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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리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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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스 리버만은 1847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로, 독일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초기에는 사실주의 화풍으로 시작하여,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빛과 색채를 강조하는 화풍을 발전시켰다. 1898년 베를린 분리파의 창립을 주도하며 근대 미술을 장려했으나, 표현주의 등 새로운 경향과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 나치 정권의 탄압으로 작품이 몰수되고, 193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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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리버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야코프 힐스도르프 사진 (1904년)
국적독일
출생일1847년 7월 20일
출생지베를린, 프로이센 왕국
사망일1935년 2월 8일
사망지베를린, 독일
배우자마르타 리버만
교육
교육베를린 대학교, 추가로 바이마르, 파리, 네덜란드에서 공부
작품 활동
알려진 작품회화 및 판화 제작
양식인상주의
운동베를린 분리파

2. 주요 작품


  • -, 1892
  • -, 1894
  • -, 1898
  • -, 1900
  • -, 1901[38]

니엔스테드텐의 레스토랑 테라스
, 1902

3. 생애

막스 리버만은 초기에는 전원이나 자신의 생활 풍경 등을 그렸고, 이후 로비스 코린트, 막스 슬레보흐트 등과 함께 독일 인상파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는 상속받은 재산을 프랑스 인상파 회화 수집에도 사용했다. 이후 자신의 정원 풍경 외에도 부르주아지 등 부유층의 생활 풍경과 초상화를 그리면서 독일 미술계와 상류 사회에서 존경받는 화가가 되었다. 한편, 빈센트 반 고흐 등 새로운 세대의 화가들을 별로 평가하지 않았고, 베를린 국립 미술관이 고흐의 작품을 거액을 들여 구입했을 때는 비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1878년, 리버만은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여행하여 베네치아에서 비토레 카르파초젠틸레 벨리니의 작품을 감상하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그곳에서 프란츠 폰 렌바흐를 비롯한 뮌헨 화가들과 함께 베네치아에 석 달 동안 머물렀고, 뮌헨 화파를 중심으로 독일 자연주의 예술의 중심지였던 바이에른 주도로 이동했다.

1878년 12월, 리버만은 암스테르담과 베네치아의 회당에서 스케치한 열두 살 예수 작업에 착수했다. 회당 내부 연구와 개별 인물들을 결합하여 이전과는 다르게 세심하게 구성했으며, 빛나는 중심인 아기 예수로부터 나오는 듯한 신비로운 빛을 담았다.

“열두 살 예수”, 1879


유대인 학자들과 이야기하는 셈족 소년 예수의 그림은 뮌헨 국제 예술 전시회에서 이단으로 비난받았고, 아우크스부르거 알게마이네 비평가는 예수를 "가장 못생기고 건방진 유대인 소년"이라고 묘사했다.[2] 루이트폴트 왕세자가 리버만을 지지했지만, 보수적인 국회의원 발타사르 폰 달러는 유대인에게 예수를 묘사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베를린에서는 궁정 설교자 아돌프 슈토커가 반유대주의 논쟁을 이어갔다. 빌헬름 라이블 등 동료 예술가들이 그를 지지했지만,[4] 비판에 대응하여 리버만은 어린 예수를 재구성하여 그림을 덧칠했다. 리하르트 무터의 출판물에 수십 년 동안 재현된 원본 버전은 짧은 망토를 입고 옆머리와 머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샌들을 신지 않은 아이였지만,[5] 1993년에 발견된 덧칠된 그림에서는 예수가 똑바로 서서 더 긴 머리카락과 로브, 샌들을 신고 있었다.[6][7] 이는 증가하는 반유대주의를 고려한 리버만의 선택과 유대교에 대한 그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다.[8][9][10]

“열두 살 예수”, 1879, 무터의 출판물에 재현된 원본 버전


이후 리버만은 유명한 화가가 되었지만, 1879년 네덜란드 체류 기간 동안 회화적 발전은 정체되었다. 1880년 살롱(파리)에 참가한 그의 그림들은 조화로운 공동체에서 평화롭게 일하는 사람들을 묘사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매년 머물며 반유대주의적 적대감이 팽배했던 뮌헨에서 찾을 수 없었던 분위기를 흡수하려 했다. 1879년에는 다하우어 무스, 로젠하임과 인 계곡을 여행하며 "브라넨부르거 비어가르텐"을 그렸다.

암스테르담 고아원의 휴식 시간, 1881–82


1880년 여름, 리버만은 브라반트의 동겐 마을에서 연구하여 「구두 수선공 작업실」에 활용했다. 뮌헨으로 돌아가기 전 암스테르담에서 "예술적 경력을 결정지은" 경험을 했다. 가톨릭 노인의 집 정원에서 햇볕 아래 벤치에 앉은 노인들을 보며 "마치 누군가가 평평한 길을 걷다가 갑자기 튀어 오르는 나선형 용수철을 밟은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 주제를 그리며 덮개를 통과한 빛의 효과, 즉 "리버만의 햇빛"이라고 불리는 자체 색상의 빛을 선택적으로 표현하여 대기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비교되는 후기 인상주의 작품을 예고했다.[11]

1880년 파리 살롱에서 리버만은 명예로운 언급을 받은 최초의 독일인이었고, 인상파 수집가 레옹 메이트르가 그의 그림 여러 점을 구입했다. 성공에 고무된 그는 이전 연구를 바탕으로 "햇빛"을 사용한 「암스테르담 고아원의 휴식 시간」(1881–82)을 제작했다.

가을에 리버만은 동겐에서 「구두 수선공 작업실」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빛을 사용한 그림으로의 전환을 보여주지만, 변형적이고 낭만적인 요소를 배제하며 이전 작품 묘사에 충실했다. 1882년 파리 살롱에서 장-바티스트 포르에게 팔린 이 작품들과 「암스테르담 고아원의 휴식 시간」에 대해 프랑스 언론은 그를 인상파 화가로 칭찬했다. 수집가 어니스트 오셰데는 에두아르 마네에게 "만약 당신이 야외의 비밀을 알려준 사람이라면, 리버만은 밀폐된 공간에서 빛을 듣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15]

리버만은 인상주의에 흡수되지 않고 「표백장」(1882–83)에서 라이블의 자연주의로 돌아섰다.[4] 빈센트 반 고흐가 그를 만나려 했지만 실패했고, 네덜란드에서 돌아온 그는 밀리치의 몰찬 백작 부인의 요청으로 실레시아에서 첫 의뢰 작품인 마을 풍경을 그렸다.

