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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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마크의 앤은 1574년 덴마크에서 태어나 1589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와 결혼하여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비가 된 인물이다. 그녀는 잉글랜드 궁정의 예술을 후원하고 건축에 관심을 가졌으나, 낭비벽과 종교 문제로 남편과의 갈등을 겪었다. 앤은 정치보다는 사회적, 예술적 활동에 더 관심을 가졌으며, 1619년 사망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아들 헨리 프레데릭과 딸 엘리자베스를 포함한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역사적으로는 사치스러운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최근에는 예술 후원자로서의 역할과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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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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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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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제임스 6세 1세 (1589년 8월 20일 결혼) |
자녀 | 헨리 프레데리크 왕세자, 엘리자베스 보헤미아 여왕, 마가렛, 찰스 1세 잉글랜드 왕, 로버트, 메리, 소피아 |
가문 | 올덴부르크 왕가 |
아버지 | 프레데리크 2세 |
어머니 | 조피 |
출생일 | 1574년 12월 12일 |
출생지 | 스카네르보르 성, 스카네르보르, 덴마크 |
사망일 | 1619년 3월 2일 |
사망지 | 햄프턴 코트 궁전, 미들섹스, 잉글랜드 |
매장일 | 1619년 5월 13일 |
매장지 | 웨스트민스터 사원, 런던, 잉글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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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정보 | |
스코틀랜드 왕비 | 재위 기간: 1589년 8월 20일 - 1619년 3월 2일 대관식: 1590년 5월 17일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비 | 재위 기간: 1603년 3월 24일 - 1619년 3월 2일 대관식: 1603년 7월 25일 |
2. 생애
덴마크의 앤은 1574년 12월 12일 덴마크 유틀란트반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레데리크 2세는 왕위를 이을 아들을 원했기에, 둘째 딸인 앤의 탄생에 실망했다. 앤은 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어머니 조피의 친정인 귀스트로에서 외조부모의 손에 자랐다.
1585년 제임스 6세와 약혼했으나,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반대로 잠시 파기되었다. 1587년 제임스 6세의 어머니 메리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처형되자,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추진으로 약혼이 재개되었다. 1589년 8월 20일 제임스 6세의 대리인을 세운 결혼식을 올렸고, 11월 23일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제임스 6세와 직접 결혼했다. 1590년 4월, 제임스 6세는 앤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으나, 도중에 만난 폭풍이 마녀의 소행으로 여겨져 마녀 재판이 벌어지기도 했다.[230][231][232]
앤은 금발의 미모를 지녔지만, 경박하고 낭비벽이 심해 스코틀랜드 왕비 시절부터 재정을 위협했다. 보석을 좋아해 장신구를 사들였고, 금세공인에게 빚을 지기도 했다. 남편과의 불화도 끊이지 않았는데, 장남 헨리 프레더릭의 이름을 짓는 문제로 다투거나, 헨리 프레더릭을 스털링 성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남편에게 맞서려다 더욱 사이가 멀어졌다.[233][234]
1603년 남편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앤은 런던으로 이주했다. 앤은 잉글랜드 궁정의 화려한 행사와 축제를 즐겼고, 벤 존슨 등의 극작가가 연출하는 가면극에 자주 참여했다. 시녀와 측근을 많이 데리고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휴양지 배스를 선호했다. 건축에 대한 과도한 투자로 막대한 부채를 남기기도 했다.
