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운카쿠
1. 개요
료운카쿠는 1890년 일본 아사쿠사에 세워진 랜드마크로, 일본 최초의 전동식 엘리베이터를 갖춘 고층 건축물이었다. 12층 건물로, 전망대, 상점, 휴게실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붕괴되어 폭파 해체되었다. 료운카쿠는 르네상스 부흥 양식으로 설계되었으며, 1968년의 연구를 통해 높이가 220척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기념비와 유적이 남아 있으며, 메이지 시대를 상징하는 건축물로서 다양한 문화 작품에 등장한다. 료운카쿠는 오사카에도 존재했으며, 한국의 관점에서는 일본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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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의 마천루 -
W350 프로젝트
W350 프로젝트는 닛켄 세케이 건축 설계, 스미토모 임업 건설, 90% 목재와 10% 강철 사용, 내진 및 내풍 설계, 56억 달러 건설 비용을 특징으로 하는 초고층 목조 빌딩 건설 계획으로, 일본 임업 활성화와 도시의 숲으로 변화를 목표로 한다. -
도쿄도의 마천루 -
스카이 마일 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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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진 탑 -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는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섬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에 건설되어 고대 세계의 랜드마크이자 항해 기술의 상징이었으며, 지진으로 파괴 후 수중 고고학 연구가 진행되었고 후대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
없어진 탑 -
영곡탑
영곡탑은 명나라 영락제 시기에 난징에 건설된 대보은사의 일부로, 흰색 도자기 벽돌로 지어진 팔각형 탑이었으나 태평천국의 난 당시에 파괴되어 현재는 난징 박물관에 모형이 전시되어 있으며 복원 사업에 대한 논란이 있다. -
붕괴된 건축물 -
삼풍백화점
삼풍백화점은 부실 공사, 무리한 구조 변경, 안전 관리 부재로 1995년 붕괴되어 502명의 사망자를 낸 대한민국의 백화점이며, 이 사고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를 낸 참사로 기록되어 재난 및 안전 관리 시스템 개선 등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붕괴된 건축물 -
프랜시스 스콧 키 브리지 (볼티모어)
프랜시스 스콧 키 브리지는 볼티모어 항을 횡단하는 교량이었으나 2024년 컨테이너선 충돌로 붕괴되어 인명 피해와 해상 운송 중단을 야기했으며 2028년 가을 완공을 목표로 재건 중이다.
2. 역사
료운카쿠는 1890년 개장 직후 아사쿠사의 랜드마크이자 상징이 되었으며, 도쿄 전역에서 온 방문객들을 위한 주요 레저 시설이었다. 1894년 도쿄 지진으로 구조물이 약해지자 강철 보강재로 보강되었다. 그러나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으로 상층부가 파괴되고 탑 전체가 심하게 손상되어, 같은 해 9월 23일 공병대에 의해 폭약으로 철거되었다.
메이지 시대 20년대, 고층 건물에서 전망을 즐기는 것이 유행하면서 전망대 건축 붐이 일었다. 후지산 종람장(도쿄 아사쿠사, 1887년), 조망각(오사카 일본바시, 1888년)에 이어 오사카와 도쿄에 같은 "료운카쿠"라는 이름의 전망대가 차례로 건설되었다.
도쿄의 료운카쿠는 아사쿠사 공원에 세워진 12층짜리 전망대였다. 1890년(메이지 23년)에 준공되었으며, 당시 일본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반파되어 해체되었다. 아사쿠사에 세워졌기 때문에 "아사쿠사 십이층" 또는 "십이층"으로 불렸다. 오사카 신세계의 통천각(초대), 고베 신카이치의 고베 타워와 함께 "일본 3대 전망대"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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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건설 배경
1880년대 말, 메이지 20년대 일본에서는 고층 건물에서 전망을 즐기는 것이 유행하여 전망대 건축 붐이 일어났다. 1889년 오사카에 9층 높이의 료운카쿠가 먼저 세워졌고, 이듬해인 1890년 도쿄에도 같은 이름의 전망탑이 건설되었다.
