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목조는 고려 후기의 인물로, 전주에서 태어나 삼척으로 이주하여 왜구와 원나라의 침략을 막아냈다. 몽골에 투항한 후 다루가치로 임명되었으며, 조선 태조의 6대조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쌍성총관부 - 환조 (조선)
환조 이자춘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로,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천호를 지내다 고려 공민왕의 반원 정책에 따라 고려에 귀순하여 동북면 영토 수복에 기여했으며, 사후 환왕, 환조 연무성환대왕으로 추존되었다. - 쌍성총관부 - 익조
익조는 조선의 추존 왕으로, 본명은 이행리이며, 원나라의 다루가치와 일본 원정에 참여했고, 여진족과의 갈등으로 의주로 이주하여 쌍성총관부의 다루가치를 지냈다. - 조선 목조 - 효공왕후
효공왕후는 고려 시대 이안사와 혼인하여 조선 태조의 고조모가 되었으며, 태조 즉위 후 효비로 추존되고 태종에 의해 효공왕후로 시호가 올려진 조선 왕비 중 유일하게 이씨 성을 가진 왕비이다. - 조선 목조 - 이양무
이양무는 전주 이씨 가문 출신으로 고려 시대에 활동했으며, 과거 급제 후 관직에 나섰고, 아들 이안사는 조선 목조가 되었으며, 묘소인 준경묘는 풍수지리 사상과 결합되어 조선 왕조 건국과 관련된 설화로 전해진다. - 용비어천가 - 정인지
정인지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고려사 등을 편찬했으며,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영의정을 역임했으나 단종 폐위에 가담한 행적으로 비판받았다. - 용비어천가 - 환조 (조선)
환조 이자춘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로,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천호를 지내다 고려 공민왕의 반원 정책에 따라 고려에 귀순하여 동북면 영토 수복에 기여했으며, 사후 환왕, 환조 연무성환대왕으로 추존되었다.
목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안사 |
한자 표기 | 李安社 |
직위 | 조선 추존왕 |
재위 기간 | 1252년–1274년 (다루가치) |
출생 | 1204년 |
출생지 | 전주, 전라북도, 고려 |
사망 | 1274년 3월 3일 (69-70세) |
사망지 | 전주, 전라북도, 고려 |
묘소 | 덕릉 |
배우자 | 효공왕후 |
자녀 | 아들 6명 |
가문 | 전주 이씨 |
왕조 | 조선 |
아버지 | 이양무 |
어머니 | 삼척 이씨 (삼척 이씨 이강제(李康濟)의 딸) |
추존 정보 | |
시호 (최초) | 목왕 (穆王, 1392년 태조에 의해 추존) |
시호 (최종) | 인문성목대왕 (仁文聖穆大王, 1411년 태종에 의해 추존) |
묘호 | 목조 (穆祖) |
2. 생애
이안사는 전라도 전주에서 대장군을 지낸 이양무와 상장군 이강제의 딸 삼척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그가 이양무의 장남이라 하고, 다른 설에 따르면 고려 말 주부동정을 지낸 이영습이 그의 형이라고도 한다. 이양무는 고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안사의 아버지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젊은 시절 이안사는 기생 문제로 산성별감(山城別監)과 갈등을 빚었다. 이안사는 이 지역의 한 기생을 좋아했는데, 하루는 그 고을 별감과 기생 문제로 다투었다. 화가 난 이안사는 별감에게 따졌고 싸움까지 일어났는데, 이 별감이 고을 현감과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현감은 이 문제를 도지사급이었던 안렴사에게 알렸고, 이안사는 투옥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는 몽고와의 전란기라 호족들은 스스로 집안과 재산, 인명을 지키기 위해 가병을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안렴사는 가병으로 이안사를 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이안사는 안렴사에게서 도망치는 틈을 타서 집을 정리하고 가솔과 재산을 가지고 강원도 삼척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왜구와 원의 침략을 막아냈다. 그러나, 산성별감이 안찰사로 임명되어 오자 다시 의주(宜州, 원산)로 이주하였다.
2. 1. 몽골 투항과 다루가치 임명
조정은 이안사를 의주 병마사로 삼아 원나라의 침략을 막게 했으나, 1254년 몽골의 산지가 이안사를 공격하고 회유하자 항복하였다.[5] 당시 몽골군은 철군할 때 항복한 고려인들을 지린성으로 끌고 갔는데, 이안사는 개원로(zh) 남경 만호부의 오동(斡東, 알동[5])으로 이주했다. 1255년 이안사는 오동천호소의 우두머리인 오동천호(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되었다.[5] 1274년 세상을 떠나 아들 이행리가 관직을 이어받았다.3. 가족 관계
4. 이주 경로
이안사는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나 삼척, 의주(원산시)를 거쳐 원나라 오동(斡東, 알동)[5]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이주는 당시 고려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 전주 → 삼척: 이안사는 전주에서 기생 문제로 산성별감과 갈등을 빚어 삼척으로 이주하였다. 이안사는 삼척에서 왜구와 원나라의 침략을 막아냈다.
- 삼척 → 의주(원산): 산성별감이 안찰사로 임명되어 오자, 이안사는 다시 의주(원산시)로 이주하였다.
- 의주(원산) → 원나라 오동(斡東): 1254년 몽골의 산지가 이안사를 공격하고 회유하자 항복하였다. 몽골군은 항복한 고려인들을 지린성으로 끌고 갔는데, 이안사는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만호부의 오동(斡東)으로 이주하였다. 1255년 이안사는 오동천호소의 우두머리 오동천호(千戶) 겸 다루가치로 임명되었다.
5. 평가 및 의의
이안사의 생애는 고려 말 격동하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 잦은 이주와 몽골 투항 등은 당시 호족들이 생존을 위해 어떠한 선택을 해야 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안사는 전주에서 삼척으로, 다시 의주(원산시)로 이주해야만 했다.[5] 이는 기생 문제로 인한 갈등, 왜구와 원의 침략, 산성별감과의 재회 등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1254년 몽골의 산지가 이안사를 공격하고 회유하자 항복하였고, 1255년 몽골에 의해 알동 천호소를 다스리는 다루가치로 임명되었다.[5] 이러한 이안사의 몽골 투항은 비판받을 여지도 있으나, 당시 몽골의 침입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안사는 조선 왕조 개창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392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목왕(穆王)에 추봉되었고, 1411년 태종에 의해 '''목조'''(穆祖)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에 재추봉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3]
문서
達魯花赤
[4]
문서
三興地誌 度祖生名之善來(小字)蒙古諱孛顔帖木児(竜飛御天歌)天方擇矣匪白衲師海東黎民其肯忘斯
[5]
문서
현 라선시의 두만강 맞은 편, 한·중·러시아|러 접경인 러시아 연해주(프리모르스키 변경주) 하산스키군 하산 (프리모르스키 지방)|하산과 중국 지린성 훈춘시 경신진(敬信鎭) 방천촌(防川村) 일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