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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흑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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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흑달은 수나라 말기, 당나라 초기의 인물로, 출생 시기와 배경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용감하고 뛰어난 무예 실력을 가졌으며, 수나라에 반대하는 농민 반란에 참여하여 이밀 휘하에서 활동했다. 이후 왕세충에게 붙잡혀 정나라에서 복무하던 중 당나라 장군 이세적에게 포로로 잡혔다. 두건덕의 휘하에 들어가 한동공에 봉해졌으며, 두건덕 사후 하나라 잔존 세력을 이끌고 당나라에 대항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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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흑달
기본 정보
가족Líu (劉)
이름헤이타 (黑闥)
통치
통치 기간622년–623년
왕조수나라당나라
연호티안자오 (天造)
연호 기간622년–623년
인물 정보
사망일623년

2. 초기 생애 및 수나라 시대 활동

유흑달은 청하군 장남현(현재의 허베이성 헝수이 시 구청 현 북동쪽) 출신으로, 두건덕과 같은 고향 사람이다. 젊어서는 품행이 좋지 않아 친구 두건덕에게 돈을 빌려 술과 도박에 썼다. 수나라 말, 하오샤오더를 따랐다가 후에 이밀을 섬겨 비장이 되었다. 이밀이 패하자 왕세충에게 붙잡혀 마군총관에 임명되어 신샹에 주둔했다. 619년, 당나라 장군 이세적이 하(夏)나라의 두건덕에게 항복하면서 신향을 공격했고, 이세적은 유흑달을 붙잡아 두건덕에게 넘겼다.[2]

2. 1. 초기 생애

유흑달은 장남(漳南, 현대의 한단시 허베이성) 출신으로, 두건덕과 같은 현 출신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용감하고 순발력이 뛰어났다고 전해지며, 술과 도박을 좋아하여 아버지와 형제들을 실망시켰다고 한다. 그는 두건덕과 친해졌고, 돈이 부족할 때마다 두건덕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결국 수나라 통치에 반대하는 농민 반란에 참여하여 처음에는 호효덕을 따랐고, 호효덕이 이밀의 군대에 합류한 후에는 이밀 휘하에서 복무했다.[2]

618년, 이밀이 당시 수나라 장군이었던 왕세충에게 패배한 후, 왕세충은 유흑달을 기병 장교로 임명했지만, 그의 행동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종종 왕세충을 비웃었다고 한다.[2]

619년, 유흑달은 왕세충이 그해 초 마지막 수나라 황제인 양동에게 양위를 받아 새로 건국한 정(鄭)나라 군대에서 복무하며 신향(新鄉, 현대의 신샹시 허난성)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당나라 장군 이세적에게 포로로 잡혔다. 이세적은 하(夏)나라에 항복하여 두건덕을 섬기도록 강요받은 상태였다.[2] 두건덕은 유흑달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한동공(漢東公)에 봉했다. 그는 종종 유흑달에게 게릴라 부대를 지휘하여 기습 공격을 가하게 하거나, 때로는 첩보 활동을 위해 적의 영토에 은밀히 침투하게 했다. 유흑달은 두건덕 휘하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고 전해진다.[2]

2. 2. 수나라 시대 활동

618년, 이밀이 왕세충에게 패배한 후, 왕세충은 유흑달의 용맹함을 알고 그를 기병 장교로 임명했다. 그러나 유흑달은 왕세충을 비웃곤 했다.[2]

619년, 유흑달은 왕세충이 세운 정(鄭)나라 군대에서 복무하며 신향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당나라 장군 이세적에게 포로로 잡혔다. 이세적은 하(夏)나라의 두건덕을 섬기도록 강요받은 상태였다.[2]劉黑闥|유흑달중국어이 이세적에게 사로잡혔다는 기록은 ''구당서'' 초판에 실려 있으며,[3] 이후 ''신당서''[4]와 ''자치통감'' 등에 채택되었다. 그러나 ''구당서''의 주석에는 유흑달이 이세적에게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스스로 두건덕에게 도망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건덕은 유흑달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한동공(漢東公)에 봉했다. 그는 종종 유흑달에게 게릴라 부대를 지휘하게 하거나, 첩보 활동을 위해 적의 영토에 은밀히 침투하게 했다. 유흑달은 두건덕 휘하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3. 두건덕 휘하에서의 활동

