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모세 (미켈란젤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미켈란젤로의 모세는 율리우스 2세의 묘를 위해 제작된 조각상으로, 앉아 있는 모습의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쥐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 1505년 율리우스 2세의 의뢰로 시작되어 1545년에 묘가 완공되었으며, 뿔이 달린 모습으로 묘사된 것이 특징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 작품을 모세가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백성을 보고 분노를 억누르는 순간으로 해석했으며, 말콤 맥밀란과 피터 스웨일스는 십계명을 받기 직전의 경외심을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전 세계 여러 곳에 복제품이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 피에타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1498년에서 1500년 사이 제작된 대리석 조각상으로, 피라미드 구도, 젊은 성모, 절제된 수난 표현이 특징이며 성 베드로 대성당에 전시, 방탄 유리로 보호되고 있다.
  •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 다비드 (미켈란젤로)
    다비드 (미켈란젤로)는 미켈란젤로가 1501년부터 1504년까지 제작한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상으로, 골리앗과의 싸움을 앞둔 다윗의 모습을 표현하며 피렌체의 정치적 상징으로 여겨진다.
  • 교황 율리오 2세 - 성 베드로 대성전
    성 베드로 대성전은 로마 4대 성전이자 바티칸 시국의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며 기독교 성지로, 예수의 사도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졌고, 1506년 착공하여 1626년 완공되었으며, 돔과 내부의 예술 작품들이 특징이다.
  • 교황 율리오 2세 - 1510년 인플루엔자 범유행
    1510년 인플루엔자 범유행은 16세기 유럽을 휩쓴 인플루엔자 유행으로,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급격한 증상과 빠른 확산, 비교적 빠른 회복세를 특징으로 하는 '인플루엔자'라는 명칭의 유래가 된 유행병이다.
모세 (미켈란젤로)
작품 정보
미켈란젤로의 모세 (로마)
미켈란젤로의 모세 (로마)
제목모세
주제성경의 모세
예술가미켈란젤로
제작 연도기원후 1513년경–1515년
재료대리석 조각
사조르네상스
높이 (미터)2.35
높이 (인치)92.5
너비 (미터)2.10
너비 (인치)82.6
소장 위치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이전 작품교황 율리오 2세의 무덤
다음 작품반항하는 노예

2. 제작 배경 및 역사

율리우스 2세는 1505년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묘 건립을 의뢰했다. 묘는 1545년에 완공되었고, 율리우스 2세는 1513년에 사망했다.[3] 초기 디자인은 40개가 넘는 조각상을 포함한 거대한 규모였으며, 모세상은 약 3.74m 높이의 단 위에 성 바울상의 반대편에 배치될 예정이었다.[3] 최종 디자인에서 모세상은 아래층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2. 1. 율리우스 2세의 의뢰

율리우스 2세는 1505년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묘 건립을 의뢰했으며, 묘는 1545년에 완공되었다.[3] 율리우스 2세는 1513년에 사망했다.[3] 미켈란젤로의 초기 디자인은 거대했으며 40개가 넘는 조각상을 요구했다. 모세상은 약 3.74m 높이의 단 위에 성 바울상의 반대편에 배치될 예정이었다.[3] 최종 디자인에서 모세상은 아래층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2. 2. 제작 과정과 완성

율리우스 2세는 1505년 미켈란젤로에게 묘 건립을 의뢰했으며, 묘는 1545년에 완공되었다. 율리우스 2세는 1513년에 사망했다.[3] 미켈란젤로의 초기 디자인은 거대했으며 40개가 넘는 조각상을 요구했다. 모세상은 약 3.74m 높이의 단 위에 성 바울상의 반대편에 배치될 예정이었다.[3] 최종 디자인에서 모세상은 아래층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3. 작품 설명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십계명을 받고 시나이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를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감정 표현은 돌이라는 재료와 조각가의 예술적 한계를 초월하는 듯하다.[6]

조르조 바사리는 로마의 유대인들이 이 조각상을 신성하게 여겨 매주 토요일마다 참배했다고 기록했다.[4] 이는 모세상의 생동감 넘치는 표현이 16세기부터 이 작품을 유명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3. 1. 외형 묘사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은 앉은 자세로 묘사된다. 몸은 정면을 향하고, 덥수룩한 수염이 있는 머리는 왼쪽을 향하고 있다. 오른발은 땅에 닿아 있고, 왼쪽 다리는 발가락만 땅에 닿은 채로 올라가 있다.[5] 오른손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잡고 있고,[6] 왼손은 길고 윤기 있는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4] 조르조 바사리는 "조각하기 어려운 수염의 섬세한 털은 마치 붓으로 그린 듯 부드럽고 솜털 같다"라고 묘사했다.[4]

