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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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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학사는 신라 성덕왕 23년(724년)에 건립된 사찰로, 충청남도 공주 계룡산에 위치해 있다. 고려 시대에는 태조의 원당으로, 조선 시대에는 세조가 사육신과 단종 등을 기리는 초혼제를 지낸 곳으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주요 전각으로는 동계사, 삼은각, 숙모전 등이 있으며, 숙모전은 단종과 정순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또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와 비구니 강원이 있으며, 대전 시내버스와 고속도로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2. 역사

신라 상원조사가 계룡산에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입적한 뒤, 그의 제자인 회의화상이 신라 성덕왕 23년(724년)에 쌍탑과 함께 건립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본래 암자의 이름은 청량사였으며, 현재 동학사의 위치가 아니라 산 중턱 남매탑이 있는 곳에 있었다.[1] 고려도선이 중창하고 고려 태조의 원당을 설치했으며, 이후 신라의 유신 류차달이 박혁거세와 박제상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확장한 뒤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1] 동학사라는 이름은 절 동쪽에 있는 학 모양의 바위에서 따 왔다는 설과, 동방 성리학의 원조로 꼽히는 정몽주를 제향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1]

조선 건국 직후, 고려 유신 길재는 단을 쌓고 고려 태조,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를 지냈다. 삼은각에서는 길재, 이색,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1]

조선 세조 3년(1457년), 김시습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조선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다. 이듬해인 1458년 세조가 직접 찾아와 사육신과 단종을 비롯하여 자신의 손에 죽은 280여 명의 이름을 써주면서 초혼제를 지내고 초혼각을 짓게 했다.[1] 세조는 사육신과 함께 억울하게 죽은 형제 안평대군금성대군, 그리고 중신 황보인김종서를 제사 지내고 명복을 빌도록 전답과 산을 하사하였다.[1] 조선 말에는 이 사당을 확장하여 숙모전이라고 고쳐 불렀다.[1]

1728년 화재로 절과 초혼각이 소실된 뒤 여러 차례 중건하였다.[1] 한국 전쟁 때 다시 절이 불타버려 1960년대 이후 서서히 중건되었다. 경허가 초기에 수행하며 깨달음을 얻은 절로도 알려져 있다.[1]

2. 1. 창건 (신라 시대)

신라 때 상원조사가 계룡산에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입적한 뒤, 그의 제자인 회의화상이 신라 성덕왕 23년(724년)에 쌍탑과 함께 건립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본래 암자의 이름은 청량사였으며, 현재 동학사의 위치가 아니라 산 중턱 남매탑이 있는 곳에 있었다.[1] 고려도선이 중창하고 고려 태조의 원당을 설치했으며, 이후 신라의 유신 류차달이 박혁거세와 박제상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확장한 뒤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1] 동학사라는 이름은 절 동쪽에 있는 학 모양의 바위에서 따 왔다는 설과, 동방 성리학의 원조로 꼽히는 정몽주를 제향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1]

2. 2. 고려 시대

신라 상원조사가 계룡산에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입적한 뒤, 그의 제자인 회의화상이 신라 성덕왕 23년(724년)에 쌍탑과 함께 건립한 것이 동학사의 시초이다. 본래 암자의 이름은 청량사였으며, 지금의 동학사 위치가 아니라 산 중턱 남매탑이 있는 곳에 있었다. 고려도선이 중창하고 고려 태조의 원당을 설치했다. 이후 신라의 유신이었던 류차달이 박혁거세와 박제상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사찰을 확장한 뒤 지금의 동학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동학사라는 이름은 절 동쪽에 있는 학 모양의 바위에서 따 왔다는 설과, 동방 성리학의 원조로 꼽히는 정몽주를 모셨기 때문에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2. 3. 조선 시대

조선 건국 직후, 고려 유신 길재가 단을 쌓고 고려 태조와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를 지냈다. 삼은각에서는 길재, 이색,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1]

