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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찬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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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승찬은 선종의 제3조로 추앙받는 승려이다. 그는 속인 신분으로 혜가를 만나 나병을 참회하고자 했으나, 죄를 찾을 수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 불법승 삼보에 귀의했다. 혜가로부터 법을 전수받고,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피해 은둔 생활을 했다. 이후 도신에게 법을 전하고, 606년에 입적했으며,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감지 선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승찬은 《신심명》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나, 현대 학자들은 이에 대한 역사적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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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찬 (승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승찬
이름감지 승찬
한자 표기鑑智僧璨
로마자 표기Chien-chih Seng-ts'an (병음)
Kanchi Sōsan (일본어)
인물 정보
생년496년 (추정)
사망일606년 11월 20일
국적중국
종교불교
종파선종
법명승찬(僧璨)
속성사마(司馬)씨
주요 활동
직업승려
스승대조 혜가
계승자대이 도신
저서신심명
기타 정보
칭호선종 제3조
감지선사(鑒智禅師)

2. 생애

승찬은 속인의 신분으로 혜가를 처음 만났다. 이때, 나병의 원인이 된 죄를 참회시켜 달라고 하였다.[23]

혜가는 승찬에게 참회시켜 줄 죄를 가져오라고 했다. 승찬은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혜가는 승찬에게 죄는 모두 참회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라고 했다. 승찬은 승보는 큰 스님인 줄 알겠으나, 불보와 법보는 모른다고 하였다.[24]

혜가는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이다라고 하면서,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고 승보도 또한 그렇다고 했다. 승찬은 비로소 죄의 성품이 마음의 안, 밖, 중간 어디에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마음처럼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님을 알았다고 했다.[25]

혜가는 승찬의 머리를 직접 깎아주며 스님들의 구슬보배라는 의미로 구슬 찬(璨)을 써서 승찬이라는 법명도 내려주었다. 광복사(光福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문둥병이 점차 나아져, 2년간 혜가를 시봉하였다.[26]

혜가의 명에 따라 위진남북조의 혼란을 피해 서주(舒州)의 환공산(晥公山)에 숨어 살았다. 이때, 4대조사인 도신에게 불법을 전했다. 이후, 나부산(羅浮山) 숨어살다가 다시 예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27]

북제 천보 3년(552년) 혜가는 승찬에게 의법을 전했다. 승찬은 당시 이미 40세를 넘고 있었다.

이후 그는 곧바로 서주 완공산에 은거한다. 네 번이나 불어닥친 삼무일종의 법난 중 하나인 북주 무제(560년-578년)의 폐불 정책 시대가 되어, 사공산(안후이성 안칭시 위에시현)에 은거했다. 거처는 항상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리고 10년 이상의 세월 동안, 그를 찾아오는 자는 없었다.

개황 12년(592년), 14세의 사미도신은 제자로 들어와 말했다.


  • 도신: "스님,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깨달음의 법문을 열어 주십시오."
  • 승찬: "누가 당신을 묶었는가?"
  • 도신: "묶은 사람은 없습니다."
  • 승찬: "그렇다면, 지금 와서 무엇을 풀어야 하는가?"

이에 도신은 크게 깨달았다.

승찬은 도신에게 "묘법연화경"의 “회삼귀일” 이론과 불법 이론을 전수했다. 이 점이 도신에게 준 영향은 지대했다.

개황 13년(593년), 혜가 입멸. 도신의 제자 입문과 거의 같은 시기였다.

도신은 수도의 노고를 9년 동안 겪고, 후 길주에서 수계했다. 승찬은 항상 도신에게 현묘 미묘한 선의 이치, 진수를 전수했다.

때가 무르익자, 승찬은 도신에게 의법을 전했다.

