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요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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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요시 1세는 1326년 헝가리의 카로이 1세와 폴란드의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342년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그는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를 배웠으며 역사와 점성술에 관심을 보였다. 러요시는 1370년 외삼촌인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폴란드 왕위를 계승하여 헝가리와 폴란드의 동군 연합을 이루었다. 그는 나폴리 원정을 시도하고 발칸 반도와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헝가리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으나, 잦은 전쟁과 귀족 특권 강화로 인한 문제점도 있었다. 러요시는 헝가리 역사에서 "대왕"으로 불리는 유일한 왕이며, 헝가리 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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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요시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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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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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어 | Nagy Lajos |
크로아티아어 | Ludovik Veliki |
슬로바키아어 | Ľudovít Veľký |
폴란드어 | Ludwik Węgierski |
출생일 | 1326년 3월 5일 |
출생지 | 비셰그라드, 헝가리 왕국 |
사망일 | 1382년 9월 10일 |
사망지 | 너지솜버트, 헝가리 왕국 (현재의 트르나바, 슬로바키아) |
매장일 | 1382년 9월 16일 |
매장지 |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 |
종교 | 가톨릭교회 |
통치 | |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왕 즉위 | 1342년 7월 16일 |
헝가리 왕 대관식 | 1342년 7월 21일,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 |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왕 전임자 | 카로이 1세 |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왕 후임자 | 마리어 1세 |
폴란드 왕 즉위 | 1370년 11월 17일 |
폴란드 왕 대관식 | 1370년 11월 17일, 크라쿠프 대성당 |
폴란드 왕 전임자 | 카지미에시 3세 |
폴란드 왕 후임자 | 야드비가 |
가문 | |
왕가 | 앙주 가문 |
아버지 | 카로이 1세 |
어머니 | 엘주비에타 워키에테크부나 |
가족 | |
배우자 | 룩셈부르크의 마르기트 엘리자베타 코트로마니치 |
자녀 | 앙주 커털린 마리어 헤드비그 |
2. 생애
헝가리 왕국은 아버지 카로이 1세의 통치 아래 대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여 강대국의 기반을 다졌다. 러요시 1세는 카로이 1세와 그의 아내 엘주비에타 워키에트쿠브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342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후 러요시 1세는 적극적인 대외 확장 정책을 펼쳤다.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을 통해 1358년 자다르 조약을 맺고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해안 지역에 대한 헝가리의 종주권을 확립했다. 또한 보스니아, 몰다비아, 왈라키아 전체와 불가리아, 세르비아 일부 지역까지 헝가리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1366년에는 헝가리를 침공한 오스만 제국 군대를 격퇴하기도 했다.
1345년 나폴리 왕국에서 여왕 조반나 1세의 남편이자 자신의 동생인 안드레아 둔게리아가 암살당하자, 러요시 1세는 동생의 죽음을 명분으로 1347년부터 수차례 나폴리 원정에 나섰다. 한때 수도 나폴리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결국 왕위를 차지하는 데는 실패하고 1352년 철수했다. 다만 만년인 1382년에는 동족인 카를로 3세를 사주하여 조반나 1세를 살해하고 그를 나폴리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국내에서는 1351년 법률을 제정하여 헝가리 귀족들의 동등한 지위와 특권을 보장하는 한편, 1222년의 금인칙서를 수정하여 귀족 영지의 상속 규정을 정비했다. 이 법은 귀족 영지의 남자 후손 세습 원칙과 후사 부재 시 왕실 환수 규정을 명확히 하여 왕권의 기반을 다지고자 했다. 또한 1367년에는 페치에 대학을 설립하여 학문 발전에도 기여했다.
1370년, 외삼촌인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 국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어머니 엘주비에트와의 혈연을 근거로 폴란드 왕위까지 계승하게 되었다. 이는 헝가리와 폴란드 간의 동군연합 시대를 열었다. 1374년에는 폴란드 귀족 계급인 슐라흐타의 지지를 얻기 위해 코시체 특권을 제정하여 그들의 특권을 확대해주었다.
