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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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반 4세는 1533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으로 즉위하여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차르 칭호를 사용한 인물이다. 그는 어린 시절 보야르들의 섭정 하에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냈으며, 16세에 차르로 즉위한 후 러시아를 통치했다. 이반 4세는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정복하고 시베리아 정복을 시작하는 등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1547년에 친정을 시작하여 새로운 법전을 공포하고 군대를 개혁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오프리치니나 제도를 실시하여 귀족들을 숙청하고 공포 정치를 펼쳐 "뇌제"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아들을 살해하는 등 잔혹한 행위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는 1584년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러시아는 혼란 시대를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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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반 4세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이반 4세 |
| 별칭 | ; |
| 수도사 이름 | 요나 |
| 전체 이름 | 이반 바실리예비치 |
| 출생일 | 1530년 8월 25일 |
| 출생지 | 콜로멘스코예, 모스크바 대공국 |
| 사망일 | 1584년 3월 28일 (향년 53세) |
| 사망지 | 모스크바, 러시아 차르국 |
| 매장지 | 모스크바 성 미카엘 대성당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왕조 | 류리크 왕조 |
| 통치 정보 | |
| 칭호 | 러시아 차르 |
| 즉위 | 1547년 1월 26일 |
| 대관식 | 1547년 1월 26일 |
| 선임자 | (스스로) 모스크바 대공 |
| 후임자 | 표도르 1세 |
| 칭호2 | 모스크바 대공 |
| 즉위2 | 1533년 12월 13일 |
| 선임자2 | 바실리 3세 |
| 후임자2 | (스스로) 러시아 차르 |
| 섭정2 | 엘레나 글린스카야 (1533년–1538년)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바실리 3세 |
| 어머니 | 엘레나 글린스카야 |
| 배우자 | 아나스타시아 로마노브나 (1547년 결혼, 1560년 사망) 마리야 템류코브나 (1561년 결혼, 1569년 사망) 마르파 소바키나 (1571년 결혼, 1571년 사망) 안나 콜톱스카야 (1572년 결혼, 1572년 이혼) 안나 바실치코바 (1575년 결혼, 1576년 이혼) 마리야 나야 (1580년 결혼) |
| 자녀 |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이반 이바노비치 표도르 1세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
2. 생애
이반 4세는 1530년 8월 25일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바실리 3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 사이에서 태어났다. 엘레나는 리투아니아 대공국 출신의 귀족으로, 킵차크 칸국의 유력자 마마이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

이반은 3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대공으로 즉위했다.[17][18] 초기에는 어머니 엘레나가 섭정을 맡았으나, 엘레나 역시 1538년에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을 맞이했다.[17][18] 이후 섭정은 권력을 다투던 보야르(귀족) 가문들에게 돌아갔고, 이반은 동생 유리와 함께 슈이스키 가문과 벨스키 가문 등 유력 보야르들에게 무시와 모욕을 당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19] 그는 훗날 편지에서 "거지 아이들처럼 길러졌다. 나는 의복과 음식이 부족하여 얼마나 고생했는가!"라고 회상할 정도였다.[19]
1547년 1월 16일, 16세가 된 이반은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모승천 대성당에서 전 러시아 차르로서 대관식을 올렸다.[21] 이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차르 즉위식이었으며, 동로마 제국과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모노마흐의 모자가 사용되었다. 즉위 2주 후, 이반은 로마노프 가문 출신의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와 결혼하여 러시아 최초의 차리나를 맞이했다.
이반 4세는 즉위 후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중앙 집권화를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1550년대에는 새 법전을 공포하고 군대를 개선했으며, 지방 통치 기관을 재조직했다. 또한 1547년에는 의회 제도를 도입하여 보야르와 드보랸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1553년에는 모스크바 크렘린에 인쇄소를 설립하고 독일에서 들여온 인쇄기를 도입하여 성서와 동방 정교회 관련 서적을 대량으로 발간, 보급했다.
이반 4세는 카잔 칸국(1552년), 아스트라한 칸국(1556년)을 정복하여 볼가 강 유역을 장악하고 시비르 칸국 정복(1582년)을 통해 시베리아 진출을 시도하는 등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발트 해 진출을 목표로 한 리보니아 전쟁(1558~1583)에서는 스웨덴,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군에 패배하여 실패했다.
1560년 사랑하는 아내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이반 4세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반대파 귀족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그는 1565년부터 1572년까지 오프리치니나 제도를 실시하여 보야르 세력을 숙청하고 공포 정치를 펼쳤다. 특히 1570년에는 노브고로드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가담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고 노브고로드 학살을 자행하여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했다.
이반 4세는 말년에 성격이 더욱 포악해져 잦은 재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며느리를 폭행하여 유산시키거나 아들 이반을 지팡이로 때려죽이는 등 잔혹한 행위를 일삼았다.[97] 1584년 3월 18일, 이반 4세는 체스를 두던 중 뇌졸중으로 사망했다.[98]
이반 4세의 뒤를 이어 셋째 아들 표도르 1세가 즉위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보리스 고두노프에게 넘어갔다. 표도르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고 막내아들 드미트리마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류리크 왕조는 단절되었다.
2. 1. 출생과 생애 초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바실리 3세와 그의 계비 엘레나 글린스카야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이반이 어릴 적 부친이 다리에 생긴 종기가 염증으로 확장하여 패혈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이반이 부친의 뒤를 이었으나 어머니 엘레나가 5년간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하였다. 섭정 기간 동안 이반의 삼촌들을 처형하였으며 결국 어머니 역시 독살당하였다. 이에 이반을 돌보던 유모까지 수도원에 감금되어 이반에겐 유리라는 어린 남동생뿐이었다. 유리는 듣지 못하는 농아[94]였다고 한다.중앙 귀족인 보야르와 그들의 협의회인 두마 의회에서는 솔로모니야 사부로바 폐위에 반발했는데, 솔로모니야는 보야르 중에서도 유력 가문 출신의 딸이었다. 그리고 엘레나 글린스카야가 동방 정교회 신자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신자인 점도 보야르들의 심기를 거슬렀다. 이후 보야르 및 그들의 협의회인 두마 의회에서는 이반에게 상당히 적대적으로 대하게 된다.
이반 바실리예비치는 바실리 3세(Vasili III of Russia)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Elena Glinskaya)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었다. 바실리의 어머니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Sophia Palaiologina)는 비잔티움 제국의 팔라이올로고스(Palaiologos) 가문의 공주였다. 그녀는 마지막 비잔티움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Constantine XI Palaiologos)(재위 1449년-1453년)[12]의 동생 토마스 팔라이올로고스(Thomas Palaiologos)의 딸이었다. 엘레나의 어머니는 세르비아 공주 아나 야크시치(Ana Jakšić)였고, 그녀의 아버지 가문인 타타르[13] 글린스키 족(리투아니아 대공국에 기반을 둔 귀족)은 정교회 헝가리 귀족과 몽골 지배자 마마이(Mamai)(1335-1380)[14][15]의 후손임을 주장했다. 8월 25일에 태어나 세례자 요한을 기리는 이름 이반을 받았는데, 그의 참수 기념일은 8월 29일이다.[16] 당시 일부 문서에서는 류리크 왕조의 다명(polyonymy) 전통에 따라 티투스(Titus)와 스마라그드(Smaragd)라는 이름으로도 언급되기도 한다. 그는 세르기우스 트리니티 수도원에서 요아사프(Joasaph)(스크리피친(Skripitsyn)) 수도원장에 의해 세례를 받았고, 요셉-볼로콜람스크 수도원의 장로인 카시안 보소이(Cassian Bossoy) 수사와 다니엘(Daniel) 수도원장이 대부로 선정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반의 탄생을 기념하여 콜로멘스코예에 승천 교회가 세워졌다고 한다.
