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안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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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안 1세는 1387년부터 1396년까지 아라곤 왕국의 왕이었다. 그는 아라곤의 페드로 4세와 시칠리아의 엘레오노르의 장남으로, 루시용의 페르피냥에서 태어났다. 그는 친프랑스 정책을 펼쳤으며, 바르의 욜란다와 결혼했다. 왕위에 오른 후, 그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그는 카스티야와 동맹을 맺고 나바라와 조약을 체결했으며, 아르마냑 백작의 공격을 격퇴하고, 그리스의 영토를 잃었으며, 유대인에 대한 법률을 공포했다. 그는 바르셀로나 문화를 후원하고, 사르데냐를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후안 1세는 사냥 중 사망했으며, 그의 동생 마르틴이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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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안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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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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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 아라곤의 왕 발렌시아의 왕 마요르카의 왕 바르셀로나 백작 |
통치 기간 | 1387년 1월 6일 – 1396년 5월 19일 |
선임 | 페드로 4세 |
후임 | 마르틴 |
배우자 | 마르타 (1373년 결혼, 1378년 사망) 비올란테 (1380년 결혼) |
자녀 | 조안나, 포아 백작부인 욜란다, 앙주 여공작 그 외 |
가문 | 바르셀로나 가문 |
아버지 | 페드로 4세 |
어머니 | 엘레오노르 데 시칠리아 |
출생일 | 1350년 12월 27일 |
출생 장소 | 페르피냥 |
사망일 | 1396년 5월 19일 (45세) |
사망 장소 | 포샤 |
매장지 | 포블레 수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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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
별칭 | 사냥꾼 (el Caçador) 친절의 연인 (l'Amador de la Gentilesa) 부주의한 자 (el Descurat) |
2. 생애
페드로 4세와 엘레오노르의 장남으로, 페르피냥에서 태어났다. 시를 즐기고 친프랑스 성향을 가졌으며,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바르의 욜란다와 결혼했다. 왕비 욜란다는 남편이 자주 병을 앓아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후 친프랑스 정책을 펴고 아비뇽 교황을 지지했으며, 카스티야, 나바라와 관계를 맺었다. 치세 동안 아르마냑 백작 장 3세의 침입을 격퇴하고, 바르셀로나 콘시스토리를 설립하여 문화를 후원했으나,[3] 그리스 지역 영토 상실, 사르데냐에서의 어려움, 재정 관리 실패 등 문제점을 드러냈다.[3]
아버지 페드로 4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2] 정치보다는 예능에 관심이 많아 국정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3] 1396년 사냥 중 낙마 사고로 사망했으며,[4] 재정난으로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4] 아들이 없어 동생 마르틴이 왕위를 계승했다.(Bisson, 1986, p. 125)
2. 1. 초기 생애
존은 페드로 4세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엘레오노르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엘레오노르는 시칠리아의 페드로 2세의 딸이었다. 그는 당시 아라곤 왕관에 속했던 루시용의 수도 페르피냥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를 좋아하는 평범한 성격의 인물이었으며, 친프랑스적인 성향을 가졌다. 아버지 페드로 4세는 그가 시칠리아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그의 뜻과는 달리 바르의 욜란다와 결혼했다. 그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으며, 부인 욜란다는 남편인 존이 자주 병을 앓았기 때문에 종종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2. 2. 결혼
추안 1세는 친프랑스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버지 페드로 4세의 바람과는 달리 바르의 욜란다와 결혼했다. 페드로 4세는 아들이 시칠리아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기를 원했었다. 추안 1세의 마지막 결혼은 행복했으며, 그의 아내 욜란다는 국왕이 자주 병을 앓았기 때문에 종종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2. 3. 치세
후안 1세는 아버지 페드로 4세와는 자신의 결혼 문제 등으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았다.[2] 그는 시를 즐기는 인물이었으며, 친프랑스 성향을 가졌다.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욜랑드 드 바르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 후안 1세가 자주 병을 앓았기 때문에 왕비 욜랑드가 정치에 자주 관여했다.왕위에 오른 후, 후안 1세는 아버지 페드로 4세의 친영국 정책을 폐기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서방 분열 시기에는 아비뇽 계열의 대립교황인 클레멘스 7세를 계속 지지했다. 또한 카스티야와 동맹을 맺었고, 1388년에는 나바라와 국경 조약을 확정했다.
1389년부터 1390년까지 아라곤은 봉신국인 마요르카 왕국을 침공한 아르마냑 백작 장 3세의 군대와 싸웠다. 침략은 엠포르다에서 지로나까지 이어졌으나, 1390년 후안 1세의 동생인 마르틴이 이끄는 아라곤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같은 시기인 1388년부터 1390년 사이, 그리스에 있던 아테네 공작령과 네오파트라스 공작령의 영토를 점차 상실했다.