그때, 도신이 읽은 게송은 다음과 같다고 전해진다. "꽃씨, 이 밭에서 땅에, 싱싱한 젊은 꽃이 대지에서 싹튼다. 만약 씨를 뿌리는 자가 없다면, 꽃으로 가득했던 대지는 (이제)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될 것이다 (불법도 또한 같아서, 지금이야말로 법을 널리 펴야 한다)."

나부산(광둥성혜주시박라현)에서 포교했다. 도신은 승찬의 유일한 제자였고, 승찬은 그에게 두터운 기대를 걸었다.

2년 후, 승찬은 원래 서주로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설법한 후, 큰 나무 아래에서 말했다고 한다.

"생사의 모습은 자유다! (결가부좌하여 입멸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나는 오늘 서서 걸어갈 것이다!)"

나뭇가지에 손을 걸고, 선 채로 승찬은 임종을 맞이했다. 그것은 수의 양제 대업 2년(606년)의 일이었다.

후세에, 당의 현종은 ''' 선사'''의 시호를 내렸다.

2. 1. 혜가와의 만남

승찬은 속인의 신분으로 혜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병의 원인이 된 죄를 참회시켜 달라고 하였다.[23] 혜가는 승찬에게 참회시켜 줄 죄를 가져오라고 했으나, 승찬은 죄를 찾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혜가는 죄는 모두 참회되었으니,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라고 하였다.[24] 승찬은 승보는 알겠으나 불보와 법보는 모른다고 하자, 혜가는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이며,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고 승보도 또한 그렇다고 설명했다.[25] 승찬은 죄의 성품이 마음의 안팎, 중간 어디에도 있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처럼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25]

혜가는 승찬의 머리를 직접 깎아주고 스님들의 구슬보배라는 의미로 '승찬'이라는 법명을 내려주었다.[26] 이후 승찬은 광복사(光福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문둥병이 점차 나아져 2년간 혜가를 시봉하였다.[26][3]

''전등록''에 나오는 승찬과 혜가의 만남은 다음과 같은 공안과 같이 시작된다.

:승찬: 저는 병으로 가득합니다. 제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혜가: 당신의 죄를 가져오십시오. 그러면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승찬 (오랜 침묵 후): 제 죄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혜가: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이제 부처님, 법, 승가에 의지하여 사십시오.[3]

동위천평 2년(535년)에 거사였던 승찬이 혜가를 만나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광복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질병이 모두 나았으며, 2년 남짓 스승(달마)을 섬겼다는 이야기가 『오등회원』 중 하나인 『경덕전등록』 제3권에 "'''삼조 승찬 대사 오도 인연'''"으로 전해진다. 그가 깨달음에 이른 날은 535년 3월 18일이었다.

북제천보 3년(552년) 혜가는 승찬에게 의법을 전했다.

2. 2. 은둔과 수행

혜가는 승찬에게 죄를 참회시켜 줄 죄를 가져오라고 했으나, 승찬은 죄를 찾을 수 없다고 답했다. 혜가는 죄는 모두 참회되었으니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라고 했다. 승찬은 승보는 알겠으나 불보와 법보는 모른다고 하자, 혜가는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이라며,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고 승보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24][25] 승찬은 이를 통해 죄의 성품이 마음의 안팎, 중간 어디에도 있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처럼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25]

혜가는 승찬의 머리를 깎아주고 '구슬 찬(璨)'자를 써서 승찬이라는 법명을 내려주었다.[26] 승찬은 광복사(光福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문둥병이 점차 나아져, 2년간 혜가를 시봉하였다.[26]

''전등록''에 따르면, 승찬은 혜가를 2년 동안 섬긴 후[5] 혜가로부터 달마의 가사와 법(일반적으로 능가경으로 여겨짐)을 전수받아 선종의 제3조가 되었다. 혜가는 승찬에게 법을 전수한 후 산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법을 전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리라"고 경고했다.[7]

혜가의 명에 따라 위진남북조의 혼란을 피해 서주(舒州)의 환공산(晥公山)에 숨어 살았으며,[27] 이때 4대조사인 도신에게 불법을 전했다. 이후 나부산(羅浮山)에 숨어살다가 다시 예전의 환공산(晥公山)으로 돌아갔다.[27] 북제 천보 3년(552년) 혜가는 승찬에게 의법을 전했고, 승찬은 서주 완공산에 은거했다. 삼무일종의 법난 중 하나인 북주 무제의 폐불 정책 시대(560년-578년)가 되자, 사공산(안휘성 안칭시 위에시현)에 은거했으며, 거처는 항상 정해져 있지 않았다.

