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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드 랑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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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담 드 랑발(Marie Thérèse Louise de Savoie-Carignan, 1749년 ~ 1792년)은 사보이아 왕가의 일원으로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측근이자 친구였다. 1767년 랑발 공작 루이 알렉상드르와 결혼했으나 이듬해 사별했으며, 1770년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에 도착한 후 궁녀장으로 임명되어 왕비의 총애를 받았다. 프랑스 혁명 발발 후 왕당파를 지지하며 튈르리 궁전에서 국왕 일가와 연락을 취하다가, 1792년 9월 혁명 세력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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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드 랑발
기본 정보
이름마리 테레즈 루이즈 드 사부아-카리냥
프랑스어 이름Marie-Thérèse-Louise de Savoie-Carignan
칭호랑발 공비
이탈리아어 이름Maria Teresa Luisa di Savoia-Carignano
가문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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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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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뒤플레시의 랑발 공비 초상화. 오른쪽 젖가슴 노출은 여성의 순수함, 건강, 수태 능력을 나타내는 미술 표현임.
랑발 공비 마리 루이즈 테레즈 드 사부아의 서명
랑발 공비 마리 루이즈 테레즈 드 사부아의 서명
생애
출생일1749년 9월 8일
출생지사르데냐 왕국, 토리노, 팔라초 카리냐노
사망일1792년 9월 3일
사망지프랑스, 파리
가족 관계
아버지루이 빅토르 드 사부아, 카리냥 공
어머니크리스티네 폰 헤센로텐부르크
배우자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 랑발 공 (1767년 결혼, 1768년 사별)

2. 생애

사보이아 가문 출신으로 1749년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1767년 프랑스 왕족인 랑발 공작 루이 알렉상드르와 결혼했으나 이듬해 사별하였다. 1770년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세자빈으로 오면서 그녀의 측근이 되었고, 왕비 즉위 후에는 왕비의 시종장으로 임명되어 깊은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1776년 무렵부터 폴리냐크 공작 부인이 왕비의 새로운 총신으로 부상하면서 잠시 멀어지기도 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많은 귀족들이 망명했지만, 랑발 공작 부인은 왕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프랑스에 남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좌했다. 1791년에는 왕가를 위한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귀국 후에는 튈르리 궁전에서 왕당파와 왕실 사이의 연락책 역할을 맡았다.

1792년 8월 10일 왕권이 정지되면서 왕당파로 간주되어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탕플 탑에 투옥되었고, 이후 라 포스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792년 9월 3일, 9월 학살의 광기 속에서 혁명 정부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성난 군중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2. 1. 출생과 성장

마리아 테레사 루이자는 1749년 9월 8일 사르데냐 왕국 토리노의 카리냐노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사보이아 왕가의 분가인 사보이아카리냐노가 출신 카리냐노 공작 루이지 비토리오와 그의 독일인 아내 크리스티네 폰 헤센 로텐부르크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번째 아이이자 다섯 번째 딸이었다.

아버지 루이지 비토리오는 사르데냐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의 증조부였으며[25], 당시 사보이아 가문의 당주이자 사르데냐 국왕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의 조카(왕의 이복 여동생의 아들)였다. 어머니 크리스티네는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의 첫 번째 왕비였던 폴리세나의 여동생이었다. 또한 어머니의 다른 언니인 카롤린은 프랑스 왕족 부르봉 공작 루이 앙리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실과도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25]

마리 루이즈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다[26]

2. 2. 결혼과 사별

1767년 1월 31일, 마리 테레즈 루이자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증손자인 랑발 공작 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팡티에브르와 토리노에서 대리 결혼식을 올렸다.[1] 랑발 공작은 팡티에브르 공작 루이 장 마리 드 부르봉의 아들이었다. 이 결혼은 루이 15세가 양가의 방계 혈족으로서 서로 어울리는 짝이라며 제안했고, 사르데냐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국왕 역시 오랫동안 사보이 가문과 부르봉 왕가 사이의 동맹 강화를 원했기에 성사되었다.