아사쿠사 료운카쿠는 나가오카 출신의 부호 후쿠하라 쇼시치(福原庄七)가 기획하였다. 기본 설계는 윌리엄 K. 버튼이 맡았고, 토목 공사 감독은 이자와 유지(伊澤雄司)가 담당했다. 운영은 료운카쿠 주식회사가 담당했으며, 사진작가이자 도쿄시회 의원이었던 에사키 레이지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아사쿠사 료운카쿠 부지는 아사쿠사 공원 바깥 지역인 센조쿠초(千束町)에 위치하여, 아사쿠사 공원 제6구에 적용되는 건물 고도 제한을 받지 않았다. 1887년 11월 아사쿠사코엔 6구에 문을 열어 인기를 끌었던 후지산 나무 조형물 '후지산종람장'(富士山縦覧場, 높이 32.8m)이 태풍 피해로 철거된 직후이기도 했다.
2.2. 완공과 운영
1890년 11월 11일 아사쿠사 료운카쿠가 완공되어 문을 열었다. 원래는 11월 10일 개장 예정이었으나 내빈 사정으로 연기되었다. 료운카쿠에는 일본 최초의 전동식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으며, 이는 훗날 도시바의 전신이 되는 백열사를 창업한 후지오카 이치스케가 설계했다.
료운카쿠의 전망대는 도쿄 시내는 물론 간토8주의 산까지 두루 볼 수 있는 명소였다. "일본의 에펠탑(1889년 완공)"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많은 관람객이 방문했다. 완공 당시 도쿄에는 12층 건축물이 드물었기 때문에 눈에 띄었고, 근대의 상징이자 유라쿠초와 아사쿠사의 얼굴이기도 했다.
각 층에는 상점, 휴게실, 전망실 등이 마련되어 복합 문화 공간으로 기능했다. 1층은 입구, 2층부터 7층은 여러 나라의 상품 판매점(총 46개 점포), 8층은 휴게실, 10층부터 12층은 전망실(망원경 설치)로 구성되었다. 1층부터 8층까지 운행되는 엘리베이터는 개장 초기 잦은 고장으로 1891년 5월 운행이 중단되기도 했다. 엘리베이터 운행 중단 이후, 계단 벽면에 게이샤들의 사진을 전시하는 '도쿄 백미인'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2.3. 쇠퇴와 철거
그러나 료운카쿠는 시간이 흐르면서 인기가 시들해졌고, 메이지 말기에는 경영난에 빠지기 시작했다. 1911년 6월 1일 탑 아래층에 '십이층 연예장'(十二階演芸場)을 새로 열고, 1914년에는 엘리베이터를 새로 정비하면서 손님 수가 반짝 증가했지만, 이후로도 경영난에 시달렸다. 1912년 2월에는 탑 근처에 아사쿠사 국기관(浅草国技館)이 들어서면서 경쟁이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료운카쿠 주변에는 '메슈야'(銘酒屋)라고 불리는, 실제로는 사창가로 운영되는 술집이 있었다. 아사쿠사에서는 '십이층 밑의 여자'(十二階下の女)라고 하면 창녀를 뜻하는 은어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으로 료운카쿠의 8층 윗부분이 무너지고 화재도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지진 발생 당시 료운카쿠 꼭대기에는 열두세 명 정도의 관람객이 있었는데, 대부분 붕괴에 휘말려 즉사했다. 근처 지상에 있던 후쿠스케 버선집 간판에 걸려 간신히 살아난 한 명만이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이미 경영난으로 휘청이던 상황에서 복구는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재건은 포기되었고, 1923년 9월 23일 아카바네 공병대의 지원으로 두 차례에 걸쳐 폭파 해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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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건물 구조 및 특징
료운카쿠는 완공 당시 높이가 220척(약 66.7m)으로 알려졌으나, 1921년 지진재해예방 조사위원회의 재조사 결과 173척으로 측정되었다. 그러나 일본건축학회 정회원 호리구치 진키치는 천장 내부, 입구 돌계단, 피뢰침, 건물 기초 바닥 높이 등을 고려하면 220척이 맞다고 주장했다. 내부 면적은 37평(122.31m2)이었다. 1층은 입구, 2~7층은 수입물품 판매점(46곳), 8층은 휴게실, 10~12층은 전망실이었다. 1층부터 8층까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으나, 잦은 고장으로 1891년 5월 사용이 중지되었다.