10년 이상의 세월 동안, 그를 찾아오는 자는 없었다. 나라 개황 12년(592년), 14세의 사미 도신이 제자로 들어와 깨달음의 법문을 청하자, 승찬은 "누가 당신을 묶었는가?"라고 물었고, 도신은 "묶은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승찬은 "그렇다면, 지금 와서 무엇을 풀어야 하는가?"라고 말했고, 이에 도신은 크게 깨달았다. 승찬은 도신에게 묘법연화경의 회삼귀일 이론과 불법 이론을 전수했다.

606년 법회하다가 큰 나무 밑에 서서 합장하고 임종하였다.[28] 승찬은 나뭇가지에 손을 걸고 선 채로 임종을 맞이했는데, 이는 수나라 양제 대업 2년(606년)의 일이었다.

2. 3. 도신에게 법을 전하다

승찬은 속인 신분으로 혜가를 처음 만나 문둥병의 원인이 된 죄를 참회시켜 달라고 하였다.[23] 혜가는 죄를 가져오면 참회시켜 주겠다고 했으나, 승찬은 죄를 찾을 수 없다고 답했다. 이에 혜가는 죄가 모두 참회되었다고 말하며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라고 했다.[24] 승찬은 승보는 알겠으나 불보와 법보는 모르겠다고 하자, 혜가는 마음이 부처요 법이며, 이 둘은 다르지 않고 승보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25] 승찬은 이를 통해 죄의 성품이 마음의 안팎, 중간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고,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25]

혜가는 승찬의 머리를 깎아주고 '구슬 찬(璨)' 자를 써서 승찬이라는 법명을 내려주었다.[26] 승찬은 광복사(光福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문둥병이 점차 나아져 2년간 혜가를 시봉하였다.[26] 동위천평 2년(535년) '''3월 18일'''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혜가의 명에 따라 위진남북조의 혼란을 피해 서주(舒州)의 환공산(晥公山)에 은거하였다.[27] 북제천보 3년(552년) 혜가는 승찬에게 의법을 전했다.[20] 이후 삼무일종의 법난 중 하나인 북주 무제의 폐불 정책 시대에 사공산(안후이성 안칭시 위에시현)에 은거하며 10년 이상을 보냈다.

나라 개황 12년(592년), 14세의 사미 도신(580-651)이 승찬을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27] 승찬은 도신에게 "누가 당신을 묶었는가?"라고 물었고, 도신은 "묶은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승찬은 "그렇다면, 지금 와서 무엇을 풀어야 하는가?"라고 되물었고, 이에 도신은 크게 깨달았다. 승찬은 도신에게 묘법연화경의 회삼귀일 이론과 불법 이론을 전수했다. 개황 13년(593년)에 혜가가 입멸하였는데, 이는 도신이 제자가 된 시기와 거의 같다. 도신은 9년 동안 수도하였고, 길주에서 수계했다. 승찬은 도신에게 선의 이치와 진수를 전수하고, 의법을 전했다.

