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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카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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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프 카라한은 트빌리시 출신의 혁명가이자 외교관으로, 러시아 혁명에 참여하여 외무 인민위원 대리, 폴란드 및 중국 대사 등을 역임했다. 1917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여 혁명군사회의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에 참여했다. 그는 1919년과 1920년 두 차례에 걸쳐 카라한 선언을 발표하여 소련의 대(對)중국 외교 정책을 제시했다. 스탈린 시대의 대숙청으로 1937년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나, 1956년 명예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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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카라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레프 카라한
레프 카라한
본명레본 미카엘리 카라하냔 (Լևոն Միքայելի Կարախանյան)
로마자 표기Rebon Mikaelli Karahanyan
러시아어 표기레프 미하일로비치 카라한 (Лев Михайлович Карахан)
출생1889년 1월 20일
출생지러시아 제국 트빌리시 트빌리스 현
사망1937년 9월 20일
사망지소련 모스크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적러시아 제국(1889–1917) / 소련(1917–1937), 아르메니아인
직업외교관
경력
활동 기간1904년–1937년
분야혁명가, 언론인, 외교관
정당
소속 정당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멘셰비키) (1904–1917) / 러시아 공산당 (1917–1937)
주요 활동
수상
훈장몽골 적기훈장
외교 경력
임기1921년 5월 30일 – 1922년 10월 9일
이전이반 아시
이후레오니트 오볼렌스키
임기1923년 9월 – 1926년 9월 10일
이전아돌프 이오페
이후프리드리흐 린데
임기1934년 6월 29일 – 1937년 5월 7일
이전야코프 수리츠
이후미하일 카르스키

2. 경력

카라한은 트빌리시 출신으로, 1917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혁명군사회의 의원으로서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는 블라디미르 레닌 지도하에 외무 인민위원 대리 (외무 차관)를 역임했다.

1919년 7월에는 제1차 카라한 선언을 베이징 정부 및 광둥 정부에 발신하고, 1920년 9월에는 제2차 카라한 선언을 베이징 정부가 파견한 장 외교 사절단과 교환하여, 소련 정부의 중화민국 (중국)에 대한 새로운 외교 정책을 제시했다.

1921년 폴란드 대사,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하며 소련의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담당했다. 주중 대사 시절인 1925년에는 일본(대일본제국)과 일소 기본 조약을 체결했다.

1927년부터 1934년까지 다시 외무 인민위원 대리가 되어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 인민위원 밑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한 대숙청 시대에 1937년 체포·처형되었다. 이후 1956년에 명예가 회복되었다.

2. 1. 초기 생애

트빌리시 출신이다.

1917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같은 해 10월, 카라한은 혁명군사회의 의원으로서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다. 러시아 내전과 간섭 전쟁을 거쳐 블라디미르 레닌 지도하의 볼셰비키 지배가 확립되어 가는 1918년부터 1920년에 걸쳐 외무 인민위원 대리 (외무 차관)를 역임했다. 1917년부터 1918년에 걸쳐 인민위원 (외무 대신)인 레프 트로츠키, 혹은 아돌프 요페와 함께 독일 제국 등과의 사이에 행해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에서의 소비에트 대표단에 참가하여 그 서기를 맡았다.

2. 2. 정치 입문

1917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같은 해 10월, 카라한은 혁명군사회의 의원으로서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다. 러시아 내전과 간섭 전쟁을 거쳐 블라디미르 레닌 지도하의 볼셰비키 지배가 확립되어 가는 1918년부터 1920년에 걸쳐 외무 인민위원 대리 (외무 차관)를 역임했다. 1917년부터 1918년에 걸쳐 인민위원 (외무 대신)인 레프 트로츠키, 혹은 아돌프 요페와 함께 독일 제국 등과의 사이에 행해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에서의 소비에트 대표단에 참가하여 그 서기를 맡았다. 1919년 7월에 제1차 카라한 선언을 베이징 정부 및 광둥 정부에 발신하고, 1920년 9월에 제2차 카라한 선언을 베이징 정부가 파견한 장 외교 사절단과 교환했다. 이 두 선언을 통해 소련 정부는 중화민국 (중국)에 대한 새로운 외교 정책을 제시했다.

