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베르투스 2세 스폴레텐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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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람베르투스 2세 스폴레텐시스는 9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군주로, 스폴레토의 귀도 3세와 아젤트루데 디 베네벤토의 아들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공동 통치자였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교황으로부터 황제 칭호를 인정받았으나, 교황과의 갈등과 아르눌프의 침공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람베르투스는 교황 포르모소의 시신을 재판에 회부하는 등 격동의 시기를 보냈으며, 898년 사냥 중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 이탈리아는 여러 세력의 다툼으로 혼란에 빠졌으며, 람베르투스는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스폴레토 공작위는 동생 귀도 4세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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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베르투스 2세 스폴레텐시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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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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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이탈리아 왕 로마 황제 |
재위 | 891년–898년 |
대관식 | 892년 4월 30일, 라벤나 |
선임자 | 귀도 3세 디 스폴레토 |
후임자 | 아르눌프 폰 케른텐 |
왕가 | 기데스키 |
아버지 | 귀도 3세 디 스폴레토 |
어머니 | 아겔트루데 디 베네벤토 |
출생일 | 880년경 |
사망일 | 898년 10월 15일 |
사망지 | 스피네타마렝고, 이탈리아 |
매장지 | 피아첸차 |
작위 | |
로마 황제 | 891년–898년 |
이탈리아 왕 | 891년–898년 |
스폴레토 공작 | 894년–898년 |
카메리노 변경백 | 894년–898년 |
가문 | |
왕조 | 비도네 가문 |
2. 생애
람베르투스는 귀도 다 스폴레토와 아젤트루데 디 베네벤토의 아들이다.[18] 아버지 귀도는 891년 교황 스테파노 5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으며[19], 같은 해 람베르투스 역시 교황으로부터 아버지와 공동 이탈리아 왕으로 인정받았다.
891년 스테파노 5세가 사망하고 포르모소가 새 교황이 되었다. 892년, 교황 포르모소는 아버지 귀도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람베르투스를 공동 황제로 인정했다.[19] 그러나 포르모소는 스폴레토 가문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여 893년 동프랑크 왕국의 아르눌프에게 황제위를 제안하며 이탈리아 개입을 요청했다. 아르눌프는 서자 츠벤티볼트와 프리울리 변경백 베렌가리오를 보냈으나 실패했고, 894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하여 이탈리아 왕으로 인정받았다.
같은 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람베르투스가 단독 황제이자 이탈리아 왕위를 계승했다. 아직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아젤트루데가 섭정이 되었다. 아젤트루데는 아들의 황제관을 공인받기 위해 로마로 향했으나, 아르눌프를 지지하던 교황 포르모소에 의해 산탄젤로 성에 감금되었다.
896년 아르눌프는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 포르모소를 구출했으며, 포르모소는 아르눌프를 황제로 대관했다. 아르눌프는 스폴레토를 공격하던 중 뇌경색으로 쓰러져 본국으로 돌아갔다.[19] 896년 4월 교황 포르모소가 사망하자, 아젤트루데는 스테파노 6세를 새 교황으로 내세웠다. 897년 스테파노 6세는 이미 사망한 포르모소 교황의 시신을 법정에 세우는 악명 높은 시체 재판을 열었고, 유죄 판결 후 시신을 테베레 강에 버렸다.[20]
898년 교황 요한 9세는 아르눌프의 황제 대관을 무효로 선언하고 람베르투스를 지지했다. 그러나 같은 해 람베르투스는 사냥 중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공동 황제 즉위
람베르투스 2세는 구이도 3세와 베네벤토 공작 아델히스의 딸인 아겔트루데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샤를마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증조모 롬바르디아의 아델라이드는 샤를마뉴의 아들 피피노 카를로만의 딸이었고, 작은할아버지 낭트의 람베르토 3세의 부인 로틸데는 중프랑크 왕국의 황제 로타르 1세의 딸이었다. 비록 샤를마뉴의 직계 계승권에서는 멀었지만, 아버지 구이도 3세가 888년 12월 이탈리아 귀족들에게 왕으로 추대되고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까지 받으면서, 람베르투스는 자연스럽게 공동 황제이자 유력한 황위 계승자가 되었다.
