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사르하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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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사르하돈은 기원전 713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669년에 사망한 아시리아의 왕으로, 센나케리브의 아들이자 아슈르바니팔의 아버지이다. 그는 32세에 아시리아 왕위에 올라 이집트 원정, 바빌론 재건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킴메르인과 시돈의 반란을 진압하고, 메디아, 아랍 등 주변국과의 외교를 통해 제국의 안정을 꾀했다. 또한, 아들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쉬-슈마-우킨을 각각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후계자로 지명하여 왕위 계승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만성적인 질병과 반란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렸으며, 결국 이집트 원정 중에 사망했다. 에사르하돈은 아시리아의 가장 위대한 왕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통치 기간은 신아시리아 제국의 번영에 중요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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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사르하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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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호 | 아시리아 왕 바빌론 왕 수메르와 아카드 왕 만왕의 왕 이집트와 쿠시 사방 세계의 왕 우주의 왕 |
| 아카드어 (원어) | 아슈르-아하-이디나 |
| 아카드어 (음역) | Aššur-aḫa-iddina |
| 아카드어 (다른 이름) | 아슈르-에텔-일라니-무킨니 |
| 통치 기간 | 기원전 681년 – 기원전 669년 |
| 선임자 | 센나케리브 |
| 후임자 (아시리아 왕) | 아슈르바니팔 |
| 후임자 (바빌론 왕) | 샤마쉬-슈무-우킨 |
| 아버지 | 센나케리브 |
| 어머니 | 나키아 |
| 왕조 | 사르곤 왕조 |
| 출생 | 기원전 713년경 |
| 사망일 | 기원전 669년 11월 1일 (44세경) |
| 사망 장소 | 하란 (현재 샨르우르파, 튀르키예) |
| 가족 및 자녀 | |
| 자녀 | 셰루아-에티라트 아슈르바니팔 샤마쉬-슈무-우킨 그 외 다수 |
2. 역사적 배경

에사르하돈은 아버지 센나케리브의 뒤를 이어 아시리아 제국의 왕위에 올랐으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본래 센나케리브는 장남 아슈르나딘슈미를 후계자로 삼았으나 그가 사망한 후 차남 아르다물리수를 지명했다. 그러나 기원전 684년, 센나케리브는 돌연 막내아들인 에사르하돈을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형제들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 결정에 앙심을 품은 아르다물리수는 다른 형제 나부-샤르-우수르와 공모하여 기원전 681년 아버지 센나케리브를 암살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왕위를 차지하려던 아르다물리수의 계획은 에사르하돈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에사르하돈은 짧은 내전 끝에 형제들의 군대를 물리치고 니네베로 진군하여 아시리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직후 에사르하돈은 반란에 가담했던 형제들의 가족을 포함한 정적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으며, 암살 주모자였던 아르다물리수와 나부-샤르-우수르는 북쪽의 우라르투 왕국으로 도망쳤다. 이러한 극적인 왕위 계승 과정은 에사르하돈의 통치 방식에 영향을 주어,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신하들과 친족에 대한 불신과 편집증적 경향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집트 정복, 바빌론 재건 등 중요한 업적을 남긴 아시리아의 주요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2. 1. 센나케리브의 후계자 지명 번복
센나케리브가 처음 후계자로 선택한 인물은 장남 아슈르-나딘-슈미였다. 센나케리브는 기원전 700년경 아슈르-나딘-슈미를 바빌론의 통치자로 임명했다.[14] 얼마 후, 센나케리브는 엘람(현재의 이란 남서부) 땅으로 도망친 칼데아인 반란 지도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엘람을 공격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엘람인들은 기원전 694년, 아시리아 제국 남부를 공격하여 시파르 시에서 아슈르-나딘-슈미를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아슈르-나딘-슈미는 엘람으로 끌려가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5]아슈르-나딘-슈미가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자, 센나케리브는 살아남은 아들 중 둘째인 아르다-무리시를 새로운 왕세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몇 년 후인 기원전 684년, 센나케리브는 후계자를 아르다-무리시에서 막내아들인 에사르하돈으로 변경했다. 아르다-무리시가 갑작스럽게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가 이 결정에 크게 실망했다는 것은 분명하다.[2] 에사르하돈은 자신이 후계자로 지명되었을 때 형제들이 보인 반응을 훗날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나는 형들 중 막내였다. 그러나 [신들] 아슈르와 샤마시, 벨과 나부의 칙령에 따라, 나의 아버지는 나를 높이셨고, 형제들의 모임에서 샤마시에게 "이 사람이 내 후계자인가?"라고 물었고, 신들은 "그는 너의 두 번째 자아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내 형제들이 미쳐 날뛰었다. 그들은 니네베 한가운데에서 신성 모독적으로 칼을 뽑았다. 그러나 아슈르, 샤마시, 벨, 나부, 이슈타르, 모든 신들은 이 악당들의 행동을 분노로 바라보며 그들의 힘을 무력으로 바꾸어 나에게 복종시켰다.[14]
아르다-무리시는 아버지 센나케리브의 명령에 따라 에사르하돈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으나, 대신 자신을 다시 후계자로 삼아달라고 센나케리브에게 거듭 호소했다. 이러한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센나케리브는 긴장된 상황을 감지하고 에사르하돈의 안전을 위해 그를 서부 속주로 보냈다.[2] 에사르하돈은 이 망명 생활을 불행하게 여겼으며, 형제들을 탓하며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그들은 [즉, 에사르하돈의 형제들] 사악한 소문, 비방, 거짓말을 신성 모독적으로, 거짓과 진실하지 않음으로 나를 둘러쌌다. 그들은 내 뒤에서 악을 꾸몄다. 신들의 뜻에 반하여 그들은 나의 아버지의 호의적인 마음을 나로부터 멀어지게 했지만, 그의 마음은 비밀리에 동정심에 영향을 받았고, 그는 여전히 내가 왕권을 행사하도록 의도했다.[7]
2. 2. 왕위 계승 분쟁과 센나케리브 암살
에사르하돈은 3년 동안 아시리아의 왕세자였고, 아버지 센나케리브 왕의 공식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며, 제국 전체가 그를 지지하는 충성 맹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19][20]
센나케리브는 본래 장남 아슈르나딘슈미를 첫 후계자로 지명하여 기원전 700년경 바빌론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센나케리브가 엘람(현재 이란 남서부)을 공격하자, 엘람인들은 보복으로 아시리아 제국 남부를 침공하여 기원전 694년 시파르에서 아슈르나딘슈미를 사로잡았다. 아슈르나딘슈미는 엘람으로 끌려가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슈르나딘슈미의 사망 이후, 센나케리브는 살아남은 아들 중 차남인 아르다물리수를 새로운 왕세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몇 년 후인 기원전 684년, 센나케리브는 돌연 후계자를 아르다물리수에서 에사르하돈으로 교체했다. 아르다물리수가 갑자기 폐위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가 이 결정에 큰 불만을 품었던 것은 분명하다. 에사르하돈은 자신이 후계자로 지명되었을 때 형제들이 보인 반응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나는 형들 중 막내였다. 그러나 [신들] 아슈르와 샤마쉬, 벨과 나부의 칙령에 따라, 나의 아버지는 나를 높이셨고, 형제들의 모임에서 샤마쉬에게 "이 사람이 내 후계자인가?"라고 물었고, 신들은 "그는 너의 두 번째 자아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내 형제들이 미쳐 날뛰었다. 그들은 니네베 한가운데에서 신성 모독적으로 칼을 뽑았다. 그러나 아슈르, 샤마쉬, 벨, 나부, 이슈타르, 모든 신들은 이 악당들의 행동을 분노로 바라보며 그들의 힘을 무력으로 바꾸어 나에게 복종시켰다.
아르다물리수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에사르하돈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지만, 계속해서 센나케리브에게 자신을 다시 후계자로 삼아달라고 호소했다. 이러한 시도가 실패하고 상황이 긴장되자, 센나케리브는 에사르하돈의 안전을 위해 그를 서부 속주로 보냈다. 에사르하돈은 이 유배 생활에 불만을 품고 형제들을 비난하며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그들은 [즉, 에사르하돈의 형제들] 사악한 소문, 비방, 거짓말을 신성 모독적으로, 거짓과 진실하지 않음으로 나를 둘러쌌다. 그들은 내 뒤에서 악을 꾸몄다. 신들의 뜻에 반하여 그들은 나의 아버지의 호의적인 마음을 나로부터 멀어지게 했지만, 그의 마음은 비밀리에 동정심에 영향을 받았고, 그는 여전히 내가 왕권을 행사하도록 의도했다.
센나케리브는 아들들 사이의 갈등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정작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예측하지 못했다. 기원전 681년 10월 20일, 아르다물리수와 또 다른 아들 나부-샤르-우수르는 니네베의 한 신전에서 아버지 센나케리브를 습격하여 살해했다.
그러나 센나케리브를 살해했음에도 아르다물리수가 왕위를 차지하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살해는 오히려 아르다물리수와 그의 지지자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즉위식이 지연되는 동안 에사르하돈은 군대를 모아 반격할 시간을 벌었다. 에사르하돈은 서부 지방인 하니갈바트에서 형제들이 이끄는 군대와 맞섰다. 전투가 벌어지자 형제들의 군대 대부분이 에사르하돈에게 투항했고, 지휘관들은 도주했다. 이후 에사르하돈은 아무런 저항 없이 수도 니네베로 진군했다.[19][20]
아버지 센나케리브가 사망한 지 6주 후, 에사르하돈은 니네베에서 아시리아의 새로운 왕으로 공식 인정받았다. 즉위 직후, 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형제들의 가족을 포함하여 반란에 가담한 모든 공모자와 정적들을 찾아내 처형했다. 니네베 왕궁의 경비 관련자들도 모두 숙청되었다. 센나케리브 암살의 주모자였던 아르다물리수와 나부-샤르-우수르는 북쪽의 우라르투 왕국으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에사르하돈은 이후 자신의 비문에서 형제들의 배신 행위에 대해 자주 언급하며 그들의 행동에 대한 충격과 고뇌를 드러냈다. 에사르하돈은 자신의 니네베 입성과 반역자 숙청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나는 기쁨으로 나의 왕의 도시인 니네베에 들어가 아버지의 왕좌에 안전하게 앉았다. 남풍이 불었고, 에아의 숨결, 즉 왕권을 행사하는 데 유리한 바람이 불었다. 하늘과 땅에는 나에게 유리한 징조, 점쟁이의 메시지, 신들과 여신의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누락된 부분]'' 그리고 내 마음에 용기를 주었다.
