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카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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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카라 전투는 1402년 7월 28일 앙카라 근처에서 일어난 티무르 제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전투이다. 중앙아시아의 강자 티무르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 간의 갈등으로 시작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은 전투에서 패배하고 바예지드 1세는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혀 일시적으로 제국을 해체시켰고, 오스만 제국의 내전을 촉발하여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오스만 제국의 발칸 지역 점령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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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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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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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402년 7월 28일 (또는 7월 20일) |
장소 | 앙카라 근교 추부크 평원 |
좌표 | 40 |
결과 | 티무르 제국의 승리 |
추가 결과 | 오스만 제국 공위 시대 시작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티무르 제국 |
교전국 2 | 아크 코윤루 |
교전국 3 | 게르미얀 공국 |
교전국 4 | 오스만 제국 |
교전국 5 | 카스트리오티 공국 |
교전국 6 | 모라바 공국 |
교전국 7 | 브란코비치 공국 |
교전국 8 | 아나톨리아 공국 및 흑타타르 |
지휘관 및 지도자 | |
티무르 제국 측 지휘관 | 티무르 |
티무르 제국 측 지휘관 2 | 샤 루흐 |
티무르 제국 측 지휘관 3 | 할릴 술탄 |
티무르 제국 측 지휘관 4 | 미란 샤 |
티무르 제국 측 지휘관 5 | 술탄 후세인 타이치우드 |
티무르 제국 측 지휘관 6 | 무함마드 술탄 미르자 |
티무르 제국 측 지휘관 7 | 피르 무함마드 |
티무르 제국 측 지휘관 8 | 샤-이-샤한 |
티무르 제국 측 지휘관 9 | 카라 율루크 오스만 |
티무르 제국 측 지휘관 10 | 야쿱 2세 |
오스만 제국 측 지휘관 | 바예지드 1세 |
오스만 제국 측 지휘관 2 | 쉴레이만 첼레비 |
오스만 제국 측 지휘관 3 | 메흐메트 첼레비 |
오스만 제국 측 지휘관 4 | 이사 첼레비 |
오스만 제국 측 지휘관 5 | 무사 첼레비 |
오스만 제국 측 지휘관 6 | 무스타파 첼레비 |
오스만 제국 측 지휘관 7 | 스테판 라자레비치 |
오스만 제국 측 지휘관 8 | 부크 라자레비치 |
오스만 제국 측 지휘관 9 | 주라지 브란코비치 |
오스만 제국 측 지휘관 10 | 존 카스트리오티 |
오스만 제국 측 지휘관 11 | 코야 자하리아 |
오스만 제국 측 지휘관 12 | 드미터 조니마 |
병력 규모 | |
티무르 제국 측 병력 | 140,000명 |
오스만 제국 측 병력 | 85,000명 - 120,000명 |
사상자 | |
티무르 제국 측 사상자 | 불명 |
오스만 제국 측 사상자 | 불명 |
2. 배경
칭기즈 칸 시대 이후 중앙아시아 최강의 지도자로 부상한 티무르는 트란스옥시아나 출신의 투르크-몽골계 세력을 이끌었다. 투르키스탄의 튀르크 귀족 가문 출신인 티무르는 몽골 제국 부흥을 꿈꾸며 1380년대와 1390년대에 걸쳐 페르시아(아제르바이잔과 상 메소포타미아 포함) 일부를 정복하고, 1395년부터 1396년 사이에는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으며, 1398년에는 델리를 약탈하는 등 광범위한 정복 활동을 벌였다.[9]
한편,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는 티무르에게 충성을 맹세한 투르크계 제후들에게 공물을 요구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바예지드 1세는 공물을 거절하면 침략하겠다는 협박을 가했고, 티무르는 이를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1400년, 티무르는 오스만 제국의 도시 시바스를 약탈하며 양국 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티무르가 아나톨리아 동쪽을 공격하자 바예지드는 크게 분노하여 군대를 소집, 앙카라 근처에서 티무르 군대와 대치하게 된다. 이들의 대립은 수년간 주고받은 모욕적인 편지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1393년 8월, 바그다드를 점령한 티무르는 맘루크 왕조에 우호 사절을 보냈으나, 술탄 바르쿠크는 이를 거절하고 사절을 가두었다.[9] 바르쿠크는 주변 국가들을 규합해 반(反) 티무르 연합을 결성했고, 티무르는 시리아 원정을 일시 중지해야 했다.[9] 이 연합에는 조치 울루스의 토흐타미슈, Eretnid dynasty|엘레트나 후국|영어의 부르하네딘(en) 외에 바예지드도 포함되어 있었다.[9]