2. 3. 혁명 참여

1917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으며, 같은 해 10월 혁명군사회의 의원으로서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다. 러시아 내전과 간섭 전쟁을 거쳐 블라디미르 레닌 지도하의 볼셰비키 지배가 확립되어 가는 1918년부터 1920년에 걸쳐 외무 인민위원 대리 (외무 차관)를 역임했다. 1917년부터 1918년까지 인민위원(외무 대신) 레프 트로츠키 또는 아돌프 요페와 함께 독일 제국 등과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 협상에서 소비에트 대표단의 서기를 맡았다.

2. 4. 외교 활동

카라한은 1917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후 외교 분야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외무인민위원 대리(외무 차관)를 역임하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에 참여하고, 중국에 대한 새로운 외교 정책을 제시하는 카라한 선언을 발표했다.

1921년 폴란드 대사,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중화민국(중국) 대사를 역임하며 소련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특히 주중 대사 시절에는 일본(대일본제국)과 일소 기본 조약을 체결하여 양국 관계 정상화에 기여했다.

1927년부터 1934년까지는 다시 외무 인민위원 대리가 되어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 인민위원 밑에서 일했다.

2. 4. 1. 초기 외교 활동 (1918-1920)

1917년 10월, 카라한은 혁명군사회의 의원으로서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다. 러시아 내전과 간섭 전쟁을 거쳐 블라디미르 레닌 지도하의 볼셰비키 지배가 확립되어 가는 1918년부터 1920년에 걸쳐 외무 인민위원 대리 (외무 차관)를 역임했다. 1917년부터 1918년에 걸쳐 인민위원 (외무 대신)인 레프 트로츠키, 혹은 아돌프 요페와 함께 독일 제국 등과의 사이에 행해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조약에서의 소비에트 대표단에 참가하여 그 서기를 맡았다. 1919년 7월에는 제1차 카라한 선언을 베이징 정부 및 광둥 정부에 발신하고, 1920년 9월에는 제2차 카라한 선언을 베이징 정부가 파견한 장 외교 사절단과 교환했다. 이 두 선언을 통해 소련 정부는 중화민국 (중국)에 대한 새로운 외교 정책을 제시했다.

2. 4. 2. 폴란드 대사 (1921)

1921년에 카라한은 폴란드 대사로 임명되어, 소련의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국가와의 관계 강화를 담당했다.

2. 4. 3. 중국 대사 (1923-1926)

카라한은 1923년부터 1926년까지 중화민국(중국) 주재 소련 대사로 파견되어 소련의 대중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주중 대사 기간 중인 1925년에는 일본(대일본제국)과 일소 기본 조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

2. 4. 4. 외무 인민위원 대리 재임 (1927-1934)

1927년부터 1934년까지 카라한은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 인민위원 밑에서 외무 인민위원 대리로 일했다. 이 시기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권력이 강화되던 때였다. 카라한은 스탈린 체제 하에서 외교 정책을 수행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결국 대숙청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2. 5. 숙청과 사망

1927년부터 1934년까지 카라한은 외무 인민위원 대리(외무 차관)로서 외무 인민위원 막심 리트비노프 밑에서 일했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의 독재가 강화되면서 대숙청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카라한은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37년 카라한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3]

1956년에 카라한은 명예가 회복되었다.[3]

2. 6. 사후 복권

Лев Михайлович Карахан|레프 미하일로비치 카라한ru은 1956년에 명예가 회복되었다.[1]

3. 카라한 선언

레프 카라한이 1919년 7월과 1920년 9월 두 차례에 걸쳐 외무 인민 위원 대리로서 소련 정권의 대(對)중국 기본 정책을 발표한 선언이다. 1차 문서는 '중국 인민 및 중국 남북 양 정부에 대한 성명'(제1차 카라한 선언), 2차 문서는 '외무 인민 위원부의 중국 정부에 보내는 중소 협정 조항'(제2차 카라한 선언)이라고 부른다.

