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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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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보이아 가문은 1023년 움베르토 1세가 사보이아 지역에 봉토를 획득하며 시작되었다. 이후 토리노를 합병하고 피에몬테를 통합하여 공작 칭호를 얻었으며,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여 시칠리아 섬을 얻었으나 사르데냐 섬과 교환하였다. 사르데냐 왕국은 리소르지멘토의 중심이 되어 이탈리아 왕국을 건국하였다. 사보이아 가문은 현명한 결혼과 외교를 통해 영토를 확장했으며,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의 주도 세력이었다. 이탈리아 왕국 성립 이후 파시즘의 부상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군주제가 폐지되었고, 사보이아 가문의 남성 후손들은 한동안 이탈리아 입국이 금지되었다. 현재 사보이아 가문은 이탈리아 정부 소유의 보석 반환을 요구하며, 가문의 칭호와 기사단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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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이아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개요
이탈리아 왕국의 작은 문장 (1890년)
문장
국명카사 사보이아
이탈리아어Casa Savoia
프랑스어Maison de Savoie
영어House of Savoy
종류귀족
국가사보이아 공국
시칠리아 왕국
사르데냐 왕국
이탈리아 왕국
스페인
아르메니아
알바니아
크로아티아
소말리아
리비아
에티오피아
톈진시
예루살렘 (주장)
민족이탈리아인
프랑스인
창립1003년
해체1946년 6월 12일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왕정 폐지, 이탈리아에서 추방)
창시자움베르토 1세 (사보이아 백작)
마지막 통치자움베르토 2세 (왕가로서의 멸망)
현재 수장논쟁 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아이모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
칭호
칭호사보이아 백작 (1003–1416)
사보이아 공작 (1416–1861)
키프로스 국왕 (1485–1946)
예루살렘 국왕 (1485–1946)
아르메니아 국왕 (1485–1946)
시칠리아 국왕 (1713–1720)
사르데냐의 군주 (1720–1861)
사보이아 공작 (1814–1860)
이탈리아의 군주 (1861–1946)
스페인 국왕 (1870–1873)
에티오피아 황제 (1936–1941)
알바니아 국왕 (1939–1943)
크로아티아 국왕 (1941–1943)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 아일랜드의 국왕 (제임스 당주, 1807–1840)
소유 부동산
부동산퀴리날레 궁전
토리노 왕궁
밀라노 왕궁
나폴리 왕궁
카세르타 왕궁
베나리아 레알레 궁전
카포디몬테 궁전
몬차 왕궁
스투피니지 사냥 궁전
팔라초 마다마
팔라초 카리냐노
팔라초 마르게리타
빌라 아다
빌라 델라 레지나
발렌티노 성
라코니지 성
리볼리 성
아글리에 성
몬칼리에리 성
만드리아 성
고보네 성
폴렌초
분가
분가사보이아카리냐노가
사보이아아오스타가
사보이아빌라프란카소아송 가문
사보이제노바 가문 (1996년 단절)
사보이아빌라프란카 가문 (1888년 단절)
사보이아소아송 (1734년 단절)
사보이아네무르 (1659년 단절)
사보이아라코니지 (1605년 단절)
사보이아텐데 (1580년 단절)
사보이아아카이아 (1418년 단절)
사보이아보 (1359년 단절)

2. 역사

사보이아 가문의 역사는 1003년 움베르토 1세사보이아아오스타 등지에 봉토를 획득하면서 시작되었다.[2] 1251년 토리노를 합병하였고, 1416년 아메데오 8세는 피에몬테의 내부 지역과 니스 항구를 끼고, 서쪽 알프스의 영토를 통일하여 공작 칭호를 받았다. 이탈리아 전쟁 중인 1536년에 프랑스에게 점령당했으나,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공작1559년 공국을 수복하였다. 이후 1563년 수도를 토리노로 옮기면서 사보이아 공국은 이탈리아의 한 나라로 자리 잡았다.

1714년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여 시칠리아섬을 양도받았다. 그러나 신성 로마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 헝가리의 왕, 사르데냐의 왕이었던 카를 6세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교환할 것을 제안하였고, 사보이아 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사르데냐 섬을 얻은 후 국호를 사르데냐 왕국으로 개칭하였다.[2] 이후 사르데냐 왕국나폴레옹 전쟁 중 정치의 중심이었던 피에몬테를 잠시 잃었으나, 빈 회의에서 피에몬테를 되찾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이후 리소르지멘토의 중심이 되어 이탈리아 왕국을 건국하였다.