료운카쿠의 입장료는 어른 8전, 어린이 4전이었다(1전은 지금의 약 100엔).
3.1. 건축 양식 및 설계
료운카쿠는 르네상스 부흥 양식의 건물로, 붉은 벽돌로 마감된 외관이 특징이었다. 10층까지는 벽돌 구조, 11층과 12층은 목조 구조였다. 설계는 윌리엄 K. 버튼이 맡았는데, 그는 설계 당시 엘리베이터 설치를 고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건물 구조에 대한 상세 정보는 다음과 같다.
일본 최초의 전동식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으며, 설계는 당시 도쿄전등주식회사(東京電燈株式会社)의 기술자이자 도시바(東芝)의 전신 중 하나인 백열사(白熱舎)를 창업한 후지오카 이치스케(藤岡市助)가 맡았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개업 당일부터 고장이 잦았고, 결국 1891년 5월에 사용 중지되었다.
3.2. 층별 구성
| 층수 | 용도 |
|---|---|
| 1층 | 입구 |
| 2층~7층 | 수입물품 판매점 (46개 점포) |
| 8층 | 휴게실 |
| 9층 | 미술 전시회장 |
| 10층~12층 | 전망실 (망원경 설치) |
1층부터 8층까지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으나, 개업 당일부터 고장이 잦아 1891년 5월에는 사용이 중지되었다.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손님을 확보하기 위해 오르막 계단 벽면에 화류계에서 발탁된 게이샤들의 사진을 붙여 일본 최초의 미인대회인 '동경백미인(東京百美人)' 전이 열리기도 했다. 11층에는 5000촉(燭)의 아크등 2개가 설치되었고, 각 층 내부에는 3개의 전등을 두어 176개의 창을 통해 빛을 발했다.
3.3. 높이 논란
료운카쿠의 높이는 완공 당시 220척(약 66.7m)으로 알려졌으나, 1921년 지진재해예방 조사위원회가 다시 조사한 결과 피뢰침까지 합한 높이가 173척으로 측정되었다. 다만 일본건축학회 정회원인 호리구치 진키치(堀口甚吉)가 1968년에 발표한 논문에서는 해당 재조사 결과에 천장 내부의 10~15척(약 3~4.5m), 입구 돌계단 높이 2척(약 0.6m), 피뢰침 높이 12척(약 3.6m)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건물 기초 바닥 높이 20척(약 6m)까지 더하면 당초 알려진 220척이 맞다고 주장했다.
3.4. 기타 시설
각 층 내부에는 전등 3개를 설치하여 176개의 창문을 통해 빛을 밝혔다. 11층에는 5000촉(燭) 아크등 2개가 설치되었다. 10층에서 12층까지의 전망실에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다.
4. 유산
료운카쿠는 1890년 개장 직후 아사쿠사의 랜드마크이자 상징이 되었으며, 도쿄 전역에서 방문객들이 찾는 주요 명소가 되었다. 1894년 도쿄 지진으로 구조물이 약해지자 강철 보강재로 보강되었으나,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상층부가 파괴되어 결국 폭약을 사용하여 철거되었다.
료운카쿠의 명성은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시카와 다쿠보쿠, 기타하라 하쿠슈, 가네코 미쓰하루 등 당대 작가들의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오가와 가즈마사의 유명 작품인 "일본의 유형, 도쿄의 유명한 게이샤" (1892년경 출판)에서도 료운카쿠의 개장을 기념했다.
료운카쿠 철거 후, 남쪽 구라마에미노와 선 아사쿠사 국제거리의 라이몬 1초메 교차로에 모리시타 진탄의 광고탑인 "진탄탑"이 세워졌다. 이 탑은 랜드마크로 사람들에게 친숙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 금속 헌납으로 철거되었다. 1954년 료운카쿠를 본뜬 2대 진탄탑이 건설되었으나 1986년 노후화로 철거되었다. 현재 그 자리에는 편의점이 들어서 있으며, 벽면에는 "진탄탑 옛터"라는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2012년, 료운카쿠 남쪽에 있던 영화관 옛터에 마쓰타케와 마루한이 주도하여 재개발 빌딩인 "마루한 마쓰타케 로꾸꾸 타워"를 건설하고, 그 모서리 부분을 료운카쿠를 재현한 외관으로 할 계획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중단되었고, 마쓰타케 단독 투자로 "아사쿠사 로꾸꾸 마쓰타케 빌딩"이 건설되면서 료운카쿠의 외관은 재현되지 않았다. (2018년 착공, 2020년 완공, 2023년 "아사쿠사 뷰 호텔 아넥스 로꾸꾸"로 개업).