아버지 구이도 3세는 889년 이탈리아 파비아에서 귀족들에 의해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어린 람베르투스는 같은 해 5월에 제국 및 이탈리아 왕국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구이도 3세는 아들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교황에게 람베르투스의 축성과 제관 수여를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891년 5월, 구이도 3세는 파비아에서 람베르투스를 공동 황제로 선포했으며[1], 같은 해 교황 스테파노 5세는 람베르투스를 아버지와 함께 공동 이탈리아 왕으로 인정하고 축성했다.[19] 그러나 그 해 스테파노 5세가 사망하고 교황 포르모소가 새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892년 4월 30일, 람베르투스와 아버지 구이도 3세는 라벤나로 가서 교황 포르모소에게 공동 황제로서의 제관 수여를 요구했다. 포르모소는 스폴레토 가문의 압력에 마지못해 람베르투스를 공동 황제로 인정했지만[2][19], 이는 마지못한 결정이었다. 부자는 교황에게 피핀의 기증과 같은 영토 헌납을 약속했지만 거절당했고, 대신 카롤링거 왕조가 교황에게 했던 기증을 재확인하는 조약을 체결했다.[3]
하지만 교황 포르모소는 스폴레토 가문의 세력 확장을 경계했다. 893년, 포르모소는 레겐스부르크에 사절을 보내 동프랑크 왕국의 카린티아의 아르눌프에게 황제관을 제안하며 이탈리아 개입을 요청했다.[4][19] 아르눌프는 아들 즈벤티볼트에게 바이에른 군대를 이끌고 프리울리의 베렌가르 1세와 합류하도록 지시했다.[2] 이 연합군은 구이도 3세에게 패배했고, 뇌물 수수와 군대 내 발열 문제로 인해 그 해 가을 철수했다.[5]
2. 2. 교황과의 갈등과 아르눌프의 침공

892년 4월 30일 라벤나에서 아버지 구이도 3세는 군사적 압력을 통해 교황 포르모소로 하여금 람베르토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키도록 강요했다.[2][19] 이는 교황이 처음에 람베르토의 공동 황제 즉위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구이도 3세와 람베르토는 교황에게 피핀의 기증과 이후 카롤링거 왕조의 교황령 기증을 확인하는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3]
그러나 포르모소 교황은 스폴레토 가문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여[5], 비밀리에 동프랑크의 국왕 아르눌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893년 교황은 레겐스부르크로 사절을 보내 아르눌프에게 이탈리아를 해방시키고 로마로 와 황제관을 쓸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4] 이에 아르눌프는 아들 츠벤티볼트에게 바이에른 군대를 이끌고 프리울리의 베렝가리오 1세와 합류하도록 했으나,[2] 구이도 3세의 뇌물과 군대 내 발병(發病)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 없이 그해 가을 동프랑크로 물러났다.[5]
894년 초, 아르눌프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포 강 이북 지역을 정복했다. 그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왕으로 인정받기도 했으나, 그해 11월 말 공동 황제였던 구이도 3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진군을 멈췄다.[5]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단독 황제이자 이탈리아 왕이 된 람베르토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확고한 반(反)독일 성향의 어머니 아젤트루데가 섭정을 맡았다. 구이도 3세가 사망하자 경쟁자였던 베렝가리오 1세가 롬바르디아의 수도 파비아를 점령했지만, 람베르토는 어머니와 측근들의 지원으로 베렝가리오 군대를 다시 몰아냈다.
람베르토와 아젤트루데는 교황에게 황제 칭호를 인정받기 위해 로마로 향했으나, 그 사이 베렝가리오 1세가 다시 파비아를 점령했다.[5] 교황 포르모소는 여전히 아르눌프를 지지하며 람베르토 모자를 산탄젤로 성에 감금했다.