3. 2. 예술적 특징

조르조 바사리는 저서 "미켈란젤로의 생애"에서 모세상을 고대와 현대의 어떤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걸작이라 칭송하며,[4] 섬세한 수염 표현, 옷 주름, 팔의 근육, 손의 뼈 등 모든 부분에서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베일로 가려야 할 정도로 빛나는 성스러운 얼굴은 신성함을 완벽하게 표현했다고 극찬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모세상을 앉은 자세로 묘사하며, 몸은 정면, 머리는 왼쪽, 오른발은 땅에, 왼쪽 다리는 발가락만 땅에 닿도록 묘사했다.[5] 오른팔은 십계명 돌판과 수염 일부를, 왼팔은 무릎 위에 놓여 있다고 설명했다.

영국 신문 가디언의 조나단 존스는 모세의 오른손은 십계명 돌판을 보호하고, 왼손은 격렬한 행동을 억누르는 듯하다고 묘사했다.[6] 시나이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황금송아지를 숭배하는 백성을 보고 분노하는 감정이 조각에 잘 표현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수염 표현이 돋보이며, 뿔과의 결합을 통해 비인간적이고 악마적인 모습을 부여했다고 해석했다.[6]

조각상의 머리 부분 상세


13세기 삽화 사본에 나오는 뿔 달린 모세의 그림


조각상 머리에 있는 두 개의 뿔은 라틴 기독교의 상징적 관습을 따른 것이다.[6][8][9][10][11] 이는 출애굽기 34장 29절, 30절, 35절의 라틴어 불가타 번역에서 모세의 얼굴을 "cornutala"("뿔 달린")라고 묘사한 것에서 유래한다.[12] 일부 학자들은 예로니무스가 모세의 얼굴을 찬양하기 위해 "뿔 달린"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해석한다.[8] 그러나, 중세와 근대 초기에 반유대주의적 감정과 연관되어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8]

2008년에 출판된 한 책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에 있는 "뿔"은 처음부터 보이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며, 뿔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이론을 제기했다.[9] 이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14]

4. 해석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914년 "미켈란젤로의 모세"라는 에세이에서 구약성경(출애굽기)의 내용과 연관 지어 모세의 심리 상태를 분석했다.[5] 반면 말콤 맥밀란과 피터 스웨일스는 모세가 두 번째 십계명을 받은 출애굽기 33장과 34장의 사건과 관련지어 조각상을 해석했다.[7]

모세상에 나타나는 뿔의 의미에 대해서는 라틴 기독교의 관습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6][8][9][10][11] 또한, 미켈란젤로와 율리우스 2세 사이의 긴장 관계가 모세상에 투영되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4. 1. 프로이트의 심리 분석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914년 "미켈란젤로의 모세"라는 에세이에서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을 구약성경(출애굽기) 32장에 묘사된 장면과 연결해 해석했다.[5] 프로이트는 모세가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분노를 억누르는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모세의 자세와 표정에서 복잡한 심리 상태를 읽어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세는 처음에 분노하여 십계명을 잊고 복수하려 했지만, 곧 유혹을 극복하고 분노와 경멸, 고통이 뒤섞인 채 앉아 있게 된다. 그는 십계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의 분노를 억제하고 내적 갈등을 겪는다. 프로이트는 모세의 왼팔은 몇 분 전 다른 손이 수염을 학대한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고 묘사했다.[5]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디테일


말콤 맥밀란과 피터 스웨일스는 "쓰레기 더미에서의 관찰: 프로이트, 미켈란젤로의 모세, 그리고 정신분석"이라는 에세이에서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7] 그들은 모세가 두 번째 십계명을 받은 출애굽기 33장과 34장의 사건과 관련지어 조각상을 해석했다. 그들은 모세가 빈 돌판을 들고 있으며, 성경에서 모세가 뿔을 가지게 된 것은 두 번째 십계명을 받은 후라고 지적하며, 이 조각상이 모세가 하나님을 본 순간을 묘사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나는 주요 감정은 "창조주를 마주하는 경외감"이라고 말했다.[7]

