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턴 트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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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턴 트롬프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해군 제독으로, 해상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어린 시절 해적으로 인해 고난을 겪었으나, 이후 네덜란드 해군에 입대하여 30년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1639년 다운스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며 해군력을 과시했으며,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주요 해전을 지휘했다. 트롬프는 도버 해전에서 일시 해임되기도 했지만, 던지네스 해전에서 승리하며 제해권을 되찾았다. 그는 스헤베닝겐 해전에서 전사했지만, 그의 죽음 이후에도 네덜란드 해군은 미힐 데 로이터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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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턴 트롬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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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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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베스테바에르 |
본명 | 마르턴 하르퍼츠존 트롬프 |
출생 | 1598년 4월 23일 |
출생지 | 브릴레, 네덜란드 공화국 |
사망 | 1653년 7월 31일 |
사망 장소 | 스헤베닝언 해전 |
매장지 | 델프트 오우데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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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력 | |
소속 | 네덜란드 공화국 |
복무 기간 | 1607년–1653년 |
최종 계급 | 해군 최고 사령관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80년 전쟁 지브롤터 해전 1639년 2월 18일 전투 영국 해협 전투 다운스 해전 됭케르크 공방전 마르디크 공방전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도버 해전 덩저니스 해전 포틀랜드 해전 가바드 해전 스헤베닝언 해전 |
2. 어린 시절
브릴레에서 태어난 마르턴 트롬프는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 하르페르트 마에르텐츠 슬하에서 자랐다. '트롬프'라는 성씨는 아버지의 배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트롬프는 9살 때 아버지와 함께 바다로 나가 지브롤터 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1][2][3][4]
1610년, 트롬프의 아버지가 해군에서 해임된 후, 가족은 기니로 향하던 중 영국 해적 피터 이스턴의 공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가 사망하고 트롬프는 살레의 노예 시장에 팔려갔다. 풀려난 후에는 로테르담 조선소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고, 다시 바다로 나갔다가 바르바리 해적에게 붙잡혀 튀니스에서 노예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뛰어난 능력과 성품으로 무라드 1세 베이의 신임을 얻어 자유를 되찾았다.[4]
2. 1. 초기 해상 경험과 시련