2. 1. 티무르 제국의 등장과 서진
트란스옥시아나 출신의 투르크-몽골계 지도자 티무르는 칭기즈 칸 시대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다.[9] 티무르는 투르키스탄의 튀르크 귀족 가문 출신으로, 1380년대부터 1390년대에 걸쳐 페르시아(아제르바이잔과 상 메소포타미아 포함) 일부를 정복하고, 1395년부터 1396년 사이에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으며, 1398년에 델리를 약탈하는 등, 긴 시간의 가혹한 싸움을 통해 몽골 제국을 부흥시키고자 하였다.[9]티무르는 1390년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를 점령하여 오스만 제국의 국경까지 자신의 제국을 확장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강대국은 직접적인 충돌을 겪게 되었다. 바예지드 1세는 티무르에게 충성을 맹세한 투르크계 제후들에게 공물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면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티무르는 바예지드를 모욕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이러한 행동을 저지하고 1400년 오스만 제국의 도시인 시바스를 약탈했다.
1393년 8월에 바그다드를 점령한 티무르는 이집트를 지배하는 맘루크 왕조에 우호 사절을 보냈지만,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르쿠크는 티무르의 제안을 거절하고 사절을 구류했다.[9] 바르쿠크는 주변 국가들을 규합하여 반티무르 연합을 결성했고, 티무르는 이에 시리아 원정을 일시 중지했다.[9] 이 연합에는 조치 울루스의 토흐타미슈, Eretnid dynasty|에레트나|영어의 부르하네딘(en) 외에 바예지드도 포함되어 있었다.[9] 티무르는 오스만 제국을 반티무르 연합에서 떼어놓기 위해 1395년에 바예지드에게 상호 불가침 조약 체결을 제안했지만, 좋은 답변을 얻지 못했다.[9]
1400년에 바예지드는 Emirate of Erzincan|에르진잔 후국|영어의 군주인 Mutahharten|무타하르텐|영어(타하르텐)에게 공납을 강요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타하르텐은 티무르에게 신종했기 때문에 티무르에게 바예지드에게 받은 압력을 보고했고, 티무르와 바예지드 간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바예지드는 이란 북동부를 지배하는 흑양 왕조의 Qara Yusuf|카라 유수프|영어에게 에르진잔 후국 공격을 부추겼고, 티무르가 흑양 왕조의 영토를 점령한 후, 오스만군은 티무르가 점령한 지역에 공격을 가했다. 티무르는 바예지드에게 포로의 반환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 상대의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무력 행사를 시사했지만, 바예지드는 도발적인 답변을 보내 양자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2. 2. 오스만 제국의 팽창과 티무르와의 갈등
트란스옥시아나 출신의 투르크-몽골계 지도자인 티무르는 칭기즈 칸의 시대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다.[9] 티무르는 투르키스탄의 튀르크 귀족 가문 출신으로, 몽골 제국을 부흥시키고자 하였다.[9] 1390년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를 점령하여 오스만 투르크의 국경까지 자신의 제국을 확장하였다.바예지드 1세는 티무르에게 충성을 맹세한 투르크계 제후들에게 공물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면 침략하겠다는 협박을 했다. 티무르는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1400년 오스만 투르크의 도시인 시바스를 약탈했다. 티무르가 동쪽에서 아나톨리아를 공격했을 때 바예지드는 격노하여 군대를 소집했고, 앙카라 근처에서 티무르의 군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이 전투는 티무르와 바예지드가 수년간 주고받은 모욕적인 편지의 절정이었다.