승찬은 나부산(광둥성혜주시박라현)에서 포교하다가 2년 후 서주로 돌아왔다.[27] 606년 법회에서 큰 나무 아래에 서서 합장하고 임종하였다.[28] 당나라 현종은 승찬에게 ''' 鑑智중국어''' (“거울 지혜”)라는 시호를 내렸다.[9]

2. 4. 입적

승찬은 속인으로 혜가를 처음 만나 문둥병의 원인이 된 죄를 참회시켜 달라고 하였다.[23] 혜가는 죄를 찾아오라고 했으나, 승찬은 찾을 수 없다고 하자 죄는 모두 참회되었다고 하며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라고 했다.[24] 혜가는 마음이 부처요 법이며,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고 승보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25] 승찬은 죄의 성품이 마음의 안팎, 중간 어디에도 없음을 깨달았고, 마음처럼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25]

혜가는 승찬의 머리를 깎아주고 '구슬 찬(璨)'자를 써서 승찬이라는 법명을 주었다.[26] 승찬은 광복사(光福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문둥병이 점차 나아져 2년간 혜가를 시봉하였다.[26] 혜가의 명에 따라 위진남북조의 혼란을 피해 서주(舒州) 환공산(晥公山)에 은거하였고, 4대 조사 도신에게 불법을 전했다.[27] 이후 나부산(羅浮山)에 은거하다가 다시 예전 장소로 돌아갔다.[27]

535년 3월 18일에 깨달음을 얻었고,[20] 552년에는 혜가로부터 의법(전법의 증표로 가사를 수여하는 것)을 전수받았다.[20] 그 후 서주 완공산에 은거하였고, 북주 무제의 폐불 정책 시대에는 사공산(안후이성 안칭시 위에시현)에 은거하며 10년 이상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20]

592년에는 14세의 사미 도신을 제자로 받아들여 묘법연화경의 “회삼귀일” 이론과 불법 이론을 전수했다.[20] 593년 혜가 입멸 후, 도신에게 의법을 전하고 나부산(광둥성혜주시박라현)에서 포교하다가 2년 후 서주로 돌아왔다.[20]

606년 법회 중 큰 나무 밑에서 선 채로 합장하며 임종하였다.[28] 당나라 현종은 승찬에게 '''''' (“거울 지혜”)라는 시호를 내렸다.[9]

3. 가르침과 사상



승찬은 이전의 달마혜가처럼, 모든 이원성을 제거하고 "말과 생각을 잊는 것"을 가르치는 능가경 연구에 몰두하고 전문가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지혜의 관조를 강조했다.[10]

그러나 맥레이는 달마(그리고 승찬)와 능가경의 연관성을 "피상적"이라고 묘사한다.[11] 이 경전과 "달마 학파" 간의 연관성은 도선의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제시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법총(法沖)의 전기를 통해 "혜가가 능가경의 본질을 처음으로 파악했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승찬을 "능가경의 심오한 가르침에 대해 설법했지만 저술하지는 않았다"는 인물로 포함시켰다.[12][13] 진정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승찬의 가르침에 대한 언급은 추측에 불과하다.

3. 1. 능가경과의 관계

승찬은 이전의 달마혜가처럼, 모든 이원성을 제거하고 "말과 생각을 잊는 것"을 가르치는 능가경 연구에 몰두하고 전문가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지혜의 관조를 강조했다.[10]

그러나 맥레이는 달마(그리고 승찬)와 능가경의 연관성을 "피상적"이라고 묘사한다.[11] 이 경전과 "달마 학파" 간의 연관성은 도선의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제시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법총(法沖)의 전기를 통해 "혜가가 능가경의 본질을 처음으로 파악했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승찬을 "능가경의 심오한 가르침에 대해 설법했지만 저술하지는 않았다"는 인물로 포함시켰다.[12][13] 진정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승찬의 가르침에 대한 언급은 추측에 불과하다.