''세헤페닝겐의 옛집들'', 1897


1884년, 리버만은 갈등을 예상하면서도 베를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베를린이 가장 큰 미술 시장이 위치한 수도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뮌헨의 전통을 부담스러워했다.[11] 1884년 5월, 그는 마르타 마르크발트(1857~1943)와 약혼하고,[12][13] 9월 14일에 결혼했다. 부부는 동물원 북쪽 끝 인 덴 젤텐 11번지에서 살았고, 이탈리아 대신 브라운슈바이크, 비스바덴을 거쳐 네덜란드 세헤페닝겐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요제프 이즈라엘스와 합류하여 라렌 (노르트홀란트)에서 안톤 마우베를 만났고, 델덴, 하를렘, 암스테르담을 방문하며 연구와 아이디어를 수집했다.

베를린에서 리버만은 베를린 예술가 협회에 받아들여졌고, 훗날 적수가 된 안톤 폰 베르너도 그의 입회에 찬성했다. 1885년 8월, 외동딸 케테가 태어났고, 그는 아버지 역할에 전념하며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칼과 펠리시 베른슈타인 부부의 집에서 에두아르 마네에드가 드가의 그림을 보며 베를린 예술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막스 클링거, 아돌프 멘젤, 게오르크 브란데스, 빌헬름 보데, 테오도르 몸젠, 에른스트 쿠르티우스, 알프레드 리히트바르크 등이 그곳을 드나들었고, 함부르크 미술관 관장 리히트바르크는 리버만의 인상파적 잠재력을 일찍이 알아봤다.

1886년, 8년 만에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전시회에 참가하여 《암스테르담 고아원의 한가로운 시간》, 《암스테르담 알트만하우스》, 《사면의 은총》을 선보였다. 《사면의 은총》은 신혼여행 중 요제프 이즈라엘스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음울하고 분위기 있는 배경에서 기도하는 네덜란드 농민 가족을 그린 작품이다. "여론 형성자" 루트비히 피체는 리버만을 위대한 재능과 현대성의 대표자로 묘사했다.

1886년 여름, 마르타 리버만이 딸과 요양을 간 동안, 리버만은 네덜란드 라렌에서 농가에서 원료 삼베로 아마가 만들어지는 것에 감명을 받아 스케치하고 유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베를린 스튜디오에서 더 큰 형식의 그림을 위한 연구를 구성하여 1887년 봄에 완성했다. 집단 작업 묘사는 일상생활에서 "영웅적으로 참을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1887년 5월, 파리 살롱에 전시된 그림은 낮은 박수를 받았지만, 뮌헨 국제 기념 전시회에서 한 비평가는 "힘든 노동의 단조로움으로 인한 둔한 허약함의 실제 묘사"라고 묘사했다. 반면 아돌프 멘젤은 그를 "사람을 만들고 모형을 만들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에밀 하일부트는 "자연주의와 막스 리버만에 대한 연구"에서 그를 "독일의 새로운 예술의 가장 용감한 선구자"라고 칭송했다.[11] 1888년 빌헬름 1세 사망 후 프리드리히 3세가 즉위했지만 99일 만에 사망했다. 리버만은 바트 쾨젠에서 프리드리히 3세를 위한 허구의 추도식을 그리며 호엔촐레른 가문 군주제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드러냈다.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파리 세계 박람회에 독일인 심사위원으로 임명되면서 베를린에서 정치적 사건을 야기했다. 프로이센 교육부 장관 구스타프 폰 고슬러의 허락을 받았지만, 신문 ''라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참여에 반대했다.[12] 리버만은 멘젤, 라이블, 빌헬름 트뤼브너, 프리츠 폰 우데와 함께 독일 회화의 최초 경비대를 선보일 계획이었고, 독일 언론은 그가 혁명의 사상을 제시했다고 비난했다. 멘젤의 지지로 프랑스에서 비공식적인 독일 예술의 첫 발표가 이루어졌고, 리버만은 명예 훈장과 소시에테 데 보자르 입회로 영예를 안았지만, 프로이센 정부를 고려하여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거절했다.[12]

1889년, 카트비크를 여행하며 《염소와 함께 있는 여자》를 통해 사회적 환경을 벗어나 더 쉬운 삶의 이미지로 전환했다. 1890년, 함부르크에서 알프레드 리히트바르크의 주선으로 여러 위촉을 받았고, 성 게오르크의 키르헨알레에 있는 파스텔 그림과 첫 초상화 위촉을 받았다. 할스의 그림을 바탕으로 완성한 칼 프리드리히 페터센 시장의 초상화는 묘사의 자연스러움 때문에 의뢰인의 분노를 샀고, 리히트바르크는 "실패"로 여겼다. 반면 《염소와 함께 있는 여자》는 1891년 뮌헨 미술 협회 전시회에서 금메달을 받았다.[14]

1차 세계 대전 발발 3주 후, 67세의 리버만은 "가능한 한 차분하게 작업을 계속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일반적인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썼다.[11] 그는 파울 카시레르가 발행하는 ''크리크차이트 – 쿤스트러플뤼크블레터''를 위해 그림을 그리며 예술적인 전쟁 선전에 헌신했다. 초판에는 빌헬름 2세의 "당 연설"을 계기로 베를린 시티 팰리스 앞에 모인 군중을 묘사한 석판화가 실렸다. 리버만은 황제의 말을 국가적 대의에 봉사하고 사회적 장벽을 낮추라는 요청으로 이해했고, 유대인이자 예술가로서 이중적인 아웃사이더 역할이 제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의 성 평화 정책과 동일시했고, 1917년에는 그를 석판화로 묘사했다.

1914년 가을, 리버만은 독일의 전쟁 범죄를 부인하는 "문화계에!"라는 호소문에 서명한 93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전쟁 초에는 두 번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조국과의 연대감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라고 자기 비판적으로 말했다. 그는 1914년 빌헬름 솔프 의장 하의 독일 협회에 가입하여 베트만 홀베크 총리의 성 평화 정책을 지지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바안제에 있는 시골집으로 물러났지만, 초상화는 카를 폰 뷔로와 같이 군부에 국한되었다. 전쟁 전부터 베를린 상류층의 초상화가였던 그는 방대한 초상화 작품을 통해 시대 화가로서의 명성을 굳혔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율리우스 마이어-그라페 등에게 비판받았다.[12]

1915년과 1917년, 비스바덴에서 두 차례 스파 체류를 제외하고 베를린을 떠나지 않았다. 1913년 이후 네덜란드 대신 바안제에서 여름을 보냈고, 겨울에는 파리제 플라츠에서 살았다. 1915년, 딸 카테 리버만은 베트만 홀베크의 고문 쿠르트 리즐러와 결혼했다. 같은 해 안톤 폰 베르너와 사촌 에밀 라테나우가 사망하며 창립 세대가 헤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1916년 4월, 리버만의 수필 "회화의 환상"이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미적 관점이 오늘날보다 더 혼란스러웠을까요?"라고 썼다. 1916년 ''크리크차이트''가 "빌더만"으로 이름을 바꾸자 참여를 포기하고, 괴테의 소설과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품집''에 대한 삽화 작업을 시작했지만, 드라마의 전환점에서 분위기를 묘사하는 스타일상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10년 동안 중단했다.

