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펠릭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리아 펠릭스(1914-2002)는 멕시코의 배우로, '라 도냐'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에 영화 경력을 시작하여 멕시코와 유럽에서 활동하며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펠릭스는 1940년대에 《도냐 바르바라》, 《에나모라다》 등의 영화로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프렌치 캉캉》과 같은 작품에 출연했다. 펠릭스는 멕시코로 돌아와서도 영화 활동을 이어갔으며, 패션 아이콘으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탱고 가수 - 카를로스 가르델
카를로스 가르델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서 활동한 탱고 가수이자 배우이며, 여러 명곡 발표와 영화 출연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 멕시코의 여성주의자 - 나탈리아 라푸르카데
멕시코의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인 나탈리아 라푸르카데는 2002년 데뷔 이후 팝, 록, 보사노바, 라틴 리듬을 혼합한 음악 스타일로 라틴 그래미 어워드와 그래미 어워드를 수상하며 라틴 아메리카 음악계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솔로 활동, 밴드 활동, 협업, 영화 음악 참여, 멕시코 전통 음악 알리기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 멕시코의 여성주의자 -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는 17세기 누에바 에스파냐의 수녀, 시인, 극작가, 사상가로, 뛰어난 지적 능력과 선구적인 페미니즘 사상으로 스페인 황금세기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라틴 아메리카 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친 멕시코 문화의 아이콘이다. - 멕시코의 성소수자 배우 - 사라 라미레스
사라 라미레스는 멕시코 태생의 미국 배우, 가수, 사회 운동가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팸어랏》으로 토니상을 수상하고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캘리 토레스 역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LGBTQ 권리 옹호 활동과 음악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 멕시코의 성소수자 배우 - 라몬 노바로
라몬 노바로는 멕시코 혁명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무성 영화 시대에 '노바로'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며 《벤허》 등의 작품으로 스타덤에 올랐으나, 유성 영화 시대에는 간헐적으로 활동하다 강도 살인으로 생을 마감한 후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배우다.
마리아 펠릭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마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펠릭스 궤레냐 |
다른 이름 | 라 도냐 마리아 보니타 |
출생일 | 1914년 4월 8일 |
출생지 | 소노라주 알라모스 |
사망일 | 2002년 4월 8일 |
사망지 | 멕시코시티 |
묘지 | 프랑스 산 호아킨 묘지 |
직업 | 배우 가수 |
활동 기간 | 1942년–1978년 |
![]() | |
사생활 | |
배우자 | 엔리케 알바레스 (1931–1938, 이혼) 아구스틴 라라 (1945–1947, 이혼) 호르헤 네그레테 (1952–1953, 사별) 알렉스 베르제 (1956–1974, 사별) |
파트너 | 앙투안 차포프 (1980년대) |
자녀 | 엔리케 알바레스 펠릭스 |
수상 | |
수상 내역 | 전체 목록 |
웹사이트 | |
공식 웹사이트 | mariafelix.com |
2. 어린 시절
마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펠릭스 구에레냐는 1914년 4월 8일 멕시코 소노라주 알라모스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출생은 5월 4일에 등록되었는데, 나중에 잘못 알려져 출생일로 보고되었다.[5]
펠릭스는 경력 초기에 할리우드에서 배역 제안을 받았지만, "그들은 나에게 '우에우엔체(인디언)' 배역만 준다"며 거절했다. 할리우드에서 영화 ''결투의 태양''의 여성 역할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고, 그 역할은 제니퍼 존스에게 돌아갔다.[3] ''맨발의 백작부인'' 출연 제의도 거절하고 프랑스에서 ''라 벨 오테로''를 제작했으며, 결국 에바 가드너가 그 역할을 맡았다. ''릴라 클레어의 전설'' 시나리오도 받았지만 감독과의 불화로 킴 노박이 출연하게 되었다.
그녀는 야키족의 먼 후손인 군 장교이자 정치인이었던 베르나르도 펠릭스 플로레스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자란 호세피나 구에레냐 로사스의 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멕시코계였다. 그녀는 호세피나, 마리아 데 라 파스, 파블로, 베르나르도, 미겔,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 페르난도,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리카르도, 벤하민, 아나 마리아 델 사크라멘토 등 15명의 형제가 있었다.[6]
어린 시절은 알라모스에서 보냈으며, 오빠 파블로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두 남매가 근친상간 관계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둘을 갈라놓았다.[7] 그 이유로 파블로는 멕시코 시티의 코레히오 밀리타르로 보내졌다.[6]
이후 펠릭스 가족은 과달라하라로 이사했다. 마리아가 17세가 되자 그녀의 아름다움은 곧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과달라하라 대학교에서 미인으로 선발되었으며, 이때 화장품 회사 맥스 팩터(Max Factor)의 판매원인 엔리케 알바레스 알라토레를 만났다. 짧은 연애 후, 1931년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1935년 펠릭스는 외아들 엔리케, 애칭 '키케'를 낳았다. 알바레스와의 결혼은 실패로 돌아갔고 1937년에 이혼했다. 이혼 후 펠릭스는 가족과 함께 과달라하라로 돌아갔고, 이혼녀라는 신분 때문에 소문과 가십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펠릭스는 아들과 함께 멕시코 시티로 이사를 결정했다.[8]
멕시코 시티에서 그녀는 성형외과 사무실에서 접수원으로 일했고, 하숙집에서 살았다. 어느 날 아들의 아버지가 아이를 방문하여 고의적으로 아이를 어머니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알바레스는 아이를 과달라하라로 데려갔다. 펠릭스의 아들은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아구스틴 라라의 도움으로 되찾았다.