이처럼 러요시 1세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폴란드 왕위까지 겸하여 '대왕'으로 불리지만, 발칸 반도로의 완전한 세력 확장에는 한계를 보였고, 만년에는 대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특권을 부여하는 등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헝가리 왕권 약화의 한 요인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러요시 1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왕위는 장녀 마리아에게, 폴란드 왕위는 막내딸 야드비가에게 계승되었다.
2. 1. 유년 시절 (1326-1342)
1326년 3월 5일, 카로이 1세와 그의 아내 엘주비에타 워키에트쿠브나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1317년에 성인으로 시성된 아버지의 삼촌 툴루즈의 성 루도비코 주교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첫째 형 카로이는 루이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으며, 1329년 둘째 형 라슬로가 사망하면서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었다.
당시 기준으로 자유로운 교육을 받아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를 배웠으며, 특히 역사와 점성술에 관심을 보였다. 브로츠와프 출신의 성직자 니콜라스 네즈메일리가 기독교 신앙의 기본 원리를 가르쳤으나, 그의 종교적 열정은 주로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어린 시절 왕실 기사 페테르 포하로스가 그를 어깨에 태우고 다녔다는 기록이 왕실 칙령에 남아 있다. 1330년 4월 17일, 펠리치안 자흐가 비셰그라드에서 왕족 암살을 시도했을 때, 그의 스승이었던 니콜라스 드루게스와 니콜라스 타폴차니 덕분에 동생 언드라시와 함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루이는 아홉 살 때 아버지와 보헤미아의 얀 국왕 사이의 동맹 조약에 날인했으며, 이듬해에는 아버지를 따라 오스트리아 공국 침공에 참여했다.
1338년 3월 1일, 보헤미아의 얀 국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를(모라바 변경백)과 비셰그라드에서 새로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카를은 외삼촌인 카지미에시 3세가 아들 없이 사망할 경우 카로이 1세의 아들들이 폴란드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또한 루이는 카를의 세 살 된 딸 마르가레트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1339년 카지미에시 3세의 첫 아내 리투아니아의 알도나가 사망하자, 폴란드 귀족들은 카지미에시 3세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 그의 누이인 엘주비에타와 그 자손들을 후계자로 삼도록 설득했다. 이는 튜턴 기사단에 대항하기 위해 헝가리의 지원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같은 해 7월, 카로이 1세와 카지미에시 3세는 비셰그라드에서 만나 카지미에시 3세 사후 루이가 폴란드 왕위를 계승하기로 하는 조약을 공식화했다. 대신 카로이 1세는 루이가 폴란드 자금 지원 없이 포메라니아 등 튜턴 기사단에게 빼앗긴 폴란드 영토를 되찾도록 돕고, 폴란드 행정에는 폴란드인만을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다.
루이는 1339년 아버지로부터 트란실바니아 공작 칭호를 받았으나, 해당 지역을 직접 통치하지는 않았다. 같은 해 왕실 칙령에 따르면 그의 약혼녀인 보헤미아의 마르가레트는 헝가리 왕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1340년에는 루이의 별도 공작 궁정이 있었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2. 2. 초기 통치 (1342-1345)
카로이 1세는 1342년 7월 16일에 사망했다. 5일 후, 에스테르곰 대주교 차나드 텔레그디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성왕관으로 러요시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러요시는 성년에 이르렀지만, 그의 어머니 엘주비에타는 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수십 년 동안 "일종의 공동 섭정" 역할을 했다. 러요시는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 기간 마지막 수십 년 동안 국회를 열지 않고 통치했던 아버지로부터 풍부한 국고를 물려받았다.
러요시는 관습법과 달리 수혜자의 형제 및 다른 친족을 기증에서 제외하는 새로운 토지 양여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에 따르면, 수혜자의 마지막 남성 후손이 사망하면 해당 토지는 왕실에 몰수되었다. 반면, 러요시는 종종 "딸을 아들로 승진"시켜, 아들이 없는 귀족의 딸이 아버지의 토지를 상속받도록 허가했다. 이는 해당 토지가 친족에게 상속되어야 한다는 관습법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조치였다. 러요시는 종종 이러한 특권을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들의 아내에게 부여했다. 또한 러요시는 토지 소유주가 자신의 토지에서 사형을 집행하도록 허가하여 군의 치안 판사 권한을 제한하기도 했다.
