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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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보산 사건은 1931년 만주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일본이 중국 침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의 갈등을 조장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일본은 중국인 지주를 매수하여 토지를 확보하고, 이를 조선인 농민에게 임대하여 수로 공사를 진행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수로가 중국인 농민의 토지를 침해하면서 갈등이 발생했고, 일본 영사관과 경찰의 개입으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언론의 왜곡된 보도로 인해 조선 내에서는 반중 폭동이 발생하여 많은 화교가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은 한중 관계를 악화시키고, 만주 사변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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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산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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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사건 개요 | |
이름 | 만보산 사건 |
로마자 표기 | Manbosan Sageon |
한자 표기 | 万宝山事件 |
일본어 표기 | 만포잔 지켄(万宝山事件) |
발생 시기 | 1931년 |
위치 | 만보산 |
관련 국가 | 중국 한국 |
원인 | |
주요 원인 | 중국인과 한국인 농민 간의 수로 건설 및 이용 분쟁 |
상세 원인 | 간도 지역에서 중국인 농민들이 만보산 지역의 한국인 농민들이 건설한 수로를 파괴하고, 한국인 농민들을 공격 |
결과 | |
주요 결과 | 중국 각지에서 한국인에 대한 대규모 폭력 사태 발생 |
추가 결과 | 만주사변의 배경 중 하나로 작용 |
관련 인물 | |
관련 인물 | 장쉐량 |
영향 | |
정치적 영향 | 만주국 건국과 만주사변의 원인이 되었음 |
사회적 영향 | 중국 내 반한 감정 심화, 한국 내 반중 감정 심화 |
기타 | |
사건 유형 | 민족 분쟁 |
관련 사건 | 만주사변 |
2. 만보산 사건의 배경
일본은 만주 진출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의 만주 이주를 장려했다.
일본은 중국인 하오융더(郝永德)를 매수하고 자금을 투자하여 만주 창춘시에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고 그를 지배인으로 앉혔다. 1931년 4월 16일 하오융더는 만보산 지방에 있는 소한림(蕭翰林) 등 11인의 소유 토지 가운데 미개간지 약 200ha를 해당 지주와 10년 기한으로 조차계약하였다(단, 이 계약에는 현 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무효라는 규정이 있었다.).[26]
4월 중에 하오융더는 현(縣)정부의 정식 승인을 얻지 않고, 이 토지를 한국인 농민 이승훈(李昇薰) 등 8인에게 10년간 조차계약을 체결하였고, 이승훈은 이 계약을 근거로 조선인 농민 180여 명을 이 지방에 이주하게 하여 개척에 착수했다.
완파오산(Wanpaoshan)은 장춘(Changchun) 북쪽 약 29km 지점, 만주의 이퉁(Itung) 강변 저습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당시 일본 제국(Empire of Japan)의 신민으로 간주되었던 한민족인 조선인들이 현지 중국인 중개인으로부터 광대한 토지를 전대차(轉貸借)하여 이퉁 강에서 수 킬로미터에 걸쳐, 임대차 계약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이자 현지 중국인 농민들이 경작하는 토지를 가로질러 수로를 파는 등 관개 작업을 준비했다.
상당한 길이의 수로가 파진 후, 중국인 농민들은 완파오산 현지 당국에 항의했고, 당국은 경찰을 파견하여 조선인들에게 공사를 즉각 중단하고 그 지역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장춘(Changchun)에 주재하는 일본 제국 영사는 조선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 영사 경찰을 파견했고, 장춘의 일본과 중국 당국은 공동 조사에 합의했다.
2. 1. 조선인의 만주 이주 장려
일본은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만주 개척에 따른 많은 혜택을 홍보하여 다수의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중국 동북지방에 이주하였고, 당시 만주 개척을 위해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하는 조선인들의 수가 매우 많았다. 일본은 만주에 이주한 많은 조선인을 구실로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만들었다.[26] 만주 사변 이후 많은 조선인 지주들과 농민들이 만주에 이주하여 만주를 개척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만주 지역에서는 조선인이 개척자로서 일본인보다 더 대우받는 일이 많았다. 당시 일본은 만주 이주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었고, 조선인들은 금방 만석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일본 법으로 축첩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많은 중국인 여성과 만주족 여성을 첩으로 삼는 등 활발한 경제활동을 하였고, 이러한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 중국인들이 시기하기 시작하였다.