사보이아라는 이름은 현재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있는 알프스 지역의 역사적 지역인 사보이에서 유래되었다. 사보이 왕가는 현명한 결혼과 국제 외교를 통해 영토와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2] 프랑스-이탈리아 국경 지역 통치에서 시작하여, 군주제 폐지 시점에는 이 왕가의 영토가 이탈리아 반도 거의 전체를 포함하게 되었다.

사보이아 백작국 움베르토 1세부터 시작하는 사보이아 본가 외에,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의 동생 토마소 프란체스코를 시조로 하는 사보이아-카리냐노 가 등이 분가로 성립했다. 1831년에 사보이아 본가의 남계 자손이 끊어지자 사보이아-카리냐노 가가 모든 작위를 계승하여 세력을 발전시켜 이탈리아 왕국을 성립시켰다. 왕가가 된 이후의 사보이아-카리냐노 가의 분가에는 초대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동생 페르디난도를 시조로 하는 사보이아-제노바 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으로 스페인 왕위에도 오른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로 시작하는 사보이아-아오스타 가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6년 6월, 왕정 폐지를 묻는 국민 투표에 의해 왕정 폐지가 결정되어 이탈리아가 공화제로 바뀌자, 일족은 국외 퇴거를 강요받았다. 귀국조차도 이탈리아 헌법에 의해 2002년까지 금지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이탈리아 파시즘이 성장하여 로마 진군으로 이어졌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피에트로 바돌리오 장군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를 용인, 1922년 10월 28일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2] 국왕은 1924년부터 무솔리니의 권력 남용에 침묵했고, 1925-26년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1928년 말, 국왕의 무솔리니 해임 권한은 이론적으로 그의 권력에 대한 유일한 제약이었다.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공화국 형태의 정부는 불가침 조항에 의해 변경될 수 없으며, 따라서 군주제 복원 시도는 금지된다. 헌법은 또한 사보이 가문의 남성 후손이 이탈리아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다.[13] 이 조항은 2002년에 삭제되었지만,[14] 사보이 가문의 마지막 계승자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했다.[15] 그는 2024년에 사망했다.[16]

2. 1. 초기 역사 (11세기 - 15세기)

사보이아 가문은 1003년 움베르토 1세 백작이 사보이아아오스타 등지에 봉토를 획득하면서 시작되었다.[2] 움베르토 1세의 조상은 확실하지 않지만, 비엔 백국이 유력한 기원일 수 있다.[4][5] 사보이아는 원래 가난한 백국이었지만, 후대 백작들은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알프스 산맥의 전략적 산길을 장악했다. 움베르토 1세의 아들 오토 사보이아는 토리노의 아델라이데 후작과 결혼하여 수사 후국과 토리노, 피네롤로 마을을 사보이아 가문의 소유로 만들었다.[6]

이들은 한때 보 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여 스위스의 시옹 성을 점령했지만, 개신교 종교 개혁 동안 제네바에 의해 접근이 막혔고, 이후 베른에 정복되었다. 피에몬테는 나중에 사보이아에 합쳐졌고, 그 이름은 "사보이" (Savoiait)로 바뀌었다.

아마데우스 8세가 14세기 후반에 권력을 잡았을 때, 사보이아 가문은 점진적인 영토 확장을 거쳤으며, 그는 1416년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에 의해 사보이아 공작으로 임명되었다.[7]

2. 2. 확장, 후퇴, 번영 (16세기 - 18세기)

1559년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공작은 프랑스에 점령당했던 공국을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2] 1563년 수도를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옮기면서 사보이아 공국은 이탈리아의 한 나라로 자리잡게 되었다.[2]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1553년에 권력을 잡았을 때, 그의 가족 영토 대부분이 프랑스 손에 있었기에, 자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의 주요 적대 세력인 합스부르크 왕가를 섬기기로 했다.[11] 그는 1555년부터 1559년까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를 네덜란드 총독으로 섬겼다.[11] 이러한 자격으로 그는 북부 프랑스에 대한 스페인 침공을 이끌었고 1557년 생캉탱 전투에서 승리했다.[12] 그는 유럽의 다양한 분쟁을 이용하여 토리노 시를 포함, 프랑스와 스페인으로부터 서서히 영토를 되찾았다.[12]