1917년,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는 그의 70세 생일에 대규모 회고전을 열어 200점 가까운 그림을 전시했다. 율리우스 엘리아스는 "대관식"이라고 칭송했고, 국립 미술관 관장 루드비히 유스티는 그에게 자신의 캐비닛을 약속했다. 빌헬름 2세는 전시회에 동의하고 붉은 독수리 훈장 3등급을 수여했으며, 발터 라테나우는 "리버만에게는 새로운 대도시 기계화된 프로이센이 스스로를 그립니다."라고 썼다.

1918년 1월 18일, 국립 미술관 막스 리버만 캐비닛 개관식에서 프리드리히 슈미트-오트가 취임사를 했다. 몇 주 후 베를린에서 5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였고, 11월 혁명 때 리버만은 파리제 플라츠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왕당파의 기관총이 집에 설치되어 혁명군이 공격했고, 1층 벽을 뚫고 응접실로 총알이 날아온 후 방어자들은 항복했다. 리버만은 귀중한 그림 컬렉션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딸의 집으로 이사했다. 그는 프로이센의 남녀평등 선거권 도입과 민주적 의회 개혁을 옹호했지만, "썩은 것이긴 하지만 온 세상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1917년 베트만 홀베크의 퇴임을 후회했고 공화국화를 놓친 기회로 보았다. "베를린은 누추하고, 더럽고, 저녁에는 어둡고, […] 죽은 도시"라고 묘사했다.[11]

1차 세계 대전과 혁명 이후, 1920년 리버만은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회장직을 맡았다. 분리파들은 해체될 때까지 병행하여 존재했고, 리버만은 표현주의를 포함한 다양한 경향을 아카데미 아래 통합하려 했다. 그는 "젊은 시절 인상주의의 거부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운동을 비난하는 데 신중할 것"이라고 말했다.[12] 민주적인 구조, 자유로운 교육 시스템, 대중의 관심을 높이는 데 성공하여 막스 페히슈타인, 카를 호퍼, 하인리히 질레, 오토 딕스, 카를 슈미트-로틀루프를 아카데미에 받아들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기간 동안 리버만은 초상화가로서 끊임없이 수요가 있었고,[4] 1902년부터 습관처럼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4] 1922년, 발터 라테나우 암살에 충격을 받은 그는 정원의 그림과 전사한 유대인 병사들을 기리는 그림, 하인리히 하이네의 "바하라흐의 랍비"를 위한 석판화를 제작했다. 1923년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았고, 1924년 남동생 펠릭스 리버만과 친척 후고 프뢰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신과 정원 속으로 물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전"으로 여겨지거나 구식으로 비판받는 자신의 작품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진보와 정치적 예술을 옹호했다. 오토 딕스의 "참호"를 "전후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라고 지지했고, 표현주의자들을 국립미술관에 전시한 루트비히 유스티와 논쟁했다. 1926년, 유대 자유주의 신문에 글을 써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유대인 어린이 집 "아하와"와 독일 유대인 구호 협회를 지원했다.

1927년, 80세 생일을 맞아 언론과 예술계는 그와 그의 작품을 축하했다. 베를린의 질레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하인리히 만, 토마스 만, 휴고 폰 호프만슈탈 등이 축하했고, 베를린은 100점이 넘는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작품은 고전으로 여겨졌고, 이전에는 도발적이었던 스타일은 지나간 시대의 기록처럼 보였다. 그는 "우리 시대의 저주는 새로운 것에 대한 중독이다. [...]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이 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1928년 하계 올림픽 예술 경연 대회의 1928년 하계 올림픽 예술 경연 대회 그림 부문에 포함되었다.[15]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 초상화, 1927


베를린 시는 그에게 명예 시민권을 부여했지만 시의회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독일 국민이 당신에게 빚진 감사의 표시"로 독일 라이히의 독수리 방패로 그를 존경했고, 발터 폰 쿠델 내무장관은 "국가에 대한 공로"라는 글이 새겨진 금색 주 메달을 수여했다. 1927년 말, 리버만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묘사하며 "유대인이 라이히 대통령을 그리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저 화가일 뿐이며, 그림이 유대교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썼다.[11]

리버만은 평생 화가, 사진가, 캐리커처리스트들에게 인기 있는 주제였다. 로비스 코린트, 안데르스 존, 얀 베트에게 그림을 그렸고, 이바와 니콜라 페르샤이트에게 사진을 찍혔으며, 하인리히 질레 등이 캐리커처를 그렸다. 프리츠 클림슈는 1912년 청동 흉상을 만들었다.

1932년, 병으로 인해 아카데미 회장직에서 사임했지만 명예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친구 페르디난트 자우어브루흐의 치료로 회복된 그는 자우어브루흐의 초상화를 그리며 초상화 작품의 결론이자 절정을 이루었고, 마지막으로 개별적인 새로운 모티프로 향했다.