1380년대와 1390년대에 티무르는 페르시아(아제르바이잔과 상 메소포타미아 포함) 일부를 침략, 정복했으며, 남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유린(1395~96년)하고 델리를 약탈(1398년)했다.[9] 오스만 제국과 몽골 사이에는 긴장이 있었지만, 바예지드가 티무르에게 충성하는 에미르에게 조공을 요구하면서 전쟁의 명분이 생겼다. 티무르는 이를 개인적인 모욕이자 전쟁의 이유로 받아들였다.[9] 1400년~1401년에 티무르는 시바스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맘루크 왕조로부터 시리아 일부를 빼앗았고, 아나톨리아로 향했다.[9]
1402년 오스만 제국은 유럽에서 원정을 벌이고 있었다. 바예지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전 (1394–1402)을 중단하고, 1402년 여름에 티무르가 다시 군대를 남동쪽으로 이동하자 앙카라로 진군했다.[9]
1393년 8월에 바그다드를 점령한 티무르는 이집트를 지배하는 맘루크 왕조에 우호의 사절을 보냈지만,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르쿠크는 티무르의 제안을 거절하고 사절을 구류했다.[9] 티무르는 시리아 원정을 계획했지만, 바르쿠크는 주변 국가들을 규합하여 반티무르 연합을 결성했기 때문에 원정을 중지했다.[9] 바르쿠크에 동조한 세력 중에는 조치 울루스의 토흐타미슈, Eretnid dynasty|엘레트나 후국영어의 부르하네딘(en) 외에 바예지드도 포함되어 있었다.[9]
3. 전투의 전개
1402년 7월 28일, 앙카라 전투는 오스만 군의 대규모 공격과 이에 맞선 티무르 군 궁기병대의 화살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다.[4] 전투 도중, 양 군의 주요 수원이었던 쿠북 강은 티무르에 의해 물길이 추부크 마을 근처 수원지로 변경되어 오스만 군은 물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바예지드 1세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군대를 물리고 한여름 더위 속에서 행군해야 했다. 오스만 군은 피로하고 목이 말랐지만, 휴식할 시간은 없었다. 바예지드는 장군들의 방어적 위치 선정 조언을 거부하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여 동쪽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티무르 군은 비밀리에 남서쪽으로 행군하여 오스만 군의 뒤편에 위치했고, 오스만 군이 이전에 점령했던 위치에 야영하며 버려진 텐트와 수원지를 이용했다.[1]
바예지드는 티무르가 시바스에서 앙카라로 향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고지대에서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8] 그러나 티무르 군이 토카트로 향한다는 보고를 받고 앙카라에 수비대만 남겨두고 삼림에 보병을 배치했다.[8] 티무르는 오스만 군이 숨은 삼림 지대를 피해 남동쪽으로 앙카라로 향하는 진로를 선택하고, 카이세리에서 군량을 보급하고 키르셰히르로 이동했다.[9] 티무르 군이 후방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알게 된 바예지드는 키르셰히르로 진로를 변경했지만, 티무르 군은 이미 앙카라 근처에 도착하여 포위망을 쳤다.[9] 티무르 군은 앙카라 성벽을 파괴하고 수원인 강을 점령했으며, 우물에 독을 풀었다.[9] 바예지드는 앙카라를 구원하기 위해 주력 부대를 이끌고 평원에서 티무르 군과 대치했지만, 오스만 군은 강행군과 식수 부족으로 전투 능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9]
최후의 전투는 쿠북 계곡의 주 지역인 카탈 언덕에서 벌어졌다. 목마르고 지친 오스만 군은 패배했고, 바예지드는 소수의 기병과 함께 근처 산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티무르에게 포위되어 체포되었다. 오스만 군은 수적으로 불리했을 뿐만 아니라, 티무르 군에 가담한 타타르 군과 아나톨리아 출신 사파위들의 이탈로 인해 더욱 약화되었다.
전투 다음 날, 앙카라는 티무르에게 항복했고, 시민들은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카스티야 왕국의 사절은 티무르를 알현하고 축사를 전했으며, 티무르는 전 유럽에 바예지드에 대한 승전을 알리기 위해 서신과 선물을 보냈다.