브릴레에서 태어난 트롬프는 해군 장교이자 프리깃함 "올리판트스트롬프"("코끼리 코")의 선장이었던 하르퍼트 마르턴스즈의 장남이었다. "트롬프"라는 성씨는 아마도 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1607년 문서에 처음 등장했다. 그의 어머니는 세탁부로 가족의 수입을 보충했다. 1607년, 9세의 트롬프는 아버지와 함께 로테르담 함대의 "올리판츠도르프"에 승선하여 지브롤터 해전에 참전했다.[1][2][3][4]1610년, 해군 개편으로 인해 그의 아버지가 해임된 후, 트롬프 가족은 상선을 타고 기니로 가는 길에 영국 해적 피터 이스턴이 지휘하는 7척의 함대에게 공격을 받았다. 전투 중 트롬프의 아버지는 포탄에 맞아 사망했고, 전설에 따르면 12세 소년 트롬프는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지 않겠는가?"라고 외치며 배의 선원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해적들은 그를 붙잡아 살레의 노예 시장에 팔았다. 2년 후, 이스턴은 연민을 느껴 그의 몸값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2][5][6]
자유의 몸이 된 트롬프는 로테르담 조선소에서 일하며 어머니와 세 자매를 부양했다. 그는 19세에 다시 항해를 시작하여 잠시 해군에서 일했지만, 1621년 다시 상선대에 합류했다가 튀니스 근해에서 바르바리 해적에게 붙잡혔다. 그는 24세까지 노예로 붙잡혀 있었는데, 그동안 그는 사격술과 항해술에서 능숙함을 보여 무라드 1세 베이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무라드 1세 베이는 그에게 함대에서 일할 자리를 제안했다. 트롬프가 거절하자, 베이는 그의 인품에 더욱 감명받아 1622년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4]
2. 2. 바르바리 해적과의 조우
1610년 해군 개편으로 트롬프의 아버지가 해임된 후, 트롬프 가족은 상선을 타고 기니로 가던 중 영국 해적 피터 이스턴이 이끄는 7척의 함대에게 공격받았다. 전투 중 트롬프의 아버지는 포탄에 맞아 사망했고, 그의 시신은 바다에 던져졌다. 전설에 따르면, 12세 소년 트롬프는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지 않겠는가!"라고 외치며 선원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이후 해적들은 그를 살레의 노예 시장에 팔았고, 그는 그곳에서 선실 소년으로 일했다. 2년 후, 이스턴은 연민을 느껴 그의 몸값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2][5][6]자유의 몸이 된 트롬프는 로테르담 조선소에서 일하며 어머니와 세 자매를 부양했다. 19세에 다시 항해를 시작하여 잠시 해군에서 일했지만, 1621년 다시 상선대에 합류했다가 튀니스 근해에서 바르바리 해적에게 붙잡혔다. 그는 24세까지 노예로 붙잡혀 있었는데, 그동안 사격술과 항해술에 능숙함을 보여 무라드 1세 베이와 해적 잭 워드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잭 워드는 그에게 함대에서 일할 자리를 제안했으나, 트롬프가 거절하자 베이는 그의 인품에 감명받아 1622년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4]
3. 네덜란드 해군 경력
1637년 필리프 반 도르프 등 무능력으로 해임된 기장들의 뒤를 이어 트롬프는 서프리지아와 홀란트의 부제독으로 승급했다. 프레데리크 헨드리크가 공식적으로 제독으로 부임했지만, 총독이었던 헨드리크는 육전에만 참여했기에 트롬프가 사실상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트롬프는 됭케르크 항구를 봉쇄하여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30년 전쟁 기간이자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 한창이던 1639년 플랑드르로 향하는 스페인 선단을 격파하여 스페인의 해군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1639년 9월 18일 전투에서 트롬프는 단종진을 세운 첫 함대 사령관으로 평가받는다.[15]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기간인 1652년부터 1653년까지 트롬프는 도버, 덩게스, 포틀랜드섬, 스헤베닝언 등지에서 영국군과 맞서 싸웠다. 1653년 윌리엄 펜에 의해 총상을 입고 사망한 트롬프의 죽음은 네덜란드 해군뿐만 아니라 영국 내 왕당파에게도 큰 침체였다. 스헤베닝언 해전 이후 공화당의 세력이 강화되었고, 이는 웨스트민스터 조약에서 영국 연방 주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마르턴 트롬프는 80년 전쟁 후반부와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기간 동안 네덜란드 함대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최고의 네덜란드 해군 사령관으로 널리 여겨진다.[7] 트롬프의 전 상관이었던 피트 피터르손 하인 제독은 트롬프가 선원과 사령관으로서 자신이 아는 모든 함장들과 구별되는 훌륭한 인품을 지녔다고 친구에게 말한 적이 있다.[8]