이반이 세 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다리에 생긴 농양과 염증이 패혈증으로 발전하여 사망했다. 어린 이반을 제외하고 왕위 계승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바실리의 이복형제들이었다. 이반 3세의 여섯 아들 중 안드레이와 유리 두 명만 남았다. 이반은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모스크바 대공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카야는 처음에 섭정으로 활동했지만, 이반이 여덟 살이었던 1538년에 사망했다.[17][18]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독살되었다고 믿는다. 이후 섭정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다투던 여러 쟁쟁한 보야르 가문 사이에서 번갈아 가며 이어졌다. 이반은 그의 편지에 따르면, 그의 동생 유리(Yuri Vasilevich (son of Vasili IIl))와 함께 슈이스키 가문과 벨스키 가문의 권력 있는 보야르들에게 종종 무시당하고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다. 그는 안드레이 쿠르브스키(Andrey Kurbsky)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형제 유리는 물론이고 나조차도 거지 아이들처럼 길러졌다. 나는 의복과 음식이 부족하여 얼마나 고생했는가!"라고 회상했다.[19]
1530년 8월 25일, 이반 4세는 크렘린(Кремль)의 테레엠노이 궁전(Теремной дворец)에서 태어났다. 오랫동안 후계자가 없었던 바실리 3세(Василий III)에게는 간절히 바라던 적장자였지만, 1525년 동방 정교회(православная церковь)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불임이었던 첫 번째 부인을 내쫓고 이반 4세의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카야(Елена Глинская)를 맞이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총대주교청(Иерусалимская Патриархия)은 이 결혼을 두고 "악한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저주했다고 한다. 엘레나는 1380년 쿨리코보 전투(Куликовская битва)에서 드미트리 돈스코이(Дмитрий Донской)에게 패배한 킵차크 칸국(Золотая Орда)의 유력자 마마이(Мамай)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며, 이반 4세는 쿨리코보 전투에서 승자와 패자 양쪽의 피를 이어받게 된다.

2. 2.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의 아들로 태어난 이반 4세는, 어린 시절 부친이 종기가 염증으로 확장하여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3세의 나이에 대공으로 즉위하였다.[17][18] 초기에는 귀족회의가 섭정을 맡았고, 이후 그의 어머니 엘레나가 섭정으로서 정무를 수행했다.[17][18]엘레나의 정부는 전국 단위의 단일 통화(모스크바 루블) 도입, 국경 방위 강화 등 적극적으로 정치에 임했고, 이웃나라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국경 분쟁에서도 승리했다. 또한 대공의 지위를 노리는 이반 4세의 두 삼촌을 실각시키고, 외가인 글린스키 가문이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1538년 어머니 엘레나가 사망하면서, 슈이스키 가문과 벨스키 가문 사람들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8세의 이반 4세는 무시당하게 되었다.[17][18] 이반은 어려서 대공의 지위를 계승했지만 이반 형제에게 적대적인 보야르들에 의해 구박받고 고통스러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반 4세와 동생 유리는 크레믈린 궁의 탑 속에 갇혀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이반 4세가 후일 측근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자신이 8살 무렵부터 슈이스키 가문과 벨스키 가문으로부터 수시로 멸시당했고 무례하게 구는 일을 당했다고 한다.[19]
2. 2. 1. 즉위
이반은 세 살의 나이에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다.[17] 아버지 바실리 3세가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이반을 제외하고 왕위 계승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바실리 3세의 이복형제들인 유리와 안드레이였다. 이반의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카야는 초기에는 섭정으로 활동했지만,[17] 이반이 여덟 살이 되던 해인 1538년에 사망했다.[18] 많은 사람들은 엘레나가 독살되었다고 믿고 있다. 엘레나 사후 섭정 자리는 권력 다툼을 벌이던 여러 보야르 가문들에게 돌아갔다. 이반은 자신의 동생 유리와 함께 슈이스키 가문과 벨스키 가문의 유력 보야르들에게 무시와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다고 편지에서 밝히기도 했다.[19]1547년 1월 16일, 16세의 이반은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모승천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렸다.[21] 모스크바 및 전 러시아 대주교는 이반에게 왕의 품위를 나타내는 상징인 생명나무 십자가, 바르마스(barmas), 모노마흐의 모자를 씌웠다. 이반은 몰약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대주교의 축복을 받았다. 그는 최초로 전 러시아 차르로 즉위한 러시아 군주였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의 할아버지 이반 3세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반 3세는 전 러시아의 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다른 군주들과의 서신에서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했었다.[21] 즉위식 2주 후, 이반은 러시아 최초의 차리나가 된 로마노프 가문 출신의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와 결혼했다.
2. 2. 2. 귀족들의 섭정 기간
바실리 3세와 그의 계비 엘레나 글린스카야의 아들로 태어난 이반 4세는, 어린 시절 부친이 종기가 염증으로 확장하여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3세의 나이에 대공으로 즉위하였다.[17][18] 초기에는 귀족회의가 섭정을 맡았고, 이후 그의 어머니 엘레나가 섭정으로서 정무를 수행했다.[17][18] 섭정기간 동안 이반의 삼촌들을 처형하였으며 결국 어머니 역시 독살당하였다.[17][18]엘레나의 정부는 전국 단위의 단일 통화(모스크바 루블) 도입, 국경 방위 강화 등 적극적으로 정치에 임했고, 이웃나라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국경 분쟁에서도 승리했다. 또한 대공의 지위를 노리는 이반 4세의 두 삼촌, 드미트로프 공 유리와 스타리차 공 안드레이를 실각시키고, 외가인 글린스키 가문이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1538년 어머니 엘레나가 사망하면서, 슈이스키 가문과 벨스키 가문 사람들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8세의 이반 4세는 무시당하게 되었다.[17][18] 이반은 어려서 대공의 지위를 계승했지만 이반 형제에게 적대적인 보야르들에 의해 구박받고 고통스러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반 4세와 동생 유리는 크레믈린 궁의 탑 속에 갇혀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이반 4세가 후일 측근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자신이 8살 무렵부터 슈이스키 가문과 비엘스키 가문으로부터 수시로 멸시당했고 무례하게 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1533년 이반은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이는 이름뿐인 지위였다. 보야르 귀족들은 이반과 청각 장애인 유리 형제를 무시했다. 형제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배가 고파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찾도록 누구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황제이긴 했지만 귀족들은 7살짜리 어린 황제 형제를 심문한 뒤 밀실로 끌고가 고문을 즐기기도 했다. 이반 형제가 왕과 왕족의 예우를 받는 날은 오로지 왕실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이반 형제들은 누더기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이러한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으로 러시아 정교회 모스크바 대주교 이오시프가 폐위되자, 대신 이반 4세의 교육자이기도 한 마카리우스가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교회의 권위는 귀족 세력에 좌우될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고, 마카리우스는 교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강력한 후원자를 필요로 했다. 그 때문에 이반 4세에게는 대공으로서가 아닌 "신이 선택한 차르"로서의 교육이 베풀어졌다. 총명한 이반 4세는 열심히 배우고, 다윗 왕부터 시작하여 동로마 제국에 이르는 "성스러운 역사"에 친숙해지며, 신앙심이 깊은 청년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를 학살하거나 귀족 자제들과 함께 시내에서 난폭하게 구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13세 무렵에는 대공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여, 과거 자신의 신하를 제거했던 섭정 중 한 명이자 명문 귀족인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처형했다.
귀족들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이반을 대공으로 대우해주고, 이반의 동생 유리를 왕자로 대우했다. 그러나 공식석상 밖에서 보야르들은 이반에게 무례하게 굴기가 예사였고, 누더기 옷을 강제로 입혔으며 이반의 침실에 나타나 일부러 소란스럽게 논쟁을 벌였다. 안드레이 슈이스키는 아예 더러운 신발을 이반의 침대 위에 갖다두고 강제로 신게 했다.
어린 시절 이반은 높은 성 꼭대기에서 애완동물을 떨어뜨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다 한다. 당시의 많은 보야르 및 일반 귀족 그리고 지방의 귀족인 드보랸 등은 그가 독살당하거나 폐위 또는 암살당하리라 전망했다. 그러나 1543년 12월 말, 이반은 자신과 가까이 지내던 몇몇 보야르 및 드보랸 자제들을 동원, 두마 회의때 크레믈린 궁의 주변에 매복시켰다. 회의가 끝나자, 이반은 이들을 시켜 자신을 학대하던 두마 의원인 보야르 귀족의 유력자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납치, 크레믈린의 개 사육사에게 보내 맹견에게 물어뜯겨 죽게 했다. 이후로 이반에 대한 보야르, 제후 의원들의 멸시와 구박은 줄어들었지만 경계심은 계속되었다.
