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말 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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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말 민변은 1618년 후금의 명나라 공격, 잦은 자연재해, 숭정제의 무능한 통치로 인한 명나라 말기의 사회 불안과 농민 반란을 다룬다. 1628년 왕가인의 산시성 반란을 시작으로 고잉샹, 장헌충, 이자성 등 주요 반란 지도자들이 등장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명나라는 이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군사력 약화와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644년 이자성의 순나라가 베이징을 점령하고 숭정제가 자살하면서 명나라는 멸망했지만, 오삼계의 청나라 투항으로 이자성은 패배하고 순나라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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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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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 | 1628년 ~ 1644년 |
| 장소 | 산시 성, 산시 성, 쓰촨 성, 허난 성 |
| 원인 | 명나라의 부패, 기근, 자연재해, 과중한 세금 |
| 결과 | 반군의 승리 이자성의 베이징 점령 명나라 멸망 |
| 관련 사건 | 명청 교체 |
| 교전 세력 | |
| 반군 | 다양한 농민 반군 (예: 순, 서) |
| 정부군 | 명나라 |
| 지휘관 | |
| 반군 | 왕자윤 고영상 이자성 노회회 나여재 장헌충 |
| 명나라 | 양학 홍승주 진기유 노상승 조문조 조변교 손전정 황득공 진양옥 양사창 정기예 부종룡 유시위 |
| 규모 | |
| 반군 | 600,000+ |
| 명나라 | ~100,000 |
2. 명나라 말기 사회상
1618년, 누르하치가 칠대죄를 발표하며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명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후금과의 전쟁, 1621년 사안의 난 등으로 명나라의 재정은 악화되었다.
산시성, 산시성, 허난성 등에서는 자연재해가 잇따랐다. 특히 1627년 산시성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식인이 발생할 정도의 기아가 발생했다. 산시성은 원래 자연재해가 잦은 곳이었지만, 명나라 말기 60년 동안에는 더욱 심각했다. 허난성에서도 기아로 인해 "쌀알이 진주만큼 귀중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숭정제는 잦은 대신 교체로 일관성 없는 정책을 펼쳐 상황을 악화시켰다. 숭정제 재위 기간에만 약 50명의 대학사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명나라 전체 기간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숭정제는 재정 악화를 막기 위해 우정 서비스 지원을 삭감했고, 이로 인해 황허 유역의 많은 사람이 실직하여 도적떼가 발생하는 등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다.
2. 1. 정치적 혼란
1618년, 누르하치 치하의 후금은 칠대죄를 통해 명나라의 종주권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만주에서 명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627년까지 후금과의 전쟁과 1621년 사안의 난의 발발로 명나라의 국고는 위험할 정도로 고갈되어 태창고에는 밖에 남지 않았다.명나라는 산시성, 산시성, 허난성에서 자연 재해로 고통받고 있었다. 1627년 산시성의 광범위한 가뭄으로 수확이 실패하고 사람들이 식인을 하면서 대규모 기아가 발생했다. 산시성의 자연 재해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명나라의 마지막 60년 동안 특히 심각했으며, 산시성에서 자연 재해가 발생하지 않은 해는 단 한 해였다. 이 지역 전체가 자연 재해 지역이었다. 산시성은 폭풍, 지진, 기근으로 고통받았다. 남쪽의 허난성 역시 기아를 겪었고, "쌀알이 진주만큼 귀중해졌다"고 한다.
숭정제의 사소하고 변덕스러운 행동은 대신들을 끊임없이 교체하여 일관된 정부 대응을 어렵게 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숭정제의 치세 동안에만 약 50명의 대학사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명나라 전체 기간 동안 이 직책을 맡았던 모든 사람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황실 재정의 추가 고갈을 막기 위해 숭정제는 명나라 우정 서비스에 대한 자금 지원을 삭감했는데, 이로 인해 황허 지역 주변의 중부 및 북부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량 해고되었다. 이는 정부 통제력의 전반적인 악화에 기여했으며, 명나라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만연하게 된 도적 집단의 형성에 기여했다.
2. 2. 경제적 어려움
1618년, 누르하치 치하의 후금은 칠대죄를 통해 명나라의 종주권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만주에서 명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627년까지 후금과의 전쟁과 1621년 사안의 난의 발발로 명나라의 국고는 위험할 정도로 고갈되어 태창고에는 밖에 남지 않았다.명나라는 산시성, 산시성, 허난성에서 자연 재해로 고통받고 있었다. 1627년 산시성의 광범위한 가뭄으로 수확이 실패하고 사람들이 식인을 할 정도로 대규모 기아가 발생했다. 산시성의 자연 재해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명나라의 마지막 60년 동안 특히 심각했으며, 산시성에서 자연 재해가 발생하지 않은 해는 단 한 해였다. 이 지역 전체가 자연 재해 지역이었다. 산시성에서는 폭풍, 지진, 기근이 발생했고 남쪽의 허난성 역시 기아를 겪어 "쌀알이 진주만큼 귀중해졌다"고 한다.