앤은 1604년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나, 죽기 직전에는 개신교도였다고 고백했다. 정치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지만, 월터 롤리의 석방을 남편에게 청원하기도 했다.[235] 1619년 햄프턴 궁전에서 수종으로 사망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1574년 12월 12일 덴마크 유틀란트반도의 스칸데르보르 성에서 프레데리크 2세와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의 소피의 딸로 태어났다. 왕위를 이을 남자 후계자를 바랐던 아버지 프레데리크 2세는 둘째 딸인 앤의 탄생에 실망했지만,[8] 3년 후 아들 크리스티안 4세를 얻었다.[9]앤은 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어머니 조피의 친정인 귀스트로에서 외조부모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공작 울리히 3세와 메클렌부르크 공작부인 엘리자베스의 손에 의해 자랐다. 1579년 앤과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의 요청으로 덴마크로 돌아왔다.[10] 앤은 덴마크에서 행복하고 친밀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는데, 이는 대부분 어머니 소피가 아이들의 질병을 직접 간호했기 때문이다.[11]
2. 2. 스코틀랜드와의 결혼
1585년, 제임스 6세와 약혼했으나,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반대로 잠시 파기되었다.[230] 1587년, 제임스 6세의 어머니 메리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처형되자,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추진으로 약혼이 재개되었다.[230]1589년 7월, 잉글랜드 첩자 토머스 파울러는 앤이 "국왕 폐하를 너무 사랑해서 이 결혼이 깨지면 죽을 것 같고, 그의 애정을 여러 방식으로 증명했으며, 폐하 또한 이에 충분히 화답할 것이다."라고 보고했다.[20]

1589년 8월 20일, 크론보르 성에서 제임스 6세의 대리인을 세운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 의식은 제임스의 대리인인 조지 키스, 제5대 마리셜 백작이 신부 침대에 앤과 나란히 앉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25]
앤은 열흘 안에 스코틀랜드로 출항할 예정이었지만, 페데르 뭉크 제독이 지휘하는 함대가 일련의 불운을 겪으며[26] 결국 노르웨이 해안으로 되돌아왔다.[27] 앤의 함대는 육로로 오슬로로 피신했다.[27]

제임스는 앤을 직접 데려오기 위해 300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리스를 떠났다.[32] 그는 플레케피오르에서 퇸스베르그를 거쳐 육로로 이동한 후 11월 19일 오슬로에 도착했다.[33] 스코틀랜드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츠를 신은 채로" 앤 앞에 나타나 그녀의 항의를 무시하고 스코틀랜드 방식으로 키스했다.[34]
1589년 11월 23일, 오슬로 구 주교 궁전의 홀에서 앤과 제임스의 정식 결혼식이 거행되었다.[35] 리스 목사 데이비드 린지는 프랑스어로 결혼식을 진행하며 앤을 "경건하고 아름다운 공주... 그녀는 폐하께 큰 만족을 드립니다"라고 묘사했다.[36]
1590년 4월, 신혼부부는 스코틀랜드로 귀국했다.[38] 5월 1일 리트 수역에 도착했다.[39] 5일 후, 앤은 덴마크에서 가져온 순은 코치를 타고 에든버러에 국빈 입성했으며, 제임스는 말에 올라 옆에서 함께 갔다.[40] 하지만, 도중에 만난 폭풍이 마녀의 소행으로 여겨져 마녀 재판이 벌어지는 소동이 벌어졌다.[230][231][232]
2. 3. 스코틀랜드 왕비 시절
앤은 1590년 5월 17일 홀리루드 수도원 교회에서 대관식을 치렀는데, 이는 스코틀랜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대관식이었다.[41] 7시간에 걸친 의식 동안, 마 백작부인이 앤의 가운을 열었고, 주례 목사인 로버트 브루스는 "가슴과 팔의 일부"에 "상당량의 기름"을 부어 여왕으로 성별했다.[42] 교회 목사들은 이 의식의 요소에 대해 이교적이고 유대교적인 의식이라며 격렬히 반대했지만, 제임스 6세는 이것이 구약성경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43] 국왕은 왕관을 재상 메이틀랜드에게 건네주었고, 그는 왕관을 앤의 머리에 씌웠다.[44] 그런 다음 그녀는 참된 종교와 하느님 숭배를 옹호하고 "모든 가톨릭교도의 미신과 하느님의 말씀에 반하는 모든 의식과 의례"를 "저항하고 경멸"하겠다는 맹세를 했다.[45]앤은 시녀(ladies-in-waiting)와 내시(chamberer)인 카트린 스킨켈, 안나 카스, 마가렛 빈스타르, 설교자 요하네스 세링, 시동 윌리엄 벨로, 금세공인 야콥 크로거, 목수 프레데릭, 요리사 한스 포필만과 마리온,[46] 재단사들을 포함하여 덴마크에서 하인과 측근들을 데려왔다.[47] 덴마크 출신 비서 칼릭스투스 셰인은 윌리엄 파울러와 존 게디라는 두 명의 스코틀랜드 동료가 있었다. 그녀의 첫 번째 가구의 수장은 빌헬름 폰 데어 벤세였다.[48][49] 그녀의 고향에서 온 하인들은 친숙함을 제공하고 문화적 차이를 좁혔다.[50]