1391년, 후안 1세는 아라곤 왕국 내 여러 도시에 거주하는 유대인 관련 법령을 공포했다. 같은 해, 봉신 왕국인 시칠리아에서는 주민들이 나폴리의 루이 2세를 왕으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켜 이에 직면해야 했다.
후안 1세는 바르셀로나 문화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는 1393년 프랑스 툴루즈의 제도를 본떠 바르셀로나 콘시스토리(Jocs Florals)를 설립하여 문예를 장려했다.
사르데냐 문제에 있어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아라곤은 하이메 2세 시대부터 사르데냐 정복을 추진하여 섬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1380년대 들어 독립 세력이던 아르보레아가 반란의 중심지가 되었다. 엘레오노르 데 바스-세라의 활약으로 아라곤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후안 1세는 통치 기간 내내 사르데냐의 반란을 진압하고 영토를 회복하려 했으나, 오히려 사르데냐 전체를 거의 상실하는 결과를 맞았다.
그는 시와 문화를 즐겼으나, 정치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아 왕비 욜랑드 드 바르와 측근들에게 국정을 맡기는 경향이 있었다. 이로 인해 신하들의 불만이 커졌으며, 사치와 낭비로 왕실 재정은 파탄에 이르렀다.[3] 후안 1세의 치세는 재정 관리 실패가 두드러졌다.
1396년 지로나 현 포샤 근처 숲에서 사냥 중 낙마 사고로 사망했는데,[4] 당시 재정난이 심각하여 왕에게 걸맞은 장례를 치르기도 어려웠다고 전해진다.[4] 두 명의 아내에게서 얻은 아들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4] 동생 마르틴이 왕위를 계승했다.
2. 4. 사망
그는 1396년 지로나 현 포샤 근처 숲에서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4] 당시 왕실은 재정난에 시달려 왕에게 걸맞은 관조차 제대로 만들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4] 추안 1세는 두 아내에게서 얻은 아들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그의 동생 마르틴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Bisson, 1986, p. 125)3. 자녀
추안 1세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자녀를 두었다. 첫 번째 부인 아르마냐크의 마르타와 사이에서는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고, 두 번째 부인 바르의 욜랑드와 사이에서는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 각 자녀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아르마냑의 마르타와의 사이
추안 1세는 1373년 6월 24일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의 딸인 아르마냐크의 마르타 (1347년 2월 18일 ~ 1378년 10월 23일)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다.- 하우메 (발렌시아, 1374년 6월 24일 ~ 발렌시아, 1374년 8월 22일)
- 후아나 (다로카, 1375년 10월 ~ 발렌시아, 1407년 9월): 1392년 6월 4일 바르셀로나에서 푸아 백작 마티외와 결혼했다. 후아나는 아버지 추안 1세 사후 아라곤 왕위를 주장했으며, 남편 마티외는 아라곤 영토를 침공했으나 새로운 국왕 마르틴에게 격퇴당했다. 후아나는 자녀 없이 사망했다.
- 후안 (바르셀로나, 1376년 7월 23일 ~ 1376년 7월 24~31일)
- 알폰소 (1377년 9월 9일 ~ 1377년)
- 레오노르 (사라고사, 1378년 7월 13일 ~ 사라고사, 1378년)
3. 2. 바르의 욜란다와의 사이
1380년 2월 2일 바르의 욜랑드 (1365년경 – 1431년 7월 3일), 바르 공작 로베르 1세와 마리 드 발루아의 딸과 결혼하여 다음 자녀를 두었다.이름 | 생몰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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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메 | 1382년 3월 22일 – 1388년 9월 1일 | 지로나 공작이자 세르베라 백작 |
욜랑드 | 사라고사 1384년 – 소뮈르 1442년 11월 14일 | 1400년 12월 2일 나폴리의 루이 2세와 결혼 |
페르난도 | 몬손 1389년 3월 18일 – 1389년 10월 | 지로나 공작이자 세르베라 백작 |
안토니아 | 1391년 – 1392년 | |
레오노르 | 1393년 1월 2일 – 1393년 7월 | |
페르 | 1394년 1월 13일 – 1394년 1월 | 지로나 공작이자 세르베라 백작 |
후아나 | 1396년 1월 12일 – 1396년 8월 4일 |
4. 가계도
테레사 데 엔텐사
캐린시아의 엘리자베트
블랑슈 드 앙주
곰발드 데 엔텐사
앙틸론의 콘스탄스
앙주의 엘레오노르
캐린시아의 오토 3세
레그니차의 에우페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