2. 3. 전 러시아의 차르
1533년 이반은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이는 명목상의 지위였다. 보야르 귀족들은 이반과 그의 동생 유리를 무시했다. 형제는 누더기 옷을 입고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귀족들은 어린 황제 형제를 심문하고 고문했다.[94] 이반 형제가 왕족 대우를 받는 날은 왕실 행사 때뿐이었고, 행사가 끝나면 다시 누더기 옷을 입어야 했다. 왕실의 살인, 암투, 음모를 목격하며 성장한 이반의 성격은 포악하게 변했다.[94] 그는 형식상의 대공이었고, 정무는 두마와 보야르들이 담당했다. 슈이스키 가문과 베리스키 가문 등 유력 보야르 가문은 대공의 섭정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었고, 이러한 갈등은 이반이 1547년 공식 차르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귀족들은 공식 석상에서는 이반을 대공으로, 유리를 왕자로 대우했지만, 사석에서는 이반에게 무례하게 굴고 누더기 옷을 강요했다. 안드레이 슈이스키는 더러운 신발을 이반의 침대에 갖다 두고 강제로 신게 했다. 어린 시절 이반은 높은 곳에서 애완동물을 떨어뜨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많은 귀족들은 그가 독살, 폐위, 암살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1543년 12월 말, 이반은 측근 보야르와 드보랸 자제들을 동원, 두마 회의 때 크레믈린 궁 주변에 매복시켰다. 회의 후 이반은 이들을 시켜 자신을 학대하던 두마 의원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납치, 크레믈린의 개 사육사에게 보내 맹견에게 물어뜯겨 죽게 했다. 이후 이반에 대한 멸시와 구박은 줄었지만 경계심은 계속되었다.
이반이 15살 때, 궁중 식사 중 귀족들이 패싸움을 벌였다. 분노한 이반은 조용히 할 것을 명했으나 귀족들은 무시했다. 이반은 경호용 개를 데려오게 하여 귀족들을 물게 했고, 심하게 물린 귀족은 은둔했다고 한다.[94] 이 일로 공포감을 느낀 두마 의원들은 이반에게 친정을 청했다. 그러나 친정을 두려워한 이반은 보론초프 가문 사람들을 중용했다가 1546년 숙청했다.
지방 귀족 드보랸들과 보야르, 제후 계층은 바실리 3세 시절부터 두마 의원, 관료들의 횡포를 억제할 강력한 왕권을 원했고, 상인들은 동일한 상법 및 무역법 신설을 원했다. 이들은 보야르와 적대적인 이반 4세에게 호의를 보였고, 그가 친정하자 적극 지지했다. 1546년 12월 이반은 혼인과 차르 즉위를 선언했다. 이듬해 그는 로마노프가의 딸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를 선택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이반 바실리예비치는 바실리 3세와 두 번째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었다. 바실리의 어머니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는 비잔티움 제국 팔라이올로고스 가문의 공주로, 마지막 비잔티움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동생 토마스 팔라이올로고스의 딸이었다.[12] 엘레나의 어머니는 세르비아 공주 아나 야크시치였고, 아버지 가문인 리투아니아 대공국 기반 귀족 타타르[13] 글린스키 족은 정교회 헝가리 귀족과 몽골 지배자 마마이의 후손임을 주장했다. 이반은 8월 25일에 태어나 세례자 요한을 기리는 이름을 받았고, 참수 기념일은 8월 29일이다.[16] 일부 문서에서는 류리크 왕조의 다명 전통에 따라 티투스, 스마라그드라는 이름으로도 언급된다. 그는 세르기우스 트리니티 수도원에서 세례를 받았고, 요셉-볼로콜람스크 수도원과 다니엘 수도원장이 대부로 선정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반의 탄생을 기념하여 콜로멘스코예에 승천 교회가 세워졌다고 한다.
이반이 세 살 때, 아버지는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어린 이반을 제외하고 왕위 계승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바실리의 이복형제들이었다. 이반 3세의 여섯 아들 중 안드레이와 유리 두 명만 남았다. 이반은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모스크바 대공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카야는 섭정으로 활동했지만, 이반이 여덟 살이던 1538년에 사망했다.[17][18]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독살되었다고 믿는다. 이후 섭정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다투던 보야르 가문 사이에서 번갈아 가며 이어졌다. 이반은 편지에서 동생 유리와 함께 슈이스키 가문과 벨스키 가문의 보야르들에게 무시당하고 모욕당했다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는 안드레이 쿠르브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거지 아이들처럼 길러졌다. 나는 의복과 음식이 부족하여 얼마나 고생했는가!"라고 썼다.[19]
1547년 1월 16일, 16세의 이반은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모승천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모스크바 및 전 러시아 대주교는 이반에게 생명나무 십자가, 바르마스, 모노마흐의 모자를 씌웠다. 이반은 몰약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대주교는 축복을 내렸다. 그는 최초로 전 러시아 차르로 대관식을 올린 러시아 군주였는데, 할아버지 이반 3세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반 3세는 전 러시아의 군주 칭호를 취하고 서신에서 차르 칭호를 사용했다.[21] 즉위식 2주 후, 이반은 로마노프 가문의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와 결혼했고, 그녀는 러시아 최초의 차리나가 되었다.

이반은 차르 즉위로 자신이 국가의 유일한 최고 통치자이며, 그의 의지는 거역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새로운 칭호는 "이전 비잔티움 카이사르와 타타르 칸의 권력과 동등하고 평행한 권력 장악을 상징하며, 정치적 효과는 이반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었다".[22] 그는 "교회 문서에서 구약의 왕들을 '차르'로, 그리스도를 천상의 차르로 묘사한 것처럼" 신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임명된 "신성한" 지도자가 되었다.[23] 새 칭호는 세대를 거쳐 전해졌고, "후대의 모스크바 통치자들은 이반 통치 기간 동안 구체화된 러시아 군주의 신성한 권력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다".[78]
합스부르크 가문과 유럽 군주들처럼, 최초의 러시아 차르들은 고대 로마에 연결되는 신화적인 족보를 채택했다. 『블라디미르 공후기』에서 혈통은 러시아 북부 노브고로드의 첫 공작 류리크로 거슬러 올라가며, 프로이센을 다스렸다고 하는 아우구스투스의 형제 프루스가 류리크의 직계 조상으로 언급된다.[24] 이반 4세는 아우구스투스와의 친족 관계를 언급하며 자신이 "러시아인"이 아니고 류리크로부터 이어지는 "독일" 혈통을 강조했다.[24] 이 족보는 신하들과 다른 유럽 강국들의 눈앞에서 러시아 군주의 지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1560년대 러시아는 가뭄, 기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의 전쟁, 타타르족 침입, 한자 동맹의 해상 무역 봉쇄 등으로 황폐화되었다. 첫 아내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는 1560년에 사망했는데,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의심되었다. 이 비극은 이반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의 성격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반의 고문 안드레이 쿠르브스키 공은 리투아니아로 망명하여 리투아니아군을 지휘하며 벨리키예 루키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이 배신 행위로 이반은 귀족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1564년 12월 3일 이반은 모스크바를 떠나 알렉산드로바 슬로보다로 가 두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귀족과 성직자의 횡령과 반역으로 인해 퇴위한다고 선포했다. 보이아르 법원은 이반 없이는 통치할 수 없었고 시민들의 분노를 두려워했다. 보이아르 사절단은 이반에게 즉위를 간청하기 위해 떠났다.[31] 이반은 절대 권력을 부여받는 조건으로 복귀에 동의했다. 그는 보이아르 의회나 교회의 간섭 없이 반역자를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할 권리를 요구했다. 이반은 Опричнина|오프리치니나ru 창설을 선포했다.
Опричнина|오프리치니나ru는 러시아 국경 내 별도 영토였으며, 주로 북부 노브고로드 공화국 영토에 있었다. 이반은 그 영토에 대한 독점적 권력을 행사했다. 보이아르 의회는 국가의 두 번째 분할인 земщина|젬시치나ru('땅')을 통치했다. 이반은 опричники|오프리치니키ru로 알려진 친위대를 모집했다. 원래는 1,000명이었다.[31] опричники|오프리치니키ru는 말류타 스쿠라토프가 이끌었다. опричники|오프리치니키ru는 Опричнина|오프리치니나ru 하에서 특권을 누렸다. 그들은 세습이나 지역 유대감이 아닌 이반에게 충성과 지위를 빚졌다.[31]
첫 박해는 주로 러시아 공작 가문, 특히 수즈달 가문들을 목표로 했다. 이반은 음모 혐의로 보이아르 가문의 저명한 인물들을 처형, 추방, 강제 삭발시켰다. 처형된 사람들 중에는 필립 대주교와 알렉산더 고르바티-슈이스키가 있었다. 1566년 이반은 Опричнина|오프리치니나ru를 8개 중앙 지구로 확장했다. 12,000명의 귀족 중 570명이 опричники|오프리치니키ru가 되었고 나머지는 추방되었다.
