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 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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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릭 베리는 1944년 뉴저지주 엘리자베스에서 태어난 미국의 은퇴한 프로 농구 선수이다. 그는 NBA와 ABA에서 모두 활약하며, NBA 신인상, 득점왕,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8번의 NBA 올스타, 4번의 ABA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1987년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릭 베리는 독특한 언더핸드 자유투 폼으로 높은 성공률을 기록했으며, 공격적인 플레이 스타일과 뛰어난 투쟁심으로 유명했다. 은퇴 후에는 방송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다섯 명의 아들 중 넷이 프로 농구 선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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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 베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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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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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44년 3월 28일 |
출생지 | 뉴저지주 엘리자베스 |
신장 | 201cm |
체중 | 93kg |
포지션 | 스몰 포워드 |
등번호 | 24, 2, 4 |
고등학교 | (로젤 파크, 뉴저지) |
대학교 | 마이애미 대학교 (1962–1965) |
별칭 | The Miami Greyhound (더 마이애미 그레이하운드) |
선수 경력 | |
드래프트 연도 | 1965년 |
드래프트 순위 | 1라운드, 2순위 |
드래프트 팀 |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 |
프로 시작 연도 | 1965년 |
프로 은퇴 연도 | 1980년 |
소속팀 |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 (–) 오클랜드 오크스 (1968–1969) 워싱턴 캡스 (1969–1970) 뉴욕 네츠 (1970–1972)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 휴스턴 로케츠 (–) |
코치 경력 | |
코치 시작 연도 | 1992년 |
코치 종료 연도 | 2000년 |
소속팀 | 시더 래피즈 샤프슈터스 (1992) 포트 웨인 퓨리 (1993–1994) 뉴저지 쇼어캣츠 (1998–1999) 플로리다 시 드래곤스 (2000) |
수상 경력 | |
NBA | NBA 챔피언 (1975) NBA 파이널 MVP (1975) 8× NBA 올스타 (, , –) NBA 올스타 게임 MVP (1967) 5× 올-NBA 퍼스트 팀 (, , –) 올-NBA 세컨드 팀 () NBA 신인왕 (1966)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66) NBA 득점왕 () NBA 스틸왕 () NBA 50주년 기념 올타임팀 NBA 75주년 기념팀 No. 24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영구 결번 |
ABA | ABA 챔피언 (1969) 4× ABA 올스타 (1969–1972) 4× 올-ABA 퍼스트 팀 (1969–1972) |
대학 | 컨센서스 퍼스트 팀 올-아메리칸 (1965) NCAA 득점왕 (1965) No. 24 마이애미 허리케인스 영구 결번 |
통계 | |
리그 | ABA 및 NBA |
득점 | 25,279 (24.8 ppg) |
리바운드 | 6,863 (6.7 rpg) |
어시스트 | 4,952 (4.9 apg) |
기타 정보 | |
명예의 전당 | 릭 배리 |
대학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연도 | 2006년 |
2. 생애
릭 베리는 미국 뉴저지주 엘리자베스에서 태어나 로젤 파크에서 성장했다. 마이애미 대학교 농구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주목받았다.
1965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에 지명되어 NBA 경력을 시작했으며, 데뷔 시즌 NBA 신인상을 수상하고 이후 득점왕에 오르는 등 빠르게 스타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1967년 계약 및 구단과의 갈등으로 경쟁 리그인 ABA로 이적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고, 여러 팀을 거치며 ABA에서도 정상급 선수로 활약했다. 법적 분쟁 끝에 1972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복귀하여 팀의 핵심 선수로 활동했다. 1974-75 시즌에는 팀을 NBA 파이널 우승으로 이끌고 파이널 MVP에 선정되었다.
이후 휴스턴 로키츠에서 선수 생활 말년을 보내고 1980년 은퇴했다. 그는 NBA와 ABA 양대 리그에서 모두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아래에서 두 손으로 던져 올리는 독특한 '언더핸드' 자유투 폼으로 유명했다. 1978-79 NBA 시즌에는 이 방식으로 94.7%라는 높은 자유투 성공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2. 1. 유년 시절
리처드 프랜시스 데니스 배리 3세는 1944년 3월 28일 뉴저지주 엘리자베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리처드 배리 주니어는 지역 세미프로팀에서 활동한 농구 선수였으며, 성 피터 폴 교구립 학교에서 농구 코치를 맡기도 했다. 아버지는 어린 배리와 4살 위 형 데니스에게 농구의 기초를 엄격하게 가르쳤고, 때로는 작은 실수에도 체벌을 가할 정도였다.5학년 때 배리는 학교 농구 대표팀에 합류했다. 팀 동료 대부분이 중학생이었음에도 배리는 키가 크고 빨랐으며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형 데니스를 따라다니며 나이가 많은 선수들과 함께 플레이한 경험도 그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농구 영재 교육을 받았지만, 정작 이 시기에 배리가 가장 열중했던 스포츠는 야구였다. 그는 지역 뉴욕 자이언츠의 슈퍼스타 윌리 메이스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를 동경하여 등번호 24번을 사용했으며, 이 번호는 그의 농구 선수 생활 동안 계속 사용되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배리 가족은 뉴저지주 로젤 파크로 이사했다. 