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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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카르 1세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1810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스웨덴 왕세자였던 아버지 칼 14세 요한을 따라 스웨덴으로 왔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양성평등법 도입, 의무교육 실시 등 진보적인 개혁을 추진했으며, 언론의 자유를 확립했다. 외교적으로는 민족주의를 지지하며 스칸디나비아 국가 간의 연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59년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장남 칼 15세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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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르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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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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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칭호 | 스웨덴 국왕, 노르웨이 국왕 |
재위 기간 | 1844년 3월 8일 ~ 1859년 7월 8일 |
대관식 | 1844년 9월 28일, 스톡홀름 |
선임자 | 칼 14세 요한 |
후임자 | 칼 15세 |
출생명 | 요세프 프랑수아 오스카르 베르나도트 |
출생일 | 1799년 7월 4일 |
출생지 | 파리, 프랑스 제1공화국 |
사망일 | 1859년 7월 8일 |
사망지 | 스톡홀름, 스웨덴 |
매장일 | 1859년 8월 8일 |
매장지 | 리다르홀름 교회 |
배우자 | 조제피누아 드 뢰히텐베리 (1823년 결혼) |
자녀 | 칼 15세 구스타프 오스카르 2세 에우셰니아 공주 아우구스트 |
왕가 | 베르나도트 왕가 |
아버지 | 칼 14세 요한 |
어머니 | 데지레 클라리 |
종교 | 스웨덴 교회 (이전: 가톨릭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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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스웨덴어 | 오스카르 1세 |
프랑스어 | 조제프 프랑수아 오스카르 |
참고 자료 |
2. 생애
1844년 아버지 칼 14세 요한이 사망하자 스웨덴 왕과 노르웨이 왕으로 즉위하였다. 오스카르 1세는 아버지와 달리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급진적인 개혁에는 반대했다.
즉위 직후 언론의 자유를 확립하고, 1845년에는 형제자매가 상속에서 동등한 권리를 갖도록 하는 양성평등 법률을 통과시켰다.[13] 또한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통합 문장이 있는 새로운 국기를 도입하여 두 왕국 간의 평등을 공식적으로 확립했다.
외교적으로는 민족주의를 지지하여 1848년 슐레스비히 제1차 전쟁에서 덴마크를 지원하고, 말뫼 휴전(1848년 8월 26일)을 중재했다. 1852년에는 런던 의정서에 서명하여 덴마크의 영토 보전을 보장했다.[14] 1850년에는 세 스칸디나비아 왕국의 왕조적 연합을 계획했으나, 어려움으로 인해 포기해야 했다.[14]
러시아 제국에 대한 아버지의 우호 정책을 바꾸어, 크림 전쟁 중에는 중립을 유지하면서도 영국, 프랑스 제2제정과 동맹을 맺어 스웨덴-노르웨이의 영토 보전을 꾀했다(1855년 11월 25일).
1857년 건강이 악화되어 섭정이 된 장남 칼 15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859년 7월 8일 스톡홀름 왕궁에서 사망하여 리다르홀멘 교회에 안장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스웨덴 왕자
1810년 아버지 칼 14세 요한이 스웨덴의 왕세자가 되면서, 이듬해인 1811년 어머니와 함께 파리에서 스톡홀름으로 이주했다. 칼 13세는 그에게 쇠데르만란드 공작 작위를 내렸다.[7] 오스카르는 왕실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여 스웨덴어를 금방 익혔다. 1816년 1월 17일,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18년에는 웁살라 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어 한 학기를 보냈다.[8]1818년, 아버지가 스웨덴과 노르웨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세자가 되었다.
2. 2. 왕세자 시절
1810년 아버지 칼 14세 요한(장바티스트 쥘 베르나도트)이 스웨덴의 왕세자가 되면서 스웨덴으로 이주하였고, 칼 13세는 그에게 쇠데르만란드 공작 작위를 내렸다.[7] 1818년 아버지가 즉위하면서 왕세자가 되었다. 1824년과 1833년에는 잠시 노르웨이 총독을 역임했다.[8] 1823년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과 혼인하였다.
스웨덴으로 온 후 르 므와네에게 스웨덴어를 배워 곧 아버지의 통역관 역할을 할 수 있었다.[8] 1816년 1월 17일,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18년 웁살라 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어 한 학기를 보냈다.[8]
1832년에서 1834년 사이에는 작곡가 에두아르트 브렌들러가 사망하여 미완성으로 남았던 낭만 오페라 ''방랑 기사 라이노''를 완성했다. 1839년 대중 교육에 관한 기사를 썼고, 1841년 교도소 개혁을 옹호하는 ''형벌과 교도소에 관하여''(Om Straff och straffanstalter)를 익명으로 출판했다.