조선 세조 3년(1457년) 김시습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이어서 조선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다. 이듬해인 1458년 세조가 직접 찾아와 사육신과 단종을 비롯하여 자신의 손에 죽은 280여 명의 이름을 써주면서 초혼제를 지내고 초혼각을 짓게 했다.[1] 세조는 사육신과 함께 억울하게 죽은 형제 안평대군금성대군, 그리고 중신 황보인김종서를 제사 지내고 명복을 빌도록 전답과 산을 하사하였다.[1] 조선 말에는 이 사당을 확장하여 숙모전이라고 고쳐 불렀다.[1]

1728년 화재로 절과 초혼각이 소실된 뒤 여러 차례 중건하였다.[1] 경허가 초기에 수행하며 깨달음을 얻은 절로도 알려져 있다.[1]

2. 4. 근현대

조선 건국 직후, 길재는 단을 쌓고 고려 태조와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삼은각에서는 길재, 이색,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조선 세조 3년(1457년), 김시습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조선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다. 이듬해인 1458년, 세조는 직접 동학사를 찾아 사육신과 단종을 비롯하여 자신의 손에 죽은 280여 명의 이름을 써주면서 초혼제를 지내고 초혼각을 짓게 했다. 세조는 사육신과 함께 억울하게 죽은 형제 안평대군금성대군, 그리고 중신 황보인김종서를 제사지내고 명복을 빌도록 전답과 산을 하사하였다. 조선 말에는 이 사당을 확장하여 숙모전이라고 고쳐 불렀다.

1728년 화재로 절과 초혼각이 소실된 뒤 여러 차례 중건되었고, 한국 전쟁 때 다시 절이 불타버려 1960년대 이후 서서히 중건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비구니 강원이 있다. 상원조사의 전설이 얽힌 남매탑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된 석탑이다.

경허가 초기에 수행하며 깨달음을 얻은 절로도 알려져 있다.

3. 주요 전각 및 유물

조선 세조 3년(1457년) 김시습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조선 단종의 제단을 증설하면서 동학사는 주요 전각 및 유물을 갖추게 되었다.[1] 이듬해인 1458년 세조가 직접 동학사를 찾아와 초혼각을 짓게 하고, 사육신과 단종을 비롯하여 자신의 손에 죽은 280여 명의 이름을 써주면서 초혼제를 지냈다.[1] 세조는 이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명복을 빌도록 전답과 산을 하사하였다.[1] 1728년 화재와 한국 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60년대 이후 서서히 중건하였다.[1] 현재 초혼각이 있던 곳은 충청남도 문화재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다.[1]

이외에도 동학사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문화재들이 있다.

명칭지정 번호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719호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복장전적보물 제1720호
동학사 삼성각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7호
동학사 삼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8호


3. 1. 초혼각

조선 세조 3년(1457년) 김시습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냈고, 이어서 조선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다.[1] 이듬해인 1458년 세조가 직접 동학사를 찾아와 사육신과 단종을 비롯하여 자신의 손에 죽은 280여 명의 이름을 써주면서 초혼제를 지내고 초혼각을 짓게 했다.[1] 세조는 사육신과 함께 억울하게 죽은 형제 안평대군금성대군, 그리고 중신 황보인김종서에게 제사를 지내고 명복을 빌도록 전답과 산을 하사하였다.[1] 1728년 화재로 소실된 뒤 여러 차례 중건하였고, 한국 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1960년대 이후 서서히 중건되었다.[1] 현재 초혼각이 있던 곳은 충청남도 문화재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으며, 사단법인 숙모회는 음력 3월 15일과 단종이 운명한 10월 24일에 제향하고 있다.[1]

3. 1. 1. 동계사

신라 눌지왕 때 일본에 인질로 잡혀간 왕의 동생 미사흔을 구출하고 일본에서 순절한 박제상을 류차달이 936년에 초혼하여 제사하고 왕명으로 동계사를 건립하였다. 철향되었다가 1956년 중건될 때 류차달도 함께 추배하였다.[1]

