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자키 준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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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의 소설가, 희곡 작가, 수필가로, 탐미주의적 경향의 작품과 일본 전통 문화를 융합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 대학 국문과를 중퇴한 그는 초기 작품에서 에로티시즘을 강조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대표작으로는 단편 《문신》, 《소년》, 장편 《치인의 사랑》, 《만자》 등이 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후 간사이 지방으로 이주하여 일본 전통 미학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으며, 《세설》과 같은 작품을 통해 일본 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 훈장을 받았으며, 미국 예술 문학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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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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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다니자키 준이치로 |
로마자 표기 | Tanizaki Jun'ichirō |
일본어 이름 | 谷崎 潤一郎 |
출생일 | 1886년 7월 24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도쿄부 니혼바시구 가키가라초 2초메 14번지 (현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닌교초 1초메 7번 10호) |
사망일 | 1965년 7월 30일 |
사망지 | 일본국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유가와라정 요시하마 아자 요모기가다이라 |
안장 장소 | 일본국 교토시 사쿄구 시시가타니 호넨인 도쿄도 도시마구 소메이 묘지 지겐지에 분골 |
직업 | 소설가, 극작가, 수필가 |
언어 | 일본어 |
활동 기간 | 1910년 - 1965년 |
학력 | |
최종 학력 | 도쿄제국대학 국문과 중퇴 |
모교 | 구제일고등학교 영법과 졸업 |
작품 활동 | |
장르 | 소설, 희곡, 수필, 번역, 와카 |
주제 | 여체미 탐구 마조히즘 에도의 화려함 악마적 심리 데카당스 페티시즘 모더니즘 이국 취미 미와 에로스의 만다라 일본의 전통미 모성애 풍속 회권 노인의 성 |
문학 경향 | 탐미파, 악마주의, 고전 회귀 |
대표 작품 | 자청(1910년) 치인의 사랑(1924년-1925년) 만지(1928년-1930년) 여뀌 먹는 벌레(1928년-1929년) 슌킨 이야기(1933년) 음예예찬(수필, 1933년-1934년) 세설(1944년-1948년) 쇼쇼 시게모토의 어머니(1949년-1950년) 열쇠(1956년) 풍전노인일기(1961년-1962년) |
수상 | |
수상 내역 | 국민문예상(1923년) 마이니치 출판문화상(1947년) 아사히문화상(1948년도) 문화훈장(1949년) 마이니치 예술대상(1962년도) |
데뷔 | |
데뷔작 | 탄생(희곡, 1910년) 자청(1910년) |
가족 | |
배우자 | 이시카와 치요코 (1915년-1930년/1982년 사망) 후루카와 도미코 (1931년-1934년/1969년 사망) 모리타 마쓰코 (1935년-/1991년 사망) |
자녀 | 아유코 (장녀, 1903년-1991년) 에미코 (차녀, 모리타 마쓰코의 장녀, 1929년-2013년) |
부모 | 구라 고로 (아버지, 1854년-1919년) 세키 (어머니, 1864년-1917년) |
형제자매 | 세이지(1890년-1971년) 도쿠조 (1893년-1988년) 슈헤이 (동생, 1908년-1990년) 소노 (1896년-1911년) 이세 (1899년-1994년) 스에 (또는 스에, 여동생, 1902년-1984년) |
조부모 | 구에몬 (할아버지, 1831년-1888년) |
손자 | 모모코, 다케다 나가오, 아리코 |
영향 | |
영향을 준 인물 | 고다 로한 이와야 사자나미 나가이 가후 이즈미 교카 이하라 사이카쿠 가부키 지다이모노 분라쿠 쿠사조시 니시키에 와일드 보들레르 비어즐리 발자크 토머스 드 퀸시 천일야화 겐지 이야기 왕조 회권 |
영향을 받은 인물 | 다쓰노 다카시 사토 하루오 후나하시 세이이치 엔치 후미코 곤 도코 미시마 유키오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 나카이 히데오 세토우치 자쿠초 나카가미 겐지 고노 다에코 다나카 신야 가와바타 야스나리 사카구치 안고 가지이 모토지로 미셸 푸코 나카자키 준 |
기타 |
2. 생애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니혼바시(日本橋)에서 출생한 소위 도쿄 토박이로서 도쿄제국대학교 국문과를 중퇴했다.[9] 초창기에 발표한 <문신(刺青)> , <소년>, <비밀> 등 탐미적 경향이 짙은 단편들이 단숨에 높은 평가를 받게 되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여기에서 말하는 ‘탐미’란 ‘강렬한 에로티시즘’과 동의어라 할 수 있다.
- 1886년(메이지 19년) 도쿄부 일본바시구 갓파마치 2정목 14번지(현・도쿄도 주오구 일본바시 인형마치 1정목 7번 10호)에서 태어남. 아버지 다니자키 쿠라 고로, 어머니 세키의 장남으로 성장함.
- 1889년(메이지 22년) 아버지가 경영하던 일본점등회사가 경영난으로 인해 매각됨(메이지 21년 9월 7일자로 이소메 토쿠키지를 발기인 대표로 하여, 다니자키 쿠라 고로와 2명을 더해 총 4명의 연명으로 유한책임 일본점등회사 설립 신고를 정관과 함께 칸다 구청에 제출, 주주를 모집. 그 40일 후, 메이지 21년 10월 24일자로 해산 신고를 칸다 구청에 제출함[23].).
- 1890년(메이지 23년) 아버지, 미곡 중개인을 시작함(도쿄부 공문서의 미상회소의 부책 중 중개인 인허료 상납 사역서에 따르면, 메이지 19년 2월 24일자, 갓파마치 1정목 2번지 주소로, 동소 기류의 에마 추고로와 함께 중개인 인허료를 납부함[24].). 남동생 세이지 출생.
- 1892년(메이지 25년) 일본바시 사카모토 소학교 보통과에 입학(1년 조기 입학). 귀공자로 자라난 소심한 성격 때문에, 유모의 수행 없이는 학교에 갈 수 없었음.