새 정치 체제 하에서 опричники|오프리치니키ru는 대규모 토지를 받았지만 이전 지주들과 달리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사실상 모든 농민을 차지하여 그들에게 10년 동안 지불하던 만큼 1년 만에 지불하도록 강요했다.[32] 이 억압은 농민들의 탈출을 초래했고, 생산량을 감소시켰다. 곡물 가격은 10배나 올랐다.
이반은 아들의 죽음과 Опричнина|오프리치니나ru 관련 행동에 대해 회개했으며, 수도원에 알려진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33]
1547년 1월 16일, 국정에서 무시되었던 이반 4세가 역사상 최초로 "차르"로 즉위했다. 차르 칭호는 이반 3세 때부터 사용되었지만, 대공이 아닌 차르로 즉위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성모승천 대성당에서 거행된 즉위식에는 모노마흐의 모자가 사용되어, 동로마 제국과의 연속성이 강조되었다. 이 즉위식을 기획한 것은 외가인 글린스키 가문이었지만, 이익을 얻은 것은 이반 4세와 교회였으며 총대주교 마카리우스는 왕관을 들고 러시아에서 교회가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각인시켰다.
즉위 직후 글린스키 가문이 세력을 확장하여 궁정 최고위를 차지했지만, 같은 해 6월 모스크바 대화재와 함께 발생한 폭동으로 인해 글린스키 가문이 실각하면서 이반 4세가 친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즉위식 한 달 후에는 자하린 가문(후일의 로마노프 가문)의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와 결혼하였다.
2. 3. 1. 친정과 차르 즉위
1547년 이반 4세는 친정하여 공식적으로 최초로 차르를 칭했고, 이후 러시아 군주의 공식 호칭이 되었다. 이후부터의 모스크바 대공국을 '러시아 차르국'이라고 부른다.[95] 이반은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차르 즉위식은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모델로 하여 거행했다. 그는 일군의 보야르, 드보랸, 제후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치세 초기 개혁에 착수했다. 1550년대 이반은 새로운 법전을 공포하고 군대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했다. 이러한 개혁은 항구적인 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강국화 정책이었다. 그러나 친정 초기 모스크바 시내에 의문의 방화사건이 발생하고,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반은 즉위 초, 소수의 측근들을 시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보야르 중에서도 심했던 인사들을 잡아 부패, 뇌물, 탐학 혐의로 처형했다. 이어 안드레이 쿠르프스키, 시종관 알렉세이 아다셰프, 사제 실베스트르, 대주교 마카리우스 등의 측근들을 발탁, 두마에 저항했다. 동시에 이반은 자신의 왕권이 불안하다고 느낀 나머지 유력 왕위 계승권자로 지목되는 자신의 가까운 친척들을 체포, 참살하거나 독약을 내려 처형했다.1548년 이반 4세는 아나스타샤와 결혼했다. 이반은 아내를 사랑하여 아나스타샤 왕비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혼 한 달 뒤 이반의 궁궐은 다시 창녀들로 채워졌고, 시녀들을 비판하거나 욕설을 하였다. 아나스타샤 왕비는 13년 동안 이반 4세의 아내로서 왕비의 자리를 지키다 30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아내가 죽자 이반은 왕비가 귀족들에게 독살되었다면서 더욱 포악해져 귀족들을 탄압했다.[94] 1552년 10월 그는 첫 아들인 드미트리를 보았다.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소동의 원인이 된 드미트리와는 동명이인으로, 이 드미트리는 생후 1년 만에 요절한다. 후에 그는 일곱째 왕비 마리아 하세에게서 얻은 아들에게도 똑같이 드미트리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 드미트리가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소동과 관련이 있다.
1553년 이반 4세는 갑자기 고열에 시달렸는데, 일설에는 뇌염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매독이라고도 한다. 그는 불안해하며 귀족들을 소집, 자신의 아들 디미트리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병세에서 회복되었다.
이반이 병중에 있을 당시 이반의 최측근인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등은 이반의 아들 드미트리가 너무 어리다 하여, 이반의 사촌 형 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를 계승자로 내정하고 있었다. 이반의 집권 초기의 혹독함에 염증을 느꼈던 아다셰프와 실베스트르는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이반의 지지세력인 드보랸과 보야르, 제후, 성직자 등의 반발이 만만찮았으므로 이반이 죽고 난 뒤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반은 쾌차했고, 자신이 믿던 최측근들이 자신을 배반함을 알고는 분개했다. 하지만 1553년 6월 26일 그의 아들 드미트리는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1547년 이반 4세는 의회 제도를 도입했다. 곧 투표가 실시되고, 의회 의원들은 시민 대표자라는 자격으로 국정에 참여하거나 잘잘못을 비평할 수 있었다. 이반 4세가 의회를 도입한 것은 보야르와 드보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553년 이반 4세의 명령에 의해 모스크바 크렘린에 인쇄소가 설립되었다. 동시에 독일에서 들여온 인쇄기가 최초로 모스크바에 소개되었다. 이후 이반 4세는 인쇄기를 모스크바 각처에 보급하여 1550년대와 1560년대에는 성서와 동방 정교회의 교리 서적 및 주변국의 종교 관련 서적, 전설, 민담 등을 채록한 서적들이 대량으로 발간되어 보급되었다. 또한 이반은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각처에 학자를 파견하여 문자를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인쇄소 건립 초기, 새로운 인쇄기술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인쇄소를 공격하다가 적발됐다. 이들 중 일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도주했지만, 일부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2. 3. 2. 집권 초기
1547년 이반 4세는 친정을 시작하며 공식적으로 차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는 이후 러시아 군주의 공식 호칭이 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러시아 차르국'으로 불리게 되었다.[95] 이반은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임을 선언하며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본뜬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보야르, 드보랸, 제후들의 보좌를 받으며 치세 초기 개혁에 착수했다. 1550년대에 이반은 새 법전을 공포하고 군대를 개선했으며 지방 통치 기관을 재조직했다. 이는 항구적인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강국화 정책이었다. 그러나 친정 초기 모스크바에서 의문의 방화 사건이 발생하고,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반은 즉위 초 소수의 측근을 시켜 자신에게 적대적인 보야르들을 부패, 뇌물, 탐학 혐의로 처형했다. 이후 안드레이 쿠르프스키, 알렉세이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마카리우스 등의 측근을 발탁하여 두마에 저항했다. 또한 왕위 계승권자로 지목되는 친척들을 체포, 참살하거나 독살했다.
1548년 이반은 아나스타샤와 결혼하여 아내를 매우 사랑했으나, 신혼 한 달 뒤 궁궐은 다시 창녀들로 채워졌다. 아나스타샤는 13년 간 왕비 자리를 지키다 30세에 요절했고, 이반은 귀족들이 왕비를 독살했다며 더욱 포악해졌다.[94] 1552년 10월 첫 아들 드미트리가 태어났으나 1년 만에 요절했다. 이후 일곱째 왕비에게서 얻은 아들에게도 드미트리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 드미트리가 훗날 가짜 드미트리 소동과 관련된다.
1553년 이반은 고열에 시달렸는데, 뇌염이나 매독으로 추정된다. 그는 귀족들에게 아들 드미트리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했으나,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이반의 병중에 측근 아다셰프와 실베스트르는 드미트리가 너무 어리다며 이반의 사촌 형 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를 계승자로 내정하려 했다. 이반의 혹독함에 염증을 느낀 이들은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이반의 지지 세력 반발로 이반 사후를 도모했다. 그러나 이반은 쾌차했고, 측근들의 배반에 분개했다. 1553년 6월 26일 아들 드미트리는 병사했다.
1547년 이반은 의회 제도를 도입하고, 의원들은 시민 대표 자격으로 국정에 참여하거나 비평할 수 있었다. 이는 보야르와 드보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553년 모스크바 크렘린에 인쇄소가 설립되고, 독일에서 들여온 인쇄기가 모스크바에 소개되었다. 1550~1560년대에 성서와 동방 정교회 교리 서적, 주변국 종교 서적, 전설 민담 등이 대량 발간되었다. 이반은 문맹 퇴치를 위해 학자들을 파견하여 문자를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인쇄소 건립 초기, 새 기술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인쇄소를 공격하다 적발되어 일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도주하고 일부는 처형당했다.