4. 2. 맥밀란과 스웨일스의 해석

말콤 맥밀란과 피터 스웨일스는 그들의 에세이에서 이 조각상을 두 번째 십계명과 출애굽기 33장과 34장에 언급된 사건과 연결시켰다.[7] 그들은 모세가 빈 돌판을 들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이 율법을 두 번째로 주기 위해 준비하라고 모세에게 명령했던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성경에는 모세가 율법을 두 번째로 받은 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온 후에야 뿔을 가졌다고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들은 이 조각상이 출애굽기 33장에 묘사된 대로 모세가 하느님을 보았을 때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지위와 백성의 지위에 대해 의심으로 가득 찬 모세는 그들이 용서받고, 주의 은총을 받고, 주가 자신의 자리를 되찾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줄 것을 요청—심지어 요구하는—상당한 위험을 감수합니다. 성공에 고무된 그는 그 후로 주가 그의 영광을 드러내 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모든 것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러한 모세가 주를 얼마나 간절한 감정으로 기다렸을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가 올까요? 그는 계약을 갱신할까요? 그는 그의 영광을 드러낼까요?"[7]

또한, 이들은 바울과 모세가 모두 하느님을 직접 경험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미켈란젤로와 율리우스 2세 교황 모두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플로렌스 신플라톤주의의 중요한 사상과 연결된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나는 주요 감정은 "창조주를 마주하는 경외감"이라고 말한다.[7]

4. 3. 뿔의 의미



라틴 기독교의 관습에 따라, 이 조각상에는 머리에 두 개의 뿔이 있다.[6][8][9][10][11] 뿔 달린 모세의 묘사는 출애굽기 34장 29절, 30절, 35절의 라틴어 불가타 번역에서 유래한다. 이 번역은 모세의 얼굴을 "cornutala"("뿔 달린")이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모세가 두 번째로 계명을 받고 백성에게 돌아온 장면이다.[12]

일부 현대 학자들은 중세 신학자들이 예로니무스가 라틴어로 "뿔 달린"을 사용하여 모세의 얼굴을 찬양하려 했다고 믿었다.[8] 원래 히브리어가 어렵고 "뿔"을 의미할 가능성이 적다는 이해는 르네상스 시대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13]

고전학자 스티븐 버트먼은 예로니무스 자신이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독자들이 뿔을 악마, 야생 동물, 적그리스도와 연관짓는 신약성경의 연상을 염두에 두고 신학적 이유로 의도적으로 모세를 "뿔"과 연관짓는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중세 기독교 미술에서 뿔 달린 모세를 묘사하는 것은 때로는 예수의 예언자이자 선구자로서의 영광을 묘사하기 위해서였지만, 특히 바울이 신앙과 율법을 대조적으로 비교한 맥락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8][11]

미술사가 루스 멜린코프는 모세의 뿔이 원래 악마의 뿔과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중세와 근대 초기에 반유대주의적 감정이 발전하면서 부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8] 유대인과 악마를 연결하는 이미지가 자주 만들어졌고, 유대인은 때때로 뿔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버트먼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 조각상 자체가 모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라고 본다. 미술사가 제니퍼 쿠시드는 이 조각상이 동물과 인간의 특성을 혼합하여 신성함을 보여주는 뿔 달린 모세 전통의 정점이라고 주장한다.

2008년에 출판된 한 책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에 있는 "뿔"은 애초에 보이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며 뿔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이론을 제기했다. 이 책에서는 "조각상은 결코 뿔이 없었다. 예술가는 '모세'를 조각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에 필적할 만한 특별한 시각 효과의 걸작으로 계획했다. 이러한 이유로 작품은 높이 올려져 바실리카 정문을 향해 바로 앞을 바라보게 해야 했다. 머리에 있는 두 개의 돌출부는 아래층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관람객에게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보이는 것은 그 부분에서 반사되는 빛뿐이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9]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14]

4. 4. 미켈란젤로와 율리우스 2세의 관계

일부 해석에서는 미켈란젤로에게 묘비 제작을 의뢰한 율리우스 2세와 예술가 사이의 긴장 관계를 모세상에 투영하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모세가 율리우스 2세와 예술가 모두에게 질책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했다.[5] 버트먼은 율리우스 2세가 흔히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이는 1000년 동안 교황들 사이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며, 조각상과 율리우스 2세 사이에 신체적 유사성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5] 모세의 분노와 위엄이 율리우스 2세의 성격을 반영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5. 복제품 및 영향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마이어스 공원에 있는 모세상 복제품


1931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재무부 장관이자 "유고슬라비아 황금 디나르의 아버지"로 알려진 보이슬라브 벨코비치(Vojislav Veljković)는 비오 11세에게 미켈란젤로의 원작 조각 21점(모세상 포함)을 분실 왁스 주조법(lost-wax method)으로 제작하는 것을 청원했다. 교황은 벨코비치가 연중 섭씨 1도 이내로 내부 온도를 유지하는 기후 제어 시스템을 갖춘 공간을 마련하는 조건으로 승인했다.[15]

