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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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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릉 전투는 기원전 342년에 제나라와 위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손빈의 계략과 방연의 자만심이 빚어낸 극적인 승부였다. 위나라는 한나라를 침공했으나, 제나라가 한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손빈은 감조지계(減竈之計)를 사용하여 위나라 군대를 유인하고, 마릉 계곡에 매복하여 방연을 죽이고 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위나라는 쇠퇴하고 제나라는 패자로 부상했으며, 진나라의 부상을 이끌어 전국 시대의 판도를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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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릉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마릉 대전
분쟁마릉 대전
날짜기원전 342년
장소마릉(하북성 대명현)
결과의 승리와 패권 차지
위의 패권 상실
교전 세력
교전국 1제(齊)
교전국 2위(魏)
지휘관 및 지도자
전기
손빈
방연
태자 신(太子 申)
병력 규모
약 5만 명
약 10만 명
사상자
기록 없음
다수 전사
지도

2. 전투의 배경

전국시대 초기, 위나라는 주변국들을 압도하며 패자로 군림했으나, 주변국들과의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되고 있었다. 당시 위나라는 동쪽으로는 , 서쪽으로는 , 남쪽으로는 , 북쪽으로는 에 둘러싸여 사방이 막힌 형국(四戰之國)이었다. 영토 확장을 위해서는 전쟁이 필수였고, 혜왕은 많은 인재를 영입하고 전쟁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키려 했다. 그러나 13년 전 계릉 전투에서 조나라를 구원하러 온 제나라에 패해 많은 군사를 잃었고, 서쪽의 진나라와는 잦은 전투 끝에 소강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나라는 신불해의 변법으로 힘을 기르고 있던 한나라를, 더 강해지기 전에 공격하고자 했다. 또한 한나라가 조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구실로 한나라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2. 1. 위의 한나라 침공

당시 위나라는 동쪽으로는 , 서쪽으로는 , 남쪽으로는 , 북쪽으로는 에 둘러싸여 있었다(四戰之國). 사방이 막혀있기 때문에 영토 확장을 위해서는 전쟁이 필수였고, 당시 군주였던 혜왕은 많은 인재를 영입하고, 전쟁을 통한 국력 신장을 꾀하고 있었다. 그러나 13년 전, 위는 조를 침공하다 조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인 제의 참전으로 많은 군사를 잃고 패했으며(계릉 전투), 서쪽의 진과는 수시로 전투가 벌어지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는 이번에는 한을 침공하였다. 당시 한은 신불해가 주도한 변법으로 나라의 힘을 기르고 있었는데, 위는 한이 더 큰 힘을 키우기 전에 그 싹을 자르고자 했던 것이었다. 또한, 한이 조와 연합하여 위를 침공하기로 맹약했던 것이 위에 전해졌기 때문에 위는 이를 구실 삼아 한을 정벌하기로 하고, 태자 신을 총사로 삼고, 위의 명장 방연을 함께 보내어 10만 군사로 신정을 공격하게 했다.[1]

2. 2. 제나라의 참전과 손빈의 계책

이무렵 제나라의 군주는 선왕이었다. 한나라의 소후가 제나라에 사신을 급파하여 구원을 요청하자, 제나라의 중신들은 회의를 거듭하였다. 당시 회의장에는 당시 제나라 왕이 아끼던 손빈이 군사(軍師)의 자격으로 참석해 있던 중이었다. 왕이 손빈에게 계책을 묻자, 손빈은 다음의 계책을 내놓는다.[1]