3. 초기 경력
펠릭스는 1914년 4월 8일 소노라주 알라모스에서 군인이자 농장 서기였던 아버지 베르나르도 펠릭스 플로레스와 바스크계 멕시코인 어머니 호세피나 구에레냐 로사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11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유복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형제 파블로와 사이가 좋았지만, 어머니는 둘의 관계를 의심하여 파블로를 멕시코시티의 군 학교로 보냈다. 펠릭스는 남자아이들의 놀이를 좋아하고 승마에 능숙했으며, 금발이었던 다른 자매들과 달리 흑발에 강한 개성을 지녀 관계가 좋지 않았다.
펠릭스 가족은 과달라하라로 이사했고, 펠릭스는 십 대 시절부터 미모로 과달라하라 대학교 미인대회에서 우승했다. 맥스 팩터 화장품 판매원 엔리케 알바레스와 결혼하여 1934년 외아들 엔리케 알바레스 펠릭스를 낳았지만, 1937년 이혼했다. 이혼 후 아들을 데리고 멕시코시티로 이사했고, 이후 남편의 도움으로 아들을 되찾았다.
3. 1. 영화계 입문
멕시코 시티의 거리를 걷던 중, 영화 감독 페르난도 팔라시오스가 마리아 펠릭스에게 영화 출연을 제안했다. 펠릭스는 "원할 때, 큰 문으로 할 거예요."라고 답하며 당돌함을 보였다. 팔라시오스는 그녀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영화계로 이끌었고, 펠릭스는 멕시코 시티 컨트리 클럽의 "흑백 무도회장"에서 사교계에 데뷔했다. 당시 멕시코 영화계의 스타들(에스테르 페르난데스, 루페 벨레즈, 안드레아 팔마 등)이 이 자리에 함께했다.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의 세실 B. 데밀은 펠릭스에게 할리우드 진출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자국에서 경력을 시작하고 싶어했다.
결국 팔라시오스 덕분에 펠릭스는 그로바스 프로덕션의 영화 ''엘 페논 데 라스 아나마스''에서 주연을 맡게 되었고, 미겔 자카리아스가 감독을 맡았다.[1] 이 영화에서 펠릭스는 인기 배우이자 가수인 호르헤 네그레테와 공연했는데, 촬영 시작부터 둘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네그레테가 자신의 여자친구인 배우 글로리아 마린을 주연으로 캐스팅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촬영에 어려움이 많았고, 펠릭스와 네그레테는 사사건건 대립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오히려 펠릭스를 강하고 오만한 여성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 영화 ''마리아 에우헤니아''에서 펠릭스는 기존의 강한 이미지와는 다른 역할을 연기했다. 이 영화는 그녀가 수영복을 입고 출연한 유일한 작품으로 기록된다. 이후 ''라 차이나 포블라나''(1943)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는 멕시코에서 두 번째로 제작된 컬러 영화였지만 현재는 유실된 상태다. 펠릭스는 이 두 영화를 "초보 시절의 죄"라고 표현했다.[2]
3. 2. '라 도냐'의 탄생
어느 날 멕시코 시티의 거리를 걷던 마리아 펠릭스에게 영화 감독 페르난도 팔라시오스가 다가와 영화 출연을 제안했다. 펠릭스는 "원할 때, 큰 문으로 할 거예요."라고 답하며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팔라시오스는 그녀를 설득했고, 펠릭스는 그의 피그말리온이 되어 영화계에 입문했다. 멕시코 시티 컨트리 클럽의 "흑백 무도회장"에서 멕시코 영화계 거물 배우들(에스테르 페르난데스, 루페 벨레즈, 안드레아 팔마 등)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펠릭스는 할리우드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의 세실 B. 데밀로부터 할리우드 진출 제안을 받았지만, 자국에서 경력을 시작하고 싶어 거절했다.[1]