술레이만은 부르사로 도망쳤고, 티무르는 무함마드 술탄에게 추격을 명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부르사에는 2000마리의 낙타에 실을 정도의 재화가 남아 있었다. 술레이만을 포함한 오스만 군 패잔병들은 제노바인과 베네치아인에게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유럽으로 탈출했고, 술레이만은 비잔틴 제국에 동맹을 조건으로 보호를 요청했다. 메흐메트와 그의 형제 이사도 도주에 성공했다.
3. 1. 양측 군대의 구성
양측 군대의 규모는 서로 비슷했다. 티무르의 군대는 대부분 기병이었고, 32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포함하여 약 14만 명으로 추산된다.[1] 반면 바예지드 1세의 군대는 8만 5천 명이었다.[1] 역사적 자료는 병력 수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아흐마드 이븐 아랍샤는 티무르 군대를 80만 명으로, 독일인 목격자는 160만 명으로 주장하기도 했다.오스만 군대는 바예지드 1세의 아들들, 가지, 예니체리, 아나톨리아 무슬림 봉신,[2] 그리고 다양한 유럽(발칸 기독교도[2]) 봉신들로 구성되었다.[3] 세르비아 봉신으로는 스테판 라자레비치, 부크 라자레비치, 조르지 브란코비치와 그의 형제 그르구르 브란코비치가 있었고,[3] 알바니아 봉신으로는 코야 자카리야, 데메트리우스 조니마, 존 카스트리오티, 타누시 두카지니가 있었다.[4] 제타 공국의 콘스탄틴 발시치는 참여하지 않았다.[4] 오스만 군대의 4분의 1은 최근 정복한 타타르족이었다.[1]
티무르 군은 10만 명이 넘는 기병과 30만 명의 보병, 전투 지원을 담당하는 공병, 기술자로 구성되었으며,[5] 32마리의 전투 코끼리도 배치되어 있었다.[1] 바예지드의 군대는 약 8만 명의 기병과 약 20만 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었으며, 휘하의 예니체리 군단이 병력의 중심이 되었다.[5]
3. 2. 전투 과정
전투는 오스만 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시작되었으며, 티무르 군의 기마 궁수들이 쏜 화살 세례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이 사망하거나 티무르에게 항복했다.[4] 스테판 라자레비치와 그의 기사들은 티무르 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몽골군을 세 번이나 돌파했다. 스테판은 바예지드 1세에게 함께 돌파할 것을 권했지만, 바예지드는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세르비아군은 바예지드의 아들 중 한 명과 보물을 몽골군으로부터 구출하여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세르비아 군대는 티무르의 화살에 매우 효과적인 검은색 중장갑을 착용했고, 티무르는 "사자처럼 싸운다"며 그들을 칭찬했다.[4]전투 중 티무르는 양 군대의 주요 수원인 Çubuk 개울의 물길을 Çubuk 마을 인근의 저수지로 돌려 오스만 군을 물 부족 상태로 만들었다. 마지막 전투는 Çubuk 계곡을 내려다보는 카탈 언덕에서 벌어졌다. 목마르고 지친 오스만 군은 패배했지만, 바예지드는 수백 명의 기병과 함께 인근 산으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티무르는 산을 포위했고, 바예지드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으로 그를 곧 사로잡았다. 바예지드는 3개월 후 포로 상태에서 사망했다.[4]
이미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오스만 제국군은 흑 타타르족과 시파히들이 바예지드를 버리고 티무르 군대에 합류하면서 더욱 약화되었다.[4]
바예지드는 티무르가 시바스에서 앙카라로 향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고지대에서 티무르 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8] 그러나 정찰병으로부터 티무르 군이 토카트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앙카라에 수비대만 남겨두고 삼림에 보병을 배치하여 티무르 군의 기병에 대비했다.[8] 티무르는 오스만 군이 숨어있는 삼림 지대를 피해 남동쪽으로 앙카라로 향하는 진로를 선택하고, 토카트로 진격하지 않고 카이세리로 돌아와 이 마을에서 군량을 보급하고 키르셰히르로 이동했다.[9] 바예지드는 티무르 군이 자군의 후방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알고 키르셰히르로 진로를 잡았지만, 티무르 군은 이미 키르셰히르를 떠나 앙카라 근처에 도착하여 포위망을 쳤다.[9] 티무르 군은 앙카라의 성벽을 파괴하고, 또한 마을의 수원인 강을 점령하고, 강 건너편의 우물에 독을 풀었다.[9] 바예지드는 티무르 군의 공격을 받고 있는 앙카라를 구원하러 가서 평원에서 자신이 이끄는 주력 부대와 앙카라의 수비대로 티무르 군을 협격하는 작전을 세웠다.[9] 그러나 티무르 군과 대치한 오스만 군은 강행군으로 인해 피폐해졌고, 식수도 부족했기 때문에 전투 능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9]