3. 1. 2. 삼은각

삼은각은 숙모전과 동계사 사이에 있는데, 정몽주(호는 포은), 이색(호는 목은), 길재(호는 야은) 등 삼은(三隱)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394년 길재가 이곳에 정몽주를 초혼하여 제사를 지낸 데에서 유래하였다.[1] 조선 정종 원년(1399년) 금헌 류방택이 이색의 넋을 초혼하여 추가로 제사를 지낸 후 단을 중수하였다.[1] 길재가 사망하자 류백순이 길재를 추가로 모시면서 삼은각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1] 이후 류방택, 이숭인, 나계종도 추가로 모셨다.[1]

조선 건국 직후, 고려 유신 길재는 단을 쌓고 고려 태조와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를 지냈다.[1]

3. 1. 3. 숙모전

조선 건국 직후 고려 유신 길재가 단을 쌓고 고려 태조와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를 지냈고, 삼은각에서는 길재, 이색,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조선 세조 3년에 김시습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이어서 조선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다. 이듬해인 1458년 세조가 직접 찾아와 사육신과 단종을 비롯하여 자신의 손에 죽은 280여 명의 이름을 써주면서 초혼제를 지내고 초혼각을 짓게 했다. 세조는 사육신과 함께 억울하게 죽은 형제 안평대군금성대군, 그리고 중신 황보인김종서를 제사지내고 명복을 빌도록 전답과 산을 하사하였다. 조선말에는 이 사당을 확장하여 숙모전이라고 고쳐 불렀다.

숙모전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참형을 당한 사육신생육신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김시습이 단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1456년(세조 2) 김시습이 처음 이곳에 단을 모아 사육신을 초혼 제사하자, 1457년 세조가 동학사에 들렀다가 초혼단을 보고 감동하여 팔폭비단에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명단을 적어 유교와 불교가 함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단종이 죽은 후에는 김시습, 조상치 등 향사7신이 엄흥도와 만나 단종의 초혼제사를 하였다. 1904년에는 왕이 숙모전이라 현판을 내렸다. 숙모전의 정전에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숙모전 앞에는 동묘와 서묘가 함께 있는데, 사육신, 생육신 외에도 300백여 충신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3. 2. 숙모회

조선 건국 직후, 고려 유신 길재는 단을 쌓고 고려 태조와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삼은각에서는 길재, 이색,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

조선 세조 3년(1457년), 김시습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조선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다. 이듬해인 1458년, 세조는 직접 찾아와 사육신과 단종을 비롯하여 자신의 손에 죽은 280여 명의 이름을 써주면서 초혼제를 지내고 초혼각을 짓게 했다. 세조는 사육신과 함께 억울하게 죽은 형제 안평대군금성대군, 그리고 중신 황보인김종서에게 제사를 지내고 명복을 빌도록 전답과 산을 하사하였다. 조선 말에는 이 사당을 확장하여 숙모전이라 불렀다.

숙모전은 공주 동학사 경내 동편(공주군 반포면 학봉리 산1번지)에 있으며, 숙모전, 동계사, 삼은각을 전각사라 일컫는다. 초혼각지는 충남문화재 기념물 제18호로 등록되었고, 1992년 건립된 강당 숙모재에 사단법인 숙모회가 설립되어 사무실을 두고 있다. 숙모회는 매년 음력 3월 15일과 단종이 운명한 10월 24일에 단종 및 순절신들의 제사 등 기타 행사를 주관한다.[1]

3. 3. 기타 문화재

명칭지정 번호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719호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복장전적보물 제1720호
동학사 삼성각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7호
동학사 삼층석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8호


4. 교통

대전에서 107번 시내버스가 운영된다. 고속도로로 접근할 때에는 유성 나들목을 이용하는 것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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