숭정제는 사소하고 변덕스러운 행동으로 대신들을 끊임없이 교체하여 일관된 정부 대응을 어렵게 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숭정제의 치세 동안에만 약 50명의 대학사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명나라 전체 기간 동안 이 직책을 맡았던 모든 사람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황실 재정의 추가 고갈을 막기 위해 숭정제는 명나라 우정 서비스에 대한 자금 지원을 삭감했는데, 이로 인해 황허 지역 주변의 중부 및 북부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량 해고되었다. 이는 정부 통제력의 전반적인 악화에 기여했으며, 명나라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만연하게 된 도적 집단의 형성에 기여했다.
2. 3. 사회 불안 심화
1618년, 누르하치가 칠대죄를 내세워 후금을 건국하고 만주에서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명나라의 국고는 급격히 고갈되기 시작했다. 1627년에는 태창고에 700만 냥밖에 남지 않았다.산시성과 허난성에서는 자연재해가 잇따랐다. 특히 1627년 산시성에는 대규모 가뭄이 발생하여 기아가 발생하고 사람들이 식인을 할 정도였다. 산시성은 원래 자연재해가 잦은 지역이었지만, 명나라 말기 60년 동안에는 특히 심각하여 자연재해가 발생하지 않은 해가 단 한 해뿐이었다. 남쪽의 허난성 역시 기아로 인해 "쌀알이 진주만큼 귀중해졌다"고 한다.
숭정제는 잦은 대신 교체로 일관성 없는 정책을 펼쳐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숭정제 시기에만 약 50명의 대학사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명나라 전체 기간 동안 이 직책을 맡았던 사람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숭정제는 황실 재정 고갈을 막기 위해 우정 서비스에 대한 자금 지원을 삭감했고, 이로 인해 황허 지역 주변의 중부 및 북부 지방에서 많은 사람이 대량 해고되었다. 이는 정부 통제력 약화와 도적 집단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1628년 봄, 왕가인(王嘉胤)은 산시성에서 약 6,000명의 추종자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는 훗날 쓰촨성을 텅 비게 만든 장헌충도 가담했다. 명나라 군대는 산시성의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했다.
또 다른 도적 두목 고잉샹(高迎祥)이 반란을 일으켜 왕가인에게 합류했다. 1629년 초, 양허(楊鶴)가 삼변 총독으로 부임했지만, 산시성 병사들의 봉급이 3년이나 밀려 있었고, 병사들마저 반란에 가담하는 등 상황은 심각했다. 양허는 왕가인의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했고, 반란군은 1630년까지 여러 요새를 점령했다.
양허의 항복한 농민들에 대한 사면 정책은 효과가 없었다. 항복한 농민들은 집으로 돌아가 다른 반란 단체에 합류하곤 했다. 명나라가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 반란은 명나라 왕조의 주요 문제로 남았다. 양허는 결국 탄핵되어 체포되었고, 홍승주로 교체되었다.
홍승주의 부하들은 반란군은 물론 민간인까지 학살하여 보상을 받았다. 한 관리는 여성의 머리를 반란군의 것이라고 주장하여 강등되기도 했다. 1631년까지 약 20만 명의 반란군이 36개의 반란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3. 농민 반란의 발발
1631년까지 약 20만 명의 반란군이 36개의 반란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1641년, 장헌충이 샹양을 점령했고, 이자성은 뤄양을 점령했으나 곧 명나라 군에게 빼앗겼다. 이자성은 많은 추종자들과 함께 카이펑을 포위했다. 한편, 장헌충은 윈양에서 서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1641년부터 1644년까지 명나라 군대가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란군에 대한 지역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딩치루이는 굶주린 부하들을 통제할 수 없었고, 그들은 지나가는 마을들을 약탈했다. 어떤 이들은 음식을 찾아 단순히 탈영했다. 딩치루이는 탄핵되었고 푸쭝룽으로 교체되었다. 장헌충의 군대는 10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지만, 쓰촨성의 도시들을 점령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명나라 군에 대해 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뤄루차이는 장헌충을 떠나 이자성에게 합류했다. 이자성은 신차이와 난양을 점령했고, 그 과정에서 푸쭝룽과 멍루후를 죽였다. 그는롱은 반란을 도운 혐의로 처형되었다.
1642년, 샹청현, 수청현, 루닝, 샹양, 더안, 청톈이 모두 이자성에게 함락되었다. 장헌충은 루저우를 점령했다. 이자성의 카이펑 포위는 실패했고, 한 번의 공격에서 그는 화살에 맞아 눈을 잃었다. 카이펑은 1642년 10월 7일, 강물을 돌려 도시를 침수시켜 27만 명을 죽이면서 함락되었다. 반란군은 도시에서 남은 모든 것을 약탈하고 후퇴했다.
