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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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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와디스와프 2세는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의 아들로, 1386년 폴란드 왕위에 올라 브와디스와프 2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튜턴 기사단과의 갈등, 리투아니아의 기독교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통합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튜턴 기사단을 격파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위상을 높였으며, 1434년 사망 시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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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왕, 바벨 대성당의 슬픔의 성모 삼폭 제단화 세부 묘사
출생일1352년/1362년 경
출생 장소빌뉴스,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망일1434년 6월 1일 (71-72/81-82세)
사망 장소흐로데크 야기엘론스키, 폴란드 왕국
매장지바벨 대성당
왕조야기에우워 왕조 (게디미나스 왕조의 분가)
아버지알기르다스
어머니율리아나 트베르스카야
리투아니아 대공 (대공/최고 공작)
통치 기간1377년 5월 - 1381년 8월
1382년 8월 3일/15일 - 1434년 6월 1일
선임자알기르다스 (1377년)
켕스투티스 (1382년)
후임자켕스투티스 (1381년)
브와디스와프 3세 (1434년)
섭정스키르가일라 (1386년–1392년)
비타우타스 (1392년–1401년)
섭정 유형섭정
공동 통치자 (대공)비타우타스 (1401년–1430년)
슈비트리가일라 (1430년–1432년)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 (1432년–1434년)
공동 통치자 유형공동 통치자 (대공)
폴란드 국왕
통치 기간1386년 3월 4일 - 1434년 6월 1일
선임자야드비가
후임자브와디스와프 3세
대관식1386년 3월 4일
섭정야드비가 (1386년–1399년)
섭정 유형공동 통치자
배우자
배우자 목록야드비가
안나 첼스카
엘리자베트 필레츠카
조피아 홀샨스카
자녀
자녀 목록엘리자베타 보니파치아 야기에우워
야드비가 야기에우워
카지미에시 야기에우워
브와디스와프 3세
카지미에시 4세

2. 어린 시절

브와디스와프 2세, 즉 요가일라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며, 역사가들은 1352년 또는 1362년경으로 추정한다.[4] 그는 게디미니드 왕조 출신으로,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트베르의 율리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5] 율리아나는 트베르 대공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의 딸이었다. 요가일라라는 이름은 '다른 이보다 더 용감하고 우월하다'는 의미를 지녔으며, 어린 시절은 주로 아버지의 영지인 빌뉴스에서 보낸 것으로 여겨진다.[10]

2. 1. 리투아니아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 즉 요가일라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출생 연도조차 확실하지 않다. 과거 역사가들은 그가 1352년에 태어났다고 추정했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1362년경으로 더 늦은 시기를 제시하기도 한다.[4][27] 그는 게디미니드 왕조의 후손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알기르다스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트베르의 율리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5] 율리아나는 트베르 대공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의 딸이었다. 요가일라라는 이름은 '다른 이보다 더 용감하고 우월하다'는 의미를 지녔으며, 그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아버지의 영지인 빌뉴스에서 보낸 것으로 여겨진다.[10] 요가일라는 아버지 계통으로 리투아니아인이었으며, 리투아니아어를 구사하여 사촌인 비타우타스와 리투아니아어로 대화했다고 알려져 있다.[7][8][10] 리투아니아의 기독교화 과정에서 사모기티아 공국을 방문했을 때, 현지 주민들과 소통할 수 없었던 성직자들을 대신해 요가일라 자신이 사모기티아 방언으로 가톨릭교 교리를 가르쳤다는 기록도 있다.[9] 다만 튜턴 기사단의 기록에 따르면 글을 읽거나 쓰지는 못하고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10]

1386년에서 1387년 사이에 빌뉴스 조폐창에서 주조된, 사자가 새겨진 초기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의 동전


1377년 아버지 알기르다스가 사망하자 요가일라는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계승했다.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북서부의 리투아니아 민족 지역과, 현재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서부 일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루테니아 영토로 구성된, 다양한 민족과 정치 체제가 공존하는 복합적인 국가였다. 초기에는 요가일라가 아버지처럼 남부와 동부의 루테니아 지역을 주로 통치했고, 그의 삼촌이자 트라카이 공작인 켕스투티스가 북서부의 리투아니아 민족 지역을 계속 다스리는 이원적 통치 체제가 유지되었다.[6][28] 그러나 요가일라의 계승은 곧 이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통치를 시작하자마자 요가일라는 내부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1377년에서 1378년 사이, 알기르다스의 장남이자 요가일라의 이복형인 폴로츠크 공작 안드레이가 대공 자리를 노리며 요가일라의 권위에 도전했다. 1380년에는 안드레이와 또 다른 이복형제 브랸스크 공작 드미트리가 모스크바 대공국드미트리 돈스코이 대공과 손을 잡고, 금장 칸국의 실질적 통치자 마마이와 동맹을 맺은 요가일라에 대항했다. 요가일라는 쿨리코보 전투에서 마마이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갔으나 전장 근처에서 머뭇거리며 합류하지 못했고, 결국 마마이는 드미트리 돈스코이에게 참패를 당했다. 이 전투는 장기적으로 모스크바 대공국이 금장 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훗날 리투아니아의 존립을 위협하는 가장 큰 세력이 되었다. 하지만 당장 1380년에는 모스크바 역시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요가일라는 같은 해에 삼촌 켕스투티스와의 권력 다툼에 집중할 수 있었다.

1386년에 폴란드 왕이 되기 전, 1377~1386년에 사용된 요가일라의 칭호(라틴어)가 새겨진 리투아니아의 국왕 인장


한편, 북서쪽 국경에서는 튜턴 기사단의 위협이 계속되었다. 튜턴 기사단은 1226년 이래로 이교도 발트족인 프로이센인, 요트빙기아인, 리투아니아인을 상대로 군사 활동과 강제 개종을 벌여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가일라는 1380년, 켕스투티스를 견제하기 위해 튜턴 기사단과 비밀리에 도비디슈케스 조약을 맺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켕스투티스는 즉시 반란을 일으켜 리투아니아 내전 (1381년-1384년)이 시작되었다. 켕스투티스는 빌뉴스를 점령하고 요가일라를 몰아낸 뒤 스스로 대공을 선포했다. 그러나 1382년, 요가일라는 아버지에게 충성했던 가신들의 군대를 모아 트라카이 근처에서 켕스투티스와 대치했다. 켕스투티스와 그의 아들 비타우타스는 협상을 위해 요가일라의 진영을 찾았으나, 속임수에 빠져 크레바 성에 감금되었다. 켕스투티스는 일주일 뒤 성 안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는데,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비타우타스는 극적으로 탈출하여 튜턴 기사단령의 말보르크 성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비간트(Wigand)'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켕스투티스와 비타우타스를 제거하는 데 튜턴 기사단의 도움을 받은 요가일라는 두비사 조약(1382년)을 통해 기사단에게 사모기티아 공국의 두비사강 서쪽 영토를 할양하고 리투아니아를 기독교화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요가일라는 이 조약의 비준을 미루었고, 이에 튜턴 기사단은 1383년 여름 리투아니아를 침공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요가일라는 전략을 바꾸어 1384년, 튜턴 기사단에 망명해 있던 사촌 비타우타스와 화해하고 그의 세습 영지인 트라카이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요가일라와 손을 잡은 비타우타스는 곧바로 튜턴 기사단을 공격하여 프로이센 지역의 여러 성을 약탈했다. 이러한 내부 갈등과 외부 위협 속에서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서 요가일라의 입지는 점차 강화되었고, 이는 이후 폴란드와의 관계 설정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2. 2. 튜턴 기사단과의 갈등

