 때, 베르나도트는 중립을 취하면서 쿠데타를 묵인하고 있었다. 같은 해, 외아들 오스칼이 태어났으며, 오스칼의 대부는 나폴레옹이라는 통설이 있지만, 오스카르가 태어났을 때 나폴레옹은 이집트 출정 중이었고, 실제 대부는 오스카르의 후견인을 맡은 조제프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25]데지레와 베르나도트가 결혼한 후에도, 베르나도트와 나폴레옹 사이의 긴장은 완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데지레는 남편인 베르나도트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는데,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에 대해 처결을 내리려 할 때마다 늘 데지레 클라리를 떠올렸고, 이 때문에 베르나도트에 대해서 심한 처분을 하지 못한다. 베르나도트 전기 작가 중 한명은 베르나도트가 데지레의 남편이 아니었다면 나폴레옹은 진작 그를 총살했을것이라고 이야기 할 정도이다.
베르나도트와 데지레의 결혼 생활은 동시대 문헌을 통해 행복했다고 알려져있다. 데지레의 성격은 정치에 관심이 없는 평범한 여성이었고 남편이 군인으로 승진하기 보다는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을 더 좋았다. 쥐노의 부인이 기록한 나폴레옹 궁정에 대한 책에서 그녀는 데지레에 대해 " 베르나도트가 전장으로 가면 그때문에 울고, 남편이 돌아오면 다시 전장으로 떠날것이라는 생각때문에 울었다."라고 이야기한다. 베르나도트 역시 다른 여성들과의 연애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살롱에서 수많은 여성들을 만났지만 그녀들과는 아내와 이야기하지 못하는 정치 이야기를 했다. 이 때문에 마담 르카미에(madame recamier)는 데지레에게 "당신 남편은 나와 단 둘이 있으면 정치 이야기만 하려하죠?"라고 물었다고 한다. 쥐노의 부인 역시 베르나도트에 대해 그가 연애에 무관심했다고 언급한다.
1809년, 남편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추밀원에 의해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된 것은 데지레와 프랑스 제국의 운명을 크게 전환하는 사건이었다. 베르나도트 부부는 이를 위해 나폴레옹에게 “스웨덴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은 허가해 주었으면 한다.”고 신청한다. 이때 나폴레옹은 “데지레에게는 내가 나쁜 일을 했다.”라며 이를 허가한다. 베르나도트는 1810년에 왕세자가 되면서 동시에 섭정(攝政)이 되어 스웨덴에서의 집정(執政)을 시작한다. 데지레가 아들 오스칼과 함께 파리로부터 스톡홀름으로 거처를 옮긴 시기는 1811년이다. 그러나 데지레는 프랑스와는 기후 풍토도, 문화도 다른 스웨덴에 친숙해지지 못했다.[30] 게다가 궁정의 실권을 잡았던 왕비 헤드비히 엘리자베트는 데지레에 대해서 차갑게 대했다. 그녀는 일기에 데지레가 마음씨가 좋고, 호탕하며, 쾌활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미숙한 응석받이 아이이며, 프랑스식이지 않은 모든 것에 불평을 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지 못한다고 묘사했다.[35] 또 이 시기의 스웨덴의 겨울이 비정상적으로 추웠던 일도 있어서 반년 후 남편과 아들을 남겨둔 채 파리로 돌아온다.[5] 프랑스로 돌아온 데지레는 스웨덴 생활에 대해서 단지 "추웠다"라고만 답했다.