만주 지역의 권익을 가지고 있던 일본 정부는 1930년 5월 간도 공산당 폭동으로 인해 추방된 조선인 200명을 만포산에 이주시켰다. 조선의 친일 단체인 조선인 거류민회 관계자들이 다수의 중국인 지주들과 임대 및 매매 계약을 맺었고, 조선인들은 곧바로 수로 건설[9] 공사를 시작했지만, 지주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계약이 아직 체결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허가를 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지주들의 요청으로 중국 경찰은 조선인 10명을 체포하고 공사 중지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일본 장춘 영사관은 경찰을 파견하여 조선인들을 지원했다.[10]
2. 2. 일본의 만주 진출 야욕
일본은 만주 이주 조선인을 구실로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일본은 중국인을 매수하여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고, 만보산 지역의 토지를 조차하려 했다.[26]1931년 4월 16일, 장농도전공사의 지배인 하오융더(郝永德)는 만보산 지방에 있는 소한림(蕭翰林) 등 11인의 소유 토지 중 미개간지 약 200ha를 10년 기한으로 조차계약하였다. 그러나 이 계약에는 현 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무효라는 규정이 있었다. 그럼에도 하오융더는 현(縣)정부의 정식 승인을 얻지 않고, 이 토지를 한국인 농민 이승훈(李昇薰) 등 8인에게 다시 10년간 조차계약을 체결하였다. 이승훈은 이 계약을 근거로 조선인 농민 180여 명을 이 지방에 이주하게 하여 개척에 착수했고, 이퉁 강에 통한 관개수로공사를 시작했다.[26]
문제는 이 수로 개척과 제방 축조가 타인의 토지인 부근 농지에 미치는 피해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토착 중국 농민들이 반대 운동을 일으키고 현(縣) 당국에 탄원·진정하여 공사 진행을 강제로 중지시켰다. 계약서 상에 현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일본의 대리인인 하오융더와 중국인 지주 간 계약이 무효가 되고, 한인 농민들의 개척작업 또한 근거가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 소속 경관 6명이 이 공사를 강행하고, 일본 경찰 60명이 중국 농민의 반대를 무력으로 억압하여 1931년 6월 말에 수로공사를 완료했다. 7월 1일에는 중국 농민 약 400여 명이 봉기하여 관개수로 약 2리를 매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7월 2일 장춘의 일본 영사관은 무장경찰관 15명을 파견하였고, 중국 측도 300명의 경찰관을 파견하였다. 일본 경찰은 무장경찰관을 증파하였고, 이들의 경계 아래 개간공사를 진행시켜 7월 6일 공사를 완성하였다. 일본 경찰은 중국인 농민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학살하였다.[9]
3. 만보산 사건의 전개
일본은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만주 개척에 따른 많은 혜택을 홍보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만주 개척을 위해 이주하는 조선인들의 수가 매우 많았으며, 일본은 이를 구실로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만들었다. 만주 사변 이후 많은 조선인 지주들과 농민들이 만주로 이주하여 개척을 시작하였고, 만주 지역에서는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더 대우받는 일도 많았다. 일본은 만주 이주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고, 조선인들은 금방 만석꾼이 되어 많은 중국인 여성과 만주족 여성을 첩으로 삼는 등 활발한 경제활동을 하였으며, 이러한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 중국인들이 시기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4월, 일본은 중국인 하오융더(郝永德)를 매수하여 만주 창춘 시에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고 지배인으로 앉혔다. 하오융더는 만보산 지방의 미개간지를 10년 기한으로 조차 계약하였으나, 이 계약은 현 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무효라는 규정이 있었다. 하오융더는 현 정부의 승인 없이 이 토지를 한국인 농민들에게 다시 조차 계약하였고, 180여 명의 조선인 농민들이 이주하여 이퉁 강 관개수로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수로 개척과 제방 축조는 주변 중국 농민들의 토지에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중국 농민들은 반대 운동을 일으키고 현 당국에 공사 중지를 요구했다. 계약서 상 현 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계약은 무효가 되고 한인 농민들의 개척 작업 근거도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은 경관들을 파견하여 공사를 강행하고, 일본 경찰을 동원하여 중국 농민들의 반대를 무력으로 억압했다.