리투아니아 대공 시절부터 폴란드의 왕이 된 이후까지 브와디스와프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튜턴 기사단과의 관계는 중요한 외교적 과제였다. 리투아니아 북서부는 1226년에 설립된 이래 이교 발트족에 대한 강제 개종과 군사적 침략을 지속해 온 튜턴 기사단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1377년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계승한 요가일라(브와디스와프 2세)는 초기부터 내부 권력 다툼과 외부 위협에 직면했다. 그는 숙부인 케스투티스와의 권력 경쟁 속에서 1380년 튜턴 기사단과 비밀리에 도비디슈케 조약을 맺어 케스투티스를 견제하려 했다。 이 밀약이 발각되면서 리투아니아 내전이 발발했고, 케스투티스는 잠시 빌뉴스를 점령하고 대공을 칭했으나, 1382년 요가일라에게 패배하여 아들 비타우타스와 함께 크레바성에 투옥되었다. 케스투티스는 곧 성에서 사망했는데,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비타우타스는 튜턴 기사단령으로 망명하여 기사단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내전에서 승리한 요가일라는 튜턴 기사단과 두비사 조약을 체결하여 기독교로 개종하고 두비사 강 서쪽의 사모기티아 영토를 할양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요가일라는 이 조약의 비준을 이행하지 않았고, 이는 1383년 여름 튜턴 기사단의 리투아니아 침공을 유발했다. 1384년 요가일라는 망명 중이던 비타우타스와 화해했고, 이후 비타우타스는 오히려 튜턴 기사단을 공격하여 프로이센의 성들을 약탈하기도 했다。

폴란드 왕위에 오른 후, 브와디스와프 2세는 리투아니아비타우타스와 협력하여 튜턴 기사단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양국 연합군은 튜턴 기사단과 총 네 차례의 주요 전쟁(1409~1411년, 1414년, 1422년, 1431~1432년)을 치렀다. 이 중 가장 결정적인 전투는 1410년 그룬발트 전투(타넨베르크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튜턴 기사단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고, 이로 인해 기사단은 유럽 북동부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전쟁 결과, 튜턴 기사단은 사모기티아를 리투아니아에, 비스와강 유역의 일부 영토를 폴란드에 할양해야 했다. 영토 손실 자체는 비교적 작았지만, 이 전쟁들로 인해 튜턴 기사단의 재정적, 군사적 역량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1412년 브와디스와프 2세는 헝가리의 지기스문트와 타협하면서 튜턴 기사단으로부터 기부금을 받는 조건으로 과거 기사단에 협력했던 헝가리와의 관계를 정리하기도 했다.

3. 폴란드 왕위 계승과 통치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는 1385년 크레보 조약을 통해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1386년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로 즉위하였다.[14] 이로써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인적 연합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이후 수 세기 동안 동유럽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브와디스와프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외교 정책은 여러 중요한 과제에 직면했다. 주요 목표는 강력한 튜턴 기사단을 견제하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 동쪽으로부터의 타타르족 침략을 막는 것, 헝가리가 차지하고 있던 루테니아(Ruthenia) 지역을 되찾는 것, 그리고 남동부 지역에서 폴란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브와디스와프 2세는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자 사촌인 비타우타스의 군사적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비타우타스와의 협력을 통해 브와디스와프 2세는 여러 차례의 전쟁(1409~11년, 1414년, 1422년, 1431~32년)을 치르며 튜턴 기사단을 압박했다. 특히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는 튜턴 기사단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유럽 북동부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 전쟁으로 리투아니아는 사모기티아를 되찾았고 폴란드는 비스와강 유역의 일부 영토를 확보했다.

동쪽 국경에서는 타타르족의 위협에 대처해야 했다. 1399년 보르스칼라강 전투에서 비타우타스가 이끄는 군대가 패배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타타르 세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동시에 이 패배는 리투아니아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던 비타우타스의 야심을 꺾는 결과를 낳았다.

남쪽 국경에서는 1387년 헝가리로부터 루테니아를 되찾았으며, 몰다비아 공작을 폴란드의 봉신으로 삼아 영향력을 강화했다. 1412년에는 튜턴 기사단을 지원했던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왕과 타협을 이루어 관계를 안정시켰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보헤미아후스파를 조심스럽게 지원하면서도 지기스문트와의 관계를 관리하여, 통치 말년에는 폴란드와 헝가리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국내 정책에서는 리투아니아 지역의 기독교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당초 크레보 조약에서 약속했던 리투아니아의 완전한 폴란드 합병은 이루지 못했다. 비타우타스는 사실상 리투아니아의 독립적인 통치자로 군림했으며, 1430년 그가 사망한 후에도 브와디스와프 2세는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직접 확보하지 못하고 내전을 겪어야 했다. 결국 비타우타스의 동생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가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었다. 폴란드 내부에서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귀족 계층의 힘이 더욱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으며, 도시민 세력을 귀족에 대항하는 정치적 균형추로 활용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1434년 6월 1일 그루데크(현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왕위는 아들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계승되었고, 이후 둘째 아들 카지미에시 4세가 뒤를 이었다.

