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A. 하디
1. 개요
로버트 A. 하디는 캐나다 출신의 의료 선교사로, 1890년 한국에 파견되어 제중원 임시 원장으로 활동했다. 부산, 원산을 거치며 선교 활동을 펼쳤고, 1898년 미국 남감리교회에 합류하여 개성에 의료 진료소를 설립하려 했으나 서울로 이주했다. 1903년 원산 부흥 운동을 촉발하여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신학 교육과 저술 활동에도 힘썼다. 1935년 은퇴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194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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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로버트 알렉산더 하디 |
|---|---|
| 출생 | 1865년 6월 11일 |
| 출생지 | 핼디먼드 군, 온타리오 주, 캐나다 |
| 사망 | 1949년 6월 30일 |
| 사망지 | 랜싱, 미시간 주, 미국 |
| 국적 | 캐나다인 |
| 직업 | 선교사 및 의사 |
| 활동 기간 | 1890년–1935년 |
| 알려진 업적 | 원산 부흥 운동, 평양 대부흥 |
| 배우자 | 켈리 가문의 마거릿 "마틸다" 하디 (1886년 결혼) |
| 한국어 이름 (한글) | 하리영 |
| 한국어 이름 (로마자 표기) | Ha Riyeong |
| 학력 | 토론토 의과대학, 의학 학사 (M.B.), 18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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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기독교 선교사 -
제임스 게일
제임스 게일은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이자 교육자, 번역가로, 한국에서 성경 번역, 사전 편찬, 문학 작품 번역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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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셔우드 홀은 한국 여성 교육과 의료 발전에 헌신한 미국의 의료 선교사이자 교육자로, 볼드윈 진료소 설립, 시각 및 청각 장애인 교육, 조선 여성 의학 훈련원 설립 등의 업적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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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은 캐나다의 최장수 총리로서 세 차례에 걸쳐 총리직을 역임하며 관세 인하, 자치권 확대, 노인 연금 도입,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캐나다 복지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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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이그나티에프는 캐나다의 저명한 역사가, 소설가, 정치인이자 국제적 지식인으로, 인권, 국제 관계, 국가 건설에 관한 저술 활동과 하버드 케네디 스쿨 교수, 그리고 캐나다 연방 하원의원을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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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연세대학교 설립자이자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로, 1885년 한국에 입국하여 새문안교회와 경신학교를 설립하고 YMCA 창설, 성서 번역, 한국어 연구, 독립운동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가족 또한 한국에서 교육 및 의료 사업에 헌신하였다.
2. 출생과 교육
1865년 6월 11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할디만에서 스코틀랜드계 부모에게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삼촌 부부의 손에서 자랐으며, 할디만 카운티의 세네카에서 학교를 다녔다. 1884년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2년간 세네카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1886년 토론토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며, 같은 해 12월 27일 온타리오주 해밀턴 출신의 마가렛 "마틸다" 켈리와 결혼했다. 토론토 의과대학 재학 중 학생자원운동(SVM)과 제임스 스카스 게일의 영향으로 해외 선교사의 길을 결심했다. 1890년 토론토 대학교에서 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3. 초기 선교 활동 (1890-1900)
1890년 여름, 하디는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이주했다. 토론토 대학교 의과대학생 YMCA(MS-YMCA)는 그 후 8년 동안 그의 사업을 지원했다. 제중원에서 의사로 잠시 일한 후, 1891년 4월 14일 부산으로 이주하여 의료 진료소를 운영했다. 1892년에는 가족의 건강 문제로 잠시 나가사키로 이주했다가 그해 늦게 부산으로 돌아왔다.
제임스 스카스 게일이 미국 장로교 선교부에 합류하면서, 하디의 제안으로 MS–YMCA와 UC–YMCA는 캐나다 대학 선교회(CCM)를 결성했고, 하디는 한국에서 그들의 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부산에서 다른 선교사들과의 경쟁, 토론토의 제한적인 지원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자, 1892년 11월 원산으로 선교부를 옮겼다. 원산에서 하디는 농업, "소 먹이기와 과일 재배"로 생계를 보충했다.
1896년 7월, 하디는 가족을 캐나다로 이주시키고 1897년 10월 혼자 원산으로 돌아왔다. 1898년, 게일이 서울로 이주했고, 하디는 CCM과의 지원 계약이 종료되자 미국 남감리교회에 합류했다.
3.1. 제중원 시절 (1890-1891)
1890년 말부터 1891년 초까지 6개월 동안 서울에 있는 제중원(왕립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했다. 당시 제중원 원장이었던 존 헤론이 사망한 직후였고, 후임 빈톤이 오기 전까지 임시 원장직을 수행했다.
4. 원산 부흥운동과 평양 대부흥운동 (1903-1907)
1900년 이후, 하디는 의료 활동을 중단하고 선교 사업에 집중했다. 1902년부터 1909년까지 원산과 강원도 사람들에게 개종하는 임무를 맡았다. 1903년 8월, 중국에서 온 모세 클라크 화이트 등 다른 선교사 6명과 성경 공부를 하면서, 하디는 기도와 성령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누가복음 11장 13절을 읽고 강원도에서의 개종 노력에 대한 실망감을 고백했다. 이후 북한 전역의 더 큰 회중들과의 모임에서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이는 서구 선교사들과 한국인 모두에게 영향을 주어 수천 명의 교인들이 기독교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했다.
하디의 고백은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에 영감을 준 원산 부흥 운동의 촉매가 되었다. 강원도에서 전도 실패에 대한 "굴욕감"을 표현한 것은 역설적으로 전국적인 종교적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1901년부터 1909년까지 약 10만 명의 한국인이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했다. 알프레드 와슨은 1934년 한국의 교회 성장에서 "\[부흥 운동은] 한국 교회 전체의 삶에서 두드러진 특징이 될 때까지 퍼져나갔고, 세계의 먼 곳에서도 널리 언급되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는 R. A. 하디 목사였다."라고 썼다.