배리는 로젤 파크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농구와 야구 대표팀에서 모두 활약했다. 야구에서는 타율 5할을 기록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2군 취급을 받는 것에 불만을 품고 코치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2학년 때는 주 대표팀에 선정되기도 했으나, 점차 야구에 대한 열정을 잃어갔다. 반면 농구 코트에서는 뛰어난 볼 핸들링 기술과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주 대표팀에 두 번이나 선발되었다. 당시 키가 약 1.83m 이상이었던 배리는 호리호리한 체격이었지만, 매우 격렬한 플레이 스타일을 가졌다. 그는 뛰어난 점프 슈터였을 뿐만 아니라 골밑으로 적극적으로 돌파하여 많은 자유투 기회를 얻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이미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독특한 "언더핸드" 방식의 자유투를 익혔다. 배리는 1962년에 로젤 파크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 2. 대학 시절 (마이애미 대학교)
릭 베리는 고등학교 졸업 후 30개 이상의 장학금 제안을 받았지만, 마이애미 대학교를 선택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마이애미 허리케인스의 브루스 헤일 감독이 추구하는 빠른 템포의 프로 스타일 농구가 베리의 기술과 운동 능력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또한 뉴저지주의 춥고 험한 겨울을 피해 따뜻한 곳에서 뛰고 싶었던 개인적인 희망과, 고등학교 시절 코치와의 갈등으로 농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던 베리에게 선수들과 함께 땀 흘리고 인간적으로 다가가는 헤일 감독의 지도 방식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시 마이애미 대학교는 명문대가 아니어서 전용 체육관 없이 인근 회관이나 군의 무기고를 빌려 연습하는 등 시설이 부족했지만, 헤일 감독의 인품 덕분에 선수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나오지 않았다. 또한, 당시 NCAA 규정상 1학년은 공식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기에, 마이애미 대학교는 1학년 선수에게 독립적인 스케줄을 편성하여 경기 경험을 쌓게 해주었다. 베리는 이곳에서 미래의 아내이자 헤일 감독의 딸인 파멜라를 만나기도 했다.1학년 시즌을 마친 베리는 NCAA 공식 경기에 출전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당시 팀의 에이스는 약 2.13m (약 2.1m)의 센터 마이크 맥코이였지만, 헤일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맥코이도 NBA에 갈 수 있겠지만, 2학년인 릭 베리야말로 장차 위대한 프로 선수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베리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 말에 자극받은 베리는 매 시즌 기량을 발전시켰다.
시즌 | 평균 득점 | 평균 리바운드 | 비고 |
---|---|---|---|
1962-63 (2학년) | 19.0 | 14.6 | |
1963-64 (3학년) | 32.2 | 16.6 | |
1964-65 (4학년) | 37.4 | 18.3 | NCAA 1부 리그 득점왕 |
대학 3시즌 동안 평균 29.8득점 16.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세 차례 올-아메리칸에 선정되었지만, 1964-65 시즌에는 마이애미 대학교 농구 프로그램이 보호 관찰 상태였기 때문에 NCAA 토너먼트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뛰어난 대학 시절 활약에도 불구하고, 프로 팀들은 베리를 평가할 때 그의 문제 행동을 우려했다. 2학년 때는 상대 선수와 난투극 직전까지 갔고, 3학년 때는 로욜라 대학교와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의 턱을 때려 골절시키는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격한 성격과 더불어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NBA의 힘든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베리 자신은 뉴욕 닉스에 지명되기를 바랐지만, 1965년 NBA 드래프트에서 닉스는 1라운드 지명권을 포기하고 지역 선수인 빌 브래들리를 지명했다. 결국 베리는 전체 2순위로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훗날 베리는 1976년 마이애미 대학교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그의 등번호 24번은 마이애미 허리케인스 농구팀 역사상 영구 결번된 두 개의 번호 중 하나가 되었다.
2. 3. 프로 선수 시절
릭 배리는 마이애미 대학교 시절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1965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에 지명되며 NBA 경력을 시작했다. 워리어스에서 두 시즌 동안 활약하며 NBA 신인상 수상과 득점왕 등극 등 화려한 시작을 알렸다.1967년, 배리는 계약 문제와 코치와의 갈등 등으로 인해 경쟁 리그인 ABA의 오클랜드 오크스로 이적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는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법적 분쟁으로 인해 한 시즌을 쉬기도 했다. ABA에서는 오클랜드 오크스, 워싱턴 캡스, 뉴욕 네츠 등 여러 팀을 거치며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로 활약했다.
1972년, 법원의 판결에 따라 다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복귀했다. 워리어스 복귀 후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1974-75 시즌 팀의 NBA 파이널 우승을 이끌었고, 자신은 파이널 MVP에 선정되었다.
이후 1977-78 시즌까지 워리어스에서 활약하다가 휴스턴 로키츠로 이적하여 두 시즌을 더 보냈다. 로키츠에서는 베테랑으로서 포인트 포워드 역할을 수행하며 팀에 기여했고, 특히 1978-79 NBA 시즌에는 94.7%라는 높은 자유투 성공률을 기록했다. 1980년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NBA와 ABA 양대 리그에서 모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선수로 평가받는다.