3. 1. 크레보 조약과 야드비가와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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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4년, 폴란드 귀족들은 헝가리로부터 영토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강력한 통치자를 원했고,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야기에우워)에게 당시 11세였던 폴란드의 여왕 야드비가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이 제안에는 요가일라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와 통합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폴란드 귀족들은 이를 통해 리투아니아의 위협을 제거하고 갈리시아-볼히니아의 비옥한 영토를 확보하며, 자신들의 특권을 늘리고 야드비가의 이전 약혼자였던 오스트리아 공작 빌헬름과 관련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피하고자 하는 등 여러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요가일라의 어머니 율리아나는 아들에게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딸 소피아와 결혼하고 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권유했다.[11][29] 그러나 당시 튜턴 기사단은 정교회 신자들을 이교도보다는 조금 나은 분열주의자로 여겼기에, 정교회로의 개종이 리투아니아에 대한 튜턴 기사단의 십자군을 막기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었다. 결국 요가일라는 전략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야드비가와 결혼하는 폴란드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12][30]

1385년 8월 14일, 요가일라는 크레바 성에서 크레보 조약(크레보 연합)을 통해 결혼 전 약속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이 조약에는 요가일라의 가톨릭 세례,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 영토의 폴란드 왕국 편입 약속('terras suas Lithuaniae et Russiae Coronae Regni Poloniae perpetuo applicare'), 그리고 과거 폴란드가 튜턴 기사단 등에 빼앗겼던 영토(동포메라니아 등)의 반환 요구 등이 포함되었다.[31] 리투아니아 영토 편입 약속 조항은 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 단순한 인적 연합에서부터 리투아니아의 완전한 폴란드 병합까지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크레보 조약은 당시 상황에서 매우 과감하고 중대한 결정으로 평가받는다.[13][34]

thumb에 있는 야드비가의 석관]]

1386년 2월 15일, 요가일라는 크라쿠프바벨 대성당에서 공식적으로 세례를 받고 '브와디스와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14][32] 이후 그는 공식 문서에서 브와디스와프 또는 그 라틴어 표기를 사용했다. 사흘 뒤인 2월 18일 야드비가와 결혼했으며, 3월 4일 대주교 보잔타에 의해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로 즉위했다. 그는 또한 야드비가의 어머니 엘리자베타 코트로마니치에게 법적으로 입양되어, 만약 야드비가가 먼저 사망하더라도 왕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한 최초의 리투아니아인이었다.[15]

왕의 세례는 리투아니아의 기독교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의 궁정 신하들과 귀족 대부분이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리투아니아의 강에서 대규모 세례식이 거행되며 공식적인 리투아니아의 기독교화가 시작되었다.[16][35] 비록 전통적인 이교 신앙과 동방 정교회 의식은 농민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었지만, 리투아니아 민족 귀족 대다수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국가의 종교적, 정치적 지형이 크게 변화했다.[16][35] 1387년 2월 22일, 브와디스와프 2세는 가톨릭 신자가 정교회 신자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미 결혼한 경우 정교회 배우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요구하는 법령을 발표했다.[15] 이러한 국왕의 개종과 관련 정책들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양국의 역사에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16][35]

브와디스와프 2세와 야드비가는 공동 군주로서 폴란드를 통치했다. 야드비가는 실질적인 권력은 제한적이었지만, 폴란드의 정치와 문화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387년, 그녀는 군대를 이끌고 붉은 루테니아 지역을 성공적으로 확보했으며, 이는 그녀의 아버지 러요시 1세 때 헝가리로 넘어갔던 영토를 되찾는 성과였다. 또한 몰다비아 공작 페트루 1세의 충성 맹세를 받아냈다. 1390년에는 직접 튜턴 기사단과의 협상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요한 정치적 결정은 브와디스와프 2세가 주도했으며, 야드비가는 주로 문화 및 자선 활동에 힘썼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빌뉴스크라쿠프와 유사한 마그데부르크법에 따른 도시 특권을 부여했고, 비타우타스볼레스와프 경건공카지미에시 3세 대왕의 통치 하에 폴란드에서 유대인에게 발행된 특권과 거의 같은 관점에서 트라카이유대인 공동체에 특권을 발행했다. 두 법 체계를 일체화하려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정책은 점진적이었지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3. 2. 리투아니아의 가톨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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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일라의 어머니인 율리아나는 모스크바드미트리 돈스코이의 딸 소피아와 결혼하여 동방 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권유했다.[11][29] 하지만 당시 튜턴 기사단은 정교회 신자들을 이교도보다 조금 나은 분열주의자로 여겼기에, 이 방법이 리투아니아에 대한 튜턴 기사단의 십자군 공격을 막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결국 요가일라는 폴란드 소폴란드 귀족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리투아니아와의 관계 개선, 갈리시아-볼히니아 영토 확보, 귀족 특권 강화, 그리고 당시 야드비가의 약혼자였던 오스트리아 공작 빌헬름으로 인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피하려는 등의 이유로 요가일라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11세의 어린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할 것을 제안했다.[12][30]

1385년 8월 14일, 요가일라는 크레바 성에서 크레바 동맹을 통해 결혼 전 약속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이 약속에는 요가일라 본인과 리투아니아 백성들의 기독교 개종, 튜턴 기사단 등 주변국에 빼앗긴 폴란드 영토의 반환, 그리고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 영토를 폴란드 왕국에 영구히 통합한다는 조항(terras suas Lithuaniae et Russiae Coronae Regni Poloniae perpetuo applicarela) 등이 포함되었다.[31] 이 조항은 후대에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간의 단순한 인적 연합인지, 아니면 리투아니아의 완전한 폴란드 병합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1386년 2월 15일, 요가일라는 크라쿠프바벨 대성당에서 공식적으로 세례를 받고 '브와디스와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14][32][33] 3일 뒤인 2월 18일 야드비가와 결혼했으며, 3월 4일에는 대주교 보잔타에 의해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로 즉위했다.[15] 그는 또한 야드비가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타 코트로마니치에게 법적으로 입양되어, 만약 야드비가가 먼저 사망하더라도 왕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의 세례는 리투아니아 궁정과 귀족 사회의 대규모 가톨릭 개종을 촉발했으며, 빌뉴스 등 리투아니아 강가에서 열린 대규모 세례식은 리투아니아의 기독교화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렸다.[16][35] 그는 빌뉴스의 이교 사원을 파괴하고, 신성시되던 숲을 베어내는 등 적극적으로 이교 관습을 철폐했다.[36] 비록 농민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이교 신앙과 정교회 의식이 오랫동안 유지되었지만, 리투아니아의 주요 귀족 대부분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16][35] 브와디스와프 2세의 개종과 그에 따른 정치적 결정들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양국의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16] 그는 1387년 가톨릭 신자와 정교회 신자 간의 결혼을 금지하고, 이미 정교회 신자와 결혼한 가톨릭 신자에게는 배우자의 개종을 요구하는 정책을 시행했다.[15] 또한, 1387년과 1413년에는 리투아니아의 가톨릭 귀족에게만 특별한 정치적, 법적 특권을 부여하여 정교회 귀족들과 차별을 두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빌뉴스에 가톨릭 주교구 창설을 지원했으며, 이 빌뉴스 관구를 튜턴 기사단의 영향력 아래 있는 쾨니히스베르크 관구가 아닌 폴란드의 그니에즈노 관구 산하에 두었다. 이는 튜턴 기사단과의 관계 개선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폴란드 교회가 리투아니아 교회를 지원하고 양국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35]