17세기는 토리노 지역에 경제 발전을 가져왔고 사보이아 가문은 이에 참여하고 이득을 보았다.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는 니스 항구를 개발하고 프랑스 방향으로 알프스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설했다.[2] 그리고 능숙한 정치적 책략을 통해 영토 확장이 계속되었다. 18세기 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사르데냐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돕기 위해 편을 바꾸었고,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그들은 그에게 이탈리아 북동부의 넓은 영토와 시칠리아의 왕관을 보상했다.[2] 사보이아 왕가 통치하의 시칠리아는 단 7년(1713-20) 동안 지속되었다.[2]

시칠리아 왕관과 마침내 왕이 되었다는 명성, 그리고 팔레르모의 부는 사보이아 가문을 더욱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1720년, 그들은 사자 동맹 전쟁의 결과로 시칠리아를 사르데냐와 교환해야 했다.[2]

2. 3. 사르데냐 왕국과 이탈리아 통일 (18세기 - 19세기)

1714년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하여 시칠리아섬을 양도받았다. 그러나 신성 로마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 헝가리의 왕, 사르데냐의 왕이었던 카를 6세가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교환할 것을 제안하였고, 사보이아 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사르데냐 섬을 얻은 후 국호를 사르데냐 왕국으로 개칭하였다.[2] 이후 사르데냐 왕국나폴레옹 전쟁 중 정치의 중심이었던 피에몬테를 잠시 잃었으나, 빈 회의에서 피에몬테를 되찾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이후 리소르지멘토의 중심이 되어 이탈리아 왕국을 건국하였다.

1796년 이탈리아 지도


1843년 이탈리아 지도


시칠리아 왕관과 팔레르모의 부는 사보이아 가문을 더욱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1720년, 사자 동맹 전쟁의 결과로 시칠리아를 사르데냐와 교환해야 했다. 본토에서도 사보이아 왕조는 확장주의 정책을 계속했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유리한 동맹을 통해 카를 에마누엘 3세는 오스트리아가 통치하는 밀라노 공국을 희생하여 새로운 영토를 얻었다.

1792년, 피에몬테-사르데냐는 프랑스 제1공화국에 대항하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 1796년 나폴레옹에게 패배하여 불리한 파리 조약 (1796년)을 체결, 프랑스군이 피에몬테를 자유롭게 통과하도록 허용했다. 1798년, 주베르는 토리노를 점령하고 카를 에마누엘 4세에게 퇴위와 사르데냐 섬으로의 이주를 강요했다. 결국 1814년 빈 회의를 통해 이전의 제노바 공화국이 추가되면서 왕국은 복원되고 확장되었다.

주세페 마치니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은 여론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마치니는 이탈리아 통일이 대중 봉기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1848년 이탈리아 혁명의 실패 이후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사르데냐 왕국과 그 수상 카보르 백작을 통일 운동의 지도자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1848년, 사르데냐의 카를 알베르토는 피에몬테-사르데냐에 ''알베르티노 헌장''으로 알려진 헌법을 양보했는데, 이 헌법은 이탈리아 통일이 이루어지고 사르데냐 왕국이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된 후에도 왕국의 법률 시스템의 기초로 남았다.

2. 4. 이탈리아 왕국 (19세기 - 20세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베르사유 조약은 이탈리아에 런던 조약에서 약속된 것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전쟁 후 이탈리아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대중의 불만이 커졌고, 이는 이탈리아 파시즘의 성장과 베니토 무솔리니로마 진군으로 이어졌다.[2]

피에트로 바돌리오 장군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에게 무솔리니와 그의 검은 셔츠단을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조언했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용인하기로 결정하고 1922년 10월 28일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 국왕은 1924년부터 무솔리니가 잇따라 권력을 남용하는 동안 침묵을 지켰고, 무솔리니가 민주주의의 모든 허울을 벗어던진 1925-26년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1928년 말까지 무솔리니를 해임할 수 있는 국왕의 권한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의 권력에 대한 유일한 제약이었다. 이후 국왕은 무솔리니 정권의 권력 남용에 대항하지 않았고, 이는 이탈리아와 군주제 자체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2]