두건덕과 같은 현 출신인 유흑달은 젊은 시절부터 용감하고 순발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는 술과 도박을 좋아하여 아버지와 형제들을 실망시켰지만, 두건덕과 친해져 돈이 부족할 때마다 도움을 받았다. 劉黑闥|유흑달중국어은 마침내 수나라 통치에 반대하는 농민 반란에 참여하여 처음에는 호효덕을 따랐고, 호효덕이 이밀의 군대에 합류한 후에는 이밀 휘하에서 복무했다.[2]

619년, 유흑달은 왕세충양동에게 양위를 받아 새로 건국한 정(鄭)나라 군대에서 복무하며 신향(新鄉, 현대의 신샹시 허난성)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당나라 장군 이세적에게 포로로 잡혔다. 이세적은 하(夏)나라에 항복하여 두건덕을 섬기도록 강요받은 상태였다.[2] 두건덕은 유흑달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한동공(漢東公)에 봉했다. 그는 종종 유흑달에게 게릴라 부대를 지휘하여 기습 공격을 가하게 하거나, 때로는 첩보 활동을 위해 적의 영토에 은밀히 침투하게 했다. 유흑달은 두건덕 휘하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고 전해진다.[2]

4. 당나라에 대한 봉기

622년 1월, 상저우를 함락한 유흑달은 한동왕이라 칭하고 천조(天趙)로 건원했다.[2] 두건덕의 옛 부하들을 등용하여 범원을 좌복야, 동강매를 병부상서, 고아현을 좌령군, 왕소호를 우령군으로 임명하고, 도읍을 명주에 두었다.[2] 당의 총관 뤄스신을 명수에서 격파하여 패사시켰다.[2] 3월,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당의 진왕 이세민과 결전을 벌여 명수에서 대패했고, 유흑달은 범원 등과 함께 돌궐로 도망쳤다.[2]

4. 1. 봉기의 배경

621년, 이세민 진왕(훗날의 당 태종)이 왕세충의 정나라를 공격하여 절박한 상황에 놓이자, 두건덕은 정나라가 멸망하면 자신의 하나라가 고립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낙양을 구원하려 했으나, 호뢰 전투에서 이세민에게 사로잡혔다. 왕세충은 항복했고, 하나라 군대는 제산행(齊善行)의 지휘하에 당나라에 항복했다.[1]

수나라 말기의 주요 봉기와 반란 지도.


두건덕은 당 고조(이세민의 아버지)에 의해 처형되었다. 전 하나라 장군들과 관리들은 당나라 관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처형될 것을 우려하여 봉기를 고려했다. 고아현(高雅賢)의 주도로 점쟁이들로부터 지도자가 유(劉)씨 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정보를 얻고, 유아(劉雅)에게 지도자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하고 살해되었다. 대신 은퇴하여 정원을 가꾸던 유흑달에게 지도자를 제안했고, 그는 이를 수락했다. 621년 가을, 봉기하여 장남을 점령했다. 전 하나라 군인들은 점차 합류했고, 유흑달은 두건덕의 영혼에게 제사를 지내며 하나라 군대가 그를 위해 복수하기 위해 봉기했다고 선언했다. 서원랑은 유흑달에게 복종했다.[1]

당 고조는 회안왕 이신통과 이의 연왕을 보냈으나, 유흑달은 요양(饒陽, 현재의 형수, 허베이성)에서 이신통을 격파하고, 이의도 격파했다. 고개도 연왕과 동돌궐과 동맹을 맺었다. 622년 새해 무렵, 황하 북쪽 지역을 모두 회복했다. 고조는 이세민과 이원길 제왕을 보내 유흑달을 공격하게 했다. 622년 봄, 유흑달은 한동왕 칭호를 주장하고, 두건덕과 같은 방식으로 정부를 조직하여 전 하나라 관리와 장군 대부분을 유지했다. 수도는 명주(현재의 광부)로 정했다.[1]