이 선언들은 러시아 제국청나라와 맺고 중화민국이 계승한 불평등 조약베이징 조약 등의 즉시·무조건 철폐를 표명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에 보내진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과 소련 측에서 발표된 내용에 차이가 있었고, 동청 철도에 관한 권익 포기 내용이 소련 측 발표 문서에는 누락되어 있었다. 제2차 카라한 선언은 베이징 정부와만 주고받았으며, 동청 철도에 관한 권익 포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 두 선언은 중국 민중의 소련 정권과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공감을 넓혔고, 중국 언론계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1. 제1차 카라한 선언 (1919)

1919년 7월, 레프 카라한은 외무 인민 위원 대리로서 소련 정권의 대(對)중국 기본 정책을 담은 선언을 발표했는데, 이를 제1차 카라한 선언이라고 한다. 이 선언은 '중국 인민 및 중국 남북 양 정부에 대한 성명'이라고도 불린다.

제1차 카라한 선언은 베이징 정부와 광둥 정부에 전달되었으며, 러시아 혁명 직후 레닌의 선언 취지를 계승하여 러시아 제국청나라와 맺고 중화민국이 계승한 불평등 조약베이징 조약 등의 즉시·무조건 철폐를 표명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에 보내진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과 소련 측에서 발표된 내용에는 차이가 있었는데, 소련 측 발표 문서에는 동청 철도에 관한 권익 포기가 누락되어 있었다.

이 선언으로 중국 민중은 소련 정권과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와 공감을 넓혔고, 중국 언론계의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몽골 문제 등으로 소련 정권과 대립하던 베이징 정부를 흔들었다. 또한 베이징 정부와 대항하던 쑨원에게 소련과의 관계 강화를 촉구하여 1924년 제1차 국공 합작으로 이어지는 기반이 되었다.

3. 2. 제2차 카라한 선언 (1920)

1919년 7월과 1920년 9월, 레프 카라한은 외무 인민 위원 대리로서 소련 정권의 대(對)중국 기본 정책을 담은 두 차례의 선언을 발표했다. 1차 문서는 '중국 인민 및 중국 남북 양 정부에 대한 성명'(제1차 카라한 선언), 2차 문서는 '외무 인민 위원부의 중국 정부에 보내는 중소 협정 조항'(제2차 카라한 선언)으로 불린다.

제2차 카라한 선언은 북경 정부와만 주고받았지만, 동청 철도에 관한 권익 포기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제1차 선언에서 러시아 제국청나라와 맺고 중화민국이 계승한 불평등 조약인 북경 조약 등의 즉시·무조건 철폐를 표명했던 것과는 다른 점이다. 다만, 제1차 선언도 중국 정부에 보내진 내용과 소련 측 발표 내용에 차이가 있어, 소련 측 발표 문서에는 동청 철도 관련 권익 포기가 누락되어 있었다.

이 두 선언은 중국 민중의 소련 정권과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공감을 넓혔고, 중국 언론계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몽골 문제 등으로 소련 정권과 대립하던 북경 정부를 흔들었다. 북경 정부에 대항하던 광동 정부 지도자 쑨원에게는 소련과의 관계 강화를 촉구하여 1924년 제1차 국공 합작의 기반이 되었다.

3. 3. 역사적 의의

1919년 7월과 1920년 9월, 레프 카라한이 외무 인민 위원 대리 시절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한 소련 정권의 대(對)중국 기본 정책 선언(카라한 선언)은 중국 민중의 소련 정권과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와 공감을 넓혔고, 중국 언론계의 여론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1] 카라한 선언은 몽골 문제 등으로 소련 정권과 대립하던 북경 정부를 흔들었다.[1] 또한 북경 정부와 대항하던 광동 정부 지도자 쑨원에게 소련과의 관계 강화를 촉구하여 1924년 제1차 국공 합작으로 이어지는 기반이 되었다.[1]

참조

[1] 서적 The Soviet Union and the Threat from the East, 1933-41: Volume 3: Moscow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1992
[2] 서적 One Who Survived Putnam 1945
[3] 서적 Memoirs of a British Agent https://archive.org/[...] Putnam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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