마침내 팔라시오스 덕분에 펠릭스는 그로바스 프로덕션의 영화 ''엘 페논 데 라스 아나마스''에서 여성 주연을 맡게 되었고, 미겔 자카리아스가 감독을 맡았다.[1] 이 영화에서 펠릭스는 인기 배우이자 가수인 호르헤 네그레테와 함께 출연했지만, 네그레테가 자신의 여자친구인 배우 글로리아 마린에게 주연을 맡겨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영화 촬영은 어려움을 겪었고, 펠릭스와 네그레테는 직접적인 대립을 겪었다. 이러한 대립은 펠릭스가 강하고 오만한 여성으로 굳어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1]
두 번째 영화 ''마리아 에우헤니아''에서 펠릭스는 자신의 기질적인 영화적 개성과는 다른 역할을 연기했지만, 이 영화는 그녀가 수영복을 입고 출연한 유일한 영화로 기억된다. 영화 ''라 차이나 포블라나''(1943)에서 펠릭스는 자신을 발굴한 감독 페르난도 팔라시오스에게 감사의 빚을 갚았다고 주장했다.[2] 멕시코 영화의 두 번째 컬러 영화였던 이 영화는 유실된 것으로 간주된다. 펠릭스는 두 영화 모두를 "그녀의 초보적인 죄"라고 불렀다.[2]
펠릭스는 베네수엘라 작가 로물로 갈레고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도냐 바르바라''(1943)에 출연하면서 ''라 도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미 다른 배우(이사벨라 코로나)가 캐스팅되어 있었지만, 갈레고스는 펠릭스를 처음 보고 "여기에 내 도냐 바르바라가 있다!"라며 감탄했다. 이 영화는 멕시코와 베네수엘라 배우들과 함께 베네수엘라에서 촬영되었다. ''도냐 바르바라''는 멕시코 영화 감독 페르난도 데 푸엔테스와의 주요 협업의 시작이었다. 펠릭스와 데 푸엔테스는 함께 ''라 무헤르 신 알마''(1944)와 ''라 데보라 도라''(1946)를 촬영했다. 마리아 펠릭스는 ''"이 영화들을 통해 나는 멕시코 가족의 도덕성을 훼손하는 최고의 적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3]
3. 3. 에밀리오 페르난데스와의 협업
에밀리오 페르난데스의 지휘 아래, 마리아 펠릭스는 에나모라다(1946), 리오 에스콘디도(1947), 마클로비아(1948)와 같은 성공적인 영화 세 편을 제작했다. 펠릭스와 페르난데스의 관계는 영화 감독의 강하고 유명한 기질에도 불구하고 원만하고 순조로웠다.[4] ''에나모라다''에서 마리아 펠릭스는 배우 페드로 아르멘다리스를 완벽한 영화 파트너로 만났다. 펠릭스와 페르난데스, 그리고 그의 팀(작가 마우리시오 마달레노, 사진가 가브리엘 피게로아, 아르멘다리스)의 영화는 여러 국제 영화제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결과 펠릭스는 ''에나모라다''와 ''리오 에스콘디도''로 아리엘상을 두 번 수상했다.[4]
페르난데스와의 영화들 사이에서, 마리아 펠릭스는 로베르토 가발돈과도 함께 작업하며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첫 번째 협업은 아르투로 데 코르도바와 함께 한 ''라 디오사 아로디야다''(1947)였다.[4]
4. 유럽 활동
1948년, 마리아 펠릭스는 스페인 영화 제작자 세사레오 곤잘레스와 계약을 맺고 유럽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52년 멕시코로 귀국하기 전까지 멕시코에서 ''도냐 디아블라''(1949) 한 편을 더 제작했다.