러요시의 아버지 시절 영향력 있던 조언자 윌리엄 드루게스는 1342년 9월에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토지를 동생 니콜라스에게 유증했지만, 러요시는 이를 몰수했다. 늦가을에는 아버지의 트란실바니아 총독이었던 토마스 세체니를 해임했는데, 그의 아내는 왕비 어머니의 먼 친척이었다. 러요시는 특히 라크피 가문을 총애하여,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 가문 출신 8명이 고위직을 맡았다. 앤드루 라크피는 러요시 통치 초기 전쟁에서 왕립군 사령관을 맡았다. 1342년 말 또는 1343년 초, 러요시는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아버지 통치 기간에 잃었던 마초 바나트를 회복했다.
나폴리의 로베르토 국왕이 1343년 1월 20일에 사망했다. 그는 유언장에서 손녀 조안나 1세를 유일한 상속자로 지명하고, 조안나의 남편이자 러요시의 동생인 앤드루가 공동 통치자가 되는 것을 배제했다. 러요시와 그의 어머니는 이를 이전 나폴리와 헝가리 국왕들 사이의 합의 위반으로 간주했다. 러요시는 아내 마가렛의 아버지인 모라바의 카를을 프라하에서 만나, 카를의 옛 스승이자 나폴리 왕국의 군주인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앤드루를 위해 개입해 줄 것을 설득했다.

러요시는 또한 나폴리의 친척들과 고위 관료들에게 사절을 보내 동생의 이익을 증진하도록 촉구했다. 어머니 엘주비에타는 1343년 여름, 거의 모든 왕실 보물, 즉 6628kg 이상의 은과 5150kg의 금을 가지고 나폴리로 떠났다.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7개월간 머물렀지만, 며느리 조안나와 교황으로부터 앤드루가 조안나의 남편으로서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약속만 받는 데 그쳤다.
퀴컬뢰의 요한의 연대기에 따르면, 러요시는 1344년 여름, 세금 납부를 거부한 트란실바니아 작센족을 상대로 첫 원정을 시작하여 그들을 굴복시켰다. 트란실바니아에 머무는 동안, 왈라키아 공작 바사라브 1세의 아들인 왈라키아의 니콜라스 알렉산더는 아버지의 대리인으로 브라쇼브(현재 루마니아 브라쇼브)에서 러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써 왈라키아에 대한 헝가리 군주의 종주권이 외형상 회복되었다.
러요시는 1344년 12월, 이교도인 리투아니아를 상대로 한 십자군에 참여했다. 보헤미아의 요한, 모라바의 카를, 부르봉의 페테르, 에노와 홀란드의 윌리엄 등이 포함된 십자군은 빌뉴스를 포위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군대가 튜턴 기사단 영토를 침공하자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러요시는 1345년 2월 말에 헝가리로 돌아왔다.
그는 세켈리의 백작인 앤드루 라크피를 파견하여, 타타르족이 트란실바니아와 스피슈(현재 슬로바키아 스피시)를 약탈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골든 호드 영토를 침공하게 했다. 라크피와 주로 세켈리 전사로 구성된 그의 군대는 1345년 2월 2일, 대규모 타타르 군대를 격파했다. 헝가리 군은 칸의 매형 아틀라미쉬를 포함한 현지 타타르 지도자들을 참수하고 타타르족을 해안 지역으로 몰아내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원정으로 골든 호드는 드네스트르강 너머로 밀려났고, 동 카르파티아 산맥과 흑해 사이 지역에 대한 골든 호드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1345년 4월, 러요시의 외삼촌인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와 장인인 모라바의 카를 사이에 갈등이 벌어져 폴란드와 보헤미아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러요시는 1339년 합의에 따라 외삼촌인 카지미에시 3세를 지원하기 위해 증원군을 보냈다.
