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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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완 2세는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마지막 칼리프로, 744년부터 750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마르와니드 가문 출신으로, 초기에는 아르메니아 총독을 역임하며 비잔티움 제국과 카자르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알-왈리드 2세 사후 칼리프 자리를 두고 내전이 벌어지자, 야지드 3세와 이브라힘을 차례로 물리치고 칼리프에 즉위했다.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압바스 왕조의 도전을 받아 여러 차례 반란을 겪었으며, 결국 자브 전투에서 패배하여 이집트로 도망치다 살해당했다. 그의 죽음으로 우마이야 왕조는 멸망하고 압바스 왕조가 새롭게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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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1년 출생 - 성덕왕
신문왕의 아들인 성덕왕은 36년간 신라를 다스리며 당과의 외교, 구휼 사업, 관료 기구 정비, 국방 강화 등 국내외 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 750년 사망 - 장욱
장욱은 파격적인 서예가로, 술에 취해 머리카락으로 글을 쓰는 등 기존 서예의 틀을 깼으며, 안진경 등 후대 서예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대표작으로는 『자언첩』과 『낭관석주기』가 있다. - 무슬림 - 코르도바 칼리파국
코르도바 칼리파국은 756년 우마이야 왕조의 후예가 건국하여 929년 칼리파국으로 발전, 10세기 서유럽 최대 도시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번영을 누리다 1031년 멸망한 이슬람 왕국이다. - 무슬림 - 무아위야 1세
우마이야 칼리파 왕조의 창시자인 무아위야 1세는 메카 출신으로 이슬람으로 개종 후 무함마드의 서기관으로 활동, 시리아 총독을 거쳐 칼리프에 올라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했으나, 권력 세습화와 시아파와의 대립을 초래했다.
마르완 2세 | |
---|---|
기본 정보 | |
이름 | 마르완 2세 |
로마자 표기 | Marwān ibn Muḥammad ibn Marwān |
칭호 | |
![]() | |
재위 기간 | 744년 12월 4일 – 750년 1월 25일 |
전체 이름 | 마르완 이븐 무함마드 이븐 마르완 |
이전 통치자 | 이브라힘 이븐 알 왈리드 |
후임 통치자 | 지위 폐지 알 사파 (아바스 칼리파) |
자녀 | 우바이드알라 압드 알 말리크 압달라 |
왕조 | 우마이야 |
가문 | 마르완 가문 |
출생일 | 691년경 |
출생지 | 알 샴, 우마이야 칼리파국 (현재의 시리아) |
사망일 | 750년 8월 6일 |
사망지 | 알 미스르, 우마이야 칼리파국 (현재의 이집트) |
배우자 | 무즈나 |
아버지 | 무함마드 이븐 마르완 |
어머니 | 움 마르완 (움 왈라드) |
종교 | 이슬람교 |
통치 정보 | |
칼리파 계승 순서 | 14대 칼리파 |
통치 시작일 | 744년 12월 4일 |
통치 종료일 | 750년 1월 25일 |
추가 정보 |
2. 출생과 가문 배경
마르완 이븐 무함마드는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마르와니드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할머니는 자이나브였다. 마르완의 아버지는 네 번째 우마이야 칼리프 마르완 1세의 아들이자 다섯 번째 우마이야 칼리프 압드 알-말리크 이븐 마르완의 이복형제인 무함마드 이븐 마르완이었다.[1][2]
732년에서 733년 사이, 칼리프 히샴(Hisham)은 마르완을 아르메니아(Armenia) 총독으로 임명했다.[11] 히샴 시대에 마르완은 히샴의 형제이자 아르메니아 총독인 마스라마(Maslama) 휘하에서 하자르(Khazar)족과 싸워 군공을 세웠다. 아르메니아 총독직에 오른 후, 마르완은 하자르족의 세력권을 공격하여 하자르의 족장을 이슬람으로 개종시켰다.[12] 735년에서 736년 사이, 마르완은 마르완 이븐 무함마드의 조지아 침공(Marwan ibn Muhammad's invasion of Georgia)을 감행하여 조지아를 황폐화시킨 후 알란족(Alans)의 요새 세 곳을 함락하고 투만샤(Tumanshah)와 평화를 맺었다. 이후에도 아르메니아 각지의 족장들을 공격하여 그들에게 신종과 공납을 약속하게 만들었다.[13] 739년에서 740년 사이, 그는 추가적인 습격을 감행하여 공물을 획득했다.
