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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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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연은 귀곡자에게 병법을 배운 인물로, 손빈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으나 손빈의 재능을 질투하여 모함했다. 위나라 장군이 된 후 손빈을 초빙하여 다리를 자르고 문신을 새기는 형벌을 내렸으나, 손빈은 제나라로 탈출하여 제나라의 전략가가 되었다. 방연은 위나라의 총사령관으로 한나라를 공격했고, 제나라가 구원군을 파견하여 손빈을 참모로 임명했다. 마릉 전투에서 손빈의 계략에 빠져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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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연
기본 정보
초한쟁패기 위나라 장수 방연
간체자庞涓
번체자龐涓
병음Páng Juān
웨이드-자일스P'ang Chüan
출생기원전 4세기
사망기원전 342년
활동 시기기원전 4세기
국가위나라
직업장군
상관위 혜왕
경쟁자손빈
사망 원인전투 중 자살
생애
주요 전투마릉 전투
관련 인물손자, 위 혜왕
기타 정보
분야군사

2. 생애

방연은 젊은 시절 귀곡자에게서 손빈과 함께 병법을 배웠다.[1] 그는 손빈에 비해 자신의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질투했다. 훗날 위나라 혜왕을 섬기며 장군이 되었고, 손빈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 방연은 손빈을 식객으로 위나라에 초빙한 뒤, 억울한 죄를 씌워 양쪽 다리를 자르고 이마에 문신을 새기는 처벌을 내렸다.

그러나 손빈은 제나라 사신 전기의 도움으로 제나라로 탈출하였다. 기원전 342년, 위나라는 한나라를 공격했고, 한나라는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제나라 위왕은 전기를 장군으로, 손빈을 군사로 임명하여 한나라를 지원했다.

방연은 제나라 군대를 맞아 싸웠으나, 갑자기 제나라 군대가 철수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추격했다. 그는 제나라 군대가 겁쟁이라고 판단하여, "우리나라 영토에 들어온 지 사흘 만에 병사들의 도망률이 절반을 넘어섰다"라고 말했다. 방연은 마릉에서 부뚜막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추격을 계속했다. 밤중에 덤불 속에서 "방연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라고 적힌 나무를 발견하고 횃불로 확인하려다 제나라 군대의 화살 세례를 받았다. 위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졌고, 방연은 "이것으로, 저 꼬맹이(손빈)에게 이름을 떨치게 했구나"라고 외치며 자결했다. 제나라 군대는 이 승리로 위나라 태자 신을 포로로 잡았다.[1] 다만, 『전국책』에는 방연이 포로로 잡히고 태자 신이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1. 초기 생애

방연은 손빈과 함께 귀곡자에게서 병법을 배웠다. 둘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했으나, 방연은 손빈의 재능을 질투했다.[1]

이후 방연은 위나라 혜왕을 섬기며 장군이 되었다. 그는 위나라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제안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고, 송나라, 노나라, 정나라 등 주변 소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성을 떨쳤다.

2. 2. 손빈과의 갈등

귀곡자(鬼谷子)의 제자로 손빈과 함께 공부하였다. 방연은 손빈의 재능을 질투하여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였다.[1] 위나라의 대장군이 된 후, 방연은 손빈을 제나라의 간첩으로 모함하여 무릎 연골을 손상시키는 빈형을 받게 하였다.

기원전 342년, 위나라는 방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나라를 침공하였다. 한나라는 제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제나라는 전기를 장군으로, 손빈을 참모로 임명하여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방연은 제나라군이 위나라 수도 대량(大梁)을 공격할 것을 예상하여 정예병을 주둔시켰으나, 제나라군은 대량성 공격에 실패하였다. 방연은 한나라 토벌군을 철수시키고 대량성의 정예병과 함께 제나라군을 협공하여 제나라군을 퇴각시켰다.

방연은 제나라군을 추격하여 마릉(馬陵)에서 손빈의 군대와 조우하였다. 손빈은 나무에 "방연이 이 나무 밑에서 죽는다"라고 적어두고 궁수 일만을 매복시켰다. 방연은 글을 읽기 위해 불을 피웠고, 이를 신호로 제나라 복병들이 화살을 발사하여 위나라 군사들을 전사시켰다. 방연은 패배를 인지하고 "기어코 그 녀석(손빈)의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라고 말하며 자결하였다.[1]

방연은 손빈을 반역 혐의로 몰아 위 혜왕에게 보고했고, 혜왕은 손빈에게 사형을 명했다. 방연은 선처를 구하는 척하여 손빈은 목숨을 건졌으나, 얼굴에 문신을 새기고 무릎뼈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방연은 손빈을 동정하는 척하며 병법서를 엮게 한 뒤 죽이려 했으나, 손빈은 제나라 관리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제나라의 전략가가 되었다.