1931년 6월 말, 수로 공사가 준공되었으나, 7월 1일 중국 농민 약 400여 명이 봉기하여 관개수로를 파괴했다. 이로 인해 현장에 있던 조선인 지주, 일본 영사관 경찰, 조선인 주민, 중국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7월 2일, 장춘의 일본 영사관은 무장 경찰관 15명을, 중국 측도 300명의 경찰관을 파견했다. 일본 경찰은 무장 경찰관을 증파하여 개간 공사를 진행시켜 7월 6일 공사를 완료했다. 일본 경찰은 중국인 농민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학살하였다.
3. 1. 수로 건설과 갈등
일본은 중국인 하오융더(郝永德)를 매수하여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고 지배인으로 앉혔다.[26] 1931년 4월 16일, 하오융더는 만보산 지역 토지 약 200ha를 10년 기한으로 조차하는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계약에는 현 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무효라는 규정이 있었다. 하오융더는 현 정부의 승인 없이 이 토지를 한국인 농민 이승훈(李昇薰) 등 8인에게 다시 10년간 조차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이승훈은 이 계약을 바탕으로 조선인 농민 180여 명을 이주시켜 개척에 착수했다. 이들은 이퉁 강 관개수로 공사를 시작했다.[26]문제는 이 수로 건설과 제방 축조가 다른 사람들의 토지, 즉 부근 중국 농민들의 농지에 큰 피해를 주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중국 농민들은 반대 운동을 일으키고 현(縣) 당국에 탄원·진정하여 공사 중지를 요구했다. 계약서 상에 현 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하오융더와 중국인 지주 간 계약이 무효가 되고, 조선인 농민들의 개척 작업 근거도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일본 영사관 소속 경관 6명이 공사를 강행했고, 일본 경찰 60명이 중국 농민의 반대를 무력으로 억압하여 1931년 6월 말 수로 공사를 완료했다. 이에 7월 1일, 중국 농민 약 400여 명이 봉기하여 관개수로 약 2리를 매몰했다. 7월 2일 장춘의 일본 영사관은 무장경찰관 15명을 파견했고, 중국 측도 300명의 경찰관을 파견했다. 일본 경찰은 무장경찰관을 증파하여 이들의 경계 아래 개간 공사를 진행시켜 7월 6일 공사를 완료했다. 일본 경찰은 중국인 농민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학살하였다.
당시 만주 지역의 권익을 가지고 있던 일본 정부는 1930년 5월 간도 공산당 폭동으로 인해 추방된 조선인 200명을 만포산에 이주시켰다. 조선의 친일 단체인 조선인 거류민회 관계자들이 다수의 중국인 지주들과 임대 및 매매 계약을 맺었고, 조선인들은 곧바로 수로 건설[9] 공사를 시작했지만, 지주들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계약이 아직 체결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허가를 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지주들의 요청으로 중국 경찰은 조선인 10명을 체포하고 공사 중지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일본 장춘 영사관은 경찰을 파견하여 조선인들을 지원했다.[10]
1931년 7월 2일 현지 중국인 농민 수백 명이 공사 중지를 요구하며 무기를 들고 실력 행사에 나섰기 때문에, 무장한 일본 경찰 50명이 대치했지만, 중국 경찰의 호소로 상황은 진정되었다. 이후 일본 경찰과 조선인 거류민회는 농사철이 다가온다는 이유로 공사를 강행하여 7월 11일에 수로가 완공되었다.
