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미사키촌 (에히메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미사키촌은 일본 에히메현의 옛 행정 구역으로, 현재는 이카타정에 속한다. 사다미사키 반도 끝에 위치하여 규슈 사이가세키와 마주보고 있으며, 이요灘과 우와해에 접한다. 1889년 8개 촌이 합병하여 미사키촌이 되었으며, 1955년 가미마쓰나 촌과 합병하여 미사키정이 되었다. 주요 산업은 어업과 농업으로, 특히 해녀 어업이 발달했으며 하귤 재배가 이루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카타정 - 사다미사키반도
    일본 중앙구조선 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사다미사키반도는 남서쪽으로 뻗어 호요 해협에 닿아 있으며, 세토 내해와 우와해에 접한 리아스식 해안과 풍력 발전 단지, 해안 경관을 바탕으로 관광 산업이 발전했다.
  • 이카타정 - 이카타촌
    이카타촌은 1889년부터 1955년까지 에히메현 니시우와군 사다곶 반도 중앙에 위치했던 촌으로, 멸치 어업과 양잠이 주요 산업이었으나 후에 온주밀감 재배가 활발해졌고, 1955년 마치미 촌과 합병하여 이카타정이 되었다.
  • 니시우와군 - 미카메정
    미카메정은 에히메현 서부에 위치한 정으로, 미카메만 양식업이 발달했으며 "세 개의 병" 전설에서 유래한 지명을 가졌으나, 2004년 세이요시에 편입되어 소멸되었다.
  • 니시우와군 - 이카타정
    이카타정은 에히메현 서부 사다미사키 반도에 위치하며, 온화한 기후와 해안 경관을 자랑하고, 원자력 및 풍력 발전이 활발하며, 감귤류 재배와 어업이 주요 산업이지만, 인구 감소와 고령화 문제를 겪고 있는 지역이다.
  • 에히메현의 폐지된 시정촌 - 다노스지촌
    다노스지 촌은 1889년 4개 촌이 합병하여 성립된 일본 에히메현의 촌으로, 우와 분지 동부에 위치하며 쌀을 주요 농산물로 생산했고, 1955년 우와정에 편입되었으며 아카시 사찰이 있다.
  • 에히메현의 폐지된 시정촌 - 우와정
    우와정은 에히메현의 산간 분지에 위치했던 정으로, 에도 시대 우와지마 번의 영지로서 농업과 역참 마을로 번영했으나 2004년 사이요시에 편입되어 소멸되었으며, 쌀 생산과 독특한 풍습, 역사적 유적들이 있는 지역이었다.
미사키촌 (에히메현) - [옛 지명]에 관한 문서
개요
폐지일1955년 3월 31일
폐지 이유신설 합병
폐지 상세간마쓰나촌·미사키촌미사키정
현재의 자치체이카타정
요미가나미사키무라
자치체 명칭미사키촌
구분
도도부현에히메현
니시우와군
면적(정보 없음)
경계 미정(정보 없음)
인구(정보 없음)
인구 시점(정보 없음)
인접 자치체 (폐지 시점)간마쓰나촌
소재지니시우와군 미사키촌 오아자 미사키
특기 사항(정보 없음)

2. 지리

이카타정 최서단에 위치하며, 사다미사키 반도 끝자락에 자리한다. 규슈 사이가세키와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이요나다, 남쪽은 우와해와 접한다. 동쪽으로는 가미마쓰나 촌과 경계를 이룬다. 미사키 취락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은 험준한 해안 지형이다. 인근 해역은 좋은 어장으로, 어업이 발달하였다.

번정기부터 이 마을과 동쪽의 가미마쓰나 촌을 통틀어 "미사키우라"로 불렀다.

2. 1. 지형 및 해안

이카타정 최서단에 위치하며, 사다미사키 반도 끝자락에 자리한다. 규슈 사이가세키와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이요나다, 남쪽은 우와해와 접한다. 동쪽으로는 가미마쓰나 촌과 경계를 이룬다. 미사키 취락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은 험준한 해안 지형이다. 인근 해역은 좋은 어장으로, 어업이 발달하였다.

'''지명의 유래'''

  • 번정기부터 이 마을과 동쪽의 가미마쓰나 촌을 통틀어 "미사키우라"로 불렀다.

2. 2. 인접 지역

사다미사키 반도 끄트머리에 있으며, 규슈 사이가세키와 마주하고 있다. 북쪽은 이요灘에, 남쪽은 우와해에 접해 있다. 동쪽은 가미마쓰나 촌과 접해 있었다.

2. 3. 지명의 유래

사다미사키 반도 끄트머리에 있으며, 번정기부터 이 마을과 동쪽의 가미마쓰나 촌을 함께 "미사키우라"라고 통칭했다.

3. 역사

조몬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규슈 방면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미사키 촌은 우와지마번의 통치 아래 중계 항구로 번성했다. 1889년 정촌제 시행으로 8개 촌(미사키 혼우라, 사다, 오사다, 타카, 이노, 요보코리, 쿠시, 쇼노)이 합병되어 미사키 촌이 되었고, 1955년 카미마츠나 촌과의 합병을 통해 미사키정이 되었다.

3. 1. 고대 - 중세

크게 서쪽으로 돌출된 지형 때문에 옛날부터 표류를 포함해 규슈 방면으로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요나다 측 니타하마에서 조몬 시대로 보이는 오이타현 히메섬산 흑요석이 출토되어, 이 지역은 옛날부터 규슈 방면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군세가 요새를 쌓고 많은 해적이 살았다고도 한다.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배한 헤이케의 유민이 표류해 왔다는 전설이 쇼노 지구 등에 전해지고 있다.