야지드 3세가 알왈리드 2세를 축출하려 하자, 마르완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충성을 맹세했다. 야지드 3세가 뇌종양으로 일찍 사망하자[7], 마르완은 야지드가 지명한 계승자 이브라힘을 무시하고 칼리프가 되었다. 이브라힘은 처음에는 숨어 있다가 마르완에게 신변 안전 보장을 요청했고, 마르완은 이를 허락했다.
야지드 3세가 알왈리드 2세를 몰아내려고 하자, 마르완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충성을 맹세했다. 야지드가 뇌종양으로 일찍 죽자[7], 마르완은 야망을 품고 야지드가 지명한 계승자 이브라힘을 무시하고 칼리프가 되었다. 이브라힘은 마르완에게 신변 안전 보장을 요청하여 허락받았고, 히샴의 저택인 루사파로 함께 가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이름이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지만, 라야 또는 타루바라고 불리기도 하는 여성으로, 대부분의 기록에 따르면 아랍계가 아닌 (쿠르드인일 가능성이 높다) 여성이었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법적인 아버지인 무함마드가 그녀와 결합하기 전에 이미 마르완을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그의 친자가 아니라고 언급하고 있다.[3] 몇몇 자료는 무함마드가 이븐 알-주바이르의 반란 진압 중에 그녀를 포로로 잡았다고 전하며, 포로가 되기 전 그녀는 이븐 알-주바이르의 노예 또는 요리사 줌리였다고 한다.[4] 이 두 사람은 우마이야의 경쟁자들에 의해 마르완의 실제 친부로 여겨졌다.[5] 그의 어머니의 이름에 대해서는 의문과 논란이 많지만, 그녀는 일반적으로 움 마르완(마르완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었다.
3. 초기 생애와 총독 시절
744년에서 745년 사이, 알-왈리드 2세(al-Walid II)를 몰아내려는 음모 소식을 듣자 마르완은 아르메니아에 있는 친척들에게 이를 강력히 만류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그들에게 우마이야 왕조의 안정과 번영을 조화롭게 유지할 것을 촉구했지만, 이는 무시되었고 많은 무장 세력이 다마스쿠스로 이동했다. 야지드는 다마스쿠스로 잠입하여 쿠데타로 알-왈리드를 폐위시켰고, 이어 국고에서 자금을 지출했다.[6]
수년 동안 칼리파의 북서부 국경에서 비잔티움 제국과 카자르에 대한 전투를 감독했던 마르완 2세는 알-왈리드 2세(al-Walid II) 사후 칼리프 자리를 주장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칼비족의 반란으로 인해 기다려야 했다. 대신 야지드 3세는 그를 메소포타미아 상부 총독으로 임명했고, 그는 카이스족이 지배하는 도시 하란(Harran)에 거주하게 되었다. 야지드 3세의 칼리파 통치 기간 동안 마르완은 총독으로 남았고 스스로 왕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4. 칼리프 즉위 과정
744년 야지드 3세가 왈리드 2세를 살해하고 칼리프 자리에 오른 후, 마르완은 왈리드 2세의 유아를 칼리프 자리에 앉히기 위해 시리아로 진군했다.[14] 야지드 3세는 6개월 만에 죽었고, 그의 뒤를 이은 이브라힘은 마르완을 저지하기 위해 예멘인들로 구성된 대군을 파견했다. 마르완은 이브라힘의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 다마스쿠스에 도착했지만, 왈리드 2세의 자녀는 이미 이브라힘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브라힘과 야지드의 부하들은 왈리드 2세의 지지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15] 마르완이 입성한 다마스쿠스는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었고, 다마스쿠스 사람들은 상황 수습을 기대하며 그를 기쁨으로 맞이했다.[16] 칼리프에 즉위한 마르완의 나이는 이미 60세 가까이 되었다.[11]
카이스 부족의 지지를 얻은 마르완은 본거지를 다마스쿠스에서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으로 옮겼지만, 그의 결정은 시리아 주민들을 실망시켰고, 시리아에서 반란이 발생했다.[17]
5. 재위 기간
마르완은 그의 두 아들 우바이달라와 압둘라를 상속자로 지명하고 무력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란과 이라크에서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반대 정서가 매우 만연했고, 압바스 왕조는 많은 지지를 얻었다. 마르완의 칼리프 통치 기간은 거의 전적으로 우마이야 제국을 유지하려는 노력에 집중되었다.