처음에 윌리엄 던다스와 같은 관찰자들은 여왕이 스코틀랜드 동반자가 거의 없이 고독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다.[51] 1590년 후반에는 메리 스튜어트, 에스메 스튜어트의 딸, 마가렛 우드, 오킬트리 스튜어트 가문의 구성원을 포함한 더 많은 스코틀랜드 귀부인들이 그녀를 섬기도록 임명되었다.[52] 제임스는 로버트 뮤어 오브 콜드웰을 포함한 스코틀랜드 영주들에게 여왕의 부인들이 탈 말 해크니 말을 보내도록 요청했다.[53] 앤은 그녀의 부인들과 시녀들에게 덴마크 출신 재단사 팔 레이와 모피 상인 헨리 코스가 제작하고, 그녀의 의상 담당자 쇠렌 존슨의 감독을 받는 스코틀랜드 재단사 피터 샌더슨과 피터 래널드가 관리하는 옷과 승마복을 맞춰 주었다.[54] 그녀는 "모이어"로만 기록된 아프리카인 하인을 두었는데, 아마도 그녀의 말을 돌보는 "사관의 시동"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렌지색 벨벳과 스페인 태피터로 옷을 입었다.[55] 그가 1591년 7월 팔랜드 궁전에서 사망했을 때, 제임스는 그의 장례 비용을 지불했다.[56] 독일 의사 마틴 쇠너는 앤이 아프거나 출산했을 때 그녀를 진찰했다.[57]
두 명의 덴마크인 애호가인 카트린 스킨켈과 소피 카스는 여왕의 것과 일치하는 깃털이 달린 벨벳 모자를 썼는데, 이는 왕의 가정교사인 피터 영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깁에 의해 만들어졌다.[58] 앤은 부인들이 결혼할 때 웨딩 가운과 결혼 지참금을 주었고, 심지어 진, 케네디 부인의 지참금에 대한 대출까지 주선했다.[59] 1592년 12월에 미망인 존 어스킨, 마 백작이 메리 스튜어트와 결혼했을 때, 제임스 6세와 앤은 앨로아에서 열린 축하 행사에 참석했고, 앤이 공연한 의상 가면극이 있었다.[60] 앤의 가면극 의상 재료에는 가벼운 실크와 리본, 깃털 "깃털 장식"이 포함되었다.[61] 스코틀랜드의 그녀 궁정 음악가에는 잉글랜드의 류트 연주자인 존 놀리가 있었다.[62]
1593년, 앤은 잉글랜드 대사 로버트 보우즈에게 엘리자베스 1세를 만나고 싶고, "좋은 혈통"의 젊은 잉글랜드 신사나 처녀가 그녀의 가정에 합류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보우즈는 이 요청을 세실에게 전달하여 고려하게 했다.[63] 그녀는 1595년 5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우정의 제안을 다시 했고, 그녀의 초상화를 요청했다. 응답이 없었고 보우즈는 그녀의 요청을 반복해야 했다. 마침내 1596년 2월 엘리자베스는 앤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어 그녀에게 사진을 보내는 것을 허락했다.[64]
제임스는 처음에는 신부에게 매료되었지만, 그의 열정은 빠르게 사라졌고 부부는 종종 갈등을 겪었다. 비록 결혼 초기에 제임스는 항상 앤을 인내심과 애정으로 대했던 것으로 보인다.[65] 앤의 침실 시종이었던 제임스 멜빌 오브 할힐은 앤이 스코틀랜드에서 "잘못된 정보"나 중상모략으로 인해 제임스가 정직한 궁정 사람들에게 격분했다는 것을 들으면 그들을 위해 제임스에게 중재하곤 했다고 썼다.[66] 결혼 초기에 제임스 6세와 덴마크의 앤은 직접 의상을 입고 궁정 사람들의 결혼식에서 가면극에 참여했다. 이 공연에는 일반적으로 음악, 춤, 변장이 포함되었다.[67] 1593년과 1595년 사이에 제임스는 앤 리옹, 킹혼 백작 부인(Anne Lyon, Countess of Kinghorne)이자, 이후 레이디 글래미스인 앤 머레이와 로맨틱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그녀를 "나의 연인, 나의 사랑"이라고 칭하며 시를 썼다. 덴마크의 앤 자신도 때때로 스캔들 루머의 대상이 되었다.[12] 1597년~1598년에 쓰여진 《바실리콘 도로》에서 제임스는 결혼을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큰 지상의 행복 또는 불행"이라고 묘사했다.[68]
결혼 첫 순간부터 앤은 제임스와 스코틀랜드에게 후계자를 제공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69] 그러나 1591년과 1592년이 임신의 기미 없이 지나가자 제임스가 남성들과의 관계를 좋아한다는 주제로 장로교의 비방이 다시 일어났고, 앤에 대한 소문이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이유로 퍼졌다.[70] 앤이 임신한 것으로 생각되었을 때, 제임스는 그녀가 승마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71] 1594년 2월 19일 앤이 첫 아이인 헨리 프레더릭, 웨일스 공자를 낳았을 때 대중들은 크게 안도했다.[72]
1593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앤의 토지 재산과 수입을 관리하기 위해 위원회를 임명했다.[107] 덴마크의 앤의 스코틀랜드 가계 지출은 엘리자베스 1세가 제임스 6세에게 준 돈으로 완화되었다. 1591년 7월부터 1594년 9월까지 18,796 스코틀랜드 파운드를 받았다.[108] 1595년 12월 말, 옥타비안으로 알려진 재정 행정부로 재임명된 여왕의 위원회는 앤에게 금화 주머니를 주었고, 앤은 이를 신년 선물로 왕에게 전달했다.[109]