유흑달은 청하군 장남현(현재의 허베이성 헝수이 시 구청 현의 북동쪽) 출신이다. 어릴 적부터 두건덕에게 돈을 빌려 술과 도박에 썼다. 수나라 대업 말년, 하오샤오더를 따랐고, 이밀을 섬겨 비장이 되었다. 이밀이 패하자 왕세충에게 붙잡혀 마군총관에 임명되어 신샹에 주둔했다. 두건덕이 이연 군의 장수 이적을 회유했을 때, 이적에게 신샹을 공격하게 했고, 이적은 유흑달을 붙잡아 두건덕에게 넘겼다. 두건덕은 유흑달을 장수로 삼아 한동군 공에 봉했다. 유흑달은 무용이 뛰어나고, 척후병을 보내 적군 내부 사정을 파악하여 기습하여 승리했으므로, 군중에서 신용이라 불렸다.[2]

오봉 4년(621년) 호뢰 전투에서 두건덕이 패하자, 유흑달은 고향 장남으로 숨었다. 당 고조 이연이 두건덕의 옛 장수 범원, 동강매, 조담, 고아현, 왕소호 등을 등용하려 했다. 범원 등은 "왕세충이 뤄양을 들어 항복했을 때, 용맹한 장수 양공경, 단웅신 등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지금 우리가 관중에 들어가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우리가 하왕(두건덕)의 복수를 위해 여생을 바친다면, 천하의 의사로 여겨질 것이다"라고 말하며 당에 반역할 것을 결심했다. 점괘에 따라 유씨를 옹립하는 것이 길하다 하여, 먼저 유아를 옹립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대신 유흑달을 옹립했다. 유흑달은 백여 명 병사로 장남을 함락하고, 패이저우 자사 다이위안샹, 웨이저우 자사 취안웨이 등을 격파하여 패사시켰다. 두건덕 옛 장수와 고리들이 잇따라 귀순하고, 군세가 성대해져 대장군을 자칭했다. 당 장수 이선통, 친우통, 왕싱민, 이적 등을 차례로 격파했다. 랴오양의 최원손과 옌저우의 쉬위안랑 등과 연합하고, 북쪽으로는 가오카이도와 돌궐과 연합하여, 두건덕 옛 영토를 모두 회복했다.[2]

4. 2. 봉기 초기 활동

621년, 이세민 진왕(훗날의 당 태종)이 왕세충의 정나라를 공격하여 절박한 상황에 놓이자, 두건덕은 정나라가 멸망하면 자신의 하나라가 고립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군대를 출동시켜 정나라의 수도 낙양을 구원하려 했으나, 호뢰 전투에서 이세민에게 사로잡혔다. 이후 왕세충은 항복했고, 하나라 군대는 관료 제산행(齊善行)의 지휘하에 당나라에 항복했다.

당 고조 (이세민의 아버지)가 두건덕을 처형한 후, 전 하나라 장군들과 관리들은 당나라 관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처형될 것을 우려하여 봉기를 고려했다. 그들은 고아현(高雅賢)의 주도로 유(劉)씨 성을 가진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괘에 따라, 장군 유아(劉雅)에게 지도자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하고, 대신 은퇴하여 정원을 가꾸던 유흑달에게 지도자를 제안하여 수락받았다. 621년 가을, 그들은 공식적으로 봉기하여 장남을 점령했다. 전 하나라 군인들이 합류했고, 유흑달은 두건덕의 영혼에게 제사를 지내며 복수를 위해 봉기했다고 선언했다. 서원랑을 비롯한 다른 농민 지도자들도 유흑달에게 복종했다.[1]

당 고조는 사촌인 회안왕 이신통(李神通)과 당나라 관리 이의 연왕을 보냈으나, 유흑달은 요양(饒陽, 현재의 형수, 허베이성)에서 이신통을 격파하고 이의도 격파하여 명성을 떨쳤다. 그는 다른 농민 지도자 고개도 연왕 및 동돌궐과 동맹을 맺었다. 622년 새해 무렵, 유흑달은 이소상(李孝常, 고조의 사촌의 아들)과 이세적을 격파하고 전 하나라 영토, 즉 황하 북쪽 지역을 모두 회복했다. 고조는 이세민과 이원길 제왕을 보내 유흑달을 공격하게 했다. 한편, 622년 봄, 유흑달은 한동왕 칭호를 주장하고 두건덕과 같은 방식으로 정부를 조직하여 전 하나라 관리와 장군 대부분을 유지했다. 그는 수도를 명주 (현재의 광부)로 정했다.[2]