1998년, 리버만은 베를린 분리파 회장을 역임했다.[4] 분리파는 근대 미술을 장려하기 위해 독립적인 전시 협회를 결성한 진보적인 예술가 그룹이었다. 리버만은 로비스 코린트, 어니스트 오플러, 막스 슬레보그트와 같은 저명한 독일 인상주의 화가들을 베를린 분리파에 영입했다. 1908년에는 설립자 중 한 명이자 분리파의 중요한 기둥이었던 발터 레이스티코가 사망했다. 1909년 봄부터 리버만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는 카를스바트에서 요양을 받았지만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사이에 세대 갈등이 발생했다. 1910년 리버만이 이끄는 분리파 이사회는 표현주의 작품 27점을 거부했고, 과거 반항아였던 그는 이제 보수적인 대변인으로 보였다. 동시에 그는 분리파 운동의 해체를 시작했다. 이 갈등에서 상대편을 대표했던 에밀 놀데는 리버만을 향해 진보에 대한 근본적인 적대감과 분리파 내 독재적 권력을 행사했다고 비난했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년 분리파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조르주 브라크야수파의 작품을 처음으로 전시했다. 분리파 위원회는 회장을 지지했고 놀데의 접근 방식을 "뻔뻔한 위선"이라고 불렀다. 총회가 소집되었고, 놀데의 제명에 대해 40대 2로 찬성표를 얻었다. 리버만 자신은 제명에 반대표를 던졌고, 변론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작가의 제명에 절대 반대합니다. 비슷한 동기가 [...] 이른바 '젊은 반대파'와 같은 [...]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놀데의 명예를 구하기 위한 리버만 자신의 노력을 통해 그는 자신의 관용을 분명히 하고자 했지만, 분리파 운동의 분열은 막을 수 없었다. 베를린 화가 게오르크 타페르트의 주도로 막스 페히슈타인과 놀데를 포함한 다른 예술가들이 뒤따라 새로운 분리파가 결성되었다. 5월 15일, 그들은 "1910년 베를린 분리파에 의해 거부된 작품"이라는 제목으로 첫 전시회를 열었다. 다리와 노이에 퀴스트러페어라이닝 뮌헨의 화가들이 새로운 분리파에 합류했다. 1911년 봄, 리버만은 베를린에서 분리파 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로마로 피신했다. 그의 친구 요제프 이즈라엘스의 죽음도 이때 일어났다. 그의 리더십 스타일에 대한 비판은 점점 더 커져 결국 그의 내부에서도 나왔다. 1911년 11월 16일, 리버만 자신이 베를린 분리파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막스 베크만, 막스 슬레보그트, 아우구스트 가울도 함께 사임했다. 총회는 리버만을 명예 회장으로 선출하고 로비스 코린트에게 분리파의 지도력을 맡겼다. 이 결정은 분리파의 종말을 예고하고 독일 인상주의의 쇠퇴를 확정지었다.

세기말 베를린에서 새로운 미술 양식을 추구하는 유겐트슈틸이 일어나, 열성가들이 1895년 베를린에서 문예잡지 『Pan』을 창간하였다. 리버만은 창립자 중 한 명으로서 표지 그림의 판의 머리를 프란츠 폰 슈투크와 함께 그렸고 판화를 기증하였다.

코린트가 의장을 맡은 1912년 리버만 이후 첫 번째 분리파 연례 전시회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1913년 초 코린트는 이사회 전체와 함께 분리파 의장직에서 사임했고, 파울 카시레르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명예 회장은 비예술가의 임명을 막으려고 했지만, "다시 나서고 싶지 않았다". 카시레르는 1913년 연례 전시회에서 총회에서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진 회원들을 제외시켰다. 예상치 못하게 로비스 코린트가 그들 편에 섰다. 리버만과 분리파의 다른 창립 멤버들은 이 두 번째 위기에서 협회를 떠났다. 1914년 2월, 최초의 분리파 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자유 분리파"가 마침내 설립되었다.[12] 리버만과 코린트 사이에는 잔여 분리파와 자유 분리파를 상징하는 적대감이 있었다. 코린트는 사망할 때까지 리버만을 상대로 행동을 취하려 했고, 그의 자서전에서도 세상의 주목에서 물러나 반제 호숫가의 정원에 헌신했던 동료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드러냈다.

1933년 1월 30일,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다. 나치들이 브란덴부르크 문을 행진하며 승리를 자축하는 것을 지켜보던 리버만은 "토할 만큼 먹을 수가 없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

리버만은 1932년 6월 긴급 호소문에 서명한 카테 콜비츠, 하인리히 만, 에리히 케스트너처럼 변화하는 문화 정책에 맞서 스스로를 변호할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도망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유대인인 나에게 그것은 비겁함으로 여겨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유대인 예술가들처럼 리버만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고 그의 작품들은 공공 컬렉션에서 제거되었다.[16]

1933년 5월 7일, 리버만은 명예 회장직, 상원 의원직,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 회원직에서 사임하며 언론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는 긴 생애 동안 온 힘을 다해 독일 예술에 봉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제 생각에 예술은 정치나 혈통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저는 더 이상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에 속할 수 없습니다... 제 견해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2]

1933년 5월부터 스위스 은행가 아돌프 뢰어의 조언에 따라 그는 자신의 미술품 컬렉션 중 가장 중요한 14점을 빌헬름 바르트만이 관장하는 취리히 미술관에 보관할 수 있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물러났고, 그의 동료들 중 거의 아무도 그를 지지하고 충성을 지키지 않았다. 카테 콜비츠만이 그에게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마지막 자화상은 1934년에 그려졌다. 리버만은 마지막 방문객 중 한 명에게 "나는 증오 때문에 살고 있다. [...] 나는 더 이상 이 방 창문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주변의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지 않다."라고 고백했다.

리버만은 1935년 2월 8일 파리제 광장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카테 콜비츠는 그가 저녁 7시에 조용히 잠들었다고 전했다.[17] 사후 가면은 당시 히틀러가 선호하던 조각가였던 아르노 브레커가 제작했고, 사진작가 샬로테 로어바흐가 석고 가면을 촬영했다.

이미 통제된 언론은 그의 죽음을 보도하지 않았고,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지나가듯 언급했을 뿐이다. 그 사이 나치의 도구가 된 예술 아카데미는 전임 회장을 기리는 것을 거부했다. 1935년 2월 11일 쇠네하우저 알레 유대인 공동묘지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아카데미나 1927년부터 그가 명예 시민이었던 도시에서도 공식 대표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게슈타포는 예술의 자유를 위한 시위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장례식 참석을 미리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100명의 친구와 친척들이 참석했다. 조문객들 중에는 카테 콜비츠, 한스 푸르만과 그의 아내 마틸데 폴몰러-푸르만, 콘라트 폰 카르도르프, 레오 클라인 폰 디폴트, 오토 나겔, 페르디난트 자우어브루흐와 그의 아들 한스 자우어브루흐, 브루노 카시레르, 게오르크 콜베, 막스 J. 프리들랜더, 프리드리히 자레, 아돌프 골드슈미트 등이 있었다.[18] 사울 프리들랜더에 따르면, 장례식에 참석한 "아리아인" 예술가는 단 세 명뿐이었다.[18] 카를 셰플러는 장례식 연설에서 리버만이 위대한 예술가일 뿐 아니라 그가 상징하는 시대를 매장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딸 카타리나 리즐러는 1938년 미국으로 망명했다.[21]

리버만은 자신의 작품 외에도 중요한 미술품 수집가였으며, 특히 프랑스 인상파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독일의 수집가였다.[19] 리버만과 그의 많은 수집가들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와 그 추종자들에게 박해를 받았다. 유대인 수집가들의 미술품이 도난당했고, 많은 작품들이 아직까지 회수되지 않았다.[20] 리버만의 광범위한 소장품은 그가 사후 아내 마르타에게 유증했으나, 나중에 그녀의 아파트에서 약탈당했다.[21] 마르타는 1943년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로 강제 이송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살했다.[22] 약 6개월 후, 게슈타포는 리버만의 유명한 개인 미술품 컬렉션 대부분을 압수했다. 파리제 광장에 있는 리버만 궁전은 곧 폐허로 변했다.