앤과 제임스 사이의 부부 불화 사건은 관찰자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언급되었다. 1600년의 이른바 고리 음모 사건은 젊은 고리 백작 존 루스벤과 그의 형제 알렉산더 루스벤이 왕에 대한 공격 혐의로 제임스의 수행원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앤이 가장 신뢰했던 시녀들인 그들의 누이 비아트릭스와 바바라 루스벤이 해고되는 결과를 낳았다.[124] 다섯 달이나 임신 중이었던 앤 여왕은[125] 그들이 복직되지 않으면 침대에서 나오기를 거부했고, 이틀 동안 그 자리에 머물며 식사도 거부했다. 제임스가 그녀에게 명령하려 하자, 그녀는 그에게 고리 백작이 아니니 자신을 조심해서 대하라고 경고했다.[126] 제임스는 유명한 곡예사를 시켜 그녀를 즐겁게 함으로써 잠시나마 그녀를 달랬지만,[127] 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다음 3년 동안 루스벤 가문에 대한 그녀의 완강한 지지는 정부에 의해 심각하게 받아들여져 안보 문제로 간주되었다.[128] 1602년, 앤이 비아트릭스 루스벤을 홀리루드 궁에 밀반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제임스는 온 집안을 상대로 심문을 실시했고,[129] 1603년, 그는 마침내 비아트릭스 루스벤에게 200 스코틀랜드 파운드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130]
1585년에 제임스 6세와 약혼했지만, 처음에는 덴마크-노르웨이가 스코틀랜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두려워한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반대로, 제임스 6세가 일단 약혼을 포기했다. 그러나 1587년에 제임스 6세의 어머니이자 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처형되자,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약혼을 다시 추진하여 실현되었고, 1589년 8월 20일에 제임스 6세의 대리인을 세운 결혼식을 올렸으며, 11월 23일에 직접 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까지 간 제임스 6세와 결혼했다. 이듬해 1590년 4월에 제임스 6세는 신부 앤과 함께 배를 타고 스코틀랜드로 귀국했지만, 도중에 만난 폭풍이 마녀의 소행으로 여겨져 마녀 재판이 단행되는 소동이 벌어졌다.[230][231][232]
금발의 미모의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박하고 낭비벽이 있어 스코틀랜드의 왕비였을 때부터 재정을 위협했으며, 보석을 좋아하여 장식품을 사들였고, 금세공사이자 고리대금업자에게 빚을 졌다. 또한 남편과의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장남 헨리 프레더릭을 낳은 것이 불화의 계기가 되었는데, 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들에게 프레데릭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어했지만, 제임스 6세는 헨리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어해서 다퉜다(결국 복합명 헨리 프레더릭으로 결정). 헨리 프레더릭을 스털링 성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남편에게 강제로 성에서 나오게 하려고 계획함으로써 부부는 더욱 소원해졌다.[233][234]
2. 4. 잉글랜드 왕비 시절
1603년 남편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면서 런던으로 이주했다. 앤은 잉글랜드 궁정의 화려한 행사와 축제를 좋아했으며, 벤 존슨 등의 극작가가 연출하는 가면극에 자주 참여했다. 시녀와 측근을 많이 데리고 여행하는 것을 즐겼고, 휴양지 배스를 좋아했다. 건축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이상한 건축물을 많이 지어 막대한 부채를 남기기도 했다. 1604년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나, 죽기 직전에는 자신이 개신교도였다고 고백했다. 정치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지만, 월터 롤리의 석방을 남편에게 청원하기도 했다.[235] 1619년 햄프턴 궁전에서 수종으로 사망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3. 자녀
앤은 남편 제임스 6세(제임스 1세)와의 사이에서 3남 4녀를 낳았으나, 대부분 요절하고 1남 1녀만이 성년으로 성장했다.[223] 장남 헨리 프레더릭, 웨일스 공은 왕세자였으나 18세에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병으로 요절했고,[224] 장녀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프리드리히 5세 폰 팔츠와 결혼하여 "겨울 왕비"로 불렸으며, 하노버 왕가의 초대 국왕 조지 1세의 할머니가 되었다.[236] 차남 찰스 1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4. 예술 후원 및 건축