- 1893년(메이지 26년) 출석 일수 부족으로 1년을 다시 하고, 수석으로 진급함. 평생의 친구인 사사누마 겐노스케(일본 최초의 "고급" 중식당 클럽 카이라쿠엔의 사자)와 만남.
- 1894년(메이지 27년) 6월 20일, 메이지 도쿄 지진으로 자택에서 피해를 입음. 지진 공포증의 원인이 됨(『9월 1일 전야의 일』에서 공포증을 고백함).
- 1896년(메이지 29년) 어머니와 가부키 『의경천본앵』을 관람하고, 평생에 걸친 영향을 받음.
- 1897년(메이지 30년) 동 소학교 보통과 졸업, 고등과에 진학. 이나바 키요키치 선생의 영향으로 문학에 눈을 뜸.
- 1898년(메이지 31년) 선배와 급우들과 함께 순환 잡지 『학생 클럽』을 발행함.
- 1899년(메이지 32년) 교바시구 츠키지 아카시마치의 오문정홍학관(일명 산마 塾)에 다니며 영어를 배움. 일본바시 카메시마마치의 카누와 슈코 塾에서 한문 소독을 받음.
- 1901년(메이지 34년) 동 고등과 졸업. 이 무렵 가산이 기울어 봉공에 나가야 했지만, 재능을 아끼는 이나바 선생 등의 지원으로 도쿄부립 제1중학교(현・히비야 고등학교)에 진학함.
- 1902년(메이지 35년) 가업이 더욱 궁핍해져 제적을 강요받지만, 한문 교사 와타나베 선생과 키타무라 시게마사(우에노 세이요켄 주인)의 덕분에 숙식을 제공받는 서생으로 가정교사가 되어 학업을 계속함.
- 1903년(메이지 36년) 제1중학교 잡지 『학우회 잡지』의 간부가 됨. 제1중학교에서는 오오누키 유키노스케(오카모토 카노코의 형), 츠치야 케이소, 츠네카와 요이치로, 요시이 유, 타츠노 타카시 등과 만남.
- 1905년(메이지 38년) 동교 졸업, 제1고등학교 영법과에 진학.
- 1907년(메이지 40년) 제1고등학교 문예부 위원이 되어 『교우회 잡지』에 글을 발표함. 키타무라 집의 하녀인 호즈미 후쿠(후쿠코)와의 연애 사건으로 키타무라 집에서 쫓겨나 학생 기숙사에 들어감. 이 무렵부터 학비는 숙부와 사사누마 집으로부터 지원을 받음.
- 1908년(메이지 41년) 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국문과에 진학.

- 1909년(메이지 42년) 이 무렵, 문단에 나가지 못하는 조바심으로 신경쇠약이 되어, 전지 요양지인 카이라쿠엔에서 나가이 하후의 『아메리카 이야기』를 애독함.
- 1910년(메이지 43년) 코야마우치 카오루, 와츠지 데쓰로, 오오누키 아키카와, 코이즈미 테쓰, 고토 스에오, 키무라 소우타 등과 함께 제2차 『신사조』를 9월에 창간. 희곡 『탄생』을 투고(창간호는 절차 미비로 인해 발매 금지). 『문신』, 『기린』을 발표.
- 1911년(메이지 44년) 『신사조』는 폐간됨. 한때 『스바루』 동인에 참가. 7월, 수업료 미납으로 제적. 『소년』『방간』『표풍』『비밀』을 발표. 작품이 나가이 하후에게 극찬을 받아 문단적 지위를 확립함.
- 1912년(메이지 45년) 1월 첫사랑 호즈미 후쿠가 폐렴으로 사망. 4월, 교토 여행을 시작으로 여러 곳을 방랑하며 신경쇠약이 재발함. 7월, 징병 검사를 받지만 지방 과다증으로 불합격. 『악마』를 발표.
- 1915년(다이쇼 4년) 이시카와 치요와 결혼. 『오쓰야살시』『법성사 이야기』『오사이와 미노스케』를 발표.
- 1916년(다이쇼 5년) 장녀 아유코 출생. 『신동』『공포 시대』를 발표.
- 1917년(다이쇼 6년) 어머니 세키 사망. 아내와 딸을 친정에 맡김. 『인어의 한탄』『이단자의 슬픔』을 발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사토 하루오와의 교류가 시작됨. 치요의 여동생 세이코를 좋아하게 됨.
- 1918년(다이쇼 7년) 조선, 만주, 중국 여행. 『작은 왕국』을 발표.
- 1919년(다이쇼 8년) 아버지 쿠라 고로 사망. 가나가와현 오다와라 쥬지마치로 이사.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기록』을 발표.
- 1920년(다이쇼 9년) 요코하마의 다이쇼 가츠에이 주식회사 각본부 고문에 취임. 의붓동생 세이코를 예명 하야마 미치코로 여배우로 만들어 『아마추어 클럽』으로 데뷔시킴. 『상어인』『예술 일가언』을 발표.
- 1921년(다이쇼 10년) 아내 치요를 사토 하루오에게 양보한다는 전언을 번복했기 때문에, 사토와 절교함("오다와라 사건").
- 1923년(다이쇼 12년) 9월 1일 관동 대지진. 당시 하코네 산길에서 버스를 타고 있었는데, 그 계곡 쪽 길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함. 요코하마 산 위의 자택은 튼튼하게 지어져 무사했지만, 인접 건물의 화재로 인해 소실됨. 지진 후, 교토시 카미교구 토지인 나카마치나, 사쿄구 산조 히가시야마도리 요호지를 거쳐, 효고현 무코군 오오야마촌 고에키(현・니시노미야시 쿠라쿠엔)의 『만상관』으로 이주. 『육괴』를 발표.