튜턴 기사단은 브와디스와프 2세의 개종이 진심이 아니며 위선적이거나 이단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리투아니아에 여전히 이교 신앙이 남아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침략을 계속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가 공식적으로 기독교 국가가 되고 폴란드와 동맹을 맺으면서 튜턴 기사단은 십자군의 명분을 내세우기 어려워졌고, 오히려 강력해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편, 리투아니아 내부에서는 브와디스와프 2세가 동생 스키르가일라에게 리투아니아 통치권을 맡긴 것에 불만을 품은 사촌 비타우타스와의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비타우타스는 1389년 리투아니아 대공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시 내전을 일으켰고, 튜턴 기사단의 지원을 받아 빌뉴스를 포위 공격하기도 했다. 길어진 분쟁 끝에 1392년 오스트로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비타우타스를 리투아니아의 대공(magnus duxla)으로 인정하는 대신, 자신은 리투아니아의 최고 공작(dux supremusla)으로서의 종주권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비타우타스는 이 합의를 받아들였지만, 이후에도 폴란드로부터 리투아니아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3. 3. 튜턴 기사단과의 전쟁

튜턴 기사단과의 관계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외교 정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리투아니아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에도, 튜턴 기사단은 브와디스와프 2세의 개종이 위장이며 리투아니아 내에 여전히 이교도가 남아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침략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폴란드 왕국과 기독교화된 리투아니아의 동맹은 점차 튜턴 기사단에게 실존적인 위협으로 다가왔고, 기사단이 내세우는 십자군의 명분은 설득력을 잃어갔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빌뉴스에 주교구를 설립하고 안제이 바실코를 초대 주교로 임명했는데, 이 교구는 튜턴 기사단의 중심지인 쾨니히스베르크가 아닌 폴란드의 그니에즈노 대주교 관할하에 두었다. 이는 기사단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지만, 폴란드 교회가 리투아니아 교회를 지원하며 양국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16]

리투아니아 내부에서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사촌인 비타우타스와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비타우타스는 스키르가일라에게 주어진 권력에 불만을 품고 1389년 내전을 일으켰다. 그는 튜턴 기사단과 손잡고 1390년 빌뉴스를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1392년 오스트루프 조약이 체결되어, 브와디스와프 2세는 리투아니아의 통치권을 비타우타스에게 넘겨주었다. 비타우타스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종주권 아래 리투아니아 대공(''magnus dux'')으로서 통치하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리투아니아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398년 비타우타스는 튜턴 기사단과 살리나스 조약을 맺고 사모기티아를 넘겨주기도 했으나, 1399년 보르스크라강 전투에서 티무르 왕조에게 크게 패배하면서 다시 브와디스와프 2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401년의 빌뉴스-라돔 연합은 비타우타스를 브와디스와프 2세의 종주권 아래 대공 지위로 확정하는 동시에 비타우타스가 아닌 브와디스와프 2세의 후계자에게 대공 칭호를 보장했다. 즉, 브와디스와프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리투아니아 보야르들이 새로운 군주를 선출하도록 했다. 아직 어느 군주에게서도 후계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연합의 의미는 예측할 수 없었지만,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귀족 사이의 유대와 두 국가 간의 영구적인 방어 동맹을 형성하여 폴란드는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튜튼 기사단과의 새로운 전쟁에서 리투아니아의 입지를 강화했다. 이 문서는 폴란드 귀족의 자유는 건드리지 않았지만, 리투아니아의 보야르에게 권한을 부여했는데, 그들의 대공은 그전까지 폴란드 군주제에 부과된 것과 같은 견제와 균형에 구애받지 않았다. 따라서 빌뉴스-라돔 연합은 브와디스와프 2세가 리투아니아에서 어느 정도의 지지를 얻게 했다.

1401년 말, 기사단과의 새로운 전쟁으로 리투아니아의 자원은 고갈되었고, 동부 지역의 봉기로 인해 두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의 또 다른 형제인 불만을 품은 슈비트리가일라는 이 시기를 틈타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대공을 선포했다. 1402년 1월 31일, 그는 말보르크에 나타나 그란 공국에서 요가일라와 비타우타스가 이전의 지도자 경쟁에서 했던 것과 유사한 양보로 기사단의 지지를 얻었다. 이 전쟁은 1404년 5월 22일 라치옹츠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사모기티아의 공식적인 할양에 동의했고, 프스코프에 대한 기사단의 계획을 지지하기로 동의했다. 그 대가로 콘라트 폰 융잉겐은 폴란드에 분쟁 중인 도브지니 토지와 브와디스와프 오폴스키에게 기사단에 저당 잡혔던 즈워토리야 마을을 판매하고, 비타우타스를 노브고로드에 대한 부활 시도에서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양측 모두 그 시점에서 조약에 서명할 실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기사단은 새로 획득한 토지를 요새화할 시간이 필요했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동부와 실레지아의 영토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1386년에서 1434년까지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1411년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의 왕실 문장


=== 폴란드-리투아니아-튜턴 전쟁 (1409-1411) ===

1408년 12월,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는 나바흐루다크 성에서 전략 회담을 갖고, 독일군을 포메라니아에서 떼어놓기 위해 튜턴 기사단의 지배에 대항하는 사모기티아 봉기를 선동하기로 결정했다. 브와디스와프는 비타우타스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향후 평화 조약에서 사모기티아를 리투아니아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17] 1409년 5월에 시작된 봉기는, 기사단이 아직 성을 건설하여 사모기티아에서 지배력을 공고히 하지 못했기에, 처음에는 기사단의 반응을 거의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6월까지 기사단의 외교관들은 오보르니키에서 브와디스와프 2세의 궁정에 로비를 하며 리투아니아와 기사단 간의 전쟁에 폴란드가 개입하는 것을 귀족들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2세는 귀족들을 제쳐두고 새로운 대영마스터 울리히 폰 융잉겐에게 기사단이 사모기티아를 진압하려 한다면 폴란드가 개입할 것이라고 알렸다. 이로 인해 기사단은 8월 6일 폴란드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했고, 브와디스와프 2세는 8월 14일 노비 코르친에서 이 선전포고를 받았다.

