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신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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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신(道信, 580년 ~ 651년)은 중국 선종의 고승으로, 기주 영녕현 출신이다. 7세에 출가하여 불교를 배우고, 승찬에게 깨달음을 얻어 그의 법을 전수받았다. 로산의 대림사에서 지카이와 함께 천태종과 삼론종의 영향을 받았으며, 617년에는 도적의 공격을 《대반야바라밀다경》으로 막아내기도 했다. 솽펑의 동산사에서 30년간 선불교를 가르쳤으며, 당 태종의 초청을 거절했다. 도신의 가르침은 동산 법문으로 알려졌으며, 명상 수행과 일상생활에서의 수행을 강조했다. 그의 가르침은 후대 선종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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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신 (승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도신 |
이명 | 대의 (大醫, Great Healer) |
존칭 | 선종 제4조 |
법명 | 도신 (道信) |
속성 | 사마(司馬)씨 |
출생 | 580년 |
사망 | 651년 10월 23일 |
출생지 | 기주영녕현 |
사망지 | 쌍봉산 동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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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
종교 | 불교 |
종파 | 초기 선, 동산법문 |
사제 관계 | |
스승 | 승찬 |
제자 | 홍인 |
계승자 | 홍인 |
기타 정보 | |
주요 활동지 | 여산 대림사, 기주 황매현 쌍봉산 |
2. 생애
도신(道信)은 기주(蕲州府) 영녕현(永寧縣) (현재 후베이성 무쉐시)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사마(司馬)였다.[3] 7세에 출가하여 불교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그를 가르친 스승의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여 스승의 눈을 피해 5~6년 동안 스스로 계율을 지키며 수행했다고 전해진다.[3][20]
도신과 그의 제자 홍인의 가르침은 ''동산 법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약 75년 후 선종이 전국적으로 융성하기 이전 단계에 해당한다.[10] 도신은 오랜 기간 한 곳에 정착하여 안정적인 공동체 생활을 발전시킨 최초의 선종 스승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중국 전역에 걸쳐 선종 사찰 공동체를 이끄는 기반이 되었다. 학자 뒤물랭[11]은 도신 공동체의 규모가 크고 인구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기존의 탁발 방식으로는 생활 유지가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로 인해 승려들은 명상 수행뿐만 아니라 직접 밭을 갈고 행정 업무를 익혀야 했다.[12] 이러한 변화는 선종 수행이 더 이상 명상실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으로 이어졌다. 종교적 수행을 삶의 모든 측면으로 확장해야 할 필요성은 이후 선종 가르침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14세 되던 개황 12년(592년)에 안휘성 안칭 시 완공산에서 3대 조사 승찬을 만났다.[4][21] 이때 승찬과의 유명한 문답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4]
이후 9년간 승찬을 모시고 수행했으며, 승찬이 나부산으로 떠날 때 도신에게 의법(衣法)을 전수하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기고 그곳에 남아 법을 펼치라고 명했다.[5] "꽃씨, 이것이 밭이다. 밭에서 싱싱한 어린 꽃을 대지에서 싹트게 한다. 만약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꽃으로 가득했던 대지는 (앞으로) 생겨나지도 않고 다해 버린다."
승찬과 헤어진 후, 도신은 길주의 한 사찰에서 정식으로 구족계를 받았다.[20] 이후 강주 여산의 대림사(大林寺)로 가서 천태종 및 삼론종의 대가였던 지카이(智鎧)와 함께 10년간 머물며 공부했다.[6] 이 시기에 다른 종파의 수행법, 특히 염불 수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6] 607년에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6]
617년에는 제자들과 함께 장시성 길주로 갔는데, 당시 도적떼가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도신이 주민들에게 대반야바라밀다경을 염송하도록 가르치자, 도적들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고 한다.[22] 이후 남쪽의 형산으로 가려 했으나 도중에 사람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22]
무덕 7년(624년), 기주 황매현의 쌍봉산(雙峰山)에 들어가 동산사(東山寺)를 세우고[7] 이후 30년간 선불교를 가르치며 제자들을 지도했다.[23] 이때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와 재가 신자들이 500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7]
643년 당 태종이 그의 명성을 듣고 수도로 초빙했으나, 도신은 병을 핑계로 세 번 모두 거절했다. 세 번째 사신에게 황제가 "오지 않으면 목을 베어 오라"고 명했다는 말을 전해 듣자, 도신은 목을 내밀며 베어 가라고 할 정도로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 사신이 돌아가 이를 보고하자 태종은 도리어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8]
영휘 2년(651년) 8월, 제자들에게 자신의 탑파를 세우라고 이른 뒤 입적했다. 세수 72세였다.[23][9] 입적 전 후계자를 지명해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나는 평생 동안 많은 이들에게 법을 맡겨왔다(我一生中,付授善多)"라고 답했다고 한다. 당 태종은 그에게 '대의선사(大醫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9]
3. 가르침
도신의 가르침을 기록한 『도신의 오문』은 그의 제자 홍인의 기록보다 늦은 8세기 초반에 등장했기 때문에, 그 내용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13] 8세기 초에 나온 『능가사 사기』에는 도신이 반야바라밀(『반야경』)과 『정토경』을 인용했다는 기록이 있지만,[14] 이 경전들을 실제로 연구하고 가르쳤는지는 명확하지 않다.[15]
