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어 (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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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어는 1382년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의 사후 그의 딸로 즉위했으며, 보스니아의 엘리자베트가 섭정했다. 여성 군주에 대한 반발과 나폴리의 카를 3세의 왕위 찬탈 시도 등 정치적 혼란 속에서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와 결혼했으나, 카를 3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기도 했다. 이후 왕위를 되찾았지만, 호르바트 형제에게 포획되어 감금되었고, 석방 후 지기스문트와 공동 통치했으나 1395년 사냥 중 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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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어 (헝가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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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여왕 |
재위 기간 | 1차: 1382년 9월 10일 - 1385년 12월 |
대관식 | 1382년 9월 17일, 헝가리 |
이전 통치자 | 러요시 1세 |
후임 통치자 | 카를로 2세 |
섭정 | 엘리자베타 코트로마니치 (1차 재위) |
배우자 |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 |
자녀 | 아들 |
왕가 | 앙주 가문 |
아버지 | 러요시 1세 |
어머니 | 엘리자베타 코트로마니치 |
출생일 | 1371년 |
사망일 | 1395년 5월 17일 |
사망 장소 | 부다, 헝가리 왕국 |
매장 장소 | 오라데아, 헝가리 왕국 (현재 루마니아) |
이름 |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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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382년 러요시 1세가 사망하면서 마리어는 11세의 어린 나이로 헝가리 여왕으로 즉위했다. 어머니 엘제베트가 섭정을 맡았으나, 실권은 궁재 미클로시 가라이가 쥐고 있었다.[1] 헝가리 귀족들은 여성 군주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대부분 마리어를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앙주가의 먼 친척인 나폴리의 카를 3세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보았다.[1]
1385년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기스문트와 결혼했다. 같은 해 12월, 카를 3세에게 쫓겨나 잠시 왕위를 빼앗겼지만, 1386년 2월 24일 엘제베트의 책략으로 카를 3세가 살해되면서 복위했다.
카를 3세의 살해로 인해 왕국 남부 보스니아 지방에서 귀족 호르바트 형제의 반란이 일어났다. 1386년 7월 25일, 가라이, 엘제베트, 마리아 등은 반란을 설득하기 위해 보스니아 지방으로 향하던 중 디아코바르에서 기습을 당했다. 가라이는 살해당하고, 마리아와 엘제베트는 호르바트 일파에게 붙잡혀 노비그라드 요새에 유폐되었다. 엘제베트는 1387년 1월 16일에 유폐된 곳에서 살해당했다. 마리아는 1387년 6월 4일에 석방되었는데, 일설에는 남편 지기스문트가 이러한 기습·유폐극을 꾸몄다고도 한다.
석방 후 지기스문트가 헝가리 왕으로 즉위하여 실권을 장악하면서 마리아는 상징적인 지위에 머물렀다.
1395년 마리어는 사망했으며, 지기스문트와의 사이에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헝가리에서의 앙주 가문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2. 1. 어린 시절 (1371–1382)
헝가리와 폴란드의 국왕인 러요시 대왕과 그의 두 번째 부인 보스니아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1371년 후반에 마리아가 태어났다. 마리아는 부모의 둘째 딸이었으며, 1370년에 태어난 언니 캐서린이 있었다. 1374년에는 여동생 야드비가가 태어났다.
아들이 없었던 러요시 1세는 자신의 딸들을 유럽 왕족의 배우자감으로 매력적으로 여겼다. 마리아가 한 살이 되기 전, 러요시 1세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에게 마리아를 황제의 둘째 아들인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와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1373년 6월, 러요시 1세는 서약서로 이 약속을 확정했다. 마리아와 지기스문트는 가까운 친척 관계였는데, 마리아의 할머니 폴란드의 엘리자베트는 지기스문트의 증조부 카지미에시 3세의 여동생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1374년 12월 6일에 이들의 결혼에 필요한 교황 칙서를 발행했다. 1375년 4월 14일, 헝가리와 폴란드의 주요 영주들은 마리아와 지기스문트의 결혼에 대한 러요시 1세의 약속을 확인했다.