895년 10월, 아르눌프는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을 시작하여 알프스 산맥을 빠르게 넘어 파비아를 점령했다. 람베르토가 전투를 피하는 사이, 아르눌프는 토스카나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했으며, 초기 람베르토를 도왔던 아달베르토 2세마저 아르눌프에게 합류했다.[5]
896년 2월 21일, 아르눌프는 로마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교황 포르모소를 해방시켰다.[6] 포르모소는 아르눌프를 황제이자 왕으로 즉위시키고 람베르토를 폐위했다. 아르눌프는 람베르토와 아젤트루데가 도피한 스폴레토로 진군했으나, 도중에 뇌졸중(또는 뇌경색)[19]으로 쓰러져 원정을 중단하고 동프랑크로 돌아가야 했다.[7]
같은 해 4월 교황 포르모소가 사망하면서 람베르토는 다시 권력을 잡을 기회를 얻었다. 이후 람베르토의 어머니 아젤트루데의 영향력 아래 새 교황 스테파노 6세가 선출되었고, 897년에는 이미 사망한 포르모소 전 교황의 시신을 꺼내 재판하는 시체 재판이 열렸다.[20] 이는 포르모소에 대한 정치적 보복의 성격을 띠었다.
898년 교황 요한 9세는 라벤나에서 시노드를 열어 아르눌프의 대관을 무효로 선언하고 람베르토의 황제 지위를 재확인하며 지지를 표명했다.
2. 3. 시체 재판과 복권
896년 4월 4일 교황 포르모소가 병으로 사망하자[19], 아르눌프에 의해 황제관을 빼앗긴 것에 분개한 람베르토 2세와 그의 어머니 아겔트루데는 복수를 계획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이용해 교황 스테파노 6세를 교황으로 옹립하고[9], 그를 설득하여 이미 사망한 교황 포르모소에 대한 재판을 열도록 했다.[20]897년, 교황 스테파노 6세는 교황 포르모소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 교황의 옷을 입히고 재판정에 세웠다.[10][20] 심판관들이 죄를 물으면 포르모소 시신 뒤에 있는 인물이 시신의 손가락을 움직여 죄를 자백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이 재판은 역사상 "시체 재판"으로 알려져 있다.[20] 재판 결과, 교황 스테파노 6세는 교황 포르모소의 교황 선출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그가 생전에 내린 교회 훈령과 성직자 임명을 모두 무효화했다. 재판이 끝난 후, 포르모소의 시신은 교황 옷이 벗겨지고 손가락이 잘리는 등 훼손된 뒤 로마 시내를 끌려다니다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10][20]
그러나 898년 1월, 로마에서 정변이 일어나 교황 스테파노 6세가 폐위되고, 교황 요한네스 9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요한네스 9세는 즉위 직후 로마와 라벤나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황 포르모소를 복권시켰다.[12] 공의회는 시체 재판과 교황 스테파노 6세의 결정들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관련 교령들을 모두 파기했으며, 스테파노 6세에 의해 폐위되었던 성직자들도 복권시켰다.
898년 2월, 람베르토 2세는 라벤나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했다. 70명의 주교가 참석한 이 회의에서 람베르토는 891년 자신의 즉위가 정당했음을 강조하고, 아르눌프의 황제 대관은 무효이며 자신의 황제 지위가 유효함을 재확인받았다.[11] 또한, 의회는 교황 요한네스 9세의 선출을 합법으로 인정하고 교황 포르모소의 복권을 확인했다.[12] 특히 람베르토에게 중요했던 것은 로타르 1세의 ''Constitutio Romana''(824년)를 재확인하여, 교황 선출 시 황제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명시한 것이었다.[11]
2. 4. 통치와 암살
람베르토 2세는 아버지 구이도 3세의 '프랑크 왕국의 부흥'(Renovatio Francorum) 정책과 선대 프랑크 왕들의 법령을 계승하였다. 그는 824년 프랑크 황제 로타르 1세의 로마 헌장(Constitutio Romana) 부활을 선언했으며, 교황 요한네스 9세는 이를 다시 승인하여 교황 선출 시 황제 사절의 의무적 참석을 확정하였다. 898년 초, 람베르토는 아버지 구이도의 정책을 명문화한 우티넨의 로마법(''Lex Romana Utinensis'')을 제정했는데, 이 법은 아리만니(arimanni)가 봉토 조성을 위해 제공해야 하는 용역 착취를 금지하는 내용도 포함했다. 또한 그는 프랑크식 사무총감을 발령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한 마지막 통치자였다.895년 5월, 람베르토는 케른텐의 아르눌프가 받은 황제관 수여가 무효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북동부에서는 여전히 베렝가리오 1세의 세력이 강했으며, 토스카나의 반항적인 아달베르토와도 대립해야 했다.[14] 아르눌프가 독일로 돌아간 후, 람베르토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탈리아 북동부와 중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탈리아를 장악했다. 그는 파비아를 다시 점령하고 아르눌프에게 가담했던 밀라노의 마그니프레드 1세를 참수했다. 896년 10월과 11월, 그는 파비아 외곽에서 베렝가리오 1세를 만나 왕국 분할에 합의했다. 베렝가리오는 아다 강과 포 강 사이의 영토를, 람베르토는 나머지를 차지하기로 했으며, 베르가모는 공유했다. 이는 889년의 현상 유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8] 람베르토는 또한 베렝가리오의 딸 기젤라와 결혼할 것을 약속했다. 후대의 연대기 작가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는 이 분할로 인해 이탈리아인들이 항상 두 명의 군주 아래에서 고통받았다고 언급했다.