나의 형제들을 위해 아시리아의 통치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민 반역자들, 그들의 대열을 마지막 사람까지 검토하고 무거운 형벌을 내렸으며, 그들의 씨앗을 파괴했다.
2. 3. 아시리아 내부 정치 상황
에사르하돈이 왕위에 오를 당시 아시리아 제국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속국들은 독립을 시도하거나 영토 확장을 노리는 외부 세력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새로운 왕이 아직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에사르하돈의 예상과 달리, 아시리아의 총독들과 군인들은 새로운 왕에게 충성을 보이며 그의 지위를 지지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위협은 계속되었다. 북쪽에서는 루사 2세가 다스리는 우라르투 왕국이 아시리아의 숙적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에사르하돈의 형제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는 에사르하돈 즉위 과정에서의 내부 갈등을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또한 서쪽 국경에서는 이란계 민족의 유목 부족인 킴메르인이 지속적으로 아시리아를 위협했다.
3. 통치
에사르하돈은 아버지 센나케리브가 암살된 기원전 681년부터 자신이 사망한 기원전 669년까지 신아시리아 제국을 다스렸다. 그는 사르곤 왕조의 세 번째 왕이었다. 그의 즉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센나케리브는 본래 차남 아르다 물리시를 후계자로 삼았으나, 기원전 684년 에사르하돈으로 교체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아르다 물리시와 다른 형제 나부 샤르 우수르는 기원전 681년 아버지를 암살하고 왕위를 차지하려 했다. 에사르하돈은 이어진 6주간의 내전에서 형제들을 물리치고 왕위에 올라야 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통치 내내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신하들과 심지어 남성 친족까지 극도로 불신했으며, 이는 그의 거처 선택이나 통치 방식에서도 드러났다. 반면 어머니 나키아나 딸 셰르아 에테라트와 같은 여성 친족들은 이전 시대보다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피해망상과 불신 참조)
어려운 시작에도 불구하고 에사르하돈은 여러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아버지 센나케리브가 파괴했던 바빌론 시를 재건하는 대규모 사업을 추진했다. (자세한 내용은 #바빌론 재건 참조) 또한, 기원전 671년에는 이집트를 성공적으로 정복하여 아시리아 제국의 영토를 역사상 가장 넓게 확장시켰다. 이집트 정복은 그의 가장 큰 군사적 성공으로 평가받는다. (자세한 내용은 #이집트 정복 참조) 이 외에도 메디아, 아라비아 반도, 아나톨리아, 코카서스, 레반트 등 여러 지역으로 군사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킴메르인의 침입을 격퇴하고 시돈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자세한 내용은 #군사 원정 참조)
하지만 그의 통치는 끊임없는 건강 문제와 씨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는 원인 모를 만성 질환에 시달렸으며, 기록에는 심한 구토, 발열, 코피, 어지럼증, 피부 발진, 우울증 등이 언급된다. 특히 기원전 673년 첫 이집트 침공 실패와 기원전 672년 아내 에샤라-함마트 및 어린 자녀의 죽음은 그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아시리아에서는 왕의 건강이 신의 지지와 직결된다고 여겼기에, 그의 병세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자세한 내용은 #건강 악화와 우울증 참조)
자신의 어려운 즉위 과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에사르하돈은 후계 문제에 신중을 기했다. 장남 신-나딘-아플리가 일찍 사망하자, 그는 차남 아슈르바니팔을 아시리아의 왕위 계승자로, 살아남은 아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샤마슈 슈움 우킨을 바빌로니아의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는 이원적인 계승 구도를 마련했다. 그는 여러 조약과 어머니 나키아의 도움을 통해 이 계획의 안정을 꾀했다. (자세한 내용은 #왕위 계승 계획 참조)
기원전 669년, 이집트에서 타하르카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에사르하돈은 세 번째 이집트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집트로 향하던 중 하란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쉬-슈움-우킨은 에사르하돈의 계획 덕분에 비교적 순조롭게 각각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왕위를 계승했다.
비교적 짧고 고통스러운 통치 기간에도 불구하고, 에사르하돈은 내전을 신속히 종식시키고,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으며, 대규모 건설 사업을 완수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권력 이양을 준비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아시리아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3. 1. 피해망상과 불신

에사르하돈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매우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신하, 가신, 심지어 가족까지도 깊이 불신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려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신탁이나 사제들에게 자주 조언을 구했다. 특히 남성 친척들을 매우 의심했지만, 여성 친척들에게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내 에샤라-함마트, 어머니 나키아, 딸 셰루아-에티라트 같은 여성 왕족들은 이전 아시리아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큰 영향력과 정치적 권력을 행사했다.
에사르하돈의 편집증적 성향은 그가 거주지를 선택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났다. 그의 주요 거처 중 하나는 님루드에 있는 궁전이었는데, 이곳은 약 200년 전 살마네세르 3세(기원전 859~824년 재위)가 무기고로 지은 건물이었다. 이 궁전은 도시의 종교 및 행정 중심지에서 벗어나 외곽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위치였다. 기원전 676년에서 672년 사이에 에사르하돈은 이 궁전을 더욱 요새화하여, 유사시에는 도시로부터 완전히 봉쇄될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만약 입구가 봉쇄되면, 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여러 개의 튼튼한 문으로 보호되는 가파르고 좁은 길뿐이었다. 비슷한 형태의 요새화된 궁전이 니네베에도 건설되었는데, 이 역시 도시 중심에서 떨어진 언덕 위에 지어졌다.
모든 아시리아 왕들은 정치적, 군사적 문제에 대해 태양신 샤마쉬에게 조언을 구하는 신탁을 이용했으나, 신하들의 배신 가능성에 대해 묻는 것은 에사르하돈의 통치에서만 유독 두드러졌다.
많은 학자들은 에사르하돈이 편집증(paranoid)을 앓았다고 평가하고, 일부는 아버지 센나케리브가 살해된 충격으로 편집성 성격 장애가 발병했을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그를 단순히 "의심이 많은(mistrustful)" 인물로 묘사하는 것을 선호한다. 편집증은 비합리적인 망상을 동반하는 반면, 에사르하돈에게는 실제로 많은 정적과 위협이 존재했으므로 그의 불신이 완전히 비합리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
3. 2. 바빌론 재건
에사르하돈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모두에서 야심찬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완수했다. 특히 그는 아버지 센나케리브에 의해 파괴되었던 바빌론 시를 재건하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3. 3. 군사 원정
에사르하돈이 왕위에 오를 당시 신아시리아 제국은 내부적인 불안정과 외부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일부 종속국들은 아시리아의 혼란을 틈타 독립을 시도했고, 주변의 경쟁 세력들은 영토 확장을 노렸다. 그러나 에사르하돈 휘하의 총독들과 군대는 새 왕에게 충성을 다하며 제국 안정을 뒷받침했다. 당시 아시리아의 주요 위협 세력은 북쪽의 우라르투 왕국(루사 2세 치하)과 서쪽 국경을 교란하던 유목민족 킴메르인이었다.
에사르하돈은 이러한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군사 원정을 단행했다. 기원전 679년, 킴메르인들이 제국 서부 속주를 침입하자 에사르하돈은 이들을 격퇴하기 위한 군사 행동에 나섰다. 기원전 676년에는 킬리키아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킴메르인과 싸워 승리했으며, 이때 킴메르의 왕 테우슈파를 살해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기병으로 유명한 스키타이인과 동맹을 맺고 자신의 딸을 스키타이 왕 바르타투아에게 시집보내는 등[22] 유목민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기도 했다.
킴메르인의 침입 와중에 레반트의 시돈 시가 아시리아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다. 에사르하돈은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기원전 677년에 시돈을 점령하고, 도망쳤던 왕 아브디-밀쿠티를 1년 후 체포하여 처형했다. 비슷한 시기 킬리키아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산두아리(Sanduarri) 역시 진압하고 처형했으며, 두 반란 왕의 머리를 니네베에서 전시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시돈의 영토는 축소되어 아시리아 속주로 편입되었고, 일부는 티레의 왕 바알 1세에게 주어졌다.
서부 전선이 안정되자 에사르하돈은 북방의 우라르투로 눈을 돌렸다. 그는 먼저 우라르투의 동맹국인 만나이를 공격했으며, 늦어도 기원전 673년까지는 우라르투 본토와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에사르하돈은 우라르투의 속국인 슈프리아 왕국을 공격하여 수도 우부무를 점령했다. 침공의 명분은 슈프리아 왕이 아시리아 정치 망명자들의 인도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슈프리아는 정복되었고 아시리아 영토로 병합되었다.
한편, 동쪽에서는 기원전 675년 엘람이 바빌로니아를 침공하여 시파르 시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아시리아 주력군은 아나톨리아 원정 중이었으나, 남부 방어를 위해 원정을 포기해야 했다. 이 사건은 아시리아에게 상당한 타격이었으나, 엘람의 왕 훔반-할타쉬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우르타크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새 엘람 왕 우르타크는 아시리아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며 바빌로니아에서 철수하고 점령했던 신상들을 반환했다. 이후 에사르하돈과 우르타크는 동맹을 맺고 서로의 자녀를 교환하여 각자의 궁정에서 양육하기로 합의했다.
에사르하돈 통치 기간 중 가장 중요한 군사적 목표 중 하나는 이집트 정복이었다. 이집트는 오랫동안 아시리아에 반항하는 세력들을 지원해왔기 때문이다. 기원전 673년 겨울, 에사르하돈은 첫 번째 이집트 침공을 감행했으나, 아시리아 측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시리아 군대는 아스칼론 외곽에서 이집트 파라오 타하르카에게 패배했고, 에사르하돈은 니네베로 후퇴해야 했다. 이 실패 이후 에사르하돈은 재침공을 준비하게 된다.
