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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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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중반까지 네덜란드 17주가 스페인의 지배에 대항하여 벌인 전쟁이다. 이 전쟁은 정치, 경제, 종교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발했으며, 네덜란드는 부르고뉴 공국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거치며 경제적 번영을 누렸지만, 스페인의 중앙집권화, 과도한 세금 부과, 종교 탄압으로 인해 갈등이 심화되었다. 1581년 네덜란드 의회가 펠리페 2세의 통치권을 부정하고 네덜란드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고,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 속에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과 군사적 승리를 거두며 독립을 쟁취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80년에 걸친 전쟁이 종결되었고, 네덜란드는 '황금 시대'를 맞이하며 해상 강국으로 성장했다. 이 전쟁은 유럽의 세력 균형을 변화시키고 종교적 자유와 관용의 가치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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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독립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분쟁 명칭네덜란드 독립 전쟁
다른 명칭80년 전쟁
네덜란드 반란
일부유럽 종교 전쟁
30년 전쟁(1621–1648)
1607년 [[지브롤터 해전]]
1607년 지브롤터 해전
시기c. 1566/1568 – 1648년 1월 30일
장소유럽 전역(c. 1566/1568)
저지대 국가 (현재의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독일 서부 일부 및 프랑스 북부)
유럽 해역: 북해, 영국 해협, 이베리아 반도 연안, 지중해
해외 (1590년대부터)
대서양: 카나리아 제도 및 아조레스 제도
아메리카: 카리브해, 기아나, 브라질 북동부, 남아메리카 남서부
아프리카: 서아프리카남아프리카
아시아: 인도양,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결과뮌스터 조약 체결
스페인이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함
스페인이 남네덜란드를 유지함
17세기 네덜란드 식민 제국의 확장. 주로 포르투갈 제국에 영향
교전 세력
교전국 1네덜란드 공화국 (1588년부터)
네덜란드 총독 (1576–1588)
네덜란드 반군 (c. 1566/68–1576)
유럽 동맹
잉글랜드 왕국 (1585–1604, 1625–1630)
프랑스 왕국 (1589–1598, 1635년부터)
앙주 공작 (1578–1583)
포르투갈 왕국 (1641년부터)
원주민 해외 동맹 (1600년대부터)
교전국 2스페인 제국
유럽 동맹
포르투갈 제국 (c.1580–1640)
유럽 공동 교전국
신성 로마 제국 (1629, 1632, 1635)
원주민 해외 동맹 (1600년대부터)
지휘관
지휘관 1빌럼 1세 판 오라녜 (사망)
마우리츠 판 오라녜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요한 판 올덴바르네펠트
빌헬름 루이스
마르텐 트롬프
엘리자베스 1세
로버트 더들리
제임스 1세
찰스 1세
프랜시스 베어
헨리 4세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루이 13세
리슐리외 추기경
지휘관 2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
마르게리타 디 파르마
알바 공작
파드리케 알바레스 데 톨레도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
알렉산데르 파르네세
알브레히트 7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암브로조 스피놀라
페르디난트 추기경
파드리케 데 톨레도
안토니오 데 오켄도
피해 규모
교전국 1100,000명 네덜란드 개신교도 사망 (1568–1609)
교전국 2미상

2. 배경

1580년, 유럽의 스페인 제국 영토


1477년 경의 네덜란드 지역


80년 전쟁의 발원은 복합적이며, 정치, 경제, 종교적 요인이 모두 작용했다.

15세기에 네덜란드(현재의 베네룩스)는 부르고뉴 공국의 일부가 된다(부르고뉴령 네덜란드). 이 당시 네덜란드는 모직물 생산으로 경제적으로 선진 지역이 되어 겐트(겐트), 앤트워프(앤트워프) 등의 부유한 도시들을 낳았다. 그러나 1477년에 부르고뉴의 샤를 용담공이 전사하자, 외동딸인 마리 부르고뉴 여공은 후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여 네덜란드 지역은 합스부르크가의 영토가 되었다.

15세기 말, 네덜란드 17주는 결혼 정책과 정복을 통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가 되었다.[18] 부르고뉴 공국마리 1세막시밀리안 1세의 혼인으로 부르고뉴와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의 영지가 되었다.[18]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인 카를 5세는 현재의 벨기에 겐트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구사했다.[19] 그는 1506년 네덜란드를 포함한 부르고뉴 공국의 군주가 되었고, 이후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을 상속받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20]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네덜란드 17주 전체의 주권자로서 전제 정치를 실시했고, 카를 5세 퇴위 후 합스부르크 영토가 오스트리아 계열과 스페인 계열로 나뉘면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중세 후기 네덜란드의 행정관은 귀족뿐 아니라 비귀족 출신도 임명되었으며,[25] 브뤼셀이 사실상 수도 역할을 했다.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는 법 집행과 세금 징수를 위해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는데,[26] 이는 네덜란드 귀족과 상인 계급에게 권력 박탈로 여겨져 반발을 샀다. 브레덴부르크 성 건설은 이러한 의심을 확증하는 증거로 비춰졌다.[27] 1531년에서 1555년 사이에는 네덜란드 의회가 실질적인 권력을 확보하기도 했다.[27]

카를 5세 통치 시기, 네덜란드 17주는 점차 경제적 자유를 잃었고, 프로테스탄트가 확산되자 종교재판이 시행되었다. 스페인 국왕 사절의 폭력과 권력 남용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도 "긴장 상태"를 유발했다.