벨코비치는 벨그라드에 있는 자신의 가족 저택 안뜰에 동남유럽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Museo'(후에 '벨코비치 파빌리온'으로 불림)를 설립하고, 현대적인 전시관을 건설했다. 이 건물에는 동남유럽 최초의 현대적인 HVAC 시스템이 설치되었다.[15]

교황의 승인 후, 파리의 주조 회사 Susse Frères가 주조 작업을 맡았고, 바티칸에서 진정성 증명서가 발급되었다. 벨코비치는 1934년 박물관 개관 전에 사망했지만, 그의 동생 요반이 프로젝트를 완료했다. 'Museo'는 일주일에 두 번 대중에게 개방되었다. 모세상 주조물 외에도 미켈란젤로의 원작 4점(낮, 밤, 죽어가는 노예, 반항하는 노예)의 주조물을 포함하여 250점 이상의 다른 미술품이 전시되었다.[16]

2차 세계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Museo'는 폐쇄되었으나, 점령 기간 동안 독일군은 소장품을 약탈하지 않았다. 전쟁 후 공산주의자가 유고슬라비아를 장악하면서, 박물관과 미술품은 국유화되었다. 건물은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고, 소장품의 그림과 조각 일부가 사라졌다. 미켈란젤로 작품의 청동 주조물은 미술대학(이후 벨그라드 예술대학교 미술학부)으로 옮겨져 토마 로산디치(Toma Rosandić)의 톱치데르(Topčider) 작업장에 보관되었다가 미술학부 조각과의 자리가 되었다. 현재 모세상 주조물은 그곳에 전시되어 있다.[17]

1971년, 마이어스 공원에 Milne & Choyce 백화점이 구입한 모세상의 복제품이 공개되었다.[18]

5. 1. 전 세계의 복제품



전 세계 여러 곳에 모세상의 복제품이 존재한다. 1930년대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보이슬라브 벨코비치(Vojislav Veljković)는 비오 11세의 허가를 받아 청동 복제품을 제작했다. 이 복제품은 벨그라드에 있는 그의 가족 저택 안뜰에 동남유럽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Museo'(나중에 '벨코비치 파빌리온'으로 불림)에 전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주의 정권이 유고슬라비아를 국유화하면서, 이 복제품은 현재 벨그라드 예술대학교 미술학부 조각과에 전시되어 있다.[15][16][17]

1971년에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마이어스 공원에 Milne & Choyce 백화점이 구입한 복제품이 설치되었다.[18]

참조

[1] 서적 Michel Angelo https://archive.org/[...] Boston, Houghton, Osgood and Company
[2] 백과사전 Michelangelo
[3] 논문 The First Two Projects of Michelangelo's Tomb of Julius II
[4] 문서 Michelangelo Buonarotti of Florence, Painter, Sculptor and Architect (1475–1564) http://employees.one[...]
[5] 서적 The Moses of Michelangelo http://www.clas.ufl.[...]
[6] 뉴스 Moses, Michelangelo (1513–16) https://www.theguard[...] 2002-06-07
[7] 논문 Observations from the Refuse-Heap: Freud, Michelangelo's Moses, and Psychoanalysis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8] 서적 The Horned Moses in Medieval Art and Thought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9] 서적 The Sistine Secrets HarperCollins
[10] 논문 Shedding Light on Michelangelo's Moses http://archderm.jama[...]
[11] 논문 Exodus 34:29–35: Moses' "Horns" in Early Bible Translations and Interpretations http://www.collectio[...]
[12] 성경 Biblia Sacra Vulgata
[13] 서적 Chap. IX. Of the Picture of Moses with Horns http://penelope.uchi[...]
[14] 웹사이트 Jewish art before 1800 http://richardmcbee.[...]
[15] 웹사이트 Mikelanđelov mojsije sa senjaka Beograd ima skulpturu na kojoj bi mu pozavidele svetske metropole, a retko ko zna za nju https://www.blic.rs/[...] 2019-02-07
[16] 웹사이트 Hoće li Museo vratiti stari sjaj? http://presscentar.u[...] 2023-06-20
[17] 웹사이트 Kuća porodice Veljković https://beogradskona[...] 2020-12-30
[18] 웹사이트 Statue of Moses https://sculpturemap[...] 2023-07-24
[19] 백과사전 Michelangelo
[20] 논문 The First Two Projects of Michelangelo's Tomb of Julius II https://www.jstor.or[...]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