3. 3. 1. 킴메르족 격퇴
아시리아의 정세가 불안정한 틈을 타 종속국들은 독립을 시도하거나 외부 세력이 영토 확장을 노렸지만, 에사르하돈의 총독들과 병사들은 그를 굳건히 지지했다. 당시 아시리아의 주요 위협 세력은 북방의 우라르투 왕국(루사 2세 치하)과 유목민인 킴메르인이었다. 특히 킴메르인들은 아시리아 서부 국경 지대를 지속적으로 교란했다. 에사르하돈은 이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기병으로 유명한 또 다른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과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기원전 679년, 킴메르인들은 아시리아 제국 서쪽 끝의 속주를 침입했으며, 기원전 676년에는 아시리아 영토 깊숙이 들어와 여러 도시와 신전을 파괴했다. 이에 에사르하돈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킬리키아로 출정하여 킴메르인들과 싸웠고, 마침내 그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에사르하돈은 자신의 비문에서 이 전투에서 킴메르의 왕 테우슈파(Teushpa)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676년경, 에사르하돈은 자그로스 산맥과 타우로스 산맥 방면으로 원정하여 현지 통제력을 강화하는 한편, 스키타이의 왕 바르타투아(Bartatua)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유목민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기도 했다.
킴메르인들의 침략 와중에 아시리아의 레반트 속령이었던 시돈 시가 반란을 일으켰다. 시돈은 에사르하돈의 아버지 산헤립에 의해 기원전 701년에 아시리아에 정복되어 종속된 상태였다. 에사르하돈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군대를 진격시켜 기원전 677년에 시돈을 점령했다. 시돈의 왕 아브디-밀쿠티(Abdi-Milkutti)는 도망쳤으나 1년 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같은 해(기원전 677년) 에사르하돈은 킴메르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반란을 일으켰던 또 다른 속왕인 쿤두(Kundu)와 시스(Sissu)의 산두아리(Sanduarri, 아마도 킬리키아 지역) 역시 패배시키고 처형했다. 에사르하돈은 승리를 기념하며 두 반란 왕의 머리를 니네베에서 귀족들 목에 걸고 행진하게 했다. 시돈은 영토가 축소되어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일부 영토는 티레 시의 왕 바알 1세에게 넘어갔다.
3. 3. 2. 시돈 반란 진압
킴메르인의 침략으로 아시리아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레반트의 아시리아 속령이었던 시돈 시가 에사르하돈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다. 시돈은 기원전 701년에 에사르하돈의 아버지인 산헤립에게 정복되어 속국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에사르하돈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군대를 보내 기원전 677년에 시돈을 점령했지만, 그 왕 아브디-밀쿠티는 작은 배를 타고 도망쳤다. 그는 1년 후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같은 해에 에사르하돈은 킴메르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반란을 일으켰던 또 다른 속주 왕인 "쿤두(Kundu)와 시스(Sissu)" (아마도 킬리키아 지역)의 산두아리(Sanduarri) 역시 패배하고 처형되었다. 승리를 과시하기 위해 에사르하돈은 이 두 속왕의 머리를 니네베에서 그들의 귀족들 목에 걸고 행진시키는 잔혹함을 보였다.
시돈은 영토가 줄어들어 아시리아의 직접 통치를 받는 속주가 되었고, 과거 시돈 왕에게 속했던 두 도시의 통치권은 다른 속국 왕인 티레의 바알 1세에게 넘어갔다. 에사르하돈은 자신의 비문에서 시돈 정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내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은 시돈 왕 아브디-밀쿠티(Abdi-milkutti)는 내 입술에서 쏟아지는 말을 고려하지 않고 두려운 바다를 믿고 내 멍에를 벗어 던졌다. 시돈, 그가 의지하는 이 도시는 바다 속에 있으며, [결손]
> 나는 물고기처럼 그를 붙잡아 바다에서 끌어내 목을 베었다. 그의 아내, 아들들, 궁궐의 사람들, 재산과 물건, 보석, 염색된 양모와 아마 옷, 단풍나무와 황양목, 그의 궁궐에 가득 찬 모든 종류의 풍성한 보물들을 내가 가져왔다. 그의 나라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 -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소, 양, 당나귀를 나는 아시리아로 데려갔다.
3. 3. 3. 우라르투 공략
에사르하돈이 즉위했을 당시 아시리아는 내부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고, 이는 주변국들에게 기회로 여겨졌다. 특히 북방의 우라르투 왕국은 루사 2세의 통치 아래 아시리아의 오랜 숙적으로 남아 있었으며, 에사르하돈의 형제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또한 유목민족인 킴메르인은 아시리아 서부 국경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에사르하돈은 먼저 제국 서쪽의 안정을 꾀했다. 그는 기원전 679년과 676년에 제국 서부 속주를 침입한 킴메르인들을 격퇴하기 위해 킬리키아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벌여 승리했으며, 킴메르의 왕 테우슈파를 살해했다고 기록했다. 이 와중에 레반트의 시돈 시가 아시리아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으나, 에사르하돈은 기원전 677년에 시돈을 점령하고 왕 아브디-밀쿠티를 처형했다. 킬리키아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산두아리 역시 패배하고 처형되었다. 시돈은 영토가 축소되어 아시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일부 영토는 티레의 왕 바알 1세에게 넘어갔다.
서부 지역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에사르하돈은 북방의 우라르투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먼저 우라르투와 동맹 관계였던 만나이를 공격했으며, 늦어도 기원전 673년까지는 우라르투 본토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이 전쟁의 일환으로 에사르하돈은 우라르투의 속국이었던 슈프리아 왕국을 공격하여 정복했다. 슈프리아의 수도 우부무는 반 호 근처에 위치했다. 침공의 명분은 슈프리아 왕이 산헤립 암살에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시리아 정치 망명자들의 인도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오랜 서신 교환 끝에 슈프리아 왕이 망명자 인도를 약속했으나, 에사르하돈은 너무 늦었다고 판단하여 침공을 강행했다. 아시리아 군대가 수도 우부무를 포위하자, 방어군은 아시리아의 공성 무기를 불태우려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오히려 불이 성 안으로 번졌다. 결국 아시리아군은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했으며, 망명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한편, 슈프리아 왕이 인도를 거부했던 우라르투 출신 죄수들 또한 아시리아군에게 붙잡혔는데, 에사르하돈은 이들을 우라르투로 송환했다. 이는 우라르투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제스처였을 가능성이 있다. 수도 우부무는 복구되고 이름이 바뀐 뒤 아시리아 영토로 병합되었고, 두 명의 환관이 총독으로 임명되어 통치하게 되었다.
3. 3. 4. 이집트 정복

이집트는 오랫동안 아시리아의 지배에 반발하는 레반트 지역의 세력들을 지원해 왔다. 에사르하돈은 이러한 배후 지원을 차단하고 쿠시 왕조가 지배하던 이집트를 정복하여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다.
에사르하돈의 첫 이집트 침공은 기원전 673년 겨울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원정에 대한 아시리아 측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 침공이 아시리아 군대의 피로 누적 등으로 인해 아스칼론 인근에서 파라오 타하르카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에게 패배하는 등, 아시리아에게 큰 실패로 끝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패배 후 에사르하돈은 니네베로 후퇴하며 이집트 정복 계획을 잠시 보류해야 했다.
기원전 671년, 에사르하돈은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다시 이집트로 진군했다. 이번에는 지난번의 실패를 교훈 삼아 매우 신중하게 천천히 진군했으며, 도중에 하란에 들렀다. 하란에서 에사르하돈은 이집트 정복이 성공할 것이라는 신(Sin)의 신탁을 받았다. 훗날 아슈르바니팔에게 보내진 편지에 따르면, 신탁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신탁을 받은 지 3개월 후, 아시리아 군대는 첫 전투에서 이집트 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징조에도 불구하고, 에사르하돈은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는 첫 승리 후 불과 11일 만에 고대 아시리아의 "대리 왕" 의식을 거행했다. 이 의식은 왕에게 닥칠지 모르는 불길한 징조나 위험을 미리 선정된 대리인(대리 왕)에게 대신 떠넘기기 위한 주술적인 행위였다. 에사르하돈은 100일 동안 공식 석상에서 사라져 '농부'라는 가명으로 숨어 지냈고, 대리인이 왕의 의복을 입고 왕의 식사를 하는 등 왕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다가 의식 기간이 끝나면 어떤 일이 발생했든 상관없이 살해되었다. 이 때문에 에사르하돈은 이집트 침공의 중요한 시기에 직접 군대를 지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편집증적인 불안감으로 인해 이후 2년 동안 이 의식을 두 번이나 더 거행했고, 이로 인해 거의 1년 가까이 왕으로서의 정상적인 통치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제국의 행정은 주로 왕태자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슈-슘-우킨이 감독했으며, 이집트 원정군은 환관장 아슈르-나시르가 지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사르하돈이 의식을 치르며 숨어 있는 동안에도 아시리아 군대는 진격을 계속하여 두 차례 더 이집트 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수도 멤피스를 점령하고 약탈하는 데 성공했다. 파라오 타하르카는 남쪽으로 도망쳤지만, 그의 아내와 아들 우샤나후르를 포함한 왕족들은 아시리아 군에 사로잡혀 인질로 아시리아 본국으로 보내졌다. 에사르하돈은 또한 레반트 지역에서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에 대항했던 티레의 왕 바알 1세와 같은 속국 왕들과도 전투를 벌여야 했다.

이집트 정복 후, 에사르하돈은 이집트 전역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총독, 관리, 감독관 등을 새롭게 임명하여 직접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정복 과정에서 수많은 이집트인들이 아시리아의 핵심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집트에 매년 막대한 공물과 세금을 부과하여 제국의 부를 늘렸다.
이집트 정복이라는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에사르하돈의 승리 비문은 높이 3m가 넘는 거대한 현무암 석비로, 시리아 북부의 사말(진지를리)에서 출토되었다. 현재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비에는 철퇴를 들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에사르하돈의 모습과, 그의 발치에서 목에 밧줄이 걸린 채 무릎 꿇고 애원하는 두 명의 포로가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각각 패배한 이집트의 파라오 타하르카와 이전에 반란을 일으켰던 시돈의 왕 아브디-밀쿠티로 여겨진다.