1378년, 마리아의 언니 캐서린이 사망하자, 러요시 1세는 1379년 졸욤 (현재 슬로바키아의 즈볼렌)에서 지기스문트의 형 벤체슬라우스에게 마리아와 지기스문트의 결혼 약속을 재확인했다. 같은 해, 마리아는 나지솜바트 (현재 슬로바키아의 트르나바)에서 지기스문트와 정식으로 약혼했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된 지기스문트는 헝가리로 왔다.
1379년 9월, 러요시 1세는 폴란드 고위 성직자와 영주들을 카사 (현재 슬로바키아의 코시체)로 소환하여 마리아의 폴란드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도록 설득했다. 1382년 7월 25일, 러요시 1세의 요구에 따라 폴란드 귀족 대표단은 지기스문트와 마리아에게 경의를 표했다.
2. 2. 초기 통치 (1382–1384)
I. Lajos|러요시 1세hu가 1382년 9월 10일에 사망하면서, 그의 딸 마리어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헝가리 여왕으로 즉위했다. 어머니 엘제베트가 섭정을 맡았으나, 실권은 궁재 미클로시 가라이가 쥐고 있었다.[1]헝가리 귀족들은 여성 군주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대부분 마리어를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앙주가의 먼 친척인 나폴리의 카를 3세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보았다.[1] 마초의 반(현재 세르비아의 마치바)인 존 호르바트와 그의 형제인 자그레브 주교 폴 호르바트가 카를 3세를 지지하는 세력의 중심인물이었다.
한편, 폴란드 귀족들은 러요시 1세의 폴란드 통치 지속에 반대했고, 이에 엘제베트는 사절단을 보내 폴란드 귀족들에게 마리어 대신 마리어의 여동생인 야드비가를 자신들의 군주로 맞이할 것을 설득했다.[1] 야드비가는 1384년 10월 16일 폴란드 여왕으로 즉위했다.[1]
2. 3. 나폴리 왕의 위협 (1384–1385)
앙주 가문의 루이 1세가 1384년 9월 10일에 사망하자, 그의 경쟁자인 나폴리의 카를 3세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안정시켰다.[1] 카를 3세의 세력 강화는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는 귀족들의 지지를 얻는 데 기여했다.[1] 마초의 반(현재 세르비아의 마치바)인 존 호르바트와 그의 형제인 자그레브 주교 폴 호르바트가 이 움직임의 중심 인물이었다.[1]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는 여왕 어머니에게 마리아와의 결혼을 승인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거절당하고 1385년 초에 헝가리를 떠났다.[1] 여왕들과 지지자들은 반대파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1385년 봄 포제자에서 열린 회의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385년 5월, 프랑스 대표단이 헝가리에 도착하자 마리아는 프랑스의 루이와 약혼했다. 이후 프랑스의 루이는 장 프로아사르에 따르면 자신의 서한에 "프랑스의 루이, 헝가리 왕"이라고 서명했다. 같은 달, 여왕 어머니는 슈테판 라크피를 반역죄로 고발하며 해임하고, 자그레브와 왕국의 다른 지역에 편지를 보내 라크피, 니콜라스 세치, 폴 호르바트 주교와 그 친척들을 지지하지 말 것을 금지했다.
존과 폴 호르바트 형제와 그들의 동맹은 나폴리의 카를 3세에게 왕위를 제안하고 8월에 헝가리로 초청했다. 같은 달, 마리아는 달마티아의 코토르에 대한 보스니아의 트브르트코 1세의 획득을 인정했다. 지기스문트는 사촌인 모라비아의 요스트와 모라비아의 프로코프와 함께 상헝가리로 쳐들어가 포조니 군을 점령했다. 여왕 어머니는 니콜라스 가라이를 니콜라스 세치로 교체하고, 슈테판 라크피를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로, 니콜라스 잠보를 재무원장으로 임명했다.
나폴리의 카를 3세는 1385년 9월 달마티아의 세니에 상륙하여 자그레브로 진군했다.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는 부더로 와서 여왕 어머니를 설득하여 마리아와의 결혼에 동의하게 했다. 10월에 부다에서 결혼이 이루어졌지만, 지기스문트는 왕으로 즉위하지 않았고 통치 권한도 받지 못했다. 여왕 어머니는 새로운 국회를 소집했고 마리아는 다시 귀족들의 자유를 확인했지만, 여왕들의 통치는 여전히 인기가 없었다. 지기스문트는 부다를 떠나 바흐 강 서쪽 영토를 그의 모라비아 사촌들에게 저당 잡혔다. 한편 나폴리의 카를로는 자그레브를 떠나 헝가리에 평화와 공공 질서를 회복하고 싶다고 말했다.