유흑달은 청하군 장남현(현재의 허베이성 헝수이 시 구청 현의 북동쪽)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두건덕에게 돈을 빌려 술과 도박에 썼다고 한다. 수나라 대업 말년, 하오샤오더를 따랐고, 이밀을 섬겨 비장이 되었다가 이밀이 패하자 왕세충에게 붙잡혀 마군총관에 임명되어 신샹에 주둔했다. 두건덕이 이적을 회유했을 때, 이적에게 신샹을 공격하게 했고, 이적은 유흑달을 붙잡아 두건덕에게 넘겼다. 두건덕은 유흑달을 장수로 삼아 한동군 공에 봉했다. 유흑달은 무용이 뛰어나고 척후병을 보내 적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여 기습하여 승리를 거듭했으므로, 군중에서 신용이라 불렸다.[3]

오봉 4년(621년) 호뢰 전투에서 두건덕이 패하자, 유흑달은 고향 장남으로 숨었다. 이때 당 고조 이연이 두건덕의 옛 장수들을 등용하려 하자, 범원 등은 "왕세충이 뤄양을 들어 항복했을 때, 용맹한 장수 양공경, 단웅신 등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지금 우리가 관중에 들어가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당에 반역할 것을 결심했다. 점괘에 따라 유씨를 옹립하는 것이 길하다 하여, 먼저 유아를 옹립하려 했으나 거절당하고 대신 유흑달을 옹립했다. 유흑달은 백여 명의 병사로 장남을 함락하고, 패이저우 자사 다이위안샹, 웨이저우 자사 취안웨이 등을 격파했다. 두건덕의 옛 장수와 고리들이 잇따라 귀순하고 군세가 성대해져 유흑달은 대장군을 자칭했다. 당의 장수 이선통, 친우통, 왕싱민, 이적 등을 차례로 격파했다. 랴오양의 최원손과 옌저우의 쉬위안랑 등과 연합하고, 북쪽으로는 가오카이도와 돌궐과 연합하여, 두건덕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했다.[4]

무덕 5년(622년) 1월, 상저우를 함락한 유흑달은 한동왕이라 칭하고, 천조로 건원했다. 범원을 좌복야로, 동강매를 병부상서로, 고아현을 좌령군으로, 왕소호를 우령군으로 임명하는 등, 두건덕의 옛 부하들을 등용하고, 도읍을 명주에 두었다. 당의 총관 뤄스신을 명수에서 격파하여 패사시켰다. 3월, 식량이 부족한 채로, 당의 진왕 이세민과 결전을 벌여 명수에서 대패했다. 유흑달은 범원 등과 함께 돌궐로 도망쳤다.

5. 한동국(漢東國) 통치

621년, 이세민 진왕(훗날의 당 태종)이 왕세충의 정나라를 공격하여 절박한 상황에 놓이자, 두건덕은 정나라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면 자신의 하나라가 고립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정나라의 수도 낙양을 구원하려 하였다. 그러나 호뢰 전투에서 이세민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혔다. 이후 두건덕은 당 고조(이세민의 아버지)에 의해 처형되었다.[1]

이후 민간인으로 돌아갔지만 당나라 관리들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하고 자신들 또한 처형될 것을 우려했던 전 하나라 장군들과 관리들은 은밀히 모여 당나라 통치에 대항하여 봉기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들은 고아현(高雅賢)의 주도로 점쟁이들로부터 지도자가 유(劉)씨 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정보를 얻은 후, 유흑달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621년 가을 공식적으로 봉기하였다. 유흑달은 두건덕의 영혼에게 제사를 지내며 하나라 군대가 그를 위해 복수하기 위해 봉기했다고 선언했다.[1]