대리 결혼식 후 프랑스로 건너간 마리 테레즈는 낭지 성에서 신랑과 시아버지인 팡티에브르 공작을 만났고, 그곳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1767년 2월에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랑스 왕족들에게 소개되어 좋은 인상을 주었다. 프랑스에서는 그녀를 마리 테레즈 루이즈로 불렀다.

결혼 초기, 부부는 서로의 아름다움에 끌려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결혼한 지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랑발 공작은 두 명의 여배우와 불륜 관계를 맺었고, 이는 마리 테레즈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시아버지 팡티에브르 공작에게 위로를 받으며 그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1768년 5월 6일, 결혼한 지 1년 남짓 만에 랑발 공작은 성병이 악화되어 루브시엔 성에서 2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마리 테레즈는 19세의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마리 테레즈 역시 남편에게 성병을 옮아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남편의 사망으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마리 테레즈는 처음에는 수녀원에 들어가려 했으나, 시아버지 팡티에브르 공작의 간곡한 만류로 그의 곁에 머물게 되었다. 그녀는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시아버지를 위로하며, 그와 함께 영지인 랑부예에서 대규모 자선 활동에 헌신했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팡티에브르 공작은 "가난한 자들의 왕"으로, 랑발 공비는 "팡티에브르의 천사"로 불리며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녀는 주로 파리의 툴루즈 호텔과 교외의 랑부예 성을 오가며 생활했다.

같은 해 1768년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가 사망하자, 루이 15세의 딸인 마리 아델라이드 공주는 아버지와 젊은 미망인 랑발 공비의 재혼을 추진했다. 아델라이드 공주는 정치적 야심이 없는 젊고 아름다운 새 왕비를 통해 자신이 국정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이 계획은 노아이유 가문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2] 그러나 랑발 공비 본인과 그녀의 시아버지 팡티에브르 공작 모두 이 결혼에 소극적이었고,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쇼아즐 공작 파벌 역시 새로운 왕비의 등장을 경계하여 강력히 반대하면서 결국 무산되었다.[27]

2. 3.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우정

1770년 오스트리아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세자빈으로 시집오면서, 마리 테레즈는 프랑스 궁정에서 그녀를 모시게 되었다.[26] 마리 앙투아네트는 곧 마리 테레즈의 상냥함과 순수함에 매료되어 각별한 애정을 보였고,[26] 1771년 오스트리아 대사는 "도팽 부인은 얼마 전부터 랑발 공주에게 큰 애정을 보였다"고 보고할 정도였다.[26]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족과 지나치게 가까운 친구를 경계했으며, 특히 사보이아 가문 출신인 마리 테레즈가 딸을 통해 사보이의 이익을 도모할까 우려하여 이들의 우정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26]

1774년 루이 16세가 즉위한 후, 1775년 9월 18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리 테레즈를 왕비의 시종장(Surintendante de la Maison de la Reine)으로 임명했다.[26] 이는 베르사유에서 시녀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였으나, 막대한 비용과 권력 집중 문제로 30년 이상 공석이었다.[26] 마리 테레즈의 임명은 그녀의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너무 젊다는 점과 연간 5만 크라운[26]에 달하는 막대한 급여 등으로 인해 논란을 일으켰고, 이는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26] 그럼에도 왕비가 된 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리 테레즈와의 우정을 소중히 여겨 남편 루이 16세에게 "아, 폐하, 랑발 공주의 우정은 제 삶의 매력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26]

마리 테레즈는 섬세하고 자존심이 강했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사교 활동보다는 왕비와 단둘이 있는 것을 선호했다.[26] 또한, 때때로 심한 신경 발작과 기절 증세를 겪었다고 알려져 있다.[26]

그러나 1775년경부터 왕비의 총애는 점차 폴리냐크 공작 부인에게로 옮겨갔다.[26]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폴리냐크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유흥과 즐거움을 제공하며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내성적인 마리 테레즈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26] 마리 테레즈 역시 폴리냐크가 왕비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하여 그녀를 싫어했다.[26] 마리 앙투아네트는 두 사람 사이에서 폴리냐크를 더 가까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마리 테레즈는 점차 궁정에서 멀어졌다.[26] 1776년 오스트리아 대사 메르시는 "랑발 공주는 총애를 많이 잃는다"고 보고했으며, 1780년에는 "공주는 궁정에서 거의 볼 수 없다"고 기록했다.[26]