중국인 지주 하오융더는 조선인에게 황무지 500정보를 10년간 임대하는 계약을 장춘현장의 승인을 얻어 체결했다.[11] 조선인은 취수구에서 20리에 걸쳐 수로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 수로는 임대 계약 외의 토지를 지나 중국 농민의 기존 농지를 분단하는 것이었고, 지주의 양해를 얻지 못했다.[12][13]
7월 1일, 중국인 농민 약 400명에 의해 수로 파괴 작업이 시작되었고,[16] 7월 2일에는 장총 20정과 권총 10정을 휴대한 중국인 폭도 약 500명(1000여 명이라고도 함)에 의해 수로 매몰 작업이 시작되었다.[18][17] 일본 경찰과 중국 폭도 간의 충돌이 발생하여 양측에서 발포했지만, 사상자는 없었고, 오전 10시에는 폭도가 철수했다.[17] 그 사이, 현지에 도착한 중국 순경 7명도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폭도의 폭행을 받았다.[18] 파괴된 수로의 복구 공사는 아무런 방해 없이 진행되어 7월 11일에 완성되어 통수되었고, 둑 공사도 진행되었다.[21]
3. 2. 일본의 개입과 무력 충돌
1931년 4월 16일, 일본은 중국인 하오융더를 매수하여 만주 창춘시에 장농도전공사를 설립하고, 하오융더는 만보산 지방의 미개간지를 10년 기한으로 조차계약하였다. 그러나 이 계약은 현 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무효라는 규정이 있었다.[26] 하오융더는 현 정부의 승인 없이 이 토지를 한국인 농민들에게 다시 조차계약했고, 180여 명의 조선인 농민들이 이주하여 이퉁 강 관개수로 공사를 시작했다.[26]수로 개척과 제방 축조는 주변 중국 농민들의 토지에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중국 농민들은 반대 운동을 일으키고 현 당국에 공사 중지를 요구했다. 계약서 상 현 정부의 승인이 없으면 계약은 무효가 되고, 한인 농민들의 개척 작업 근거도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은 경관들을 파견하여 공사를 강행하고, 일본 경찰을 동원하여 중국 농민들의 반대를 무력으로 억압했다.[26]
1931년 6월 말, 수로 공사가 준공되었으나, 7월 1일 중국 농민 약 400여 명이 봉기하여 관개수로를 파괴했다. 이로 인해 현장에 있던 조선인 지주, 일본 영사관 경찰, 조선인 주민, 중국인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7월 2일, 장춘의 일본 영사관은 무장경찰관 15명을 파견했고, 중국 측도 300명의 경찰관을 파견했다. 일본 경찰은 무장경찰관을 증파하여 개간 공사를 진행시켜 7월 6일 공사를 완료했다. 일본 경찰은 중국인 농민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학살하였다.
공동 조사가 시작되기 전, 중국 농민 400여 명이 한국인들을 몰아내고 수로를 매웠다. 일본 영사 경찰은 폭도를 해산시키기 위해 발포 자세를 취했고, 양측은 약 한 시간 동안 대치했다. 중국 농민들은 물러났고, 일본 경찰은 한국인들이 수로와 댐을 완성할 때까지 현장에 남았다. 일본 경찰이나 한국인 부상자는 없었지만, 중국 농민 몇 명이 부상을 입었고, 체포된 중국인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풀려났다.[1]
1931년 7월 2일, 중국인 농민 수백 명이 무기를 들고 공사 중지를 요구하며 실력 행사에 나섰고, 무장한 일본 경찰 50명이 대치했지만, 중국 경찰의 호소로 상황은 진정되었다. 이후 일본 경찰과 조선인 거류민회는 농사철을 이유로 공사를 강행하여 7월 11일에 수로가 완공되었다.