북부 국경을 지키는 성들은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기사단은 즈워토리야, 도브진 및 도브진 영토의 수도인 보브로브니키를 쉽게 점령했고, 독일 시민들은 비드고슈치(독일어: Bromberg)로 그들을 초대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9월 말에 현장에 도착하여 일주일 안에 비드고슈치를 되찾았고, 10월 8일에 기사단과 합의했다. 겨울 동안 두 군대는 대규모 대결을 준비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마조비아의 프워츠크에 전략적인 보급 기지를 설치하고, 폰툰 교를 건설하여 비스와 강을 따라 북쪽으로 수송했다.

한편, 양측은 외교 공세를 펼쳤다. 기사단은 유럽의 군주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교도에 대항하는 통상적인 십자군을 설파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군주들에게 자신의 편지를 보내 기사단이 전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호소는 각 측에 많은 외국 기사들을 성공적으로 모집했다.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우스 4세는 튜턴 기사단에 대항하여 폴란드와 방어 조약을 체결했다; 그의 형제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는 기사단과 동맹을 맺고 7월 12일 폴란드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그의 헝가리 봉신들은 그의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그룬발트 전투, 1410년. 얀 마테이코의 그림


1410년 6월 전쟁이 재개되자 브와디스와프는 약 2만 명의 기마 귀족, 1만 5천 명의 무장 평민, 주로 보헤미아에서 고용된 2천 명의 전문 기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튜턴 기사단의 심장부로 진격했다. 체르비스크의 부교를 통해 비스와 강을 건넌 후, 그의 군대는 리투아니아인, 루테니아인, 그리고 타타르족으로 구성된 1만 1천 명의 경기병을 이끌고 온 비타우타스의 군대와 합류했다. 튜턴 기사단의 군대는 약 1만 8천 명의 기병(대부분 독일인)과 5천 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7월 15일, 중세 시대 최대 규모의 격렬한 전투 중 하나였던 그룬발트 전투에서 연합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튜턴 기사단 군대는 사실상 전멸했으며, 기사단 대영주 울리히 폰 융잉겐과 대원수 프리드리히 폰 발렌로데를 포함한 주요 지휘관 대부분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수천 명의 군인들이 양측에서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말보르크 성에 있는 튜턴 기사단


이제 튜턴 기사단의 수도인 말보르크로 가는 길이 열렸고, 그 도시는 방어되지 않았다. 그러나 출처에 설명되지 않은 이유로 브와디스와프 2세는 자신의 이점을 활용하는 것을 망설였다. 7월 17일, 그의 군대는 힘들게 진격을 시작하여 7월 25일에야 말보르크에 도착했는데, 이때 새로운 대사령관인 하인리히 폰 플라우엔이 요새 방어를 조직했다. 9월 19일 브와디스와프 2세에 의해 중단된 후속 포위 공격의 소극적인 모습은 요새 자체의 견고함, 리투아니아군의 높은 사상자 수, 브와디스와프가 더 이상의 희생을 꺼렸기 때문이라는 분석, 혹은 기사단을 완전히 멸망시키기보다 약화시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는 추측 등 다양한 설명이 있지만, 명확한 사료 부족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1377~1434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튜턴 기사단과의 갈등.


전쟁은 1411년 토룬 평화 조약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군사적 우위를 협상에서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이는 폴란드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폴란드는 도브지니 토지를 되찾았고, 리투아니아는 사모기티아를 (브와디스와프와 비타우타스 생존 기간 동안만), 마조비아는 브크라 강 너머의 작은 영토를 되찾았다. 그러나 항복한 도시들을 포함한 튜턴 기사단의 영토 대부분은 온전하게 유지되었다.

브와디스와프는 이후 많은 고위 튜턴 기사단과 관료들을 비교적 적은 몸값으로 석방했다. 그러나 몸값 지불에 대한 누적된 지출은 기사단의 자원 고갈을 초래했다. 이러한 승리를 귀족들이 만족할 만큼 활용하지 못한 것은 1411년 이후 브와디스와프 정권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켰으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의 분쟁 지역인 포돌리아를 비타우타스에게 할양하고 국왕이 2년 동안 리투아니아에 부재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브와디스와프는 비판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반대 세력의 지도자인 미코와이 트롬바 주교를 1411년 가을 그니에즈노 대주교로 승진시키고, 크라쿠프에서는 비타우타스 지지자인 보이치에흐 야스트셰비에츠로 교체했다. 그는 또한 리투아니아에서 더 많은 동맹을 만들려고 했다. 1413년 10월 2일 호로드워 연합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우리 폴란드 왕국에 영구적이고 되돌릴 수 없게 묶여 있다"고 선언하고, 리투아니아의 가톨릭 귀족들에게 폴란드 슐라흐타와 동등한 특권을 부여했다. 이 조항에는 폴란드 귀족이 리투아니아 귀족의 동의 없이 군주를 선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리투아니아 귀족이 폴란드 군주의 동의 없이 대공을 선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 기근 전쟁과 외교전 ===

1414년에는 새로운 산발적인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는 기사단의 초토화 작전으로 밭과 제분소를 불태운 데서 유래하여 "기근 전쟁"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기사단과 리투아니아 양측 모두 이전 전쟁으로 너무 지쳐서 대규모 전투를 감행할 위험을 감수하지 못했고, 가을에 전투는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적대 행위는 1419년 콘스탄츠 공의회 기간까지 다시 불붙지 않았고, 교황 사절의 주장에 따라 중단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테오토니크 십자군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여러 유럽 분쟁에서도 그러했다. 비타우타스는 1415년에 키예프 대주교와 사모기티아 증인을 포함한 대표단을 보냈다. 그들은 그해 말 콘스탄츠에 도착하여 "피가 아닌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미코와이 트롬바, 자비샤 차르니, 파베우 브워드코비츠 등을 포함한 폴란드 사절들은 이교도의 강제 개종을 중단하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 대한 기사단의 공격을 중단할 것을 로비했다.[18] 폴란드-리투아니아 외교의 결과로, 공의회는 브워드코비치가 수도원 국가의 정당성을 문제 삼은 것에 충격을 받았지만, 기사단의 추가 십자군 요청을 거부하고 대신 사모기티아의 개종을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위임했다.

콘스탄츠의 외교적 맥락에는 보헤미아 후스파의 반란이 포함되었는데, 이들은 보헤미아의 새로운 왕이자 황제 선출자였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 맞서 싸우는 전쟁에서 폴란드를 동맹국으로 여겼다. 1421년, 보헤미아 의회는 지기스문트를 폐위시키고 브와디스와프에게 프라하 4개 조항의 종교적 원칙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공식적으로 왕관을 제안했지만, 그는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브와디스와프가 거절한 후 비타우타스는 부재 상태에서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그는 이단자들을 반대한다고 교황에게 확언했다. 1422년에서 1428년 사이에, 브와디스와프의 조카 지기스문트 코리부트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보헤미아에서 섭정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비타우타스는 1429년에 브와디스와프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지기스문트의 왕관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폴란드군은 수송 중인 왕관을 가로막았고 대관식은 취소되었다.