폴리냐크에게 총애를 빼앗겼음에도 마리 테레즈는 왕비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았고, 왕비 역시 그녀의 변함없는 마음에 의지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는 결코 앙심을 품지 않는 내가 아는 유일한 여자이다. 그녀에게서는 증오나 질투심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하며 마리 테레즈를 신뢰했다.[26] 마리 테레즈는 총애를 잃은 후에도 시종장 직위를 유지하며 공식적인 임무는 계속 수행했다.[26] 목걸이 사건 당시에는 주모자 라 모트 부인과의 면회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26]

1780년대 중반 마리 테레즈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직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고, 1787년에는 건강 회복을 위해 영국 바스에서 요양하기도 했다.[26] 이 여행 이후 건강이 호전되자 궁정에 더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마침 폴리냐크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 마리 테레즈의 변함없는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며 그녀를 가까이했다.[26]

한편, 당시 유행하던 반왕당파 선전 인쇄물에서는 마리 테레즈가 왕비의 레즈비언 애인으로 묘사되는 등 악의적인 비방에 시달리기도 했다.[3] 프랑스 혁명 발발 후, 망명 생활 중에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요청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1791년 프랑스로 돌아왔다.[2] 그녀는 왕비에게 "나는 그녀와 함께 살고 죽어야 한다"고 말하며 굳은 충성심을 보였다.[2] 이후 튈르리 궁전에서 왕비를 보좌하며 1792년 6월 20일 시위와 8월 10일 사건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켰다.[4][7]

2. 4. 프랑스 혁명과 죽음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왕비의 총애를 받던 인물 중 하나인 폴리냑 백작 부인은 재빨리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반면 랑발 공작 부인은 혁명의 와중에도 왕가 곁을 지키고자 했다. 1791년에는 국왕 루이 16세 일가를 위한 원조를 구하기 위해 영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귀국 후에는 튈르리 궁전에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좌하며 자신의 거처를 왕당파와 국왕 일가의 연락 장소로 제공하는 등 충성을 이어갔다.

그러나 혁명의 흐름은 왕가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1792년 8월 10일, 왕권이 정지되면서 랑발 공작 부인 역시 왕당파로 간주되어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탕플 탑에 투옥되었다. 이후 8월 19일에는 다른 왕실 인사들과 함께 라 포스 감옥으로 옮겨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에서 9월 학살이 벌어졌다. 9월 3일, 랑발 공작 부인은 감옥에서 끌려 나와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왕가에 대한 증오를 맹세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왕비의 친구이자 왕당파라는 이유로 격분한 민중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그녀의 시신은 심하게 훼손된 것으로 전해진다.

2. 4. 1. 혁명 초기 활동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 당시, 랑발 공작 부인은 마침 스위스를 여행 중이었고, 9월에 귀국한 후에는 병든 시아버지 팡티에브르 공작을 간호하기 위해 시골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1789년 10월 5일 베르사유 행진 당시에는 오말에서 시아버지와 함께 있어 궁정에 참여하지 못했다[2]. 한편, 왕비의 또 다른 총신이었던 폴리냑 백작 부인은 혁명이 일어나자 재빨리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1789년 10월 7일, 베르사유 행진 소식을 접한 랑발 공작 부인은 즉시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가서 국왕 일가에 합류하여 총감으로서의 직무를 재개했다[26]. 그녀는 왕의 여동생 마담 엘리자베트와 함께 궁전 내 플로르 파빌리온 아파트에 거처를 마련하고, 시아버지 방문이나 파시의 자택 방문 외에는 대부분 튈르리 궁전에 머물렀다.

