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순양전함 그나이제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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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나이제나우는 독일 해군이 건조한 샤른호르스트급 순양전함 중 하나이다. 1934년 12월 기공되어 1938년 5월에 준공되었으며, 28cm 주포 9문, 15cm 부포 12문 등을 탑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노르웨이 침공, 대서양 통상 파괴 작전 등에 참여했으나, 영국 해군의 공격으로 여러 차례 손상을 입었다. 1942년 2월 킬 군항에서 폭격으로 뱃머리가 파손되어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고, 이후 고텐하펜으로 옮겨져 무장 해제되었다. 1945년 3월, 붉은 군대의 진격을 막기 위해 자침되었으며, 1947년에 인양되어 고철로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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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순양전함 그나이제나우 - [배(Ship)]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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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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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명 | 그나이제나우 |
함명 유래 | 아우구스트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 |
함종 | 순양전함 |
기공 | 1935년 5월 6일 |
진수 | 1936년 12월 8일 |
취역 | 1938년 5월 21일 |
퇴역 | 1942년 7월 1일 |
최후 | 1945년 3월 23일 자침, 1951년 해체 |
건조 | Deutsche Werke |
자매함 | 샤른호르스트 |
제원 | |
배수량 | 표준: 32,100 톤, 만재: 38,100 톤 |
전장 | 229.8 미터 |
선폭 | 30 미터 |
흘수 | 9.9 미터 |
동력 | 165,930 마력 |
추진 | 3축 게르마니아 기어 증기 터빈 |
속력 | 31 노트 |
항속 거리 | 19 노트에서 6,200 해리 |
승조원 | 장교 56명, 사병 1,613명 |
무장 | |
주포 | 28 cm/54.5 (11인치) SK C/34 9문 |
부포 | 15 cm/55 (5.9인치) SK C/28 12문 |
대공포 | 10.5 cm SK C/33 14문 3.7 cm SK C/30 16문 2 cm C/30 또는 C/38 10문 (후에 16문) |
어뢰 | 533 mm 어뢰 발사관 6기 |
장갑 | |
현측 | 350 mm |
갑판 | 50 ~ 105 mm |
포탑 | 200 ~ 360 mm |
사령탑 | 350 mm |
항공기 | |
함재기 | Arado Ar 196A 3대 |
항공 설비 | 사출기 1기 |
2. 설계
''그나이제나우''는 낡은 전노급 전함 헤센을 대체하기 위해 계약명 "E", ''Ersatz Hessen''으로 발주되었다. 킬의 도이체 베르케 조선소에서 1935년 5월 6일에 기공되었고, 1936년 12월 8일에 진수되었다. 이후 장비 작업과 해상 시험을 거쳐 1938년 5월 21일에 에리히 푀르스테 해군 대령의 지휘 아래 취역했다.
''그나이제나우''는 기준 배수량 약 32615108.70kg, 만재 배수량 약 38711390.70kg이었다. 전체 길이는 229.8m, 선폭은 30m, 최대 흘수는 9.9m였다. 3기의 게르마니아 기어드 증기 터빈을 장착하여 총 165,930 PS의 출력을 내며 시험에서 최대 31.3노트의 속도를 기록했다. 표준 승무원은 장교 56명과 사병 1,613명으로 구성되었으나, 전쟁 중에는 장교 60명과 사병 1,780명까지 증가했다. 함대 기함으로 운용될 때는 추가로 장교 10명과 사병 61명이 더 탑승했다.
주 무장으로는 9문의 28cm (11.1 인치) L/54.5 포를 3연장 포탑 3개에 나누어 탑재했다. 이 중 2개의 포탑(안톤, 브루노)은 전방에 상호 사격 방식으로 배치되었고, 나머지 1개 포탑(체사르)은 후방에 배치되었다. 부포는 12문의 15cm (5.9 인치) L/55 포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8문은 2연장 포탑에, 나머지 4문은 단일 포탑에 탑재되었다. 중대공 무장은 14문의 10.5cm L/65 포였으며, 4개의 SL-6 안정화 대공 사격 지휘소에 의해 조준되었다. 경대공 무장은 16문의 3.7cm SK C/30 L/83 포와 초기에는 10문의 2cm C/30 대공포로 구성되었다. 2 cm 포의 수는 이후 38문까지 증가했다. 1941년 3월에는 라이프치히 경순양함에서 가져온 2개의 3연장 53.3cm 수상 어뢰 발사관이 설치되었다.
''그나이제나우''의 장갑은 중앙부에서 350mm 두께의 주 갑판 벨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함선의 탄약고와 추진 기계실을 보호했다. 함선은 평평한 부분에서 20mm에서 40mm 두께의 장갑 갑판을 가지고 있었고, 벨트 하단과 연결되는 경사면에서는 105mm으로 증가했다. 주포 포탑은 전면에 360mm, 측면에 200mm의 장갑을 갖추었다. 함교는 측면에 350mm의 장갑 방호력을 갖추었다.