1643년까지, 반란군은 중국 중부의 이자성과 쓰촨의 장헌충, 두 주요 파벌로 뭉쳤다. 이자성은 스스로 순왕이라고 선언했고, 장헌충은 스스로 서왕이라고 선언했다. 우창, 한양, 창사는 장헌충에게 함락되었고, 그는 서나라의 건국을 선언했다. 이자성은 장헌충의 성공이 커지는 것에 위협을 느껴 그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었다. 이자성은 뤄루차이와 다른 지역 도적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파벌 내에서 권력을 공고히 했다. 가을에 숭정제는 순촨팅에게 이자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나, 이는 명나라 군대가 완전히 파괴되고 쑨촨팅이 전사하면서 마지막 명나라 공세가 되었다. 이자성은 시안을 점령하여 승리했고, 시안은 저항 없이 항복했다.
1644년, 이자성은 순나라의 건국을 선언했다. 베이징에서 숭정제는 민간인들로부터 군대를 일으키는 마지막 노력을 했고, 그들을 이자성에 맞서 보냈다. 군대의 절반 이상이 베이징에서 100리도 안 되는 거리에서 탈영했다. 이자성은 두 방향으로 명나라 수도로 진격하여 타이위안, 다퉁, 창핑을 점령했다.
4월 24일, 숭정제의 환관 중 한 명이 반란군을 위해 문을 열라고 명령했지만 경비병들은 거부했다. 방어군은 대규모 무력 시위로 대포를 발사했지만 탄약이 없었다. 반란군이 화약만 발사되는 것을 깨닫자, 그들은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짧은 격전 끝에 성문을 점령했다. 숭정제는 황족들에게 자살을 명령했다. 숭정제는 스스로 목을 매달기 전에 자살을 할 수 없었던 공주의 팔을 잘랐다. 그녀는 반란군이 그녀를 발견했을 때까지 살아 있었다.
3. 1. 초기 반란의 시작
1618년, 누르하치 치하의 후금은 칠대죄를 통해 명나라의 종주권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만주에서 명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627년까지 후금과의 전쟁과 1621년 사안의 난의 발발로 명나라의 국고는 위험할 정도로 고갈되었다.명나라는 산시성, 산서성, 허난성에서 자연 재해로 고통받고 있었다. 1627년 산시성의 광범위한 가뭄으로 수확이 실패하고 사람들이 식인을 하면서 대규모 기아가 발생했다. 산시성의 자연 재해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명나라의 마지막 60년 동안 특히 심각했으며, 산시성에서 자연 재해가 발생하지 않은 해는 단 한 해였다. 이 지역 전체가 자연 재해 지역이었다. 산시성 역시 폭풍, 지진, 기근으로 고통받았다. 남쪽의 허난성 역시 기아를 겪었고, "쌀알이 진주만큼 귀중해졌다"고 한다.
숭정제의 사소하고 변덕스러운 행동은 대신들을 끊임없이 교체하여 일관된 정부 대응을 어렵게 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숭정제의 치세 동안에만 약 50명의 대학사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명나라 전체 기간 동안 이 직책을 맡았던 모든 사람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황실 재정의 추가 고갈을 막기 위해 숭정제는 명나라 우정 서비스에 대한 자금 지원을 삭감했는데, 이로 인해 황허 지역 주변의 중부 및 북부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량 해고되었다. 이는 정부 통제력의 전반적인 악화에 기여했으며, 명나라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만연하게 된 도적 집단의 형성에 기여했다.
1628년 봄, 왕가인(王嘉胤)은 약 6,000명의 추종자와 함께 산시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중 한 명이 미래에 쓰촨성을 텅 비게 만들 장헌충이었다. 이 반란은 명나라 군대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산시성의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인해 17,000명 규모의 명나라 진압군은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소탕할 수 없었다.
또 다른 도적 두목 고잉샹(高迎祥)이 반란을 일으켜 곧 왕가인에게 합류했다. 1629년 초, 베테랑 반란 진압 지도자 양허(楊鶴)가 소집되어 삼변 총독이 되었다. 그는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시성 병사들의 봉급은 3년이나 밀려 있었고, 심지어 그들의 병사들마저 반란에 가담하기 위해 탈영하고 있었다. 양허는 왕가인의 반란군을 진압할 수 없었고, 반란군은 1630년까지도 여러 고립된 요새를 점령했다.
항복한 농민들에 대한 양허의 사면 정책은 일반적으로 효과가 없었다. 일단 항복한 농민들은 집으로 돌아가 다른 반란 단체에 합류하곤 했다. 명나라가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 반란은 명나라 왕조의 나머지 기간 동안 주요 문제로 남았다. 양허는 결국 무능력으로 탄핵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나중에 청나라에 투항하게 될 홍승주로 교체되었다.