"무릇 위나라는 스스로 그 국세가 강성함을 믿고 지난번에는 조나라를 공격하였고 이번에는 한나라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위나라는 잠시도 우리 제나라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한나라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한나라를 위나라에 주어 위나라를 살찌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한나라를 구하지 말자고 하는 사람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한나라에 대한 위나라의 공격이 지금 시작되었음으로 한나라는 아직 대항할 힘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미리 구원군을 보낸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한나라를 대신해서 위나라의 병화를 맞이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나라는 안전함을 즐기게 되는 상황이 되는 반면에, 우리는 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어 그 위험을 대신 하게 되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한나라를 구원하자고 하는 사람들의 말도 옳지 않습니다. 대왕을 위해 한 가지 계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은 한나라를 반드시 구해준다고 사자가 말하여 한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십시오.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구원병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온 힘을 기울여 위나라의 공격에 맞서 싸울 것이고, 위나라도 역시 있는 힘을 다하여 한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나라가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서서히 군사를 발하여 진격하여 지칠대로 지친 위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여 한나라를 구원한다면 힘은 적은 힘으로 큰 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어찌 앞서의 두 가지 방책보다 못하다 하겠습니까?"

왕은 기뻐하며 이 계책을 채택한다.[1]

2. 3. 신정성 전투와 위의 회군

한나라는 신불해의 변법으로 국력을 강화한 상태였고, 신정은 견고하여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게다가 제나라의 원군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나라 병사들은 위나라의 공격을 수 차례 막아냈다. 공성전은 지루하게 전개되었다.[1]

이때, 전기를 사령관으로 하는 제나라 군대가 위나라의 도성인 대량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급보가 위나라 진영에 도착했다. 그러나 계릉 전투에서 '''위위구조(圍魏救趙)''' 계책으로 낭패를 보았던 방연은 태자 신의 군사를 대량에 남겨두어 대비했다. 태자 신은 결사적으로 제나라 군대를 막았다. 방연이 이끄는 군대가 위나라 국경에 도달하자, 제나라는 군사를 돌이켜 회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모두 손빈의 계책이었다.[1]

3. 마릉 전투 (기원전 342년)

馬陵之戰|마릉지전중국어은 전국시대 손빈의 뛰어난 계략과 방연의 자만, 방심이 엇갈려 당시 정세를 뒤바꾼 전투이다.

3. 1. 손빈의 계책: 감조지계(減竈之計)

손빈은 평소 위나라 군사들이 제나라 군사들을 얕잡아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손빈 자신이 직접 참전했다면, 방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손빈은 전기에게 계책을 낸다.[1]

:"병법에 이르기를 '백 리를 추격하여 승리를 얻고자 하는 군사들은 그 장수를 잃게 되며, 오십 리를 추격하여 승리를 얻고자 하는 군사들은 그 군사의 반만이 목적지에 당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철군하는 쪽은 추격하는 쪽보다 불리합니다만, 저는 이를 이용하고자 합니다."

:"군사께서는 어떤 계책을 쓰시려 하십니까?"

:"옛적 스승님과 함께 수학할 때에, 방연은 군사의 수를 계산하는 방법으로 병사들이 식사를 한 아궁이의 숫자를 세는 방법을 사용하여 적 병력의 수를 계산했습니다. 이를 이용할 것입니다. 오늘 저녁, 군사들이 취사할 때에는 10만 명이 밥을 먹을 아궁이를 만드십시오. 그리고 다음날부터는 그 숫자를 절반으로 줄여나가시면, 방연은 필시 우리 군사들이 적지에 들어와서 겁을 먹고 탈주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방연과 위군은 조바심을 내고 추격을 하게 될 것이니, 반드시 우리의 계책에 넘어올 것입니다."

손빈의 계책을 "아궁이를 줄여 적의 눈을 속인다"는 뜻의 "'''감조지계(減竈之計)'''"라 한다. 전기는 손빈의 계책에 찬성했다. 예상은 적중하여 방연은 제군에 탈영병이 속출하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방연은 태자 신과 군사를 기병 위주로 편제하여 2대로 나누고, 후방에는 조카인 방총이 나머지 군사를 지휘하여 따라오게 하였다. 그만큼 마음이 급해진 것이다. 위군은 행군속도를 두 배로 올려서 추격하기 시작했다.[1]

3. 2. 마릉에서의 매복

손빈은 마릉의 지형적 이점을 활용해 매복 작전을 준비했다. 마릉은 계곡이 깊고 숲이 험준하여 매복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손빈은 마릉 계곡의 나무들을 베어 길목을 막고, 계곡 가운데 큰 나무 껍질을 벗겨 숯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1]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는다"