2. 3. 1.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 (1965-1967)
릭 배리가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에서 NBA 데뷔 시즌을 보낸 1965-66 NBA 시즌에 팀은 직전 시즌 17승 63패의 부진에서 벗어나 35승 45패로 크게 발전하며 정규 시즌 마지막까지 플레이오프 진출 경쟁을 벌였다. 이는 윌트 체임벌린을 트레이드로 보낸 후 어려움을 겪던 팀에 배리가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결과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의 오랜 방송인 빌 킹은 배리의 길고 날씬한 체형과 빠른 움직임, 뛰어난 본능을 보고 "마이애미 그레이하운드"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배리는 데뷔 시즌에 경기당 평균 25.7득점과 10.6리바운드(리그 10위)를 기록하고, 자유투 성공률 86.2%(리그 2위)를 달성하며 NBA 신인상을 수상했다. 또한 신인임에도 올 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고, NBA 올스타전에도 출전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워리어스에는 네이트 서먼드와 같은 명선수도 있었지만, 배리는 입단 첫해부터 팀 공격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과거 어시스트왕 경력이 있는 포인트 가드 가이 로저스의 패스를 받아 빠르게 득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년 차인 1966-67 NBA 시즌에는 새로운 감독 빌 셔먼의 지도 아래 더욱 성장하여 평균 35.6득점과 9.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 시즌 평균 득점은 7년간 윌트 체임벌린이 지켜온 득점왕 자리를 빼앗은 것이었으며, 당시 NBA 역사상 8번째로 높은 시즌 평균 득점 기록이었다. (2021년 기준 시즌 평균 35득점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배리, 체임벌린, 마이클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 제임스 하든 5명뿐이다.) 또한, 1966년 12월 6일 뉴욕 닉스와의 경기에서는 한 쿼터에만 14개의 자유투를 성공시켜 NBA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67 NBA 올스타전에서는 윌트 체임벌린, 오스카 로버트슨, 빌 러셀 등 전설적인 선수들이 포함된 동부 팀을 상대로 38득점을 올리며 서부 팀의 승리를 이끌었고, MVP를 수상했다. 배리의 활약에 힘입어 워리어스는 44승 37패의 성적으로 NBA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엘진 베일러와 제리 웨스트가 이끄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3승 무패로 꺾었고, 디비전 결승에서는 루 허드슨이 이끄는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를 4승 2패로 제압하며 팀을 1967 NBA 파이널로 이끌었다. 이는 불과 3년 전 17승에 그쳤던 팀을 2년 만에 파이널 무대에 올려놓은 성과였다.
파이널 상대는 윌트 체임벌린이 이적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였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보스턴 셀틱스의 8년 연속 파이널 우승을 저지하고 정규 시즌에서 68승을 거둔 강력한 팀이었으며, 훗날 "역대 가장 위대한 팀"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워리어스는 이러한 강팀을 상대로 선전했으나, 6경기 끝에 2승 4패로 패배하며 우승에는 실패했다. 배리는 시리즈 내내 왼쪽 무릎 부상으로 경기 당일 코르티손 주사를 맞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3차전에서 55득점(당시 파이널 역대 2위 기록)을 포함하여 시리즈 평균 40.8득점을 기록하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이 평균 득점 기록은 1993년 마이클 조던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NBA 파이널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었다. 당시 상대 팀 에이스였던 윌트 체임벌린은 "그는 너무 잘해서 우리 팀은 세 명의 다른 선수들이 번갈아 그를 막아야 했다. 그가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2. 3. 2. ABA 시절 (1968-1972)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구단주 프랭클린 미울리와의 미지급 인센티브 문제로 갈등을 겪던 베리는 경쟁 리그인 ABA의 오클랜드 옥스로 이적을 결정했다. 당시 옥스의 구단주는 가수 팻 분이었으며, 베리에게 파격적인 계약 조건을 제시했다. 또한 마이애미 대학 시절 베리의 코치이자 장인이었던 브루스 헤일을 감독으로 영입했다. 이로써 베리는 라이벌 리그로 이적한 최초의 스타급 NBA 선수가 되었다. 계약 조건은 연봉 7.5만달러에 옥스 지분 15%, 그리고 팀 입장 수입이 60만달러를 넘을 경우 추가로 5%를 받는 것이었다. 이 결정에 대해 베리는 "사람들이 나를 배신자라고 부르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것은 내 가족을 부양하는 방식이다. 직업을 바꾸는 다른 사람들을 불충하다고 말하지 않듯이, 나에게도 그래야 한다"고 항변했다.[5]하지만 당시 NBA 팀들은 선수 계약에 1년 연장 옵션을 가지고 있었고, 워리어스는 즉시 이 옵션을 행사했다. 법원은 워리어스 계약의 보류 조항 유효성을 인정하며 베리가 1967-68 시즌을 옥스에서 뛰는 것을 금지했다.[6] 베리의 소송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커트 플러드가 보류 조항에 대해 미국 대법원까지 끌고 간 소송보다 2년 앞선 것이었다. 플러드의 소송이 더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베리가 미국 프로 스포츠에서 보류 조항에 법적으로 도전한 최초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7] 이 과정에서 베리는 이기적이고 돈만 밝힌다는 부정적인 여론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당시 많은 NBA 선수들 역시 ABA를 경력 발전의 기회로 보고 있었다.
법원의 결정으로 1967-68 시즌을 뛰지 못한 베리는 옥스의 방송팀에서 활동했다. 1968-69 시즌을 앞두고 옥스는 베리의 전 워리어스 감독이었던 알렉스 해넘을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8] 코트로 돌아온 베리는 ABA 데뷔 시즌부터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경기당 평균 34.0점으로 리그 득점 1위를 차지했고, 자유투 성공률(.888)에서도 리그 선두에 올랐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오크스는 서부 해안 연고 팀 최초로 프로 농구 리그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베리의 시즌은 예기치 않게 일찍 끝났다. 1968년 12월 27일 뉴욕 네츠와의 경기 후반, 상대 선수 켄 윌번에게 블라인드 사이드 가격을 당해 왼쪽 무릎 인대가 파열되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1969년 1월 복귀를 시도했지만 부상이 악화되어 남은 시즌을 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단 35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뛰어난 활약을 인정받아 ABA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팀의 핵심 선수인 베리가 부상으로 빠졌음에도, 오크스는 해넘 감독의 지도 아래 60승 18패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서부 디비전 1위를 차지했다. 1969년 ABA 플레이오프에서는 덴버 로키츠와 뉴올리언스 버커니어스를 차례로 꺾고, 챔피언십 라운드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4승 1패로 제압하며 ABA 정상에 올랐다.