그의 부하들, 특히 형제 조문조(曹文詔)와 조변교(曹變蛟)는 무모했다. 병사들은 보상을 받기 위해 반란군은 물론 민간인까지 학살하여 머리를 제출했다. 한때 한 관리는 심지어 여성의 머리를 제출하며 반란군의 것이라고 주장하여 강등되었다. 1631년까지 약 20만 명의 반란군이 36개의 반란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3. 2. 반란의 확산
1628년 봄, 왕가인(王嘉胤)은 산시성에서 약 6,000명의 추종자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 중에는 훗날 쓰촨성을 텅 비게 만든 장헌충도 있었다. 명나라 군대는 산시성의 험준한 지형 때문에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어려웠다.고잉샹(高迎祥)이 왕가인에게 합류했다. 1629년 초, 양허(楊鶴)가 삼변 총독으로 부임했으나, 산시성 병사들의 봉급이 3년이나 밀려 있었고, 병사들마저 반란에 가담하는 등 상황은 심각했다. 양허는 왕가인의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했고, 반란군은 1630년까지 여러 요새를 점령했다.
양허의 항복한 농민 사면 정책은 효과가 없었다. 항복한 농민들은 다시 다른 반란 단체에 합류했다. 명나라가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농민 반란은 계속되었다. 양허는 무능력으로 탄핵, 체포되었고, 홍승주로 교체되었다.
홍승주의 부하들은 반란군은 물론 민간인까지 학살하여 보상을 받았다. 1631년까지 약 20만 명의 반란군이 36개 단체에서 활동했다.
1633년까지 반군은 호광, 사천, 산서로 확산되었다. 진계유는 섬서, 산서, 하남, 호광, 사천의 최고 사령관이 되어 장헌충과 뤄루차이를 사천에서 몰아냈다. 하남의 반군은 서쪽으로 몰려 체상 협곡에 갇혔다. 폭우가 40일 동안 반군을 강타했고, 이자성을 포함한 13,000명이 진계유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이들이 풀려나자 전면적인 반란이 다시 일어났다.
이자성은 롱저우를 포위했지만 좌광현에게 쫓겨났다. 1635년, 주요 반군 단체 간의 회의가 하남 중부의 롱양에서 열렸다. 장헌충과 고영상이 남쪽 직례 점령, 뤄루차이는 황하 방어, 마서잉은 기동 부대 지휘를 맡았다.
장과 고는 홍무제의 고향이자 무덤이 있는 펑양을 약탈했다. 4,000명 이상의 명나라 관리들이 살해되었고, 2,600채의 구조물이 불탔다. 이 과정에서 이자성과 장헌충 사이에 환관 처형에 대한 논쟁이 벌어져 반군 동맹이 해체되었다. 이자성은 서쪽으로, 장헌충은 동쪽으로 이동했다.
장헌충은 뤄저우 점령에 실패했다. 이자성은 1635년과 1636년에 걸쳐 반군 활동을 계속했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서안을 잃었다. 북쪽에서는 홍승주가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반군을 몰아내지 못하고 패배했다. 루샹성은 호광에서 반군 진압을 담당하게 되었고, 명나라는 조문조가 자살하는 큰 패배를 겪었다.
반군은 1636년까지 더 잘 조직되었고, 중무장 대포를 갖추게 되었다. 고영상은 타오저우로 이동하여 난징으로 가는 길에 명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고는 루샹성과의 전투에서 패했지만 탈출했다. 루는 청나라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북쪽 변경으로 소환되었다. 손전정은 섬서의 순무가 되어 고영상을 생포하여 베이징으로 보냈고, 고영상은 사지가 절단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자성 등 다른 반군 지도자들에게 합류했다.
숭정제가 1637년에 세금을 인상하면서 반군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슝원찬이 반군 진압 활동을 담당했지만, 홍승주와 좌량옥은 그의 명령을 무시했다. 홍은 사천에서 이자성을 격파했지만, 전투에서의 승리는 반군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명나라군은 이자성과 장헌충을 잡지 못한 채 승리했다. 장헌충은 항복하고 이자성에 맞서 싸우겠다는 약속으로 군대와 물자를 받았다.
1638년과 1639년 동안 지진이 사천을 흔들었고, 메뚜기 떼가 쑤저우를 휩쓸었다. 반군 운동은 더 많은 난민들이 합류하면서 탄력을 받았다. 이자성은 계속 전투에서 패하고 산으로 도망갔다. 뤄루차이는 명나라에 항복했다. 명나라 군대가 승리를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으나, 청나라가 1638년에 다시 침략하여 명나라의 자원을 악화시켰다.
