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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갑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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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갑완은 명성황후의 일족인 민영돈의 딸로, 1907년 영친왕의 약혼녀로 간택되었으나, 영친왕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후 일본 황족인 이방자와 정략결혼하면서 파혼당했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김규식의 후원을 받았지만, 독립운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책과 뜨개질로 세월을 보냈다. 1963년 영친왕이 귀국했으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1968년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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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갑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민갑완

2. 생애

민갑완은 명성황후의 일족인 민영돈의 딸로 태어나 1907년 영친왕의 약혼녀로 간택되었으나, 일본의 방해와 영친왕의 정략결혼으로 파혼당했다.[1]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규식의 도움을 받았으나, 일본의 지속적인 감시와 압박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 광복 후 귀국하였으나 불우한 만년을 보내다 1968년 후두암으로 사망했다.[1]

2. 1. 출생과 약혼

명성황후의 일족인 민영돈의 딸로 명성황후의 2주기가 되는 날에 태어났으며, 1907년에 황태자 영친왕의 약혼녀로 간택되었다.[1] 민갑완의 할아버지 민석호는 이완용의 외사촌 형이었고, 민갑완의 언니는 순정효황후의 백부인 윤덕영의 맏며느리였다. 이러한 집안 배경이 그녀가 태자비로 간택되는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1]

그러나 일본은 '유학'이라는 구실로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갔고, 1910년 한일합병이 되면서 영친왕은 일본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1] 1917년 민갑완은 10년간 영친왕의 귀국과 혼례만을 기다리며 책을 벗삼아 지냈으나, 영친왕이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과 정략결혼하게 되면서 파혼당하고 말았다.[1]

2. 2. 상하이 망명

영친왕과 마사코의 결혼식이 일본에서 치러지고 3개월 후, 민갑완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부친 민영돈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더 이상 조선에 남아 있기 어려웠고 의지할 곳이 없기에 망명을 결심하였으나 일본의 핍박은 집요했다. 상하이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김규식의 후원으로 상하이 현지에 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울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신학문 공부에 한창 재미를 붙일 무렵, 일본 영사가 학교에 찾아와 민갑완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고 압력을 행사하였다. 학교장은 결국 민갑완을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했고, 그는 또한번 좌절했다.[1]

김규식은 그녀에게 한학과 영문을 가르쳤다.[1]

그녀가 성인이 되자 김규식은 민갑완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민갑완은 '나 하나의 희생으로 만사가 평온하기를 바랄 뿐'이라면서 거절했다. 민갑완은 책과 뜨개질로 세월을 보냈고, 파혼으로 여러 번 혼담이 들어왔지만 모두 거절하였다.[1]

2. 3. 생애 후반

1963년 영친왕이 박정희 정부의 주선으로 귀국하였으나 뇌연화증으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민갑완은 그를 만날 수 없었다.[1] 1968년 2월 19일 오전, 민갑완은 부산 초량동 자택에서 후두암으로 71세의 생을 마감하였다.[1] 이후 부산직할시 천주교 용호동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묘지가 개발되면서 2007년 9월 개장하여 실로암 공원 묘원 납골당에 동생 민천식 내외와 함께 안치되었다.[1]

3.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
고조부민용현(閔龍顯)
증조부민치서(閔致序)
조부민석호(閔奭鎬)
아버지민영돈1863년 음력 2월 ~ 1919년 1월 5일
어머니전주 이씨(이기돈)1869년 ~ 1928년 10월 22일(음력 9월 9일)
동생민천식(천행)1906년 3월 3일(음력 2월 9일) ~ 1968년 2월 5일
올케윤정순1917년 ~ 1996년 7월 15일
조카민병순1936년 9월 25일 ~ 1984년
조카민병휘1941년 5월 18일 ~
질부박무선1947년 ~
조카민병욱1947년 4월 25일 ~ 1998년 3월 13일
질부동래정씨1955년 ~
동생민만식1909년 ~ 1935년 6월 10일
동생민만순1911년 5월 22일 ~ 2000년 1월 23일


4. 평가

박은봉은 김규식이 권고한 독립운동에 투신했더라면 민갑완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비판했다.[1]

5. 기타

이헌재대한민국 부총리의 아버지 이강하의 고종사촌 누나가 민갑완의 어머니였다고 한다. 즉, 이헌재의 대고모가 민갑완의 어머니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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