젊은 시절에는 서양 문화를 동경해 서구적인 요소와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자기 작품에 도입했으나, 1923년의 간토 대지진을 계기로 지진에 대한 공포 때문에 간사이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차츰 일본의 전통 문화에 심취하게 된다. 후반기에는 교토를 중심으로 간사이 지방의 전통적 언어(방언)를 구사하는 작품들을 완성했다.

- 1924년(다이쇼 13년) 무코군 혼잔촌 키타하타(현・고베시 히가시나다구 혼잔정)로 이사. 『바보의 사랑』을 발표.
- 1926년(다이쇼 15년) 1월 다시 중국의 상하이로 여행. 궈머뤄와 만남. 귀국 후, 가을에 사토 하루오와 화해하고, 무코군 혼잔촌 오카모토 코분엔(현・고베시 히가시나다구 오카모토)로 이사. 『상하이 교유기』, 『상하이견문록』을 발표.
- 1927년(쇼와 2년) 네즈 마쓰코와 만남. 『달변록』을 연재하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사이에 "줄거리가 있는 소설, 없는 소설" 논쟁이 일어나지만, 후일, 다니자키의 생일에 아쿠타가와가 자살함.
- 1928년(쇼와 3년) 효고현 무코군 오카모토 우메가야(현・고베시 히가시나다구 오카모토)에 신주택("사란각")을 건축. 『흑백』, 『만자』를 발표.
- 1929년(쇼와 4년) 아내 치요를 와다 로쿠로(후의 오오츠보 사나오)에게 양보하는 이야기가 나와, 그것을 바탕으로 『여뀌 먹는 벌레』를 전년부터 연재하지만, 사토 하루오의 반대로 이야기는 무산됨.
- 1930년(쇼와 5년) 『난국 이야기』 전편 발표. 치요와 이혼. 이혼 및 치요의 사토 재혼을 알리는 인사장이 유명해져 "아내 양도 사건"으로 소란이 일어남.
- 1931년(쇼와 6년) 후루카와 테이미코와 결혼. 빚 때문에 한때 고야산에 은거함. 『요시노 가쓰』『맹목 이야기』『무슈 공비화』를 발표.
- 1932년(쇼와 7년) 무코군 우오자키정 요코야(현・고베시 히가시나다구)로 이사함. 이웃집은 네즈 마쓰코 일가였음. 마쓰코와의 불륜이 시작됨. 『의송암 수필』『로카리』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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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쇼와 10년) 전년에 네즈 세이타로와 이혼한 모리타 마쓰코와 결혼. 『겐지 이야기』 현대어 번역에 착수. 『섭양 수필』을 발표. 이 해에 창설된 아쿠타가와상, 나오키상의 심사위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심사 당일에는 결석함[25].
- 1936년(쇼와 11년) 『고양이와 쇼조와 두 명의 여자』를 발표. 무코군 스미요시촌 한타카바야시(현・고베시 히가시나다구)로 이사. 5월 실명 오이 고이치로, 스미다 타쿠조(가부키의 피리 명인 총가원)가 시가 나오야를 방문하여 다니자키에 대한 소개를 기뻐함.
- 1937년(쇼와 12년) 설립된 제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됨.
- 1938년(쇼와 13년) 한신 대홍수 발생. 이때의 상황이 후에 『세설』에 반영됨. 겐지 이야기 현대어 번역 완료.
- 1939년(쇼와 14년) 남동생 세이지와 화해. 『준이치로 역 겐지 이야기』 간행되지만, 황실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 몇 군데 삭제됨. 장녀 아유코가 타케다 류지(사토 하루오의 조카)와 결혼(주례는 이즈미 쿄카).
- 1941년(쇼와 16년) 첫 손녀 모모코 출생.
- 1942년(쇼와 17년) 아타미시 니시야마의 별장을 구입.
- 1943년(쇼와 18년) 『중앙공론』지상에서 연재가 시작된 『세설』이 군부에 의해 연재 중단됨. 이후 은밀히 집필을 계속함.
- 1944년(쇼와 19년) 『세설』 상권을 사가판으로 발행. 일가족으로 아타미로 소개.
- 1945년(쇼와 20년) 오카야마현 쓰야마로, 이어 마니와군 가쓰야마정(현・마니와시)로 다시 소개.
- 1946년(쇼와 21년) 교토시 사쿄구 난젠지 시모카와하라마치로 이사함(이전 센칸테이).
- 1947년(쇼와 22년) 고혈압 악화로 집필이 지체됨. 『세설』 중권 발행. 마쓰코의 장녀 네즈 에미코를 차녀로 입적.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수상.
- 1948년(쇼와 23년) 『세설』 하권 완성.

1949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 훈장을 수여받았다.
- 1950년(쇼와 25년) 아타미시 나카타에 다시 별장을 구입(이전 세츠고안).
- 1951년(쇼와 26년) 이 해 이후 다시 고혈압 악화, 요양에 전념. 문화공로자가 됨. 『준이치로 신역 겐지 이야기』 발표.
- 1954년(쇼와 29년) 아타미시 이즈야마 나루사와에 새로 별장을 빌려 이사함(후의 세츠고안).
- 1955년(쇼과 30년) 『유소 시대』『과산화 망간수의 꿈』 발표.
- 1956년(쇼와 31년) 교토의 센칸테이를 매각하고, 아타미 이즈야마에 정착. 『열쇠』 발표.
- 1958년(쇼와 33년) 11월 가벼운 발작을 일으켜 의사로부터 3개월 요양을 권고받음.
- 1959년(쇼와 34년) 오른손에 통증과 마비가 발생하여, 이후 구수(구술 필기)로 집필. 『꿈의 뜬다리』 발표. NHK텔레비전 『여기에 종은 울린다』 출연.
- 1960년(쇼와 35년) 양녀 에미코가 칸세 에이후와 결혼. 협심증 발작으로 입원. 『세 가지 경우』 발표.
- 1961년(쇼와 36년) 『광인 노인 일기』 발표.