1639년, 장헌충은 구청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구청의 감옥을 열고 지역 관리들을 살해했다. 장과 뤄는 힘을 합쳐 방현을 공격한 다음, 산시 국경의 숲이 우거진 산으로 이동했다. 좌량옥이 매복 공격을 받아 10,000명의 손실을 입었다. 슝원찬은 탄핵되어 양사창으로 교체되었다.
양사창과 좌량옥은 정책에 대해 충돌했지만, 1639년부터 1640년까지 반군에 맞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좌는 마나오산 근처에서 장헌충에게 큰 패배를 안겨 3,500명을 살해하고 여러 지휘관을 생포했다. 장은 사천 서부로 탈출했다. 양은 좌의 성공에 대해 경계심을 갖게 되었고, 다른 장군을 그의 동등자로 승진시키려 했다. 1640년 겨울, 사천은 장헌충에 의해 황폐해졌고, 명나라 군대는 매일 탈영했다. 양은 자신의 직에서 물러나도록 요청했으나, 숭정제는 거절하고 더 많은 자금을 보냈다.
4. 주요 반란 지도자
산시성 옌안 출신의 장헌충과 산시성 미즈현 출신의 이자성은 명말 민변의 주요 지도자였다. 장헌충은 용맹하여 진홍범에게 목숨을 건졌고, 이후 반란에 가담하여 '황호'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자성은 양치기였다가 군대에 입대했으나 탈영 후 우편 업무를 했다. 이후 살인 혐의로 도주, 다시 군대에 들어가 부대장이 되었으나 군량 절도 혐의로 반란군이 되었다.
4. 1. 장헌충
장헌충은 산시성 옌안 출신이었다. 그는 강인하고 용감했지만, 털이 많았고 살인을 즐겼다고 한다. 그의 공식 전기에는 "하루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매우 불행해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동료들과의 싸움으로 가족에게서 버림받자 군대에 입대했는데, 군법을 위반하여 사형 선고를 받았다.이후 장헌충은 진홍범이라는 장교가 그의 용맹함에 감탄하여 목숨을 살려주었다. 장헌충은 반란에 가담하여 마수영을 따랐고, 마수영은 그를 하급 장교로 임명하고 "황호"라는 별명을 붙였다. 1631년 겨울, 어려움이 닥치자 장헌충은 여러 번의 경우처럼 편의를 위해 로여재와 함께 항복해야만 했다.
4. 2. 이자성
이자성은 이수중의 둘째 아들로, 산시성 미즈현 출신이다. 이자성은 어릴 때부터 말 위에서 활을 쏘는 재능을 보였지만, 가난 때문에 열 살에 양치기가 되었다. 어머니가 3년 후 사망하면서 고아가 되었다. 이자성은 16세에 군대에 입대했지만, 이후 탈영하여 1626년에는 우편 업무에 종사했다.어느 시점에서 이자성은 오랫동안 출장을 다녀온 후 아내와 함께 침대에 있는 남자를 죽인 혐의로 무법자가 되었다. 그는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조카 이과가 그를 석방했고, 둘은 함께 그 지역을 도주했다. 간쑤성에서 이자성은 다시 군대에 입대하여 50명의 부대장이 되었다. 반군 고영상 토벌에 참여한 후, 이자성은 군량 절도 혐의로 반란군이 되었다.
5. 반란의 전개 과정
1641년, 장헌충은 샹양을 점령했고, 이자성은 뤄양을 점령했으나 곧 명나라 군에게 잃었다. 이자성은 당시 최고의 반란 지도자로 인정받아 많은 추종자들과 함께 카이펑을 포위했다. 양사창은 이 소식을 듣고 음식을 끊고 사망했으며, 딩치루이로 교체되었다. 한편, 장헌충은 격퇴되어 윈양에서 서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1641년부터 1644년까지 명나라 군대가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반란군에 대한 지역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딩치루이는 굶주린 부하들을 통제할 수 없었고, 그들은 지나가는 마을들을 약탈했다. 일부는 음식을 찾아 탈영했으며, 딩치루이는 탄핵되어 푸쭝룽으로 교체되었다. 장헌충의 군대는 10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지만, 쓰촨의 도시들을 점령하는 것 외에는 명나라 군에 대해 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뤄루차이는 장헌충을 떠나 이자성에게 합류했다. 이자성은 신차이와 난양을 점령했고, 그 과정에서 푸쭝룽과 멍루후를 죽였다. 그는롱은 반란을 도운 혐의로 처형되었다.
1642년, 샹청현, 수청현, 루닝, 샹양, 더안, 청톈이 모두 이자성에게 함락되었다. 장헌충은 루저우를 점령했다. 이자성은 카이펑을 필사적으로 포위했지만 실패했고, 한 번의 공격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잃었다. 카이펑은 1642년 10월 7일, 강물을 돌려 도시를 침수시켜 27만 명을 죽이면서 함락되었다. 반란군은 도시에서 남은 모든 것을 약탈하고 후퇴했다.
