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카타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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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카타 촌은 현재의 이카타정 동부에 위치했던 지역으로, 사다곶 반도의 거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북쪽은 이요灘, 남쪽은 우와해에 면해 있으며, 1889년 정촌제 시행으로 이카타우라가 이카타 촌이 되었다. 1955년 마치미 촌과 합병하여 이카타정이 되었다. 과거에는 멸치 어업이 활발했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 농업으로 전환되었고, 쇼와 시대에는 양잠이 성행했다. 이후 온주밀감 재배가 주력 산업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카타 두사(杜氏)로도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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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타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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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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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가나 | 이카타무라 |
자치체 명칭 | 이카타촌 |
구분 | 촌 |
폐지일 | 1955년 3월 31일 |
폐지 사유 | 신설 합병 |
폐지 상세 | 이카타촌・미토미촌 → 이카타정 |
현재 자치체 | 이카타정 |
도도부현 | 에히메현 |
군 | 니시우와군 |
인접 자치체 | 이소즈촌, 가와노이시정, 미토미촌 |
소재지 | 니시우와군 이카타촌 자(字) 미나토우라 |
2. 지리
현재의 이카타정 동부에 해당하며, 야와타하마시와 접하는 지역이다. 사다곶 반도의 거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이요나다에, 남쪽으로는 우와해에 면해 있다. 마을 중앙에는 사다곶 반도를 이루는 산지가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다. 동쪽으로는 이소즈촌 및 가와노이시정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마치미촌과 접한다. 우와해 쪽의 만에는 몇몇 마을이 흩어져 있으며, 이요나다 쪽은 험준한 해안선이 특징이다.
2. 1. 지명의 유래
- 근세 초기부터 이 지역은 이카타포(伊方浦|いかたうら일본어)라고 불렸다. '이카타'라는 이름 자체의 정확한 어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2. 2. 섬
3. 역사
이카타 지역은 고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헤이케와 관련된 전설 및 지명이 남아있다. 센고쿠 시대에는 우츠노미야 씨의 지배 하에 있었고, 이후 에도 시대에는 우와지마 번의 영지가 되었다. 1674년에는 츠지 가문이 촌장이 되어 어업을 통해 영향력을 키웠으나, 1830년에는 촌장의 횡포에 반발한 농어민들이 농민 봉기인 이카타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 1889년 정촌제가 시행되면서, 기존의 이카타우라(伊方浦)는 행정 구역으로서 '''이카타 촌'''(伊方村)이 되었고, 큐쵸우라(九町浦)와 후타미우라(二見浦)는 합병하여 마치미 촌(町見村)이 되었다. 이후 이카타 촌은 근대적인 시설들이 들어서고 온주귤 재배가 시작되는 등 변화를 겪었다. 1955년 3월 31일, 이카타 촌은 마치미 촌과 합병하고 정제를 시행하여 '''이카타정'''(伊方町)으로 승격되면서 이카타 촌은 폐지되었다.[1]
3. 1. 고대 - 중세
이카타촌을 포함한 사다곶 반도 기부 일대는 옛날에는 '矢野保|야노보일본어'라고 불렸다. 헤이케가 세력을 떨치던 시기에는 이 지역이 池大納言|이케다이나곤일본어 타이라노 요리모리의 영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아즈마카가미).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배한 헤이 씨의 패잔병들이 伊予灘|이요나다일본어에 면한 伊方越|이카타고시일본어에 도착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패잔병 전설과 관련된 退ケ浦|퇴케우라일본어, 勝負ケ崎|쇼부케자키일본어, 赤旗|아카하타일본어 등의 지명과 사당이 남아 있다.《고금저문집》에 黒島|구로시마일본어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정어리 어업을 통해 이미 이 부근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센고쿠 시대 말기, 이카타촌 일대는 宇都宮房綱|우츠노미야 후사츠나일본어의 세력 아래 있었다. 藤原良通|후지와라 요시미치일본어를 통해 中浦|나카우라일본어에 丸岡城|마루오카성일본어이 축성되었으나, 겐키 연간(1570년~1573년)에 土佐의 一条 세력에 의해 함락되었다.
3. 2. 근세, 번정기
우와지마 번의 영지였다.1674년(엔포 2년)에는 츠지 가문이 이카타우라의 촌장이 되어 큰 어망을 이용한 어업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츠지 가문은 구로시마를 개발하였고, 번으로부터 영구적인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1830년(분세이 13년)에는 이카타 소동이 발생했다. 당시 촌장이었던 츠지 쵸지베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으며, 은퇴하고 아들 키헤이타에게 촌장직을 물려준 뒤에도 그의 횡포는 계속되었다. 이에 불만이 쌓인 농어민들이 농민 봉기인 이카타 소동을 일으켰다. 그해 봄, 마을 주민들이 번에 직접 문제를 호소했으나 번의 조치가 미흡하자, 3월에는 약 800명의 주민들이 오즈 번 영지인 히지카와 강변으로 집단 도주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소동의 결과, 쵸지베는 토시마로 유배되었고 아들 키헤이타는 야노보 지역으로 이주당했다. 소동의 주모자는 사형에 처해졌으며, 가담했던 주민 10여 명도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3. 3. 메이지 이후
- 1889년 (메이지 시대 22년) 12월 15일: 정촌제 시행에 따라 이카타우라(伊方浦)가 행정 구역으로서 이카타 촌(伊方村)이 되었다.