=== 골루브 전쟁과 멜노 조약 ===

1422년, 브와디스와프 2세는 골루브 전쟁으로 알려진 또 다른 전쟁을 테오토니크 기사단과 벌였고, 기사단의 황제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2개월도 안 되어 그들을 격파했다. 그 결과

3. 4. 그룬발트 전투 (1410)



1408년12월, 브와디스와프 2세와 비타우타스는 나바흐루다크 성에서 전략 회담을 갖고, 독일군의 전력을 포메라니아에서 분산시키기 위해 튜턴 기사단의 지배에 대한 사모기티아 봉기를 선동하기로 결정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비타우타스에게 지원의 대가로, 향후 평화 조약에서 사모기티아리투아니아에 반환할 것을 약속했다[17][39]. 1409년 5월에 시작된 봉기는, 기사단이 아직 성을 건설하여 사모기티아에서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지 못했기에, 처음에는 기사단의 미미한 반응만 이끌어냈으나, 6월까지 기사단의 외교관들은 오보르니키의 브와디스와프 2세 궁정에서 폴란드 귀족들에게 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 폴란드가 개입하는 것을 경고하며 로비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2세는 귀족들을 거치지 않고 새로운 튜턴 기사단 총장 울리히 폰 융잉겐에게 기사단이 사모기티아를 진압하려 한다면 폴란드가 개입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에 기사단은 8월 6일 폴란드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고, 브와디스와프 2세는 8월 14일 노비 코르친에서 이를 수락했다.

북부 국경을 지키는 성들은 방비가 취약하여 기사단은 즈워토리야, 도브지인 및 도브지인 영토의 수도인 보브로브니키를 쉽게 점령했고, 독일 시민들은 비드고슈치(독일어: Bromberg)로 기사단을 맞아들였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9월 말에 반격에 나서 일주일 만에 비드고슈치를 탈환했고, 10월 8일 기사단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겨울 동안 양측 군대는 대규모 결전을 준비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마조비아의 프워츠크에 전략적인 보급 기지를 설치하고, 비스와강을 따라 북쪽으로 수송할 부교를 건설했다.

동시에 양측은 외교 공세를 펼쳤다. 기사단은 유럽 군주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교도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호소했고, 브와디스와프 2세는 기사단이 세계 정복을 꾀한다고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러한 호소로 양측 모두 많은 외국 기사들을 모집했다. 보헤미아 국왕 벤체슬라우스 4세는 기사단에 대항하여 폴란드와 방어 조약을 맺었으나, 그의 동생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는 기사단과 동맹을 맺고 7월 12일 폴란드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그의 헝가리 봉신들은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1410년 6월 전쟁이 재개되자, 브와디스와프 2세는 약 2만 명의 기마 귀족, 1만 5천 명의 무장 평민, 그리고 주로 보헤미아에서 고용된 2천 명의 전문 기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튜턴 기사단의 심장부로 진격했다. 체르빈스크의 부교를 통해 비스와 강을 건넌 후, 그의 군대는 리투아니아인, 루테니아인, 타타르족으로 구성된 1만 1천 명의 경기병을 이끌고 온 비타우타스의 군대와 합류했다. 튜턴 기사단의 군대는 약 1만 8천 명의 기병(대부분 독일인)과 5천 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7월 15일, 중세 시대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였던 그룬발트 전투(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튜턴 기사단 군대는 사실상 전멸했으며, 튜턴 기사단 총장 울리히 폰 융잉겐과 프리드리히 폰 발렌로데 대원수를 포함한 주요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했다. 양측에서 수천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제 튜턴 기사단의 수도인 말보르크(독일어: Marienburg)로 가는 길이 열렸고, 도시는 방어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기록에 명확히 설명되지 않은 이유로 브와디스와프 2세는 이점을 즉시 활용하는 것을 망설였다. 7월 17일, 그의 군대는 진격을 시작하여 7월 25일에야 말보르크에 도착했는데, 이때 새로운 튜턴 기사단 총장 하인리히 폰 플라우엔이 요새 방어를 조직한 상태였다. 이어진 포위 공격은 소극적이었고, 결국 9월 19일 브와디스와프 2세에 의해 중단되었다. 포위 실패의 원인으로는 요새의 견고함, 리투아니아 군의 높은 사상자, 브와디스와프 2세가 추가적인 손실을 꺼렸다는 점, 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폴란드가 기사단 영토 대부분을 차지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 기사단을 약화시키되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 등이 거론된다. 그러나 명확한 사료 부족으로 확실한 설명은 어렵다.

3. 5. 내치

브와디스와프 2세는 야드비가와 공동 군주로 재위했으나, 실제 권력은 대부분 브와디스와프 2세가 행사했다. 야드비가는 실권이 거의 없었음에도 폴란드의 정치 및 문화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387년 붉은 루테니아를 회복시키고 몰다비아 공국의 충성을 확보하는 군사 원정을 이끌기도 했다. 1390년에는 튜턴 기사단과 직접 협상을 시작하기도 했으나, 주로 문화 및 자선 활동에 집중했다.

즉위 직후 브와디스와프 2세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크라쿠프와 같이 마그데부르크법을 모델로 한 도시 헌장을 부여했다. 또한 그의 사촌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 비타우타스트라카이유대인 공동체에게 과거 볼레스와프 경건공카지미에시 3세 대왕의 통치 하에 폴란드 유대인들에게 부여된 것과 유사한 특권을 부여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두 법 체계를 통합하려 했으며, 이는 처음에는 부분적이고 불균형했지만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1569년 루블린 연합 당시에는 두 국가의 행정 및 사법 시스템 간 차이가 거의 없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아직 이교도가 많았던 리투아니아 지역의 기독교화를 활발히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우대받는 경향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1387년과 1413년에는 리투아니아의 가톨릭 귀족들에게 정교회 귀족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특별한 사법 및 정치적 특권이 부여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리투아니아 내 가톨릭 세력의 확장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15세기에 루스인과 리투아니아인의 정체성이 각각 부상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리투아니아를 기독교화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브와디스와프 2세는 당초 약속했던 리투아니아의 폴란드 합병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비타우타스가 사실상의 주권자로서 리투아니아를 통치하는 것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1430년 비타우타스가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 2세는 리투아니아 대공위를 직접 주장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내전 끝에 비타우타스의 동생 지기만타스 케스투타이티스가 리투아니아의 대공이 되었다.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폴란드 내부에서는 귀족 계층의 정치적 힘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말년에 브와디스와프 2세는 도시민(공민)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귀족 세력을 견제하는 데 실패했다. 이는 장기적으로 폴란드 정치 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1434년 6월 1일, 브와디스와프 2세는 그루데크(현재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사망했다. 그의 왕위는 아들 브와디스와프 3세가 계승했으며, 이후 둘째 아들 카지미에시 4세가 왕위를 이었다.