2. 3. 마릉 전투와 최후

기원전 342년, 위나라는 방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한나라를 침공하였다. 한나라는 제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제나라는 전기를 장군으로, 손빈을 참모로 임명하여 구원군을 파견하였다.[1] 방연은 제나라군이 위나라의 수도인 대량을 공격할 것을 예상하여 대량에 위나라 정예병들을 주둔시켰다. 제나라군은 대량성 공격에 실패하고, 방연은 한나라 토벌군을 철수시키고 대량성의 정예병과 한나라 토벌군으로 제나라군을 협공하여 제나라군을 철수시켰다.

방연은 제나라군이 퇴각하자 군을 이끌고 추격하였다. 마릉(馬陵)에서 손빈의 제나라군과 조우하였다. 손빈은 주위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 방책을 만들었고, 한 그루의 나무만 남겨두었다. 그 나무의 한쪽 껍질을 벗겨낸 후, 거기에 "龐涓死于此樹之下(방연이 이 나무 밑에서 죽는다)"라고 적어두었고, 길 양측에 궁수 일만을 매복시켰다. 손빈의 계산대로 한밤중에 방연이 도착하였고, 나무에 글이 적혀있자 호기심에 글을 읽기 위해 불을 피웠다. 방연이 불을 피운 것이 신호가 되어 제나라 복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발사하여 수많은 위나라 군사들이 전사하였다. 방연은 패배를 인지하고 "기어코 그 녀석의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遂成豎子之名)"라고 말하고는 자결하였다.[1]

마릉 전투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


방연과 손빈의 다툼은 계릉 전투와 마릉 전투로 이어졌다. 방연은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했고, 조나라는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손빈은 전기와 함께 제나라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원한다"는 전략을 제안하여, 방연이 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도록 유인하여 조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게 했다. 계릉 전투에서 방연의 군대는 손빈의 군대에 매복되어 패배했다. 이후 방연은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했고, 손빈은 제나라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나라를 침공했다. 손빈은 패배를 가장하여 방연의 군대가 제나라 군대를 따르도록 유인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방연은 속아 손빈을 추격했고, 제나라 군대의 규모가 줄어드는 것을 알아차렸다. 방연은 손빈을 격파하려는 열망에 휩싸여 경무장 기병대를 이끌고 추격했지만, 마릉 전투에서 좁은 계곡에 매복한 제나라 군대에 함정에 빠졌다. 위나라 군대는 처참하게 패배했고 위나라 태자는 제나라 군대에게 포로로 잡혔으며, 방연은 자결했다.

민간 설화에 따르면, 손빈은 매복 지역의 나무에 "방연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는 글을 새겨 놓았다. 방연과 그의 부하들이 도착했을 때, 그는 나무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횃불을 켰다. 바로 그 순간, 매복해 있던 제나라 군대가 공격했고 방연은 바로 그 나무 아래에서 자결했다.

기원전 342년, 위나라는 太子申|태자신중국어을 총대장으로, 방연을 부장으로 하여 조나라와 연합하여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는 제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제나라 위왕은 전기를 장군으로, 손빈을 군사로 하여 지원했다.

방연은 철수하려 했지만, 제나라 군대는 국경을 넘어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나라 군대를 맞이하게 되었으나, 갑자기 제나라 군대가 철수했다. 팽연은 "제나라 병사들이 겁쟁이라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영토에 들어온 지 사흘 만에 병사들의 도망률이 절반을 넘어섰다"라고 말하며 기뻐했다. 그래서 팽연은 기병을 이끌고, 보병을 뒤따르게 하여 맹렬하게 추격했다.

마릉(현재의 산둥성린이 시탄청 현)에 들어서 부뚜막의 수가 점차 줄어드는 것을 본 팽연은 기뻐하며 추격을 계속했다. 밤에 깊숙이 들어가던 중 잘린 나무에 막힌 덤불에 들어가, 어떤 오래된 큰 나무가 깎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팽연은 기병에게 횃불로 그것을 보게 하자 "팽연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때 제나라의 만 명의 쇠뇌 부대가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위나라 군대는 대혼란을 일으켜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팽연은 "이것으로, 저 꼬맹이(손빈)에게 이름을 떨치게 했구나"라고 외치며 자결했다. 제나라 군대는 기세를 몰아 태자신을 포로로 잡는 전공을 세웠다(마릉 전투).

다만, 『전국책』에 따르면, 팽연은 포로로 잡히고, 태자신은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 평가 및 영향

방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직접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대중문화 속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의 이미지를 짐작할 수 있다.

3. 1. 대중문화 속 방연

방연은 때때로 중국 사원과 도교 사원에서 문신으로 등장하며, 보통 손빈과 짝을 이룬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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