2. 3.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
1810년 스웨덴의 왕세자가 된 칼 14세 요한(장바티스트 쥘 베르나도트)를 따라 스웨덴으로 왔으며, 칼 13세는 그에게 쇠데르만란드 공작 작위를 내렸다. 아버지가 즉위한 1818년부터는 노르웨이 총독이 되었으며, 1823년에 로이히텐베르크의 조제핀과 혼인하였다. 184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스웨덴 왕과 노르웨이 왕으로 즉위한다. 그는 재위기간 중 양성평등법을 도입하고, 의무교육을 실행하는 등 진보적인 개혁을 이루어내었다. 그는 1859년 사망하였다.1824년과 1833년에 오스카르는 잠시 노르웨이 총독을 역임했다.
1838년 칼 14세 요한은 자신의 아들이 자유주의 정치인들과 음모를 꾸며 내각 개편이나 심지어 자신의 퇴위를 가져오려 한다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오스카르가 이때 야당을 적극적으로 돕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의 전제주의적 행동에 대한 그의 불만은 악명이 높았다. 비록 실제로는 파국을 피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의 자유주의는 야당이 1844년 그의 즉위 직후에 크게 실망한 것처럼 매우 신중하고 온건한 성격이었다. 새 국왕은 국왕을 거의 독재자로 만든 번거롭고 시대에 뒤떨어진 1809년 정부 형태의 급진적인 개혁에 대해서는 듣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초기 조치 중 하나는 언론의 자유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1845년 유언에 달리 명시되지 않는 한 형제자매가 상속에서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스웨덴에서 양성평등을 지지하는 최초의 법률을 통과시켰다.[13] 오스카르 1세는 또한 공통된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통합 문장이 있는 새로운 국기를 도입하고, 연합을 위한 새로운 문장을 도입함으로써 두 왕국 간의 평등을 공식적으로 확립했다.
외교에서 오스카르 1세는 민족주의 원칙의 지지자였다. 1848년 그는 슐레스비히 제1차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에 맞서 덴마크를 지원하기 위해 스웨덴과 노르웨이 군대를 피난처에 배치했으며(퓔렌과 북부 슐레스비히 (1849~1850)), 말뫼 휴전(1848년 8월 26일)의 중재자였다. 그는 또한 덴마크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는 국가 중 하나였다(런던 의정서, 1852년 5월 8일).[14]
일찍이 1850년에 오스카르 1세는 세 스칸디나비아 왕국의 왕조적 연합 계획을 세웠지만,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그 계획은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러시아 제국에 대한 우호 정책을 역전하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가 바랑게르 피오르드 연안의 해안을 요구할까 봐 두려워한 그는 크림 전쟁 중에는 중립을 유지했고, 이후 스웨덴-노르웨이의 영토 보전을 위해 영국과 프랑스 제2제정과 동맹을 체결했다(1855년 11월 25일).
오스카르 1세는 입헌군주제 스웨덴에서 왕권이 제한된 군주였지만, 독자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아버지 카를 14세는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 지지자로, 자신을 의회에서 선출된 통치자라고 여겼으나, 모국어가 프랑스어인 귀족 출신자들로 주변이 굳어지면서 보수적인 입장도 두드러졌다. 하지만 오스카르 1세는 정부 주도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점진적으로 개혁적인 법안들이 통과되었다. 이 시대에는 1848년 혁명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자유주의가 스웨덴에도 상륙하여 왕정 폐지를 주장하는 폭동이 일어났으나, 그는 빈 체제를 위협하는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하여 무력으로 진압했다.
또한 이 무렵 북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민족주의, 범스칸디나비아주의에 오스카르 1세도 경도되어 이를 지지했다. 오스카르 1세는 이 사상의 선구자로서 유럽 열강(신성동맹)에 대항했다. 1848년, 덴마크에서 제1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카르 1세는 덴마크를 전면적으로 지지하여 퓔른 섬에 군대를 파병하고, 스코네에 예비 부대를 배치했으며, 자원병을 의용군으로 덴마크 육군에 참가시켰다. 하지만 정규군은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자원병은 스웨덴 육군, 노르웨이 육군 양쪽에서 파병되었지만, 중립주의 정책은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28] 전쟁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을 지지하는 프로이센 왕국의 개입으로 경직되자, 오스카르 1세는 독자적으로 열강과 협상하여 휴전에 이르게 했다. 이 외교적 성공은 유럽에 오스카르 1세의 명성을 높였지만, 한편으로는 열강의 경계심을 불렀다. 범스칸디나비아주의의 정치적인 측면에는 덴마크의 왕위 계승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고, 베르나도테 왕조의 덴마크 왕 추대에 의한 칼마르 동맹 재현을 노렸지만, 런던 의정서에서 그것은 부정되었다.