2. 4. 카를 3세의 통치 (1385–1386)
나폴리의 카를 3세가 헝가리 왕위를 요구하며 부다로 진군하자, 많은 귀족들이 그를 따랐다. 마리아와 엘리자베스는 카를을 정중히 맞이했고, 1385년 12월 초 카를은 두 여왕과 함께 수도에 입성했다.[1] 마리아는 카를이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하여 12월 중순 왕위를 포기했다. 카를은 처음에는 총독 칭호를 사용했으나, 국회는 그를 왕으로 선출했다. 1385년 12월 31일, 카를 3세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왕으로 즉위했다. 로렌초 데 모나치스(Lorenzo de Monacis)에 따르면, 카를의 대관식에 참석한 마리아와 엘리자베스는 의식 도중 루이 1세의 무덤을 찾아 슬픔에 잠겼다고 한다.
카를은 마리아와 엘리자베스를 구금하지 않았고, 그들은 부다 왕궁에서 계속 거주했다. 엘리자베스와 니콜라스 가라이는 카를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잔 다르크를 설득하여 암살에 가담시켰고, 성공하면 김메스 (현재 슬로바키아 옐레네츠) 영지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1386년 2월 7일, 엘리자베스의 요청으로 카를은 마리아와 엘리자베스를 방문했고, 그 자리에서 잔 다르크가 카를을 공격하여 머리에 큰 부상을 입혔다. 부상당한 카를은 비셰그라드로 옮겨졌으나, 1386년 2월 24일 사망했다.
2. 5. 왕정 복고와 포획 (1386–1387)

마리아는 왕위에 복위했고,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섭정으로서 통치했다.[1] 엘리자베스는 1386년 2월 14일에 이미 쾨세그 시민들에게 "마리아 여왕이 신성한 왕관을 되찾았다"고 알렸다. 그러나 호르바트 형제는 살해된 카를 3세의 아들인 나폴리의 라디슬라오를 위해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마리아의 남편 지기스문트와 그의 형제 벤체슬라우스는 4월에 상 헝가리를 침공했다. 수 주간의 협상 끝에, 5월 초 죄르에서 조약이 체결되어 지기스문트의 배우자 지위가 인정되었다. 또한 지기스문트가 바그 강 서쪽의 토지를 모라비아의 요스트와 프로코프에게 저당 잡힌 것을 확인했다. 조약 체결 후, 엘리자베스와 마리아는 부다로 돌아갔고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로 떠났는데, 이는 그가 조약에 불만을 느꼈음을 시사한다.
15세기 역사가 요하네스 데 투로츠에 따르면, 엘리자베스는 나폴리의 라디슬라오 지지자들이 통제하는 왕국의 남부 지역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1386년 7월 15일경, 엘리자베스와 마리아는 니콜라스 가라이와 소규모 수행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자코보로 출발했다. 그러나 요한 호르바트, 팔리시나의 요한과 그들의 부하들은 7월 25일에 고르자니에서 매복 공격을 가했다. 여왕의 소규모 수행원들은 공격자들과 싸웠지만, 모두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벌라이즈 포르가치와 니콜라스 가라이는 참수되었고, 그들의 머리는 여왕의 마차에 던져졌다. 엘리자베스는 반란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졌고, 공격자들에게 딸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마리아와 엘리자베스는 투옥되었다. 그들은 자그레브 주교령의 요새였던 고메넥 성에 억류되었다. 여왕들이 부재한 동안, 왕국의 귀족들은 새로 조각된 "레그니콜레스의 인장" 아래에서 국회를 소집했다. 그들은 마리아를 대신하여 일반적인 사면을 약속했지만, 호르바트 형제들은 복종을 거부했다. 두 여왕은 크루파로 끌려갔고, 거기에서 아드리아 해 해안에 있는 노비그라드 성으로 끌려갔다. 귀족 또는 국회는 팔라틴으로 스테판 라크피를 선출했고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요한 호르바트의 부하들은 1387년 1월 초에 마리아 앞에서 엘리자베스를 교살했다. 같은 달, 지기스문트는 슬라보니아를 침공했지만, 반군을 물리칠 수 없었다.