유흑달은 당나라에 항복했던 서원랑과 연합하고,[1] 사촌인 회안왕 이신통(李神通)과 당나라 관리 이의 연왕을 격파하는 등 연승을 거두었다.[1] 또한 다른 농민 지도자 고개도 연왕과 동돌궐과 동맹을 맺었다.[1] 622년 새해 무렵, 유흑달은 이소상(李孝常, 고조의 사촌의 아들)과 이세적을 격파하고 전 하나라 영토, 즉 황하 북쪽 지역을 모두 회복했다.[1]

622년 봄, 유흑달은 한동왕(漢東王) 칭호를 사용했다.[1] 그는 두건덕과 같은 방식으로 정부를 조직하여 전 하나라 관리와 장군 대부분을 유지했다.[1] 수도는 명주(현재의 광부)로 정했는데, 이곳은 두건덕의 수도와 동일한 위치였다.[1]

무덕 5년(622년) 1월, 상저우를 함락한 유흑달은 한동왕이라 칭하고, 연호를 천조로 정했다.[2] 범원을 좌복야로, 동강매를 병부상서로, 고아현을 좌령군으로, 왕소호를 우령군으로 임명하는 등, 두건덕의 옛 부하들을 등용하고, 도읍을 명주에 두었다.[2]

6. 당나라와의 전쟁 및 최후

622년 여름, 유흑달은 돌궐의 지원을 받아 다시 당나라에 맞섰다. 이예는 유흑달을 막지 못했다. 이세민이 장안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고조는 이도현과 이원길을 보내 유흑달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유흑달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도현을 죽이고, 이전 하나라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다. 이원길은 유흑달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전투를 망설였다.[3]

이건성은 이세민과의 권력 다툼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유흑달과의 전투에 자원했다. 왕규와 위징의 조언에 따라 이건성은 고조에게 직접 군대를 이끌겠다고 요청했고, 고조는 이를 허락했다. 유흑달의 군대는 위주(현대 한단시)를 포위했지만, 이건성과 이원지가 도착하자 식량이 부족해 붕괴되었다. 유흑달은 도망쳤으나, 623년 봄 요주(현재 형수 지역)에서 제갈덕위에게 배신당해 사로잡혔다. 제갈덕위는 연회를 베푸는 척 유흑달을 유인하여 체포한 후 이건성에게 넘겼다.[4]

이건성은 유흑달과 그의 형제 유십선을 명주의 시장에서 처형했다. 유흑달은 죽기 전에 고아현 때문에 자신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탄했다.[4]

6. 1. 이세민과의 전투

이세민(李世民)은 유흑달(劉黑闥)이 거주를 포위하고 있을 때 남쪽에서 도착했다. 이예(李藝)는 북쪽에서 오고 있었고, 두 당(唐)나라 장군은 황하에서 명주를 거쳐 유주(베이징)로 가는 북쪽 길을 점령하여 병력을 합쳐 반군을 돌궐 동맹군으로부터 고립시키려 했다. 유흑달은 병력을 분산시켰다. 그는 낙사신(羅士信)을 사로잡을 수 있었고, 낙사신이 반군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자 처형했다. 그의 군대의 다른 부대는 이예에게 패했다.[1]

결국 당나라와 한동(Handong) 군대는 60일 이상 명수(明河)를 사이에 두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양측은 서로 공격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 동안 이세민은 명강 상류에 댐을 건설했다. 유흑달이 공격하자 이세민은 댐을 파괴하여 한동 군대의 상당수를 수장시켰다. 유흑달은 그의 장군 왕소호(王小胡)와 함께 도망칠 수 있었지만, 한동의 방어는 붕괴되었다. 유흑달은 동돌궐로 도망쳤고, 한동 영토는 당나라 손에 들어갔다.[1]

무덕 5년(622년) 3월, 식량이 부족한 채로, 당의 진왕 이세민과 결전을 벌여 명수에서 대패했다. 유흑달은 범원 등과 함께 돌궐로 도망쳤다.[2]

6. 2. 재기와 패배

이세민은 유흑달이 거주를 포위하고 있을 때 남쪽에서 도착했다. 이예는 북쪽에서 오고 있었고, 두 당나라 군대는 황하에서 명주를 거쳐 유주(베이징)로 가는 북쪽 길을 점령하여 병력을 합쳐 반군을 돌궐 동맹군으로부터 고립시키려 했다. 유흑달은 병력을 분산시켰다. 그는 낙사신을 사로잡았고, 낙사신이 반군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자 처형했다.[1] 그의 군대의 다른 부대는 이예에게 패했다.[1]