1853년에는 빈 체제 붕괴를 상징하는 크림 전쟁이 발발했다. 유럽 열강을 분열시킨 이 전쟁에도 오스카르 1세는 관심을 보였고, 영국, 프랑스 제2제정의 지지 하에 핀란드 탈환을 꾀했다. 오스카르 1세는 처음에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이를 주시하며 영국·프랑스의 발트 해 함대 파견을 지원했다. 영국·프랑스 함대는 핀란드 연안을 제압했지만, 이에 대해 러시아 제국은 기뢰를 사용하여 핀란드 상륙을 저지했기 때문에, 오스카르 1세는 신중한 방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크림 전쟁은 스웨덴이 선전포고하기 직전에 종결되었다. 다만, 스웨덴에게는 숙원이었던 올란드 제도의 비무장을 러시아에 인정시킨 것은 성공했다(파리 조약, 1856년). 또한 동군연합을 맺은 노르웨이의 안전 보장을 위해, 특히 핀마르크 주를 러시아로부터 지키기 위해 영국·프랑스와 보장을 요구하는 조약을 체결했다(1855년). 이 협정은 비밀 조약이었지만, 곧 각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스웨덴의 참전이 소문났다. 사실 이 조약이 체결된 해 1월에 군의 동원 계획이 작성되어 있었고, 당시에는 참전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있었으며, 오스카르 1세 자신도 참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종결로 오스카르 1세의 기대는 빗나가게 되었다.[29]
오스카르 1세는 영국·프랑스 열강과 협조하여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장 중립을 포기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중립주의를 원하는 정부와 국민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57년에는 덴마크와의 군사 동맹도 검토했지만, 정부에 의해 부정되었다. 이것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 직면한 덴마크와 협력하여 프로이센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맹을 맺음으로써 분쟁에 휘말릴 것은 확실했기 때문에,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오스카르 1세의 이러한 정책의 배경에는 범스칸디나비아주의 이상과 열강 시대에 대한 향수가 있었다. 그의 시대가 북유럽 민족주의의 정점이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통일 국가로의 이행이 진지하게 주장되었고, 그것은 북유럽 여러 민족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또한 핀란드인도 이 사상에 공명하여 후의 핀란드 대공국 민족주의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이 사상은 왕권 부활을 거부하는 북유럽 여러 국가 정부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북유럽 여러 민족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 이상은 아들 칼 15세에게 계승되지만, 오스카르 1세의 말년에는 이미 쇠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1857년에 병에 걸려 왕세자 카를이 섭정이 되었다. 1859년 7월 8일에 사망하여, 스웨덴의 대국 부흥의 꿈은 완전히 과거의 것이 되었다.
3. 외교 정책과 범스칸디나비아주의
외교에서 오스카르 1세는 민족주의 원칙을 지지했다. 1848년 슐레스비히 제1차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에 맞서 덴마크를 지원하기 위해 스웨덴과 노르웨이 군대를 피난처에 배치했고(퓔렌과 북부 슐레스비히 (1849~1850)), 말뫼 휴전(1848년 8월 26일)의 중재자였다. 그는 또한 덴마크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는 국가 중 하나였다(런던 의정서, 1852년 5월 8일).[14]
1850년 오스카르 1세는 세 스칸디나비아 왕국의 왕조적 연합 계획을 세웠지만,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포기해야 했다.[14]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러시아 제국에 대한 우호 정책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가 바랑게르 피오르드 연안의 해안을 요구할까 봐 두려워한 그는 크림 전쟁 중에는 중립을 유지했고, 이후 스웨덴-노르웨이의 영토 보전을 위해 영국과 프랑스 제2제정과 동맹을 체결했다(1855년 11월 25일).[14]
오스카르 1세는 입헌군주제 하의 스웨덴에서 왕권이 제한된 군주였지만, 독자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정부 주도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점진적으로 개혁적인 법안들이 통과되도록 하였다. 이 시대에는 1848년 혁명과 같은 자유주의가 스웨덴에도 상륙하여 왕정 폐지를 주장하는 폭동이 일어났으나, 그는 빈 체제를 위협하는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하여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 무렵 북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민족주의(나쇼날리즘), 범스칸디나비아주의에 오스카르 1세도 관심을 가지고 이를 지지했다. 오스카르 1세는 이 사상의 선구자로서 유럽 열강(신성동맹|오대국)에 대항했다. 1848년, 덴마크에서 제1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카르 1세는 덴마크를 전면적으로 지지하여 퓔른 섬에 군대를 파병하고, 스코네에 예비 부대를 배치했으며, 자원병을 의용군으로 덴마크 육군에 참가시켰다. 하지만 정규군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자원병은 스웨덴 육군, 노르웨이 육군 양쪽에서 파병되었지만, 중립주의|중립 정책은 유지했다).[28] 전쟁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홀슈타인 공국을 지지하는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의 개입으로 경직되자, 오스카르 1세는 독자적으로 열강과 협상하여 휴전에 이르게 했다. 이 외교적 성공은 유럽에서 오스카르 1세의 명성을 높였지만, 한편으로는 열강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범스칸디나비아주의의 정치적인 측면에는 덴마크의 왕위 계승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고, 베르나도테 왕조|베르나도테 가문의 덴마크 왕 추대를 통한 칼마르 동맹 재현을 노렸지만, 런던 의정서에서 이는 무산되었다.