16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번영한 지역 중 하나였다.[21] 플란데런 지방을 중심으로 모직물 산업과 무역이 발달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 아래에서 기업이 성장했다. 카를 5세는 유럽과 아메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는데, 이로 인해 잦은 전쟁에 휘말렸다. 프랑스이탈리아 전쟁을 벌였고, 오스만 제국과는 지중해를 두고 대립했으며, 독일 지역의 개신교와도 전쟁을 치렀다.[22]

카를 5세는 이러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22] 특히, 모든 판매 수익과 토지 수익의 10%를 징수하는 '1할세'는 상인과 지주들의 큰 불만을 야기했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네덜란드가 카를 5세에 대항하는 계기가 되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었다.[23] 무역에 의존하던 네덜란드자유관용으로 사회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그 때문에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카를 5세와 그의 후계자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간주하고 탄압하였다.[23] 이로 인해 네덜란드의 평화로운 공존은 위기를 맞았고, 펠리페 2세는 에스파냐 군대를 주둔시켜 반란을 진압하고 네덜란드를 로마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려 하였다. 이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24]

2. 1. 합스부르크의 지배와 중앙집권화

15세기 말, 네덜란드 17주는 결혼 정책과 정복을 통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가 되었다.[18] 부르고뉴 공국마리 1세막시밀리안 1세의 혼인으로 부르고뉴와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의 영지가 되었다.[18]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인 카를 5세는 현재의 벨기에 겐트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구사했다.[19] 그는 1506년 네덜란드를 포함한 부르고뉴 공국의 군주가 되었고, 이후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을 상속받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20]

중세 후기 네덜란드의 행정관은 귀족뿐 아니라 비귀족 출신도 임명되었으며,[25] 브뤼셀이 사실상 수도 역할을 했다.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는 법 집행과 세금 징수를 위해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는데,[26] 이는 네덜란드 귀족과 상인 계급에게 권력 박탈로 여겨져 반발을 샀다. 브레덴부르크 성 건설은 이러한 의심을 확증하는 증거로 비춰졌다.[27] 1531년에서 1555년 사이에는 네덜란드 의회가 실질적인 권력을 확보하기도 했다.[27]

카를 5세 통치 시기, 네덜란드 17주는 점차 경제적 자유를 잃었고, 프로테스탄트가 확산되자 종교재판이 시행되었다. 스페인 국왕 사절의 폭력과 권력 남용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도 "긴장 상태"를 유발했다.

2. 2. 경제적 번영과 과중한 세금

16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번영한 지역 중 하나였다.[21] 플란데런 지방을 중심으로 모직물 산업과 무역이 발달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 아래에서 기업이 성장했다. 카를 5세는 유럽과 아메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는데, 이로 인해 잦은 전쟁에 휘말렸다. 프랑스이탈리아 전쟁을 벌였고, 오스만 제국과는 지중해를 두고 대립했으며, 독일 지역의 개신교와도 전쟁을 치렀다.[22]

카를 5세는 이러한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22] 특히, 모든 판매 수익과 토지 수익의 10%를 징수하는 '1할세'는 상인과 지주들의 큰 불만을 야기했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네덜란드가 카를 5세에 대항하는 계기가 되었다.

2. 3. 종교 개혁과 개신교 탄압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었다.[23] 무역에 의존하던 네덜란드자유관용으로 사회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그 때문에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카를 5세와 그의 후계자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간주하고 탄압하였다.[23] 이로 인해 네덜란드의 평화로운 공존은 위기를 맞았고, 펠리페 2세는 에스파냐 군대를 주둔시켜 반란을 진압하고 네덜란드를 로마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려 하였다. 이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24]

3. 전쟁 초기 (1555년 - 1572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


1556년 카를 5세는 아들 필리페 2세에게 스페인 왕위를 양위했다. 카를 5세의 통치는 확고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사회 변혁과 종교 개혁의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 5세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플랑드르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독일어도 약간 할 수 있었지만, 필리페 2세는 스페인에서 자랐기 때문에 플랑드르어와 프랑스어를 할 수 없었다. 필리페 2세 통치하에서는 증세와 칼뱅주의의 확산, 중앙 집권화 강화로 인해 긴장 상태가 심화되었다. 더욱이 필리페 2세의 비타협적인 태도로 인해 긴장 상태는 독립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네덜란드에서 흔들리지 않는 행정과 왕권에 대한 충성을 확립하기 위해, 필리페 2세는 귀족 대표들을 네덜란드 북부를 통치하는 삼부회에 초청했다. 또한 필리페 2세는 플랑드르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복 누이 팔마 공녀 마르가리타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앙투안 드 그랑벨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1558년을 기점으로 삼부회는 필리페 2세의 요구를 거부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과세를 거부하고 스페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등의 행동을 보였다. 필리페 2세에 대한 항의는 그 후 그랑벨의 정책에 대한 항의로 바뀌어 갔다.

3. 1. 고조되는 갈등 (1555년 - 1568년)

1556년 카를 5세는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왕위를 양위하였다.[28] 카를 5세는 네덜란드를 가혹하게 통치하였으나 고향이라는 애착을 갖고 있었던 반면, 스페인에서 태어나 자란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할 줄 몰랐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 대해 중과세, 개신교 탄압,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진했고, 이는 결국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으로 이어진다.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17주의 상급 귀족으로 하여금 네덜란드 의회를 구성하게 하고, 그란베일을 수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의 서녀였던 파르마의 마르가레테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28] 그럼에도 불구하고 1558년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군대의 철수와 높은 세금의 감면에 대한 요구가 쏟아져 나왔으며, 상위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가 침묵하자 펠리페 2세에게 직접 탄원하기 시작하였다. 에그몬트 백작 라모랄, 흄 백작, 오라녜공 빌렘 1세[29] 등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펠리페 2세가 그란베일을 스페인으로 소환할 것을 요구하였다.[30] 1564년 귀족들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반란이 일어날 것임을 경고하였으나, 펠리페 2세는 억압으로 대응하였다.