- 1962년(쇼와 37년) 『부엌 태평기』 발표.
- 1963년(쇼와 38년) 『광인 노인 일기』로 마이니치 예술상 수상. 아타미시 니시야마(요시카와 에이지 별장)로 이사. 신택 조성을 위해 도쿄도 분쿄구 세키구치마치의 아파트에 거주. 『설후안 야화』 발표.
- 1964년(쇼와 39년) 전미 예술원・미국문학예술아카데미 명예 회원이 됨. 가나가와현 아시가라시모군 유가와라정 요시하마지 요모기가하라의 신택으로 이사함(쇼헤키산방). 『준이치로 신신역 겐지 이야기』 간행.
최말년의 1964년(쇼와 39년) 6월에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전미예술원·미국문학예술아카데미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2]
- 1965년(쇼와 40년) 도쿄 의치과대학 부속병원에 입원. 퇴원 후, 교토에 놀러 감. 7월 30일 신부전에 심부전을 합병하여 사망. 향년 80세(만 79세 사망). 8월, 아오야마 장례식장에서 장례식[26]. 법명은 "'''안락수원공예문림덕윤거사'''". 절필은 『미움받는 입』『79세의 봄』. 교토시 사쿄구 시카가야의 호라넨인에 안치. 백일 법요에서 도쿄도 도시마구 소메이 묘지 지겐지에 있는 부모의 묘에 분골.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묘와 등을 맞대고 있음.
- 2016년(헤이세이 28년) 전년에 당시의 저작권 보호 기간인 사후 50년을 만료하고, 원일부터 작품의 저작권이 소멸하여 퍼블릭 도메인이 됨.
2. 1. 초기 생애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니혼바시(日本橋)에서 출생한 도쿄 토박이로서 도쿄제국대학교 국문과를 중퇴했다. 초창기에 발표한 <문신(刺青)>, <소년(少年)>, <비밀(秘密)> 등 탐미적 경향이 짙은 단편들이 단숨에 높은 평가를 받게 되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여기에서 말하는 ‘탐미’란 ‘강렬한 에로티시즘’과 동의어라 할 수 있다.다니자키 준이치로는 할아버지가 세운 인쇄소를 삼촌이 운영하던 도쿄의 니혼바시에서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구라 고로와 세키 다니자키였다. 그의 형 구마키치는 그가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사망하여 그는 집안의 차남이 되었다. 다니자키는 토쿠조, 세이지/Seiji영어(작가이기도 함), 슈헤이 세 명의 남동생과 소노, 이세, 수에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다니자키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요쇼 지다이」(『幼少時代』(1956년), Childhood Years: A Memoir영어)에서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응석받이로 자랐다고 묘사했다. 그의 어린 시절 집은 1894년 메이지 도쿄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는데, 이는 다니자키가 평생 지진을 두려워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그는 후에 말했다. 그가 성장하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어 결국 가정교사로 다른 집에 머물러야 했다.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쿄 제일 중학교(히비야 고등학교)에 다녔으며, 그곳에서 이사무 요시이와 친분을 쌓았다. 다니자키는 1908년부터 도쿄 제국 대학 문학부에 다녔지만, 학비를 낼 수 없어 1911년에 중퇴했다.
2. 2. 문학적 초기 경력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니혼바시(日本橋)에서 출생한 도쿄 토박이로서 도쿄제국대학교 국문과를 중퇴했다. 초창기에 발표한 <문신(刺青)>(1910), <소년(少年)>(1911), <비밀(秘密)>(1911) 등 탐미적 경향이 짙은 단편들이 단숨에 높은 평가를 받게 되어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여기에서 말하는 ‘탐미’란 ‘강렬한 에로티시즘’과 동의어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서양 문화를 동경해 서구적인 요소와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자기 작품에 도입했다.1909년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첫 작품은 1막짜리 희곡으로 문학 잡지에 발표되었다. 다니자키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단편 소설 「刺青」(시세이, 1910) 발표 이후였다. 이 소설에서 한 문신사는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몸에 거대한 거미를 새긴다. 그 후 여성의 아름다움은 악마적이고 매혹적인 힘을 지니게 되는데, 여기에는 에로티시즘과 사도-마조히즘이 결합되어 있다. 팜므파탈은 「麒麟」(기린, 1910), 「少年」(쇼넨, 1911), 「秘密」(히미츠, 1911), 「悪魔」(아쿠마, 1912) 등 다니자키 초기 작품들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다. 다이쇼 시대에 발표된 「神童」(신도, 1916)과 「鬼の面」(오니노멘, 1916)은 부분적으로 자전적인 성격을 띤다.
1915년 첫 번째 부인 이시카와 치요(石川千代)와 결혼했고, 1916년 외동딸 아유코(鮎子)가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한 결혼 생활이었고, 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치요와 친구이자 동료 작가인 사토 하루오(佐藤春夫)의 관계를 묵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된 심리적 스트레스는 「愛すればこそ」(아이스레바코소, 1921)라는 희곡과 「神と人との中」(가미토히토노아이다, 1924)라는 소설 등 그의 초기 작품들에 반영되어 있다.

1918년, 다니자키는 조선, 중국 북부 및 만주를 여행했다. 초기 그는 서구와 모든 현대적인 것들에 매료되었다. 1922년, 오다와라에서 요코하마로 이주하여 잠시 서양식 주택에 살면서 보헤미안적인 생활 방식을 영위했다.