744년 야지드 3세가 왈리드 2세를 살해하고 칼리프 자리에 오른 후, 마르완은 왈리드 2세의 유아를 칼리프 자리에 앉히기 위해 시리아로 진군했다.[14] 야지드 3세는 6개월 만에 죽었고, 그의 뒤를 이은 야지드 3세의 동생 이브라힘은 마르완을 저지하기 위해 예멘인들로 구성된 대군을 파견했다. 마르완은 이브라힘의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 다마스쿠스에 도착했지만, 왈리드 2세의 자녀는 이미 이브라힘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브라힘과 야지드의 부하들은 왈리드 2세의 지지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15] 마르완이 입성한 다마스쿠스는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었고, 그는 다마스쿠스 사람들로부터 상황 수습을 기대하며 기쁨으로 맞이받았다.[16] 칼리프에 즉위한 마르완의 나이는 이미 60세 가까이 되었다.[11]
카이스 부족의 지지를 얻은 마르완은 본거지를 다마스쿠스에서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으로 옮겼지만, 그의 결정은 시리아 주민들을 실망시켰고, 시리아에서 반란이 발생했다.[17]
(하위 섹션 '주요 반란'에서 다양한 반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이어진다.)
결국 750년 8월 6일 마르완 2세는 이집트에서 체포되어 살해되었고[8], 그의 상속자 우바이달라와 압둘라는 에리트레아로 도망쳤으나 압둘라는 그곳에서 싸우다 죽었다. 마르완 2세의 죽음으로 동방에서 우마이야 왕조는 막을 내렸고, 압바스 왕조에 의한 우마이야 왕조 대학살이 뒤따랐다. 압드 알라흐만 1세만이 스페인으로 도망쳐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8]
5. 1. 주요 반란
마르완 2세의 통치 기간에는 여러 차례의 주요 반란이 일어났다.
야지드 3세가 알왈리드 2세를 몰아내고 즉위했을 때, 마르완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충성을 맹세했다. 야지드 3세가 뇌종양으로 일찍 사망하고 그의 형제 이브라힘이 계승자로 지명되었지만, 마르완 2세는 이브라힘을 무시하고 칼리프가 되었다.
마르완 2세는 두 아들을 상속자로 지명하고 무력으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란과 이라크를 중심으로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반대 정서가 강했고, 압바스 왕조가 큰 지지를 얻었다.