헝가리의 무정부 상태를 틈타 폴란드군은 2월에 로도메리아와 할리치를 침공했다. 두 왕국을 자신을 위해 주장한 오폴레의 브와디스와프 2세만이 그들의 행동에 반대했다. 지기스문트는 1387년 3월 31일에 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지지자 중 한 명인 크르크의 이반은 조반니 바르바리고가 지휘하는 베네치아 함대의 지원을 받아 노비그라드 성을 포위했다. 그들은 성을 점령하고 1387년 6월 4일에 마리아를 해방시켰다. 마리아는 특히 바르바리고에게 감사했으며, 그를 기사로 임명하고 600골든 플로린의 연금을 수여했다.
2. 6. 남편과의 공동 통치 (1387–1395)

마리어는 1387년 7월 4일 자그레브에서 남편을 만났다.[1] 공식적으로 마리어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기스문트의 공동 통치자로 남아 있었지만, 정부에 대한 영향력은 미미했다. 지기스문트의 토지 양도는 공동 통치 첫 해 동안 마리어의 대인장으로 항상 확인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토지 수여자들이 그녀의 확인을 거의 구하지 않았다. 왕실 칙서는 그녀의 즉위가 아닌 남편의 대관식부터 그녀의 통치 연도를 계산했다. 요하네스 데 투로츠에 따르면, 마리어는 지기스문트가 존 호르바트를 살려두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1394년 7월에 체포된 존 호르바트를 사지절단하도록 남편을 설득했다.
1395년 5월 17일, 마리어는 부다 숲에서 단독으로 사냥에 나섰을 때 임신 중이었다. 그녀의 말은 걸려 넘어졌고, 그녀를 내던진 뒤 그녀 위에 쓰러졌다. 이 사고로 조산을 하게 되었고, 마리어는 아들을 조산했다. 여왕은 치명적인 부상으로 사망했고, 어떤 종류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곳에 있었기에 그녀의 아들 또한 사망했다. 마리어는 바러드(현재 루마니아의 오라데아) 대성당에 묻혔다. 마리어의 여동생 야드비가는 헝가리 왕위를 주장했지만, 지기스문트는 큰 어려움 없이 왕위를 유지했다.
마리아의 죽음으로 헝가리에서의 앙주 가문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3. 가계
마리아 여왕은 라요시 1세와 보스니아의 엘리자베스의 딸로, 앙주 가문 출신이다. 아르파드 왕조의 후손이기도 하다.
1. 헝가리의 마리아 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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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라요시 1세 |
3. 보스니아의 엘리자베스 |
4. 카로이 1세 |
5. 폴란드의 엘제비에타 |
6. 스테판 2세 |
7. 쿠야비아의 엘리자베스 |
8. 앙주의 카를 마르텔 |
9. 합스부르크의 클레멘티아 |
10. 브와디스와프 1세 |
11. 칼리시의 야드비가 |
12. 스테판 1세 |
13. 세르비아의 엘리자베스 |
14. 그니에프코보의 카지미에시 3세 |
15. (이름 미상) |
16. 카를로 2세 |
17. 헝가리의 마리아 |
18. 루돌프 1세 |
19. 호엔베르크의 게르트루데 |
20. 쿠야비아의 카지미에시 1세 |
21. 오폴레의 에우프로시네 |
22. 볼레스와프 |
23. 헝가리의 욜란다 |
24. 보스니아의 프리에즈다 1세 |
25. (이름 미상) |
26. 세르비아의 스테판 드라구틴 |
27. 헝가리의 카타린 |
28. 쿠야비아의 지에모미슬 |
29. 포메라니아의 살로메 |
30. (이름 미상) |
31. (이름 미상) |
벨러 4세 | ||
이슈트반 5세 | ||
헝가리의 욜란다 | 헝가리의 마리아 | 헝가리의 카타린 |
칼리시의 야드비가 | 앙주의 카를 마르텔 | 세르비아의 엘리자베스 |
폴란드의 엘리자베타 | 카로이 1세 | 스테판 2세 |
라요시 1세 | 보스니아의 엘리자베스 | |
헝가리의 마리아 여왕 |
4. 각주
4. 1. 1차 자료
4. 2. 2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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