파리에 돌아온 데지레는 스웨덴 왕태자비로서 살롱을 열었으며 이곳에는 주로 스웨덴인들과 반 나폴레옹파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늘 가족들과 친밀한 관계였던 데지레는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언니와 다른 가족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1818년, 베르나도트는 스웨덴과 노르웨이(1814년에 획득)의 국왕 칼 14세 요한으로서 즉위했다. 하지만 남편이 즉위한 뒤에도 데지레는 스웨덴에 가지 않고 프랑스에 남아 있었다.[30] 1823년에 왕세자 오스카르가 프랑스 황후 조제핀의 손녀와 결혼한 것을 계기로 데지레는 다시 스톡홀름으로 옮겨살게 된다. 데지레가 돌아온후 스웨덴 궁정은 구스타프 3세 이후 가장 활발했다. 하지만 데지레는 곧 지쳤으며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길 원했지만, 칼 14세 요한은 허락하지 않았다. 남편 칼 14세가 1844년에 사망한 후, 태후가 되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실행하지는 못했다. 남편이 죽은후 데지레는 기이한 행동을 많이 했는데, 밤낮을 뒤바꿔 살았으며, 오페라가 끝난뒤에 오페라 박스에 들어가기도 했다.
왕위를 계승한 아들 오스카르 1세도 1859년에 데지레에 앞서 사망하면서 섭정을 맡고 있던 손자 칼 15세가 즉위한다. 1860년에 데지레도 83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데지레의 마지막 말은 ‘나폴레옹’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2. 4. 왕비 시절과 말년
1809년 남편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추밀원에 의해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된 것은 데지레와 프랑스 제국의 운명을 크게 전환하는 사건이었다. 베르나도트는 1810년 왕세자가 됨과 동시에 섭정이 되어 스웨덴에서 집정을 시작했고, 데지레는 1811년 아들 오스칼과 함께 스톡홀름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데지레는 스웨덴의 기후와 문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왕비 샤를로테는 데지레에게 차갑게 대하며 "자신의 조국을 흘끗이라도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거나 "아들을 치마폭에 감싸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결국 데지레는 반년 만에 남편과 아들을 남겨둔 채 파리로 돌아갔다.파리에 돌아온 데지레는 스웨덴 왕태자비로서 살롱을 열었고, 이곳에는 스웨덴인들과 반 나폴레옹파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1818년 베르나도트는 칼 14세 요한으로 즉위했지만, 데지레는 프랑스에 남아 있었다. 1823년 왕세자 오스카르가 프랑스 황후 조제핀의 손녀와 결혼하면서 데지레는 다시 스톡홀름으로 옮겨 살게 되었고, 스웨덴 궁정은 구스타프 3세 이후 가장 활발해졌다. 하지만 데지레는 곧 지쳤으며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길 원했지만, 칼 14세 요한은 허락하지 않았다.
1810년 12월 22일 데지레는 스웨덴 헬싱보리에 도착했고, 1811년 1월 6일 스톡홀름 왕궁에서 스웨덴 왕실에 소개되었다.[5] 스웨덴의 기후는 그녀에게 충격적이었고, 겨울에 도착한 탓에 눈을 싫어하여 울었다고 한다.[5] 관용법에 따라 개종할 의무는 없었지만, 그녀를 위해 가톨릭 예배당이 마련되었다.[6] 데지레는 공식적인 궁정 예법에 적응하지 못했고, 프랑스 측근들은 그녀가 모든 것에 불평하도록 부추겨 인기가 없었다.[2] 헤드비히 엘리자베스 샬롯 여왕은 데지레를 미성숙한 "응석받이"이자 "모든 면에서 프랑스 여자"라고 묘사하며 탐탁지 않아 했다.[7]

데지레는 1811년 여름, 건강상의 이유로 ''고틀란드'' 백작 부인이라는 가명으로 스웨덴을 떠나 파리로 돌아갔다.[8] 그녀는 스웨덴 귀족들이 자신을 얼음처럼 대했다고 말했다.[8] 파리에서 그녀의 집은 비밀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그녀의 편지는 그들에 의해 읽혔다.[6] 그녀는 탈레랑과 푸셰와 자주 교류했고, 나폴레옹의 임무에 따라 그녀를 통해 남편에게 영향을 미치려 했다.[6] 1812년 오보에서 남편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만남 동안, 차르는 샤를 요한에게 그녀와 이혼하고 그의 여동생 중 한 명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6]
1814년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데지레는 프랑스의 루이 18세에게 소개되었고, 그 후 몇 년 동안 그의 궁정을 자주 방문했다.[9] 1817년, 데지레의 남편은 그녀가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동을 하는지 보고하기 위해 몽드리샤르 백작을 스파이로 배치했다.[5]