튈르리 궁전에서도 베르사유 시절의 궁정 의례와 행사가 일부 부활했으며, 랑발 공작 부인은 총감으로서 모든 행사에 참여하며 공사 양면으로 왕비의 곁을 지켰다[26]. 그녀는 국왕 일가와 함께 1790년 여름 생클루 성에 머물렀고, 샹 드 마르스에서 열린 연맹 축제에도 동행했다[26]. 이전과 달리, 그녀는 이제 왕비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충성파 귀족들을 규합하고자 자신의 살롱에서 적극적으로 무도회와 만찬회를 개최했다[26]. 그녀의 살롱은 왕비가 국민 제헌 의회 의원들과 접촉하여 왕당파로 끌어들이려는 비밀 회합 장소로 활용되었으며[30], 미라보와의 회담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26]. 또한, 그녀는 정보망을 통해 궁정 직원들의 충성심을 조사하는 등 왕실을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26]. 캉팡 부인은 랑발 공작 부인이 자신을 면담하며 충성심을 확인했던 일화를 기록하기도 했다[26].

폴리냐크 공작 부인 등 왕비의 측근 다수가 망명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랑발 공작 부인에게 이제 민중의 증오가 그녀에게 집중될 것이며, 파리에 유포되는 ''중상 모략'' 팜플렛의 표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2]. 실제로 랑발 공작 부인은 자신을 왕비의 레즈비언 연인으로 묘사하는 등 외설적으로 비방하는 팜플렛들을 접하기도 했다[3][26]. 한편, 그녀는 자신의 시누이인 오를레앙 공작 부인이 남편 오를레앙 공작과의 이혼 소송을 제기했을 때 공작 부인을 지지했는데, 이는 오를레앙 공작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오를레앙 공작은 랑발 공작 부인이 자신의 남편의 방탕한 생활과 죽음에 오를레앙 공작의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자 그녀와 절교한 것으로 알려졌다[2].

1791년 6월 국왕 일가의 도주 시도에 대해 랑발 공작 부인은 사전에 알지 못했다. 출발 당일 밤, 왕비는 그녀에게 건강을 위해 며칠 시골에 다녀오라고만 말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 날, 왕가의 도주 사실과 브뤼셀에서 합류하라는 내용의 쪽지를 받은 그녀는[2] 즉시 시아버지에게 사실을 알리고 소개장을 받아 프랑스를 떠났다[2]. 그녀는 불로뉴에서 도버로 건너가 영국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오스텐데를 거쳐 브뤼셀로 향했고, 이후 아헨 등지에서 머물렀다[2].

해외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프랑스 안팎에서 왕비를 도울 최선의 방법을 고심하며 악셀 폰 페르센 등과 접촉하고, 스파와 아헨에서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를 만나기도 했다[2].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왕비는 사적인 편지에서는 그녀의 안전을 염려하여 프랑스로 돌아오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2]. 그러나 1791년 10월, 새로운 1791년 헌법에 따라 왕실 기구 개편이 요구되자, 왕비는 공식 서한을 통해 랑발 공작 부인에게 복귀하거나 총감직에서 사임할 것을 요청해야 했다[2]. 이 공식 요청에 랑발 공작 부인은 복귀를 결심하며 "나는 그녀와 함께 살고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2]. 파리로 돌아갈 경우 닥칠 위험을 예감한 그녀는 아헨에서 1791년 10월 15일자로 유언장을 작성했다[2]. 그녀는 10월 20일 아헨을 떠나 11월 4일 파리에 도착했다[2].

튈르리 궁전으로 돌아온 랑발 공작 부인은 즉시 총감 직무를 재개하며, 왕비를 위한 지지자 규합, 궁정 직원 충성심 조사, 망명 귀족들에게 왕비의 이름으로 귀국을 촉구하는 서한 발송 등의 활동에 매진했다[2]. 예를 들어, 1792년 2월 루이 마리 드 레스퀴르는 랑발 공작 부인의 주선으로 왕비를 만난 뒤 망명 계획을 접고 프랑스에 남아 왕실을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고, 그의 배우자 빅투아르 드 돈니상 드 라 로슈자클랭과 함께 왕비의 뜻에 따라 프랑스에 머물렀다[2]. 그러나 그녀의 활동은 자코뱅 세력의 반감을 샀고, 파리 시장 페티옹은 왕비가 랑발 공작 부인의 아파트에 드나드는 것을 공공연히 비난했다. 또한 그녀의 방이 프랑스 침공과 혁명 파괴를 모의하는 소위 '오스트리아 위원회'의 회합 장소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퍼졌다[2].