1566년 하급 귀족 400명이 서명한 청원서가 펠리페 2세에게 전달되었다. 청원서를 전달하기 위해 총독 마르가르타의 저택에 방문했을 때 참모 중 한 명이 이들을 "괴젠"이라 표현하였는데, 이는 "거지"를 뜻하는 말이다. 그들의 탄원이 일정 정도 받아들여지자 하급 귀족들은 "괴젠"이란 칭호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3. 2. 성상 파괴 운동과 알바 공의 공포 정치 (1566년)

1565년 네덜란드는 북방 7년 전쟁의 여파와 흉년이 겹쳐 경제가 침체되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 신자들을 중심으로 반란의 기운이 가득 차게 되었다.[31] 1566년 8월 플랜더스의 혼트슈테 교회를 습격한 칼뱅주의자들은 교회에 있던 가톨릭 성인의 성상을 파괴하였다. 이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성상 파괴 운동 가운데 하나였다.[31] 성서주의자들인 칼뱅주의자들은 성상이 십계명에서 금지한 우상 숭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성상 파괴를 정당화하였다.[31] 성상 파괴에 참여한 인원은 적었으며[32] 그들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지방 정부는 그들의 파괴 행위를 방관하였다.[33]

이러한 성상 파괴 운동의 발생은 네덜란드 귀족을 두 편으로 갈라놓았다. 오라녜 공과 브레데로드 백작 헨리가 각 진영의 정점에 있었다. 귀족들의 청원에 응답하기 전부터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펠리페 2세는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것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1567년 8월 22일, 알바 공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가 1만 군대를 이끌고 브뤼셀에 주둔하였다.[34]

'''알바 공'''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알바 공은 특별 법정을 세우고 국왕을 비방한 모든 이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상위 귀족도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알바 공은 자신이 네덜란드에서 펠리페 2세를 대리한다고 생각하였으며 파르마의 마르가레테의 지위는 무시되었다. 결국 그녀는 1567년 9월 총독직을 사퇴하였다.[35] 에그몬트 백작과 호른 백작은 체포되어 브뤼셀의 대광장에서 참수되었다. 처형된 두 백작은 죽을 때까지 스페인의 국왕에 대한 충성을 지킨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였다. 알바 공이 이들을 처형한 명분은 이들의 개신교에 대한 관용 정책이 반란을 키웠다는 것이었다. 알바 공의 상급 귀족 처형은 네덜란드 의회의 권한을 침해한 것이었으며, 알바 공의 법정은 수 개월간 수천 명의 사람들을 처형하였다.[36] 이러한 무자비한 처형 때문에 특별 법정은 "피의 법정"으로 불리게 되었고 알바 공은 "강철 대공"이란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반란이 수그러들고 난 뒤에도 이러한 처형은 계속 이루어졌다.

3. 3. 오라녜 공 빌렘 1세의 저항 (1568년)

오라녜 공작 빌렘 1세는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의 영주이자 앤트워프의 후작이었으며 펠리페 2세에 대한 청원에 앞장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네덜란드 의회의 의원이었다. 알바공이 에그몬트 백작 라모랄과 호른 백작 필립 드 몽모랑시를 처형하자 빌렘 1세는 체포를 피하기 위해 그의 영지를 장인이었던 삭소니의 선제후에게 넘겼다. 펠리페 2세는 빌렘 1세의 네덜란드에서의 모든 지위와 영지를 몰수하였다.

1580년, 오라녜 공 빌렘 1세


1568년 빌렘 1세는 그가 원하는 것은 스페인왕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브뤼셀의 알바공을 퇴진시키는 것과 자신의 영지를 되찾는 것이라 밝혔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네덜란드의 국가 1절의 가사로 요약된다. 1568년 4월 23일 빌렘은 헤일리게레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이후 80년간 이어질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빌렘은 재산이 바닥나게 되어 군대가 해산되었고 알바공은 빌렘의 동맹군을 패퇴시켰다. 그는 1572년 다시 한 번 군대를 일으켜 홀란트와 젤란드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오라녜 공 빌렘 1세는 1584년 로마 가톨릭교도인 발타자르 게라트에 의해 암살되었다.

4. 다시 불붙은 전쟁 (1572년 - 1585년)

1572년 3월 1일,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에스파냐 국왕의 요청이라는 명분으로 영국의 항구에서 "바다의 거지들"이라 불리던 괴젠을 추방하여 이들을 네덜란드로 보냈다.[38] 괴젠들은 루멘의 영주 라마르크의 빌렘 2세를 지도자로 하여 4월 1일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브리엘을 점령하였다.[38] 브릴 점령은 북부 네덜란드 여러 도시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홀란트, 제일란트 등 북부 지역 대부분이 반군에 가담하면서, 스페인에 대한 저항은 더욱 확산되었다.[38][39]

1572년 도르드레히트에서 빌렘 1세는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스란트의 통치자이자 장군으로서 반군들과 회동하였다. 이 회동에서 오라네 왕가와 국가의 권력 분립이 합의되었다.[39] 1578년 여전히 로마 가톨릭 교회 세력이 우세하였던 암스테르담과 미델부르크를 제외한 홀란트와 젤란트 대부분의 도시가 반군에 가담하였다.[39]

1573년, 네덜란드의 반란이 지속되자 에스파냐는 알바 공을 루이스 데 레케센스 이 수니가로 교체하였다. 레케센스는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양 진영에 모두 호의적인 정책을 취하려고 애썼다. 한편 1575년 에스파냐는 파산상태에 빠졌다. 이로 인해 용병의 급여가 지급되지 않자 에스파냐의 군대는 당연히 쇠약해졌으며 안트베르펜에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에스파냐의 약탈"이라 불리는 이 약탈은 반군 측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일조하였다.