1558년 측근들은 동부 지역 재건을 주문했지만, 이반은 서부 영토 공략을 원해 발트해 연안 리보니아를 공격하며 리보니아 전쟁을 일으켰다. 스웨덴,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개입하여 러시아에 저항했고, 전쟁은 막대한 병력 손실과 사망자만 내고 종결되었다. 킵차크 칸국의 계승 제국인 칸국이 모스크바를 침략, 약탈했고, 동부 지역에는 타타르 족이 침략했으나 러시아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1560년까지 흉년과 역병이 계속되었다. 크림의 데보레트 기레이는 12만 기병으로 모스크바를 공격했고, 1572년 모로디 전투까지 침공이 계속되었다. 이후 수십 년간 남부 국경 지대는 노가이 오르다와 크림 칸국의 약탈로 주민들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었다. 대 녹채 지대 관리에는 연간 수만 명의 병사가 필요해 러시아의 사회, 경제적 발전을 저해했다.
이반 3세가 이룩한 국가 통일에 이어 이반 4세는 중앙 집권화를 위해 1565년~1572년 오프리치니나 제도를 실시하고 대귀족을 탄압하여 중농적 중앙 집권 국가를 수립했다. 대귀족 탄압의 공포 정치로 그로즈니라는 이름을 얻었다. 1552년 카잔 한국, 1556년 아스트라한 한국을 합병하여 볼가강 지배권을 획득하고 동방, 동남방 교역 거점을 확보했다. 1581년 예르마크를 통해 시베리아 진출도 시도했다. 리보니아 전쟁(1558~1583)에서 폴란드, 스웨덴과 싸운 것은 서유럽 발트해 진출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1550년, 1566년 전국 회의를 열어 왕의 뜻을 철저히 하는 기관으로 삼았다. 1553년 영국과 백해를 통한 통상 관계를 맺고 시베리아 진출도 시작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다민족, 다종교 국가로 변모했고, 차르는 볼가강 유역 전역을 지배하며 중앙아시아 진출 발판을 얻었다.
1560년 아내 아나스타샤가 사망하자 이반은 자제심을 잃고 반대 귀족들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동방 정교회 등 종교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혹형을 가했다.[96] 아나스타샤 독살설이 퍼졌고,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에 아나스타샤의 관을 발굴한 결과 평균 이상의 수은과 비소가 검출되었다.
아나스타샤 사망 후 이반은 친위대 오프리치니크를 동원해 보야르에게 왕비 독살죄를 씌워 처형, 유폐시켰다. 1563년 측근 아다셰프와 실베스트르 주교, 이복형 블라디미르와 가족, 친척, 처족, 사촌 블라디미르 스타리스키를 참수했다. 보야르, 드보랸, 제후, 성직자, 젠트리 등을 가리지 않고 처형했다. 가족, 친지 중 왕실 비판자를 밀고하게 하고 밀고자에게 상금을 내렸다. 리보니아 전쟁 후유증과 기근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처형은 계속되었다.
2. 3. 3. 정복 사업
이반 4세는 1552년 카잔 칸국, 1556년 아스트라한 칸국을 합병하여 볼가 강의 지배권을 획득하고 동방 및 동남방 교역의 거점을 확보했다. 또한 1581년에는 카자흐족 족장 예르마크를 통해 시비르 칸국 정복을 추진하여 시베리아 진출을 시도했다.
이반 4세의 어린 시절, 카잔 칸국 군대는 러시아 북동부를 반복적으로 침략했다.[45] 1552년 이반 4세는 10만 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카잔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전투에서 안드레이 쿠르프스키 공이 활약했다. 카잔 칸 야디겔 마흐메트는 사로잡혀 1553년 모스크바에서 정교회로 개종했다. 이반 4세는 성모 마리아 수호 대성당(현재의 성 바실리 대성당)을 건립하여 카잔 칸국 정복을 기념했다. 그러나 잔존 세력의 반란은 1557년까지 계속되었다.

1551년, 스비야즈스크의 목조 요새가 우글리치에서 볼가 강을 따라 카잔까지 운반되어 1552년 결정적인 전투에서 러시아의 병참기지로 사용되었다. 1552년 6월 16일, 이반은 카잔으로 향했고, 8월 30일에 마지막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인들은 공성추, 공성탑, 땅굴 공사, 150문의 대포, 효율적인 군사 기술자들을 이용했다. 10월 2일, 카잔은 함락되었고, 요새는 파괴되었으며 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많은 러시아 포로와 노예들이 풀려났다. 이반은 카잔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여러 교회를 건설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대성당이다. 1557년 제1차 체르미스 전쟁이 끝났고, 바시키르인은 이반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칸국을 병합했다. 이로써 볼가 강 전역이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이슬람교도 타타르인을 영토 내에 포함하게 되면서 이반 4세는 다민족 국가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딘 러시아의 차르가 되었다. 1554년과 1556년의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볼가 강 어귀에 있는 아스트라한 칸국을 정복했고, 1558년 이반 비로드코프에 의해 새로운 아스트라한 요새가 건설되어 옛 타타르 수도를 대체했다. 타타르 칸국의 합병은 광대한 영토의 정복, 대규모 시장에 대한 접근, 그리고 볼가 강 전체에 대한 통제를 의미했다. 무슬림 칸국의 정복은 러시아를 제국으로 만들었다.[46] 카잔을 정복한 후 이반은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을 정교회 교회 돔의 그리스도교 십자가 아래에 놓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47][48][49]
1568년, 오스만 제국의 대베지르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는 볼가 강과 돈 강을 운하로 연결하는 계획을 세웠다. 1569년 여름, 오스만 군대는 아스트라한을 포위 공격하고 운하 공사를 시작했으며, 오스만 함대는 아조프를 포위했다. 1570년 초, 이반 4세의 사절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술탄과 차르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했다.[50]
1558년 이반은 발트 해 연안의 리보니아를 공격하여 리보니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스웨덴,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킵차크 칸국의 계승제국인 크림 칸국이 모스크바를 침략하여 약탈했고, 동부 지역에는 타타르 족이 침략했으나 러시아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1560년까지 흉년과 역병이 계속되었다. 1571년 데블렛 기레이는 12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공격했고, 1572년 모로디 전투에서 멈출 때까지 침공은 계속되었다. 수십 년에 걸쳐 남부 국경지대는 노가이 오르다 및 크림 칸국의 약탈을 받아 러시아 주민들이 포로로 사로잡혀 노예가 되었다.
1577년부터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지원으로 코사크 지도자 예르마크가 시비르 칸국 정복에 나섰고, 이반 4세도 1581년 예르마크에게 승인을 주어 시베리아 정복 사업을 추진했다. 1582년 시비르 칸국 정복이 완료되었다.
2. 3. 4. 중앙 귀족 숙청
1560년 아내 아나스타시아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반 4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오프리치니크 측근들에게 사악한 간신들이 아내를 독살했다고 분개했다.[96] 이후 자제심을 잃고 반대 귀족들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는 아내가 독살당했다고 믿었고, 이는 아나스타샤 독살설로 퍼져나갔다.왕후 아나스타샤의 죽음을 계기로 이반 4세는 친위대인 오프리치니크를 동원해 일부 보야르에게 왕비 독살죄를 씌워 처형하거나 유폐시켰다. 1563년에는 최측근인 아다셰프와 실베스르트 주교, 이복형 블라디미르와 그의 가족, 친척, 처족들을 모두 처형하고, 사촌 블라디미르 스타리스키까지 참수했다. 보야르, 드보랸, 제후, 성직자, 젠트리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밉보인 인물들을 처형했다. 가족, 친지들 중 왕실에 비판적인 자들을 밀고하게 하고, 밀고자에게는 상금을 후하게 내렸다.
그러나 보야르의 반발은 거셌고, 왕실의 먼 친척을 대안으로 삼거나 왕실 자체를 폐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1564년 이반 4세는 최측근 몇 명만 데리고 모스크바를 떠나 알렉산드로프스키 성에 장기간 은거했다. 그는 두마 의원들과 보야르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정권을 위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각지에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드보랸, 성직자, 보야르들은 궁궐 내 환관과 궁녀들이 국정을 농단한 것으로 해석하고 반발했다.