티무르 군은 6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중앙에 티무르 자신이 지휘하는 2개 군단, 좌우 양익의 군단, 전위에 주력 2개 군단을 배치했다. 티무르의 아들 미란샤와 샤 루흐가 우익과 좌익을 지휘하고, 손자들이 전위를 지휘했다.[5]
오스만 군은 예니체리를 이끈 바예지드가 중앙을 지휘하고, 정예 부대를 이끈 왕자 쉴레이만이 좌익, 유럽 병사를 이끈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우익, 왕자 메흐메트 1세가 후위를 지휘했다.[5] 바예지드의 군단과 양익은 동일선상에 늘어서고, 중앙의 본군 후방에 용병 기마 부대와 후위가 이어지며, 양익 뒤에 2개 군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아침에 티무르 군의 공격 신호인 나팔 소리가 울리자 티무르 군의 선봉대가 오스만 군의 좌익을 밀어냈고,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기병대가 샤 루흐가 이끄는 좌익을 격퇴했다. 양군 병사들이 뒤섞여 싸우는 가운데, 티무르는 궁정에 망명해 있던 베이리크의 군주들이 이끄는 기병대를 출격시켰고, 옛 주인의 모습을 본 오스만 군 병사들은 티무르 군으로 전향하여 오스만 군의 좌익을 공격했다. 오스만 군의 왕자 메흐메트가 티무르 군의 우익을 막아섰고, 바예지드는 이탈한 병사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예비 병력을 투입했다. 정오에 티무르는 손자 무함마드 술탄이 이끄는 정예 부대에 중앙의 적군 공격을 명령했고, 오스만 군은 열세에 놓였다. 오스만 군의 왕자와 장교들은 전장에서 퇴각했고, 오스만 군 병사들도 도망쳤지만, 예니체리는 바예지드를 지키며 분전했고, 세르비아 병사들은 티무르가 감탄할 정도의 싸움을 보였다. 열세에 놓인 바예지드는 살아남은 소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언덕으로 도망쳐 저녁까지 항전했다. 마지막 호위병인 예니체리가 전사한 후, 바예지드는 말을 타고 도주하려 했으나 왕자와 함께 술탄 마흐무드에게 붙잡혔다.
바예지드가 티무르의 진영으로 끌려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져 있었고, 티무르는 체스 대국을 중단하고 바예지드에게 정중한 말을 건네며 그와 왕자의 안전을 보장했다. 전투 다음 날, 앙카라는 티무르에게 항복했고, 시민들에게 몸값을 지불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앙카라 성 안에 있던 카스티야 왕국의 사절은 티무르를 알현하고 주군의 이름으로 축사를 보냈으며, 티무르는 전 유럽에 바예지드에 대한 승전을 알리기 위해 그들에게 서신과 선물을 들려 보냈다.
술레이만은 부르사로 도망쳤고, 티무르는 무함마드 술탄에게 술레이만의 추격을 명했지만, 술레이만을 붙잡지 못했다. 하지만 부르사에는 2000마리의 낙타에 실을 정도의 재화가 남아 있었고, 그 중에는 우스만 사본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술레이만을 포함한 오스만 군의 패잔병들은 제노바인, 베네치아인에게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유럽으로 탈출했고, 술레이만은 비잔틴 제국에 동맹과 교환하여 보호를 요청했다. 메흐메트와 그의 형제 이사도 도주에 성공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티무르의 침략에 고무되었다. 제노바인들은 티무르의 지원을 받아 갈라타 성벽에 몽골의 군기를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몇 달 후 티무르가 아나톨리아에서 오스만 세력을 괴멸시키는 것을 보고, 다음 목표는 자신들이라는 공포에 휩싸였다. 앙카라 전투는 오스만 투르크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발칸반도의 정치 상황에 일시적인 영향을 끼쳤다.