리그 우승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크스는 흥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베리의 시즌 아웃 공백이 컸고, 같은 연고지에 더 오래된 NBA 팀인 워리어스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홈 경기 평균 관중은 약 2,800명에 불과했다. 결국 구단주 팻 분은 두 시즌 동안 200만달러가 넘는 손실을 본 후 팀 매각을 결정했다. 1968년 8월, 팀은 부동산 변호사이자 전 볼티모어 불리츠 구단주였던 얼 포먼이 이끄는 그룹에 인수되었고, 팀은 즉시 워싱턴 D.C.로 연고지를 이전하여 워싱턴 캡스가 되었다.
베리는 마지못해 1969-70 시즌을 워싱턴 캡스에서 뛰었다. 그는 처음에 "내가 워싱턴에 가고 싶었다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것"이라며 팀 합류를 거부하기도 했다. 결국 팀에 합류했지만 첫 32경기에 결장했고, 서부 디비전에 속해 있으면서 동부 해안에 연고지를 둔 탓에 힘든 원정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캡스는 44승 40패의 준수한 성적으로 서부 디비전 3위를 기록했다. 베리는 무릎 부상 여파로 52경기만 뛰었음에도 경기당 평균 27.7점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 2위에 올랐다. 플레이오프에서는 덴버 로키츠에게 7차전 접전 끝에 패배했는데, 베리는 원정에서 열린 7차전에서 52득점을 올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이는 프로 농구 역사상 플레이오프 7차전 최고 득점 기록이었다.
1970-71 시즌부터 베리는 뉴욕 네츠 소속으로 뛰었다. 그는 두 시즌 동안 네츠에서 활약하며 ABA를 대표하는 스타로서의 면모를 이어갔다. 1970-71 시즌에는 평균 29.4점, 6.8리바운드, 5.0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자유투 성공률(.890) 1위를 차지했다. 1971-72 시즌에는 80경기에 출전하여 평균 45.2분이라는 엄청난 출전 시간을 소화하며 평균 31.5점으로 ABA 득점왕에 올랐고, 7.5리바운드, 4.1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자유투 성공률(.878)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두 시즌 연속 ABA 올스타에도 선정되었다.
하지만 베리의 ABA 생활은 법적 문제로 다시 한번 전환점을 맞았다. 베리 복귀에 집념을 보이던 워리어스 구단주 프랭클린 미울리는 1971년에 다시 소송을 제기했고, 1972년 6월 23일 캘리포니아 법원은 베리가 3년 전 워리어스와 맺었던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네츠와의 계약이 만료된 베리가 워리어스 외 다른 팀에서 뛰는 것을 금지했다. 결국 10월 6일 네츠는 베리를 방출했고, 베리는 5년 만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로써 베리는 NBA 데뷔 후 7년 동안 두 리그, 세 팀, 네 도시를 거치는 파란만장한 선수 생활 초기를 보냈다.
2. 3. 3.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복귀 (1972-1978)
1972년 6월 23일, 미국 지방 법원 판사는 뉴욕 네츠와의 계약이 만료된 후 베리가 1969년에 체결한 5년 계약 때문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외의 다른 팀에서 뛰는 것을 금지하는 예비 금지 명령을 내렸다.[10] 1972년 10월 6일, 네츠는 베리를 방출했고 그는 6년 만에 워리어스로 복귀했다.[11]베이 에어리어로 돌아온 베리는 이전과 달랐다. 몸무게를 약 9.07kg 늘려 더 강인해졌고, 슛 범위도 넓어졌으며 (당시 NBA에는 3점슛이 없었음), 패스 감각까지 발전하여 선수로서 한 단계 성장했지만, 오클랜드 시절 입은 무릎 부상이라는 부담도 안고 있었다. 워리어스 복귀 첫 시즌인 1972-73 시즌에는 평균 22.9득점으로 프로 데뷔 이후 가장 낮은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향상된 패스 능력으로 NBA에서는 자신의 최고 기록인 평균 4.9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자유투 성공률 90.2%로 NBA에서 처음으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완벽한 몸 상태는 아니었지만, 베리는 올-NBA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베리가 없는 동안 워리어스는 네이트 서몬드가 리그를 대표하는 베테랑 센터로 성장했고, 제프 멀린스와 카지 러셀 등이 백코트를 구성했으며, 알 애틀스가 감독을 맡고 있었다. 1972-73 시즌 워리어스는 47승 35패를 기록했고,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카림 압둘 자바가 이끄는 60승의 밀워키 벅스를 4승 2패로 꺾는 이변을 일으켰다.