앤은 춤과 연극을 좋아했는데, 이는 장로교 스코틀랜드에서는 종종 눈살을 찌푸리는 활동이었지만, 자코뱅 시대 런던에서는 활기찬 출구를 찾았다.
역사가 앨런 스튜어트는 현재 자코뱅 시대 고유의 것으로 여겨지는 많은 현상이 제임스 1세보다 앤의 후원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제안한다.
앤은 제임스 1세의 가장 가까운 측근 중 한 명이자 1608년부터 1616년까지 배스 앤드 웰스 주교였던 제임스 몬태규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배스에 대한 그녀의 첫 방문은 몬태규 주교의 사비로 배스 수도원의 지붕 개축이 완료되는 시점에 맞춰 이루어졌을 수 있으며, 몬태규는 1613년 웰스의 주교궁에서 "찬양 연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아리마태아의 요셉이라는 인물이 여왕에게 글래스턴베리 성모자 나무에서 나온 가지를 선물했다.[187]
4. 1. 예술 후원
앤은 왕실에서 "풍요롭고 환대하는" 문화적 분위기를 조성하고,[167] 열성적인 연극 관람객이 되었으며, 호화로운 가면극을 후원했다. 서 월터 코프는 로버트 세실이 앤의 형제 덴마크의 울리크가 방문했을 때 여왕을 위한 연극을 선택해 달라고 요청하자, "버비지가 왔는데, 여왕이 보지 못한 새로운 연극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재치와 즐거움으로 여왕을 매우 기쁘게 할 '사랑의 헛수고'라는 옛 연극을 부활시켰다고 합니다."라고 적었다.[168] 앤의 가면극은 전례 없는 수준의 극적인 연출과 볼거리를 보여주었으며,[169] 외국 대사들과 고위 인사들이 열렬히 참석했고, 영국의 유럽적 중요성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베네치아 대사인 조르지 주스티니안은 1604년 크리스마스 가면극에 대해 "모두의 의견으로는 다른 어떤 궁정도 그처럼 화려함과 풍요로움을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적었다.[170]앤의 가면극은 17세기 초 20년 동안 궁정 여성 공연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으며, 여성 공연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171] 앤은 때때로 자신의 시녀들과 함께 가면극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때로는 관객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1604년의 ''12명의 여신들의 비전''에서 그녀는 팔라스 아테나 역할을 맡아 일부 관찰자들이 너무 짧다고 생각한 튜닉을 입었고, 1605년의 ''흑암의 가면극''에서는 임신 6개월의 앤이 자신의 시녀들과 함께 피부를 "흑인"으로 칠한 채 등장하여 스캔들을 일으켰다. 서신 작가 더들리 칼턴은 앤이 그 후 스페인 대사와 춤을 췄을 때, 대사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 "입술에 자국이 남을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고 보고했다.[172] 앤은 이러한 가면극을 제작하기 위해 벤 존슨과 이냐고 존스를 포함한 당대 최고의 인재들을 초청했다.[173]
최신 유럽 취향에 정통한 재능 있는 건축가인 존스는 앤을 위해 그리니치에 있는 여왕의 집을 설계했는데, 이는 영국 최초의 진정한 팔라디오 양식 건물 중 하나였다.[174] 그는 오틀랜즈 궁전의 정원과 포도원에 장식용 출입구를 설계했다. 수석 화가 존 드 크리츠는 앤의 "정돈실", 즉 서머셋 하우스의 드레스룸 벽난로를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 무늬와 모조 석재로 장식했고, 오틀랜즈 예배당에는 검은색과 흰색 대리석을 칠했다. 1618년 서머셋 하우스의 통로는 르네상스 양식의 그로테스크 작품으로 장식되었으며, "그로테스크"로 기록되었다.[175]
랄프 윈우드는 그녀의 사냥을 위해 우에르덴 총독 야코프 반 덴 에이데로부터 특별한 그레이하운드를 얻었다.[176] 네덜란드 발명가 살로몬 드 카우스는 그리니치와 서머셋 하우스에 앤의 정원을 조성했다.[177] 그녀는 템스 강에서의 여행을 위해 유리창이 달린 배를 가지고 있었다.[178] 앤은 특히 음악을 좋아했고, 덴마크에 있는 그녀의 형제 궁정에서 이전에 고용되었던 류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존 다울랜드를 후원했으며,[179] "꽤 많은" 프랑스 음악가도 후원했다.[180] 1607년에서 1619년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아일랜드 하프 연주자인 다니엘 더프 오카힐을 고용하기도 했다.[181]
앤은 폴 반 소머, 아이작 올리버, 다니엘 미텐스와 같은 예술가들에게 의뢰했는데, 이들은 한 세대 동안 시각 예술 분야에서 영국의 취향을 이끌었다.[132] 앤의 통치 하에 왕실 컬렉션은 다시 확장되기 시작했고,[182] 이는 앤의 아들인 찰스에 의해 계속되었다. 앤의 시녀인 진 드럼몬드는 여왕의 평판을 "초라한 갤러리의 무해한 그림"에 만족하는 것과 샐즈베리 백작의 "공정한 방에서의 큰 직무"를 비교했다.[183]