5월 25일, 중국 공안국 순경에 의해 수로 개척 중인 조선인 감독이 구금되고, 폭행당한 조선인 농민 중 중상자가 발생했다는 연락이 주장춘 일본 영사관에 들어왔다.[14] 다음날인 5월 26일, 일본 영사관 직원과 경찰이 파견되어 조사가 이루어졌고, 중국 관헌에 의해 중국인 지주가 구금되어 조선인을 퇴거시키려는 책동이 발각되었다.[15]
7월 1일, 중국인 농민 약 400명에 의해 수로 파괴 작업이 시작되었고, 현장에 파견된 일본 경찰은 조선인에게 절대 무저항하도록 지시했다.[16] 다음날인 7월 2일, 장총 20정과 권총 10정을 휴대한 중국인 폭도 약 500명(1000여 명이라고도 함)에 의해 수로 매몰 작업이 시작되어, 일본 기마 경찰 3명이 급파되었고, 추가로 10명이 파견되었다.[18][17] 오전 8시경 충돌이 발생하여 폭도가 발포했고, 경찰관도 발포했지만, 양측에 사상자는 없었고, 오전 10시에는 폭도가 철수했다.[17] 그 사이, 현지에 도착한 중국 순경 7명도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폭도의 폭행을 받았다.[18]
파괴된 수로의 복구 공사는 아무런 방해 없이 진행되어 7월 11일에 완성되어 통수되었고, 둑 공사도 진행되었다. 다데이 시게노리(田代重徳) 영사는 "조선 농민 50여 명은 환희하여 만세를 연호하며 '우리는 영원히 이 땅을 사수해야 한다'고 절규하는 자도 있었다"고 보고했다.[21]
4. 만보산 사건의 확산: 조선 내 반중 폭동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은 만보산 사건을 왜곡 보도하여 조선 내 반중 감정을 격화시켰다. 특히 조선일보는 '만보산에서 중국 농민과 조선 농민이 충돌해 많은 조선인이 피살됐다'는 오보를 내보내 조선인들의 분노를 샀다.[27]
이러한 오보는 인천을 시작으로 경성, 원산, 평양, 부산, 대전, 천안 등 전국 각지에서 중국인 배척 운동을 일으켰다. 수만 명의 조선인들이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중국인들을 구타하고 학살하는 사건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27] 이로 인해 수많은 중국인 사상자와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4. 1. 언론의 왜곡 보도
조선일보는 1931년 7월 2일 호외로 '만보산에서 중국 농민과 조선 농민이 충돌해 많은 조선인이 피살됐다'는 보도를 하였다. 이는 조선일보 장춘 지국의 조선인 기자 김이삼이 전한 것으로, 그는 정보의 진위를 가리지 않고 타전했다.[27] 이 보도는 조선 내에서 중국인을 적대시하는 운동을 일으켰다.[27] 인천을 시작으로 경성, 원산, 평양, 부산, 대전, 천안 등 각지에서 수만 명이 참가하는 중국인 배척 운동이 일어났으며, 평양, 부산, 인천, 천안에서는 대낮에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 학살하는 사건이 며칠간 계속되었다.[27]일본 당국은 조선일보가 수백 명의 한국인이 사망했다는 날조된 보도를 하도록 했다.[2][3] 이러한 허위 보도가 확산되면서 7월 3일 인천을 시작으로 한국 전역에서 일련의 반중 폭동이 발생했다.[4]
조선일보는 “2일의 충돌로 다수의 조선인이 사망했다”고 보도했고, 이 기사를 계기로 조선에서 중국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주로 도시 지역에서 중국인 배척 운동이 일어났다(조선배화사건 참조).[10]
첫 보도를 냈던 조선일보 기자 김이삼은 정정보도와 사죄문을 조선일보에 발표한 다음날 조선인에게 피살되었다.[28] 김이삼은 7월 14일 조선일보에 “중국어를 할 줄 몰라 일본 각 기관의 선전 자료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했지만 오보였다”는 사과문을 게재하고, 더 나아가 “ (조선인, 중국인을 분열시키는 목적으로) 일본인, 친일 조선인에 의한 사건을 유발하기 위한 음모이다”라고 주장했지만, 다음 날 같은 조선인에게 총으로 살해당했다.[10] 김이삼이 지린시에서 일본의 특무기관에 의하여 살해당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28]
4. 2. 반중 폭동과 화교 학살
조선일보는 1931년 7월 2일 호외로 '만보산에서 중국 농민과 조선 농민이 충돌해 많은 조선인이 피살됐다'는 오보를 냈다. 이 보도는 조선일보의 장춘 지국 조선인 기자 김이삼이 전한 것으로, 그는 정보의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타전했다.[27] 이 오보로 인해 인천을 시작으로 경성, 원산, 평양, 부산, 대전, 천안 등지에서 수만 명이 참가하는 중국인 배척 운동이 일어났다.[27] 특히 평양, 부산, 인천, 천안에서는 대낮에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 학살하는 사건이 며칠간 계속되는 등 잔혹한 폭력 사태로 확산되었다.[27] 일본 제국은 불량배를 매수하여 화교에 대한 학살과 강간 등 폭력 행위를 조장하기도 했다.[27]이러한 반중 폭동으로 인해 중국인 142명이 사망하고 546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상당한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4] 폭동은 7월 5일 평양에서 가장 심각했다.[4]