독일 분실 미술품 재단은 분실 미술품 데이터베이스에 막스 리버만이 제작하거나 소장했던 수백 점의 미술품을 목록으로 올려놓았다.[23][24]

나치가 약탈한 미술품에 대한 반환 청구는 막스 리버만의 상속인과 그의 유대인 후원자들의 상속인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들의 소장품은 약탈당했다.[25]

리버만 가족은 수년 동안 게슈타포가 마르타 리버만의 아파트에서 압수한 물품 목록에 있었던 마르타 리버만의 초상화를 회수하려고 노력해왔다.[26]

2013년 뮌헨에서 히틀러의 미술상인 힐데브란트 구를리트의 아들의 미술품 비축이 발견되었을 때, 나치에 의해 약탈된 것으로 밝혀진 최초의 미술품 중 하나는 유대인 수집가 다비드 프리드만이 소유했던 리버만의 ''해변의 두 기수''였다.3. 1. 유년 시절과 교육 막스 리버만은 부유한 유대인 직물 제조업자이자 은행가인 아버지 루이스 리버만과 어머니 필리핀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할아버지 요제프 리버만은 섬유 기업가로 리버만 가문의 상당한 재산을 일군 인물이었다. 막스가 태어난 지 사흘 만에 프로이센 유대인법(1847년)이 발효되어 프로이센의 유대인들에게 더 큰 권리가 주어졌다. 그는 형 게오르크 리버만과 동생 펠릭스 리버만을 포함하여 다섯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1851년 리버만 가족은 베렌슈트라세로 이사했고, 막스는 인근 인문학 유아학교에 다녔다. 그는 이 학교를 비롯하여 이후 모든 교육기관을 곧 싫어하게 되었다.[15]

초등학교를 마친 후 리버만은 도로테엔슈테티셰 레알슐레로 진학했다. 그는 점점 더 그림을 그리는 데 시간을 보냈고, 그의 부모는 조심스럽게 이를 격려했다. 막스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 루이스는 브란덴부르크 문 바로 북쪽에 있는 파리 광장 7번지에 있는 인상적인 리버만 궁전을 구입했다.[2]

1859년 막스 리버만은 어머니와 함께 화가 안토니에 폴크마르를 찾았다. 지루함을 느낀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안토니에 폴크마르는 그의 재능을 발견했다. 그의 부모는 그림에 대해 열정적이지 않았지만, 막스는 방과 후에 에두아르트 홀바인과 칼 슈테펙에게 개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가족 내에서 막스는 특별히 똑똑한 아이로 여겨지지 않았다. 학교에서 그는 종종 다른 생각에 잠겨 선생님의 질문에 부적절한 답변을 했고, 반 친구들의 놀림을 받았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애정과 지지를 보여주었지만, 그는 형 게오르크에 대한 부모의 더 큰 관심을 알고 있었다. 막스의 그림 재능은 그의 부모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그의 작품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아버지는 13세의 아들이 리버만이라는 이름으로 서명하는 것을 금지했다.

중등학교로 루이스 리버만은 그의 아들들을 위해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아들들이 공부했던 프리드리히베르더슈 김나지움을 선택했다. 1862년 15세의 막스는 젊은 사회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의 연설에 참석했는데, 그의 열정적인 사상은 백만장자의 아들을 매료시켰다. 1866년 막스 리버만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15] 졸업 시험에서 그는 반에서 네 번째였지만, 가족에서는 항상 "나쁜 학생"으로 느꼈다.[3]

고등학교 졸업 후 리버만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 입학하여 화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화학 수업은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구실에 불과했다. 강의 대신 동물원에 나가 그림을 그렸다. 칼 슈테펙 밑에서 그는 기념비적인 전투 그림 디자인에 조수 역할을 했다.[12] 그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지만, "학업 부진"으로 1868년 1월 22일에 제적당했다. 1869년 그의 부모는 그가 바이마르의 대공령 작센 예술학교에서 그림과 드로잉을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그곳에서 벨기에 역사화가 페르디난드 파우웰스의 제자가 되었고, 파우웰스는 그에게 렘브란트의 작품에 대한 감상을 심어주었다. 렘브란트는 젊은 리버만의 화풍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1870~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그는 요한니터(성 요한 기사단 바이에른 지부)에 자원하여 메츠 포위 공격 중 의무병으로 복무했다. 전쟁터에서의 경험은 젊은 예술가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의 전쟁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들었다.

1871년 리버만은 뒤셀도르프에서 미하이 뭉카치를 만났다. 그의 형 게오르그의 지원을 받아 그는 처음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헤베닝언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빛, 사람들, 풍경에서 영감을 받았다.

거위털 뽑는 여인들 (1872)


귀국 후 몇 달 만에 그의 첫 번째 대작인 ''Die Gänserupferinnen''(거위털 뽑는 여인들)이 완성되었다. 어두운 색조로 그려진 이 그림은 거위털을 뽑는 평범한 활동을 보여준다.[11] 1872년 리버만이 이 그림으로 함부르크 예술 전시회에 참가했을 때, 그의 독특한 주제는 혐오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비평가들은 그의 능숙한 화풍을 칭찬했지만, 그는 "추한 것의 화가"로 비판받았다. 같은 해 베를린에서 전시되었을 때도 비슷한 의견이 나왔지만,[4] 철도 거물 베텔 헨리 스트라우스버그가 구매했다. 리버만은 자신의 첫 번째 화풍을 발견했다. 즉, 굴욕적인 동정심이나 낭만주의 없이 노동자들을 사실적이고 감상적이지 않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1873년 리버만은 바이마르 외곽에서 사탕무를 수확하는 농부들을 보았다. 그는 이 주제를 유화로 담으려고 했지만, 카를 구소가 비꼬는 투로 그 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조언하자 리버만은 캔버스에서 그림을 지워 버렸다. 그는 무력감과 의욕 상실을 느꼈다. 리버만은 비엔나의 유명한 역사 및 살롱 화가 한스 마카르트를 방문하기로 결정했지만, 이틀 만에 머물렀다. 대신 그는 당시 낙후되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겼던 독일과 그 예술계에 등을 돌리기로 결심했다.