4.1. 원산 부흥운동 (1903)
1903년 8월, 원산에서 열린 선교사 사경회에서 하디는 자신의 선교 실패와 교만을 회개하고 성령 체험을 했다. 그는 선교 실적 부진으로 인한 실망감과 피로감으로 지쳐 있었으나, 사경회를 인도하는 중 선교 실패의 원인이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따르지 않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였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하디는 한국인 회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했고, 이는 한국 교인들의 회개 운동을 촉발했다.
9월 초 하디가 인도한 원산교회 직원 부흥회, 10월에 원산을 방문한 미국 스칸디나비아선교회 지도자 프랜슨(F. Franson)이 인도한 부흥회 등에서 교인들의 공개 자복이 나타났다. 당시 교인들이 자복한 죄는 주로 횡령, 절도, 간음, 위선, 미움, 증오, 질투와 같은 윤리적인 내용이었다. 미워하고 증오했던 교인들 사이에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졌고, 과거에 훔치거나 횡령한 것을 보상하거나 배상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김화 새술막교회 윤성근(일명 윤승근) 전도사는 원산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과거 회사(정부) 돈을 사용했던 것을 회개하고, 그 돈을 마련해 탁지부에 되돌려 줌으로 '양심전'(良心錢)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러한 공개 자복과 윤리적 갱신은 원산 부흥운동의 특징이 되었다.
하디의 고백은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에 영감을 준 원산 부흥 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4.2. 전국적 확산 (1904-1906)
1904년, 하디는 개성 지방 사경회(1월), 김화 새술막교회와 지경터교회(2월), 서울 자골교회(4월) 부흥회를 인도하며 원산 부흥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이 부흥회들에서도 공개적인 죄 자백 현상이 나타났다. 초기에는 하디가 소속된 남감리회 소속 교회들 중심으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9월 서울 정동제일교회 부흥회를 시작으로, 10월 평양 지방, 11월 인천 지방에서 연합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미감리회 구역으로까지 부흥 운동이 확대되었다.
하디는 인천 지방 연합부흥회를 마치고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없는 동안에는 크램(W. G. Cram)과 캐롤, 하운셀 등 다른 남감리회 선교사들이 1905년 개성과 원산, 서울 등지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1905년 9월, 장로회와 감리회 6개 선교부가 조직한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는 매년 연초에 각 지방별로 실시하는 사경회를 연합부흥회로 진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06년 1∼2월 서울과 원산, 평양 등지에서 초교파 연합 부흥회가 개최되어 원산부흥운동의 열기를 이어나갔다.
4.3. 평양 대부흥운동 (1907)
1906년 8월,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귀환한 하디는 평양에서 선교사 연합사경회를 인도하였는데, 이때 블레어(W. N. Blair)와 그레이엄 리(Graham Lee) 등 장로교 선교사들이 '성령 충만'을 경험했다. 한 달 후, 미국 부흥운동 지도자 존스턴(H. A. Johnston)이 평양을 방문하여 영국 웨일즈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운동 소식을 전했고, 평양의 선교사와 한국 교인들은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3개월 간의 기도 준비 후,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와 숭덕학교에서 개최된 연합사경회에서 교인들이 공개적으로 통회 자복하는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초기 한국 기독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평양대부흥운동의 시작이었다. 하디의 고백은 평양대부흥운동에 영감을 준 원산 부흥 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5. 신학 교육 및 저술 활동
하디는 1905년 이동식 신학교인 '신학당'을 설립하여 인천, 공주, 평양, 서울 등지에서 신학 교육을 시작했다. 1909년에는 서울로 이주하여 피어선기념성경학교(Pyeongtaek University)와 감리교 성서학교에서 가르쳤다. 1913년에는 서울에 협성신학교를 설립하고 1922년까지 교장으로 재직했다.
1916년, 감리교 최초의 신학 전문지 '신학세계'를 창간하고 편집장을 역임하며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1923년에는 조선예수교서회(현 한국기독교문학협회)의 편집장이 되었다.
1920년부터 1934년까지 성서 고고학, 구약 개론, 구약사, 모세오경, 예언서 등에 관한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신명기 법전」과 「제사 법전」은 그의 대표적인 논문으로 평가받는다. 『신약 총론』(1918), 『구약 총론』(1921) 등 성경 개설서와 주석적 논문을 저술했다. 『기독 신보』에 「구신약 강해」를 약 100회 연재하기도 하였다.
하디는 『웨슬레의 일기』, 『웨슬리의 도리적(道理的) 강도』(1918) 등의 책을 통해 감리교 신학을 소개하고자 힘썼다.
6. 가족과 말년
하디는 아내 마가렛과의 사이에 7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이 중 3명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1888년에 첫째 아들 아서 시드니가 유아로 사망했고, 둘째 딸 애니 엘리자베스는 한국에서의 선교사 생활 첫 해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셋째 딸 마리 메이블은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사망했다. 이후 성장한 자녀로는 거트루드 아비가일과 사라 그레이스가 있었다. 일곱 번째 자녀 로버트와 막내 딸 마가렛 조이는 각각 11세와 6세에 사망했다. 하디 가족은 추포니아라는 한국 소녀를 입양하기도 했다.
1935년, 하디는 선교사 직에서 은퇴하고 아내와 함께 딸 그레이스가 사는 미국 미시간주 랜싱으로 이주했다. 그는 45년 동안 의료 선교사와 복음주의 선교사로 봉사했다. 아내 마가렛은 1945년에 사망했고, 로버트 하디는 1949년 6월 30일에 84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