두마의 지도자 보야르는 이반 4세에게 다시는 무례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간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반 4세는 돌아와 부패 관료와 반역자를 재판 없이 사형하고 재산을 몰수할 권한을 갖는다고 선포했다. 1565년에는 국가를 오프리치니나와 젬시치니나로 분할하고, 모스크바에서 가장 풍부한 지역을 자신의 직속령에 편입시켰다. 이반 4세의 분노는 보야르, 왕족, 제후에게까지 향했고, 노브고로드 학살(1570년)에서 절정에 달했다.
1565년 모스크바를 떠나 외국으로 잠적한 안드레이 쿠르프스키는 이반 4세에게 충고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차르는 민중의 지도자이자 목자로서 귀족과 지식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만인의 아버지가 되어 민중의 생활을 보호해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반 4세는 "차르는 신께서 권리를 부여한 전제군주이므로 누구의 비판도 받아서는 안된다."라고 답했다. 1566년 이반 4세는 차르의 근위대 겸 오브리치니나의 치안을 담당하는 오프리치니크 부대를 창설했다. 이들은 검은 제복을 착용하여 흑위병, 검은 기사로 불렸다.
오프리치니나 정책으로 이반 4세는 보야르 가문의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을 파괴했지만, 무역은 쇠퇴하고 농민들은 세금과 폭력을 피해 도망치려 했다. 농민들을 이동의 자유를 일부 제한하여 농촌 사회는 법제화된 농노제에 가깝게 되었다. 1572년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나 체제를 포기했다.
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 일족의 고문과 처형을 담당했던 말류타 스쿠라토프는 오프리치니크 부대의 지휘관으로 기용되어 보야르, 왕족, 제후, 두마의 반대파, 드보랸, 성직자, 젠트리 등을 가리지 않고 고문했다. 오프리치니크 부대원들은 사형수들을 끓는 물에 넣거나 쇠꼬챙이로 꿰는 등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했다. 1570년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크 부대에게 노브고로드 시민들을 전부 사형하라고 명령했다. 노브고로드는 이반 4세에게 적대적인 도시였고, 오프리치니크 부대는 노브고로드 지역 주민들을 엄벌하라는 지시에 따라 1500여 명의 보야르와 그 가족들을 한꺼번에 사형했다.
1570년 노브고로드 대공족, 성직자, 젠트리들에 대한 대량 학살은 오프리치니크 부대원들의 주도로 벌어졌다. 이반 4세는 노브고로드에 반대 세력이 많이 모여 산다는 이유로 일주일 동안 6만 명을 온갖 방법으로 사형했다. 그는 블라드 체페슈의 고문, 사형 자료를 참고했고, 이러한 사형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기도 했다. 검은 옷에 검은 말을 탄 오프리치니크가 나타나는 거리마다 비명과 공포, 적막감이 감돌았다.
1575년 이반 4세는 타타르족인 시메온 벡불라토비치에게 차르 직을 일시 양위하고 자신은 대공이라 칭했다. 시메온 벡불라토비치는 이반 3세의 고손녀와 결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시메온의 거듭된 복직 요청으로 이반 4세는 1년 만에 다시 차르로 복귀했다.
2. 3. 5. 오프리치니나와 대학살극
오프리치니나 정책으로 이반 4세는 주요 보야르 가문의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을 파괴했지만, 그들은 국가 관리 능력이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무역은 쇠퇴하고 농민들은 세금과 폭력을 피해 모스크바를 떠나려 했다. 농민들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로 농노제가 강화되었다. 1572년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나 체제를 포기했다. 이 체제는 전쟁 자원 동원과 반대 목소리 억압을 목적으로 했으나, 러시아를 황폐화시키고 동란 시대(1598-1613)라는 사회 분쟁과 내전을 초래했다.오프리치니크 지휘관 말류타 스쿠라토프는 보야르, 왕족, 귀족, 성직자 등을 가리지 않고 끓는 물에 담그거나 살점을 베는 등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1570년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크 부대에 노브고로드 시민들을 사형하라고 명령했다. 노브고로드는 보야르들이 많이 살던 곳으로, 1500여 명의 보야르와 그 가족들이 사형당했다.
1570년 노브고로드 대량 학살은 오프리치니크 부대원들이 주도했다. 이반 4세는 반대 세력이 노브고로드에 모여 있다는 이유로 일주일 동안 대공족, 성직자, 젠트리 등 6만 명을 잔혹하게 사형시켰다. 항문에 말뚝을 박거나 끓는 물에 던지는 등 블라드 체페슈의 고문 방법을 참고했다. 검은 옷과 말을 탄 오프리치니크가 나타나는 거리에는 비명과 공포가 가득했다.
1575년 이반 4세는 타타르족인 시메온 벡불라토비치에게 차르 직위를 양위하고 자신은 대공이라 칭했다. 시메온 벡불라토비치는 이반 3세의 고손녀와 결혼한 인물이다. 그러나 1년 만에 이반 4세는 다시 차르로 복귀했다.
1565년, 이반 4세는 대귀족들의 탄원으로 복위하며 반역자 처벌 권한을 포함한 막대한 권한을 인정받고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크렘린 귀환 당일 지도적 명문 귀족 당주 7명을 처형하고, 오프리치니나 제도를 도입하여 전국을 직할령(오프리치니나)과 그 외 국토(젬시치나)로 나누었다. 직할령은 오프리치니키에게 통치하게 했고, 오프리치니나 지역 토지 소유자는 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러시아는 차르파 오프리치니키와 구 귀족들의 젬시치나로 양분되었다. 오프리치니나는 독자적 귀족회의, 행정 조직, 군대를 가졌다. 오프리치니키는 부유층 재산을 노리고 요인 숙청을 실행했다. 주요 표적은 모스크바 총대주교 필립, 노브고로드 대주교 피멘 등 고위 성직자, 스타리차 공작 블라디미르 등이었다. 1566년 전국 회의는 제도 폐지를 탄원했지만, 이반 4세는 탄원자 전원을 처형했다.
1570년 이반 4세는 노브고로드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리투아니아) 편에 서려 한다고 착각하여 유력자들과 가족 전체를 학살했다(노브고로트 학살). 1만 5천 명의 오프리치니키 군대를 편성하여 공격을 개시했고, 행군 중 마을들은 불태워지고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오프리치니키 군대는 1570년 1월 2일 노브고로드에 도착, 도시를 봉쇄했다. 노브고로드 대주교 피멘은 이반 4세를 맞이했지만, 황제는 대주교를 반역자라 욕하며 축복을 거부했다.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의 성체미사는 받았으나, 점심 식사 중 오프리치니키가 난입하여 유력자들을 체포하고 대성당을 약탈했다. 시내에서도 오프리치니키는 성직자, 유력자, 관리, 상인, 아내와 자식까지 연행하여 고문 후 살해했다. 여성과 아이들은 묶인 채 혹한의 호수에 버려졌다.
1월 2일 시작된 학살과 약탈은 2월에 멈췄지만, 시외 수도원으로 목표가 옮겨져 27곳 모든 수도원의 약탈과 살육이 계속되었다. 이후 다시 시내에서 일반 시민 대상 약탈이 재개되어 많은 수가 살해되었다. 노브고로드 학살 희생자는 3천 명 가까이 확인되었고, 피멘 대주교 등 모스크바로 연행 후 살해된 사람은 300명에 달했다. 징발한 곡물은 불태워져 생존자들은 기근에 시달렸다.
프스코프도 약탈 피해를 입었지만, 광인 니콜라이 덕분에 학살은 적었다. 이반 4세는 광인을 두려워하고 존경했다. 약탈은 피할 수 없었고, 시민들에게 강제 노역과 중과세가 부과되었다.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 약탈은 오프리치니키를 살육, 약탈 집단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이반 4세는 “공범자” 300명 중 180명에게 사면을 내렸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자애로운 아버지라고 불리지 않았다.