다니자키는 무성 영화 분야에서 다이카츠(帝國キネマ演芸) 영화사의 각본가로 일했다. 그는 순수영화 운동을 지지했고, 일본 영화에 모더니즘적 주제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 그는 「아마추어 클럽」(1922)과 「뱀의 욕정」(1923)의 각본을 썼다.[4]
2. 3. 간사이 이주와 전통으로의 회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니혼바시 출생으로, 도쿄제국대학 국문과를 중퇴했다. 초기에는 탐미적 경향의 단편들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젊은 시절에는 서양 문화를 동경했으나, 1923년 관동 대지진을 계기로 간사이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일본 전통 문화에 심취하게 되었다.[5] 지진으로 도쿄의 역사적인 건물들이 파괴되면서 그의 관심사가 변화했고, 서구와 근대성에 대한 열정을 일본의 미학과 문화, 특히 간사이 지역의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돌렸다.[5]1923년 9월 27일, 다니자키는 교토로 이주하여 피난 생활을 시작했다.[52] 이후 한신 지방을 중심으로 거주지를 옮겨 다녔으며, 1954년 아타미로 이주할 때까지 간사이 지방을 떠나지 않았다.[52] 이 시기에 다니자키는 오사카 방언의 영향을 받아 『만지(曼陀羅)』(1928-1929), 『가시덤불(蓼食う虫)』(1928-29), 『칡(吉野葛)』(1931), 『슌킨의 초상(春琴抄)』(1933) 등 간사이 지방을 배경으로 한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5] 특히 『사사메유키(細雪)』(1943-1948)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몰락해 가는 오사카 상인 가문의 네 자매 이야기를 다룬 그의 대표작이다.[5]
다니자키는 1942년 아타미로 이주했다가 1946년 교토로 돌아왔다.[5] 그는 간사이 지방에 거주하면서 다양한 지역을 전전했는데, 효고현무코군다이샤촌 고에키 「'''만상관'''」(현: 니시노미야시쿠라쿠엔 4번초메 6)을 시작으로,[53] 고베시히가시나다구 등 여러 곳에 거주했다.[53]
2. 4. 전쟁과 전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문단에서 다시 두각을 나타내며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사망할 때까지 그는 일본 최고의 현대 작가로 널리 인정받았다. 1949년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1964년에는 미국 예술 문학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어 이 영예를 안은 최초의 일본 작가가 되었다.
전후 그의 첫 번째 주요 작품은 《시게모토 선장의 어머니》(1949~1950)로, 아들과 어머니 사이의 그리움이라는 주제를 다시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또한 노년의 성(Sexuality)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는데, 이는 후속 작품인 《열쇠》(1956)와 같은 작품에서 다시 등장한다. 《열쇠》는 노년의 교수가 자신의 시들해진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아내의 불륜을 계획하는 심리 소설이다.
다니자키는 1950년 아타미로 돌아왔고, 1952년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공로자로 지정되었다. 1958년 오른손 마비를 겪었고, 1960년에는 협심증으로 입원했다. 그의 마지막 소설 중 하나인 《광기 노인 일기》(1961~1962)에서 노년의 일기 작가는 과도한 성적 흥분으로 인한 뇌졸중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의 과거 욕망과 서양의 값비싼 물건으로 며느리에게 성적 자극을 제공하도록 회유하려는 현재의 노력을 모두 기록한다. 1964년 다니자키는 유가와라로 이사했고, 1965년 7월 30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묘는 교토의 호넨인 절에 있다.
3. 작품의 평가 및 특징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와 함께 전후 일본의 3대 작가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6] 메이지·다이쇼 시대부터 근대 일본 문학의 주류는 사소설이었으며, 작가의 자아와 사생활을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추구하는 모습을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 때문에 다니자키의 작품은 "사상이 없다", "속세와의 대결이 없다", "투쟁하지 않는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27][28]
그러나 사소설 중심의 문학관에서 벗어났을 때, 다니자키 소설 세계의 풍요로움과 넓은 시야에서 본 사상, 18세기 프랑스 문학과 같은 가혹한 인간 인식과 추상주의를 보여준 작품(만 등)에 높은 평가가 주어지기도 한다.[27][29] 오타니노 아츠시에 따르면, 다니자키는 자신의 여성 편력과 주변에 널리 소재를 취하면서 호화로운 이야기들을 써 내려갔다고 한다.[30]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가 자신의 투쟁을 보여주지 않고 "매우 자기 은폐에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27] 그러나 미시마는 다니자키의 소설가로서의 천재를 칭찬하면서도, 그의 작품들이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도 사회 비판적인 것을 전혀 포함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고 지적했다.[31]
다니자키의 문장은 "함축"이 있는 문체로, 일본적인 아름다움, 성과 관능을 탐미적으로 그렸다. 정서적이고 풍부하면서도 높은 논리성을 자랑하는 그 문체는 일본 문학적 정취와 서양 문학적 소설 기법의 교합적인 것이며, 매력적인 일본어 문장이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극치라고도 말해진다. 모리 오가이와 시가 나가야를 대표로 하는 간결한 표현과는 정반대이지만, 오가이와 함께 소설 문체의 이상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32]
강하고 아름다운 여성과 그것에 대한 마조히스틱한 주인공의 사모가 작품에 종종 등장하기 때문에, 여성 찬양이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논의되기도 하지만, 여성의 발에 대한 페티시즘(발페티시)과 같이 다니자키의 성애와 신체에 대한 흥미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관동 대지진 이전의 다니자키의 작풍은 모던하고 대중적인 것이 알려져 있지만, 다니자키 자신은 그 점을 후회하여 지진 이전의 작품은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많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야기 소설의 부활의 기운과 함께 지진 이전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니자키의 특색이 현저한 단편 소설들은 대표작 『문신』(1910년)에서의 탐미주의, 마조히즘, 에도 문명에 대한 동경과 근대화에 대한 거절 등을 포함한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의 선구적인 작품도 남기고 있으며, 에도가와 란포는 다니자키를 일본의 에드거 앨런 포라고 평가하고, 그의 작품의 탐정 소설로서의 측면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33] 특히 란포는 『도상』을 높이 평가하고, "프로바빌리티의 범죄"를 다룬 세계 최초의 미스터리라고 평가했다.[34]
1920년에 발표된 『예술일가언』에서는 지적인 예술관과 이야기론을 전개하고 있으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의 문학 논쟁은 문학사적으로 유명하다(아쿠타가와의 『문예적인, 너무 문예적인』 참조)[14]. 미시마 유키오는 아쿠타가와의 자살이 그 후의 다니자키 문학에 준 "역작용"의 영향을 지적하며, 다니자키가 니힐리즘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구원한 작가"라고 평가했다.[28]
간사이 이주 후의 대표작은 장편을 중심으로, 『치인의 애』(1924년)는 풍속 묘사의 문제가 다이쇼 시대 여러 작품의 총정리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 걸작으로 유명한 『만』(1928년-1930년), 『료쿠이후무시』(1928년-1929년)는 현대 풍속을 다루면서 남녀 애욕의 모습을 정성스럽게 그리고 성애의 깊이를 보여준다.