다음 1973-74 시즌에는 평균 25.1득점, 6.8리바운드를 기록했고, 평균 6.1 어시스트는 리그 8위, 이 해부터 측정된 스틸은 평균 2.1개로 리그 5위에 올랐다. 평균 25.1득점은 리그 5위, 자유투 성공률 89.9%는 리그 2위를 기록하며 주요 4개 부문에서 리그 톱 10에 드는 다재다능한 활약을 펼친 베리는 올-NBA 퍼스트 팀에 복귀했다. 또한 3월 26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의 경기에서는 커리어 하이인 64득점을 기록했다. 이 경기에서 베리는 전반에 19득점에 그쳤지만, 후반에는 필드골 21개를 성공시키며 45점을 몰아넣었다. 하지만 베리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워리어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1974-75 시즌을 앞두고 워리어스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10년간 팀을 지탱해 온 프랜차이즈 스타 네이트 서몬드를 트레이드하고, 주축 선수였던 카지 러셀도 내보냈다. 새로운 주전 센터 클리포드 레이는 서몬드만큼의 선수가 아니었고, 제프 멀린스도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했으며, 주목할 만한 전력은 신인 자말 윌크스 정도였기에 워리어스의 새 시즌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 속에서 30세가 된 베리는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는 평균 30.6득점, 5.7리바운드, 6.2어시스트, 2.9스틸, 자유투 성공률 90.4%를 기록했다. 득점은 밥 맥아두에 이어 2위, 어시스트는 6위를 기록했으며, 스틸과 자유투 성공률 부문에서는 모두 1위를 차지했다. 플레이오프 진출조차 불투명했던 워리어스는 베리의 맹활약과 알 애틀스 감독의 지도력에 힘입어 전년보다 좋은 48승 34패를 기록하며 디비전 1위에 올랐다. 애틀스 감독은 10명의 선수를 기용하는 로테이션으로 효과적인 공격을 펼쳤고, 팀 평균 득점 108.5점은 리그 1위를 기록했으며, 9명의 선수가 시즌 총 1,000분 이상 출전했다. 애틀스 감독이 도입한 압박 수비 역시 워리어스의 강력한 무기가 되었고, 트레이드 당시 큰 기대를 받지 못했던 클리포드 레이는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신인 윌크스는 베리가 9년 전에 수상했던 신인왕을 차지했지만, MVP급 활약을 펼친 베리는 밥 맥아두에게 밀려 MVP 수상에는 실패했다. 베리 자신은 리그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에 MVP를 놓친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1번 시드를 획득한 워리어스는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시애틀 슈퍼소닉스를 4승 2패로 꺾었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제리 슬론, 밥 러브가 버티고 있으며 공교롭게도 서몬드가 이적한 팀이기도 한 시카고 불스와 맞붙었다. 리그 최고의 공격력을 가진 워리어스와 리그 최고의 수비력을 가진 불스는 정규 시즌 성적도 단 1경기 차이였으며,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으로 이어졌다. 이 시리즈에서 베리는 다소 부진했고, 승부가 결정되는 7차전에서는 경기 막판 중요한 순간에 벤치로 물러나기도 했지만, 워리어스는 힘겹게 불스를 꺾었다. 베리 역시 경기 종료 직전 코트로 돌아와 승리를 확정 짓는 중요한 슛 몇 개를 성공시켰다. 4승 3패로 불스를 물리친 워리어스는 8년 만에 NBA 파이널 진출을 확정했다.
예상을 뒤엎고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워리어스의 파죽지세는 여기까지일 것으로 여겨졌다. 파이널 상대인 워싱턴 불리츠는 엘빈 헤이즈, 웨스 언셀드를 보유한 강팀이었고, 정규 시즌에는 워리어스를 압도하는 60승을 거두었다. 워리어스는 정규 시즌 맞대결에서도 불리츠에게 1승 3패로 열세였기에, 대부분 워리어스의 패배를 예상했다. 그러나 이 시즌의 신데렐라였던 워리어스는 이 큰 무대에서도 예상을 뒤엎는 대이변을 일으켰고, 이 결과는 종종 NBA 파이널 역사상 가장 큰 이변으로 평가받는다. 파이널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경기장 사정으로 인해, 첫 경기는 홈 코트 어드밴티지를 가진 불리츠의 홈에서 치르고, 다음 두 경기는 워리어스의 홈에서, 이어진 두 경기는 다시 불리츠의 홈에서, 나머지 두 경기는 워리어스와 불리츠의 홈에서 번갈아 치르는 1-2-2-1-1 방식의 일정이 짜여졌다. 이는 일반적인 2-2-1-1-1 포맷과 달랐으며, 시리즈 첫 경기를 홈에서 치르고 싶다는 불리츠 측의 제안으로 결정된 것이었지만, 이는 그들에게 큰 오판이 되었다.
불리츠의 오산은 워싱턴에서 열린 1차전을 패배하면서 시작되었다. 워리어스는 정규 시즌처럼 주전과 벤치 선수들이 총출동하여 불리츠를 공략했고, 이 경기에서는 필 스미스, 찰스 더들리, 데릭 디키 등이 활약했다. 101-95로 워리어스가 승리하며 강력한 일격을 맞은 불리츠는 재정비할 틈도 없이 서부 해안으로 이동해야 했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불리츠 선수들에게는 또 다른 예상 밖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워리어스가 파이널에 진출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워리어스의 홈 경기장인 오클랜드 아레나의 일정이 비어 있지 않았고, 급히 다른 경기장을 찾아야 했다. 이때 베리가 제안한 곳이 샌프란시스코 시절 워리어스가 홈으로 사용했던 카우 팰리스였다. 젊은 선수들이 많았던 불리츠 선수들에게는 낯선 경기장이었지만, 샌프란시스코 시절부터 워리어스의 에이스였고 카우 팰리스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베리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다. 베리는 궁합이 잘 맞았던 카우 팰리스에서 열린 2차전에서 36득점을 폭발시키며 92-91 승리를 이끌었고, 3차전에서도 38득점을 올리며 109-101 승리를 견인, 시리즈 3연승을 거두었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불리츠는 시리즈 내내 평균 35득점을 기록한 베리를 막기 위해 4차전에 마이크 리오던을 투입했다. 리오던은 1쿼터 중반 돌파를 시도하는 베리에게 거친 파울을 범했고, 격분한 베리는 과민 반응을 보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베리 대신 리오던에게 달려든 것은 애틀스 감독이었다. 애틀스 감독은 퇴장당했지만, 그의 기지로 베리의 퇴장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고, 그의 행동은 팀의 투지를 북돋았다. 초반 14점 차 리드를 허용했던 워리어스는 반격에 나섰고, 워싱턴 팬들의 야유 속에서도 베리는 팀을 이끌며 역전을 만들어냈다. 결국 워리어스는 96-95로 4차전마저 승리하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4전 전승 스윕으로 파이널 우승을 차지했다. 베리는 "이것은 NBA 파이널 역사상 최대의 업셋"이라고 주장했으며, "동화 같은 시즌이었다. 모든 것이 잘 풀렸다. 죽을 때까지 간직할 보물이다"라고 덧붙였다. 베리는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
1975-76 시즌, 우승의 기세를 몰아 워리어스는 리그 전체 1위인 59승을 거두었다. 전년도 파이널에서 활약한 자말 윌크스와 필 스미스 등의 성장으로 부담이 줄어든 베리는 평균 21.6득점으로 득점은 감소했지만, 평균 6.1리바운드, 6.1어시스트, 2.5스틸로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했고, 자유투 성공률 92.3%로 2년 연속 리그 1위를 기록했다. 베리는 3년 연속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다. 전년도에 기적적인 우승을 차지했던 워리어스는 이 해 플레이오프를 강력한 우승 후보로 맞이했지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피닉스 선스에게 3승 4패로 패하며 탈락했다. 이 시리즈 도중 팀 동료들과 언쟁을 벌이는 모습이 포착된 베리는 플레이오프 탈락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비판을 받았다. 이후 워리어스는 점차 하락세를 보였고, 베리 역시 평균 22득점, 6어시스트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다.