4.1. 기념비 및 유적
료운카쿠 터에는 현재 파칭코 가게가 들어서 있으며, 입구 근처에는 료운카쿠 사적보존회에서 2004년 12월에 설치한 아사쿠사료운카쿠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이 자리, 다이토구 아사쿠사 2초메 14번 5호 부근에 아사쿠사 료운카쿠(통칭 십이층)이 완성"이라고 쓰여 있다.
한편, 아사쿠사코엔초 모임에서 1977년 12월 윈즈아사쿠사 구석에 설치한 '아사쿠사코엔 사적순회 제2번찰소' 표지석에는 "료운카쿠는 지금의 아사쿠사 도에이에서 북서쪽으로 10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아사쿠사코엔 5구, 센조쿠 2초메 38번지)"라는 설명문이 있다. 그러나 1981년 7월 아사쿠사 2초메 13번에서 진행된 료운카쿠지 발굴 결과, 실제 탑의 위치는 지금의 아사쿠사 2초메 13번~14번 사이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8년 2월, 아사쿠사 2초메 14번지에서 진행되던 빌딩 공사 현장에서 료운카쿠의 기초 부분에 해당되는 벽돌과 팔각형 기초 콘크리트 일부가 발견되기도 했다.
4.2. 문화적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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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도쿄 박물관에는 료운카쿠의 축소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료운카쿠는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모래 한 줌, 에도가와 란포의 그림과 함께 여행하는 남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아사쿠사 홍단 등 여러 문학 작품에 등장하며, 메이지 시대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묘사된다.
료운카쿠는 귀멸의 칼날 아사쿠사 편, 사쿠라 대전 (TV 애니메이션) 제13화, 여기는 잘나가는 파출소 애니메이션판 제214화 등 현대 대중문화에서도 종종 소재로 활용된다.
5. 오사카의 료운카쿠
도쿄의 료운카쿠보다 1년 앞선 1889년, 오사카부니시나리군 기타노무라(현 오사카시 기타구)의 일본식 정원 "유라쿠엔" 안에 9층 건물(높이 39m)로 세워졌다. 오사카 미나미에 있던 5층짜리 "조망각"이 "미나미의 5층"으로 불린 것에 대응하여, "'키타의 9층'"으로 불렸다.
1889년 일본 여행 중 오사카에서 료운카쿠를 방문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은 "오사카의 에펠탑"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일본인은 누구나 경치 좋은 곳에 와서 앉아 차나 과자, 술을 즐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오사카에서는 교외에 목재와 철골을 사용하여 9층짜리 탑을 짓고, 세련된 일본식 정원을 만들고, 온통 빨간 등롱을 둘러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장사가 충분히 번창한다. 이 오사카 에펠탑은 솔직히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거기서 보이는 경치는 그걸 보상하고도 남는다.”영어
또한, 1, 2층에 줄지어 늘어선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꽃 풍경을 즐기는 만원의 손님들을 보고 "동양인이 이렇게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에 나는 놀랐다."영어라고 적었다. 영국령 인도 출신의 영국인인 키플링은 경관을 즐기는 취미가 있는 것은 서양인 상류층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양인인 일본 서민이 경치를 즐기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9층 료운카쿠에 앞선 1888년에는, 나니와구 니혼바시의 유원지 "유호지" 안에 5층 높이 31m의 조보카쿠(眺望閣)가 지어졌으며, '키타의 9층', '미나미의 5층'이라고 불렸다. 조보카쿠는 육각형 기둥 모양의 파노라마식 고층 건물로,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고층 건축이라고도 한다. 주변에는 노점상 거리도 정비되었다. 이 조보카쿠는 1904년에 해체되었지만, 현재도 지명으로 '5층 백화점'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