『춘금초』(1933년)는 다니자키적인 주제를 모두 포함하면서도, 상당히 실험적인 문체를 사용함으로써 작가의 "함축"을 내포한 걸작이 되어 있으며, 대표작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하다. 『음영예찬』(1933년-1934년), 『문장독본』(1935년)이라는 두 개의 비평에 의해, 자신의 미의식을 개진하면서 당시 문명을 비판했다.
전중·전후의 다니자키의 활동은 『세설』과 『겐지 이야기』 현대어 번역의 집필이 대표적이다. 전후의 대표작으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근친상간적인 애욕의 계보인 『소장 시즈키의 어머니』(1949년), 『꿈의 뜬다리』(1959년)가 있다. 『열쇠』(1956년)는 억압되는 성욕과 남녀의 삼각 관계를 테마로 한다. 『광인노인일기』(1961년-1962년)는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와 즐거움이 피학적인 애욕에 겹쳐진 경지를 보여준다.[22]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로, 1965년 출판사 중앙공론사(Chūō Kōronsha)가 제정하여 매년 소설이나 희곡 작품에 수여한다. 다니자키는 1958년 노벨 문학상 후보가 되었고, 1960년부터 사망한 1965년까지 매년 후보가 되었으며, 1960년에는 최종 후보 5명 안에 들었다.
3. 1. 탐미주의와 에로티시즘
3. 2. 문체와 서술 기법
3. 3. 시대적 배경과 사회 비판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소개일기」(疎開日記) 쇼와 19년 3월 4일 항목에 전승 소문에 대해 “소위 전과라는 것은 데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이러할 것이라고 바라는 도민의 희망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상상되어 유언이 된 것일 것이다”라는 냉정한 감상을 적고 있다.[38]전후 출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전쟁 수행자로서 국가 체제에 긍정적인 견해를 서술의 표면에 흩뿌리면서, 그 상황을 상대화하는 우의(寓意)적인 아이러니(イロニー)를 섞어나가는 수법은 『세설(細雪)』 중권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에쓰코(悦子)가 「아오기리(青桐)」라는 이름을 페테르(ペータア)에게 가르쳐주려는 장면을 통해 일독 양국의 관계를 긍정과 풍자의 양가적인 시각으로 파악하려는 방향성을 드러낸다. 당시 유럽에서 독일이 전승을 거듭하던 상황에서 육군 상층부가 승리자 편에 붙으려고 내각을 움직인 결과가 삼국 동맹의 성립이었지만, 그것은 정책상의 “의리이펜(義理一遍)”인 측면이 강했다.[38] 독일과의 협력 관계는 쇼와 19년 시점에서는 유명무실한 것이었지만, 일본인과 독일인 가정의 교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측면을 섞어 넣는 아이러니로 표현되었다.[38]
이러한 전시하의 아이러니는 호다 요시로(保田與重郎)나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등, 본래 아이러니를 본령으로 여겨지는 문학가들의 것과 비교해도 더 정교하고 신랄하다.[38] 호다나 다자이가 보인 시국에 대한 반 이상의 타협과 비교하면, 『세설(細雪)』에 보이는 아이러니의 표출은 명확한 대타성을 띤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공적인 출판을 금지된 형태로 쓰여 나감으로써 오히려 외부 세계에 대한 비판성이 높아진 결과였다.[38]
3. 4.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정치성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자신의 작품에 특정한 정치적 의도를 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작품은 당국으로부터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細雪》이 대표적이다. 후에 다니자키는 "문필가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이 어떤 권위에 의해 강제적으로 봉쇄되고, 이에 대해 한마디 반박조차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를 묵인하지는 않더라도, 깊이 의심하지도 않는다는 일반적인 풍조가 강하게 나를 압박했다."라고 말하고 있다.당국의 탄압에 저항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쓰고 세상에 묻고자 했던 자세는 물론이고, 애초에 태평양 전쟁이라는 전례 없는 상황 속에서, 그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우아하고 느린, 이른바 絵巻物과 같은 소설을 구상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니자키의 특이성을 상징하고 있다.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에 대해 "큰 정치적 상황을 에로틱하고 가혹하며 바람직한 寓話로 바꿔 버린다"는 것이며, "속세도, 정치도, 아니 이 세상 전체를 刺青을 한 여자의 등 이상의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다니자키가 전시하에서조차 이러한 사상을 관철한 것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역설적으로 정치적 태도의 표명이 될 수 있었다.