이탈리아는 1936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를 정복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에티오피아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1939년 알바니아 왕위에도 올랐지만, 2년 후인 1941년 에티오피아를 잃었다.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무솔리니와 추축국이 실패하자, 이탈리아 궁정의 여러 구성원들은 연합국과 협상을 시도했고, 연합국은 무솔리니가 물러나야 한다는 것을 알렸다. 무솔리니는 7월 24일 파시스트 대의회에서 불신임 투표를 받은 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그를 해임하고 에티오피아와 알바니아 왕위를 포기했으며,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총리로 임명했다. 9월 8일 새 정부는 5일 전에 연합국과 휴전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정부와 함께 남쪽의 브린디시로 도망쳐 군대에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실수를 범했다.[2]

연합군과 레지스탕스가 점차 나치와 파시스트를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면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지지했던 과거 때문에 전후에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에 따라 1944년 4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대부분의 권한을 아들 움베르토 2세 왕세자에게 이양했다. 로마가 해방된 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남은 권한을 움베르토 2세에게 넘겨주고 그를 왕국 대리로 임명했다. 1년 안에 여론은 군주제를 유지할 것인지 공화국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국민 투표를 요구했다. 1946년 5월 9일, 군주제를 구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아들에게 정식으로 양위했고, 움베르토 2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1946년 이탈리아 헌법 국민 투표에서 공화주의자가 54%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이집트로 망명했고, 1년 후 그곳에서 사망했다.[2]

1946년 6월 12일, 움베르토 2세가 알치데 데 가스페리 총리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이탈리아 국민에게 새로운 공화국을 지지할 것을 촉구하면서 이탈리아 왕국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움베르토 2세는 포르투갈로 망명했고, 다시는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1983년에 사망했다.[2]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공화국 형태의 정부는 불가침 조항에 의해 헌법 개정으로 변경될 수 없으며,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지 않는 한 군주제를 복원하려는 시도는 금지된다. 헌법은 또한 사보이 가문의 남성 후손이 이탈리아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다.[13] 이 조항은 2002년에 삭제되었지만,[14] 이탈리아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조건으로 사보이 가문의 마지막 계승자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했다.[15] 그는 2024년에 사망했다.[16]

2. 5. 파시즘과 군주제 종말 (20세기)

베니토 무솔리니이탈리아 파시즘이 성장하여 로마 진군으로 이어졌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피에트로 바돌리오 장군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를 용인, 1922년 10월 28일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2] 국왕은 1924년부터 무솔리니의 권력 남용에 침묵했고, 1925-26년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1928년 말, 국왕의 무솔리니 해임 권한은 이론적으로 그의 권력에 대한 유일한 제약이었다. 이후 국왕은 무솔리니 정권의 권력 남용에 대항하지 않아 이탈리아와 군주제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2]

1936년 이탈리아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를 정복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에티오피아 황제로 즉위했다. 1939년에는 알바니아 왕관도 추가했지만, 1941년 에티오피아를 잃었다.[2]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이 실패하자, 이탈리아 궁정은 연합국과 협상했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대의회에서 불신임 투표를 받은 후 해임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에티오피아와 알바니아 왕관을 포기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총리로 임명했다. 9월 8일 신정부는 연합국과 휴전을 발표했다. 그러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정부와 함께 브린디시로 도망쳐 군대에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실수를 범했다.[2]

연합군과 레지스탕스가 나치와 파시스트를 몰아내면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 지지 전력 때문에 전후 역할이 불가능해졌다. 1944년 4월, 그는 아들 움베르토 왕세자에게 대부분의 권한을 이양했다. 로마 해방 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남은 권한을 움베르토에게 이양하고 그를 왕국 대리로 임명했다. 1946년 5월 9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했지만, 1946년 이탈리아 헌법 국민 투표에서 공화주의자가 54%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이집트로 망명하여 1년 후 사망했다.[2]

1946년 6월 12일, 움베르토 2세가 알치데 데 가스페리 총리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이탈리아 국민에게 새로운 공화국을 지지할 것을 촉구하면서 이탈리아 왕국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움베르토 2세는 포르투갈로 망명하여 1983년에 사망했다.[2]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공화국 형태의 정부는 불가침 조항에 의해 변경될 수 없으며, 따라서 군주제 복원 시도는 금지된다. 헌법은 또한 사보이 가문의 남성 후손이 이탈리아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다.[13] 이 조항은 2002년에 삭제되었지만,[14] 사보이 가문의 마지막 계승자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했다.[15] 그는 2024년에 사망했다.[16]

3. 사보이아 가문의 분가

사보이아 가문은 사보이아 백작 움베르토 1세부터 시작하는 본가 외에 여러 분가들이 존재했다.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의 동생 토마소 프란체스코를 시조로 하는 사보이아-카리냐노 가가 대표적이다. 1831년 사보이아 본가의 남계 자손이 끊기자 사보이아-카리냐노 가가 작위를 계승하여 이탈리아 왕국을 성립시켰다.[2]

왕가가 된 이후 사보이아-카리냐노 가의 분가로는 초대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동생 페르디난도를 시조로 하는 사보이아-제노바 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으로 스페인 왕위에 오른 아메데오를 시조로 하는 사보이아-아오스타 가가 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분가들이 있었다.