- 1889년 (메이지 22년): 이카타 순사 주재소가 설치되었다.
- 1897년 (메이지 30년): 서남 은행 이카타 지점이 문을 열었다. 이 지점은 후에 이요 은행 이카타 지점이 된다.
- 1903년 (메이지 36년): 이카타 어업 조합이 설립되었다.
- 1911년 (메이지 44년): 두사·창부 조합(杜氏・蔵夫組合)이 결성되었다.
- 1914년 (다이쇼 시대 3년): 사사키 쵸지(佐々木長治)가 미나토우라(湊浦)에 이카타 실천 학교를 설립하였다.
- 1922년 (다이쇼 11년): 마을에 전등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1948년 (쇼와 시대 23년): 미나토우라와 야와타하마시를 잇는 버스 노선이 개통되었다.
- 1949년 (쇼와 24년): 오하마(大浜) 지역을 중심으로 온주귤 재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 1955년 (쇼와 30년) 3월 31일: 이카타 촌은 마치미 촌(町見村)과 합병하고 정제를 시행하여 이카타정으로 승격되었다.
4. 행정
이카타 마을청은 아자 미나토우라에 위치해 있었다.
5. 경제
에도 시대 이카타촌의 주요 경제 활동은 멸치 어업이었으나,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농업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메이지 시대 말부터 쇼와 시대까지는 양잠업이 성행하였고, 쇼와 시대 중반 이후로는 온주밀감 재배가 주력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1] 농업 외에도 농한기 부업으로 술을 빚는 '이카타 두사'가 일본 전역과 한반도, 대만 등지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으며, 마을 내에는 양잠업과 관련된 제사 공장과 청주 등을 생산하는 양조장도 운영되었다.[2]
5. 1. 산업
번정기에는 멸치 어업이 활발하여 그물 수가 우와지마 번 내에서 가장 많았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면서 멸치 어업은 점차 쇠퇴하고 농업으로 전환되었다. 메이지 20년대 말에는 새로운 품종의 뽕나무가 도입되어 쇼와 시대까지 양잠이 성행했으며, 약 900호의 농가가 양잠에 종사했다고 전해진다.[1]쇼와 20년대 중반부터는 온주밀감 재배가 활발해지면서 멸치 어업과 양잠을 대체하는 주력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설립된 이카타 실천 농학교는 농업 후계자 육성뿐만 아니라 여성 농업 교육에도 힘썼다. 특히, 두사(杜氏)로 일하러 간 남성들을 대신해 여성들이 농업을 담당하는 데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등 지역 사회에 크게 기여했다. 그 외 주요 농산물로는 밀랍나무, 보리, 고구마류가 있었고, 육우 사육도 이루어졌다.
농한기에는 부업으로 술을 빚는 이카타 두사가 유명했으며, 이들은 일본 전역과 한반도, 대만까지 진출하여 명성을 떨쳤다. 또한, 양잠업의 발달과 함께 제사 공장이 운영되었고, 청주 등을 생산하는 양조장도 있었다.[2]
5. 1. 1. 이카타 두사(杜氏)
이카타 두사의 기원에 대한 확실한 것은 없지만, 밀랍나무 열매를 짜거나 말린 멸치 장사를 통해 기술을 습득한 것이 시작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중반에는 이미 다른 지역으로 나가 일하는 출작업이 이루어졌다. 주로 11월부터 3월까지의 농한기에 양조장에 두사나 창부로서 나가 일했으며, '이카타 두사'로서 명성을 떨쳤다. 쇼와 초년에는 두사와 창부를 합쳐 600명에 달하여 전성기를 이루었고, 활동 범위도 넓어 도쿠시마현, 가가와현, 오이타현뿐만 아니라 멀리 한반도나 대만까지 진출했다.5. 1. 2. 공장
쇼와 시대에 양잠이 성행하면서 미나토우라를 중심으로 15곳에 달하는 제사 공장이 운영되었다.마을 내 주요 공장 정보는 다음과 같다.
6. 교통
이카타촌에는 철도가 지나지 않는다. 산이 바다와 바로 맞닿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육로 교통은 예로부터 불편했으며, 이는 사다곶 반도 남쪽의 우와해에 접한 지역 대부분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과거에는 해안을 따라 포구들을 연결하는 배가 중요한 교통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하타하마와 미나토우라를 잇는 버스 노선이 개통되었다.
참조
[1]
간행물
大日本篤農家名鑑
https://dl.ndl.go.jp[...]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2017-07-21
[2]
간행물
全国工場通覧
https://dl.ndl.go.jp[...]
202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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