1977-78 시즌 종료 후, 워리어스와의 계약이 만료된 베리는 팀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2. 3. 4. 휴스턴 로키츠 (1978-1980)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를 떠난 베리는 1978-79 시즌을 앞두고 휴스턴 로키츠로 이적했다. 당시 로키츠에는 모제스 말론, 루디 톰자노비치, 캘빈 머피 등 재능 있는 선수들이 있었지만, 이전 시즌 성적은 28승 54패로 부진했고, 포인트 가드 존 루카스 2세를 잃은 상황이었다.34세의 베테랑이 된 베리는 팀의 공격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아, 오늘날의 포인트 포워드와 유사한 플레이를 펼쳤다. 이 시즌 그의 평균 득점은 13.5점으로 이전보다 낮아졌지만, 평균 어시스트는 자신의 선수 경력 중 가장 높은 6.3개를 기록했다. 베리의 합류 덕분에 로키츠는 47승 35패로 성적이 크게 향상되었다.
베리는 로키츠에서의 두 번째 시즌인 1979-80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마지막 시즌에는 평균 12.0득점, 3.3리바운드, 3.7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자유투 성공률은 93.5%로 3년 연속 리그 1위를 차지했다. 베리 본인은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가기를 원했지만, 1980-81 NBA 시즌부터 리그의 선수 로스터가 11명으로 축소되면서 36세의 베테랑 선수였던 그와 계약하려는 팀이 나타나지 않아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베리는 말했다.
3. 은퇴 이후
릭 베리는 성공적으로 방송 분야로 전환한 초기 프로 농구 선수 중 한 명이다. 법적 문제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던 1967-68 시즌 오클랜드 오크스 경기 중계를 시작으로 방송 경력을 쌓았다. 현역 시절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라디오 쇼를 진행했으며, CBS와 TBS 등에서 해설가로 활동했다.
1981년 NBA 파이널 5차전 CBS 중계 중, 동료 해설가 빌 러셀의 과거 사진을 보며 그의 미소를 "수박 미소(watermelon grin)"에 비유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21][22] 이는 '수박'이라는 단어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함의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리는 인종차별적 의도가 없었다고 해명하며 러셀에게 사과했고, 러셀도 이를 받아들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 원만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23] CBS는 다음 시즌 베리와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는데, 방송 제작진은 그의 해설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톤을 지녔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23]
이후 시애틀 슈퍼소닉스 중계를 맡으려 했으나, 아내의 원정 경기 동행 요구가 팀 정책과 충돌하여 무산되었다.[23]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A Voice Crying In The Wilderness)"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그의 방송 경력 난항과 NBA 내에서의 평판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23] 베리는 이후 TBS와 TNT에서 1989-90 시즌까지 주로 해설자로 활동했으며, 때로는 빌 러셀과 함께 플레이 바이 플레이 중계를 맡기도 했다. TBS 시절 1985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5차전 중계는 래리 버드의 결정적인 스틸 장면으로 유명하다. 1989-90 시즌 이후에는 TBS에서 스킵 캐레이와 함께 애틀랜타 호크스 경기의 해설을 맡았다.
스포츠 외 활동으로는 1980년대 중반 게임 쇼 ''Catchphrase''의 파일럿 진행자를 맡았으나, 정규 방송에서는 아트 제임스로 교체되었다.[24]
베리는 1990년대에 마이너 리그 농구팀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1992년 10월 글로벌 농구 협회(GBA) 소속 시더래피즈 샤프슈터스 감독을 맡았으나,[14] 리그 해체로 짧게 끝났다.[15] 1993년 1월에는 컨티넨탈 농구 협회(CBA) 소속 포트웨인 퓨리 감독으로 임명되었지만,[16] 1994년 3월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었다.[17] 이후 미국 농구 리그(USBL)에서 1998년과 1999년 뉴저지 쇼어캣츠, 2000년 플로리다 시 드래곤스 감독을 지냈다.[18]
2001년 9월부터 샌프란시스코 KNBR 라디오에서 스포츠 토크쇼를 진행했으며, 2003년 6월부터는 로드 브룩스와 '릭 앤 로드' 쇼를 공동 진행했다. 이 쇼는 2006년 8월까지 이어졌으나, 베리는 공개되지 않은 이유로 갑작스럽게 하차했다.[25] 현재는 뉴욕의 Sirius Satellite Radio에서 농구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4. 플레이 스타일
릭 베리는 뛰어난 득점력과 넓은 시야, 정확한 패스 능력을 겸비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특히 코트 위에서의 불타는 투쟁심은 그의 또 다른 특징으로 꼽힌다.