트롬프는 1622년 7월 중위로 네덜란드 해군에 입대하여 로테르담의 마스 해군성에서 "브루인피시"호에 탑승했다.[2] 1624년 5월 7일, 상인의 딸인 디그놈 코르넬리스도흐터 데 하에스와 결혼했고, 같은 해에 빠른 속도로 항해하는 파견 및 호위 요트인 "성 안토니우스"호의 선장이 되었다.[4] 1629년 오스텐더 사략선과의 전투에서 하인 제독의 기함 "블리겐데 흐로에네 드라에크"호의 선장으로 활약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이 전투에서 하인이 사망하자 그의 시신을 가지고 귀향했다.[9]
3. 1. 80년 전쟁 활약
80년 전쟁(1568년~1648년) 동안 트롬프는 1629년 프레데릭 헨드릭 총독의 제안으로 정식 함장이 되었다. 트롬프는 됭케르크(Dunkirkers)와의 전투에서 함대 사령관으로 매우 성공적임을 보여주며, ''플리헤인더 흐로네 드라크''(Vliegende Groene Draeck)에서 사령관 역할을 수행했다.[10][4] 그는 4개의 명예 금사슬을 받았지만, 더 이상 진급하지 못했다. ''플리헤인더 흐로네 드라크''는 침몰했고, 새로운 대형 선박은 기함급 장교들을 위해 비워졌고, 트롬프는 구형 ''프린스 헨드릭''(Prins Hendrik)으로 강등되었다.[10][4] 1634년에 첫 번째 부인이 사망하여 세 아들을 부양해야 했고, 그해 실망하여 해군 복무를 그만두었다.[4]1637년 트롬프는 다시 네덜란드 해군에 입대하여 오라녜 공 프레데릭 헨드릭 총독 휘하의 홀란드와 서프리슬란트의 해군 중장(Lieutenant-Admiral)으로 진급했다. 이는 해군 중장 필립스 판 도르프(Philips van Dorp)가 사임하고, 부제독 야스퍼 리프헤버(Jasper Liefhebber) 등 무능함으로 인해 네덜란드 해군을 소홀히 하여 참담한 상태로 만든 기함급 장교들이 해임된 후에 일어났다.[11][12] 트롬프는 이전 지휘관들이 함대를 얼마나 소홀히 했는지 기억하며, 해군에게 허용된 것보다 더 큰 권한을 부여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트롬프는 더 많은 수의 선박과 충분한 보급품과 인력을 갖출 것을 주장했고, 주 의회는 트롬프에게 그의 모든 요청을 승인하겠다고 엄숙히 약속했다. 총독의 트롬프 공식 임명 조건은 그의 지위를 더욱 강화했다. 1살 연하의 비테 데 비트(Witte de With)는 매우 용감했지만 잔혹하고 성질이 고약했으며, 그의 부제독으로 임명되었다.[14]
트롬프는 기함인 ''아밀리아(Aemilia)''를 이용하여 됭케르크의 소홀했던 봉쇄를 즉시 재개하고 스페인 군대의 플랑드르 이동을 방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15] 트롬프는 플랑드르로 향하던 오켄도(Oquendo)의 함대를 제압했지만, 다운스 해전(The Downs)에서 켄트(Kent) 해안의 모래톱 뒤로 후퇴하여 갇히게 되었고, 3개 왕국 전쟁이 런던에서 계속되면서 오랜 논쟁이 벌어졌다. 트롬프는 1637년과 1638년의 순항으로 해협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고, 칼레로 향하여 됭케르크의 남서쪽 입구를 막았으며, 리카르드 추기경의 지원을 받아 칼레에서 함대에 보급을 받았다. 강화된 함대를 갖춘 트롬프는 스페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찰스 1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16] 10월 21일 다운스 해전에서 공격하여 오켄도의 함대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다.[17] 해협에서의 전투 중, 다운스 해전의 예비 전투에서 트롬프는 의도적으로 전열(line of battle) 전술을 사용한 최초의 함대 사령관으로 알려져 있으며,[15] 스페인 해군의 종말을 알렸다.[18][19]
80년 전쟁에서 1639년 됭케르크 해전(Action of 18 February 1639영어)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고, 같은 해 다운즈 해전에서 상륙군을 포함한 스페인·포르투갈의 대함대를 격파했다.