에사르하돈은 자신의 승리 비문에 이집트 정복 과정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집트에 대한 아시리아의 군사적 승리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무기의 차이를 지적한다. 아시리아는 아르메니아 고원과 같은 철광석 산지를 장악하여 철제 무기로 군대를 무장시킨 반면, 당시 이집트 군대는 여전히 청동기 시대의 무기를 주로 사용하고 있어 전력 면에서 차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3. 4. 건강 악화와 우울증
기원전 673년 이집트 침공에 실패할 무렵, 에사르하돈 왕의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었다.[15] 이는 아시리아 왕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자격 요건 중 하나가 완벽한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였다.[14] 에사르하돈은 끊임없이 어떤 질병에 시달렸으며, 종종 며칠 동안 음식이나 음료를 거의 섭취하지 않고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며 침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총애했던 아내 에샤라-함마트가 기원전 672년 2월(또는 그 이전)에 사망하고,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어린 자녀마저 잃게 되자 그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5][17]남아있는 궁정 기록들은 에사르하돈이 자주 깊은 슬픔에 잠겼음을 보여준다. 특히 아내와 어린 자녀의 죽음은 그를 극심한 우울증에 빠뜨렸다. 이는 왕의 건강을 책임졌던 수석 주술사 아다드-슈무-우수르(akk)가 쓴 편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한 편지에서 그는 왕이 "나는 매우 슬프다. 이 작은 아이 때문에 이렇게 우울해졌는가?"라고 토로했으며, 주술사는 "치료할 수 있었다면, 왕께서는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왕국의 절반을 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 나의 주 왕이시여,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답하며 안타까움을 표현했다.[17]
에사르하돈의 의사를 포함한 왕실 측근들이 남긴 메모와 편지들은 그의 상태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심한 구토, 끊임없는 발열, 코피, 어지럼증, 고통스러운 귀 통증, 설사, 그리고 우울한 정신 상태 등이 언급된다. 왕은 종종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고 두려워했으며, 그의 얼굴을 포함한 몸 대부분을 뒤덮은 영구적인 피부 발진은 그의 건강 악화를 누구에게나 분명히 보여주었다. 아시리아 최고의 의사들조차 당황하여 결국 왕을 도울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15] 한 의사는 편지에서 "나의 주 왕께서는 계속해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내 병의 본질을 파악하고 치료법을 찾지 못하는가?' 제가 이미 왕에게 직접 말씀드렸듯이, 그의 증상은 분류할 수 없습니다."라고 기록했다.[15]
아시리아인들은 질병을 신의 형벌로 여겼기 때문에, 병든 왕은 신들의 지지를 잃었다는 불길한 징조로 해석될 수 있었다. 따라서 에사르하돈의 좋지 않은 건강 상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신하들에게 숨겨야만 했다.[15] 신하들이 왕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고대 아시리아 왕실의 관례에 따라 왕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무릎을 꿇고 베일을 써야 했다.[16]
에사르하돈이 앓았던 구체적인 병이 무엇인지 현대에 와서 정확히 밝혀내려는 시도는 많지 않았다.[28] 동시대 문서에 기록된 그의 주요 증상으로는 발열, 쇠약, 식욕 부진, 관절 경직, 안구 이상, 피부 발진 및 수포, 오한, 귀 통증 등이 있으며,[29] 이러한 증상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30] 그의 병은 만성적이고 발작적이었으며, 증상이 심하지 않을 때는 외국 원정을 떠날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전염병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0] 이러한 증상은 즉위 전인 기원전 681년 이전, 즉 35세보다 젊었을 때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이며,[29] 나이가 들면서 악화되어 기원전 672년 무렵에는 생명이 위독할 정도였다.[29] 일시적인 회복 후 이집트 원정에 나섰으나, 도중에 다시 발작을 일으켜 기원전 669년에 사망했다.[29]
당시 의사와 주술사들은 해열 작용이 있는 로션이나 습포, 피부 발진을 억제하는 연고, 휴식과 식이요법, 그리고 주술적인 처방 등을 시도했지만,[29] 근본적인 치료에는 이르지 못했다. 에사르하돈은 의사들에게 계속해서 치료법을 찾아내라고 촉구했다.[28][29]
고대의 기록이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완전하지 않고, 기록된 증상들이 반드시 동일한 질병에서 비롯된 것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에사르하돈의 병명을 확실하게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29] 초기 연구자들은 만성 류마티즘을 가능성 있는 진단으로 제시했으나,[28] 핀란드의 학자 시모 파르폴라(Simo Parpola)는 일부 증상이 류마티즘과 일치하지 않는다며 교원병의 일종인 전신성 홍반 루푸스일 가능성을 제기했다.[31] 이 견해는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지만,[32] 파르폴라 자신도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듯이 이는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3. 5. 왕위 계승 계획

에사르하돈은 자신이 아시리아 왕위를 매우 어렵게 차지했기 때문에, 자신의 사후 권력 이양이 순조롭고 평화롭게 이루어지도록 여러 조치를 취했다. 기원전 672년경 에사르하돈과 동쪽 메디아 왕국의 속왕인 라마타이아의 통치자 우라카자바르나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는 당시 에사르하돈의 모든 아들이 미성년자였던 점이 문제로 언급되었다. 이 조약은 또한 에사르하돈이 자신의 사후 후계자 즉위에 여러 파벌이 반대할 것을 우려했음을 보여준다. 잠재적 반대 세력으로는 후계자의 형제, 삼촌, 사촌, 심지어 "전 왕족의 후손"과 "아시리아의 수장 또는 총독 중 한 명"까지 언급되었다.
이는 적어도 에사르하돈의 형제 중 일부가 당시까지 살아 있었고, 그들이나 그들의 자녀가 에사르하돈의 자녀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전 왕족의 후손"에 대한 언급은 에사르하돈의 할아버지인 사르곤 2세가 찬탈을 통해 왕위를 얻었으며 이전 왕조와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할 수 있다. 이전 왕가의 후손이 여전히 살아남아 아시리아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죽음 이후 내전을 피하기 위해 에사르하돈은 기원전 674년에 장남 신-나딘-아플리를 왕세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신-나딘-아플리는 불과 2년 만에 사망하여 다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에사르하돈이 두 명의 왕세자를 임명했다. 살아남은 아들 중 장남인 샤마쉬-슈움-우킨은 바빌론의 후계자로, 차남인 아슈르바니팔은 아시리아의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두 왕자는 수도 니네베에 함께 도착하여 외국 대표, 아시리아 귀족, 군인들과 함께 축하 행사에 참여했다. 지난 수십 년간 아시리아 왕이 동시에 바빌론의 왕을 겸했기 때문에, 아들 중 한 명을 아시리아의 후계자로, 다른 한 명을 바빌론의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였다.
에사르하돈의 주요 칭호였던 아시리아의 왕위를 차남에게, 바빌론의 왕위를 장남에게 준 결정은 두 아들의 어머니 출신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아슈르바니팔의 어머니는 아시리아 출신일 가능성이 높은 반면, 샤마쉬-슈움-우킨은 바빌론 출신 여성의 아들이었을 수 있다 (이는 불확실하며, 두 사람이 같은 어머니를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바빌론계 어머니를 둔 샤마쉬-슈움-우킨이 아시리아 왕위에 오르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기에, 차남인 아슈르바니팔이 아시리아 왕위 계승에 더 적합한 후보로 여겨졌을 수 있다. 에사르하돈은 바빌로니아인들이 바빌론 혈통과 연관된 인물을 왕으로 삼는 것에 만족할 것이라 추측하고, 샤마쉬-슈움-우킨에게 바빌론과 제국 남부 지역을 상속하도록 했을 것이다. 에사르하돈이 작성한 조약은 두 아들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지는 않았다. 아슈르바니팔이 제국의 주요 후계자이고 샤마쉬-슈움-우킨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지만, 다른 조항에서는 아슈르바니팔이 샤마쉬-슈움-우킨의 영역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여 보다 동등한 지위를 암시하기도 했다. 두 왕세자는 곧 아시리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게 되어 병약한 아버지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에사르하돈의 어머니 나키아는 에사르하돈 자신의 즉위 초기에 발생했던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잠재적인 적들과 왕위 주장자들이 아슈르바니팔의 아시리아 왕위 계승을 지지하도록 맹세하게 하는 추가 조치를 취했다.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쉬-슈움-우킨의 왕위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에사르하돈 자신도 기원전 672년에 동쪽에 있는 최소 6명의 독립 군주 및 아시리아 본토 밖의 여러 총독들과 계승 조약을 체결했다. 이러한 조약을 맺게 된 주된 동기는 그의 형제들, 특히 아르다-물리수가 여전히 살아남아 아시리아 왕위를 주장할 가능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부 비문은 그들이 기원전 673년까지도 살아 있었음을 시사한다.