1853년에는 빈 체제 붕괴를 상징하는 크림 전쟁이 발발했다. 유럽 열강을 분열시킨 이 전쟁에도 오스카르 1세는 관심을 보였고, 영국 (영국), 프랑스 제2제정|프랑스의 지지 하에 핀란드 탈환을 꾀했다. 오스카르 1세는 처음에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이를 주시하며 영국·프랑스의 발트해 함대 파견을 지원했다. 영국·프랑스 함대는 핀란드 연안을 제압했지만, 러시아 제국은 기뢰를 사용하여 핀란드 상륙을 저지했기 때문에, 오스카르 1세는 신중한 방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크림 전쟁은 스웨덴이 선전포고하기 직전에 종결되었다. 다만, 스웨덴은 숙원이었던 올란드 제도의 비무장화를 러시아에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파리 조약, 1856년). 또한 동군연합 관계인 노르웨이의 안전 보장을 위해, 특히 핀마르크주를 러시아로부터 지키기 위해 영국·프랑스와 보장 조약을 체결했다(1855년). 이 조약은 비밀 조약이었지만, 곧 각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스웨덴의 참전이 거론되었다. 실제로 이 조약이 체결된 해 1월에 군의 동원 계획이 작성되어 있었고, 당시 여론은 참전을 지지했으며, 오스카르 1세 자신도 참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오스카르 1세의 기대는 좌절되었다.[29]
오스카르 1세는 영국·프랑스 등 열강과 협조하여 러시아의 위협을 제거하고, 경우에 따라 무장 중립을 포기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중립주의를 원하는 정부와 국민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57년에는 덴마크와의 군사 동맹도 검토했지만, 정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 직면한 덴마크와 협력하여 프로이센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맹을 맺으면 분쟁에 휘말릴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오스카르 1세의 이러한 정책 배경에는 범스칸디나비아주의 이상과 열강 시대에 대한 향수가 있었다. 그의 시대는 북유럽 민족주의의 정점이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통일 국가로의 이행이 진지하게 논의되었고, 북유럽 여러 민족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핀란드인도 이 사상에 공감하여 훗날 핀란드 대공국|핀란드 민족주의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이 사상은 왕권 부활을 거부하는 북유럽 여러 국가 정부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북유럽 민족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 이상은 아들 카를 15세 (왕세자 카를)에게 계승되었지만, 오스카르 1세의 말년에는 이미 쇠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4. 사망
1850년대에 오스카르 1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1857년에는 마비 증세를 보였다. 1859년 7월 8일, 생일로부터 나흘 후 스톡홀름 왕궁에서 사망하였으며, 스웨덴 국왕들의 전통적인 매장지인 스톡홀름 중심부 리다르홀멘 섬에 있는 리다르홀멘 교회에 안장되었다.[28] 그의 장남이자 섭정을 지낸 칼 15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5. 자녀
로이히텐베르크의 요세피나 왕비와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칼 15세 | 1826년 | 1872년 | |
우플란드 공작 구스타프 | 1827년 | 1852년 | |
오스카르 2세 | 1829년 | 1907년 | [11] |
유셰니 공주 | 1830년 | 1889년 | |
달라르나 공작 아우구스트 | 1831년 | 1873년 |
정부 에밀레 호그퀴스트와의 사이에서 2남(총 2명)을 두었다.[12] 이들은 비공식적으로 '라플란드의 왕자들'이라고 불렸다.