앤은 1604년 요크셔의 리폰에 대학을 설립하려는 시도에 참여했지만 실패했다. 이 계획은 에드윈 샌즈 주교의 미망인인 세실리 샌디스와 베스 오브 하드윅 및 길버트 탤벗, 제7대 슈루즈베리 백작을 포함한 다른 지지자들에 의해 추진되었다.[185]
4. 2. 건축
앤은 건축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그녀는 최신 유럽 취향에 정통한 재능 있는 건축가인 이리고 존스에게 그리니치에 있는 여왕의 집을 설계하도록 했는데, 이는 영국 최초의 진정한 팔라디안 양식 건물 중 하나였다.[174] 그는 오틀랜즈 궁전의 정원과 포도원에 장식용 출입구를 설계했다. 수석 화가 존 드 크리츠는 앤의 "정돈실", 즉 서머셋 하우스의 드레스룸 벽난로를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 무늬와 모조 석재로 장식했고, 오틀랜즈 예배당에는 검은색과 흰색 대리석을 칠했다. 1618년 서머셋 하우스의 통로는 르네상스 양식의 그로테스크 작품으로 장식되었다.[175] 앤은 이상한 건축물을 많이 지어 막대한 부채를 남겨 남편 제임스 1세를 곤란하게 했다.5. 평가
앤 오브 덴마크는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에게 경박하고 사치스러운 인물로 평가받아 왔다.[160] 초기 역사가들은 제임스 시대 궁정의 자기만족과 허영심에서 잉글랜드 내전의 기원을 찾으려 했고, 앤의 이러한 면모를 강조했다.[161] 데이비드 해리스 윌슨은 1956년 제임스 전기에서 "앤은 남편에게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지적인 관심사를 공유할 수 없었고, 그는 여자들을 어리석게 경멸했다. 아아! 왕은 어리석은 아내와 결혼했다."라고 혹평했다.[161] 19세기 전기 작가 애그니스 스트릭랜드는 앤이 헨리 왕자를 다시 데려오기 위한 행동을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며, "앤 오브 덴마크의 인품은 여성으로서나 여왕으로서나 모든 사람의 눈에 실추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162]
하지만 최근에는 제임스 1세를 스코틀랜드에서 왕권을 확장하고 재위 기간 동안 왕국을 전쟁으로부터 지켜낸 유능한 통치자로 재평가하면서, 앤에 대한 평가도 변화하고 있다.[163] 앤은 영향력 있는 정치적 인물이자 적극적인 어머니로서 재평가받고 있다.[164] 존 리즈 바로는 앤의 문화 전기를 통해 스코틀랜드에서의 그녀의 정치적 개입이 이전에 주목받았던 것보다 더 중요하고 분명히 더 골치 아픈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클레어 맥매너스를 비롯한 문화 역사가들은 작가와 예술가의 후원자일 뿐만 아니라 배우로서도 앤이 제임스 시대 문화의 번성에 미친 영향력 있는 역할을 강조한다.[165]
실제로 앤은 가면극을 자주 열었고, 벤 존슨 등의 극작가가 연출하는 가면극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앤은 건축에 많은 관심을 가져 막대한 부채를 남기기도 했다. 앤은 월터 롤리에게 도움을 주었고, 남편에게 롤리의 석방을 청원하기도 했다.[235]
앤은 금발의 미모를 가진 여성이었지만, 경박하고 낭비벽이 심해 스코틀랜드 왕비 시절부터 재정을 위협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보석을 좋아해 장식품을 많이 샀고, 금세공인이자 고리대금업자에게 빚을 지기도 했다. 남편과의 불화도 잦았는데, 장남 헨리 프레데릭의 이름을 짓는 문제로 갈등을 겪었고, 헨리 프레데릭을 스털링 성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남편에게 강제로 성에서 나오게 하려고 계획하면서 부부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233][234]
신앙 문제도 남편의 고민거리였다. 결혼 초기에는 개신교였지만, 런던으로 이주한 후 1604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가, 죽음을 앞두고는 다시 개신교였다고 고백했다. 앤이 죽은 후 막대한 부채가 남겨져 남편은 곤란을 겪었고, 그녀에 대해 "텅 빈 머리"(Empty Headed)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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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anger and distress at the removal of her first child were never entirely assuaged." Croft, 24; "... a struggle with her husband of such bitterness that it wrecked her married life." Williams, 52; The Earls of Mar were the traditional custodians of the heirs to the Scottish throne. Stewart, 140; Williams, 53.