3. 6. 이집트 정복과 대리 왕
기원전 671년, 에사르하돈은 이집트를 성공적으로 정복하며 아시리아 제국의 영토를 역사상 가장 넓게 확장시켰다.[1] 이집트 정복은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첫 번째 이집트 원정은 기원전 673년에 이루어졌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에사르하돈은 기원전 671년 초,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두 번째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그는 지난번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 천천히 진군했다.[14] 원정 도중 하란에 들렀을 때, 에사르하돈은 이집트 정복이 성공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15] 신탁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에사르하돈이 이집트로 진군할 때, 삼나무 신전이 하란에 세워졌다. 그곳에서 신 신이 기둥 위에서 왕위에 앉았고, 두 개의 왕관이 신의 머리 위에 있었으며, 그 앞에 서 있는 신은 누스쿠 신이었다. 에사르하돈이 들어가 그 왕관을 그의 머리 위에 쓰고, 신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선언되었다. "너는 앞으로 나아가 세상을 정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가서 이집트를 정복했다.[15]
이 신탁을 받은 지 3개월 후, 에사르하돈의 군대는 이집트 군과의 첫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에사르하돈은 여전히 불안감을 느꼈고, 첫 승리 후 불과 11일 만에 '대리 왕' 의식을 거행했다. 이 의식은 왕에게 닥칠지 모르는 불길한 징조나 위험을 대리인에게 대신 떠넘기기 위한 고대 아시리아의 관습이었다. 에사르하돈은 이 의식 때문에 100일 동안 숨어 지내야 했고, 이집트 침공을 직접 지휘할 수 없게 되었다.[16] 대리 왕은 왕의 옷을 입고 왕의 음식을 먹으며 왕 대신 지내다가 100일이 지나면 어떤 일이 있었든 살해되었다.[16]
에사르하돈이 숨어 있는 동안, 아시리아 군대는 두 차례 더 이집트 군을 격파하고 수도 멤피스를 점령하여 약탈했다.[16] 이집트의 파라오 타하르카는 남쪽으로 도망쳤지만, 그의 아내와 아들 등 가족들은 아시리아 군에 포로로 잡혀 아시리아로 보내졌다.[18] 에사르하돈은 이집트 곳곳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총독들을 임명했다.[18] 또한,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에 대항했던 티로스의 바알 1세 같은 레반트의 군주들과도 싸워야 했다.[19]
에사르하돈은 이집트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높이 3m가 넘는 거대한 에사르하돈의 승리 비문을 세웠다. 비문에는 에사르하돈이 위풍당당하게 서서 곤봉을 들고 있고, 그의 발밑에는 포로가 된 이집트 왕자 우샤나후르(타하르카의 아들)와 또 다른 적대 군주(아마도 시돈의 아브디-밀쿠티 왕)가 목에 밧줄이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14][20] 이 정복으로 수많은 이집트인이 아시리아 본토로 강제 이주되었다.[21] 에사르하돈은 자신의 승리 비문에 이집트 정복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위대한 신들에게 저주받은 이집트 및 쿠시[23]의 왕 타하르카(의 군대)에 대해, 이슈후프리에서 그의 거성 멤피스까지 15일의 여정을, 나는 매일 휴식 없이 살육을 했다. 그 자신에게도, 나는 다섯 번 화살촉으로 쏘아,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나는 그의 거성 멤피스를 포위하고, 갱도, 파구, 공성 사다리를 이용하여, 반나절 만에 점령했다. 나는 (멤피스 시를) 약탈하고,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그의 왕비, 하렘, 왕태자[24] 우샤나후르, 기타 왕자 및 공주들, (그리고) 그의 재화, 말, 소, 소가축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전리품으로 아시리아로 운반했다. 나는 쿠시(의 세력)를 이집트에서 근절했다. 나에 대한 굴종(의 확보)을 위해, 그곳(이집트)에 아무도(쿠시인을) 남기지 않았다. 나는 이집트 전역에 걸쳐 (각지에) 왕, 총독, 장관, 상업항 감독관, 대리, 속리를 새롭게 임명했다. 나의 주 아슈르 및 (다른) 위대한 신들을 위해, 기증과 헌물을 영원히 정하고, 나의 지배에 대해서는, 공납과 진물을 해마다 끊임없이 그들(이집트인)에게 부과했다[25].
나는 나의 이름을 새긴 석비를 만들게 하고, 그 위에 나의 주 아슈르 신의 영광과 무용, 나의 훌륭한 소행, 내가 어떻게 나의 주 아슈르 신의 가호 아래 빈번히 다녔는지, 그리고 나의 정복의 손의 강함을 쓰게 했다. 세상의 끝까지 모든 나의 적에게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이것을 세웠다.[26]
아시리아가 이집트를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무기의 차이였다. 아시리아는 철광석 산지인 아르메니아 고원을 장악하여 철제 무기로 군대를 무장시킨 반면, 이집트 군은 여전히 청동제 무기를 주로 사용하여 전력에서 뒤처졌다.[20]
에사르하돈은 기원전 671년 이후에도 두 차례나 더 대리 왕 의식을 치렀다. 이로 인해 거의 1년 가까이 왕으로서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16] 이 기간 동안 제국의 행정은 대부분 왕세자인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슈-슈무-킨이 맡았으며, 이집트 주둔군은 환관장 아슈르-나시르가 지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6]
한편, 에사르하돈의 이집트 정복 직후, 하란에서 새로운 불길한 예언이 퍼져나갔다.[27] 신들린 여성이 전한 예언은 다음과 같았다.
> 이것은 누스쿠 신의 말씀이다. 왕권은 사시(Sasî)에게 속한다. 나는 센나케리브의 이름과 씨앗을 부수겠다![27]
이 예언은 센나케리브의 모든 후손, 즉 에사르하돈과 그의 아들들이 왕위를 차지할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며 반란의 빌미를 제공했다.[27] 예언에서 왕으로 지목된 사시(Sasî)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과거 아시리아 왕족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제국 전역에서 빠르게 지지 세력을 모았고, 심지어 에사르하돈의 환관장 아슈르-나시르까지 사시 편에 섰다.[28]
에사르하돈은 제국 전역에 퍼져 있는 정보망을 통해 이 음모를 빠르게 파악했다. 그는 사시 지지자들이 하란뿐 아니라 바빌론과 아시리아 핵심 지역에서도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에사르하돈은 기원전 671년, 첫 번째 대리 왕 의식이 끝난 지 불과 3개월 만에 다시 한번 대리 왕 의식을 치르며 상황을 주시했다.[29]
두 번째 대리 왕 의식이 끝나자마자 에사르하돈은 모습을 드러내고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여 음모 가담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다. 사시와 예언을 전한 여성의 운명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숙청으로 아시리아 행정 체계는 큰 타격을 입었고, 기원전 670년에는 한 해 동안의 연호를 정하는 '림무' 관직조차 임명되지 못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에사르하돈은 이 사건 이후 궁정 내 보안을 대폭 강화했다.[30]


숙청 이후에도 에사르하돈의 건강 문제와 불안감은 계속되었다. 그는 기원전 669년에 세 번째로 대리 왕 의식을 치렀다. 이 무렵, 이집트 남부에서 파라오 타하르카가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아시리아 내부의 혼란한 상황이 이집트의 반란을 부추겼을 가능성이 있다.[1][31] 에사르하돈이 직접 임명했던 이집트 총독들 중 일부까지 조공을 중단하고 반란에 가담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14]
에사르하돈은 100일간의 세 번째 은둔 생활을 마친 후, 건강이 다소 회복된 듯 이집트로의 세 번째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집트 국경에 도착하기도 전인 기원전 669년 11월 1일,[32] 하란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33] 그의 죽음은 예상치 못한 자연사였던 것으로 보인다.[31] 에사르하돈의 사후, 아들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슈-슈무-킨은 그의 사전 계획 덕분에 큰 혼란 없이 각각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왕위를 계승했다.[31]
3. 7. 사시의 반란
에사르하돈의 이집트 정복 직후, 하란에서 새로운 예언이 퍼져나갔다. 이전에 하란에서 내려진 예언이 에사르하돈의 이집트 정복으로 증명되면서, 하란의 신탁은 신뢰성을 얻게 되었다. 신들린 상태가 된 한 여성이 전한 예언은 다음과 같았다.> 이것은 누스쿠 신의 말씀이다. 왕권은 사시(Sasî)에게 속한다. 나는 센나케리브의 이름과 씨앗을 부수겠다!
이 예언은 산헤립의 모든 후손, 즉 에사르하돈을 포함한 현 왕가를 참칭자로 규정하며 에사르하돈에 대한 반란의 종교적 명분을 제공했다. 에사르하돈이 앓고 있던 피부 질환이 하란 방문 중에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이 그의 왕위 정통성을 문제 삼는 빌미가 되었을 수도 있다. 예언에서 왕으로 지목된 사시(Sasî)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왕위 계승 후보로 거론될 정도라면 과거 아시리아 왕족, 어쩌면 사르곤 2세의 후손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시는 빠르게 제국 전역에서 지지를 확보했으며, 심지어 에사르하돈의 환관장으로 이집트 공략을 대리 지휘했던 것으로 보이는 아슈르-나시르(Ashur-nasir)마저 사시에게 가담했다.
에사르하돈은 그의 망상증 때문에 제국 전역에 구축해 둔 방대한 신하들의 정보망을 통해 이 음모를 비교적 신속하게 파악했다. 정보원들은 계획된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에사르하돈에게 보고하기로 맹세했으며, 그들의 보고를 통해 에사르하돈은 사시 지지자들이 하란뿐만 아니라 바빌론과 아시리아 핵심 지역에서도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잠시 정보를 수집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에사르하돈은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기원전 671년, 첫 번째 의식이 끝난 지 불과 3개월 만에 두 번째 "대리 왕" 의식을 치렀다.
"대리 왕" 의식이 끝나자마자, 숨어 있던 에사르하돈은 모습을 드러내고 음모에 가담한 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며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이는 그의 치세 중 두 번째 숙청이었다. 사시와 그에게 왕위를 예언했던 여성의 운명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체포되어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숙청으로 수많은 관리가 제거되면서 아시리아의 행정 기구는 이후 수년간 어려움을 겪었다. 기원전 670년 초에는 그 해의 연호를 정하는 림무(기년관) 직책이 공석으로 남는, 아시리아 역사상 매우 이례적인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사시 지지자들의 거점으로 추정되는 여러 도시에서 기원전 670년경 파괴된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에사르하돈은 보안을 크게 강화했다. 그는 자신을 만나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 궁정 내 새로운 직위를 2개 신설하고, 궁궐 출입을 통제하는 관리의 수를 제한하는 등 통제를 강화했다.
3. 8. 죽음
기원전 672년, 에사르하돈은 생존한 아들 중 장남인 샤마슈-슈무-킨을 바빌론의 계승자로, 차남인 아슈르바니팔을 아시리아의 계승자로 삼았다.에사르하돈은 자신이 어려운 상황 끝에 아시리아 왕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자신의 사후 권력 이양이 순조롭고 평화롭게 이루어지도록 여러 단계를 거쳤다. 에사르하돈과 동방의 메디아 왕국 속왕 라마타이아(Ramataia) 간에 기원전 672년에 체결된 조약(서약)은 에사르하돈의 모든 아들이 당시 미성년이었고 문제가 있음을 시사했다. 이 조약은 또한 에사르하돈이 자신의 사후에 그의 후계자 즉위에 여러 파벌이 반대하고, 삼촌, 사촌, 심지어 "전 왕족의 자손"과 "아시리아의 수장 또는 총독 중 한 명"을 추대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이는 적어도 에사르하돈의 형제 중 몇 명이 이 시점에서 생존해 있었고, 그들 또는 그들의 자녀가 자신의 자녀에게 위협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전 왕족의 자손"에 대한 언급은 에사르하돈의 할아버지 사르곤 2세가 찬탈로 왕위를 차지했고, 그 이전의 왕들과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할 수도 있다. 과거 왕가의 자손이 아직 생존해 있고, 아시리아 왕위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입장에 있었을 수 있다.