1570년 오스만 제국과 강화 조약을 체결했지만, 1571년 크림 칸국이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고 러시아를 침공, 5월에는 모스크바를 불태웠다(1571년 모스크바 대화재). 칸 데블레트 1세 기라이가 이끄는 크림 칸국군에 대해 오프리치니키 군대가 방어에 나섰지만, 타타르 기병에 궤멸되었다.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나 궁전으로 피신했다. 모스크바 방어는 귀족들의 젬시치나 군과 오프리치니키 군 합동으로 맡게 되었지만, 데블레트 1세 기라이는 속공으로 모스크바에 침입하여 학살을 자행했다. 약탈과 방화로 모스크바 시가지는 소실되었고, 크림 칸국은 시민 6만 명 살해를 공표했다는 기록이 있고, 동시대 기록에는 30만 명, 영국인 플레처 기록에는 80만 명 사망자가 기록되었다.
수도 멸망은 이반 4세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오프리치니나 제도의 실패를 깨닫게 했다. 이반 4세는 전국 회의를 소집, 젬시치나 군과 오프리치니키 군 지휘를 일원화했다.
1572년, 러시아군은 몰로디 전투에서 크림 칸국에 승리했다. 타타르인의 대규모 침입은 사라졌다. 같은 해,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나 폐지를 선언하고 간부들을 대량 처형하여 그 존재를 말살했다. 이반 4세는 1565년부터 장악했던 "비상 대권"을 내놓았다. 같은 해, 이반 4세는 안나 콜토프스카야와 2년 전 노브고로드 학살을 자행한 노브고로드를 신혼여행지로 삼았다.
2. 3. 6. 외교 정책
이반 4세는 영국,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들과 교역 및 수교 정책을 펼쳤다.[45] 1553년 리처드 챈슬러가 백해에 도착하여 모스크바에 상륙한 후, 모스크바 회사를 설립했다. 이반 4세는 이 회사를 통해 엘리자베스 1세와 서신을 교환했다.[45]1558년 발트해 연안의 리보니아를 공격하여 리보니아 전쟁을 일으켰으나, 스웨덴,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개입으로 전쟁은 장기화되었다.[45] 킵차크 칸국의 계승제국인 크림 칸국이 모스크바를 침략하고, 타타르 족도 러시아를 침략했으나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45] 1560년까지 흉년과 역병이 계속되었다.[45] 1571년 데블렛 기레이가 이끄는 크림 칸국 군대가 모스크바를 공격했고, 1572년 모로디 전투에서 멈출 때까지 침공은 계속되었다.[45] 이후 수십 년간 남부 국경지대는 노가이 오르다와 크림 칸국의 약탈을 당했다.[45]
1552년 카잔 칸국을 정복하고, 1554년과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칸국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했다.[46]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을 정교회 십자가 아래에 놓으라고 명령하기도 했다.[47][48][49] 1555년 시베리아 칸국의 야데가르와 노가이 칸국의 이스마일이 이반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558년 스트로가노프 가문에게 카마 강 유역 식민지 특허를 부여했고, 1577년경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를 고용하여 시베리아 정복을 시작했다.
1555년 잉글랜드와 통상 협정을 맺고, 잉글랜드 상인들에게 특혜를 주었다.[45] 1568년 러시아-오스만 전쟁이 발발했고,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결성되면서 전쟁은 불리하게 진행되었다.[45] 1570년 오스만 제국과 강화 조약을 체결했지만, 1571년 크림 칸국이 모스크바를 불태웠다.[45] 1572년 몰로디 전투에서 크림 칸국에 승리했다.[45]
1582년 얌-자폴리스키 조약을 체결하고, 1583년 플류사 조약을 체결하여 리보니아 전쟁을 종결했으나, 러시아의 국경선은 후퇴하고 발트해 무역 루트를 상실했다.[45]
2. 4. 생애 후반
이반 4세는 아들 이반 이바노비치를 실수로 살해한 후 죄책감에 시달리는 말년을 보냈다. 심신이 쇠약해져 통치도 침체되었다.[97] 타고난 불면증은 더욱 악화되어, 시종들은 드미트리와 이반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밤늦게 회랑을 배회하는 황제를 여러 번 목격했다.[98] 또한 황태자를 추도하기 위해 러시아 국내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등 해외 각지의 수도원에도 많은 기부를 했다.[98] 1960년대 초 소비에트 연방의 인류학자 미하일 게라시모프가 이반의 뼈를 조사한 결과, 척추에 많은 염류 침착물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말년의 이반은 염증으로 인한 심한 통증에 시달려 걷는 것조차 어려웠다.[98]1584년, 이반 4세는 측근과 체스를 두던 중 실신했고, 3월 18일에 발작을 일으켜 서거했다.[98] 뒤를 이어 지적 장애가 있어 후계자로 부적격하다고 여겨졌던 셋째 아들 표도르 1세가 즉위했고, 이반 4세의 유언에 따라 지명된 섭정단이 황폐해진 국가를 통치하게 되었다.
2. 4. 1. 노년기의 난폭함
아나스타샤가 죽은 후 이반 4세는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잦은 이혼과 재혼을 반복했으며, 여러 명의 첩을 들였다. 정교회는 이를 지적하며 이반 4세와 자주 갈등을 빚었다. 두 번째 부인 마리아는 9년 간의 결혼 생활 끝에 의문의 독살을 당했는데, 마리아가 살아있을 때 이반 4세가 폴란드 공주와의 결혼을 공공연히 언급했기 때문에 독살 의심을 받기도 했다.[97] 마리아 사후 2년 뒤, 이반 4세는 마르파 소바키나와 결혼했지만, 마르파 역시 결혼 3주 만에 갑작스러운 고열로 사망했다. 첫 아내 아나스타샤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떠올린 이반 4세의 광기는 더욱 심해졌다.[97]1579년, 이반 4세는 바실리아라는 여성과 결혼했으나, 바실리아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자, 이반 4세는 그 내연남들을 바실리아가 보는 앞에서 처형하고, 바실리아는 벽으로 막힌 회랑에 가두어 죽게 했다. 바실리아가 죽은 후에는 마리아 돌고루카야와 재혼했지만, 마리아 역시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지다가 발각되어 이반 4세에 의해 물에 빠져 죽었다. 그 후 이반 4세는 마리아 나가야와 재혼하여 아들 드미트리를 낳았지만, 드미트리는 태어날 때부터 간질 발작을 앓았다.[97]
일부 정교회에서는 이반 4세의 잦은 재혼과 첩을 들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일부 지역에서는 차르의 지배권을 거부하고 대주교의 지도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정교회는 이반 4세의 행동을 두고 성도덕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이반 4세는 성직자들을 처형하고 정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97]
말년에 이반 4세는 성격이 포악해져 잔인한 일들을 많이 저질렀다. 이에 반발한 그의 친족이자 군사령관이었던 쿠르프스키는 폴란드로 망명했다. 1581년 11월, 임신 중이던 며느리 엘레나가 얇은 옷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이반 4세에게 폭행을 당해 유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들 이반 왕자는 이 일로 아버지에게 분노했고, 격분한 이반 4세는 지팡이[97]로 아들을 때려 중태에 빠뜨렸다. 보리스 고두노프가 달려와 말렸지만 이미 늦었고, 아들은 3일 뒤에 숨을 거두었다. 이반 4세는 이후 수도자가 되었으나 3년 뒤에 사망했다.[98] 1584년 3월 28일, 이반 4세는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98]

2. 4. 2. 의문의 최후
아나스타샤 황후 사후 이반 4세는 심리적 안정을 찾지 못하고 여러 번 이혼과 재혼을 반복했으며, 많은 첩을 들였다. 이로 인해 교회와 자주 마찰을 빚었다. 두 번째 부인 마리아는 9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의문의 독살을 당했는데, 마리아 생전에 이반 4세가 폴란드 공주와의 결혼을 공공연히 언급했기 때문에 독살 의심을 받기도 했다.[97] 마리아가 독살된 후, 2년 뒤 마르파 소바키나와 결혼했지만, 마르파 역시 결혼 3주 만에 갑작스러운 고열로 사망했다. 첫 아내 아나스타샤의 의문사를 떠올린 이반 4세의 광기는 더욱 심해졌다.[98]1579년, 이반 4세는 바실리아라는 여성과 결혼했으나, 바실리아가 바람을 피우자 몇 달 뒤 내연남들을 처형하고 바실리아를 벽으로 둘러싸인 회랑에 가두어 죽게 했다. 바실리아 사후 바로 마리아 돌고루카야와 재혼했지만, 역시 바람을 피우다 발각되어 물에 빠져 익사했다. 이후 마리아 나가야와 재혼하여 아들 드미트리를 얻었으나, 드미트리는 간질 발작을 앓았다.