4.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1652년부터 1653년까지 벌어진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트롬프는 도버 해전, 던제니스 해전, 포틀랜드 해전, 가바드 해전, 스헤베닝겐 해전 등 주요 해전에서 네덜란드 함대를 이끌었다.[24]
전쟁 발발 전, 올리버 크롬웰과 의회 잔당은 항해 조례를 통해 외국과의 무역을 금지하고 북해나 해협에 있는 모든 외국 함대는 깃발을 내려 경의를 표하도록 강제했다. 네덜란드 사절단은 이 조례의 철폐를 위해 런던에서 협상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5]
1652년 5월 29일 도버 해협에서 트롬프 제독의 네덜란드 함대와 로버트 블레이크 제독의 잉글랜드 함대가 충돌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해전은 무승부로 끝났고, 이후 트롬프는 일시적으로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다가 켄티시 노크 해전에서 윗 제독이 블레이크에게 패하면서 다시 복직했다. 같은 해 12월 던제니스 해전에서는 블레이크 함대를 격파하고 네덜란드에 제해권을 되찾아 주었다.
그러나 1653년 2월부터 3월에 걸쳐 벌어진 포틀랜드 해전에서 조지 몽크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대패하여 제해권을 상실했다. 6월의 가바드 해전 (노스포어랜드 해전)에서도 몽크 함대에게 다시 패배하여 네덜란드 연안이 봉쇄되었다. 8월에는 재건 중이던 네덜란드 함대가 몽크 함대에게 발각되어 스헤베닝겐 해전 (테르헤이데 해전)이 벌어졌고, 격전 끝에 네덜란드 함대는 큰 피해를 입고 트롬프도 전사했다. 그러나 영국 함대 역시 피해가 커서 연안 봉쇄를 지속할 수 없었다.
스헤베닝겐 해전에서 트롬프는 윌리엄 펜의 배에 있던 저격병에게 총을 맞고 사망했다.[24]
트롬프 사후 165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이 체결되면서 제1차 영란 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후 네덜란드 함대는 트롬프 휘하에서 성장한 미힐 데 로이테르가 이끌게 되었다.
4. 1. 주요 전투
마르턴 트롬프는 1637년 필리프 반 도르프 등이 무능으로 해임되자 서프리지아와 홀란트의 부제독으로 승진했다. 프레데리크 헨드리크가 공식적으로 제독이었지만, 헨드리크는 육전에만 참여했기에 트롬프가 사실상 최고 사령관이었다. 트롬프는 됭케르크 항구를 봉쇄하고 점령했다. 30년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 전쟁 기간 중 1639년 플랑드르로 향하는 스페인 선단을 격파하여 스페인의 해군력을 약화시켰다. 1639년 9월 18일 전투에서 단종진을 사용한 첫 함대 사령관으로 평가받는다.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트롬프는 도버 해전, 던제니스 해전, 포틀랜드 해전, 가바드 해전, 스헤베닝겐 해전 등에서 네덜란드 함대를 지휘했다.[24]
올리버 크롬웰과 의회 잔당은 외국 무역을 금지하고 북해 등에서 외국 함대가 깃발을 내려 경례와 복종을 표시해야 한다는 항해 조례를 발포했다. 네덜란드 사절단은 항해 조례 철폐를 협상하려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25]
1652년 5월 19일, 트롬프는 네덜란드 상선을 수색, 압류하는 영국 함대를 감시하며 홀란드의 상업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뉘포르트와 뫼즈 강 하구 사이에서 40척의 함대로 영국 해협을 순항했다.[26] 영국 제독 로버트 블레이크는 페어라이트 해안에서 7척의 네덜란드 상선을 나포했다.[27] 블레이크는 15척의 함선을 이끌고 도버에, 다른 8척은 다운즈에 정박해 있었다.[26] 트롬프가 깃발을 내리지 않자 블레이크는 포탄 없이 두 발의 경고 사격을 했다. 도버 해전은 트롬프가 깃발을 내리지 않고 붉은 전투 깃발을 띄우며 저항하면서 시작되었으며,[28] 블레이크는 세 번째 총을 발사하여 트롬프의 배를 명중시키고 일부 승무원을 부상시켰다. 트롬프는 기함 ''브레데로데''에서 경고 사격으로 반격했다. 블레이크는 다시 일제 사격을 가했고 5시간 동안 전투가 벌어졌다.[29] 밤까지 계속된 전투는 뚜렷한 승자 없이 끝났다.[30][31] 전투 직후 크롬웰 등의 위원회는 트롬프가 의도적으로 적대 행위를 유발했다고 결론 내렸다. 네덜란드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세 명의 대사를 소환했으며,[32] 1652년 7월 8일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했다.[30]