자신의 죽음에 따른 내전을 피하기 위해 에사르하돈은 기원전 674년에 장남 신-나딘-아플리(Sin-nadin-apli)를 왕세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그는 2년 후에 사망하여, 다시 왕위 계승이 위기에 직면했다. 이 때 에사르하돈은 두 명의 왕세자를 임명했다. 생존한 왕자 중 장남인 샤마슈-슈무-킨을 바빌론의 계승자로 선택하고, 차남인 아슈르바니팔을 아시리아의 왕세자로 임명했다. 이 두 왕자는 니네베를 함께 방문하여 외국 대표, 아시리아 귀족, 군인들의 축하를 받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아시리아 왕은 동시에 바빌론의 왕을 겸임해 왔으며, 아들 중 한 명을 아시리아 왕의 후계자로, 다른 한 명을 바빌론 왕의 후계자로 삼는 것은 새로운 시도였다.
아시리아 왕위는 분명히 에사르하돈의 첫 번째 칭호였다. 아시리아 왕세자에는 동생을, 바빌론 왕세자에는 형을 임명한 선택은 그들의 어머니의 출신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아슈르바니팔의 어머니는 아마 아시리아인이고, 샤마슈-슈무-킨은 바빌론 여성의 아들이었다(이는 불확실하며,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슈-슈무-킨이 동복 형제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 때문에 만약 샤마슈-슈무-킨이 아시리아 왕위에 오른다면 문제가 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아슈르바니팔은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아들이었고, 형 다음으로 왕위 계승의 유력한 후보였다. 에사르하돈은 아마도 바빌로니아인과 연관된 자를 왕으로 옹립하는 것에 바빌로니아인이 만족할 것이라고 추측했고, 그래서 샤마슈-슈무-킨을 바빌론과 아시리아 제국의 남부 후계자로 삼았다. 에사르하돈이 작성한 조약은 이 두 아들의 관계가 어떠할 것이라고 그가 예상했는지 다소 불분명하다. 아슈르바니팔이 제국의 첫 번째 계승자였음은 분명했고, 샤마슈-슈무-킨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아슈르바니팔이 샤마슈-슈무-킨의 관할에 간섭하지 않을 것도 명시되어 있어, 이는 보다 대등한 관계를 보여준다. 두 왕세자는 즉시 아시리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병약한 아버지의 어깨에 짊어진 부담의 일부를 덜었다.
에사르하돈의 어머니 나키아는 에사르하돈이 자신의 즉위 초기에 발생한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취했던 조치와는 별개로, 잠재적 적과 왕위 주장자들에게 아슈르바니팔이 아시리아 왕위에 오르는 것에 대한 지지를 맹세하게 했다.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슈-슈무-킨의 왕위 계승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에사르하돈 자신도 또한 최소 6명의 동방 독립 제국의 군주 및 아시리아의 핵심 지역 밖에 있던 여러 총독과 기원전 672년에 계승 조약을 체결했다. 아마도 이러한 조약을 작성하게 된 주된 동기는 에사르하돈의 형제, 특히 아르다 물리시가 아직 살아 있었고 아시리아 왕위를 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몇몇 비문에 따르면 아르다-무리시는 기원전 673년 시점에도 살아 있었다.
에사르하돈은 음모를 헤쳐나갔지만, 병과 망상증은 치료되지 않았다. 불과 1년 후인 기원전 669년, 그는 다시 '대리왕' 의식을 치렀다. 이 무렵, 한 번 물리친 파라오 타하르카가 이집트 남부에서 나타났고, 아마도 아시리아 내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과 맞물려 에사르하돈의 지배로부터 이집트의 이탈을 촉진했다.
에사르하돈은 이집트의 반란 보고를 받고, 그가 직접 이집트에 임명한 총독들 중 일부조차 그에게 조공을 중단하고 반란에 가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0일간의 은둔에서 돌아온 후, 이전보다 건강을 회복한 것으로 보이는 에사르하돈은 이집트로의 세 번째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이집트 국경에 도달하기 전, 기원전 669년 11월 1일, 하란에서 사망했다. 원정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는 사료가 없는 것은, 에사르하돈의 죽음이 예상치 못한 자연사였음을 시사한다.
에사르하돈의 사후, 그의 아들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슈-슈무-킨이 정치적 소란이나 유혈 사태 없이 왕위를 계승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에사르하돈의 왕위 계승 계획이, 적어도 처음에는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4. 외교
현대 역사가들은 에사르하돈을 "의심이 많은", "미신적인", "편집증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당시 신하들이 남긴 기록, 특히 흉조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질문과 신하들의 배신을 극도로 두려워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26] 에사르하돈은 평생 불길한 징조를 두려워하고 신경질적으로 천문 현상을 걱정했으며, 이는 당시 점성술사들의 보고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27]
에사르하돈은 즉위 과정에서의 혼란 때문에 자신의 신하, 관리, 심지어 가족까지 불신했다. 그는 친족이나 관리들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에 대해 신탁과 신관들의 조언을 자주 구했다. 특히 남성 친족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보였으나, 여성 친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왕비 에샤라 함마트, 왕모 나키아, 그리고 공주 셰루아 에테라트는 이전 아시리아 역사상 어떤 여성보다도 훨씬 큰 영향력과 정치적 권력을 행사했다.
모든 아시리아 왕들이 정치적·군사적 문제에 대해 신의 인도를 구했지만, 에사르하돈은 유독 신하들의 배신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신탁에 자주 던졌다. 이는 그의 통치 시기에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이러한 에사르하돈의 성향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가 편집증(paranoid)을 앓았다고 보며, 일부는 아버지 산헤립의 암살 이후 편집성 인격 장애를 겪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편집증'이라는 용어 사용에 신중하며, 그가 실제로 많은 반대자와 적을 가졌을 가능성을 고려하여 단순히 "의심이 많은(mistrustful)" 인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성향과 통치 방식은 대내 정책뿐 아니라 대외적인 외교 관계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4. 1. 아랍과의 외교

기원전 671년 에사르하돈의 이집트 원정에서 아랍인과 시나이 반도의 다른 부족들의 지원은 매우 중요했다. 에사르하돈은 그의 아버지 산헤립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정복했던 아랍 부족들, 특히 아둠마투 주변 부족들의 충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아둠마투의 왕 하자엘은 에사르하돈에게 조공을 바치고 여러 선물을 보냈다. 에사르하돈은 이에 화답하여 수년 전 산헤립이 빼앗았던 하자엘의 신상들을 돌려주었다. 하자엘이 죽고 그의 아들 야우타가 왕위를 계승하자, 에사르하돈은 야우타의 왕위를 인정하고 그가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야우타는 에사르하돈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아시리아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야우타는 왕좌에서 도망쳤다. 야우타는 훗날 아슈르바니팔의 통치 기간 동안 잠시 복권되었으나, 결국 다시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었다가 사로잡혀 니네베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에사르하돈은 또한 아시리아 왕궁에서 자란 타부아라는 여성을 "아랍의 여왕"으로 임명하여 그녀가 자신의 백성에게 돌아가 통치하도록 허락했다. 다른 사례로, 에사르하돈은 기원전 676년 야디(Yadi)라는 도시의 지역 왕으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은 후, "바자"(Bazza, 아라비아 반도 동부로 추정) 지역을 침략했다. 이 원정에서 아시리아 군대는 이 지역의 8명의 왕을 격파하고 정복지를 야디의 왕에게 넘겨주었다.
4. 2. 메디아와의 외교
에사르하돈 치세 동안 많은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이 아시리아의 봉신이 되거나 그 상태를 유지했다. 기원전 676년 이전에 에사르하돈의 군대는 메디아 중앙 어딘가로 추정되는 비크니 산 근처에서 메디아 왕 에파르나와 시디르파르나를 물리쳐, 아시리아가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음을 메디아인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승리 이후 많은 메디아인들이 아시리아에 충성을 맹세하고 니네베에 선물을 바쳤으며, 에사르하돈이 그들의 영토에 아시리아 총독을 임명하는 것을 받아들였다.에사르하돈이 아들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슈-슈마-우킨의 계승을 위해 신하들에게 충성 맹세를 강요했을 때, 메디아의 통치자들과 왕자들도 이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에사르하돈과 메디아의 관계가 항상 평화롭지는 않았다. 기원전 672년까지 메디아가 아시리아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에사르하돈이 점을 칠 때 메디아는 잠재적인 적으로 자주 언급되었다. 메디아에서 에사르하돈의 주요 경쟁자 중 한 명은 아시리아인들이 카슈타리투라고 부르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아시리아 영토를 약탈했다. 이 인물은 메디아 제국의 두 번째 왕인 프라오르테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5. 가족 및 자녀
에사르하돈은 자신이 왕위를 얻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에, 사후 권력 이양이 평화롭게 이루어지도록 여러 조치를 취했다. 기원전 672년경, 에사르하돈과 동쪽 메디아 왕국의 속주 통치자 라마타이아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서는 당시 에사르하돈의 모든 아들이 미성년자였음을 언급하며 후계 문제의 어려움을 시사한다. 이 조약은 또한 에사르하돈이 후계자의 형제, 삼촌, 사촌, "전 왕족의 후손", "아시리아의 족장 또는 총독 중 한 명" 등 여러 세력이 자신의 사후 후계자에게 반기를 들 가능성을 우려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에사르하돈의 형제 중 일부가 여전히 살아있어 잠재적 위협이 되었음을 암시하며, 할아버지 사르곤 2세가 찬탈로 왕위에 올랐기에 이전 왕가의 후손들이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음을 나타낸다.
내전을 피하고자 에사르하돈은 기원전 674년 장남 신-나딘-아플리를 왕세자로 임명했으나, 그가 2년 만에 사망하면서 다시 계승 위기에 직면했다. 이에 에사르하돈은 두 명의 왕세자를 임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살아있는 아들 중 장남인 샤마쉬-슈움-우킨은 바빌론의 후계자로, 차남 아슈르바니팔은 아시리아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는 아시리아 왕이 바빌론 왕을 겸임하던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였다. 두 왕자는 니네베에서 외국 대표, 귀족, 군인들의 축하를 받았다.