4. 1. 주요 출연작
연도 | 제목 | 배역 | 비고 |
---|---|---|---|
1943 | 엘 페논 데 라스 아니마스 | 마리아 앙헬라 발디비아 | |
1943 | 마리아 에우헤니아 | 마리아 에우헤니아 | |
1943 | 도냐 바르바라 | 도냐 바르바라 | |
1943 | 라 차이나 포블라나 | ||
1944 | 라 무헤르 신 알마 | 테레사 | |
1945 | 엘 몬헤 블랑코 | 갈라테아 | |
1946 | 현기증 | ||
1946 | 에나모라다 | 베아트리스 페냐피엘 | 아리엘상 여우주연상 수상 |
1946 | 라 데보라도라 | 디아나 데 몬테마요르 | |
1947 | 라 디오사 아로디야다 | 라켈 세라노 | |
1947 | 리오 에스콘디도 | 로사우라 살라사르 | 아리엘상 여우주연상 수상 |
1948 | 마클로비아 | 마클로비아 | |
1948 | 마레 노스트룸 | 프레이아 | |
1949 | 도냐 디아블라 | 앙헬라 | |
1950 | 우나 무헤르 쿠알키에라 | ||
1950 | 라 노체 델 사바도 | 임페리아 | |
1951 | 메살리나 | 메살리나 | |
1951 | 라 코로나 네그라 | 마라 | 장 콕토 원작 |
1951 | 인칸테시모 트라지코 | 올리바 | |
1952 | 라 파시온 데스누다 | ||
1954 | 카멜리아 | 카멜리아 | |
1954 | 프렌치 캉캉 | 롤라 "라 벨 아베스" | 장 르누아르 감독 |
1954 | 라 벨 오테로 | 카롤리나 오테로 | |
1955 | 레 에로 손 파티게 | 마누엘라 | |
1955 | 라 에스콘디다 | 가브리엘라 | |
1955 | 멕시코 이야기 바구니 | ||
1956 | 티족 | 마리아 | 페드로 인판테와 공연 |
1957 | 파우스티나 | 파우스티나 | |
1957 | 한계 밖으로 | 알렉산드라 | |
1958 | 재의 수요일 | 빅토리아 | |
1958 | 텅 빈 별 | 올가 | |
1958 | 카페 콜론 | ||
1959 | 판초 비야의 병사들 | 돌로레스 델 리오와 공연 | |
1959 | 소나타스 | 니냐 촐레 | |
1959 | 엘 파오로 열이 오른다 | 이네스 로하스 | 루이스 부뉴엘 감독 |
1960 | 후아나 가요 | 후아나 가요 | |
1963 | 라 반디다 | 마리아 멘도사 "라 반디다" | |
1963 | 사랑과 섹스 | 사포 | |
1966 | 라 발렌티나 | 발렌티나 수비란 | |
1970 | 라 헤네랄라 | 마리아나 세데뇨, "라 헤네랄라" |
5. 멕시코 복귀 및 후기 활동
펠릭스는 1955년 멕시코로 돌아왔다. 이 시기 그녀의 경력은 멕시코 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시대극에 출연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주기는 《라 에스콘디다(La Escondida, 1955)로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그리고 《멕시코 이야기 바구니》(Canasta de cuentos mexicanos, 1955) 및 《카페 콜론》(Café Colón, 1958)과 같은 이야기에서 그녀는 페드로 아르멘다리스와 다시 함께 작업했다. 1956년에는 배우이자 가수인 페드로 인판테와 함께 《티족(Tizoc)》에 출연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국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배우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잭 팰런스와 함께 《한계 밖으로(Beyond All Limits, 1957)를 촬영했고, 멜로드라마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과 《텅 빈 별(The Empty Star)》(둘 다 1958)을 촬영했다. 1959년에는 최고의 주연 배우인 돌로레스 델 리오와 함께 《판초 비야의 병사들(The Soldiers of Pancho Villa)》에서 타이틀 역할을 맡았다. 같은 해 후안 안토니오 바르뎀이 감독한 스페인-멕시코 합작 영화 《소나타스(Sonatas)》와 루이스 부뉴엘이 감독한 프랑스-멕시코 합작 영화 《엘 파오로 열이 오른다(La Fièvre Monte à El Pao)》에 출연했다.
1960년대에 펠릭스의 영화 출연은 몇 편의 영화로 제한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영화는 《후아나 가요》(Juana Gallo, 1960), 《라 반디다(La bandida)》(1963), 《사랑과 섹스(Amor y sexo)》(《사포 '63》, 1963), 그리고 《라 발렌티나(La Valentina)》(1966)였다. 1970년에는 그녀의 마지막 영화가 될 《라 제네랄라》를 촬영했다. 멕시코 역사 텔레노벨라 《라 콘스티투시온》(La Constitución, 1971)은 그녀의 마지막 전문 연기 작품이 될 것이다. 펠릭스는 영화계에 두 번이나 복귀를 시도했다. 첫 번째는 1982년 영화 《토냐 마체테스》, 두 번째는 1986년 영화 《인솔리토 레스플랜도르》였다. 두 프로젝트 모두 실현되지 않았고, 펠릭스는 영화에 다시 출연하지 않았다.
6. 개인사
마리아 펠릭스는 야키족 혈통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아버지 베르나르도 펠릭스 플로레스와 바스크계 멕시코인 어머니 호세피나 구에레냐 로사스 사이에서 1914년 4월 8일 소노라주 알라모스에서 태어났다. 마리아에게는 11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으며, 유복하지는 않았다. 형제인 파블로와 사이가 좋았기에, 어머니는 마리아와 파블로가 좋지 않은 관계에 있다고 의심하여 둘을 떨어뜨려 놓고 파블로를 멕시코시티의 군 학교로 보냈다. 마리아는 남자아이들이 하는 놀이를 좋아했으며, 인형 놀이 및 기타 "여자아이들이 하는" 장난감을 싫어했다. 또한 마리아는 승마에도 능숙했다. 다른 자매들은 모계 유전으로 금발(마리아는 흑발)이었고, 마리아가 강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매들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펠릭스 가족은 과달라하라로 이사했다. 마리아 펠릭스는 십 대 시절부터 그 미모로 주목을 받았으며, 과달라하라 대학교의 미인대회에서 우승했다. 이 때 맥스 팩터의 화장품 세일즈맨인 엔리케 알바레스와 만나 짧은 연애 후 1931년에 결혼했고, 1934년에는 엔리케 알바레스 펠릭스es (키케)를 낳았지만, 1937년에 이혼했다. 이혼 경력이 가십거리와 소문의 대상이 되었기에 아들 키케를 데리고 멕시코시티로 이사했다.