동아일보 등이 오보임을 알리고 진정을 호소하는 보도를 하면서 7월 10일 이후 폭동은 진정되는 듯했으나, 전국에서 화교에 대한 학살과 강간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27] 이 학살로 인해 조선 내 화교의 수는 급감하였다.[27]
5. 만보산 사건의 본질과 영향
만보산 사건은 단순한 물 분쟁이 아니라,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과 민족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건이었다. 일본은 만주 이주 조선인들을 이용하여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 당시 만주로 이주하는 조선인들은 일본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경우가 많아 중국인들의 시기를 받았다.[26]
1931년 4월 16일, 일본에 매수된 중국인 하오융더는 만보산 지역의 토지를 해당 지주와 계약하였으나, 현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아 무효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하오융더는 이 토지를 한국인 농민들에게 다시 임대했고, 이들은 이퉁 강 관개수로 공사를 시작했다.[26] 이 수로 공사는 주변 중국 농민들의 토지에 피해를 주었고, 중국 농민들은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 경찰은 공사를 강행하고, 일본 경찰은 중국 농민의 반대를 무력으로 억압하여 수로공사를 완료했다.
7월 1일, 중국 농민들은 봉기하여 관개수로를 파괴했고, 이는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충돌로 이어졌다. 일본 영사관은 무장경찰관을 파견하여 개간공사를 진행시켰고, 중국인 농민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학살하였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일본에 강경하게 대응했으나, 일본은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일본 영사 경찰서는 한국인 다수가 살상되었다는 허위 정보를 제공했고, 조선 내 신문들은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오보를 냈다.[27] 조선일보는 7월 2일 호외로 '만보산에서 중국농민과 조선농민이 충돌해 많은 조선인이 피살됐다'는 오보를 냈고, 이는 인천을 필두로 전국적인 중국인 배척 운동(조선배화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많은 중국인들이 피해를 입었으며, 화교의 수가 급감하였다. 동아일보 등이 오보임을 알리고 진정을 호소하는 보도로 7월 10일 이후 진정되는 기미가 보였으나, 전국에서 화교에 대한 학살과 강간은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이 사건의 본질은 만주에 세력을 형성한 중국 민족운동 세력과 조선인 민족운동 세력의 반일 공동전선투쟁에 대해 중국인과 한국인을 이간하여 분열시키려는 일본의 치밀한 음모였으며, 이주한 조선인들을 만주 침략과 대륙 침탈의 발판으로 삼고 국제적으로는 자기 입장을 유리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는 학설이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정설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2000년대부터 이 학설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만보산 사건과 그 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화교배척사건들을 모두 만보산 사건이라는 명칭으로 하나로 묶어서 설명하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이 사태를 방관하는 한편, 형식적으로 제지의 태도를 보였으나 극히 소극적이고 냉담하였다. 이후 중국에서는 조선인 배척운동이, 일본에서는 만주 침략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이러한 갈등은 만주 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거센 배일운동이 일어났고, 중국과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연합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했다.