1576년 저지대 지방에서 에스파냐를 축출하기 위해 저지대 지방의 북부와 남부가 서로간의 종교의 차이를 불문하고 협력하기로 하는 간트 협약이 체결되었다. 에스파냐의 안트베르펜 약탈을 지켜본 로마 가톨릭 교회 교도들은 외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느니 반군에 가담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한편, 에스파냐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막대한 을 가져올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대를 편성하였다. 사령관은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였다.

1579년 아라동맹과 위트레흐트 동맹의 세력권
노란색-아라동맹
하늘색-위트레흐트 동맹


1579년 1월 16일 페르네제는 바룬 프랜더스(지금의 프랑스 아라와 벨기에의 왈로니)에서 북 네덜란드와 개신교에 대항하는 가톨릭교도들을 중심으로 아라 동맹을 결성한다. 이로 인해 3년간 유지되던 간트 협약은 붕괴되었고 종교적 관용을 바탕에 둔 독립을 희망했던 네덜란드 17주의 초기 목표역시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1월 23일 빌렘 1세는 아라 동맹에 대한 대응으로 북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로써 네덜란드 17주는 에스파냐 국왕의 휘하에 있는 남부와 반군의 통치를 받는 북부로 양분되었다.

성공회 신자였던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네덜란드 개신교 신자들의 독립전쟁을 후원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초기에 그녀는 위그노와의 헴프턴 코트 협약에서 배반당한 경험 때문에 개입을 주저했으나, 1585년 논서치 협약을 통해 네덜란드 반군을 지원하였다. 펠리페 2세는 이를 배반으로 받아들여 9년 전쟁에서 아일랜드를 지원하며 보복했다. 영국과 에스파냐의 대립은 1588년 무적함대의 패배로 이어졌다.

1581년 펠리페 2세는 앙주공 프랑소와를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네덜란드 의회는 반대하였다. 결국 1581년 7월, 네덜란드 의회는 '결별 선언'(Plakkaat van Verlatinghe)을 통해 펠리페 2세의 통치권을 부정하고, 네덜란드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앙주공은 권력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나, 1583년 네덜란드를 떠났다.

1581년 네덜란드가 결별 선언(Plakkaat van Verlatinghe)을 선포하자 에스파냐는 새로운 군대를 파견하였다. 에스파냐 군대는 플랜더스와 브라반트를 탈환하는 등 북부 지역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41] 1585년에는 당시 저지대 지방의 가장 큰 도시였던 안트베르펜이 에스파냐 군대에 함락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북부 네덜란드로 탈주하였다. 안트베르펜의 인구는 1560년 10만 명에서 1590년 4만 2천 명으로 줄었다.[41]

1584년 7월 10일, 펠리페 2세무법자로 규정한 오라녜 공 빌렘 1세는 펠리페 2세가 사주한 암살자에 의해 암살되었다.[41] 그의 지위는 아들 오라녜 공 나사우의 마우리츠에게 상속되었고, 마우리츠는 독립 전쟁을 이끌게 되었다.[41]

1585년 네덜란드는 개신교 (칼뱅주의)가 대다수인 북부와 로마 가톨릭이 대다수인 남부로 분리되었으며, 북부는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고 남부는 여전히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있었다. 에스파냐는 남부에 상당수의 군대를 주둔시켜 북부 네덜란드와 전쟁을 치르는 한편 프랑스를 견제하였다.[41]

4. 1. '바다의 거지들'의 활약과 북부 네덜란드의 봉기 (1572년)

1572년 3월 1일,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에스파냐 국왕의 요청이라는 명분으로 영국의 항구에서 "바다의 거지들"이라 불리던 괴젠을 추방하여 이들을 네덜란드로 보냈다.[38] 괴젠들은 루멘의 영주 라마르크의 빌렘 2세를 지도자로 하여 4월 1일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브리엘을 점령하였다.[38] 브릴 점령은 북부 네덜란드 여러 도시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홀란트, 제일란트 등 북부 지역 대부분이 반군에 가담하면서, 스페인에 대한 저항은 더욱 확산되었다.[38][39]

1572년 도르드레히트에서 빌렘 1세는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스란트의 통치자이자 장군으로서 반군들과 회동하였다. 이 회동에서 오라네 왕가와 국가의 권력 분립이 합의되었다.[39] 1578년 여전히 로마 가톨릭 교회 세력이 우세하였던 암스테르담과 미델부르크를 제외한 홀란트와 젤란트 대부분의 도시가 반군에 가담하였다.[39]

4. 2. 간트 협약과 네덜란드의 분열 (1576년)

1573년, 네덜란드의 반란이 지속되자 에스파냐는 알바 공을 루이스 데 레케센스 이 수니가로 교체하였다. 레케센스는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양 진영에 모두 호의적인 정책을 취하려고 애썼다. 한편 1575년 에스파냐는 파산상태에 빠졌다. 이로 인해 용병의 급여가 지급되지 않자 에스파냐의 군대는 당연히 쇠약해졌으며 안트베르펜에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에스파냐의 약탈"이라 불리는 이 약탈은 반군 측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일조하였다.

1576년 저지대 지방에서 에스파냐를 축출하기 위해 저지대 지방의 북부와 남부가 서로간의 종교의 차이를 불문하고 협력하기로 하는 간트 협약이 체결되었다. 에스파냐의 안트베르펜 약탈을 지켜본 로마 가톨릭 교회 교도들은 외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느니 반군에 가담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한편, 에스파냐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막대한 을 가져올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대를 편성하였다. 사령관은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였다.