4. 후계와 사망

바벨 대성당에 있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석관


첫 부인 야드비가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그녀의 유언에 따라 슈타이어 출신 귀족 여성인 안나와 결혼했다. 안나는 1416년에 사망했으며, 딸 하나를 남겼다.

  • 헤드비지 (1408–1431)


1417년 브와디스와프 2세는 필리차의 엘리자베스와 세 번째 결혼을 했으나, 그녀는 자녀를 낳지 못하고 1420년에 사망했다. 2년 후인 1422년, 그는 할샤니의 소피아와 네 번째 결혼을 하여 두 아들을 얻었다.

  • 브와디스와프 (1424–1444)
  • 카지미에시 (1427–1492)


1431년, 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혈통을 이은 상속자였던 딸 헤드비지가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 2세는 소피아 왕비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폴란드 왕위는 선출제였기 때문에, 그는 아들들의 왕위 계승에 대한 폴란드 귀족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상당한 양보를 해야만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폴란드에서 귀족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위 선출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미 1427년부터 폴란드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의 아들들이 피아스트 왕조와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다는 점을 들어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19]

리투아니아의 계승 문제 역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1430년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가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 2세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동생인 슈비트리가일라를 새로운 대공으로 지지했지만, 슈비트리가일라는 튜턴 기사단 및 일부 루스계 귀족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폴란드의 종주권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폴란드는 크라쿠프 주교 즈비그니에프 올레슈니키의 주도하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과거 비타우타스에게 양도했던 포돌리아와 볼히니아 지역을 점령했다. 1432년, 리투아니아 내 친폴란드 성향의 귀족들은 비타우타스의 동생인 지기만타스 켕스투타이티스를 대공으로 추대했고, 이로 인해 리투아니아는 대공 자리를 둘러싼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이 분쟁은 브와디스와프 2세가 사망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통치 48년째 되던 해인 1434년, 프셰미실 지역을 순시하던 중 감기에 걸렸고,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그는 결국 1434년 6월 1일 그로데크에서 사망했다. 그는 폴란드 왕위를 장남 브와디스와프 3세에게, 리투아니아 대공위는 차남 카지미에시 4세에게 물려주었으나, 두 아들 모두 당시에는 미성년자였다. 브와디스와프 2세의 죽음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의 개인적인 동군연합 관계를 공식적으로 종료시켰고, 두 국가의 향후 관계는 불확실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5. 유산

브와디스와프 2세는 현대화된 100 폴란드 즐로티 지폐 앞면에 묘사되어 있다.[20] 비아워비에자 숲에 있는 고대 나무인 야기에우오 오크는 그가 이 지역에서 왕실 사냥 전통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리기 위해 이름이 붙여졌다.[21] 2021년에는 소행성 2004 TP17이 공식적으로 요가일라(그의 이름의 리투아니아어 변형)로 명명되었다.[22][23]

1411년 2월 1일 제1차 토룬 평화 조약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독일 기사단 간에 평화가 맺어졌지만, 협상 과정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자국에 유리한 조건을 충분히 관철하지 못하여 폴란드 귀족들의 불만을 샀다. 이 조약으로 폴란드는 도브지 지방을, 리투아니아는 제마이티야를, 마조비아는 우크라 강 (Wkra (dopływ Narwi)pl) 건너편의 작은 지역을 각각 획득했다. 그러나 양도된 도시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일 기사단 영토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브와디스와프 2세는 상대적으로 낮은 몸값을 받고 많은 독일 기사단 간부와 기사를 석방했다. 이 몸값 마련은 독일 기사단의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다.[41] 폴란드 귀족에게 불만을 남긴 이러한 전후 처리 방식은 1411년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에 대한 반대 세력의 성장을 촉진했다. 또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서 귀속 문제가 있던 포돌리아를 비타우타스에게 양도하고, 브와디스와프 2세가 2년 동안 폴란드를 비우고 리투아니아에 머문 것도 귀족들의 불만을 키웠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411년 가을, 반대파의 수장이었던 미코와이 트롬바 (Mikołaj Trąba영어)를 그니에즈노 대주교로 승진시켰다. 대신 비타우타스의 지지자였던 보이체흐 야스트제비에츠를 크라쿠프에 배치하여 리투아니아와의 관계 강화를 도모했다. 1413년 10월 2일에는 호로드워 연합이 조인되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위가 "영원하고 불가역적으로 우리 폴란드 왕국과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선포했다. 이를 통해 리투아니아의 가톨릭 귀족에게 폴란드 귀족과 동등한 특권이 부여되었다. 이 칙령에는 폴란드 귀족이 리투아니아 귀족의 동의 없이 폴란드 국왕을 선출하거나, 리투아니아 귀족이 폴란드 귀족의 동의 없이 리투아니아 대공을 선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도 포함되었다.