1792년 6월 20일, 민중이 튈르리 궁에 난입했을 때 그녀는 왕비와 아이들 곁을 지키며 용감하게 그들을 보호했다[2][6]. 랑발 공작 부인은 8월 10일 왕권이 정지되고 국왕 일가가 탕플 탑에 유폐될 때까지 왕비를 끝까지 보좌했다[4].

2. 4. 2. 투옥과 9월 학살

1792년 8월 10일 왕궁 습격 사건 이후, 랑발 공작 부인은 왕당파로 간주되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 함께 탕플 탑에 투옥되었다.[2] 8월 19일에는 마담 드 투르젤 및 그녀의 딸 폴린 드 투르젤과 함께 왕족과 분리되어 라 포스 감옥으로 이송되었으며, 같은 감방을 사용했다.[8][6]

9월 학살이 벌어지면서 감옥은 폭도들의 공격을 받았고, 죄수들은 급하게 소집된 민중 재판소에서 즉결 심판을 받았다. 각 죄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진 후, "국민 만세"라는 말과 함께 석방되거나, 사형 선고("아베이로 데려가라" 또는 "그를 보내라")를 받고 즉시 마당에서 대기하던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2] 감옥 직원들은 학살에 반대하며 많은 죄수, 특히 여성들의 탈출을 도왔고, 약 200명의 여성 수감자 중 단 두 명만이 살해되었다.[2] 마담 드 투르젤과 다른 왕실 관련 여성 다수는 재판 후 풀려났으나, 랑발 공작 부인은 예외적인 경우였다.[2]

1792년 9월 3일, 랑발 공작 부인은 마담 드 투르젤과 함께 재판소로 끌려 나갔다. 그녀는 급조된 재판에서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고 국왕과 왕비, 그리고 군주제에 대한 증오를 맹세하라"는 요구를 받았다.[9] 그녀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맹세에는 동의했으나, 왕가와 군주제에 대한 증오 맹세는 "제 마음에는 없습니다"라며 거부했다. 그녀의 시아버지 대리인들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맹세하라고 속삭였으나, 그녀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조금 더 일찍 죽든 늦게 죽든 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저는 제 생명을 희생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재판관은 "부인을 데려가라"("emmenez madame")라는 말과 함께 재판을 끝냈다.[2]

> "당신은 누구입니까?"

> "마리 테레즈 루이즈, 사보이 공주입니다."

>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 "왕비의 시종장입니다."

> "8월 10일 궁정의 음모에 대해 아는 바가 있습니까?"

> "8월 10일에 음모가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 "자유와 평등을 맹세하고 국왕과 왕비를 증오하십시오."

> "전자에 대해서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할 수 없습니다. 제 마음에는 없습니다."

> [시아버지의 대리인들이 속삭임]

>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조금 더 일찍 죽든 늦게 죽든 저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저는 제 생명을 희생했습니다."

> "부인을 석방하라."[2]

1837년 리처드 벤틀리의 에칭에 묘사된 랑발 공작 부인의 살해 사건


레옹 막심 파브르의 1908년 작품, ''마담 드 랑발의 죽음'' (프랑스 혁명 박물관)


그녀는 두 명의 경비원에 의해 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으로 끌려갔다. 문이 열리고 피투성이 시체 더미를 본 그녀는 "오, 끔찍해!"("Fi horreur!") 또는 "저는 망했어요!"라고 외치며 뒤로 물러섰으나, 앞으로 끌려 나갔다.[2] 시아버지의 대리인들이 군중 속에서 "자비를!"("Grâce! Grâce!") 외쳤지만 묵살되었다.[2] 잠시 혼자 서 있던 그녀는 창으로 머리를 가격당했고, 이마에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린 후 군중에게 찔려 살해당했다.[2][10][14] 그녀의 죽음 방식에 대해서는 강간, 가슴 절단 등 잔혹 행위에 대한 주장이 있으나[13][11], 성적 훼손이나 잔혹 행위를 입증할 증거는 없으며, 이는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선정적인 이야기 과정에서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12]