1579년 1월 16일 페르네제는 바룬 프랜더스(지금의 프랑스 아라와 벨기에의 왈로니)에서 북 네덜란드와 개신교에 대항하는 가톨릭교도들을 중심으로 아라 동맹을 결성한다. 이로 인해 3년간 유지되던 간트 협약은 붕괴되었고 종교적 관용을 바탕에 둔 독립을 희망했던 네덜란드 17주의 초기 목표역시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1월 23일 빌렘 1세는 아라 동맹에 대한 대응으로 북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로써 네덜란드 17주는 에스파냐 국왕의 휘하에 있는 남부와 반군의 통치를 받는 북부로 양분되었다.

4. 3. 영국의 개입과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 선언 (1581년)

성공회 신자였던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네덜란드 개신교 신자들의 독립전쟁을 후원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초기에 그녀는 위그노와의 헴프턴 코트 협약에서 배반당한 경험 때문에 개입을 주저했으나, 1585년 논서치 협약을 통해 네덜란드 반군을 지원하였다. 펠리페 2세는 이를 배반으로 받아들여 9년 전쟁에서 아일랜드를 지원하며 보복했다. 영국과 에스파냐의 대립은 1588년 무적함대의 패배로 이어졌다.

1581년 펠리페 2세는 앙주공 프랑소와를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네덜란드 의회는 반대하였다. 결국 1581년 7월, 네덜란드 의회는 '결별 선언'(Plakkaat van Verlatinghe)을 통해 펠리페 2세의 통치권을 부정하고, 네덜란드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앙주공은 권력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나, 1583년 네덜란드를 떠났다.

4. 4. 안트베르펜 함락과 빌렘 1세의 암살 (1584년 - 1585년)

1581년 네덜란드가 결별 선언(Plakkaat van Verlatinghe)을 선포하자 에스파냐는 새로운 군대를 파견하였다. 에스파냐 군대는 플랜더스와 브라반트를 탈환하는 등 북부 지역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41] 1585년에는 당시 저지대 지방의 가장 큰 도시였던 안트베르펜이 에스파냐 군대에 함락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북부 네덜란드로 탈주하였다. 안트베르펜의 인구는 1560년 10만 명에서 1590년 4만 2천 명으로 줄었다.[41]

1584년 7월 10일, 펠리페 2세무법자로 규정한 오라녜 공 빌렘 1세는 펠리페 2세가 사주한 암살자에 의해 암살되었다.[41] 그의 지위는 아들 오라녜 공 나사우의 마우리츠에게 상속되었고, 마우리츠는 독립 전쟁을 이끌게 되었다.[41]

1585년 네덜란드는 개신교 (칼뱅주의)가 대다수인 북부와 로마 가톨릭이 대다수인 남부로 분리되었으며, 북부는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고 남부는 여전히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있었다. 에스파냐는 남부에 상당수의 군대를 주둔시켜 북부 네덜란드와 전쟁을 치르는 한편 프랑스를 견제하였다.[41]

5. 북부의 독립 (1585년 - 1609년)



1600년경 북부 7주는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으로서 사실상 독립을 달성했다. 공화국이 성립되었어도 스페인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은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로 진출하고, 포르투갈(1580년부터 스페인과 동군연합)과의 (1602년 - 1663년)에서 향신료 무역을 빼앗아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다. 이 때문에 무역의 부가 암스테르담으로 유입되어 17세기의 공화국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1609년에는 스페인과의 이 체결되었다. 여기서 17세기 말까지는 네덜란드 황금기라고 불린다.

네덜란드의 공업력은 영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완전한 가공무역국으로서 원료가 자급할 수 없는 결점을 보충하고도 남을 만한 만능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선박·풍차가 특히 유명하지만, 위그노 자본을 집중 투입한 마뉴팍튀르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것은 농공일체의 염색업이었다. 네덜란드의 토양은 경작에 부적합했기 때문에, 삼·홉·과일 등이 재배되었다. 원예 작물로 튤립이 재배되어, 후에 튤립 버블을 일으킬 정도로 유행했다. 그 외에도 선명한 색깔의 많은 작물이 재배되었다. 16-17세기, 네덜란드의 염료는 국제 시장에서 무적이었다.[14] 1614년, 영국의 제임스 1세는 산업 보호를 위해 백포(白布) 수출을 금지했지만, 네덜란드는 영국 등에서 염색된 옷감을 불매했다. 제임스 1세는 염색되지 않은 양모까지 수출을 금지했지만, 3년 이상 수출액이 2/3가 되어 버려, 1617년에 해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15] 네덜란드의 모직물 염색 기술은 47%의 부가가치로 이만큼의 경쟁력을 유지한 것이다.[16] 근대의 IG 파르벤으로 이어지는 염색업의 뿌리였다.

도르트 회의(1618년 - 1619년)에서 렘브란트파의 의견이 배척되었다.

5. 1. 마우리츠의 군사적 성공과 네덜란드 공화국의 성장

마우리츠는 군사 전략가이자 재정 전문가로서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군사 개혁을 통해 네덜란드 군을 강화하고, 효율적인 전술을 구사하여 에스파냐 군에 연승을 거두었다.[42] 1588년에는 해군을 정비하고 영국과 연합하여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특히 찰스 하워드가 이끄는 영국 함대가 아르마다 해전에서 승리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마우리츠는 에스파냐가 영국과 프랑스에 패배하여 약화된 틈을 타, 1588년 베르겐을 시작으로 브레다(1590년), 쥣펀, 데벤터르, 델프지일, 네이메헌(1591년), 스텐휘크, 퀘보르덴(1592년), 게르트륀덴베르그(1593년), 흐로닝언(1594년), 그롤, 엔스헤데, 오트마르숨, 올덴잘(1597년), 그라베(1602년) 등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해 나갔다.[42] 이러한 군사적 성공을 통해 오늘날 네덜란드의 국경과 유사한 형태가 갖추어졌다.