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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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wart, 140–141; Williams suggests that Maitland was playing a double game: though he shared Anne's enmity towards Mar, he secretly urged James not to give way to her. Williams, 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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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wart, 169; Williams, 70; Foreign commentators in London passed on rumours about the miscarriage: the Venetian ambassador reported that Anne had beaten her belly to induce it, the French Maximilien de Béthune, duc de Sully, that she had faked the miscarriage for political effect. Williams, 71; Stewart, 169; McManus, 91.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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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s reply indicates that Anne had accused him of not loving her, of only marrying her because of her high birth, and of listening to rumours that she might turn Catholic: "I thank God," he wrote, "I carry that love and respect unto you which by the law of God and nature I ought to do my wife and mother of my children, but not for ye are a King's daughter, for whether ye were a King's or a cook's daughter ye must be all alike to me, being once my wife." And he swore "upon the peril of my salvation and damnation, that neither the Earl of Mar nor any flesh living ever informed me that ye was upon any papist or Spanish course." Stewart, 170.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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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ft, 55; Willson, 160; Williams, 71; both Barroll, 30, and McManus, 81, point out that Anne's actions were political as well as maternal; elaborate diplomacy and politics went into the hand-over: the governing Council met at Stirling and banned Anne's noble attendants from coming within 10 mi (16 km) of Henry; Mar delivered Henry to Ludovic Stewart, 2nd Duke of Lennox, representing the king; Lennox delivered him to the Council; the Council handed him over to Anne and Lennox, who were to take him south together; Stewart, 170–171. As the Queen travelled south, John Graham, 3rd Earl of Montrose, wrote to James urging him to exercise greater control over her: "But lest Her Highness' wrath continuing, should hereafter produce unexpected tortures, I would most humbly entreat Your Majesty to prevent the same ... and suffer not this canker or corruption to have any further progress." Barroll,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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