미시마에게 있어, 다니자키의 특히 전전의 여러 작품은, "오늘날보다 옛날 풍속 속에 두는 쪽이 훨씬 비밀스럽고,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쾌락적인 것"이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어우러지는 "소년"(1911년), 남성이 여성으로 분장하여 몰래 밤거리를 배회하는 "비밀"(1911년), 여성의 동성애와 그 파멸을 그린 "만자"(1928년) 등에 보이는 성적 도착의 여러 가지는, "옛날에는 선택받은 자의 쾌락이었고, 그러한 소재를 다루는 것이 일종의 세기말 취미를 만족시키고, 지식 계급의 악덕의 표현이 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에서는, 그러한 소재의 '새로움'과는 별도로, 쾌락도 지적인 방탕도 악덕의 관념성도 상실되고, 모든 성적 변질은 노골적인 인간성의 구현에 지나지 않게 되고, 그 풍취는 사라지고, 그 낭만주의는 소멸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20세에 맞이한 패전을 여러 가치관의 최대 전환점으로 보고, 전후 사회에서는 모든 타락과 방종이 자명한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면서도, 감히 전전의 "금기"에 집착하는 길을 택하고, 그 침범을 목표로 하는 것에 어떤 종류의 낭만주의를 세우려고 꾀한 미시마에게 있어서는, 다니자키가 그려낸 세계에 더욱 "새로움"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지능과 감각의 전부를 오로지 관능에 쏟음으로써 다니자키가 그려낸 "감미롭고 향기롭다" (이단자의 슬픔), 화려하고 우아한 작품 세계와, 당국으로부터의 반복되는 탄압과 세상의 선량한 체하는 풍조에 대해, 전전부터 전중, 전후를 통해 굳이 자신을 관철하는 듯한 오만하고 호화로운 반역의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다니자키를 제외하고는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다니자키 문학은 현대에 있어서야말로 유니크하고, 새로운 것이다.
3. 5. 여성 관계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1915년(다이쇼 4년)에 이시카와 치요코와 결혼했지만, 1921년(다이쇼 10년)경 치요코의 여동생이자 세이코에게 마음을 빼앗겨 부인과 불화했다.[14][44] 다니자키의 친구 사토 하루오는 치요코에게 호의를 보여 삼각관계에 빠졌고, 다니자키가 치요코를 사토에게 양보하기로 했다가 번복하는 "오다와라 사건"이 발생했다.[14][44] 사토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정어리의 노래』,『이 세 가지 것』, 다니자키는 『신과 사람 사이』를 저술했다.[14][44]1926년(다이쇼 15년)에 사토와 다니자키는 화해하고, 1930년(쇼와 5년)에 치요코는 다니자키와 이혼하고 사토와 재혼했다.[14][44] 세 사람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부인 양도 사건"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14][44]
1931년(쇼와 6년), 다니자키는 후루카와 쵸미코와 결혼했지만, 1934년(쇼와 9년) 10월에 이혼했다.[15] 이듬해 1월, 모리타 마츠코와 결혼식을 올렸다.[15] 다니자키는 『설후암야화』에서 마츠코가 임신했을 때 자신의 의향으로 낙태했다고 썼지만, 『초석』에 따르면 마츠코는 세 명의 의사로부터 건강상 낙태를 권고받았다.[30]
4. 주요 작품
; 단편
- 문신 (제2차 신사조 1910년 11월)
- 소년 (스바루 1911년 6월)
- 비밀 (중앙공론 1911년 11월)
- 악마 (중앙공론 1912년 2월)
- 공포 (오사카 니치니치 신문 1913년 1월)
- 금빛 죽음 (도쿄 아사히 신문 1914년 12월)
- 오쓰야 살해 (중앙공론 1915년 1월)
- 신동 (중앙공론 1916년 1월)
- 인어의 한탄 (중앙공론 1917년 1월)
- 마술사 (신소설 1917년 1월)
- 현장 삼장 (중앙공론 1917년 4월)
- 이단자의 슬픔 (중앙공론 1917년 7월)
- 하산 칸의 요술 (중앙공론 1917년 11월)
- 인면저 (신소설 1918년 3월)
- 금과 은 (쿠로시오 1918년 5월)
- 작은 왕국〈후에 「작은 왕국」으로 개제〉(나카가이 1918년 8월)
- 야나기유 온천의 사건 (나카가이 1918년 10월)
- 미식 클럽 (오사카 아사히 신문 1919년 1월-2월)
-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기록 (오사카 아사히 신문·도쿄 니치니치 신문 1919년 1월-2월)
- 진회의 밤 (나카가이 1919년 2월)
- 후미코의 발 (웅변 1919년 6월)
- 도상(개조 1920년 1월)
- 나 (개조 1921년 3월) -
- 불행한 어머니의 이야기 (중앙공론 1921년 3월)
- 푸른 꽃 (개조 1922년 3월)
- 아베 마리아 (중앙공론 1923년 1월)
- 붉은 지붕 (개조 1925년 7월)
- 토모다와 마츠나가의 이야기 (주부의 친구 1926년 1월-5월)
- 일본에 있어서의 클립푼 사건 (문예춘추 1927년 1월)
- 삼인법사 (중앙공론 1929년 10월-11월)
- 맹목 이야기 (중앙공론 1931년 9월)
- 아스가리 (개조 1932년 11월-12월)
- 달과 광대 (중앙공론 1949년 1월)
- 꿈의 뜬다리 (중앙공론 1959년 10월) -
; 중편·장편
- 치인의 애 (오사카 아사히 신문 1924년 3월-6월. 여성 1924년 11월-1925년 7월)
- 흑백 (오사카 아사히 신문·도쿄 아사히 신문 1928년 3월-7월)
- 만자 (개조 1928년 3월-1930년 4월 단속적)
- 료쿠이무시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도쿄 니치니치 신문 1928년 12월-1929년 6월)
- 요시노 카즈라 (중앙공론 1931년 1월-2월)
- 무슈코쿠 비화 (신청년 1931년 10월-1932년 11월) ☆
- 춘금초 (중앙공론 1933년 6월)
-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 (개조 1936년 1월·7월)
- 세설 (중앙공론 1943년 1월·3월. 부인공론 1947년 3월-1948년 10월)
- 소장 시칸의 어머니 (마이니치 신문 1949년 11월-1950년 2월)
- 열쇠 (중앙공론 1956년 1월-12월)
- 광인 노인 일기 (중앙공론 1961년 11월-1962년 5월)
- 부엌 태평기 (선데이 마이니치 1962년 11월-1963년 3월) -
4. 1. 소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발표하며 일본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초기에는 탐미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주로 썼으며, 대표작으로는 1910년에 발표한 刺青일본어가 있다.[63] 이 시기에는 少年일본어(1911), 金色の死일본어(1914) 등의 단편 소설도 발표했다.1924년에는 痴人の愛일본어를 발표하여 큰 화제를 모았다.[63] 이 작품은 서구적인 외모의 소녀 나오미에게 매혹된 한 남자의 파멸을 그린 소설로, 다니자키 문학의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蓼喰ふ虫일본어(1929), 吉野葛일본어(1931) 등을 통해 일본 전통 미학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1935년에는 武州公秘話일본어를 발표하였고, 1943년부터 1948년까지는 대표작 중 하나인 세설[64]을 연재했다. 세설은 오사카 상류층 가문의 몰락을 배경으로 네 자매의 삶과 사랑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1950년대 이후에는 鍵일본어(1956), 瘋癲老人日記일본어(1961) 등 노년의 성과 욕망을 주제로 한 소설을 발표하여 다시 한번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瘋癲老人日記일본어는 노인의 성적 욕망을 대담하게 묘사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다니자키의 작품들은 현재 저작권이 소멸되어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에 속한다.