1600년경 북부 7주는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으로 사실상 독립을 달성하였으며,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로 진출했다. 이후 포르투갈(1580년부터 스페인과 동군연합)과의 (1602년 - 1663년)에서 승리하여 향신료 무역을 장악하고 세계 무역의 패권을 차지했다. 이로 인해 암스테르담에 막대한 부가 유입되었고,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은 '황금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14]

네덜란드는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공업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염색업은 농공일체형 마뉴팍튀르 형태로 발전하여 국제 시장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했다.[14] 1614년 영국의 제임스 1세가 산업 보호를 위해 백포 수출을 금지했으나, 네덜란드는 염색된 옷감 불매로 맞섰고, 결국 1617년 영국은 수출 금지 조치를 해제해야 했다.[15] 네덜란드의 모직물 염색 기술은 47%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훗날 IG 파르벤으로 이어지는 염색업의 뿌리가 되었다.[16]

5. 2. 무적함대의 패배와 프랑스-스페인 전쟁

1588년 에스파냐는 22척의 전함과 108척의 무장상선으로 무적함대(아르마다 인벤치블, Armada Invenciblees)를 구성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지원하는 영국을 저지하기 위한 원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무적함대는 영국 함대와의 해전에서 패배하여 목적 달성에 실패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는 이후 영국의 해상력 강화의 기반이 되었다.

무적함대의 패배를 그린 그림, 1797년 작


프랑스의 앙리 4세는 개신교 신도였으며 이로 인해 프랑스 내 가톨릭 세력으로부터 왕위를 부정당하였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프랑스의 가톨릭 세력을 지원하여 앙리 4세를 압박하였으나 무적함대의 패배 이후 영국 및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에스파냐의 세력이 약화되자 앙리 4세는 1595년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에스파냐가 다시는 프랑스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과 앙리 4세의 왕권을 인정하는 베르빙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1598년 펠리페 2세가 사망한 뒤 에스파냐의 왕위를 이은 펠리페 3세는 앙리 4세와의 베르빙 조약을 계승하였다. 이로써 프랑스 종교 전쟁이 일단락되었다.

1595년 펠리페 2세는 전쟁으로 인한 재정 압박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자신의 딸 이사벨라와 그녀의 남편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대공에게 양도하였으며 프랑스와는 베르빙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5. 3. 네덜란드의 승리와 동인도 회사 설립

1600년 니우포르트 전투와 1607년 지브롤터 해전에서 네덜란드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네덜란드 공화국은 에스파냐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고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로 진출, 포르투갈(1580년부터 스페인과 동군연합)과의 (1602년 - 1663년)에서 향신료 무역을 빼앗아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다. 네덜란드 제국은 인도네시아, 싱가폴 등을 식민 지배하였다. 이 때문에 무역의 부가 암스테르담으로 유입되어 17세기의 공화국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1609년에는 스페인과의 이 체결되었다.

네덜란드의 공업력은 영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완전한 가공무역국으로서 원료가 자급할 수 없는 결점을 보충하고도 남을 만한 만능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선박·풍차가 특히 유명하지만, 위그노 자본을 집중 투입한 마뉴팍튀르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것은 농공일체의 염색업이었다. 네덜란드의 토양은 경작에 부적합했기 때문에, 삼·홉·과일 등이 재배되었다. 원예 작물로 튤립이 재배되어, 후에 튤립 버블을 일으킬 정도로 유행했다. 그 외에도 선명한 색깔의 많은 작물이 재배되었다. 16-17세기, 네덜란드의 염료는 국제 시장에서 무적이었다.[14] 1614년, 영국의 제임스 1세는 산업 보호를 위해 백포(白布) 수출을 금지했지만, 네덜란드는 영국 등에서 염색된 옷감을 불매했다. 제임스 1세는 염색되지 않은 양모까지 수출을 금지했지만, 3년 이상 수출액이 2/3가 되어 버려, 1617년에 해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15] 네덜란드의 모직물 염색 기술은 47%의 부가가치로 이만큼의 경쟁력을 유지한 것이다.[16]

도르트 회의(1618년 - 1619년)에서 렘브란트파의 의견이 배척되었다.

6. 휴전 (1609년 - 1621년)

1609년 북부 네덜란드와 남부 네덜란드는 영국과 프랑스의 입회아래 헤이그에서 휴전 조약을 맺었다. 휴전기간 동안 네덜란드에는 새로운 중요 사안이 발생하였다. 휘호 그로티우스와 올덴바르네벨트(Johan van Oldenbarnevelt)가 지도하던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는 온건 칼뱅주의 교파인 아르메니우스파가 대중에게 확산되었다. 1617년 이에 대해 강경 칼뱅주의자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강경파의 지지를 받고 있던 모리스는 온건파에 반대하는 법령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휘호 그로티우스는 뢰베스타인 성으로 도피하였다.[43]