897년 초, 람베르토는 어머니 아젤트루데, 그리고 귀도 4세와 함께 로마로 가서 자신의 황제 칭호를 재확인받았다.[9] 복수심에 불탄 람베르토와 아젤트루데는 그들의 영향력으로 선출된 교황 스테파노 6세를 설득하여, 이미 사망한 전임 교황 포르모수스의 시신을 여러 범죄 혐의로 재판에 회부하도록 했다. 교황 예복이 벗겨지고 훼손된 시신은 악명 높은 '시체 시노드' 이후 테베레 강에 버려졌다.[10]
898년 1월, 교황 요한 9세는 람베르토와 아젤트루데의 의사에 반하여 포르모수스를 복권시켰다. 이에 람베르토는 2월 라벤나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70명의 주교가 모여 891년 조약의 유효성, 아르눌프의 대관식 무효, 람베르토의 황제 칭호 유효성을 확인했다.[11] 또한 요한 9세의 선출을 합법화하고 포르모수스의 복권을 확인했다.[12] 람베르토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로타르 1세의 ''Constitutio Romana''(824년)를 재확인하여, 교황 선거에 황제의 참석을 요구하는 조항을 부활시킨 것이었다.[11] 그의 통치는 897년 라델키스 2세 공작의 복귀 이후 베네벤토에서도 인정받았다.[13]
898년 초가을, 그는 베렝가리오 1세와 교전했으나 패배했다. 하지만 베렝가리오는 파비아 남쪽으로 진격하지 못했고, 이탈리아 중남부는 여전히 람베르토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같은 해, 토스카나의 아달베르토가 파비아로 진군했다. 밀라노 남쪽 마렝고 근처에서 사냥 중이던 람베르토는[15] 이 소식을 듣고 피덴차 근처 보르고 산 도니노에서 아달베르토를 기습하여 격파하고 포로로 잡아 파비아로 압송했다.
그러나 898년 10월 15일, 람베르토는 마렝고로 돌아오는 길(또는 사냥 중)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크레모나의 주교 리우트프란트는 마기눌프의 아들 우고가 보낸 자객에 의해 말 위에서 떨어져 암살되었다고 기록했다. 리우트프란트는 또한 그가 단순히 말에서 떨어져 사고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람베르토는 피아첸차에 묻혔다. 리우트프란트는 그를 "우아한 젊은이이자 엄격한 남자"(''elegans iuvenis'' 및 ''vir severus'')로 기억했다. 그의 비문은 다음과 같이 새겨졌다.
라틴어 원문 | 한국어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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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ine præcipuō Francōrum germinis ortus Lambertus fuit hīc Caesar in Urbe potēns Alter erat Cōnstantīnus, Theodōsius alter Et prīnceps pācis clārus amōre nimis | 프랑크족의 뛰어난 혈통으로 태어난, 람베르투스는 여기, 도시(로마)에서 권력을 잡은 황제였다; 그는 또 다른 콘스탄티누스였고, 또 다른 테오도시우스였으며, 사랑으로 매우 유명한 평화의 군주였다. |
람베르토의 사후 스폴레토 공작위는 가이 4세가 계승했지만, 이탈리아 왕국과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는 여러 경쟁자들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16] 며칠 지나지 않아 베렝가리오 1세는 파비아를 점령했다.
3. 가족 관계
참조
[1]
문서
Carpegna Falconi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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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Comy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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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the Italian Republics in the Middle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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