3. 2. 초기 활동과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향

고등학교 졸업 후, 리버만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 입학하여 화학을 전공했지만, 실제로는 예술에 전념하기 위한 구실이었다. 그는 동물원에서 그림을 그렸고, 카를 슈테펙 밑에서 기념비적인 전투 그림 디자인 조수로 일하면서 빌헬름 보데를 만났다.[12]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지만 "학업 부진"으로 제적당했다. 아버지와의 갈등 끝에 1869년, 부모님의 허락으로 바이마르의 대공령 작센 예술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페르디난드 파우웰스의 제자가 되었고, 렘브란트의 작품에 대한 감상을 배우며 화풍에 큰 영향을 받았다.

1870~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의무병으로 참전한 경험은 그에게 충격을 주었고, 전쟁에 대한 열정을 잃게 했다.[12] 1871년, 뒤셀도르프에서 미하이 뭉카치를 만나면서 일상 장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형의 지원으로 네덜란드를 여행하며 빛, 사람들, 풍경에서 영감을 얻었다.

귀국 후, 첫 대작 ''거위털 뽑는 여인들''(Die Gänserupferinnen)을 완성했다. 이 그림은 평범한 활동을 어두운 색조로 묘사했으며,[11] 뭉카치의 자연주의와 역사화의 요소를 통합했다. 그의 스승 파우웰스는 그를 해고했지만, 1872년 함부르크 예술 전시회에서 그의 그림은 혐오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비평가들은 그의 능숙한 화풍을 칭찬했지만, "추한 것의 화가"로 비판받았다. 베를린 전시회에서도 비슷한 반응이었지만,[4] 철도 거물 베텔 헨리 스트라우스버그가 구매했다. 리버만은 굴욕적인 동정심이나 낭만주의 없이 노동자들을 사실적이고 감상적이지 않게 묘사하는 자신의 첫 화풍을 발견했다.

1873년, 사탕무를 수확하는 농부들을 유화로 담으려 했으나 카를 구소의 조언으로 포기하고, 비엔나의 한스 마카르트를 방문했지만 이틀 만에 떠났다. 그는 독일과 그 예술계에 등을 돌리기로 결심했다.

1873년 12월, 파리로 이주하여 몽마르트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사실주의 및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고자 했으나, 프랑스 화가들은 그와 접촉을 거부했다. 1874년 파리 살롱에 '거위 털 뽑기'를 출품했지만,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1874년 여름, 퐁텐블로 숲 근처 바르비종에서 시간을 보내며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야외 그림 '플랭에르' 기법에 관심을 가졌다.[12] 그는 문카치의 기법에서 벗어나 바르비종파의 기법에 더 관심을 가졌고, '바르비종의 감자 수확'을 그렸지만 완성하는 데 수년이 걸렸다. 그는 밀레를 따르고자 했지만, 당대 비평가들은 그가 밀레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12]

1875년, 네덜란드 잔드포르트에서 프란스 할스의 그림을 모사하며 밝고 자유로운 화풍을 개발했다.[4] 1875년 가을 파리로 돌아와 더 큰 작업실로 이사한 후, '목욕하는 어부 소년들'을 그렸고, 이 주제는 수년 후에도 다시 다루게 되었다.

1876년 여름, 네덜란드에서 요제프 이즈라엘스(Jozef Israëls)와 헤이그파를 소개받았다. 그의 그림 '네덜란드 재봉학교'에서 인상파적인 방식으로 빛의 효과를 사용했다. 암스테르담의 포르투갈 회당을 알게 되면서 유대인 기원에 대한 회화적 분석으로 이어졌고, 암스테르담 고아원에 대한 연구도 이때 이루어졌다.

부모와 자신에 대한 책임감에 시달리던 리버만은 파리에서 심한 우울증을 겪었고, 파리 살롱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파리의 예술계는 그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었고, 쇼비니즘적인 이유로 그를 거부했다. 그의 그림은 "프랑스적"이 되지 못했고, 네덜란드에서의 체류가 그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리버만은 파리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3. 3. 베를린 분리파와 전성기

1898년 리버만은 베를린 분리파 회장을 역임했다.[4] 분리파는 근대 미술을 장려하기 위해 독립적인 전시 협회를 결성한 진보적인 예술가 그룹이었다. 리버만은 로비스 코린트, 어니스트 오플러, 막스 슬레보그트와 같은 저명한 독일 인상주의 화가들을 베를린 분리파에 영입했다. 1908년에는 설립자 중 한 명이자 분리파의 중요한 기둥이었던 발터 레이스티코가 사망했다. 1909년 봄부터 리버만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는 카를스바트에서 요양을 받았지만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사이에 세대 갈등이 발생했다. 1910년 리버만이 이끄는 분리파 이사회는 표현주의 작품 27점을 거부했고, 과거 반항아였던 그는 이제 보수적인 대변인으로 보였다. 동시에 그는 분리파 운동의 해체를 시작했다. 이 갈등에서 상대편을 대표했던 에밀 놀데는 리버만을 향해 진보에 대한 근본적인 적대감과 분리파 내 독재적 권력을 행사했다고 비난했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년 분리파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조르주 브라크야수파의 작품을 처음으로 전시했다. 분리파 위원회는 회장을 지지했고 놀데의 접근 방식을 "뻔뻔한 위선"이라고 불렀다. 총회가 소집되었고, 놀데의 제명에 대해 40대 2로 찬성표를 얻었다. 리버만 자신은 제명에 반대표를 던졌고, 변론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작가의 제명에 절대 반대합니다. 비슷한 동기가 [...] 이른바 '젊은 반대파'와 같은 [...]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놀데의 명예를 구하기 위한 리버만 자신의 노력을 통해 그는 자신의 관용을 분명히 하고자 했지만, 분리파 운동의 분열은 막을 수 없었다. 베를린 화가 게오르크 타페르트의 주도로 막스 페히슈타인과 놀데를 포함한 다른 예술가들이 뒤따라 새로운 분리파가 결성되었다. 5월 15일, 그들은 "1910년 베를린 분리파에 의해 거부된 작품"이라는 제목으로 첫 전시회를 열었다. 다리와 노이에 퀴스트러페어라이닝 뮌헨의 화가들이 새로운 분리파에 합류했다. 1911년 봄, 리버만은 베를린에서 분리파 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로마로 피신했다. 그의 친구 요제프 이즈라엘스의 죽음도 이때 일어났다. 그의 리더십 스타일에 대한 비판은 점점 더 커져 결국 그의 내부에서도 나왔다. 1911년 11월 16일, 리버만 자신이 베를린 분리파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막스 베크만, 막스 슬레보그트, 아우구스트 가울도 함께 사임했다. 총회는 리버만을 명예 회장으로 선출하고 로비스 코린트에게 분리파의 지도력을 맡겼다. 이 결정은 분리파의 종말을 예고하고 독일 인상주의의 쇠퇴를 확정지었다.