5. 1. 일본의 이간책
일본은 만보산 사건을 이용하여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의 민족 갈등을 조장하고, 이를 통해 만주 침략의 명분을 만들려 했다. 일본은 만주 지역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이주한 조선인들을 이용하려 했다.[9]일본은 중국인 하오융더(郝永德)를 매수하여 창춘시에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고, 그를 통해 만보산 지역의 토지를 한국인 농민들에게 임대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현(縣) 정부의 정식 승인을 받지 않는 등 문제가 있었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조선인 농민들의 이주와 개척을 지원했다.[26]
일본 영사관 경찰은 수로 공사를 강행하고, 중국 농민들의 반대를 무력으로 억압했다.[26]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은 중국인 농민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학살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의 행동은 중국인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중국 농민들이 봉기하여 관개수로를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한국인 다수가 살상되었다는 허위 정보로 조선 내 신문들에 보도하게 하여, 조선 내에서 중국인에 대한 적대감을 일으켰다.[27] 조선일보는 '만보산에서 중국농민과 조선농민이 충돌해 많은 조선인이 피살됐다'는 오보를 냈고,[27] 이는 인천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중국인 배척 운동(조선배화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많은 중국인들이 피해를 입었다.[4]
이 사건의 본질은 중국인과 한국인을 이간질하여 반일 공동전선을 분열시키려는 일본의 치밀한 음모였다는 학설이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일본은 이 사건을 통해 만주 침략의 분위기를 조성했고, 이는 결국 만주 사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첫 보도를 냈던 조선일보 기자 김이삼(본명: 김영석)은 정정보도와 사죄문을 발표한 다음날 조선인에게 피살되었다.[28] 김이삼이 일본의 특무기관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28]
중국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거센 배일운동이 일어났고, 중국과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연합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했다.
5. 2. 만주사변으로의 확대
만보산 사건은 중일 간의 갈등을 심화시켜 만주사변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 내에서는 배일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특히 중국과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연합하여 공동 투쟁을 전개했다.일본 경찰은 만보산 사건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고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중국에서는 조선인 배척 운동이, 일본에서는 만주 침략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이러한 갈등은 결국 만주사변으로 이어졌다.
일본과 중국 당국은 상황 해결을 위해 협상을 계속하였다. 중국은 간도협약에 따라 한국인이 간도 지역 외부에 거주하며 토지를 임대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본은 한국인이 일본 국민으로서 다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남만주 전역에서 거주하고 토지를 임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인들이 성실하게 사업을 진행했으며, 임대 계약을 주선한 중국 중개인의 잘못으로 인한 문제라고 비난했다. 일본은 결국 완파산에서 영사 경찰을 철수시켰지만, 한국인들은 그곳에 남았다.
1931년 9월까지도 만보산 사건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만주사변과 만주사변 이후 중국 내 한국인에 대한 반대 시위에 대한 선전 활동은 계속되었다.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9월 일본에서는 서평(지린)에서 한국인에 대한 공격으로 30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11월, 장춘의 일본 사령관은 길림에서 중국 폭도들이 1만 명의 한국인을 학살하고 도 전체의 한국인 주택을 불태우거나 약탈했다고 주장했다.[5][6]
6. 만보산 사건 이후
일본과 중국 당국은 만보산 사건 해결을 위해 협상을 계속했다. 중국은 간도협약에 따라 한국인이 간도 지역 외부에 거주하며 토지를 임대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본은 한국인이 일본 국민으로서 다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남만주 전역에서 거주하며 토지를 임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한국인들이 성실하게 사업을 진행했으며, 임대 계약을 주선한 중국 중개인의 잘못으로 인한 불규칙성을 비난했다. 일본은 완파산에서 영사 경찰을 철수시켰지만, 한국인들은 남아 있었다.[5][6]
1931년 9월까지 만보산 사건의 완전한 해결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만주사변 이후 중국 내 한국인에 대한 반대 시위에 대한 선전 활동이 계속되었다.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9월 일본에서는 서평에서 한국인에 대한 공격으로 30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11월 장춘의 일본 사령관은 지린에서 중국 폭도들이 1만 명의 한국인을 학살하고 도 전체의 한국인 주택을 불태우거나 약탈했다고 주장했다.[5][6]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습격을 받아 만주 철도 연선으로 피난했다.[22] 이후 질서가 회복되면서 일부는 돌아왔지만, 북만주의 수해까지 겹치면서 많은 피난민이 남게 되었다.[22] 1932년 상하이 천장절 폭탄 사건이 발생하자, 중국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악감정은 호전되었고, 양측의 불화는 해소되었다.