군사 유지비와 무역 감소로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 모두 재정적 압박을 받았다.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 1609년 4월 9일 안트베르펜에서 휴전 조약이 체결되어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 종식되고 십이년 휴전이 시작되었다. 이 휴전의 종결은 홀란트 랜드아드보카트 요한 판 올덴바르네펠트에게는 중대한 외교적 성공이었는데, 스페인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공화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는 이 휴전을 굴욕적인 패배로 여겼다. 정치적, 군사적, 이념적 패배를 당했고, 권위에 대한 모욕은 엄청났다.[10] 안트베르펜으로의 출입을 위한 쉘트 강의 폐쇄와 스페인 및 포르투갈 식민지 해상 항로에서의 네덜란드 상업 활동 허용은 스페인이 반대하는 몇 가지 사항에 불과했다.[11]

도르트 회의


국제적으로는 평화가 유지되었지만, 네덜란드 내정에는 정치적 불안이 만연했다. 신학적 논쟁으로 시작된 것이 항변파 (아르미니우스파)와 반항변파(고마리스트) 사이의 폭동으로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레헨트들은 전자를, 시민들은 후자를 지지했다. 정부조차도 개입하여, 올덴바르네펠트는 항변파를, 총독 모리스 나소는 그들의 반대파를 지지했다. 결국 도르트 회의는 항변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국교회에서 파문시켰다. 올덴바르네펠트는 그의 동맹 질스 판 레덴베르크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고, 다른 두 명의 항변파 동맹인 롬바우트 호거베츠와 휘고 그로티우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600년경까지 북부 7주는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으로서 사실상 독립을 달성했다. 공화국이 성립되었어도 스페인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은 1602년, 동인도회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로 진출하고, 포르투갈(1580년부터 스페인과 동군연합)과의 향신료 무역을 빼앗아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다. 이 때문에 무역의 부가 암스테르담으로 유입되어 17세기의 공화국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1609년에는 스페인과의 12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여기서 17세기 말까지는 네덜란드 황금기라고 불린다.

네덜란드의 공업력은 영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완전한 가공무역국으로서 원료가 자급할 수 없는 결점을 보충하고도 남을 만한 만능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선박·풍차가 특히 유명하지만, 위그노 자본을 집중 투입한 마뉴팍튀르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것은 농공일체의 염색업이었다. 네덜란드의 토양은 경작에 부적합했기 때문에, 삼·홉·과일 등이 재배되었다. 원예 작물로 튤립이 재배되어, 후에 튤립 버블을 일으킬 정도로 유행했다. 그 외에도 선명한 색깔의 많은 작물이 재배되었다. 16-17세기, 네덜란드의 염료는 국제 시장에서 무적이었다.[14] 1614년, 영국의 제임스 1세는 산업 보호를 위해 백포(白布) 수출을 금지했지만, 네덜란드는 영국 등에서 염색된 옷감을 불매했다. 제임스 1세는 염색되지 않은 양모까지 수출을 금지했지만, 3년 이상 수출액이 2/3가 되어 버려, 1617년에 해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15] 네덜란드의 모직물 염색 기술은 47%의 부가가치로 이만큼의 경쟁력을 유지한 것이다.[16] 근대의 IG 파르벤으로 이어지는 염색업의 뿌리였다.

도르트 회의(1618년 - 1619년)에서 렘브란트파의 의견이 배척되었다.

6. 1. 휴전 협정과 내부 갈등

군사 유지비와 무역 감소로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 모두 재정적 압박을 받았다. 1609년 4월 9일 안트베르펜에서 휴전 조약이 체결되어 십이년 휴전이 시작되었다.[10] 이 휴전의 종결은 홀란트 랜드아드보카트 요한 판 올덴바르네펠트에게는 중대한 외교적 성공이었는데, 스페인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공화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10] 스페인에서는 이 휴전을 굴욕적인 패배로 여겼다.[10]

국제적으로는 평화가 유지되었지만, 네덜란드 내정에는 정치적 불안이 만연했다. 신학적 논쟁으로 시작된 것이 항변파 (아르미니우스파)와 반항변파(고마리스트) 사이의 폭동으로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레헨트들은 전자를, 시민들은 후자를 지지했다. 정부조차도 개입하여, 올덴바르네펠트는 항변파를, 총독 모리스 나소는 그들의 반대파를 지지했다. 결국 도르트 회의는 항변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국교회에서 파문시켰다. 올덴바르네펠트는 그의 동맹 질스 판 레덴베르크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고, 다른 두 명의 항변파 동맹인 롬바우트 호거베츠와 휘고 그로티우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0]

7. 전쟁의 결말 (1621년 - 1648년)

1621년 휴전이 종식되면서 독립 전쟁은 유럽 전체를 휘말리게 한 삼십년 전쟁(1618년 - 1648년)으로 이어졌다. 삼십년 전쟁에서 브레다는 스페인군에 두 차례나 유린당했다.

1624년 - 1625년, 로스 바르바세스 후작 암브로시오 스피놀라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침공하여 오라니예 공 마우리츠가 이끄는 네덜란드군이 수비하는 브레다를 포위했다 (제3차 브레다 전투/Siege_of_Breda_(1624)영어). 유명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명화 『브레다의 항복』에는 공성전을 지휘한 암브로시오 스피놀라에게 브레다 수비대 사령관이었던 유스티누스 판 나사우(오라니예 공 빌렘 1세의 서자)가 성문의 열쇠를 건네주며 스페인에 항복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1637년, 오라니예 공 프레데릭 헨드릭에 의한 제4차 브레다 전투/Siege_of_Breda_(1637)영어에 의해 브레다는 해방되었다. 마르턴 트롬프가 이끄는 네덜란드 해군은 1639년 2월 덩케르크 해전/Zeeslag bij Duinkerkenl()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하고, 같은 해 10월 다운스 해전/Battle of the Downs영어에서 상륙군을 포함한 스페인・포르투갈의 대함대를 격파했다.