4. 저술

꽃씨가 비록 땅을 인연하여
땅 위에 씨앗 꽃을 피우나
꽃씨는 나는 성품이 없나니
땅에도 또한 남이 없도다.[29]

승찬은 전통적으로 《신심명(信心銘, Faith in Mind)》의 저자로 존경받았지만,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이를 사실로 보기 어렵다고 일축한다.[29] 『신심명』(대정장 (大正蔵) 제48권 신심명:2010(승찬 (승려)작)SAT 데이터베이스/T2010_.48.0376b18 - T2010_.48.0377a11)

5. 평가 및 영향

승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매우 적다. 모든 선종 조사들 중에서 승찬은 가장 알려진 바가 적고 모호한 인물이다.[14] 승찬에 대한 초기 기록은 도선(?–667)이 쓴 『고승전』(645)에 나오는데, 혜가의 제자 7명 중 한 명으로 혜가의 이름 바로 다음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정보는 제공되지 않는다.[15]

약 710년에 편찬된 『전법보기』는 『고승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선종의 가르침 "계보"를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고승전』에서 승찬의 이름이 혜가 바로 다음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선종의 제3대 조사로 지명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16] 승찬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대부분의 정보는 항저우 링인 사찰(靈隱寺)의 승려 보제(普濟)가 13세기 초에 편찬한 《오등회원(五燈會元)》에서 비롯되었으며, 《전등록(傳燈錄)》[18]에서 주로 수집되었다.[17]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전등록 기록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19] 승찬의 전기로는 독고급(? - 777년)이 지은 '수고감지선사비명병서'가 알려져 있다. 그보다 앞서 7세기 중반에 성립된 도선의 '속고승전'에는 법충전의 문중에 혜가의 제자로서 찬선사가 있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변의(541년 - 606년)의 전중에도 승찬선사가 등장한다.

제4조 도신의 스승을 승찬으로 하는 것은 8세기 초기에 성립된 선의 등사인 '능가사지기'와 '전법보기'이다. '신심명'의 저자를 승찬으로 비정하는 것은 백장회해(749년 - 814년)이며, 그 이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시대가 거슬러 올라갈수록 승찬에 관한 전기라고 할 만한 것은 적어진다. 보리달마를 동전의 초조로 하고, 혜가를 거쳐 "동산법문"의 사람들에게 계승되었다'라고 하는 선의 정통 계보를 강하게 연결하는 데 있어서 중요시되는 것이 제3조 승찬이다.

5. 1. 시호

6. 기타

참조

[1] 문서 Ferguson
[2] 문서 Ferguson
[3] 문서 Cleary 1990
[4] 문서 McRae
[5] 문서 Cleary
[6] 문서 Dumoulin
[7] 문서 Ferguson
[8] 문서 Ferguson
[9] 문서
[10] 문서 Dumoulin
[11] 문서 McRae 1986
[12] 문서 Dumoulin
[13] 문서 Dumoulin
[14] 문서 Dumoulin
[15] 문서 Dumoulin
[16] 문서 McRae, John R 1986
[17] 웹사이트 Lingyin Temple http://www.orientala[...]
[18] 문서 Ferguson, Andy 2000
[19] 문서 McRae, John R 2003
[20] 문서 『[[続高僧伝]]』卷21「唐蘄州双峰山釈道信伝」“又有二僧 莫知何来 入舒州皖公山静修禅業 聞而往赴 便蒙受法”
[21] 웹인용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http://www.ibulgyo.c[...] 불교신문 2003-06-18
[22] 웹인용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http://www.ibulgyo.c[...] 불교신문 2003-06-18
[23] 웹인용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http://www.ibulgyo.c[...] 불교신문 2003-06-18
[24] 웹인용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http://www.ibulgyo.c[...] 불교신문 2003-06-18
[25] 웹인용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http://www.ibulgyo.c[...] 불교신문 2003-06-18
[26] 웹인용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http://www.ibulgyo.c[...] 불교신문 2003-06-18
[27] 웹인용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http://www.ibulgyo.c[...] 불교신문 2003-06-18
[28] 웹인용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http://www.ibulgyo.c[...] 불교신문 2003-06-18
[29] 서적 육조단경 2023-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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