"군사 손빈이 적다"손빈은 계곡 양쪽에 궁수 1만 명을 배치하고, 나무에서 불빛이 비치는 순간 집중 사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곧 저녁이 되었다.[1]

3. 3. 방연의 최후와 위나라의 패배

저녁이 되자, 방연이 이끄는 군사들은 마릉 계곡에 도착했다. 그러나 계곡 곳곳에는 나무들이 어지럽게 잘려 넘어져 있었다. 방연은 이것이 제나라 군대가 퇴로를 뚫은 흔적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유독 한 그루의 나무만이 서 있었고,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방연은 그 나무로 다가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슨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방연은 글자를 읽기 위해 횃불을 밝혔다. 글자를 읽은 방연은 크게 놀랐다. 이 모든 것이 손빈의 계략이었다. 그 순간, 사방에서 무수히 많은 화살이 날아왔고, 위나라 군사들은 화살을 맞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방연 역시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방연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자결했다고 한다.

'''"결국 그 녀석(손빈)의 명성을 떨치게 해주었구나!"'''

태자 신이 이끄는 군사들 역시 매복에 걸려 대부분 죽임을 당했고, 태자는 제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었다. 손빈은 방연의 시신에서 목을 베었고, 태자를 함거에 가두었다. 그러나 그날 밤, 태자는 욕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칼을 빼 자결했다. 원래 태자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손빈은 태자의 죽음을 듣고 탄식하였다. 후미에서 따라오던 위나라 군대 역시 제나라 군대의 기습으로 크게 패하였다.[1]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마릉 전투는 당시 중국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위 문후위 무후의 치세 아래 번영을 누리며 7국의 패자를 자임하던 위나라의 위상은 흔들렸고, 제나라는 새로운 패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또한, 진나라상앙의 계략으로 하서 땅을 점령하면서 약소국에서 급부상하게 되었다. 위나라의 몰락은 진나라의 중원 진출을 야기했고, 이는 훗날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이 되었다.

4. 1. 전국시대 판도 변화

이 전투는 당시 중국 전체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위 문후위 무후의 치세 아래 번영을 누리며, 7국의 패자를 자임하던 위나라는 위상이 흔들렸으며, 다시는 천하 쟁패를 노리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 승전국인 제나라는 새로운 패자로 부상하게 된다. 또한 이 전투가 벌어진 후, 함곡관 안에 웅크리고 있던 진나라의 5만 군사가 상앙의 계략으로 하서 땅을 점령하면서 약소국의 위치에 있던 진나라가 급부상하게 되었다. 위나라는 진나라를 틀어막는 역할을 감당했는데, 위나라가 몰락하면서 진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결국 중원으로 나온 진나라가 나머지 나라들을 공략하면서 천하의 판도는 서서히 진나라로 기울게 되는데, 이는 좀 더 훗날의 이야기이다.

4. 2. 군사 전략적 의의

손빈의 감조지계(減竈之計)(아궁이를 줄여 적을 속이는 계책)는 적을 속이고 기만하는 심리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1] 이 계책은 병법에서 '백 리를 추격하여 승리를 얻고자 하는 군사들은 그 장수를 잃게 된다'는 점을 역이용하여, 철군하는 쪽이 오히려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손빈은 위나라 군대가 제나라 군대를 얕잡아보고 있다는 점과, 방연이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라는 점을 간파하여 이 계책을 활용했다.

이 전투는 매복과 지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정보전의 가치를 부각하는 고대 전쟁사의 중요한 사례이다. 특히, 적군의 수를 계산하는 방법으로 식사한 아궁이 숫자를 세는 방식을 역이용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승리를 이끌어낸 점은 주목할 만하다.