1643년, 반란군은 중국 중부의 이자성과 쓰촨의 장헌충, 두 주요 파벌로 뭉쳤다. 이자성은 스스로 순왕이라 선언했고, 장헌충은 서왕이라 선언했다. 우창, 한양, 창사는 장헌충에게 함락되었고, 그는 서나라 건국을 선언했다. 이자성은 장헌충의 성공이 커지는 것에 위협을 느껴 그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었다. 이자성은 뤄루차이와 다른 지역 도적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파벌 내에서 권력을 공고히 했다. 가을에 숭정제는 순촨팅에게 이자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이는 명나라 군대가 완전히 파괴되고 쑨촨팅이 전투에서 죽으면서 마지막 명나라 공세가 되었다. 이자성은 시안을 점령하여 승리를 이끌었고, 시안은 저항 없이 항복했다.
1644년, 이자성은 순나라 건국을 선언했다. 베이징에서 숭정제는 민간인들로부터 군대를 일으키는 마지막 노력을 했고, 그들을 이자성에 맞서 보냈다. 군대의 절반 이상이 베이징에서 100리도 안 되는 거리에서 탈영했다. 이자성은 두 방향으로 명나라 수도로 진격하여 타이위안, 다퉁, 창핑을 점령했다.
4월 24일, 숭정제의 환관 중 한 명이 반란군을 위해 문을 열라고 명령했지만 경비병들은 거부했다. 방어군은 대규모 무력 시위로 대포를 발사했지만 탄약이 없었다. 반란군이 화약만 발사되는 것을 깨닫자, 그들은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짧은 격전 끝에 성문을 점령했다. 숭정제는 황족들에게 자살을 명령했고, 스스로 목을 매달기 전에 자살을 할 수 없었던 공주의 팔을 잘랐다. 그녀는 반란군이 그녀를 발견했을 때 다음 날까지 살아 있었다.
이자성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달 북방 장군 오삼계가 청나라로 투항했고, 그들은 함께 산해관 전투에서 이자성을 격파했다. 이자성의 순나라는 다음 해에 해체되었고, 이자성은 혼란 속에서 사라졌다. 장헌충은 1647년 청나라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5. 1. 반란군의 분열과 연합
1633년까지 반군은 호광, 사천, 산서로 확산되었다. 진계유는 섬서, 산서, 하남, 호광, 사천의 최고 사령관이 되어 장헌충과 뤄루차이를 사천에서 몰아냈다. 하남의 반군은 서쪽으로 몰려 체상 협곡에 갇혔고, 40일 동안 폭우를 맞았다. 궁핍함 끝에 이자성을 포함한 13,000명의 반군이 진계유에게 항복했지만, 곧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이자성은 롱저우를 포위했지만 실패했고, 명나라는 마을 요새화를 시작했다. 1635년, 주요 반군 단체들은 롱양에서 회의를 열고, 장헌충과 고영상은 남쪽 직례 점령, 뤄루차이는 황하 방어, 마서잉은 기동 부대 지휘를 맡았다.
장헌충과 고영상은 펑양을 약탈하며 4,000명 이상의 명나라 관리를 살해하고 2,600채의 구조물을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이자성과 장헌충 사이에 갈등이 생겨 반군 동맹이 해체되었다.
장헌충은 대포로 방어된 뤄저우 점령에 실패했다. 이자성은 1635년과 1636년에 걸쳐 반군 활동을 계속했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서안을 잃었다. 홍승주가 이끄는 명나라 군대는 반군 진압에 실패했고, 루샹성이 호광에서 반군 진압을 담당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조문조가 이끄는 반군과의 충돌에서 패배했고, 조문조는 자살했다.
1636년까지 반군은 더욱 조직화되었고, 고영상은 타오저우로 이동하여 난징으로 가는 길에 명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고영상은 루샹성에게 패했지만 탈출했고, 루샹성은 청나라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소환되었다. 손전정은 섬서를 침략한 고영상을 생포하여 베이징으로 보냈고, 고영상은 처형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자성 등에게 합류했다.
숭정제의 세금 인상(1637년)으로 상황은 악화되었다. 슝원찬이 반군 진압을 담당했지만, 홍승주와 좌량옥은 그의 명령을 무시했다. 홍승주는 이자성을 격파했지만, 전투 승리는 큰 의미가 없었고, 명나라 군대는 약탈과 강간을 자행했다. 장헌충은 항복 후 이자성에 맞서 싸우겠다는 약속으로 군대와 물자를 받았다.