1818년 남편이 스웨덴 국왕이 되면서 데지레는 여왕이 되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프랑스에 머물렀다.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변장 상태를 유지했지만, 스웨덴 대사관과 연락을 유지하고 루이 18세의 궁정을 자주 방문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프랑스 총리 리슐리외 공작과 사랑에 빠졌지만, 리슐리외는 그녀의 애정에 화답하지 않고 그녀를 "미친 여왕"이라고 불렀다.[6]
1823년 데지레는 아들의 신부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세핀과 함께 스웨덴으로 돌아왔다.[10] 1829년 8월 21일, 그녀는 스톡홀름의 스토르키르칸에서 스웨덴 여왕으로 대관했다.[11] 그녀는 자신의 요청에 따라 대관했는데, 이혼에 대한 보호로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12] 그녀는 1568년의 카린 몬스도터 이후 스웨덴의 여왕이 된 최초의 평민이었다.

데지레 여왕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은 것으로 칭찬받았다.[6] 샤를 요한이 흥분할 때마다, 그녀는 "베르나도트!"라는 한 마디로 그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6] 그녀는 사교 생활을 즐겼지만, 격식을 차리지 않을 경우에만 그랬다.[13] 그녀는 시종들과 친하게 지냈고, 특히 클라라 본데 백작 부인을 좋아했다.[6] 그녀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춤을 즐겼으며, 스웨덴어를 배우지 못했지만 그녀의 스웨덴어 구사 시도에 대한 많은 일화가 있다.

데지레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독실하지는 않았다.[6] 그녀의 독실한 가톨릭 며느리는 그녀가 미사와 고해성사에 참석하도록 고집했지만, 그녀는 고백할 죄가 없다고 말했다.[6]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 별장은 로세르베르 궁이었고, 람로사 헬소브룬과 같은 스웨덴 온천을 자주 방문했다. 데지레는 1825년에 처음으로 노르웨이를 방문했고, 오슬로의 가난한 소녀들을 위한 마리아 샨도르프의 ''유게니아 스티펠세''(유게니아 재단)의 후원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5]
[[File:Desideria_caricature_by_Fritz_von_Dardel.png|thumb|1850년대 프리츠 폰 다르델(Fritz von Dardel)의 데지레 클라리 여왕 모후 캐리커처
1844년 칼 14세 요한이 사망하고 데지레는 여왕 모후가 되었다. 그녀의 아들인 오스카르 1세는 그녀의 습관을 바꾸지 않도록 배려했다.[6] 데지레는 자선 활동에 참여했지만 은밀하게 진행했다.[6] 1853년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 황제가 된 후, 데지레는 파리로 돌아갈 준비를 했지만, 바다 여행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떠날 수 없었다.[6]
[[File:Desideria_of_Sweden_&_Norway_dead_1860.jpg|thumb|200px|그녀의 임종 시 사진
[[File:Desideria_of_Sweden_&_Norway_grave_2007.jpg|thumb|200px|리다르홀름 교회에 있는 데지레의 석관
여왕 시절, 특히 여왕 모후가 된 후, 그녀는 괴팍함으로 유명해졌다. 그녀는 시간을 거꾸로 보내는 것으로 알려졌고, 밤에 "마차를 타고 산책"을 했다.[5] 그녀는 때때로 거리의 아이들을 궁궐로 데려와 과자를 주었고, ''"Kom, kom!"'' (스웨덴어로 "어서 와!"라는 뜻)이라고 말했다.[5]
1860년 데지레는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4] 데지레의 마지막 말은 ‘나폴레옹’이라고 전해진다. 그녀는 리다르홀름 교회에 안장되었다.[14] 칼 14세 요한과 데지레의 후손은 스웨덴 왕실, 덴마크 왕실, 노르웨이 왕실, 벨기에 왕실, 룩셈부르크 대공가 등에 퍼져있다. 데지레가 죽은 후, 그녀의 개인 문서들 사이에서 나폴레옹과의 편지 초안이 발견되었다.[53]
3. 평가와 유산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3. 3. 유산
wikitable
4. 대중문화
데지레 클라리는 여러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16]
- 《데지레》(1951)는 안네마리 셀린코가 쓴 소설로, 모의 자서전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이 소설은 원래 독일어로 출판되었으며, 키펜호이어 운트 비츠에서 출판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중국어, 네덜란드어, 영어, 에스토니아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헝가리어, 스페인어, 페르시아어, 슬로베니아어, 터키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 《데지레 클라리의 놀라운 운명(Le Destin fabuleux de Désirée Clary)》(또는 《미스 데지레》)(1942)는 사샤 기트리가 감독한 프랑스 영화이다.