5. 주요 인물


  • '''제나라'''


선왕 시기, 제나라는 손빈의 계책에 따라 한나라를 구원하는 척하면서 위나라를 지치게 만든 후 공격하려 했다.[1]

  • '''위나라'''


혜왕 시기, 위나라는 사방이 막혀있어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이 필수적이었다. 계릉 전투에서 제나라에게 패배하고, 진나라와는 소강상태였던 위나라는 한나라를 침공, 신정에서 전투를 벌였다. 제나라 군사들이 위나라 도성을 공격했으나, 위나라는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5. 1. 제나라

이무렵 제나라의 군주는 선왕이었다. 한나라의 소후가 제나라에 사신을 급파하여 구원을 요청하자, 제나라의 중신들은 회의를 거듭하였다. 당시 회의장에는 제나라 왕이 아끼던 손빈이 군사(軍師)의 자격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왕이 손빈에게 계책을 묻자, 손빈은 다음과 같은 계책을 내놓았다.[1]

"무릇 위나라는 스스로 그 국세가 강성함을 믿고 지난번에는 조나라를 공격하였고 이번에는 한나라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위나라는 잠시도 우리 제나라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한나라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한나라를 위나라에 주어 위나라를 살찌게 만드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한나라를 구하지 말자는 사람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 한나라에 대한 위나라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므로 한나라는 아직 대항할 힘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미리 구원군을 보낸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한나라를 대신해서 위나라의 병화를 맞이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나라는 안전함을 즐기게 되는 상황이 되는 반면에, 우리는 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어 그 위험을 대신하게 되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한나라를 구원하자는 사람들의 말도 옳지 않습니다. 대왕을 위해 한 가지 계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은 한나라를 반드시 구해준다고 사신에게 말하여 한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십시오.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구원병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온 힘을 기울여 위나라의 공격에 맞서 싸울 것이고, 위나라도 역시 있는 힘을 다하여 한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나라가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서서히 군사를 발하여 진격하여 지칠 대로 지친 위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여 한나라를 구원한다면 적은 힘으로 큰 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어찌 앞서의 두 가지 방책보다 못하다 하겠습니까?"[1]

왕은 기뻐하며 이 계책을 채택한다.

5. 2. 위나라

당시 위나라는 동으로는 , 서로는 , 남으로는 , 북으로는 에 둘러싸여 있었다(四戰之國). 사방이 막혀있기 때문에 영토 확장을 위해서는 전쟁이 필수였고, 당시 군주였던 혜왕은 많은 인재를 영입하고, 전쟁을 통한 국력 신장을 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13년 전, 위는 조를 침공하다 조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인 제의 참전으로 많은 군사를 잃고 패하였으며(계릉 전투), 서쪽의 진과는 수시로 전투가 벌어지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는 이번에는 한을 침공하였다. 당시 한은 신불해가 주도한 변법으로 나라의 힘을 기르고 있었는데, 위는 한이 더 큰 힘을 키우기 전에 그 싹을 자르고자 했던 것이었다. 또한 한이 조와 연합하여 위를 침공하기로 맹약했던 것이 위에 전해졌던 상황이기 때문에 위는 이를 구실삼아 한을 정벌하기로 하고, 태자 신을 총사로 삼고, 위의 명장 방연을 함께 보내어 10만의 군사로 신정을 공격하게 했다.

한은 춘추전국시대의 유력 제후국인 정나라를 기원전 375년에 병합하고, 정나라의 도읍지였던 신정을 새 도읍지로 정했다. 전투는 바로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당시 한은 신불해의 변법으로 나라의 국력이 많이 신장되어 있었으며, 신정은 견고한 도시였기에 함락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제의 원군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의 병사들은 죽을 힘을 다해 맞섰고, 위의 공격을 수 차례나 막아냈다. 공성전은 지루하게 전개되었다. 바로 이때, 위의 진영에 급보가 도착했다. 전기를 사령관으로 하는 제의 군사들이 위의 도성인 대량을 향하여 진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위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미 지난 계릉 전투에서 '''위위구조(圍魏救趙)'''의 계책으로 낭패를 보았던 방연은, 태자 신의 군사를 대량에 남겨두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태자 신은 결사적으로 제의 군사들을 막았다. 그리고 방연이 이끄는 군대가 곧 위의 국경에 도달하자, 제는 군사를 돌이켜 회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모두 손빈의 계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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