일부 정교회에서는 이반 4세의 잦은 재혼과 축첩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심지어 차르의 지배권을 거부하고 대주교의 지도를 따르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또한 정교회는 이반 4세의 행동을 성도덕이 희박하다고 비판했다. 이에 이반 4세는 성직자들을 처형하고 정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했다.
말년에 이반 4세는 성격이 난폭해져 잔혹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 이에 반발한 친족이자 군사령관인 쿠르프스키는 폴란드로 망명했다. 1581년 11월, 임신한 며느리 엘레나가 얇은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폭행하여 유산하게 만들었다. 분노한 아들 이반 황태자가 항의하자, 이반 4세는 지팡이[97]로 아들을 때려 중상을 입혔다.[98] 보리스 고두노프가 달려와 말렸지만 이미 늦었고, 아들은 3일 뒤 사망했다. 이반 4세는 아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수도자가 되었으나, 3년 뒤 1584년 3월 28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이반 4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체스를 두다 일어서던 중 발을 헛디뎌 사망했다는 설, 시종무관 이반 벨스키의 여동생을 겁탈하려다 벨스키와 보리스 고두노프에게 목 졸려 죽었다는 설 등이 있다.
2. 4. 3. 사망과 류리크 왕조의 종말
아나스타샤 황후에게서 여러 아들을 얻었지만, 장남 디미트리는 유모의 실수로 익사했고, 그 뒤를 이은 바실리 왕자는 이반 4세에게 맞아 죽었다.[68] 이반 4세의 뒤를 이은 이는 지적 장애가 있던 아들 표도르 1세였다. 사실상의 정치 권력은 차르 아내의 오빠였던 대귀족 보리스 고두노프의 손으로 넘어갔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농노가 1년에 한 번만 이동의 자유를 주어 섬기던 영주를 변경하는 유리의 날을 폐지했다.[71] 표도르 1세는 병약하여 요절했고, 막내아들 드미트리는 8살의 어린 나이에 살해당했다. 이후 표도르 1세의 처남(아내의 오빠)인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 자리를 승계하여 류리크 왕조는 종말하게 된다. 이후 보리스 고두노프는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를 자칭한 첫 번째 가짜 드미트리의 침공 중에 사망한다.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를 자칭한 사람은 총 3명으로, 그 중 첫 번째 가짜는 차르 자리까지 오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반 4세의 딸들 및 몇몇 서출 자녀들은 후손이 이어졌고, 이오시프 스탈린도 그의 후손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69]결국 가짜 드미트리 소동을 거쳐 한때 폴란드의 왕인 블라디슬라프가 1610년부터 1613년까지 러시아 차르 직에 있었다. 그 뒤 이반 4세의 왕비 아나스타샤의 남동생 니키타 로마노프의 손자인 미하일 1세가 즉위하여 로마노프 왕조를 열게 된다.
3. 유산과 평가
이반 4세는 뛰어난 시인이자 작곡가였다. 그의 정교회 전례 성가인 "성 베드로를 기리는 스티키론 1번"과 그의 편지 일부는 소련 작곡가 로디온 셰드린에 의해 음악으로 편곡되었다. 이 녹음은 최초의 소련 제작 CD로, 1988년 러시아 기독교 천년을 기념하여 발매되었다.[60][61]

이반 4세는 러시아의 정부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 현대 러시아 정치 조직의 특징을 확립했다.[74] 그가 만든 오프리치니나는 오직 그에게만 책임을 지는 기구로, 개인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보야르들의 전통적인 권력과 권리를 축소했다.[75] 이후 차르의 독재와 전제 정치가 러시아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76] 메스트니체스트보 제도를 우회하여 하급 귀족들 중 지지자들에게 권력을 주었다.[77] 제국의 지방 행정은 지역 및 중앙 임명 관리들을 결합했다. 이 시스템은 내구성이 있고 실용적이며 나중에 수정을 허용할 만큼 충분히 유연했다.[78]
폴란드에 대한 이반 4세의 원정은 군사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과 러시아의 무역, 정치 및 문화적 유대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를 주요 유럽 강국으로 만들려는 노력에서 이러한 유대 관계를 기반으로 했다. 이반 4세 사망 당시 제국은 남서쪽으로는 카스피해, 동쪽으로는 서시베리아에 이르렀다. 그의 남쪽 정복은 팽창주의적인 오스만 제국과 여러 갈등을 일으켰고, 그 영토는 발칸 반도와 흑해 지역으로 제한되었다.[79]
이반 4세의 경제 관리 체계는 그의 생애 동안과 그 이후에도 모두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빚에 쪼들린 정부를 물려받았고, 팽창주의 전쟁에 더 많은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점점 더 인기가 없고 부담이 되는 세금을 도입했다.[80] 연이은 전쟁으로 인력과 자원이 고갈되어 "파멸 직전"에 이르렀다.[81] 사후, 제국의 거의 파탄 난 경제는 류리크 왕조의 몰락에 기여하여 혼란 시대를 초래했다.
이반 4세의 폭발적인 성격과 전제적인 변덕은 차르의 지위를 지상의 어떤 권위에도 책임질 필요가 없고 오직 신에게만 책임지는 존재로 특징짓는 데 일조했다.[78] 차르의 절대주의는 19세기까지 심각한 도전을 거의 받지 않았다. 1917년 이전 그의 통치에 대한 가장 초기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기록은 역사가 니콜라이 카람진의 것이었는데, 그는 이반을 특히 1560년 이후 백성을 '고문한 자'로 묘사했지만, 그 이후에도 그의 성격에는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다고 믿었다. 1922년 역사가 로베르트 위퍼는 이반을 "평범한 백성을 사랑한 군주"로 재평가하고 그의 농업 개혁을 칭찬하는 전기를 썼다.[82]
1920년대, 소련의 역사 연구를 지배했던 미하일 포크로프스키는 오프리치니나의 성공을 대지주들에 대한 수십 년간의 계급 투쟁에서 소규모 토지 소유자와 도시민 편에 선 것에 돌렸고, 이반의 역할을 신흥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도구로 격하시켰다. 그러나 1941년 2월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사촌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개적으로 전파되는 새로운 숭배는 이반 착한, 오프리치니나, 잔혹함이다"라고 날카롭게 언급했다.[83] 요셉 스탈린은 위퍼의 전기를 읽고 이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표트르 대제처럼 러시아를 강화하고 확장한 강력한 지도자들을 소련 역사가들이 칭찬해야 한다고 결정했다.[84]
그 결과 작가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이반의 삶을 무대극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이반을 기리는 3부작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 두 프로젝트 모두 소련이 나치 독일과 전쟁 중이던 시기에 스탈린의 개인적인 감독을 받았다. 1943년 쿠르스크 전투 후 톨스토이의 희곡 각본과 에이젠슈타인의 첫 번째 영화 각본을 함께 읽고 에이젠슈타인의 버전을 칭찬했지만 톨스토이의 버전은 거절했다. 톨스토이는 독재자를 만족시키는 버전을 쓰는 데 1944년까지 걸렸다.[85] 에이젠슈타인은 "이반 뇌제 1부"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후속작 "보야르의 반란"은 양심의 가책을 겪는 인물을 묘사했기 때문에 스탈린을 화나게 했다. 스탈린은 에이젠슈타인에게 "이반 뇌제는 매우 잔혹했다. 그가 잔혹했던 것을 보여줄 수 있지만, 왜 잔혹해야 했는지 보여줘야 한다. 이반 뇌제의 실수 중 하나는 5대 가문을 끝까지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86] 이 영화는 1958년까지 상영 금지되었다.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이반 4세에게 성인을 추서하려는 운동이 벌어졌지만,[87] 러시아 정교회는 이에 반대했다.[88]
이반 뇌제의 첫 번째 동상이 2016년 러시아 오룔에서 공식적으로 공개되었다. 공식적으로 이 동상은 오룔 건립 450주년을 기념하여 제막되었는데, 오룔은 모스크바의 남쪽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요새로 건설된 약 31만 명의 인구를 가진 러시아 도시이다. 비공식적으로는 큰 정치적 함의가 있었다. 반대파는 이반 뇌제의 복권이 스탈린 시대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한다. 동상 건립은 가디언,[89] 워싱턴 포스트,[90] 폴리티코[91] 등 국제 언론에서 광범위하게 보도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동상 건립을 공식적으로 지지했다.[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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