전국 시대에는 우토노미야 후사쓰나의 영지 일부였다고 여겨진다. 규슈의 오토모 씨에 대비해, 겐키 연간에는 오사다에 야마자키 성이 축조되어 니노미야 신키치가 성주가 되었지만, 후에 사다의 마쓰모리 성으로 옮겨졌다. 신키치의 사망 후, 가신이 니노미야 씨를 계승하여 이 지역을 다스렸다.

3. 2. 번정기 (에도 시대)


  • 우와지마번 영지였다.
  • 우와지마 번의 다테 씨는 번 내를 10개 조로 나누어 통치했는데, 이 마을은 "호나이 조"에 속했으며, 그 안에서 이 마을 일대는 "미사키 우라"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우토노미야 씨의 지배 시대를 포함해 9대, 약 150년에 걸쳐 니노미야 씨가 촌장을, 그 후 간세이 연간부터 효도 씨가 맡았다.
  • 사다우라의 항구는 중계 항구로 번성했을 뿐만 아니라, 우와지마 번의 참근교대 해상 루트이기도 하여 사다에는 배 번소가 설치되었다.
  • 분세이 연간에 마쓰우라로부터 이주하여 요보코리우라가 개척되었다.
  • 1867년(게이오 3년) - 쿠시의 우에다 씨에 의해 쇼노의 개척이 시작되어, 메이지 시대에 하나의 취락을 형성했다.

3. 3. 메이지 시대 이후


  • 1874년 (메이지 7년) - 미사키 초등학교 개교.
  • 1880년 (메이지 13년) - 미사키 우체국 개국.
  • 1881년 (메이지 14년) - 한반도 방면으로의 출어 시작.
  • 1886년 (메이지 19년) - 마쓰우라의 우토노미야 세이슈에 의해 하귤이 이 지역에 도입되었다. 미사키 우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3. 4. 미사키 촌 성립 (1889년)

1889년 12월 15일, 메이지의 정촌제·시제 시행에 따라 8개 촌(우라)이 합병하여 '''미사키 촌'''이 되었다.

구 정촌명현재 지명
미사키 혼우라미사키정
사다
오사다
타카
이노
요보코리
쿠시
쇼노


3. 5. 다이쇼 - 쇼와 시대 (미사키정)


  • 1921년 (다이쇼 10년) 게이요 요새 사다곶 포대 조성이 시작되었다.
  • 1926년 쇼노야 계선장 (군함 계선장)이 완성되었다.
  • 1955년 (쇼와 30년) 3월 31일 - 카미마츠나 촌과 합병, 정제 시행에 의해 '''미사키정'''이 되었다.

4. 행정

행정 기관은 오아자 미사키(혼우라)에 위치해 있었다.

5. 지역

메이지 시대의 합병 이전의 8개의 포구가 그대로 대자(大字)가 되었다.

미사키 혼우라(三崎本浦)가 마을의 중심이며, 코(高), 사다(佐田), 오사다(大佐田), 이노(井野)가 미사키 혼우라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요시(与侈), 쿠시(串), 쇼노(正野)가 미사키 혼우라의 북쪽 사다미사키(佐田岬) 돌출부 쪽에 위치하며, 이쪽은 특히 단애 해안을 이루고 있다.

6. 산업

미사키촌에서는 어업과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정야, 구시, 요시 등의 취락에서는 멸치, 방어, 전복, 소라, 우뭇가사리 등을 잡는 어업이 발달했고, 남부의 사타, 고등 지역에서는 하귤을 중심으로 , 보리, 고구마 등을 재배하는 농업이 발달했다.

6. 1. 어업

정야, 구시, 요시 등의 취락에서는 어업이 발달했다. 멸치, 방어 외에, 해안 암초가 풍부하여 전복, 소라, 우뭇가사리 등의 해조류가 잡힌다. 어선에 의한 어업 외에, 특히 해녀에 의한 잠수 어업이 특징적이다. 어법의 특징으로 보아 오키나와, 고토 열도에서 전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우와지마번 다테 히데무네가 건립한 노사카 대권현의 棟札(건물에 붙이는 기록)에는 큰 문어가 끌어안고 있던 빛나는 구슬을 해녀가 끌어올려 제사 지냈다는 이야기가 있어, 17세기 무렵에는 이미 해녀 어업이 성립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1881년에는 구시우라의 오카자키 손타로 등 10여 명이 처음으로 한반도 연안에서 전복 채취에 종사했다. 다이쇼 시대에 피크를 맞이했으며, 당시에는 대부분의 해녀가 해외 출어 경험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와해 쪽의 다카오에서는 망주가 망을 세워 어민을 통솔하여 대형 그물을 사용하여 미사키 만으로 들어온 방어를 잡았다. 또한, 같은 조직에 의해 건멸치 가공도 이루어졌다.

1948년에는 에히메현에서 최대 어획량을 기록했다.

6. 2. 농업

남부의 사타, 고등 지역은 경사가 완만하여 농업이 발달했다. 1886년에 이 지역에 하귤이 도입되어 산지를 형성했고, 미사키항은 하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번성했다. 그 외 , 보리, 고구마 등을 재배했다.

7. 교통

철도는 다니지 않는다.

미사키항에서 사가노세키항으로 가는 페리가 취항한 것은 미사키정이 된 후 한참 지난 1969년(昭和|쇼와일본어 44년)이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