트롬프는 명령보다 큰 함대를 이끌고 다운즈로 항해하여 블레이크가 템스 강으로 출항한 것을 발견했다. 강 하구 근처에서 조지 에스큐 경의 영국 함대와 마주쳤는데, 에스큐는 풍상의 이점을 가지고 있어 트롬프가 효과적으로 교전하지 못했다. 트롬프는 네덜란드 해안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고, 이 결정은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미힐 데 로이터 제독으로 교체되며 해임되었다.[33]
1652년 10월 8일, 트롬프의 지휘가 정지된 상태에서 네덜란드 부제독 비테 데 비트는 60척의 함대를 이끌고 블레이크를 과소평가하여 켄티시 노크 해전을 공격했으나, 블레이크가 데 비트를 네덜란드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끝났다. 데 비트는 뛰어난 전술가였지만 ''레졸루션''과 ''소버린''을 포함한 블레이크의 함대에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34] 데 비트의 패배는 국가 평의회에 의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받아들여져 블레이크가 영국 해협을 통제하게 되었다고 가정하게 되었다. 평의회는 함대를 분산시켰고, 블레이크는 다운즈에 정박한 약 40척의 함대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자금 부족으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35][36]
데 비트의 패배 이후, 트롬프는 5월 8일에 사령관으로 복귀했는데, 이는 네덜란드 해군 사기에 큰 힘이 되었다.[37] 던제니스 해전은 1652년 11월 30일에 일어났으며, 트롬프의 함대가 네덜란드에 영국 해협의 일시적인 통제권을 가져다주었다. 300척의 상선 호송대가 비스케이 만으로 향하기 위해 네덜란드를 떠날 준비가 되었으며, 73척의 대형 군함과 소수의 방화선으로 구성된 함대가 동행했다. 트롬프는 요한 에베르츠와 데 로이터를 부사령관으로 지휘했다. 블레이크 제독은 시야가 좋지 않아 네덜란드 함대의 전력을 과소평가했는데, 그의 함대는 2대 1로 수적으로 열세였다. 블레이크는 던제니스로 향하는 영국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네덜란드 함대를 감시했고, 해안선은 남쪽으로 굽어지기 시작했다.[38][39] 함대가 던제니스 포인트에 접근하면서 블레이크의 함대는 해안에 갇히게 되었다. 트롬프는 붉은 전투 깃발을 게양하고 블레이크의 기함 ''트라이엄프''로 진격했다.[37] 전투는 네덜란드 함대의 일부만 포함되었는데, 바람이 다른 함대가 적시에 교전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오후 5시까지 많은 백병전이 벌어졌으며 밤이 되면서 네덜란드 함대가 승리하여 여러 영국 전리품을 획득했고, 블레이크는 템스 강 하구로 후퇴했다.[38][39] 트롬프의 승리는 영국 해군에게 전환점을 가져왔다.[40]
가바드 해전은 1653년 6월 2일~3일(1653년 6월 12일~13일 그레고리력) 잉글랜드 서퍽 해안의 가바드 사주 인근에서 벌어졌다. 트롬프는 기함 ''브레데로데''에서 부제독 비테 데 비트와 함께 ''프리하이트''에 탑승하여 98척의 함선과 6척의 방화선을 지휘했고, 5개 분대로 나뉘었다. 조지 몽크와 리처드 딘은 100척의 함선과 5척의 방화선을 지휘했으며, 3개 분대로 나뉘었다.[41] 트롬프의 함대는 주로 근접전을 위해 조직되었지만, 영국은 우수한 화력을 사용했다.[42] 로버트 블레이크 제독은 6월 3일에 영국 함대에 합류했다. 트롬프는 직접 공격을 결정했지만, 바람이 거의 멈추면서 네덜란드 함대는 적의 우수한 화력에 취약해졌다. 네덜란드는 17척의 함선을 나포 또는 침몰시켰고, 영국은 한 척도 잃지 않았다. 딘은 작전 중 사망했다. 이는 네덜란드가 겪은 가장 큰 손실 중 하나였으며, 영국은 영국 해협을 통제하게 되었다.[41]