결국 당나라와 한동(Handong) 군대는 60일 이상 명수(明河)를 사이에 두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양측은 서로 공격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 동안 이세민은 명강 상류에 댐을 건설했다. 유흑달이 공격하자 이세민은 댐을 파괴하여 한동 군대의 상당수를 수장시켰다. 유흑달은 그의 장군 왕소호와 함께 도망칠 수 있었지만, 한동의 방어는 붕괴되었다. 유흑달은 동돌궐로 도망쳤고, 한동 영토는 당나라 손에 들어갔다.[2]

622년 여름, 유흑달은 돌궐의 지원군과 함께 그 지역으로 돌아오려 했다. 이예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이세민이 이미 그 시점에 장안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고조는 사촌의 또 다른 아들인 회양왕(懷陽王) 이도현을 이원길과 함께 유흑달을 공격하도록 보냈다. 그러나 유흑달의 군대는 전투에서 승리했고, 622년 겨울에 유흑달은 하박(현재 형수 지역)에서 이도현과 교전하여 이도현을 격파하고 죽였다. 반 달 안에 유흑달은 다시 이전 하나라 영토를 모두 회복했다. 이원지는 그의 힘을 두려워하여 그와 교전하는 것을 망설였다.[3]

그 동안 고조의 맏아들인 이건성 태자는 이제 이세민과 격렬한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는데, 이는 이건성의 형으로서 이세민에게 양보하지 않고 그가 스스로 왕위를 찬탈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고조가 다시 이세민을 보내는 것을 고려하자, 이건성은 그의 참모인 왕규와 위징의 제안에 따라 자원했다. 그래서 고조는 그를 보냈다. 한편 유흑달의 군대는 당나라 위주(현대 한단시)를 포위하는 동안 갇히게 되었고, 이건성과 이원지가 도착하자 유흑달의 군대는 식량이 떨어져 붕괴되었다. 유흑달은 도망칠 수 있었지만, 623년 봄에 경비병 100명과 함께 도망치다가 요주(현재 형수 지역)에 도착했을 때, 그의 요주 자사 제갈덕위가 그를 도시로 맞아 연회를 열었다. 그러나 연회 중간에 제갈은 그와 그의 경비병을 기습하여 사로잡아 이건성에게 넘겼다. 이건성은 유흑달과 그의 형제 유십선을 그의 옛 수도 명주의 시장에서 처형했다. 죽기 전에 유흑달은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4]

> 나는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고아현이 이끄는 사람들이었다.[4]

무덕 5년(622년) 1월, 상주를 함락한 유흑달은 한동왕이라 칭하고, 천조로 건원했다. 범원을 좌복야로, 동강매를 병부상서로, 고아현을 좌령군으로, 왕소호를 우령군으로 임명하는 등, 두건덕의 옛 부하들을 등용하고, 도읍을 명주에 두었다. 당의 총관 낙사신을 명수에서 격파하여 패사시켰다. 3월, 식량이 부족한 채로, 당의 진왕 이세민과 결전을 벌여 명수에서 대패했다. 유흑달은 범원 등과 함께 돌궐로 도망쳤다.

6월, 유흑달은 돌궐의 군사를 빌려 다시 공격하여, 당의 회양왕 이도현과 원국공 스완바오 등을 격파했다. 하베이를 다시 회복하고, 또한 명주를 도읍으로 삼았다. 12월, 당의 황태자이건성·제왕 이원길의 군대와 관타오에서 싸워 대패했다. 천조 2년(623년), 랴오양으로 도망갔다가 제갈덕위에게 붙잡혀 이건성에게 보내져, 동생 유십선과 함께 명주에서 참수되었다.

참조

[1] 서적 Xin Tang Shu
[2] 간행물 Old Book of Tang, Vol. LV http://ef.cdpa.nsysu[...] 2007-10-11
[3] 간행물 New Book of Tang, Vol. LXXXVI http://ef.cdpa.nsysu[...] 2008-02-10
[4] 간행물 "Zizhi Tongjian, Vol. CLXXXV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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