  • 피에몬테 영주의 가계 - 사보이아-피에몬테 가문 (아메데오 5세는 이 가문 출신)
  • 아카이아 공 (1대 한정으로 그 후는 명목뿐)의 가계 - 사보이아-아카이아 가문
  • 사보이아-브레스 가 (사보이아 공작 필리포 2세의 계통)
  • 사보와-누무르 가
  • 사보와-소아송 가


왕정 폐지를 묻는 국민 투표를 통해 이탈리아가 공화국으로 바뀐 후, 사보이아 가문은 국외로 추방되었고, 2002년까지 귀국이 금지되었다.[2]

3. 1.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은 사보이아 가문의 분가로, 공작 작위를 사용하며 프랑스어로는 사부아카리냥 가문이라고 불린다. 1831년 사보이아 왕가의 본가가 되었다.[2] 사보이아라는 이름은 현재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있는 알프스 지역의 역사적 지역인 사보이에서 유래되었다. 사보이 왕가는 현명한 결혼과 국제 외교를 통해 영토와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으며, 군주제 폐지 시점에는 이탈리아 반도 거의 전체를 영토로 포함하게 되었다.[2]

사보이아 가문의 주요 분가는 다음과 같다.

  • 피에몬테 영주의 가계 - 사보이아-피에몬테 가문 (아메데오 5세는 이 가문 출신)
  • 아카이아 공 (1대 한정으로 그 후는 명목뿐)의 가계 - 사보이아-아카이아 가문

3. 2. 사보이아-제노바 가문

사보이아-제노바 가문은 사보이아 가문의 분가로, 카를로 알베르토의 차남 페르디난도를 시조로 하여 5대 165년간 지속되었다. 공작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름재위 기간
페르디난도1831년~1855년
토마소1855년~1931년
페르디난도1931년~1963년
필리베르토1963년~1990년
에우제니오1990년~1996년


3. 3.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 아메데오를 시조로 하는 분가로, 작위는 공작이다. 5대째 이어지고 있다.

1941년, 파시스트 괴뢰국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 스페인 국왕 아메데오 1세의 손자인 아이모네는 토미슬라브 2세라는 이름으로 형식상 왕으로 임명되었지만,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실제로 통치하지는 않았다. 이탈리아가 추축국과의 관계를 끝낸 1943년에 형식적으로 퇴위했다.[42]

4. 사보이아 가문의 오늘날

1946년 이탈리아 왕정이 폐지된 후, 사보이아 가문은 여러 논란과 계승 분쟁을 겪었다. 같은 해 왕정 폐지를 묻는 국민 투표를 통해 이탈리아가 공화제로 바뀌면서 왕족은 국외로 추방되었고,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에 의해 2002년까지 귀국이 금지되었다.[35]

사보이아 가문의 남성 후손들은 이탈리아 입국이 금지되었으나, 2002년에 이 조항은 삭제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1978년 디르크 하머를 총으로 쏴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과실 치사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불법 총기 소지 혐의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18] 2006년에는 정치 부패 및 매춘부 고용 혐의로 체포되어 가택 연금되었다.[19][20][21] 그는 디르크 하머 살해와 관련하여 프랑스 판사들을 속였다고 인정한 녹취록이 공개되기도 했다.[23]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그의 아들 베네치아 및 피에몬테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이탈리아 정부에 망명 기간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이탈리아 정부는 사보이아 가문이 베니토 무솔리니와 공모한 것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28][29]

사보이아 가문은 1362년부터 최고 성스러운 수태고지 기사단, 성 마우리치오와 라자로 기사단 등 2개의 왕실 기사단을 소유해 왔으며,[37] 이탈리아 왕국이 멸망한 후에도 움베르토 2세는 이 기사단의 수장직을 유지했다. 현재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왕자아이모네 왕자가 각각 기사단의 세습 군주이자 그랜드 마스터라고 주장하며 분쟁 중이다.[37][38]