아시리아 왕위 계승자로 차남을, 바빌론 왕위 계승자로 장남을 선택한 배경에는 두 아들의 어머니가 달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아슈르바니팔의 어머니는 아시리아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반면, 샤마쉬-슈움-우킨의 어머니는 바빌론 출신 여성일 수 있다(확실하지는 않으며, 두 아들이 같은 어머니를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바빌론계 혈통인 샤마쉬-슈움-우킨이 아시리아 왕위에 오르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에, 아시리아 혈통의 아슈르바니팔이 더 적합한 후보로 여겨졌다. 에사르하돈은 바빌로니아인들이 자신들과 연관된 왕을 갖는 것에 만족할 것이라 판단하여 샤마쉬-슈움-우킨에게 바빌론과 제국 남부를 맡긴 것으로 보인다. 에사르하돈이 작성한 조약은 두 아들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지는 않았다. 아슈르바니팔이 제국의 주된 후계자로서 샤마쉬-슈움-우킨의 충성을 받아야 했지만, 동시에 아슈르바니팔이 샤마쉬-슈움-우킨의 영역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도 있어 다소 모호하고 동등한 지위를 암시하기도 한다. 두 왕세자는 곧 정치에 깊이 관여하며 병약한 아버지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에사르하돈의 어머니 나키아 역시 아들 아슈르바니팔의 아시리아 왕위 계승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잠재적 경쟁자들이 아슈르바니팔의 즉위를 지지하도록 맹세하게 함으로써, 에사르하돈 즉위 초기의 혼란과 유혈 사태를 막고자 했다. 에사르하돈 자신도 동방의 독립 군주들과 제국 내 총독들과 계승 조약을 체결하여 두 아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여전히 살아있던 그의 형제들, 특히 아르다-물리수가 왕위를 노릴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에사르하돈에게는 여러 명의 아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계승 조약에서 "아슈르바니팔의 어머니가 낳은 아들"과 "나머지 에사르하돈의 아들들"을 구분하는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들 중 이름이 알려진 유일한 왕비는 '''에샤라-함마트''' (Ešarra-ḫammatakk)이다.[3] 그녀는 에사르하돈의 정비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사후 에사르하돈이 그녀를 위해 지은 영묘에 대한 기록을 통해 주로 알려져 있다. 에사르하돈의 많은 자녀 중 누가 에샤라-함마트의 소생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에사르하돈에게는 최소 18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이는 고대 아시리아 기준으로도 대가족에 해당한다. 일부 자녀들은 아버지 에사르하돈처럼 만성적인 질병을 앓아 궁정 의사의 지속적인 보살핌이 필요했다. 이름이 알려진 에사르하돈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 '''세루아-에테라트''' (Šeruʾa-eṭiratakk)[4] – 에사르하돈의 장녀이자 이름이 알려진 유일한 딸. 아슈르바니팔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모든 자녀 중 맏이였을 가능성이 있다. 아버지 에사르하돈과 오빠 아슈르바니팔의 궁정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 '''신-나딘-아플리''' (Sîn-nadin-apliakk)[5] – 에사르하돈의 장남. 기원전 674년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2년 뒤인 기원전 672년에 예기치 않게 사망했다.
- '''샤마쉬-슈무-우킨''' (Šamaš-šumu-ukinakk) – 에사르하돈의 둘째 아들. 기원전 672년부터 바빌론의 왕세자였으며, 이후 바빌론의 왕이 되었다.
- '''샤마시-메투-우발리트''' (Šamaš-metu-uballiṭakk)[6] – 에사르하돈의 셋째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샤마시 신이 죽은 자를 살렸다"는 의미의 이름으로 보아 건강이 좋지 않았거나 출생 과정이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672년까지 생존했으나 건강 문제로 동생 아슈르바니팔에게 왕위 계승 순위에서 밀렸을 수 있다. 일설에는 아슈르바니팔의 즉위를 받아들이지 않아 처형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 '''아슈르바니팔''' (Aššur-bāni-apliakk) – 에사르하돈의 넷째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672년부터 아시리아의 왕세자였으며, 이후 아시리아의 왕이 되었다.
- '''아슈르-타키샤-리블루트''' (Aššur-taqiša-libluṭakk) – 에사르하돈의 다섯째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병약했던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672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아슈르-무킨-팔레야''' (Aššur-mukin-paleʾaakk)[7] – 에사르하돈의 여섯째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에사르하돈이 왕위에 오른 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아슈르바니팔 통치 시기에 아수르 시의 사제로 임명되었다.
- '''아슈르-에텔-샤메-에르세티-무발리쑤''' (Aššur-etel-šamê-erṣeti-muballissuakk)[8] – 에사르하돈의 일곱째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에사르하돈 즉위 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아슈르바니팔 통치 시기에 하란 시의 사제로 임명되었다.
- '''아슈르-사라니-무발리쑤''' (Aššur-šarrani-muballissuakk)[9] – 단 하나의 편지에서만 언급되며, 아슈르-에텔-샤메-에르세티-무발리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 '''신-페루-우킨''' (Sîn-perʾu-ukinakk)[10] – 왕을 방문할 적절한 시기를 묻는 편지와 그의 건강 상태를 언급하는 편지를 통해 존재가 알려져 있다.
6. 유산
에사르하돈은 아버지 센나케리브가 사망한 기원전 681년부터 자신이 사망한 기원전 669년까지 아시리아 제국을 다스린 사르곤 왕조의 세 번째 왕이다. 그는 기원전 671년 이집트를 정복하여 아시리아 제국의 영토를 역사상 최대로 확장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아버지 센나케리브가 파괴했던 바빌론 시를 재건했다. 죽음을 앞두고는 두 아들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슈 슈움 우킨에게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준비했다.
6. 1. 에사르하돈 사후 아시리아

에사르하돈 사후, 그의 아들 아슈르바니팔이 아시리아의 왕위를 계승했다. 아슈르바니팔의 형 샤마쉬-슈마-우킨은 동생의 대관식에 참석한 후, 아시리아가 약탈했던 벨 신상을 바빌론으로 돌려보내고 그곳의 왕이 되었다. 아슈르바니팔은 바빌론에서 샤마쉬-슈마-우킨을 위해 성대한 대관식 축제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샤마쉬-슈마-우킨은 바빌론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의 봉신 지위에 있었다. 아슈르바니팔은 바빌론에서 전통적으로 바빌론 군주가 주관하던 왕실 제물을 계속 바쳤으며, 제국 남부의 총독과 주둔 군대 및 경비병 역시 아시리아인이었다. 샤마쉬-슈마-우킨의 초기 바빌론 통치는 비교적 평화로웠고, 그는 요새와 신전을 복원하는 데 힘썼다.
두 형제가 각자의 왕위에 오른 후, 아슈르바니팔은 기원전 667년에 에사르하돈이 마치지 못한 이집트 원정을 완수하기 위해 출정했다. 그는 남쪽으로 테베까지 진군하며 약탈을 자행했고, 승리 후에는 에사르하돈의 궁정에서 교육받았던 프삼티크 1세와 네코 1세를 봉신 파라오로 남겨두었다. 기원전 666년에서 665년 사이에는 타하르카의 조카인 탄타마니가 이집트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샤마쉬-슈마-우킨은 점차 세력을 키우며 형 아슈르바니팔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기원전 652년, 그는 엘람, 쿠쉬, 칼데아인 등 아시리아의 적대 세력과 동맹을 맺고, 아슈르바니팔이 남부 도시에서 제물을 바치는 것을 금지했다. 이는 4년간 지속된 내전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650년경 샤마쉬-슈마-우킨의 상황은 악화되었고, 아슈르바니팔의 군대는 십파르, 보르시파, 쿠타, 그리고 바빌론까지 포위했다. 결국 기원전 648년 바빌론은 함락되었고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약탈당했다. 샤마쉬-슈마-우킨은 이때 사망했으며,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슈르바니팔은 긴 통치 기간 동안 아시리아의 모든 적과 경쟁자들에 맞서 끊임없이 원정을 벌였다. 그의 사후 아들들인 아슈르-에틸-일라니와 신샤리쉬쿤이 잠시 제국을 통치했지만, 이 시기에 많은 아시리아 속국들이 독립을 선언하며 제국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627년부터 612년 사이, 아시리아 제국은 사실상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 메디아와 새로 독립한 신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한 연합 세력이 아시리아 본토를 침공했고, 기원전 612년에는 수도 니네베 자체가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아시리아는 마지막 왕 아슈르-우발리트 2세가 기원전 609년 하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최종적으로 멸망했다.
6. 2. 역사학자들의 평가
에사르하돈은 그의 선임자인 센나케리브와 후임자인 아슈르바니팔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아시리아 왕 3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일반적으로 센나케리브보다 더 관대하고 온화한 인물로 여겨지며, 정복한 민족들을 달래고 통합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에사르하돈은 이집트 정복, 반항적이기로 악명 높았던 바빌로니아의 성공적이고 평화로운 통치, 그리고 바빌론의 야심찬 재건 사업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이를 바탕으로 신아시리아 제국의 가장 성공적인 통치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아시리아학자 카렌 라드너에 따르면, 에사르하돈은 다른 아시리아 왕들에 비해 남아있는 사료를 통해 개인적인 면모가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아시리아 왕들은 주로 왕실 비문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에사르하돈의 통치 시기는 약 10년간에 걸쳐 작성된 궁정 서신 등 다양한 문서들이 보존되어 있어 예외적으로 기록이 풍부하다.
아버지 센나케리브 암살 이후 형제들과의 내전을 겪고 왕위에 오른 경험은 에사르하돈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평생 동안 피해망상(paranoia)과 자신의 관리, 총독, 심지어 남성 친족들에 대한 불신에 시달렸다. 이러한 불안감 때문에 에사르하돈이 사용했던 궁전 대부분은 각 도시의 주요 인구 밀집 지역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경비가 삼엄한 요새 형태를 띠었다. 또한 남성 친족에 대한 불신의 영향으로, 그의 통치 기간에는 어머니 나키아나 딸 셰르아 에테라트와 같은 여성 친족들이 이전 아시리아 역사에서 여성들이 가졌던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과 정치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비교적 짧고 어려움이 많았던 통치 기간과 그가 겪었던 피해망상, 우울증, 잦은 질병에도 불구하고, 에사르하돈은 가장 성공적인 아시리아 왕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다. 그는 기원전 681년에 신속하게 형제들의 반란을 진압했고,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양쪽에서 야심찬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완수했으며, 메디아, 아라비아 반도, 아나톨리아, 코카서스, 레반트 지역으로의 군사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또한 이집트를 격파하고 정복했으며, 죽음을 앞두고는 두 아들 아슈르바니팔과 샤마슈슘우킨에게 비교적 평화롭게 권력을 이양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아슈르바니팔이 자신의 유명한 도서관을 위해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학 작품들을 수집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이러한 수집 활동은 이미 에사르하돈의 통치 기간에 시작되었다. 따라서 에사르하돈이 아슈르바니팔의 수집 활동과 교육을 장려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7. 칭호

에사르하돈은 왕세자로 임명되고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묘사한 비문에서 다음과 같은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 에사르하돈, 대왕, 아시리아의 왕, 바빌론의 부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사방의 왕, 그의 주군인 위대한 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자. 아슈르, 마르두크, 나부, 니네베의 이슈타르와 아르벨라의 이슈타르가 그를 지명하고 그의 이름을 왕위에 올렸다.