폴란드와 타타르족과의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러요시는 1345년 6월 크로아티아로 진군했다. 그는 아버지 카로이 1세에게 성공적으로 저항했던 고 이반 넬리파치의 옛 거점인 크닌을 포위하여 그의 미망인과 아들을 항복시켰다. 코르바비아 백작 가문과 다른 크로아티아 귀족들도 러요시가 크로아티아에 머무는 동안 그에게 복속했다. 자다르 시민들은 베네치아 공화국에 반란을 일으키고 러요시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러요시는 비셰그라드로 돌아온 후, 보스니아의 반인 스테판 2세를 파견하여 자다르 시민들을 지원하게 했지만, 스테판 2세는 베네치아군과 싸우지 않았다.
2. 3. 나폴리 원정 (1345-1350)
1345년 9월 18일, 러요시 1세의 동생이자 나폴리 왕국의 여왕 조반나 1세의 남편이었던 안드라스가 아베르사에서 살해당했다. 러요시와 그의 어머니는 조반나 1세 여왕을 비롯해 타란토의 로베르, 두라초의 카를로 등 앙주 가문의 나폴리 분파 인물들이 암살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1346년 1월 15일, 러요시는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서한을 보내 "남편을 살해한" 여왕을 폐위시키고, 안드라스와 조반나 사이의 아들인 샤를마르텔을 왕위에 앉힐 것을 요구했다. 또한, 그는 나폴리의 샤를 2세의 장남 샤를 마르텔로부터 이어지는 자신의 부계 혈통을 근거로 조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 자리를 요구하며, 교황청에 대한 나폴리 왕국의 연간 공물 증액까지 약속했다. 그러나 교황이 안드라스 암살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자, 러요시는 남부 이탈리아 침공을 결심하고 1346년 여름 이전에 안코나 등 이탈리아 도시들에 사절을 보냈다.

이탈리아에서 사절들이 협상하는 동안, 러요시는 자다르 구원을 위해 달마티아로 진군했으나 베네치아 공화국 측이 그의 지휘관들을 매수했다. 자다르 시민들이 포위군을 공격했을 때 헝가리 군대는 개입하지 않았고, 베네치아군은 도시 성벽 밖에서 자다르 군을 제압했다. 러요시는 철수했지만, 베네치아 측이 32만 금 플로린의 보상금을 제안했음에도 달마티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군사적 지원을 받지 못한 자다르는 1346년 12월 21일 베네치아에 항복했다.
러요시는 1347년 4월 24일 니콜라스 바사리가 지휘하는 소규모 선발대를 이탈리아로 보냈다. 이는 전년도 기근으로 고통받은 이탈리아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그는 독일 용병도 고용했으며, 1347년 11월 11일 비셰그라드를 출발하여 우디네, 베로나, 모데나, 볼로냐, 우르비노, 페루자를 거쳐 12월 24일 라퀼라 근처에서 나폴리 왕국 영토로 진입했다. 라퀼라는 그에게 항복했다.
조반나 여왕은 사촌인 타란토의 루이와 재혼한 뒤 1348년 1월 11일 마르세유로 도주했다. 다른 친척들인 타란토의 로베르와 두라초의 카를로는 아베르사에서 러요시에게 항복했다. 러요시는 처음에는 이들을 환대하며 그들의 형제인 타란토의 필리포와 두라초의 루이까지 합류하도록 설득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하자 러요시는 태도를 바꿔 동생 살해 혐의로 이들을 비난하고 1월 22일 모두 체포했다. 다음 날인 1월 23일, 조반나 1세의 여동생 칼라브리아의 마리아의 남편이었던 두라초의 카를로가 러요시의 명령으로 참수되었다. 다른 왕자들은 포로로 잡혀 어린 조카 샤를마르텔과 함께 헝가리로 보내졌다.