워리어스 복귀 후, 베리는 골대에서 멀어져 플레이하는 스타일을 선보였는데, 이는 리그 역사상 초기의 포인트 포워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포인트 가드처럼 공격의 주요 조율자 역할을 맡았다. 과거만큼 공격적인 돌파는 줄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득점력을 과시하여 1974년 3월 26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의 경기에서는 개인 최고 기록인 64득점을 올리기도 했다.[12]
1974-75 시즌은 베리의 선수 경력 중 최고의 시즌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팀의 주장으로 선출되어 팀을 태평양 디비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경기당 평균 30.6점을 기록했다. 또한 자유투 성공률(.904)과 경기당 스틸(2.9)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고, 어시스트(6.2) 부문에서는 6위에 오르며 포워드로서는 드물게 상위 1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워리어스는 1975년 NBA 파이널에서 워싱턴 불리츠를 꺾고 우승했으며, 베리는 평균 29.5득점, 5.0어시스트, 3.5스틸을 기록하며 NBA 파이널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베리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공격형 포워드였다. 빌 셔먼 감독은 그를 "가장 다작하는 공격형 포워드"라고 평가했다. 그는 코트 어느 위치에서든 득점할 수 있었으며, 특히 외곽 점프슛의 정확도가 높았다. 체트 워커는 "우리 시대에 3점슛이 있었다면 베리는 정말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베리는 점프슛 외에도 훅슛, 페이드어웨이, 세트슛, 레이업 등 다양한 슛 기술을 양손으로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또한, 빌 셔먼은 베리가 당대 2m 신장의 선수 중 가장 빨랐다고 평가했으며, 큰 선수를 상대로는 민첩성을, 작은 선수를 상대로는 신장을 이용해 미스매치를 만들어냈다. 빠른 발을 이용한 속공 능력도 뛰어나 '그레이하운드(Greyhound)'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뛰어난 득점력 외에도 베리는 탁월한 패스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상대 팀의 더블 팀 수비에 막힐 때면 동료들에게 정확한 패스를 연결하여 득점 기회를 만들어주었으며, 픽앤롤 플레이에도 능했다. 그의 넓은 시야와 패스 능력은 그가 포인트 포워드로서 활약하는 기반이 되었다. 수비에서도 민첩성을 발휘하여 높은 스틸 수치를 기록했으며, 1974년 10월 29일 버펄로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는 30득점 10리바운드 11어시스트 9스틸을 기록하며 쿼드러플 더블에 가까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베리의 플레이 스타일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그의 불타는 듯한 투쟁심이었다. 강한 승부욕을 지녔던 그는 큰 경기나 어려운 상황에서 더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가 이끈 팀들은 종종 플레이오프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으며, 특히 워싱턴 불리츠를 4전 전승으로 꺾은 1975년 NBA 파이널 우승은 '파이널 역사상 가장 큰 이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베리의 NBA 파이널 통산 평균 득점(36.3점)은 마이클 조던(33.6점)을 넘어서는 역대 1위 기록이다. 하지만 그의 강한 투쟁심과 직설적인 성격은 때때로 상대 선수뿐만 아니라 팀 동료, 기자, 팬들과의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마이크 던리비는 "저 친구를 유엔에 데려가면 제3차 세계 대전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독특한 "언더핸드" 방식의 자유투는 매우 높은 성공률을 자랑했다. (자세한 내용은 #언더핸드 자유투 참조)
4. 1. 언더핸드 자유투
릭 베리의 상징적인 "언더핸드 슛" 자유투는 매우 높은 정확도를 자랑했다. 그는 선수 생활 내내 높은 자유투 성공률을 유지했으며, NBA 역대 3위에 해당하는 통산 성공률 90.00%를 기록했다. 또한, ABA 시절을 포함하여 총 9번이나 리그 자유투 성공률 1위에 오르는 등 자유투와 관련하여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특히 1978-79 시즌에는 94.7%라는 놀라운 성공률을 보여주었다.베리 자신은 언더핸드 슛을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무렵에는 이미 이 폼을 익혔다고 한다. 이전까지 그의 자유투 성공률은 약 70%로 평범한 수준이었으나,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언더핸드 슛을 시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독특한 슛폼 때문에 망설였지만, 점차 효과를 느끼기 시작했다. 선수 생활 후반에는 공을 던지는 순간의 손목 모양을 바꾸는 등 폼을 개선하여, NBA 마지막 6시즌 동안 모두 90% 이상의 성공률을 기록했다. 언더핸드 슛은 베리만의 독창적인 기술은 아니었으며, 1940년대 이전에도 사용되던 방식이었다.
;자유투 성공률 성적
rowspan="2" | | NBA | ABA | NBA | 합계 | |||||||||||
---|---|---|---|---|---|---|---|---|---|---|---|---|---|---|---|
1966 | 1967 | 1969 |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1980 | ||
시도 횟수 | 660 | 852 | 454 | 463 | 507 | 730 | 397 | 464 | 436 | 311 | 392 | 409 | 169 | 153 | 6,397 |
성공 횟수 | 569 | 753 | 403 | 400 | 451 | 641 | 358 | 417 | 394 | 287 | 359 | 378 | 160 | 143 | 5,713 |
성공률 | 86.2% | 88.4% | 88.8% | 86.4% | 89.0% | 87.8% | 90.2% | 89.9% | 90.4% | 92.3% | 91.6% | 92.4% | 94.7% | 93.5% | 89.3% |
리그 순위 | 2 | 2 | 1 | 3 | 1 | 1 | 1 | 2 | 1 | 1 | 2 | 1 | 1 | 1 | 4 |
훗날 샤킬 오닐이 낮은 자유투 성공률로 고민할 때 베리가 이 폼을 가르쳐 주려 했으나, 오닐은 "스타일이 멋지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한편, 만화 슬램 덩크의 주인공 사쿠라기 하나미치(강백호)가 자유투 부진을 겪던 중 우연히 베리와 유사한 언더핸드 폼을 떠올려 사용하는 장면이 등장하여 한국 팬들에게도 이 자유투 폼이 친숙해졌다.