4. 2. 희곡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여러 희곡 작품을 남겼다. 1913년에 발표된 恋を知る頃일본어 (사랑을 느낄 무렵)과 1922년에 발표된 白孤の湯일본어 (흰 여우 온천) 등이 있다. 이외에도 1910년 9월에 발표한 탄생(誕生)은 栄花物語, 에이가모노가타리일본어를 소재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딸이 태어난 것을 그리고 있으며, 1918년 2월에 발표한 형제(兄弟)는 栄花物語, 에이가모노가타리일본어에서 후지와라노 미치카네와 후지와라노 미치타카 형제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1933년 8월부터 10월까지 발표된 안면(顔世)은 仮名手本忠臣蔵, 가나데혼츄신구라일본어를 소재로 하였으며, 후에 신도 가네토가 悪党, 아쿠토일본어로 영화화했다.4. 3. 수필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다양한 수필을 집필했다. 1933년에는 미학에 관한 에세이인 陰翳礼讃일본어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그림자의 찬미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그는 또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발언에 대한 반론을 담은 료설록을 1927년에 발표했다. 같은 해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부고를 듣고 그와 관련된 글을 쓰기도 했다.
1932년에는 오사카의 언어와 문화를 도쿄와 비교하는 내용을 담은 "내가 본 오사카 및 오사카 사람들"을 발표했다. 1934년에는 문장독본을 출간했다.
인형 조루리를 치매의 예술이라고 하면서도 귀여운 내 아이라고 평한 "소위 치매의 예술에 관하여"는 1948년에 발표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니혼바시를 그린 "유소시대"는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연재되었다.
5. 한국어 번역
민음사의 쏜살문고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 전 10권을 냈다. 선집의 제1~9권은 소설이고, 제10권은 수필·평론이다.
- 1권: 문신, 소년, 작은 왕국(박연정 외 옮김, 2018년 8월 3일)
- 2권: 인어의 탄식, 마술사, 금빛 죽음(양윤옥 옮김)
- 3권: 치인의 사랑(김춘미 옮김)
- 4권: 여뀌 먹는 벌레(임다함 옮김, 2020년 1월 28일)
- 5권: 요시노 구즈, 장님 이야기(엄인경 옮김, 2018년 8월 3일)
- 6권: 무주공 비화(류정훈 옮김)
- 7권: 슌킨 이야기(박연정 외 옮김, 2018년 8월 3일)
- 8권: 열쇠(김효순 옮김)
- 9권: 미친 노인의 일기
- 10권: 활동 사진의 현재와 장래, 영화 잡감, 영화 감상-〈슌킨 이야기〉 영화화 무렵에, 내가 본 오사카와 오사카 사람, 음예 예찬, 반소매 이야기, 어린 시절 먹거리의 추억(김보경 옮김, 2020년 1월 28일)
열린책들에서 세설을, 산지니에서 희곡 선집을 냈다.
다음과 같은 희곡 5편이 번역되었다.
- 사랑을 느낄 무렵
- 기혼자와 이혼자
- 흰 여우 온천
- 만돌린을 켜는 남자
- 돈을 빌리러 온 남자
《세설》(細雪)이 전 2권으로 번역되었다.
그는 오스카 와일드의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天佑社 1919년 3월), 토머스 하디의 그리브가의 바바라 이야기(중앙공론 1927년 12월[59]), 스탕달의 카스트로의 수녀(여성 1928년 1월-4월)☆,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모노가타리(중앙공론사 1939년 1월-1941년 7월)를 번역했다.
6. 수상 경력
7. 기념관
아시야시에는 아시야시 다니자키 준이치로 기념관이 있다. 또한 의송암(다니자키 준이치로 구거)에서는 『세설』을 집필했다. 후타 토우카 구거(다니자키 준이치로 구거)는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인』의 무대이며, 이곳에서 『겐지 이야기 현대어역』, 『반소데 이야기』를 집필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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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崎精二『生ひたちの記』には、里見氏から出た家柄とある。また、潤一郎の『朱雀日記』「嵯峨野」の章には、新田義貞の妾だった江澤局(えざわのつぼね)が父方の先祖だったと記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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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品 第二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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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崎潤一郎全集 第二十二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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決定版 三島由紀夫全集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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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崎潤一郎全集 第四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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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光金欄帖
중공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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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棚のスフィンクス
논창사
(출판일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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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の有名一族 近代エスタブリッシュメントの系図集
환동사신서
2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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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偽書が揺るがせた日本史
山川出版社
202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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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家の手料理
평범사
202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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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間モダニズム 六甲山麓に花開いた文化、明治末期‐昭和15年の軌跡
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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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翻訳小説
(출판일 정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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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人魚の嘆き・魔術師
春陽堂書店
2020
[61]
서적
谷崎潤一郎の文学
中央公論社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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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小田原文学館
https://www.city.oda[...]
小田原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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