이후, 아구스틴 라라와 (1945–1947) 결혼했다. 아구스틴 라라는 펠릭스를 위해 "'마리아 보니타'"를 포함한 여러 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라라의 질투로 인해 1947년에 이혼했다.[8]
두 번째 이혼 후 펠릭스는 멕시코 항공 기업가 호르헤 파스켈, 스페인 투우사 루이스 미겔 도밍긴, 아르헨티나 배우 카를로스 톰슨과 로맨스를 가졌다.
1953년에는 배우이자 가수 호르헤 네그레테와 재혼했지만, 네그레테는 결혼 11개월 만에 사망했다. 1956년에는 루마니아 태생의 프랑스 은행가 알렉산더 베르거와 네 번째 결혼을 하여 1974년 베르거가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마리아 펠릭스는 2002년 4월 8일 멕시코시티에서 사망했다. 향년 88세(생몰일 동일).
6. 1. 아들 엔리케 알바레스 펠릭스
마리아 펠릭스는 1931년 화장품 판매원 엔리케 알바레스 알라토레와 결혼하여 1938년에 이혼했다.[12] 둘 사이에서는 1934년 외아들 엔리케 알바레스 펠릭스가 태어났다.언론인 세르히오 알마존에 따르면, 펠릭스는 아들이 흰 드레스와 목걸이를 착용한 것을 발견하고 격분하여 그를 때려 기절시켰다고 한다.[12] 알바레스는 아들을 과달라하라로 데려갔고, 펠릭스는 몇 년 후 두 번째 남편 아구스틴 라라의 도움을 받아 아들을 되찾았다.[8]
펠릭스는 아들을 외국 학교로 보내 교육시켰기 때문에, 아들은 어린 시절을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다. 엔리케는 멕시코로 돌아와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배우로 활동했다. 펠릭스는 아들에 대해 "엔리케는 매우 재능 있는 남자이며, 칭찬할 만한 상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라고 말했다.
1996년 엔리케가 심장 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펠릭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7. 영향력 및 유산
마리아 펠릭스는 멕시코 영화 황금기의 대표적인 배우로, 영화계를 넘어 예술과 패션 분야까지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펠릭스는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10대 시절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가 그녀를 그렸지만, 펠릭스는 그 그림이 자신을 "화장한 해골"처럼 묘사했다고 말했다.[1] 영화 ''리오 에스콘디도''(1947) 촬영 중에는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프리다 칼로와 함께 우정을 쌓았다.[1] 1949년 리베라가 그린 초상화는 펠릭스가 "매우 형편없는" 작품으로 평가했고, 후에 후안 가브리엘에게 1500만멕시코 페소에 팔았다.[1] 레오노르 피니, 레오노라 캐링턴 등 초현실주의 화가들도 펠릭스를 그렸으며, 1980년대에는 그녀의 마지막 파트너였던 앙투안 차포프가 그녀의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다.[1]
레나토 레두크, 살바도르 노보, 장 콕토, 옥타비오 파스 등 많은 작가와 극작가들이 펠릭스에게 작품을 헌정했다.[1] 루이스 스포타는 소설 『텅 빈 별』에서,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소설 『사그라다 구역』에서 그녀를 모델로 했다.[1] 후안 가브리엘의 『마리아 데 토다스 라스 마리아스』, 프란시스 카브렐의 『Je l'aime à mourir』 등 그녀를 위해 작곡된 노래도 있었다.[1]
펠릭스는 패션계에서도 아이콘이었다. 크리스찬 디올, 지방시, 이브 생 로랑, 샤넬, 발렌시아가 등 유명 디자이너들의 의상을 즐겨 입었으며, 에르메스는 그녀만을 위한 특별한 작품을 디자인했다.[29] 프랑스 제2제국 가구 컬렉션을 수집하는 등 골동품 애호가였으며, 41.37g의 ''아쇼카'' 다이아몬드를 포함한 화려한 보석 컬렉션을 소유했다.[29] 1968년 까르띠에에 의뢰한 뱀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178.21g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었고,[29] 1975년에는 두 마리의 악어 모양 목걸이를 의뢰했는데, 524.9g의 금과 1,023개의 옐로우 다이아몬드, 1,060개의 에메랄드로 장식되었다.[29] 펠릭스 사후, 이 보석들은 ''까르띠에 예술 컬렉션''의 일부로 전 세계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2006년 까르띠에는 펠릭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라 도냐 드 까르띠에 컬렉션''을 선보였으며, 파충류 링크가 있는 ''라 도냐 드 까르띠에 시계''는 악어 머리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디자인을 특징으로 한다.[31]