스헤베닝겐 해전에서 1653년 7월 31일, 트롬프는 윌리엄 펜의 배에서 저격병에게 살해당했다.[24] 트롬프의 기함 ''브레데로데''는 영국 해군을 돌파하여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트롬프는 곧 사망했다. 트롬프의 마지막 말은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오 주님, 저와 당신의 가엾은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였다. 그의 승무원들은 치명상을 입은 트롬프를 갑판 아래 선실로 옮겼고, 그는 잠시 후 사망했다.[43] 그의 기함 캡틴 에크베르트 바르톨로메유스 코르테나르는 ''브레데로데''에서 트롬프의 깃발을 내리지 않고 트롬프가 여전히 살아있는 척하며 함대의 사기를 유지했다.[44] 에베르첸이 지휘를 맡았고, 네덜란드 제독들은 함선으로 돌아와 전투를 재개했다.[45] 트롬프의 손실은 네덜란드 해군에게 심각한 타격이었다.[24] 전투는 영국에게 전술적 승리를 가져다주었지만, 봉쇄를 해제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에게 전략적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제1차 영란 전쟁에서 1652년 5월 29일 도버 해협에서 트롬프 제독의 네덜란드 함대와 로버트 블레이크 제독의 잉글랜드 함대가 충돌하여 개전의 방아쇠가 당겨졌지만, 도버 해전은 무승부로 끝나 트롬프는 일시적으로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다. 후임으로 윗 제독이 임명되었지만, 켄티시 노크 해전에서 블레이크에게 패배하여 트롬프는 복직했다. 같은 해 12월의 던제니스 해전에서는 블레이크 함대와 재전하여 승리하여 네덜란드에 제해권을 되찾았다.
1653년 2월부터 3월에 걸쳐 발생한 포틀랜드 해전에서, 조지 몽크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 앞에서 트롬프는 대패했고, 네덜란드는 제해권을 잃었다. 6월의 가바드 해전(노스포어랜드 해전)에서도 블레이크를 대신하여 지휘를 맡은 몽크 함대에 다시 패배하여, 네덜란드 연안 봉쇄를 허용하게 되었다. 8월에는 재건 중이던 네덜란드 함대가 몽크 함대에 발견되어 스헤베닝겐 해전(테르헤이데 해전)이 벌어져, 격전 끝에 네덜란드 함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트롬프도 전사했지만, 영국 함대의 손해도 커서 연안 봉쇄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트롬프 사후 1654년, 웨스트민스터 조약이 성립되어 제1차 영란 전쟁은 종결되었다. 네덜란드 함대는 트롬프 휘하에서 전력을 쌓은 미힐 데 로이테르가 이어받아, 다음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5. 유산
트롬프는 네덜란드 해군과 일반 대중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의 죽음은 네덜란드 해군에게 큰 타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연방의 패배와 스튜어트 왕가의 복원을 추구했던 오라녜파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스헤베닝겐 전투 이후 공화파의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이는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귀결되는 잉글랜드 연방과의 평화 협상으로 이어졌다.[20] 그는 1653년 8월 델프트의 오우데 케르크에서 국장을 치렀으며, 그의 명예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트롬프는 그의 둘째 아들이자 뛰어난 해군 장교였던 코르넬리스 마르턴스존 트롬프(1629-1691)를 유족으로 남겼다.[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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オランダ名海将列伝: 日本語訳: The Great Dutch Admirals
Kindle版
2024-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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