세기말 베를린에서 새로운 미술 양식을 추구하는 유겐트슈틸이 일어나, 열성가들이 1895년 베를린에서 문예잡지 『Pan』을 창간하였다. 리버만은 창립자 중 한 명으로서 표지 그림의 판의 머리를 프란츠 폰 슈투크와 함께 그렸고 판화를 기증하였다.

코린트가 의장을 맡은 1912년 리버만 이후 첫 번째 분리파 연례 전시회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1913년 초 코린트는 이사회 전체와 함께 분리파 의장직에서 사임했고, 파울 카시레르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명예 회장은 비예술가의 임명을 막으려고 했지만, "다시 나서고 싶지 않았다". 카시레르는 1913년 연례 전시회에서 총회에서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진 회원들을 제외시켰다. 예상치 못하게 로비스 코린트가 그들 편에 섰다. 리버만과 분리파의 다른 창립 멤버들은 이 두 번째 위기에서 협회를 떠났다. 1914년 2월, 최초의 분리파 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자유 분리파"가 마침내 설립되었다.[12] 리버만과 코린트 사이에는 잔여 분리파와 자유 분리파를 상징하는 적대감이 있었다. 코린트는 사망할 때까지 리버만을 상대로 행동을 취하려 했고, 그의 자서전에서도 세상의 주목에서 물러나 반제 호숫가의 정원에 헌신했던 동료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드러냈다.

3. 4. 나치 탄압과 말년

1933년 1월 30일,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다. 나치들이 브란덴부르크 문을 행진하며 승리를 자축하는 것을 지켜보던 리버만은 "토할 만큼 먹을 수가 없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

리버만은 1932년 6월 긴급 호소문에 서명한 카테 콜비츠, 하인리히 만, 에리히 케스트너처럼 변화하는 문화 정책에 맞서 스스로를 변호할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도망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유대인인 나에게 그것은 비겁함으로 여겨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유대인 예술가들처럼 리버만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고 그의 작품들은 공공 컬렉션에서 제거되었다.[16]

1933년 5월 7일, 리버만은 명예 회장직, 상원 의원직,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 회원직에서 사임하며 언론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는 긴 생애 동안 온 힘을 다해 독일 예술에 봉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제 생각에 예술은 정치나 혈통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저는 더 이상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에 속할 수 없습니다... 제 견해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12]

1933년 5월부터 스위스 은행가 아돌프 뢰어의 조언에 따라 그는 자신의 미술품 컬렉션 중 가장 중요한 14점을 빌헬름 바르트만이 관장하는 취리히 미술관(Kunsthaus Zürich)에 보관할 수 있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물러났고, 그의 동료들 중 거의 아무도 그를 지지하고 충성을 지키지 않았다. 카테 콜비츠만이 그에게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마지막 자화상은 1934년에 그려졌다. 리버만은 마지막 방문객 중 한 명에게 "나는 증오 때문에 살고 있다. [...] 나는 더 이상 이 방 창문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주변의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지 않다."라고 고백했다.

리버만은 1935년 2월 8일 파리제 광장(Pariser Platz)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카테 콜비츠는 그가 저녁 7시에 조용히 잠들었다고 전했다.[17] 사후 가면은 당시 히틀러가 선호하던 조각가였던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가 제작했고, 사진작가 샬로테 로어바흐(Charlotte Rohrbach)가 석고 가면을 촬영했다.

이미 통제된 언론은 그의 죽음을 보도하지 않았고,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지나가듯 언급했을 뿐이다. 그 사이 나치의 도구가 된 예술 아카데미는 전임 회장을 기리는 것을 거부했다. 1935년 2월 11일 쇠네하우저 알레 유대인 공동묘지(Schönhauser Allee Jewish cemetery)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아카데미나 1927년부터 그가 명예 시민이었던 도시에서도 공식 대표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게슈타포는 예술의 자유를 위한 시위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장례식 참석을 미리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100명의 친구와 친척들이 참석했다. 조문객들 중에는 카테 콜비츠, 한스 푸르만(Hans Purrmann)과 그의 아내 마틸데 폴몰러-푸르만(Mathilde Vollmoeller-Purrmann), 콘라트 폰 카르도르프(Konrad von Kardorff), 레오 클라인 폰 디폴트(Leo Klein von Diepold), 오토 나겔(Otto Nagel), 페르디난트 자우어브루흐(Ferdinand Sauerbruch)와 그의 아들 한스 자우어브루흐(Hans Sauerbruch), 브루노 카시레르(Bruno Cassirer), 게오르크 콜베(Georg Kolbe), 막스 J. 프리들랜더(Max J. Friedländer), 프리드리히 자레(Friedrich Sarre), 아돌프 골드슈미트(Adolph Goldschmidt) 등이 있었다.[18] 사울 프리들랜더(Saul Friedländer)에 따르면, 장례식에 참석한 "아리아인" 예술가는 단 세 명뿐이었다.[18] 카를 셰플러(Karl Scheffler)는 장례식 연설에서 리버만이 위대한 예술가일 뿐 아니라 그가 상징하는 시대를 매장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딸 카타리나 리즐러(Katharina Riezler)는 1938년 미국으로 망명했다.[21]

리버만은 자신의 작품 외에도 중요한 미술품 수집가였으며, 특히 프랑스 인상파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독일의 수집가였다.[19] 리버만과 그의 많은 수집가들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와 그 추종자들에게 박해를 받았다. 유대인 수집가들의 미술품이 도난당했고, 많은 작품들이 아직까지 회수되지 않았다.[20] 리버만의 광범위한 소장품은 그가 사후 아내 마르타에게 유증했으나, 나중에 그녀의 아파트에서 약탈당했다.[21] 마르타는 1943년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로 강제 이송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살했다.[22] 약 6개월 후, 게슈타포는 리버만의 유명한 개인 미술품 컬렉션 대부분을 압수했다. 파리제 광장에 있는 리버만 궁전은 곧 폐허로 변했다.