7. 1. 예술 분야
펠릭스는 평생 동안 많은 유명 화가들의 모델이 되었다. 10대 시절 과달라하라에서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가 그녀를 그렸지만, 펠릭스는 "그는 나를 화장한 해골처럼 그렸다"라고 말했다.[1] 펠릭스는 영화 ''리오 에스콘디도''(1947) 촬영 중에 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1] 펠릭스는 그와 그의 아내 프리다 칼로와 우정을 쌓았다.[1] 1949년, 리베라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펠릭스는 이를 "매우 형편없는" 작품으로 분류했다.[1] 이후 리베라는 리베라의 작품 회고전의 일부로 전시하기 위해 그림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펠릭스는 거절했다.[1] 펠릭스는 그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결국 후안 가브리엘에게 1500만멕시코 페소에 팔았다.[1] 펠릭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리베라의 그림을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다. 그에게 말했다. 나는 그가 나를 테우아나 여성으로 그려주길 원했지만, 그는 매우 천박하다고 말했고, 그래서 그가 원하는 대로 나를 그렸다... 알몸으로, 그는 나를 매우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디에고는 팔라시오 데 벨라스 아르테스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위해 그 초상화를 원했지만, 내가 빌려주지 않자 1년 넘게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어느 날 벽돌공이 우리 집을 수리하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내 누드 초상화]에 흰색 페인트를 칠해서 모든 것을 조금 가리도록 보냈고, 그렇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팔았는데, 어쨌든 매우 형편없이 팔았다."[1]그 외에도 레오노르 피니, 레오노라 캐링턴, 레메디오스 바로, 브리지트 베이트 티체너를 포함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펠릭스를 캔버스에 담았다.[1] 1980년대에는 러시아-프랑스 출신 화가 앙투안 차포프 (펠릭스의 마지막 파트너)가 그녀의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다.[1]
펠릭스는 많은 멕시코 및 외국 작가, 극작가들과도 관계를 맺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펠릭스에게 여러 소설을 헌정했다.[1] 그들 중에는 레나토 레두크, 사비에르 비야루루티아, 살바도르 노보, 피타 아모르, 장 콕토, 옥타비오 파스가 있다.[1] 루이스 스포타는 그의 소설 『텅 빈 별』에서 그녀의 삶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펠릭스는 1958년 영화 버전에도 출연했다.[1]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소설 『사그라다 구역』에서 그녀에게 영감을 얻었다.[1] 푸엔테스와의 관계는 작가가 펠릭스와 돌로레스 델 리오의 모습을 패러디한 연극 『달빛 속의 난초』를 만들면서 끝났다.[1] 펠릭스는 화가 나서 그를 "mujerujo" ("여성스러운")라고 불렀다.[1]
후안 가브리엘의 『마리아 데 토다스 라스 마리아스』와 프란시스 카브렐의 『Je l'aime à mourir』 등 펠릭스를 위해 작곡된 노래도 있었다.[1]
7. 2. 패션 분야