살해 후 그녀의 시신은 옷이 벗겨지고 머리가 잘려 창에 꽂혔다.[2][26] 머리카락 한 묶음은 라모트 부인이 사서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전달했다.[2][26] 머리는 창에 꽂힌 채 "'라 랑발! 라 랑발!'"이라는 외침과 함께 거리를 행진했고, 시신은 군중에게 끌려다녔다고 여러 증인이 증언했다.[2][26] 일부 기록에 따르면 머리는 카페로 옮겨져 손님들에게 보여지거나[13] 이발소에서 손질되었다고[11] 하나,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14][40]

랑발 공작 부인의 목과 심장을 창에 꿰고, 내장을 도려낸 몸통을 끌고 탕플 탑으로 몰려가 왕비에게 보여주려는 모습


이후 머리는 탕플 탑으로 옮겨져 마리 앙투아네트의 창문 아래에서 행진했다.[15][41]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족은 다른 방에 있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2][26], 감옥 관리인의 아내 마담 티송이 이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2][26] 군중은 왕비에게 머리에 키스할 것을 요구했으나(당시 퍼진 중상모략에 기반하여), 머리를 건물 안으로 들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15][41] 왕비는 관리로부터 상황을 전해 듣고 기절했다.[15][41][42]

머리와 시신은 팔레 루아얄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오를레앙 공작은 저녁 식사 중 이를 보고 "오, 랑발의 머리군. 긴 머리카락으로 알겠네. 저녁 식사나 합시다."라고 말했으며, 그의 연인 뷔퐁 부인은 "오 신이시여! 내 목도 언젠가는 저렇게 굴러다니겠지!"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2][26]

시아버지의 대리인들은 시신을 수습하려 했고, 군중이 시신을 오텔 드 랑발 앞에 전시하려는 것을 막았다.[2][26] 대리인 중 한 명인 포앙텔은 술집 밖에 놓여 있던 머리를 가져가 캥즈뱅 병원 근처 묘지에 묻었다.[2][26] 시신 처리에 관해서는 상반된 기록이 존재한다. 왕당파는 시신이 하루 종일 거리에 전시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공식 기록에 따르면 파리 시민 5명이 그녀의 사망 직후 (머리는 없지만) 옷을 입은 상태의 시신을 당국에 인계했다고 되어 있어[12][38], 내장 적출 등 잔혹 행위 주장의 신빙성은 낮다.[12]

그녀의 유해는 결국 행방불명되었으며, 오를레앙 가문의 묘소인 드뢰 왕실 예배당에도 존재하지 않는다.[16][17][43][44] 마담 튀소는 그녀의 데스 마스크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전해진다.[18]

3. 유산과 평가



랑발 공작 부인은 1792년 9월 3일 9월 학살 당시 라 포스 감옥에서 폭도들에 의해 급하게 소집된 민중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에서 그녀는 "자유와 평등을 사랑하고 국왕과 왕비, 그리고 군주제에 대한 증오를 맹세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자유와 평등에 대한 맹세는 동의하면서도 왕가에 대한 증오 맹세는 거부했다.[9] 이에 재판관은 "부인을 데려가라(emmenez madame프랑스어)"고 말하며 사실상 사형을 선고했다.[2]

재판 직후 감옥 마당으로 끌려 나갔고, 문밖에서 기다리던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녀의 정확한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상반된 기록이 존재한다. 한 남자가 창으로 머리를 내리쳐 머리카락 속에 숨겨둔 마리 앙투아네트의 편지가 드러났고, 이후 이마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자 군중에게 찔려 죽었다는 증언 등이 있다.[2][10][14] 그녀의 죽음은 혁명 이후 수년간 큰 관심을 끌었으며, 왕정을 비판하는 선전 목적으로 이용되면서 강간이나 가슴 절단 등 과장되고 선정적인 묘사가 덧붙여지기도 했다.[2][13][11] 그러나 이러한 성적 훼손이나 극단적인 잔혹 행위가 실제로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고, 선정적인 이야기 속에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2]