5. 주요 업적
릭 베리는 마이애미 대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선수로 인정받았으며, NBA와 ABA 양대 리그에서 모두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그는 특히 정확한 슈팅과 특유의 '언더핸드' 자유투로 유명했으며, 1978-79 시즌에는 94.7%라는 높은 자유투 성공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 '''고등학교 및 대학교'''
- 로젤 파크 고등학교: 2회 올스테이트 선정
- 마이애미 대학교: AP통신 퍼스트 팀 올 아메리카 (1965), ''더 스포팅 뉴스'' 올 아메리카 세컨드 팀 (1965), NCAA 디비전 I 득점왕 (1965, 평균 37.4점)
- '''NBA 경력 (샌프란시스코/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휴스턴 로키츠)'''
- NBA 신인상 (1966)
-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66)
- NBA 득점왕 (1967, 평균 35.6점)
- NBA 올스타전 MVP (1967)
- NBA 자유투 성공률 1위 (7회: 1973, 1975, 1976, 1978, 1979, 1980)
- NBA 스틸 1위 (1975, 평균 2.9개)
- NBA 챔피언 (1975,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 NBA 파이널 MVP (1975)
- 올-NBA 퍼스트 팀 (5회: 1966, 1967, 1974, 1975, 1976)
- 올-NBA 세컨드 팀 (1973)
- NBA 올스타 (8회: 1966, 1967, 1973–1978)
- '''ABA 경력 (오클랜드 옥스, 워싱턴 캡스, 뉴욕 네츠)'''
- ABA 챔피언 (1969, 오클랜드 옥스)
- ABA 득점왕 (2회: 1969 (평균 34.0점), 1972 (평균 31.5점))[35]
- ABA 자유투 성공률 1위 (3회: 1969, 1971, 1972)
- 올-ABA 퍼스트 팀 (4회: 1969–1972)
- ABA 올스타 (4회: 1969–1972)
- '''주요 영예 및 기록'''
- 네이스미스 기념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87)
- NBA 50주년 기념 팀 선정 (1996)
- NBA 75주년 기념 팀 선정 (2021)
- 마이애미 대학교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 (1976)
- 베이 에어리어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 (1988)
- 뉴저지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 (1994)
- 아카데미 오브 어치브먼트 골든 플레이트 상 (1975)
- 슬램 매거진 선정 NBA 역대 선수 Top 75 중 21위 (2003)
- NBA 정규 시즌 통산 14경기에서 50점 이상 득점 (역대 5위)[35]
- 프로 통산 115경기에서 40점 이상 득점 (NBA 70회, ABA 45회, 윌트 체임벌린, 마이클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 다음 역대 4위)[35]
- ABA 통산 평균 득점 1위 (30.5점)[35]
- NBA 통산 자유투 성공률 90.0%[35]
6. 가족 관계
릭 베리는 아일랜드, 잉글랜드, 프랑스, 리투아니아 혈통이다.[26] 현재 세 번째 부인인 린 노렌버그 배리와 함께 콜로라도 스프링스, 콜로라도에 거주하고 있다.[27][28]
그는 첫 번째 부인 팸(Pam)과 1979년 이혼했으며,[34] 슬하에 네 명의 아들(스쿠터, 존, 브렌트, 드류)과 한 명의 딸(섀넌)을 두었다. 이혼 후 자녀들은 주로 어머니 팸 슬하에서 자랐으나,[34] 네 아들 모두 프로 농구 선수의 길을 걸었다. 장남 스쿠터는 캔자스 대학교를 거쳐 CBA와 벨기에 리그에서 우승을 경험했다. 차남 존과 넷째 아들 드류는 조지아 공과대학교 출신으로 모두 NBA에서 활동했다.[34] 셋째 아들 브렌트는 오리건 주립 대학교 졸업 후 NBA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으며, 2005년 샌안토니오 스퍼스 소속으로 NBA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존과 브렌트는 은퇴 후 방송계로 진출했다. 존은 ESPN에서 게임 분석가로 활동 중이며, 브렌트는 TNT와 NBA TV에서 분석가로 일하다가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농구 운영 부사장직을 맡기도 했다.[30][31]
세 번째 부인 린 배리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캐년을 두었다. 캐년 역시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농구를 했으며, 2018-19 시즌에는 중국 클럽 후난 진지안 미예에서 뛰는 등 프로 선수로 활동했다. 릭 베리는 캐년이 대학에서 뛸 때 그의 경기를 보기 위해 게인즈빌, 플로리다에 콘도를 임대하기도 했다.
아들 브렌트가 2005년 NBA 우승을 차지하면서, 릭과 브렌트는 맷 구오커스 시니어와 맷 구오커스 주니어에 이어 NBA 역사상 두 번째로 우승을 경험한 부자(父子) 선수가 되었다. 이후 빌과 루크 월턴, 마이클과 클레이 톰슨, 게리 페이튼과 게리 페이튼 II가 이 기록에 이름을 올렸다.
한편, 1991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Daddy Dearest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릭 베리를 자기 중심적인 아버지로 묘사했고, 이에 릭 베리가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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