1638년과 1639년 동안 지진과 메뚜기 떼가 발생했고, 더 많은 난민들이 반군에 합류했다. 이자성은 패배 후 산으로 도망갔고, 뤄루차이는 항복했다. 명나라 군대가 승리하는 듯했지만, 청나라의 침략(1638년)으로 상황은 악화되었다.
1639년, 장헌충은 구청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켜 관리들을 살해하고, 뤄루차이와 연합하여 방현을 공격한 후 산시 국경으로 이동했다. 좌량옥은 매복 공격으로 10,000명의 손실을 보았고, 슝원찬은 양사창으로 교체되었다.
양사창과 좌량옥은 정책적으로 충돌했지만, 1639년부터 1640년까지 반군에 맞서 여러 승리를 거두었다. 좌량옥은 마나오산 근처에서 장헌충에게 큰 패배를 안겼고, 장헌충은 사천 서부로 탈출했다. 양사창은 좌량옥의 성공을 경계하여 다른 장군을 승진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두 장군은 소외되었다. 1640년 겨울, 사천은 장헌충에 의해 황폐해졌고, 명나라 군대는 탈영했다. 양사창은 사직을 요청했지만, 숭정제는 거절하고 더 많은 자금을 보냈다.
5. 2. 명나라의 진압 노력
1618년,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은 칠대죄를 명분으로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1627년까지 후금과의 전쟁, 그리고 1621년 사안의 난 등으로 명나라의 국고는 바닥을 드러냈다.산시성과 허난성에서는 자연재해가 잇따랐다. 1627년 산시성에서는 가뭄으로 인한 대기근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식인을 할 정도였다. 산시성은 명나라 말기 60년 동안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으며, 폭풍, 지진, 기근이 계속되었다. 허난성 역시 기근으로 "쌀알이 진주만큼 귀중해졌다"고 한다.
숭정제는 잦은 대신 교체로 일관된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 숭정제 재위 기간 동안 약 50명의 대학사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명나라 전체 기간 동안 이 직책을 맡았던 사람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숭정제는 황실 재정 악화를 막기 위해 우정 서비스에 대한 자금 지원을 삭감했고, 이로 인해 황허 지역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해고되었다. 이는 정부 통제력 약화와 도적 집단 형성에 기여했다.
1628년 봄, 왕가인(王嘉胤)은 산시성에서 약 6,000명의 추종자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는 훗날 쓰촨성을 텅 비게 만든 장헌충도 가담했다. 명나라군은 산시성의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했다.
또 다른 도적 두목 고잉샹(高迎祥)이 반란을 일으켜 왕가인에게 합류했다. 1629년 초, 양허(楊鶴)가 삼변 총독으로 부임했으나, 산시성 병사들의 봉급이 3년이나 밀려 있었고, 병사들마저 반란에 가담하는 등 상황은 심각했다. 양허는 왕가인의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했고, 반란군은 1630년까지 여러 요새를 점령했다.
양허의 농민 사면 정책은 효과가 없었다. 항복한 농민들은 집으로 돌아가 다른 반란 단체에 합류하곤 했다. 양허는 결국 탄핵되어 체포되었고, 홍승주로 교체되었다.
홍승주의 부하들은 반란군뿐만 아니라 민간인까지 학살하여 보상을 받았다. 1631년까지 약 20만 명의 반란군이 36개의 반란 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1633년까지 반군은 호광, 사천, 산서로 확산되었다. 진계유는 섬서, 산서, 하남, 호광, 사천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장헌충과 뤄루차이를 사천에서 몰아냈다. 하남의 반군은 서쪽으로 몰려 체상 협곡에 갇혔다. 폭우가 40일 동안 반군을 강타했고, 이자성을 포함한 13,000명의 반군이 진계유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전면적인 반란이 다시 일어났다.
이자성은 롱저우를 포위했지만 좌광현에게 쫓겨났다. 명나라 군대는 반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지 못했고, 마을에 망루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635년, 주요 반군 단체 간의 회의가 하남 중부의 롱양에서 열렸다. 장헌충과 고영상이 남쪽 직례를 점령하고, 뤄루차이는 황하를 방어하며, 마서잉은 기동 부대를 이끄는 임무를 맡았다.
장과 고는 홍무제의 고향이자 무덤이 있는 펑양을 약탈했다. 4,000명 이상의 명나라 관리들이 살해되었고, 2,600채의 구조물이 불탔다. 이자성과 장헌충 사이에 환관을 죽일지 여부에 대한 논쟁이 벌어져 반군 동맹이 해체되었다. 그들은 흩어져 이자성은 서쪽으로, 장헌충은 동쪽으로 이동했다.
장헌충은 뤄저우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이자성은 1635년과 1636년에 걸쳐 반군 활동을 계속했으나, 부하가 명나라에 투항하고 여자친구를 데려갔다. 이자는 서안을 명나라에 잃었다. 북쪽에서는 홍승주가 지휘하는 43,000명의 명나라 군대가 하남에 도착했으나 반군을 몰아내는 데 실패했다. 루샹성은 호광에서 반군 진압을 담당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조문조를 포위하여 반군 기병대와 충돌했을 때 큰 패배를 겪었고, 조는 자살했다.