독일 분실 미술품 재단은 분실 미술품 데이터베이스에 막스 리버만이 제작하거나 소장했던 수백 점의 미술품을 목록으로 올려놓았다.[23][24]

나치가 약탈한 미술품에 대한 반환 청구는 막스 리버만의 상속인과 그의 유대인 후원자들의 상속인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들의 소장품은 약탈당했다.[25]

리버만 가족은 수년 동안 게슈타포가 마르타 리버만의 아파트에서 압수한 물품 목록에 있었던 마르타 리버만의 초상화를 회수하려고 노력해왔다.[26]

2013년 뮌헨에서 히틀러의 미술상인 힐데브란트 구를리트의 아들의 미술품 비축이 발견되었을 때, 나치에 의해 약탈된 것으로 밝혀진 최초의 미술품 중 하나는 유대인 수집가 다비드 프리드만이 소유했던 리버만의 ''해변의 두 기수''였다.[27][28][29]

브레슬라우 출신의 유명한 유대인 미술 수집가였던 막스 실버버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되었는데, 그가 소유했던 리버만의 여러 작품들이 나치에 의해 약탈당했다. 일부는 반환되었다.[30][31][32]

4. 예술적 특징과 영향

5. 관련 도서


  • Max Liebermann|막스 리버만de - 자비네 카르본 지음, 김라합 번역 - 웅진주니어, 2008년
  • 리버만, 막스; 골드, 알프레드. Karl Stauffer (1818-1890): seine Kunst|카를 슈테페크(1818-1890): 그의 예술de. 베를린: P. 카시레르, 1913. 1913년 10월 카를 슈테페크 저택 전람회 도록.[1]
  • (막스 리버만 저), 그의 삶
  • (알프레드 골드 저), 그의 작품
  • 리버만, 막스; 부쉬, 군터; 로리히트, 카를 헤르만. Phantasie in der Malerei: Schriften und Reden|회화 속의 환상: 저술과 연설de. 베를린: 부흐페어라크 데어 모르겐, 1986. 전기.[2]
  • 리버만, 막스. Max Liebermanns Garten|막스 리버만의 정원de. 함부르크 미술관, 2004.[3]
  • Zweig, Arnold|츠바이크, 아르놀트de. Herkunft und Zukunft?: 2 Essays zum Schicksal e. Volkes|기원과 미래?: 한 민족의 운명에 관한 두 개의 에세이de. 빈: 파이돈, 1929.[4] PDF판 발행처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 Freimann-Sammlung Univ.-Bibliothek, 2008,[5] 막스 리버만, 마르크 샤갈 사진 수록.

참조

[1] 뉴스 A dramatic life; the work, not quite so https://www.latimes.[...] 2021-11-28
[2] 뉴스 A Berlin Painter, Jewish and Proudly Assimilated https://www.nytimes.[...] 2006-03-20
[3] 논문 Nachwort http://dx.doi.org/10[...] Vervuert Verlagsgesellschaft 1988-12-31
[4] 간행물 Liebermann, Max
[5] 서적 Geschichte der Malerei im XIX. Jahrhundert G.J. Göschen'sche Verlagshandlung
[6] 학술지 Die ursprüngliche Fassung von Max Liebermanns: Der zwölfjährige Jesus im Tempel. Ein christliches Thema aus jüdischer Sicht
[7] 서적 Studien zum Frühwerk von Max Liebermann mit einem Verzeichnis der Gemälde und Ölstudien von 1866–1889 Georg Olms AG
[8] 서적 Max Liebermann's Jewish Heritage
[9] 서적 Antisemitismus im 19. Jahrhundert aus internationaler Perspektive https://www.vr-elibr[...] V&R unipress
[10] 서적 Max Liebermann – Der "Jüdische Maler" in Preußen. Der Begriff der Jüdischen Kunst in der Kunstgeschichte: Versuch einer Definition De Gruyter
[11] 서적 Max Liebermann: Modern Art and Modern Germany Ashgate
[12] 간행물 Liebermann, Max Duncker & Humblot
[13] 웹사이트 Martha Liebermann (Marckwald) http://www.geni.com/[...] 2018-01-02
[14] 논문 Gustav Adolf Hirn Sein Leben und seine Werke http://dx.doi.org/10[...] Springer Berlin Heidelberg 1912
[15] 웹사이트 Max Liebermann https://www.olympedi[...]
[16] 웹사이트 The Liebermann collection stored in the Wiesbaden CCP? https://returnedmast[...] 2014-06-29
[17] 서적 Die Tagebücher 1908–1943 btb 1935-02-09
[18] 서적 Das Dritte Reich und die Juden Beck’sche Reihe
[19] 웹사이트 Max Liebermann: Modern Art and Modern Germany https://www.lbi.org/[...] 2017-03-28
[20] 잡지 Kunsthandel: Mehr Licht in die Dunkelkammern von Museen https://www.beobacht[...] 2015-09
[21] 웹사이트 The Liebermann collection stored in the Wiesbaden CCP? https://returnedmast[...]
[22] 웹사이트 Newly Recovered Art Has Poignant Tale https://www.lootedar[...] Wall Street Journal
[23] 웹사이트 Lost Art Internet Database – Einfache Suche _ Max Liebermann http://www.lostart.d[...]
[24] 웹사이트 Unusual Case of Nazi-looted Artwork That Turned Up in Israel https://www.lootedar[...]
[25] 웹사이트 Nazi Controversy Stirred as Liebermann Heirs Slam Auction Sale https://www.lootedar[...]
[26] 웹사이트 She Tracked Nazi-Looted Art. She Quit When No One Returned It. https://www.lootedar[...] New York Times
[27] 웹사이트 First Painting Restituted from Gurlitt Hoard Goes Up for Auction https://news.artnet.[...] 2015-05-22
[28] 웹사이트 Reunion with looted painting is 'second victory against the Nazis' http://www.theguardi[...] 2015-05-27
[29] 웹사이트 First Two Works From Gurlitt Trove Returned https://news.artnet.[...] 2015-05-15
[30] 웹사이트 ART INSTITUTE TAKES INITIATIVE ON WORKS LOOTED IN NAZI ERA https://www.chicagot[...] 2000-03-10
[31] 웹사이트 Nähschule – Max Silberberg Heirs and Bündner Kunstmuseum Chur — Centre du droit de l'art https://plone.unige.[...]
[32] 웹사이트 Les musées suisses face au pillage nazi https://www.swissinf[...] 2013-11-07
[33] 웹사이트 The Liebermann-Villa http://www.lieberman[...]
[34] 웹사이트 Ein Stein für Martha Liebermann https://www.faz.net/[...] 2005-06-09
[35] 뉴스 Museum returns looted painting https://www.latimes.[...] 2011-09-09
[36] 웹사이트 20世紀西洋人名事典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9-07
[37] 논문 風景と音・音風景/人間と社会 : 耳を澄まして http://id.nii.ac.jp/[...] 大妻女子大学
[38] 문서 (제목 없음) # 내용만 있는 항목이므로 제목을 지정할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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