러요시는 1348년 2월 나폴리로 진군했다. 그는 시민들의 성대한 입성 제안을 거절하고 세금 인상을 거부하면 도시를 약탈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나폴리 왕들의 전통적인 칭호인 "시칠리아 및 예루살렘 왕, 풀리아와 카푸아 공작"을 사용하며 카스텔 누오보에서 왕국을 통치했고, 주요 요새에는 용병을 주둔시켰다. 당시 역사가 도메니코 다 그라비나에 따르면, 러요시는 동생의 죽음에 연루된 모든 공모자를 찾기 위해 매우 잔혹한 수사 방법을 사용했다. 발조 가문과 산세베리노 가문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 귀족 가문은 그에게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교황 역시 두 왕국이 러요시 아래 통합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그의 나폴리 통치를 승인하지 않았고, 교황 회의에서 조반나 여왕이 남편 살해 혐의에 대해 무죄라고 선언했다.
흑사병의 창궐은 러요시가 1348년 5월 이탈리아를 떠나도록 만들었다. 그는 울리히 볼프하르트를 나폴리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그의 용병들은 9월에 돌아온 조반나 1세와 그녀의 남편을 막지 못했다. 한편, 8월 5일 베네치아와 8년 휴전을 맺었던 러요시는 1349년 말, 스테판 락피 지휘 하에 새로운 군대를 나폴리로 보냈다. 락피는 카푸아, 아베르사 등 조반나 1세에게 빼앗겼던 요새들을 일부 탈환했으나, 고용한 독일 용병들 사이의 반란으로 인해 헝가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 사이 흑사병은 헝가리에도 도달했다. 첫 유행은 6월에 끝났으나 9월에 재발하여 러요시의 첫 번째 아내 마거릿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러요시 자신도 병에 걸렸으나 페스트에서 살아남았다. 흑사병은 인구 밀도가 낮은 헝가리에서 다른 유럽 지역보다는 덜 치명적이었지만, 1349년 일부 지역의 인구 감소를 초래했고 이후 몇 년간 노동력 수요를 증가시켰다.
러요시는 교황 클레멘스가 조반나를 폐위시킨다면 나폴리 왕국을 포기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교황이 이를 거부하자 1350년 4월 두 번째 나폴리 원정에 나섰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바를레타에서 추가 병력 도착을 기다리던 중 용병 반란을 진압했다. 나폴리로 진군하는 동안, 스테판 락피 휘하 선봉대의 잔혹함 때문에 많은 도시에서 저항에 부딪혔다.
원정 기간 동안 러요시는 직접 공격을 이끌고 병사들과 함께 성벽을 오르는 등 위험을 무릅썼다. 카노사 디 푸글리아 포위 공격 중에는 수비대가 던진 돌에 맞아 해자에 빠지기도 했고, 명령에 따라 강을 건너다 휩쓸린 젊은 병사를 구하기 위해 직접 강물에 뛰어들기도 했다. 아베르사 포위 중에는 화살에 왼쪽 다리를 맞았다. 1350년 8월 3일 헝가리군이 아베르사를 함락시키자 조반나 여왕과 남편은 다시 나폴리에서 도망쳤다. 그러나 러요시는 헝가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역사가 마테오 빌라니에 따르면, 러요시는 자금이 부족해지고 지역 주민들의 저항에 직면하자 "체면을 잃지 않고 왕국을 떠나려" 했다고 한다.
1350년 희년을 맞아 러요시는 헝가리로 돌아가는 길에 로마를 방문했고, 1350년 10월 25일 부다에 도착했다. 교황청의 중재로 러요시와 조반나 여왕의 남편 타란토의 루이 측 사절들은 6개월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교황은 러요시에게 여왕의 남편 살해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약속하고, 조반나에게는 투옥된 나폴리 왕자들의 몸값으로 30만 금 플로린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2. 4. 발칸 반도와 동유럽에서의 확장 (1350-1370)
1351년, 러요시 1세는 외삼촌인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의 요청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전쟁에 개입했다. 카지미에시 3세는 후사가 없을 경우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를 헝가리에 넘기기로 약속했다. 러요시는 폴란드-헝가리 연합군을 이끌고 리투아니아 공작 케스투티스의 영토를 침공했으며, 케스투티스는 헝가리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세례를 받기로 약속하는 듯했으나, 군대가 철수한 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러요시는 케스투티스를 붙잡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동맹인 플로츠크의 볼레스와프 3세를 잃는 등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52년 다시 벨즈를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하고 머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같은 해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가 골든 호드의 타타르 용병을 고용해 포돌리아를 침공하자, 러요시는 트란실바니아 방어를 위해 헝가리로 돌아갔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며 러요시를 지원하고 4년간 교회 수입의 십일조 징수를 허가했다.1353년 보스니아의 스테판 2세의 딸 보스니아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면서 발칸 반도 문제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했다. 1354년에는 세르비아를 침공했으나, 황제 스테판 두샨은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같은 해, 마테오 빌라니의 기록에 따르면 러요시는 골든 호드에 대항하는 원정을 시작하여 타타르 통치자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고 하며, 이후 타타르의 트란실바니아 침공이 중단되었다.