펠릭스는 크리스찬 디올, 지방시, 이브 생 로랑, 샤넬, 발렌시아가와 같은 디자이너들의 의상을 입었다. 에르메스는 그녀만을 위한 호화로운 작품을 디자인했다.[29] 그녀는 훌륭한 골동품 수집가로, 프랑스 제2제국 가구 컬렉션과 같은 작품들을 선호했다. 또한 보석 감정가이기도 했던 그녀는 41.37g의 D-플로리스(D-flawless) ''아쇼카'' 다이아몬드를 포함한 광범위한 보석 컬렉션을 소유하고 있었다.[29] 1968년, 그녀는 까르띠에에 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의뢰했다. 그 결과 백금과 화이트 골드로 만들어지고 178.21g의 다이아몬드로 덮인 완전히 연결된 뱀이 탄생했다.[29] 1975년, 그녀는 다시 까르띠에에 목걸이 제작을 의뢰했고, 이번에는 두 마리의 악어 모양이었다. 두 악어의 몸체는 524.9g의 금으로 만들어졌으며, 하나는 1,023개의 옐로우 다이아몬드로 덮여 있었고, 다른 하나는 1,060개의 원형 컷 에메랄드로 장식되었다.[29] 이후 그녀는 보석의 대부분을 까르띠에에 되팔았다. 그녀는 또한 파리에 롤스로이스를 남겼다.[30]펠릭스의 사망 이후, 이 보석들은 전 세계 여러 박물관에서 ''까르띠에 예술 컬렉션''의 일부로 전시되었다. 이 여배우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2006년 까르띠에는 ''라 도냐 드 까르띠에 컬렉션''을 선보였다. 파충류 링크가 있는 ''라 도냐 드 까르띠에 시계''는 와일드한 모습으로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제작되었다. ''라 도냐 드 까르띠에''의 케이스는 악어 머리를 연상시키는 비대칭적인 프로파일을 가진 사다리꼴 모양을 특징으로 한다. 시계의 팔찌는 크고 대담한 금색 비늘로 악어의 윤곽을 닮았다. ''라 도냐 드 까르띠에 컬렉션''에는 보석, 액세서리, 핸드백도 포함되어 있다.[31]
멕시코의 스타 모자 제작자 글래디스 타메즈는 펠릭스를 기리기 위해 "엘 페닉스"라는 모자 컬렉션을 헌정했다.[32]
2023년, 멕시코시티의 후멕스 박물관은 마리아 펠릭스가 착용한 상징적인 보석들을 전시한 "까르띠에 디자인: 살아있는 유산" 전시회를 열었으며, 이 전시회는 160점 이상의 작품을 선보였고, 유명한 멕시코 건축가 프리다 에스코베도가 디자인하고, 멕시코 미술 평론가 아나 엘레나 말레트가 큐레이팅했다.[33]
8. 사망
마리아 펠릭스는 2002년 4월 8일, 88번째 생일에 멕시코시티에서 잠을 자다 사망했다.[4] 그녀는 멕시코시티에 있는 판테온 프랑세스의 가족 묘소에 아들 엔리케와 부모님 곁에 안장되었다.
9. 출연 작품
펠릭스는 라파엘 길 감독의 영화 마레 노스트룸(1948)으로 유럽 영화에 데뷔했다. 길 감독과 함께 1950년에 ''우나 무헤르 쿠알키에라''와 ''라 노체 델 사바도'' 두 편의 영화를 더 만들었다. 1951년에는 장 콕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루이스 사슬라브스키가 감독한 프랑스-스페인 합작 영화 ''라 쿠론 네그레''에 출연했고, ''인칸테시모 트라지코''(1951)로 이탈리아 영화에 데뷔했다. 같은 해 카르미네 갈로네 감독의 영화 메살리나(1951)에도 출연했다.
1952년, 펠릭스는 아르헨티나에서 루이스 세사르 아마도리 감독의 ''라 파시온 데스누다''를 촬영했다. 같은 해 멕시코로 돌아와 영화 카멜리아(1954)를 끝으로 세사레오 곤잘레스와의 관계를 마무리했다. 이후 배우이자 가수인 호르헤 네그레테와 결혼했고,[9] 에밀리오 페르난데스가 감독한 네그레테의 마지막 영화 ''엘 라프토''에 함께 출연했다.[10]
1953년 네그레테가 사망한 후, 펠릭스는 유럽으로 돌아갔다. 프랑스에서 이브 몽탕과 함께 ''라 벨 오테로''(1954)와 ''레 에로 손 파티게''(1955)에 출연했다. 이 시기 펠릭스의 가장 중요한 영화는 장 르누아르 감독의 ''프렌치 캉캉(1954)''이었다. 유럽에서 촬영한 마지막 영화는 스페인 영화 ''파우스티나''였다.[11]
1955년 펠릭스는 멕시코로 돌아와 멕시코 혁명 시대극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라 에스콘디다》(La Escondida, 1955)를 시작으로, 《멕시코 이야기 바구니》(Canasta de cuentos mexicanos, 1955), 《카페 콜론》(Café Colón, 1958) 등에서 페드로 아르멘다리스와 다시 작업했다. 1956년에는 페드로 인판테와 함께 《티족(Tizoc)》에 출연했다. 1959년에는 후안 안토니오 바르뎀 감독의 스페인-멕시코 합작 영화 《소나타스(Sonatas)》와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프랑스-멕시코 합작 영화 《엘 파오로 열이 오른다(La Fièvre Monte à El Pao)》에 출연했다.
1960년대에는 《후아나 가요》(Juana Gallo, 1960), 《라 반디다(La bandida)》(1963), 《사랑과 섹스(Amor y sexo)》(《사포 '63》, 1963), 《라 발렌티나(La Valentina)》(1966) 등 몇 편의 영화에만 출연했다. 1970년에는 마지막 영화 《라 제네랄라》를 촬영했고, 1971년 멕시코 역사 텔레노벨라 《라 콘스티투시온》(La Constitución)이 마지막 연기 작품이 되었다.