살해 후 그녀의 머리는 잘려 창에 꽂힌 채 거리를 행진했으며, 군중들은 "라 랑발! 라 랑발!(La Lamballe! La Lamballe!프랑스어)"이라고 외치며 시신을 끌고 다니며 모욕했다.[2] 이 머리는 근처 카페에 놓여 손님들에게 보여지기도 했고,[13] 이발소에서 머리를 손질했다는[11] (논란의 여지가 있는[14]) 기록도 있다. 이후 머리는 탕플 탑에 유폐되어 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창문 아래로 옮겨졌다.[15]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족들은 당시 다른 방에 있어 직접 머리를 보지는 못했지만, 감옥 관리인의 아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소동을 통해 친구의 참혹한 죽음을 인지했으며, 왕비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기절했다고 전해진다.[2][15] 군중은 왕비에게 머리를 직접 보여주려 했지만 감옥 관리들의 설득으로 무산되었다.[2] 이후 머리와 시신은 팔레 루아얄로 옮겨져 오를레앙 공작과 그의 연인 앞에서 전시되기도 했다.[2]

머리 없는 시신의 처리에 대해서도 기록이 엇갈린다. 왕당파 측에서는 시신이 하루 종일 거리에 전시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공식 기록에 따르면 살해 직후 당국에 인계되었고 옷을 완전히 입은 상태였다고 한다.[12][26] 이는 시신이 내장이 제거되거나 옷이 벗겨진 채 거리를 끌려다녔다는 선정적인 이야기와 차이가 있다.[12]

랑발 공작 부인의 시신은 결국 행방불명되었으며,[16][17] 그녀의 시아버지 가문인 팡티에브르 공작가의 묘소가 있는 드뢰 왕실 예배당에도 묻히지 못했다.[43][44]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은 프랑스 혁명기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후대에 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1837년 리처드 벤틀리의 에칭, 1908년 레옹 막심 파브르의 그림 ''마담 드 랑발의 죽음'' 등이 대표적이다. 마담 튀소는 그녀의 데스 마스크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18]

4. 가계도

마리아 테레사 루이자는 1749년 9월 8일 토리노의 카리냐노 궁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보이아의 루이 빅토르, 카리냐노 공이며, 어머니는 헤센-로텐부르크의 크리스틴 공녀이다. 아버지는 사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그의 정부 잔 바티스트 달베르 드 뤼네의 외손자였다.

람발 공비 사보이아의 ''마리아 루이사'' 문장


아래는 마담 드 랑발의 직계 조상을 나타내는 표이다.

마담 드 랑발의 직계 조상[22]
세대번호이름비고
본인1사보이아의 마리 테레즈 루이즈 공주마담 드 랑발
부모 (2대)2카리냐노 공 루이 빅토르아버지
3헤센-로텐부르크의 크리스틴 공주어머니
조부모 (3대)4카리냐노 공 빅토르 아메데우스 1세친할아버지 (2의 아버지)
5수사 후작부인 마리아 비토리아 디 사보이아친할머니 (2의 어머니)
6헤센-로텐부르크의 에르네스트 레오폴트 방백외할아버지 (3의 아버지)
7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슈포르의 엘레오노레외할머니 (3의 어머니)
증조부모 (4대)8카리냐노 공 에마누엘 필리베르친증조할아버지 (4의 아버지)
9에스테의 마리아 안젤라 카테리나친증조할머니 (4의 어머니)
10사르데냐의 빅토르 아메데우스 2세친증조할아버지 (5의 아버지)
11잔 바티스트 달베르 드 뤼뉴친증조할머니 (5의 어머니)
12헤센-로텐부르크의 빌헬름 방백외증조할아버지 (6의 아버지)
13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슈포르의 마리아 안나 공주외증조할머니 (6의 어머니)
14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로슈포르 공작 막시밀리안 카를 알베르외증조할아버지 (7의 아버지)
15리히텐베르크와 벨라시의 쿠엔 백작부인 마리아 폴릭세나외증조할머니 (7의 어머니)


5. 대중문화 속 랑발 공작 부인

마담 드 랑발은 여러 영화, 드라마, 소설, 만화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 드라마
  • 2022년 방영을 시작한 텔레비전 드라마 ''마리 앙투아네트 (TV 시리즈)''에서는 자스민 블랙보로가 랑발 공작 부인 역을 맡았다.