- 《데지레(Désirée)》(1954)는 셀린코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미국 영화로, 진 시몬스와 말론 브란도가 출연했다.
- 《베르나도트 앨범》(1918)은 존 B. 랭건이 클라리와 조세핀(본명: 마리 타셰)의 삶을 다룬 "스크린 처리"로, "마리 타셰와 데지레 클라리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 《여왕의 행운: 데지레, 나폴레옹, 그리고 제국보다 오래 살아남은 왕조에 관한 소설》(2020)은 앨리슨 파타키가 쓴 1인칭 서술 소설로, 클라리의 삶을 다루고 있다.[17]
영화
- 『데지레』(1954년, 20세기 폭스, 감독: 헨리 코스터) - 배우: 진 시몬스
만화
- 이케다 리요코 『영광의 나폴레옹 - 에로이카』 1986년 - 1995년, 부인공론
소설
- 안네마리 셀린코 『데지레 이야기』 우에다 토시로 역, 가마쿠라 서방, 1955년 (상기 영화의 원작)
게임
-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
4. 1. 영화
데지레 클라리는 여러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16] 안네마리 셀린코가 쓴 소설 《데지레》(1951)는 모의 자서전 형식으로, 독일어로 처음 출판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소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으며,[16] 1954년에는 진 시몬스와 말론 브란도가 출연한 미국 영화 《데지레》로 제작되었다.[17] 그 외에도 사샤 기트리가 감독한 프랑스 영화 《데지레 클라리의 놀라운 운명(Le Destin fabuleux de Désirée Clary)》(1942)가 있다.[17] 1918년에는 존 B. 랭건이 클라리와 조세핀(본명: 마리 타셰)의 삶을 다룬 "스크린 처리"인 《베르나도트 앨범》을 출간하기도 했다. 2020년에는 앨리슨 파타키가 클라리의 삶을 다룬 1인칭 서술 소설 《여왕의 행운》을 출간했다.[17]헨리 코스터 감독, 진 시몬스 주연의 영화 《데지레》(1954)가 있다.[16]
4. 2. 소설
데지레 클라리는 여러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16] 안네마리 셀린코가 쓴 소설 《데지레》(1951)는 모의 자서전 형식으로 구성되었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사샤 기트리가 감독한 프랑스 영화 《데지레 클라리의 놀라운 운명(Le Destin fabuleux de Désirée Clary)》(1942)와 셀린코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미국 영화 《데지레(Désirée)》(1954)가 제작되었다. 존 B. 랭건의 《베르나도트 앨범》(1918)은 클라리와 조세핀의 삶을 다룬 "스크린 처리"이며, 앨리슨 파타키의 소설 《여왕의 행운: 데지레, 나폴레옹, 그리고 제국보다 오래 살아남은 왕조에 관한 소설》(2020)은 클라리의 삶을 1인칭 서술로 다루고 있다.[17]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영광의 나폴레옹 - 에로이카』(1986년 - 1995년)에도 등장하며, 게임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도 나온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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