1356년 여름, 러요시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점유하고 있던 달마티아 지역을 되찾기 위해 공식적인 선전포고 없이 베네치아 영토를 침공하여 트레비소를 포위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6세는 러요시를 '교회의 기수'로 임명하고 교황령의 반란 세력 진압을 명분으로 3년간의 십일조 징수권을 부여하며 그를 지지했다. 1357년 러요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달마티아로 진군하여 스플리트, 트로기르, 시베니크의 항복을 받아내고, 시민들의 도움으로 자다르를 점령했다. 또한 장인의 뒤를 이은 보스니아의 트브르트코 1세로부터 서부 훔 지역을 아내의 지참금 명목으로 넘겨받았다.

결국 1358년 2월 18일, 자다르 조약이 체결되어 베네치아 공화국은 크바르너 만에서 두라초에 이르는 달마티아의 모든 도시와 섬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라구사 공화국 역시 헝가리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러요시는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에 대한 헝가리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이후 러요시는 보스니아, 몰다비아, 왈라키아 전체 지역과 불가리아, 세르비아 일부 지역에 대한 헝가리의 종주권을 확립하며 발칸 반도에서 헝가리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했다.
1366년에는 동쪽에서 새롭게 세력을 확장하던 오스만 제국 군대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여 헝가리의 국경을 방어했다. 또한 1367년에는 페치에 대학교를 설립하여 학문과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2. 5. 폴란드 왕위 계승과 통치 (1370-1382)
1370년 외삼촌이었던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 국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러요시 1세는 폴란드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는 그의 어머니 엘주비에트가 카지미에시 3세의 누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폴란드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러요시 1세는 1374년 헝가리의 커서(Kassa, 현재 슬로바키아 코시체)에서 코시체 특권을 제정했다. 이 특권은 폴란드의 주요 귀족 계급이었던 슐라흐타와의 타협안으로, 세금 감면 등 슐라흐타의 여러 특권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슐라흐타가 러요시 1세의 딸 중 한 명을 폴란드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는 대가였다.
러요시 1세의 폴란드 통치는 헝가리와 폴란드 두 왕국 간의 동군연합 시대를 열었으며, 양국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코시체 특권 등으로 인해 폴란드 내에서 귀족 세력인 슐라흐타의 힘이 더욱 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평가도 받는다. 러요시 1세는 대부분의 시간을 헝가리에서 보냈으며, 폴란드 통치는 주로 그의 어머니 엘주비에트와 같은 대리인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2. 6. 가족 관계

러요시 1세는 1342년경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의 딸인 마르기트(1335~1349)와 첫 결혼을 했다. 그러나 마르기트는 1349년 자녀를 낳지 못하고 사망했다.
1353년에는 보스니아의 반 스테판 2세의 딸인 엘리자베트 코트로마니치와 재혼했다. 두 사람은 가까운 친척 관계였기에 결혼을 위해 교황의 특별 허가가 필요했다. 엘리자베트와의 사이에서 세 딸을 두었으나, 첫째 딸은 일찍 사망했다.
- 카타린 (1370년 ~ 1378년)
- 마리아 (1371년 ~ 1395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훗날 신성 로마 황제가 되는 지기스문트와 결혼했다.
- 야드비가 (1373/1374년 ~ 1399년): 폴란드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브와디스와프 2세)와 결혼했다.