그러나 도신이 명상을 중요하게 가르쳤다는 점은 분명하다. 선종 학자 야나기다 세이잔은 "일행삼매(一行三昧)"라는 개념이 도신 수행법의 핵심이었다고 분석했다.[16] 『도신의 오문』에는 도신이 "부처는 마음이다. 마음 밖에는 부처가 없다"라고 말했다는 구절이 전해진다.[17] 후대의 기록에는 그가 제자들에게 "진지하게 명상에 앉아라! 명상에 앉는 것이 다른 모든 것의 기본이다... 경전을 읽지 말고, 누구와도 논쟁하지 말라!"고 강조했다는 내용도 인용된다. 『오등회원』에는 도신이 임종 시 제자들에게 "세상의 모든 무수한 법은 버려야 한다. 각자 이 깨달음을 지켜 미래로 가져가라"는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18]
4. 저술
5. 게송
꽃씨에 나는 성품 있어
땅을 인연하여 씨앗 꽃이 피나
앞의 인연이 화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나지 않는도다.[24]
6. 평가 및 영향
도신과 그의 제자 홍인의 가르침은 '동산 법문( East Mountain Teachingeng )'(東山法門)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8세기 초 선종이 전국적으로 융성하기 약 75년 전의 중요한 단계로 평가받는다.[10] 도신은 오랜 기간 한 곳에 정착하여 선불교 사찰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킨 최초의 선종 스승으로 여겨진다.[11] 그는 솽펑("쌍봉")의 동산사(東山寺)에 30년간 머물며 500명에 달하는 재가 신자와 승려를 포함한 많은 수행자를 지도했다.[7]
뒤물랭(Dumoulin)은 도신 공동체의 규모가 크고 인구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탁발만으로는 생계 유지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았다. 이로 인해 승려들은 명상 수행뿐만 아니라 직접 밭을 갈고 행정 기술을 익혀야 했으며,[12] 이는 선종 수행이 단순히 좌선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사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선종 가르침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당 태종은 도신을 높이 평가하여 수도로 초청했으나, 도신은 세 번 모두 거절했다. 세 번째 거절에 황제는 사신에게 도신을 데려오거나 그의 목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도신이 이 말을 듣고 의연하게 목을 내밀자, 사신은 크게 감명받아 이를 황제에게 보고했고, 태종은 도신을 모범적인 불교 승려로서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8] 도신이 입적한 후, 당 대종은 그에게 '대의(大醫, 위대한 치유자)'라는 시호를 내렸다.
도신의 가르침을 기록한 《오문》(五門)은 그의 제자 홍인의 기록보다 늦은 8세기 초반에 등장하여, 그 내용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의가 있다.[13] 8세기 초의 기록인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에는 도신이 반야경과 정토 경전을 인용했다는 내용이 있으나,[14] 이것이 그의 핵심 가르침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15]
그러나 도신이 명상 수행을 중요하게 가르쳤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본의 선종 학자 야나기다 세이잔은 '일행삼매(一行三昧, samādhi of one practiceeng)'가 도신 수행의 핵심이었다고 평가했다.[16] 《오문》에는 도신이 "부처는 마음이다. 마음 밖에는 부처가 없다"라고 가르쳤으며,[17] 제자들에게 "진지하게 좌선하라! 좌선은 다른 모든 것의 기본이다... 경전을 읽지 말고, 누구와도 논쟁하지 말라!"고 권고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임종 시에는 "세상의 모든 무수한 법은 버려야 한다. 각자 이 깨달음을 지켜 미래로 가져가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18]
참조
[1]
간행물
McRae, 1986:31-33
[2]
인용
“Given the tenuous nature of our sources, the sequence of the first five Chán patriarchs cannot be determined with full certainty.” Dumoulin (1994, 1998) p 98
[3]
간행물
McRae, 1986:33
[4]
간행물
Zong (see also :Ferguson, 2000:24)
[5]
간행물
McRae, 1986:261
[6]
간행물
Ferguson, 2000:26 (note: McRae disputes that Daoxin met Zhikai; see p 283, n. 60)
[7]
간행물
McRae, 1986:32
[8]
간행물
Ferguson, 2000:28)
[9]
인용
The ''Ch’üan fa-pao chi'' (''Annals of the Transmission of the Dharma-treasure'') gives a different story regarding who would receive transmission upon Daoxin’s death. When asked, Daoxin paused and replied with a sigh, “Hung-jen is a bit better [than any of the others]” (McRae, 1986:263)
[10]
간행물
McRae, 1986:30
[11]
간행물
p 99
[12]
인용
McRae disputes this, asserting that the community received outside financial support and that it was “unlikely that the monks …maintained an agricultural operation of any significant size” p 286 n. 86
[13]
간행물
see McRae, 2003:37-38
[14]
간행물
Dumoulin (1994, 1988) p 99
[15]
인용
McRae, (1986:33) calls the anecdote in the Chronicle “entertaining, but it cannot be taken seriously”.
[16]
인용
cited in Dumoulin (1994, 1988) p 99
[17]
간행물
Dumoulin (1994, 1988) p. 100
[18]
간행물
Ferguson, 2000:28
[19]
웹인용
중국의 선④ 도신〈1〉
http://www.ibulgyo.c[...]
불교신문
2010-04-24
[20]
웹인용
중국의 선④ 도신〈1〉
http://www.ibulgyo.c[...]
불교신문
2010-04-24
[21]
웹인용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http://www.ibulgyo.c[...]
불교신문
2003-06-18
[22]
웹인용
중국의 선④ 도신〈1〉
http://www.ibulgyo.c[...]
불교신문
2010-04-24
[23]
웹인용
중국의 선④ 도신〈1〉
http://www.ibulgyo.c[...]
불교신문
2010-04-24
[24]
서적
육조단경
2023-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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