사보이아 가문의 수장 자리를 두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 사이에 경쟁이 있었으며, 2004년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아메데오의 뺨을 때리는 사건도 있었다.[17] 2019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상속법을 수정하여 손녀 사보이아 공주 비토리아를 상속 순위에 포함시켰으나, 아이모네는 이 변경이 불법이라고 주장했다.[33][34]

2022년 현재 사보이아 가문은 이탈리아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가문의 보석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35]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2024년 2월에 사망했다.[36]

5. 사보이아 가문의 통치자 목록

사보이아 가문은 사보이 지역에서 유래되었으며, 움베르토 1세 (1003–1047/1048)부터 시작되었다.[2] 이 가문은 전략적 결혼과 외교를 통해 영토를 확장해 왔다.

사보이아 가문의 통치자 목록은 다음과 같다.



1831년 사보이아 본가의 남계 자손이 단절되자 사보이아-카리냐노 가가 작위를 계승하여 이탈리아 왕국을 성립시켰다.

1946년 국민 투표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전환되면서 사보이아 가문은 국외로 추방되었고,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에 의해 2002년까지 귀국이 금지되었다.

5. 1. 사보이아 백작


  • 움베르토 1세 비안카마노 (1003년-1047/1048년)
  • 아메데오 1세 (1047/1048년-1051/1056년)
  • 오도네 (1051/1056년-1060년)
  • 피에트로 1세 (1060년-1078년)
  • 아메데오 2세 (1178년-1080년)
  • 움베르토 2세 (1080년-1103년)
  • 아메데오 3세 (1103년-1148년)
  • 움베르토 3세 (1148년-1189년)
  • 토마소 1세 (1189년-1233년)
  • 아메데오 4세 (1233년-1253년)
  • 보니파초 (1253년-1263년)
  • 피에트로 2세 (1263년-1268년)
  • 필리포 1세 (1268년-1285년)
  • 아메데오 5세 (1285년-1323년)
  • 에두아르도 (1323년-1329년)
  • 아이모네 (1329년-1343년)
  • 아메데오 6세 (1343년-1383년)
  • 아메데오 7세 (1383년-1391년)
  • 아메데오 8세 (1391년-1416년)

5. 2. 사보이아 공작


5. 3. 시칠리아 국왕

5. 4. 사르데냐 국왕

Regno di Sardegnait

1720년 사자 동맹 전쟁의 결과로 사보이아 가문은 시칠리아사르데냐와 교환해야 했다.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동안 유리한 동맹을 통해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는 오스트리아가 통치하는 밀라노 공국을 희생하여 새로운 영토를 얻었다.[43]

1792년, 피에몬테-사르데냐는 프랑스 제1 공화국에 대항하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 1796년 나폴레옹에게 패배하여 불리한 파리 조약 (1796년)을 체결하여 프랑스군이 피에몬테를 자유롭게 통과하도록 허용했다. 1798년, 주베르는 토리노를 점령하고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에게 퇴위하고 사르데냐 섬으로 떠나도록 강요했다. 결국 1814년 빈 회의를 통해 이전의 제노바 공화국이 추가되면서 왕국은 복원되고 확장되었다.[44]

주세페 마치니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의 영향으로, 1848년 이탈리아 혁명의 실패 이후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사르데냐 왕국과 그 수상 카보르 백작을 통일 운동의 지도자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1848년, 카를로 알베르토피에몬테-사르데냐에 ''알베르티노 헌장''으로 알려진 헌법을 양보했는데, 이 헌법은 이탈리아 통일이 이루어지고 사르데냐 왕국이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된 후에도 왕국의 법률 시스템의 기초로 남았다.


5. 5. 이탈리아 국왕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는 1655년 4월, 왈도파를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45] 이 학살은 유럽 전역에서 분노를 일으켰고, 존 밀턴소네트 "피에몬테의 최근 학살에 관하여"의 소재가 되었다.