3. 유산과 평가
러요시 1세는 헝가리 역사에서 유일하게 "대왕"(Nagy|너지hun)이라는 별칭을 받은 군주이다.[4] 14세기와 15세기 헝가리 연대기뿐만 아니라 17세기 카페 왕조 계보에서도 이 별칭으로 불렸다. 그의 기사도적인 성품과 성공적인 군사 원정은 '대왕'으로서의 명성을 얻는 데 기여했다. 실제로 러요시는 재위 기간 거의 매년 전쟁을 치렀다. 15세기 후반 역사가 안토니오 본피니는 러요시가 "국내의 평화와 해외의 전쟁을 항상 원했는데, 둘 중 어느 것도 다른 하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역사가 에니코 추코비츠는 러요시의 군사 활동이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회복, 이탈리아 남부, 리투아니아, 발칸 반도에서의 전쟁 등 아버지 카로이 1세의 정책을 계승하고 완성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반면, 팔 엥겔은 러요시의 원정이 "종종 현실적인 목표가 부족했고, 때로는 합리적인 명분조차 없었으며... 그에게 즐거움을 준 것은 전쟁 그 자체였다"고 비판적으로 보기도 한다.
낭만 민족주의 시대에는 러요시 치하의 헝가리가 아드리아해, 발트해, 흑해의 세 바다에 둘러싸인 제국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시인 샨도르 페퇴피는 1845년에 러요시 시대를 "북쪽, 동쪽, 남쪽의 떨어지는 별들이 모두 헝가리 바다에서 사라진" 때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폴란드는 독립 국가로 남아 있었고, 헝가리 국경이 발트해까지 닿지도 않았으며, 흑해 북서부 해안에 대한 러요시의 영향력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의 발칸 반도로의 세력 확대 시도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폴란드 역사학에서는 러요시의 폴란드 통치에 대해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14세기 후반 얀 오브 차르노프에서 비롯된 "비관적" 전통은 러요시 통치하 폴란드의 불안정성과 왕실 관리들의 수탈을 강조한다. 반면, "낙관적" 전통은 러요시가 카지미에시 3세의 정책을 이어받아 소폴란드 귀족들의 도움으로 대폴란드 분리주의 세력에 맞서 폴란드의 통합을 지키려 했다고 평가한다.
동시대 인물인 요한네스 폰 퀴퀼로는 러요시가 "열정이나 독단이 아닌, 정의의 수호자처럼 통치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안토니오 본피니 역시 러요시를 변장하고 백성들 사이를 다니며 관리들의 잘못된 행동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정의로운 왕으로 묘사했다. 심지어 비판적이었던 얀 오브 차르노프조차 러요시가 "절대적인 방식으로 통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폴란드인] 자유의 기초를 놓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에는 문제점도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계속된 전쟁은 아드리아해를 통한 무역을 위축시키고, 대신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를 경유하는 교역로를 발전시켜 이 지역들의 성장을 촉진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또한 대귀족들의 반발에 부딪혀 말년에는 그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등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헝가리 왕권 약화의 한 요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화적으로 러요시 1세는 졸욤(현 즈볼렌), 디오슈제르 등지에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의 새로운 궁전과 성들을 건설했다. 또한 그는 이전 연대기의 내용을 보존한 중요한 역사서인 ''일러스트 연대기''(Chronicon Pictumlat)의 편찬을 후원했다. 이 연대기에 실린 147개의 정교한 삽화는 당시 헝가리 공방의 높은 예술적 수준을 보여준다.
러요시 1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 헝가리 왕위는 장녀 마리아에게, 폴란드 왕위는 막내딸 야드비가에게 계승되었다. 하지만 헝가리에서는 마리아와 카를로 3세(헝가리 왕으로는 카로이 2세) 사이에 잠시 왕위 계승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The Annals of Jan Długosz
1339
[2]
서적
The Annals of Jan Długosz
1363
[3]
간행물
The Age of the Angevine Dynasty
http://mek.niif.hu/0[...]
Encyclopaedia Humana Association
2015-01-09
[4]
웹사이트
Louis I. of Hun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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