참조

[1] 문서 Other names include ({{langx|lt|Jogaila Algirdaitis}}; {{langx|be|Ягайла|Jahajła}}) (See also [[Names and titles of Władysław II Jagiełło]])
[2] 간행물 Ladislaus II Jagiełło (1386–1434) 2022-02-15
[3] 문서 "[[Anna Jagiellon]], the last member of royal Jagiellon family, died in 1596."
[4] 문서 "{{Harvnb|Tęgowski|1999|pp=124–125}}"
[5] 문서 "{{Harvnb|Potašenko|2008|p=30}}"
[6] 문서 Some historians have called this system a diarchy ({{Harvnb|Sruogienė-Sruoga|1987}}; {{Harvnb|Deveike|1950}}). However, Rowell suggests that the nature of this dual rule "...reflects political expediency; it certainly does not meet the formal definition of diarchy as 'rule by two independent authorities'...those two leaders were not equal: the grand duke in Vilnius was supreme" ({{Harvnb|Rowell|1994|p=68}}).
[7] 웹사이트 Ar perrašinėjamos istorijos pasakų įkvėpta Baltarusija gali kėsintis į Rytų Lietuvą? https://www.15min.lt[...] 2014-10-01
[8] 웹사이트 Jogailaičiai. Kodėl ne Gediminaičiai? https://www.15min.lt[...] 2018-11-09
[9] 서적 Žemaičių krikštas: tyrimai ir refleksija https://www.lkma.lt/[...] Lithuanian Catholic Academy of Science 2021-07-17
[10] 웹사이트 Kodėl Jogaila buvo geras, o Vytautas Didysis - genialus https://www.delfi.lt[...] 2021-05-19
[11] 문서 The historian [[John Meyendorff]] suggests Jogaila may have already been an Orthodox Christian: "In 1377, Olgerd of Lithuania died, leaving the Grand Principality to his son Jagiello, an Orthodox Christian..." ({{harvnb|Meyendorff|1989|p=205}}). Dmitri, however, made it a condition of the marriage that Jogaila "should be baptized in the Orthodox faith and that he should proclaim his Christianity to all men" ({{harvnb|Dvornik|1992|p=221}}).
[12] 문서 Jadwiga had actually been crowned [[king of Poland]] ({{lang|la|rex poloni}}), because the Polish political system made no provision for a [[queen regnant]] ({{harvnb|Stone|2001|p=8}}).
[13] 문서 It "reflects the exceptional far-sightedness of the political elites ruling both countries" ({{Harvnb|Kłoczowski|2000|p=55}}). It was "a desperate gamble by Jogaila to avert a seemingly inevitable subjugation" ({{Harvnb|Lukowski|Zawadzki|2001|p=38}})
[14] 문서 A Slavic name that roughly translates as ''glorious rule'', Władysław is often [[Latinization (literature)|Latinised]] into either Wladislaus or Ladislaus. The choice evoked both [[Władysław I the Elbow-high|Władysław I of Poland, the Elbow-high]], who was Queen Jadwiga's great-grandfather and unified the kingdom in 1320, and Saint [[Ladislaus I of Hungary]], a king who sided with the pope against the emperor [[Henry IV, Holy Roman Emperor|Henry IV]] and Christianised [[Transylvania]] ({{harvnb|Rowell|2000|pp=709–712}}).
[15] 웹사이트 Jogaila https://www.vle.lt/s[...] 2021-05-19
[16] 문서 "{{Harvnb|Kłoczowski|2000|pp=54–57}}"
[17] 문서 "{{harvnb|Karwasińska|Zakrzewski|1892|p=21}}"
[18] 문서 "{{harvnb|Kłoczowski|2000|p=73}}"
[19] 웹사이트 Jagiellonians Timeline https://www.jagiello[...] University of Oxford 2021-04-20
[20] 웹사이트 Narodowy Bank Polski - Internet Information Service https://www.nbp.pl/h[...] 2022-07-11
[21] 웹사이트 Dead Wood https://emergencemag[...] 2021-10-23
[22] 웹사이트 Jogailos planeta skrieja Saulės sistemoje – Lenkijos siūlymas oficialiai patvirtintas https://www.lrt.lt/n[...] 2021-07-09
[23] 웹사이트 Five minor planets given Polish names https://polandin.com[...] 2021-07-11
[24] 문서 彼は以下の複数の名で知られている: {{lang-lt|Jogaila Algirdaitis}}; {{lang-pl|Władysław II Jagiełło}}; {{lang-be|Jahajła (Ягайла)}}。[[:en: Names and titles of Władysław II Jagiełło]]を参照のこと
[25] 문서 "[[1596年]]に没した[[アンナ (ポーランド女王) |アンナ・ヤギェロンカ]]がヤギェウォ家最後の男系の人物である。"
[26] 문서 Anna Boczkowska, Sarkofag Władysława II Jagiełły i Donatello, Gdańsk 2011, p.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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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문서 何人かの歴史家はこのシステムを二頭政治と呼んでいる ({{Harvnb|Sruogienė-Sruoga|1987}}; {{Harvnb|Deveike|1950}})。しかしながら、スティーブン・クリストファー・ローウェルは、この二重支配の実態を、"...政治上の便宜を反映しており、それは '2つの独立した権威による支配'としての二頭政治の公式な定義には正確には一致しない...ヴィリニュスの大公が最も権威が高かったことから、こららの2つの指導者は対等ではなかったと主張している" ({{Harvnb|Rowell|1994|p=68}}).
[29] 문서 歴史家の[[ジョン・メイエンドルフ]]は、「1377年にオルゲリドは大公国に正教徒である息子のヤゲローを残して死んだ……」と、ヨガイラが既に正教徒だったと主張している ({{harvnb|Meyendorff|1989|p=205}})。しかしながらドミトリイはヨガイラに結婚の条件として「正教徒の信仰の洗礼を受け入れ、自身がキリスト教徒であることを全てのものに表明するように求めた」({{harvnb|Dvornik|1992|p=221}})。
[30] 문서 ポーランドの政治体系には女王を[[摂政]]と扱う条項がなく、ヤドヴィガは事実上のポーランド国王(''rex poloni'')として戴冠していた{{harvnb|Stone|2001|p=8}})。
[31] 문서 山内『北の十字軍 「ヨーロッパ」の北方拡大』、212頁
[32] 문서 ルコフスキ、ザヴァツキ『ポーランドの歴史』、54頁
[33] 문서 概して ''光栄ある支配者''として訳されるスラヴ的な名前のヴワディスワフの[[:en: Latinisation of names|ラテン語での表記]]は普通、ウラディスラウスないしラディスラウスである。この洗礼名は、ヤドヴィガの曽祖父で[[1320年]]に王国を再統一した[[ヴワディスワフ1世 (ポーランド王)|ポーランド国王ヴワディスワフ1世短身王]]と、[[ハインリヒ4世 (神聖ローマ皇帝)|神聖ローマ皇帝ハインリヒ4世]]と対立していたローマ教皇に与して[[トランシルバニア]]をキリスト教化した[[ラースロー1世 (ハンガリー王)|ハンガリー国王聖ラースロー1世]] ({{harvnb|Rowell|2000|pp=709–712}})に由来する。
[34] 문서 ルコフスキ、ザヴァツキ『ポーランドの歴史』、54-55頁
[35] 문서 "{{Harvnb|Kłoczowski|2000|pp=54–57}}"
[36] 서적 北の十字軍 「ヨーロッパ」の北方拡大
[37] 서적 北の十字軍 「ヨーロッパ」の北方拡大
[38] 웹사이트 Śląsk w polityce Piastów (Silesia within the policies of the Piasts) http://www.piastowie[...] 2006-08-09
[39] 서적
[40] 서적 北の十字軍 「ヨーロッパ」の北方拡大
[41] 서적 北の十字軍 「ヨーロッパ」の北方拡大
[4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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