이름 | 출생 | 사망 |
---|---|---|
얄마르 호그퀴스트 | 1839년 6월 18일 (함부르크) | 1874년 (런던) |
막스 호그퀴스트 | 1840년 8월 12일 (스톡홀름) | 1872년 (중국) |
정부 자케트 뢰벤힐름과의 사이에서 1녀(총 1명)를 두었다.
- 오스카리아 (1817년-1880년)
6. 평가
오스카르 1세는 입헌군주제 하에서 왕권이 제한된 군주였지만, 독자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아버지 카를 14세는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 지지자였으나, 프랑스어 사용 귀족 출신자들로 주변이 굳어지면서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오스카르 1세는 정부 주도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점진적으로 개혁적인 법안들이 통과되었다. 이 시대에는 1848년 혁명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자유주의가 스웨덴에도 상륙하여 왕정 폐지를 주장하는 폭동이 일어났으나, 그는 빈 체제를 위협하는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하여 무력으로 진압했다.[28]
이 무렵 북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민족주의, 범스칸디나비아주의에 오스카르 1세도 경도되어 이를 지지했다. 오스카르 1세는 이 사상의 선구자로서 유럽 열강에 대항했다. 1848년, 덴마크에서 제1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카르 1세는 덴마크를 전면적으로 지지하여 퓔른 섬에 군대를 파병하고, 스코네에 예비 부대를 배치했으며, 자원병을 의용군으로 덴마크 육군에 참가시켰다. 하지만 정규군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자원병은 스웨덴 육군, 노르웨이 육군 양쪽에서 파병되었지만, 중립 정책은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28] 전쟁이 홀슈타인 공국을 지지하는 프로이센의 개입으로 경직되자, 오스카르 1세는 독자적으로 열강과 협상하여 휴전에 이르게 했다. 이 외교적 성공은 유럽에 오스카르 1세의 명성을 높였지만, 한편으로는 열강의 경계심을 불렀다. 범스칸디나비아주의의 정치적인 측면에는 덴마크의 왕위 계승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고, 베르나도테 가문의 덴마크 왕 추대에 의한 칼마르 동맹 재현을 노렸지만, 런던 의정서에서 그것은 부정되었다.[28]
1853년 빈 체제 붕괴를 상징하는 크림 전쟁이 발발했다. 유럽 열강을 분열시킨 이 전쟁에도 오스카르 1세는 관심을 보였고, 영국과 프랑스의 지지 하에 핀란드 탈환을 꾀했다. 오스카르 1세는 처음에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이를 주시하며 영국·프랑스의 발트해 함대 파견을 지원했다. 영국·프랑스 함대는 핀란드 연안을 제압했지만, 이에 대해 러시아 제국은 기뢰를 사용하여 핀란드 상륙을 저지했기 때문에, 오스카르 1세는 신중한 방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크림 전쟁은 스웨덴이 선전포고하기 직전에 종결되었다. 다만, 스웨덴에게는 숙원이었던 올란드 제도의 비무장화를 러시아에 인정시킨 것은 성공했다(파리 조약, 1856년).[29] 동군연합을 맺은 노르웨이의 안전 보장을 위해, 특히 핀마르크주를 러시아로부터 지키기 위해 영국·프랑스와 보장을 요구하는 조약을 체결했다(1855년). 이 협정은 비밀 조약이었지만, 곧 각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스웨덴의 참전이 소문났다. 이 조약이 체결된 해 1월에 군의 동원 계획이 작성되어 있었고, 당시 참전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있었으며, 오스카르 1세 자신도 참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종결로 오스카르 1세의 기대는 빗나가게 되었다.[29]
오스카르 1세는 영국·프랑스 열강과 협조하여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장 중립을 포기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중립주의를 원하는 정부와 국민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57년 덴마크와의 군사 동맹도 검토했지만, 정부에 의해 부정되었다. 이것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 직면한 덴마크와 협력하여 프로이센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맹을 맺음으로써 분쟁에 휘말릴 것은 확실했기 때문에,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오스카르 1세의 이러한 정책 배경에는 범스칸디나비아주의 이상과 열강 시대에 대한 향수가 있었다. 그의 시대가 북유럽 민족주의의 정점이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통일 국가로의 이행이 진지하게 주장되었고, 그것은 북유럽 여러 민족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핀란드인도 이 사상에 공명하여 후의 핀란드 민족주의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이 사상은 왕권 부활을 거부하는 북유럽 여러 국가 정부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북유럽 여러 민족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 이상은 아들 왕세자 카를에게 계승되지만, 오스카르 1세의 말년에는 이미 쇠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29]
1857년 병에 걸려 왕세자 카를이 섭정이 되었다. 1859년 7월 8일에 사망하여, 스웨덴의 대국 부흥의 꿈은 완전히 과거의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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