1898년, 바바 베카리스 학살 당시 이탈리아 국왕 움베르토 1세는 학살을 자행한 피오렌초 바바 베카리스 장군에게 축하를 보내고 훈장을 수여하여 여론의 분노를 샀다. 그 결과, 움베르토 1세는 1900년 7월 가에타노 브레시에게 암살당했다.[4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은 이탈리아에 런던 조약에서 약속된 것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 전쟁 후 이탈리아의 경제 상황 악화와 대중의 불만은 이탈리아 파시즘의 씨앗이 되었고, 베니토 무솔리니로마 진군으로 이어졌다.[45]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고 그의 권력 남용에 침묵했다. 1936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를 정복한 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에티오피아 황제로 즉위했다. 1939년에는 알바니아 왕이 되었지만, 1941년 에티오피아를 잃었다.[45]

1943년 무솔리니가 실각하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그를 해임하고 에티오피아와 알바니아 왕관을 포기했으며,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총리로 임명했다. 1944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대부분의 권한을 아들 움베르토 왕세자에게 이양했다. 1946년 군주제 폐지 국민 투표 직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아들에게 정식으로 양위했고, 아들은 움베르토 2세가 되었다. 그러나 국민 투표에서 공화정이 54%의 득표율로 승리하면서 군주제는 폐지되었다.[45]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은 공화국 형태의 정부를 불가침 조항에 의해 헌법 개정으로 변경될 수 없다고 명시하여 군주제 복원 시도를 금지했다. 헌법은 또한 사보이 가문의 남성 후손이 이탈리아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으나, 이 조항은 2002년에 삭제되었다.[45]

5. 6. 에스파냐 국왕

아마데오 1세는 1871년부터 1873년까지 에스파냐 국왕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아들이다.[3]

출생-사망재위 기간이름
1845년-1890년1871년-1873년아메데오 1세


5. 7. 에티오피아 황제

이탈리아는 1936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를 정복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에티오피아 황제로 즉위했다.[13] 그는 1939년 알바니아 왕 왕관도 추가했지만, 2년 후인 1941년 에티오피아를 잃었다.[14]

Vittorio Emanuele III|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it (Viiktooriyo Emaanu’eel III|비익토오리요 에마아누엘 3세aa), 에티오피아 황제 1936–1941 (1869–1947) - 망명 중인 황제 하이레 셀라시에 1세에 의해 반박됨.

5. 8. 알바니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알바니아 국왕을 지냈다.[13] 1939년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점령하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알바니아 국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이 패배하면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알바니아 왕위를 포기했다.[14]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Contemporary Italy: Society and Politics, 1943–1988 https://books.google[...]
[2] 서적 The kingdom of Burgundy, the land of the house of Savoy and adjacent territori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3] 간행물 Savoy Catholic Encyclopedia
[4] 문서 Administrative charters of Humbert's family are studied in the thesis Laurent Ripart, « Les fondements idéologiques du pouvoir des comtes de la maison de Savoie (de la fin du Xe au début du XIIIe siècle) », Université de Nice, 1999, 3 volumes, Tome II, p. 496-695.
[5] 서적 Le royaume de Bourgogne autour de l'an mil http://www.mgh-bibli[...] Université de Savoie
[6] 간행물 Piedmont Catholic Encyclopedia
[7] 서적 Introduction:The Sabaudian Lands and Sabaudian Studies Truman State University Press
[8] 서적 Sabaudian Studies Truman State University Press
[9] 서적 The Italian Wars, 1494-1559 Pearson Educational Limited
[10] 서적 The Italian Wars, 1494-1559
[11] 서적 Philip of Spain Yale University Press
[12] 서적 Philip of Spain
[13] 학술지 Né l'Unione europea, né i diritti dell'uomo possono aprire le frontiere a Casa Savoia https://www.questia.[...]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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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뉴스 I Savoia chiedono 260 milioni allo Stato https://www.corriere[...] 2007-11-20
[30] 뉴스 BBC NEWS - Europe - Italian 'prince' weds actress http://news.bbc.c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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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웹사이트 Amedeo padre di Ginevra. Lo dice il Dna http://www.corriere.[...] 2015-02-18
[33] 뉴스 Paris Teenager's New Gig: Would-Be Queen of Italy. A Nation Shrugs. https://www.nytimes.[...] 2021-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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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웹사이트 Savoy 4 http://genealogy.euw[...]
[44] 웹사이트 Savoy 5 http://genealogy.euw[...]
[45] 웹사이트 Savoy 6 http://genealogy.euw[...]
[46] 서적 The Armenians of Cyprus Kalaydjian Foundation
[47] 웹사이트 Royal Styles http://heraldic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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