전투 후 티무르는 서부 아나톨리아를 지나 에게 해 연안으로 이동하여 기독교 병원 기사단의 거점인 스미르나 시를 포위하고 점령했다.[1]
4. 1. 오스만 제국의 내분
티무르의 침략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은 연기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새로운 위협에 맞서기 위해 발칸 반도에서 물러났다. 이 사건은 바예지드 1세가 포로로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들은 살아남아 오스만 제국을 내분으로 이끌었다. 바예지드 1세의 네 아들 간의 내전으로 대부분의 오스만 군대는 유럽으로 도망쳤다. 오스만 제국의 일시적인 약화는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과 발칸 반도 점령을 늦추었다.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에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왔으며, 제국을 거의 붕괴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이로 인해 바예지드의 아들들 사이의 내전이 발생했다. 오스만 내전은 앙카라 전투 이후 11년(1413년) 더 지속되었다.
이 전투는 술탄이 직접 포로로 잡힌 유일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오스만 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앙카라 전투는 오스만 제국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혀, 제국은 일시적으로 해체되었다. 패전으로 인해 아시아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 영역은 무라드 1세 시기와 비슷하게 축소되었다.[8] 과거 바예지드 1세에게 병합된 아나톨리아의 베이릭은 부활했고, 바예지드 1세의 왕자들은 제국의 계승권을 두고 다투었다.[8] 1413년에 오스만 제국의 내전은 종결되었고, 후계자 다툼에서 승리한 메흐메트 1세가 제위에 올랐다.
4. 2. 동로마 제국의 생존 연장
티무르의 침략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은 연기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새로운 위협에 저항하기 위해 발칸반도에서 퇴각했다. 이 사건은 바예지드 1세가 생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들이 자유롭게 살아있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을 내분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바예지드 1세의 네 아들 간의 내전 결과, 대부분의 오스만 제국군은 유럽으로 달아났다. 오스만 제국의 일시적인 약화는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과 오스만 제국의 최종적인 발칸 점령을 일시적으로 지연시켰다.[1]4. 3. 티무르 제국의 한계
앙카라 전투 이후, 티무르는 서부 아나톨리아를 거쳐 에게 해 연안으로 이동하여 스미르나를 포위하고 점령했다. 스미르나는 기독교 병원 기사단의 거점이었다.[1] 그러나 티무르는 유럽으로 진군하지 않고 사마르칸트로 돌아갔다.포로가 된 바예지드 1세는 덩굴로 엮은 격자가 박힌 가마에 태워져 낙타 등에 실려 호송되었다.[2] 티무르는 바예지드를 존경하면서도 경계했지만, 여러 저술가들은 이를 오해하여 "바예지드는 철제 우리에 갇혀 굴욕적인 취급을 받았다"거나 "티무르는 바예지드를 발판으로 삼았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3] 티무르는 바예지드를 몸값과 복종을 조건으로 석방하려 했으나, 1403년 3월 9일 바예지드는 병사했다.[4] 바예지드가 사망할 당시 티무르 군에서는 석방 조건 협상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바예지드가 독을 마시고 자결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5]
앙카라 전투는 오스만 제국에 큰 타격을 주어, 제국은 일시적으로 해체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아시아 지배 영역은 무라트 1세 시대 수준으로 축소되었고,[6] 바예지드에게 병합되었던 아나톨리아의 베이릭(소국)들이 부활했다. 바예지드의 아들들은 제국의 계승권을 두고 다투었다.[7] 1413년 오스만 제국의 내전은 종식되었고, 메흐메트 1세가 제위에 올랐다.
참조
[1]
서적
Encyclopedia of the Peoples of Africa and the Middle East
https://books.google[...]
Infobase Publishing
2021-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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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ürkiye tarihi
AKDTYKTTK Yayınlar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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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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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DTYKTTK Yayınlar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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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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ティムール
山川出版社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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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ティームール朝成立史の研究
北海道大学図書刊行会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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