1932년 11월 조선총독부 파견원의 추정치는 다음과 같다.[22]
지역 | 피난민 수 |
---|---|
하얼빈 (수해) | 4,000 |
하얼빈 (폐해) | 2,000 |
철령 (폐해) | 600 |
개원 (폐해) | 1,200 |
사평 (폐해) | 800 |
신경 (폐해) | 800 |
안동 (폐해) | 1,600 |
길림 (폐해) | 2,200 |
반석 (폐해) | 1,200 |
교하 (폐해) | 1,300 |
돈화 (폐해) | 1,500 |
봉천 (폐해) | 4,000 |
부순 (폐해) | 3,000 |
산성진 (폐해) | 9,000 |
6. 1. 한중 관계의 변화

일본과 중국 당국은 만보산 사건 해결을 위해 협상을 계속했다. 중국은 간도협약에 따라 한국인이 간도 지역 외부에 거주하며 토지를 임대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본은 한국인이 일본 국민으로서 다른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남만주 전역에서 거주하며 토지를 임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한국인들이 성실하게 사업을 진행했으며, 임대 계약을 주선한 중국 중개인의 잘못으로 인한 불규칙성을 비난했다. 일본은 완파산에서 영사 경찰을 철수시켰지만, 한국인들은 남아 있었다.[5][6]
1931년 9월까지 만보산 사건의 완전한 해결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만주사변 이후 중국 내 한국인에 대한 반대 시위에 대한 선전 활동이 계속되었다.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9월 일본에서는 서평에서 한국인에 대한 공격으로 30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11월 장춘의 일본 사령관은 길림에서 중국 폭도들이 1만 명의 한국인을 학살하고 도 전체의 한국인 주택을 불태우거나 약탈했다고 주장했다.[5][6]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습격을 받아 만주 철도 연선으로 피난했다.[22] 이후 질서가 회복되면서 돌아왔지만,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고 북만주의 수해까지 겹치면서 많은 피난민이 남게 되었다.[22] 1932년 상하이 천장절 폭탄 사건이 발생하자, 중국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악감정은 호전되었고, 양측의 불화는 해소되었다.
6. 2. 피난민 발생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습격을 피해 만주 철도 연선으로 피난했다.[22] 이후 질서가 회복되면서 일부는 돌아왔지만, 북만주의 수해까지 겹치면서 많은 피난민이 남게 되었다.[22]1932년 11월 조선총독부 파견원의 추정치는 다음과 같다.[22]
지역 | 피난민 수 |
---|---|
하얼빈 (수해) | 4,000 |
하얼빈 (폐해) | 2,000 |
철령 (폐해) | 600 |
개원 (폐해) | 1,200 |
사평 (폐해) | 800 |
신경 (폐해) | 800 |
안동 (폐해) | 1,600 |
길림 (폐해) | 2,200 |
반석 (폐해) | 1,200 |
교하 (폐해) | 1,300 |
돈화 (폐해) | 1,500 |
봉천 (폐해) | 4,000 |
부순 (폐해) | 3,000 |
산성진 (폐해) | 9,000 |
7. 기념물
1985년 12월, 더후이시 미사쯔진에 만보산사건기념비가 건립되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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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
어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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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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