3. 연혁
초기 시험 운항 결과, 심한 파도 속에서 함수에 상당량의 물이 들어오는 문제가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전방 포탑의 전기 시스템이 손상될 위험이 있어, 조선소로 돌아가 원래의 직선형 선수 대신 솟아오른 "대서양 선수"로 교체하는 개조를 받았다. 또한 주 돛대가 연기에 휩싸이는 것을 막기 위해 연돌 덮개가 추가되었다. 이러한 개조 작업은 1939년 9월에 완료되어 함선은 완전한 운용 상태에 들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나이제나우는 여러 작전에 투입되었다. 1939년 11월 23일에는 자매함 샤른호르스트와 함께 페로 제도 해전에 참가하여 영국 무장 상선 라왈핀디호를 격침시키는 데 기여했다. 1940년에는 베저위붕 작전의 일환으로 나르비크 해전과 노르웨이 해전에 참가하여 영국 항공모함 글로리어스와 구축함 2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트론헤임 근해에서 영국 잠수함 클라이드의 어뢰 공격을 받아 손상을 입었다.
1941년에는 베를린 작전에 투입되어 샤른호르스트와 함께 대서양에서 연합군 상선 다수를 격침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4월, 점령된 프랑스의 브레스트 항구에서 영국 공군의 공습과 어뢰 공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 장기간 수리에 들어갔고, 이로 인해 라인 연습 작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1942년 2월 11일, 켈베로스 작전에 참가하여 샤른호르스트, 프린츠 오이겐과 함께 영국 해협을 돌파하여 독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귀환 후 킬 군항에서 수리 중이던 2월 26일, 연합군 공군의 대규모 폭격으로 함수 탄약고가 유폭되어 함수 부분이 완전히 파괴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2]
이후 함체 길이 연장 및 주포를 38cm 연장포로 교체하는 대대적인 개장을 위해 폴란드의 고텐하펜(현 그디니아)으로 이동했으나,[3] 1943년 바렌츠해 해전 패배 이후 히틀러의 대형함 폐기 명령에 따라 공사가 중단되고 폐기가 결정되었다. 탑재되었던 함포들은 철거되어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지의 해안 요새포로 전용되었다.
1945년 3월 28일, 전쟁 막바지에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고텐하펜 항구 입구를 막는 폐색선으로 자침되었다. 전쟁 후 1947년에 인양 작업이 시작되어 1951년에 완전히 해체되었고 고철로 처리되었다.
3. 1.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나이제나우는 함대 사령장관 헤르만 뵘 제독의 기함으로 활동했다. 10월 8일, 뵘 제독의 지휘 아래 경순양함 쾰른, 구축함 9척과 함께 출격했으나, 영국 본국 함대의 출격 소식을 듣고 귀환했다. 11월 21일, 뵘 제독의 후임인 빌헬름 마르샬 제독의 기함으로 자매함 샤른호르스트, 경순양함 쾰른, 라이프치히 등과 함께 빌헬름스하펜을 출격했다. 11월 23일, 페로 제도 인근 해역에서 벌어진 교전에서 영국 무장 상선 라왈핀디호를 샤른호르스트와 함께 격침시켰다.
1940년 2월 18일부터 20일까지, 마르샬 제독의 기함으로 샤른호르스트, 중순양함 아드미랄 히퍼, 구축함 2척과 함께 노르웨이 해역에서 연합군 선단 공격을 목표로 한 "노르트마르크 작전"에 참가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4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는 베저위붕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나이제나우와 샤른호르스트는 귄터 뤼첸스 부제독의 지휘 아래 나르비크와 트론헤임 공격 부대를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4월 7일 아침, 빌헬름스하펜을 출항하여 중순양함 아드미랄 히퍼와 14척의 구축함과 합류했다. 4월 9일 새벽 4시 30분, 그나이제나우의 레이더가 영국 순양전함 리나운을 포착했다. 5시 5분, 리나운이 먼저 포격을 개시했고, 그나이제나우도 응사하여 리나운에 두 발을 명중시켰으나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반면 그나이제나우는 리나운의 38cm 포탄 두 발에 피격되었다. 한 발은 지휘탑을 관통했으나 불발되었고, 다른 한 발은 후방 포탑을 무력화시켰다. 뤼첸스 제독은 리나운을 호위하는 구축함의 어뢰 공격을 우려하여 교전을 중단하고 고속으로 이탈했다. 이 교전(로포텐 해전의 일부)에서 그나이제나우는 28cm 포탄 60발과 15cm 포탄 8발을 발사했다. 이후 샤른호르스트, 아드미랄 히퍼와 함께 4월 12일 빌헬름스하펜으로 귀환하여 수리를 받았다. 5월 5일, 엘베 강 어귀에서 자기 기뢰에 접촉하여 폭발이 일어나 선체 후미 하부에 손상을 입고 여러 구획이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다. 5월 21일까지 킬에서 수리를 마쳤다.