다른 비문에서는 에사르하돈의 칭호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에사르하돈, 대왕, 강력한 왕, 우주의 왕, 아시리아의 왕, 바빌론의 부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대왕이며 강력한 왕, 아시리아의 왕이었던 센나케리브의 아들. 대왕이며 강력한 왕, 아시리아의 왕이었던 사르곤의 손자. 아슈르 신, 신, 샤마슈, 나부 신, 마르두크 신, 니네베의 이슈타르 신, 아르벨라의 이슈타르 신의 보호 아래 있는 자. 그의 주군, 위대한 신들은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그의 가는 길에 그에게 필적할 자를 두지 않았다.
에사르하돈의 왕 칭호에 대한 더 긴 버전과 신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대한 자랑은 또 다른 비문에 다음과 같이 보존되어 있다.
: 나는 에사르하돈, 세계의 왕, 아시리아의 왕, 강력한 전사, 모든 군주의 으뜸,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의 아들이자, 세계의 왕이며 아시리아의 왕 사르곤의 손자이다. 아슈르 신과 닌릴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신 신과 샤마슈 신의 총애를 받으며, 나부 신과 마르두크 신이 총애하는 자, 여왕 이슈타르의 사랑의 대상이며 위대한 신들의 마음의 소원이다. 강력하고 현명하며 사려 깊고, 많은 것을 알고, 위대한 신들의 조상을 복원하고 모든 대도시의 신전을 재건하기 위해 위대한 신들이 왕으로 지명한 자이다. 아슈르 신전의 건설자이며 바빌론의 에사길라의 재건자, 그곳에 거주하는 여러 신들과 여러 여신의 조각상을 복원한 자, 각지의 포로가 된 신들을 아슈르에서 각각의 땅으로 돌려보내어 신들이 평화로운 집에 살도록 한 자, 마침내 그는 모든 신전을 완전히 복원하고, 신들을 자신의 신전에 살게 하여, 영원히 그곳에서 지내도록 했다.
신들의 힘에 의지하여,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승리하며 진군하며, 필적하는 자 없이, 신들이 우리 발밑에 사방 세계의 군주들을 복종하게 한 자가 나이다. 아슈르 신에게 반항한 모든 땅에 대해 신들은 나를 파견했다. 신들의 아버지 아슈르 신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평화 속에서 살도록, 아시리아의 경계를 넓히기 위해, 나를 임명했다. 신 신, 왕관의 지배자. 강력함, 남자다움, 용기의 신. 그가 나의 운명을 만들었다. 샤마슈 신, 신들의 빛. 나의 명예로운 이름에, 그는 가장 높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마르두크 신, 신들의 왕. 그는 강력한 폭풍과 같이, 나의 지배에 대한 공포로 사방 세계 각지를 덮었다. 신들 중에 만능인 네르갈 신. 그는 외경, 공포, 훌륭한 외경을 나에게 주셨다. 싸움과 전쟁의 여왕 이슈타르 신. 그녀는 강한 활, 무시무시한 던지는 창을 나에게 주셨다.
아마도 에사르하돈의 왕 칭호 중에서 가장 길고 가장 정교한 버전은 이집트에 대한 승리 후에 그가 세운 승리의 비문에 있는 것이다.
: 에사르하돈, 대왕, 강한 왕, 세계의 왕, 아시리아의 왕, 바빌론의 부왕, 수메르와 아카드 왕, 카르두니아시의 왕, 그 모든 것, 하 이집트, 상 이집트, 및 쿠시의 여러 왕들의 왕, 위대한 신들을 두려워하는 자, 아슈르 신, 샤마슈 신, 나부 신, 마르두크 신의 자랑스러운 전제군주, 여러 왕들의 왕, 무자비한 자, 악을 평정하는 자, 공포를 두르는 자, 싸움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자, 완전한 영웅, 싸움에서 무자비한 자, 전능한 군주, 군주들의 고삐를 가진 자, 맹렬한 사냥개, 그를 낳은 아버지의 복수자, 아슈르 신, 샤마슈 신, 나부 신, 마르두크 신의 보호를 받는 왕, 이 신들, 그의 동맹국은 올바르게 걸으며, 그의 소망을 이룬다.
그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군주들을, 그는 덤불의 갈대와 같이 꺾어, 발 밑에 짓밟았다. 위대한 신들에게 풍요로운 공물을 바치는 자, 그가 생각하는 것은 여러 신들과 여러 여신의 숭배에 대한 것이다. [결락] 아슈르의 신전의 건설자, 그 장식을 완성한 자, 에-사길라와 바빌론의 재건자, 그 의식을 세세한 부분까지 실행한 자, 포로가 된 땅의 사람들을 [결락]에서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낸 자.
왕, 그가 바치는 희생은 위대한 신들에게 사랑받고, 신전에서의 그 신직을 영구히 확립하며, 무자비한 무기를 왕의 선물로 받았다. 왕, 여러 왕들의 왕인 마르두크 신이 그 주권을 위대한 것으로 만들고, 사방 세계의 여러 왕들의 훨씬 위에 있는 것으로 했다. 신은 모든 땅을 그의 발 밑에 귀순시키고, 그들에게 공납과 세금을 부과했다. 왕, 그의 걸음은 폭풍이며, 그가 하는 것은 격노하는 늑대이다. 그의 앞은 폭풍이며, 그의 뒤에는 구름이 끓어올랐다. 싸움을 시작하는 그는 강력하고, 그는 태워 없애는 불꽃, 꺼지지 않는 불이다.
세계의 왕이며 아시리아의 왕이었던 산헤립의 아들. 세계의 왕이며 아시리아의 왕, 바빌론의 부왕, 수메르와 아카드 왕이었던 사르곤의 손자. 아다시의 아들이며 신권의 영원한 기원인 바알-바니의 계보에 이어진 자. 아다시는 아시리아 왕국을 창설하고, 아슈르 신, 샤마슈 신, 나부 신, 마르두크 신, 그의 주된 위대한 신들의 명령에 의해 아슈르 도시의 예속을 끝냈다.
나는 강력하고, 나는 모든 것이 강력하며, 나는 영웅이고, 나는 거대하며, 나는 엄청나게 거대하며, 나에게 영광이 있으며, 나는 숭배받고, 모든 왕들 중에 나의 동등자는 없다. 아슈르 신, 나부 신, 마르두크 신에게 선택받고, 신 신에게 불리고, 아누 신의 호의를 받고, 여왕 이슈타르와 전 세계의 여신의 총애를 받으며, 적들의 땅을 완전히 파괴하는 무자비한 무기, 그것이 나이다.
왕, 싸움과 전투에서 강력하며, 그의 적들의 거처를 파괴하는 자, 그의 적들을 죽이고, 그에게 해를 끼치는 자를 근절하고, 그에게 따르지 않는 자를 따르게 하고, 모든 사람들을 그의 권위 아래에 둔 자, 우리의 고귀한 주 아슈르 신, 샤마슈 신, 나부 신, 마르두크 신, 이 신들의 말은 변경될 수 없다. 나의 숙명으로 운명 지어진 무적의 왕국. 또한, 귀부인인 이슈타르 신, 나의 신권의 애인은 나의 손에 강한 활을 쥐게 하고, 불성실한 자들에게 법을 가져다주는 강력한 창을 수여하며, 나의 소망을 이루고, 따르지 않는 모든 군주들을 나의 발밑에 복종시켰다.
8. 연표
| 연도(기원전) | 연령(*) | 사건 |
|---|---|---|
| 기원전 713년경 | 0 | 에사르하돈, 탄생 |
| 기원전 701년 | 12 | 아버지 센나케리브가 시돈을 항복시킴 |
| 기원전 694년 | 19 | 바빌론 태수였던 장남 아슈르 나딘 슈미가 엘람으로 끌려가 소식을 알 수 없게 됨 |
| 기원전 689년 | 24 | 아버지 센나케리브가 반란에 대한 처벌로 바빌론 시를 파괴 |
| 기원전 684년 | 29 | 아버지 센나케리브가 후계자 지명을 아르다 물리시에서 에사르하돈으로 변경 |
| 기원전 681년 | 32 | 형 아르다 물리시 등이 아버지 센나케리브를 암살. 에사르하돈이 아시리아 왕이 됨 |
| 기원전 679년 | 34 | 킴메르인이 제국 내에 침입. 시돈이 반란을 일으킴 |
| 기원전 677년 | 36 | 반란을 일으킨 시돈을 재점령. 킴메르인을 격퇴 |
| 기원전 676년 | 37 | 킴메르인이 제국 내에 재침입. 에사르하돈은 자그로스 산맥과 토로스 산맥 방면으로 원정 |
| 기원전 675년 | 38 | 엘람이 침공하여, 십파르가 빼앗김. 아나톨리아 지방에 있던 아시리아군 주력은 남쪽으로 전환, 엘람을 격파 |
| 기원전 674년 | 39 | 장남 신나딘아플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 |
| 기원전 673년 | 40 | 이집트 원정 (아마 실패). 정신적인 병세가 악화 |
| 기원전 672년 | 41 | 후계자로 지명했던 장남 신나딘아플리가 사망. 아슈르바니팔을 아시리아 왕의 후계로 지명, 샤마슈 슈움 우킨을 바빌론 왕의 후계로 지명 |
| 기원전 671년 | 42 | 이집트 원정 (2번째) 여러 차례 대리 왕을 세워 제국의 통치에 혼란을 초래 |
| 기원전 670년 | 43 | 사시의 반란에 대한 대처 |
| 기원전 669년 | 44 | 에사르하돈, 사망 (병사?) |
(* 생년을 기원전 713년으로 계산한 경우의 대략적인 연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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