10. 디스코그래피
음반명 | 발매사 | 발매일 | 수록곡 |
---|---|---|---|
La voz de María y la inspiración de Agustín|마리아와 아구스틴의 목소리와 영감es | RCA 빅터 | 1964년 | |
Enamorada|사랑에 빠져es | 포노비사 | 1998년 |
참조
[1]
뉴스
María Félix: Mexican actress
https://www.britanni[...]
2018-05-08
[2]
서적
The Human Tradition in Mexico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02-12-01
[3]
웹사이트
María Felix: La bella actriz que despreció a Hollywood y a sus indias cheyennes
https://vanguardia.c[...]
2017-04-07
[4]
뉴스
María Félix, 87, Feisty Heroine Who Reigned Supreme in Mexican Cinema, Dies
https://www.nytimes.[...]
2018-05-08
[5]
웹사이트
Ancestry Library Edition
https://www.ancestry[...]
[6]
웹사이트
Maria Felix: 10 datos intimos de la diva del cine mexicano
https://de10.com.mx/[...]
El Universal de10.mx
2019-04-08
[7]
문서
Documental María Félix
Editorial Clio
[8]
웹사이트
Los amores de Maria Felix
https://www.marthade[...]
Martha Debayle.com
2019-06-01
[9]
서적
Una Mujer Llamada Maria Felix: Historia No Autorizada
https://archive.org/[...]
EDAMEX
[10]
서적
Los Grandes: Maria Felix (Los Grandes Mexicanos)
Grupo Tomo
[11]
서적
Notable Twentieth-Century Latin American Women: A Biographical Dictionary
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19-08-08
[12]
웹사이트
El horrible castigo de María Félix a su hijo tras descubrirlo vestido de mujer
https://www.sdpnotic[...]
2018-12-31
[13]
서적
The Last Chicano: A Mexican American Experience
https://books.google[...]
AuthorHouse
2009
[14]
웹사이트
Amores Secretos / María Félix
https://reforma.vlex[...]
vLex
2020-09-28
[15]
서적
María Félix: 47 pasos por el cine
https://books.google[...]
Bruguera
2008
[16]
뉴스
Raul Prado, fundador del Trío Calaveras
https://elpais.com/d[...]
2020-09-28
[17]
뉴스
A los 88 años falleció la actriz mexicana María Félix
https://www.lanacion[...]
2020-09-28
[18]
웹사이트
47 mitos de la leyenda llamada María Félix
https://www.tvynovel[...]
[19]
웹사이트
Creyó ser María Félix
https://www.elfinanc[...]
2020-09-28
[20]
웹사이트
María Félix y la historia de cómo le rompió el corazón al argentino Carlos Thompson
https://www.infobae.[...]
2020-09-09
[21]
웹사이트
Pasión, orgullo y un corazón roto: la fallida boda entre María Félix y Carlos Thompson
https://www.infobae.[...]
2020-09-09
[22]
웹사이트
María Félix, el último mito
http://www.cervantes[...]
Miguel de Cervantes Virtual Library
2020-09-10
[23]
뉴스
Un mito secreto del siglo XX
https://www.lanacion[...]
2020-09-10
[24]
서적
Frede : belle de nuit
[25]
웹사이트
Frede, la amante de Marlene Dietrich y reina de las lesbianas de París
https://www.revistav[...]
2020-09-10
[26]
웹사이트
La Case de las Tortugas
http://www.lacasadel[...]
2019-06-01
[27]
웹사이트
Conociendo a... María Félix. La reina de los hipódromos
https://www.ecuestre[...]
2018-12-31
[28]
웹사이트
Estate of María Félix: La Doña totals $7.3 million
http://www.artquid.c[...]
[29]
웹사이트
Maria Felix's Cartier crocodile necklace 1975
http://www.thejewell[...]
2018-01-28
[30]
웹사이트
Maria Felix, The Unforgettable
http://www.lacasadel[...]
La Casa de las Tortugas
2019-06-01
[31]
웹사이트
La Dona de Cartier Watch - Fiery Reptile Created to Seduce Watches Channel
http://watches.infon[...]
[32]
웹사이트
Gladyz Tamez y Jeanette Longoria participaron en una venta en Los Ángeles
https://www.quien.co[...]
2023-12-27
[33]
웹사이트
Museo Jumex to display María Félix's jewels in Cartier exhibit
https://mexiconewsda[...]
2023-12-27
[34]
웹사이트
María Félix's 104th Birthday
https://doodles.goog[...]
2018-04-08
[35]
간행물
New Album Releases
https://books.google[...]
2016-09-16
[36]
뉴스
MUSICA/CANTO RODADO: María Félix, "Enamorada"
http://www.proceso.c[...]
Proceso
2016-09-16
[37]
뉴스
New Album Releases
https://books.google[...]
빌보드
2016-09-16
[38]
뉴스
MUSICA/CANTO RODADO: María Félix, "Enamorada"
http://www.proceso.c[...]
Proceso
2016-09-1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