1648년, 삼십년 전쟁을 종식시킨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브레다는 공식적으로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에 합류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일부인 뮌스터 조약/Peace of Münster영어에서 스페인은 네덜란드 연합 공화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마침내 80년에 걸친 전쟁이 종식되었다.

7. 1. 30년 전쟁과 네덜란드의 참전

1621년 휴전이 종식되면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벌어진 30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30년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이 이끄는 로마 가톨릭과 네덜란드를 비롯한 개신교 국가들 간의 종교 전쟁이었으나, 실제로는 각국의 이익에 따라 결성된 동맹 간의 전쟁이었다.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 국가였으나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기 위해 개신교 국가 편에 섰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작 "브레다의 항복"


영구 평화 조약 체결을 위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의 협상은 종교적 문제와 식민지 권리 문제로 인해 결렬되었다. 에스파냐는 북부 네덜란드 내 로마 가톨릭 신도에 대한 종교적 자유를 요구했으나, 네덜란드가 남부 네덜란드의 개신교 신도에 대한 종교적 자유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했다.

전쟁 초기 에스파냐는 브레다를 함락하는 등 선전하였으나, 1624년 - 1625년 암브로시오 스피놀라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오라니예 공 마우리츠가 이끄는 네덜란드군이 수비하는 브레다를 포위하여 함락하였다. (제3차 브레다 전투/Siege_of_Breda_(1624)영어).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명화 『브레다의 항복』에는 암브로시오 스피놀라에게 유스티누스 판 나사우(오라니예 공 빌렘 1세의 서자)가 성문의 열쇠를 건네주며 항복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1637년 오라니예 공 프레데릭 헨드릭에 의한 제4차 브레다 전투/Siege_of_Breda_(1637)영어에 의해 브레다는 해방되었다. 결국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주축이 된 동맹군에 에스파냐가 패배하였다. 네덜란드는 개신교 동맹으로서 승전국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7. 2. 베스트팔렌 조약과 네덜란드 독립의 승인 (1648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30년 전쟁과 80년 전쟁이 모두 종식되었다.[44] 이 조약의 일부인 뮌스터 조약을 통해 스페인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12]

바르톨로메우스 판 데어 헬스트의 ''뮌스터 조약의 기념연회'' (1648)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 간의 협상은 1646년 1월, 30년 전쟁 당사국들 간의 더 광범위한 평화 협상의 일환으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네덜란드 총주(States General)는 여러 주에서 대표를 파견했는데, 대표단은 빌럼 판 리퍼르다(오베라이셀), 프란스 판 도니아(프리슬란트), 아드리아엔 클란트 톳 스테둠(그로닝언), 아드리아안 파우와 얀 판 마테네세(홀란트), 바르톨트 판 겐트(헬더란트), 요한 더 크뉘트(젤란트), 고데르트 판 레데(위트레흐트)였다. 스페인 대표단은 가스파르 데 브라카몬테(Gaspar de Bracamonte), 3대 페냐란다 백작이 이끌었다.

네덜란드와 스페인 대표단은 12년 휴전 조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곧 합의에 도달하여, 스페인의 네덜란드 독립 승인을 확인했다. 네덜란드의 요구 사항은 대체로 충족되었다. 조약(79개 조항)의 텍스트는 1648년 1월 30일에 확정되었고, 1648년 5월 15일 평화를 선서로 확인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식적인 "독립"을 획득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으므로 1659년 피레네 평화까지 전쟁 상태를 유지했다. 이 평화는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화려한 축제로 기념되었다.[12]

8. 결과 및 영향

80년 전쟁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정치, 경제, 종교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독립 이후 해상 무역과 식민지 개척을 통해 경제적으로 번영하며 '황금 시대'를 맞이했다. 암스테르담은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네덜란드는 과학, 예술, 문화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80년 전쟁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스페인의 패권이 약화되고, 네덜란드영국이 새로운 해상 강국으로 부상했다. 또한, 80년 전쟁과 연관된 30년 전쟁의 결과로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가 추락하고, 프랑스가 유럽 대륙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80년 전쟁은 종교적 자유와 관용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다양한 종교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를 건설했으며, 이는 근대 유럽의 종교적 관용 전통에 영향을 미쳤다.

8. 1. 네덜란드 공화국의 발전과 황금 시대

네덜란드 공화국은 독립 이후 해상 무역과 식민지 개척을 통해 경제적으로 번영하며 '황금 시대'를 맞이했다. 암스테르담은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네덜란드는 과학, 예술, 문화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8. 2. 유럽의 세력 균형 변화

80년 전쟁은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스페인의 패권이 약화되고, 네덜란드영국이 새로운 해상 강국으로 부상했다. 또한, 80년 전쟁과 연관된 30년 전쟁의 결과로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가 추락하고, 프랑스가 유럽 대륙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8. 3. 종교적 자유와 관용의 가치 확산

80년 전쟁은 종교적 자유와 관용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다양한 종교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를 건설했으며, 이는 근대 유럽의 종교적 관용 전통에 영향을 미쳤다.

9. 한국사와의 연관성

9. 1. 조선과 네덜란드의 만남

9. 2. 서양 문물의 전래와 영향

9. 3. 역사적 교훈과 현대적 의미

10. 기타

대항해시대 온라인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소재로 하는 시나리오가 포함되어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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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술지 El imperio colonial español y la República Holandesa tras la Paz de Münster https://dialnet.unir[...]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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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서적 Waar is de Tachtigjarige Oorlog gebleven? De Harmonie 2006
[43] 웹사이트 The Life and Death of John of Barneveld http://www.gutenberg[...] Project Gutenberg 1874
[44] 서적 스페인사 까치글방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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