마르완 2세의 죽음으로 동방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운명은 끝났고, 압바스 왕조에 의한 우마이야 왕조 대학살이 뒤따랐다. 압드 알라흐만 1세만이 스페인으로 도망쳐 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
6. 몰락과 죽음
마르완 2세는 즉위 전 12년 동안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총독을 지냈다.[11] 744년 야지드 3세가 왈리드 2세를 살해하고 칼리프 자리에 오른 후, 마르완은 왈리드 2세의 유아를 칼리프 자리에 앉히기 위해 시리아로 진군했다.[14] 야지드 3세는 6개월 만에 죽었고, 그의 뒤를 이은 동생 이브라힘은 마르완을 저지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지만 격파당했다. 마르완은 수도 다마스쿠스에 도착했지만, 왈리드 2세의 자녀는 이미 살해된 뒤였다.[15]
카이스 부족의 지지를 얻은 마르완은 본거지를 다마스쿠스에서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으로 옮겼지만, 이 결정은 시리아 주민들을 실망시켰고, 시리아에서 반란이 발생했다.[17] 시리아에서의 반란과 동시에 하와리지파 신도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비잔틴 제국 군대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영토에 침입하여 말라티아 등의 도시를 파괴했다. 홈스와 팔레스타인에서의 반란을 진압한 마르완은 하와리지파의 공격에 맞서 메소포타미아와 히자즈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팔미라 근교 루사파에서 우마이야 가문 사람들이 일으킨 반란도 진압했다.[18] 마르완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도망친 반란군을 추격하여 홈스, 바알벡,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등의 도시 성벽을 파괴했다. 우마이야 왕조는 748년까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지배를 회복했다.[19]
그러나 747년 동방의 호라산 지방에서 아바스 가문이 지휘하는 무장봉기(아바스 혁명)가 발발하여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749년 반란의 지도자인 아바스 가문의 이브라힘 이븐 무함마드를 사로잡았지만, 남은 아바스 가문 사람들은 이라크의 쿠파에 잠복했다.[22] 749년 11월 아바스 가문의 아부 알아바스 사파는 쿠파에서 칼리프를 자칭했다.[23] 마르완은 군대를 이끌고 하란을 떠나 750년 1월 티그리스 강의 지류인 자브 강(자브 강 전투)에서 아바스 가문의 압드 알라 이븐 알리와 교전했으나 패배했다.[24]
패전 후 마르완은 시리아로 도망쳤지만 각 도시에서 지원을 받을 수 없어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했다. 시리아의 주요 도시들은 거의 저항 없이 아바스 군에 항복했다.[25] 팔레스타인으로 도망친 마르완은 비잔틴의 지원을 받으려고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이집트로 도주했다.[27] 도주처인 부시리스의 기독교 사원에서 마르완은 아바스 군의 병사들에게 발견되어 칼을 들고 싸웠지만 목숨을 잃었다.[28]
7. 평가
마르완 2세는 밝은 피부색, 파란 눈, 큰 수염과 머리를 가진 중간 키의 소유자였다.[9] 그는 수염을 염색하지 않고 희게 놔두었다.[9] "당나귀"를 의미하는 알-히마르(아랍어: الحمار|알 히마르ar)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인내심이 강한 성격[29], 혹은 작약꽃을 좋아해서 "당나귀의 장미"라고 불렸기 때문[11]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마르완은 금욕적인 성격으로, 군대에서는 일반 병사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30] 고대사에 관심이 많아 측근들에게 역사를 강의하기도 했다.[30]
마르완 2세는 군대 전투 방식을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용했던 횡렬진형(아랍어: صفوف|수후프ar)에서 기동력을 중시한 소부대 진형(아랍어: كراديس|칼라디스ar)으로 전환한 인물로 평가받는다.[29]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Women and the State in Early Islam
[4]
서적
[5]
서적
Marwan Ibn Muhammad: the passind of the Umayyad caliphat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Microfilms
[6]
서적
Seeing Islam as Others Saw It
Darwin Press
[7]
서적
Seeing Islam as Others Saw It
Hoyland
[8]
서적
The Caliph's Splendor: Islam and the West in the Golden Age of Baghdad
Simon & Schuster
[9]
웹사이트
البداية والنهاية
http://www.al-eman.c[...]
2022-06-05
[10]
서적
アラブの歴史
[11]
서적
イスラム世界
[12]
서적
諸国征服史
[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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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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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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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教史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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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教史
[17]
서적
アラブの歴史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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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スラム世界
[19]
서적
イスラム世界
[20]
서적
諸国征服史
岩波書店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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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ラブの歴史
[22]
서적
マンスール
[23]
서적
マンスール
[24]
서적
マンスール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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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スラム世界
[26]
서적
諸国征服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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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回教史
[28]
서적
回教史
[29]
서적
アラブの歴史
[30]
서적
回教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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