6월 4일, "유노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샤른호르스트, 아드미랄 히퍼, 구축함 4척과 함께 다시 빌헬름스하펜을 출항했다. 이 작전의 목표는 노르웨이 주둔 연합군에 대한 보급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6월 8일, 트롤선 주니퍼와 유조선 '오일 파이오니어'를 격침시켰다. 같은 날 오후 5시 45분경, 약 40000m 거리에서 영국 항공모함 글로리어스와 호위 구축함 아카스타, 아덴트를 발견했다. 그나이제나우와 샤른호르스트는 즉시 글로리어스를 향해 접근하며 포격을 개시했다. 샤른호르스트가 먼저 글로리어스에 명중탄을 기록했고, 그나이제나우는 구축함 아덴트와 교전했다. 영국 구축함들은 연막을 치며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아카스타가 발사한 어뢰 한 발이 샤른호르스트에 명중하여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수적, 화력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글로리어스, 아카스타, 아덴트 세 척 모두 격침되었다. 이 전투는 항공모함이 전함의 포격에 격침된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이다.
전투 후 샤른호르스트의 수리를 위해 함대는 트론헤임으로 이동했다. 6월 20일, 아이슬란드 방면으로 출격하던 중 트론헤임 북서쪽 해역에서 영국 잠수함 클라이드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 어뢰는 함수 부분에 명중하여 심각한 손상을 입혔고, 그나이제나우는 다시 트론헤임으로 회항해야 했다. 임시 수리 후 7월 말 킬로 돌아와 호발츠베르케 조선소에서 5개월간 본격적인 수리를 받았다.
1941년 1월 22일, 수리를 마친 그나이제나우는 샤른호르스트와 함께 베를린 작전에 투입되었다. 뤼첸스 제독의 지휘 아래 두 척의 전함은 북대서양으로 진출하여 연합군 수송선단 공격에 나섰다. 2월 8일, HX 106 호송대를 발견했으나 영국 전함 라밀리스의 호위 때문에 공격을 포기했다. 3월 8일에는 SL67 호송대를 발견했지만, 이번에는 전함 말라야의 호위로 인해 교전을 피했다. 이 작전 기간 동안 뤼첸스는 영국 주력함과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1] 그러나 두 전함은 호송대에서 이탈하거나 단독으로 항해하는 상선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베를린 작전 동안 그나이제나우는 총 14척 (샤른호르스트는 8척)의 상선을 격침 또는 나포하여 총 톤수 약 116,000 GRT에 달하는 피해를 입혔다. 3월 22일, 작전을 마치고 점령된 프랑스의 브레스트 항구에 도착했다.
브레스트에 정박한 후, 그나이제나우는 영국 공군의 집중적인 공습 목표가 되었다. 4월 6일, 영국 공군 연안 사령부 소속 브리스톨 보퍼트 뇌격기의 공격을 받아 어뢰 1발이 우현 후방 수선 하부에 명중했다. 이 공격으로 약 3050ton의 해수가 유입되고 추진축이 손상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 공습을 성공시킨 조종사 케네스 캠벨 비행 장교는 전사 후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 4월 10일 밤에는 추가 폭격으로 4발의 폭탄이 명중하여 약 50명의 승무원이 사망하고 9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 피해로 인해 그나이제나우는 장기간 수리에 들어가게 되었고, 5월에 있었던 라인 연습 작전에 참가하지 못했다. 수리 기간 동안 대공 무장을 강화하고 어뢰 발사관을 추가하는 개조 작업도 함께 진행되었다.
1942년 2월, 독일 해군 지휘부는 브레스트에 정박 중인 그나이제나우, 샤른호르스트,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을 독일 본토로 귀환시키기로 결정했다. 노르웨이 방면으로 재배치하여 소련으로 향하는 북극 호송선단을 차단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위험한 영국 해협 돌파 작전은 켈베로스 작전으로 명명되었다. 오토 실리아크 부제독의 지휘 아래 2월 11일 밤 브레스트를 출항한 함대는 루프트바페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으며 영국 해협을 고속으로 통과했다. 영국군의 감시망을 뚫고 여러 차례의 공습과 구축함의 공격을 물리쳤으나, 2월 12일 저녁 테르스헬링 근해에서 그나이제나우는 자기 기뢰에 접촉했다. 폭발은 후방 포탑 인근에서 발생했으며, 약간의 침수와 중앙 터빈 손상을 일으켰지만 항해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2월 13일 새벽, 헬골란트를 거쳐 브룬스뷔텔에 도착했으나, 킬 운하의 결빙으로 인해 잠시 대기해야 했다. 항구 내에서 이동 중 수중 난파선과 충돌하여 선체에 추가적인 손상을 입었다. 다음 날 킬에 도착하여 도이체 베르케 조선소의 부유식 건선거에 들어가 수리를 시작했다.