  • 소설 및 만화
  • 1905년 출간된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어린이 소설 ''작은 공주''에서 주인공 사라 크루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랑발 공작 부인의 비극적인 죽음을 언급한다.
  • 코이데 요시토의 일본 만화 『악역 영애로 환생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였습니다』에도 등장인물로 나온다. 이 작품은 월간 코믹 플래퍼 (KADOKAWA)에서 연재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Capet 40 http://w.genealogy.e[...]
[2] 서적 The Princesse de Lamballe; a biography https://archive.org/[...] Project Gutenberg
[3] 서적 The Wicked Queen: The Origins of the Myth of Marie-Antoinette
[4] 간행물 Lamballe, Marie Thérèse Louise of Savoy-Carignano, Princesse de
[5] 서적 The Royal Crescent in Bath https://archive.org/[...] Redcliffe Press
[6] 서적 Madame de Lamballe G. A. S. Wieners
[7] 서적 Marie Antoinette at the Tuileries, 1789–1791 https://archive.org/[...] C. Scribner's sons 1901
[8] 서적 Marie Antoinette: The Last Queen of France https://books.google[...] Macmillan
[9] 서적 La Princesse de Lamballe, mourir pour la Reine Librairie Académique Perrin
[10] 문서
[11] 서적 Blood of Revolution https://books.google[...] Arcade Publishing
[12] 서적 Glory and Terror: Seven Deaths Under the French Revolution https://books.google[...] Routledge
[13] 서적 The Days of the French Revolution https://books.google[...] Morrow
[14] 서적 Glory and Terror https://books.google[...] Routledge
[15] 서적 Marie Antoinette: The Journey https://archive.org/[...] Anchor Books
[16] 문서
[17] 서적 The Princesse de Lamballe https://books.google[...] D Appleton & Co.
[18] 서적 The Romance of Madame Tussaud's https://archive.org/[...] George H. Doran Company
[19] 웹사이트 Marie Antoinette (1938) https://www.imdb.com[...] IMDb.com 2008-10-19
[20] 웹사이트 Marie Antoinette (2006) https://www.imdb.com[...] IMDb.com 2008-10-19
[21] 웹사이트 The French Revolution https://www.imdb.com[...] IMdB
[22] 서적 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23] 웹사이트 SINGULART MAGAZINE:5 Nudes that Scandalized the Art World https://blog.singula[...] 2017-08-14
[24] 기타
[25] 웹사이트 Full text of Madame de Lamballe https://archive.org/[...] 2009-11-26
[26] 서적 The Princesse de Lamballe; a biography https://archive.org/[...] Project Gutenberg
[27] 서적 Madame Dubarry Beijer
[28] 서적 The Wicked Queen: The Origins of the Myth of Marie-Antoinette
[29] 기타
[30] 간행물 Lamballe, Marie Thérèse Louise of Savoy-Carignano, Princesse de
[31] 서적 The Royal Crescent in Bath https://archive.org/[...] Redcliffe Press
[32] 서적 Madame de Lamballe G. A. S. Wieners
[33] 서적 Marie Antoinette at the Tuileries, 1789–1791 https://archive.org/[...] C. Scribner's sons 1901
[34] 서적 Marie Antoinette: The Last Queen of France https://books.google[...] Macmillan
[35] 서적 La Princesse de Lamballe, mourir pour la Reine Librairie Académique Perrin
[36] 문서 de Decker
[37] 서적 Blood of Revolution https://books.google[...] Arcade Publishing
[38] 서적 Glory and Terror: Seven Deaths Under the French Revolution https://books.google[...] Routledge
[39] 서적 The Days of the French Revolution https://books.google[...] Morrow
[40] 서적 Glory and Terror https://books.google[...] Routledge
[41] 서적 Marie Antoinette: The Journey https://archive.org/[...] Anchor Books
[42] 문서 訳文は、アントニア・フレイザー著、野中邦子訳『マリー・アントワネット(下)』、P304による。
[43] 문서 de Decker
[44] 서적 The Princesse de Lamballe https://books.google[...] D Appleton & Co.
[45] 서적 The Romance of Madame Tussaud's https://archive.org/[...] George H. Doran company
[46] 웹사이트 "Marie Antoinette" https://www.imdb.com[...] IMDb.com 2008-10-19
[47] 웹사이트 "Mary Antoinette" https://www.imdb.com[...] IMDb.com, Inc. 200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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