반군은 1636년까지 더 잘 조직되었고, 중무장한 대포를 갖추게 되었다. 고영상은 타오저우로 이동하여 난징으로 가는 길에 명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고는 루샹성과의 전투에서 패했지만 탈출했다. 루는 청나라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북쪽 변경으로 소환되었다. 손전정은 섬서의 순무가 되었다. 손전정은 고영상을 생포하여 베이징으로 보냈고, 고영상은 그곳에서 사지가 절단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자성 등 다른 반군 지도자들에게 합류했다.
숭정제가 1637년에 군자금 마련을 위해 세금을 인상하면서 반군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슝원찬은 전반적인 반군 진압 활동을 담당했지만, 홍승주와 좌량옥은 그의 명령을 무시했다. 홍은 사천에서 이자성을 격파했지만, 전투에서의 승리는 반군에 대해 거의 의미가 없었고, 때로는 군대가 약탈과 강간을 자행했다. 명나라군은 이자성과 장헌충을 죽이거나 생포하지 못한 채 승리를 거두었다. 장헌충은 항복했고, 이자성에 맞서 싸우겠다는 약속으로 군대와 물자를 받았다.
1638년과 1639년 동안 지진이 사천을 흔들었고, 메뚜기 떼가 쑤저우를 휩쓸었다. 이자성은 계속 전투에서 패하고 산으로 도망갔다. 뤄루차이는 명나라에 항복했다. 청나라는 1638년에 다시 침략하여 명나라의 자원을 악화시켰다.
1639년, 장헌충은 구청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구청의 감옥을 열고 지역 관리들을 살해했다. 장과 뤄는 힘을 합쳐 방현을 공격한 다음, 산시 국경의 산으로 이동했다. 좌량옥이 반란에 맞서 파견되었으나 매복 공격을 받아 10,000명의 손실을 입었다. 슝원찬은 탄핵되어 양사창으로 교체되었다.
양사창과 좌량옥은 정책에 대해 충돌했지만, 1639년부터 1640년까지 반군에 맞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좌는 마나오산 근처에서 장헌충에게 큰 패배를 안겨 3,500명을 살해하고 여러 지휘관을 생포했다. 장은 사천 서부로 탈출했다. 양은 좌의 성공에 대해 경계심을 갖게 되었고, 다른 장군 하인룡을 그의 동등자로 승진시키려 했다. 1640년 겨울, 사천은 장헌충에 의해 황폐해졌고, 명나라 군대는 매일 탈영했다. 양은 자신의 직에서 물러나도록 요청했다. 숭정제는 거절하고 대신 그에게 의약품과 기근 구제를 위한 더 많은 자금을 보냈다.
6. 반란의 종결과 영향
이자성이 1644년 베이징을 함락하고 순나라를 건국했으나,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하여 산해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그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순나라는 이듬해 해체되었고, 이자성은 혼란 속에서 사라졌다. 장헌충은 1647년 청나라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6. 1. 이자성의 베이징 함락과 순나라 건국
1644년, 이자성은 순나라를 건국했다. 베이징의 숭정제는 민간인으로 군대를 조직해 이자성에게 맞서게 했으나, 이 군대의 절반 이상은 베이징에서 100리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탈영했다. 이자성은 두 방향으로 명나라 수도를 향해 진격하여 타이위안, 다퉁, 창핑을 함락시켰다.4월 24일, 숭정제의 환관 중 한 명이 반란군에게 성문을 열라고 명령했지만, 경비병들은 이를 거부했다. 방어군은 대포를 발사하며 대규모 무력 시위를 벌였으나, 실제로는 탄약이 부족했다. 반란군은 화약만 발사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 짧은 격전 끝에 성문을 점령했다. 숭정제는 황족들에게 자결을 명하고, 스스로 목을 매기 전 자결하지 못한 공주의 팔을 잘랐다. 이 공주는 다음 날 반란군에게 발견될 때까지 살아있었다.
그러나 이자성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달, 북방 장군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했고, 이들은 산해관 전투에서 이자성을 격파했다. 이자성의 순나라는 이듬해 해체되었으며, 이자성은 혼란 속에서 사라졌다.
6. 2. 오삼계의 투항과 청나라의 개입
이자성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달, 북방 장군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했고, 이들은 함께 산해관 전투에서 이자성을 격파했다. 이자성의 순나라는 다음 해에 해체되었으며, 이자성은 혼란 속에서 사라졌다. 장헌충은 1647년 청나라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6. 3. 장헌충의 최후
장헌충은 1647년 청나라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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