그러나 킬에서의 수리는 순조롭지 못했다. 1942년 2월 26일 밤, 영국 공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그나이제나우는 폭탄 여러 발에 명중당했다. 한 발이 함수 부분의 탄약고를 유폭시켜 함수 부분이 완전히 파괴되고 화재가 발생하는 등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 피해로 그나이제나우는 사실상 전투 능력을 상실했다. 함체 자체의 손상은 비교적 경미하고 기관도 무사하여 자력 항해는 가능했으나[2], 함수를 새로 제작하고 주포를 38cm 연장포로 교체하는 대대적인 개장이 필요했다. 4월 4일까지 외양 항해가 가능할 정도로 임시 수리를 마친 후[3], 개장을 위해 폴란드의 고텐하펜(현 그디니아)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1943년 1월, 바렌츠해 해전에서 독일 해군 수상함대가 패배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대형함 무용론을 주장하며 모든 대형함 건조 및 수리 중단과 폐기를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그나이제나우의 개장 공사는 중단되었고, 폐기가 결정되었다. 함선에 탑재되었던 주포와 부포 등 무장은 철거되어 노르웨이와 네덜란드 등지의 해안포 요새로 전용되었다. 3개의 3연장 주포탑 중 제1 포탑은 단장포로 분할되어 네덜란드에, 제2, 제3 포탑은 3연장 그대로 노르웨이 요새에 설치되었다.
1945년 3월 28일, 전쟁 막바지에 소련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고텐하펜 항구 입구를 막는 폐색선으로 사용되어 자침되었다. 전쟁 후 1947년 폴란드 정부에 의해 인양되어 해체된 후 고철로 처리되었다. 폐함 시 요새포로 전용되었던 제3 포탑과 부포탑 일부는 현재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3. 2. 전후
1942년 2월 26일 킬 군항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폭격을 받아 함수 탄약고가 폭발하여 함수가 절단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2] 이후 수리를 거쳐 주포탑을 38cm 연장포로 교체하기 위해 폴란드의 그디니아(당시 고텐하펜)로 이동했다.[3] 그러나 1943년, 바렌츠 해 해전에서의 패전 이후 아돌프 히틀러가 대형함 건조 및 개장 중단 명령을 내리면서 공사가 중지되었고, 결국 폐기가 결정되었다.
폐기가 결정된 후, 그나이제나우에 탑재되었던 함포들은 철거되어 육상 요새포 및 해안포로 전용되었다. 28 cm 주포탑 중 'Caesar' 포탑(제3 포탑)은 노르웨이 트론헤임 근처의 오스트라트 요새에 설치되었고, 15 cm 부포탑 중 하나는 덴마크에 설치되었다.
전쟁 막바지인 1945년 3월 27일, 붉은 군대의 진격을 막기 위해 고텐하펜 항구 입구에서 방해선으로 자침되었다. 전쟁 후 1947년, 폴란드 정부의 결정에 따라 인양 작업이 시작되었고, 1951년 9월 12일에 다시 인양되어 완전히 해체, 고철로 처리되었다. 이는 당시 인양된 선박 중 가장 큰 규모였다. 해체된 선체의 일부 강철은 폴란드 상선 건조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노르웨이 오스트라트 요새에는 제3 주포탑이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덴마크에도 부포탑이 남아있다. 1979년 노르웨이 정부가 포탑 반환을 제안했으나, 독일 측이 거절하였다.
4. 함장
wiki
재임 기간 | 계급 및 이름 |
---|---|
1938년 5월 21일 ~ 1939년 11월 25일 | 해군 대령 에리히 푀르스테 |
1939년 11월 26일 ~ 1940년 8월 | 해군 대령 하랄트 네츠반트 |
1940년 8월 20일 ~ 1942년 4월 14일 | 해군 대령 오토 파인 |
1942년 4월 15일 ~ 17일 | 해군 대령 루돌프 페터스 |
1942년 5월 ~ 7월 | 해군 중령 볼프강 쾰러 |
5. 자매함
- 샤른호르스트 (전함)
6. 동명함
- 그나이제나우 (순양함) - 샤른호르스트급의 2번함이다.
참조
[1]
간행물
世界の艦船増刊第67集
[2]
웹사이트
キールで爆撃される前と後のグナイゼナウおよびその損傷の様子。
http://www.scharnhor[...]
[3]
웹사이트
艦歴(ドイツ語)
http://schlachtsch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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