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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규 (19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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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문규는 1906년생으로,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경성제국대학 졸업 후 학자로서 토지 문제와 농업 정책을 연구했으며, 성대반제운동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중앙위원,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장을 역임했고, 남로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했다. 북한 정권 수립 후에는 농림상을 시작으로 국가검열상, 지방행정상, 내무상, 노동당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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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규 (190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8년 9월 북한 초대 내각의 박문규. 세 번째 열의 오른쪽 첫 번째
1948년 9월. 박문규는 북한 내각과 함께한다. 세 번째 열의 오른쪽 첫 번째
출생1906년
출생지게이쇼쿠호쿠도 (경상북도), 일본 제국
사망?
학력
학교대구고등학교
대학교게이조 제국대학
정치 경력
소속 정당조선로동당
직책토지행정상
내각제3기 내각
임기 시작1962년 10월 23일
임기 종료1967년 12월 16일
수상김일성
전임석산
후임노병우
직책지방행정상
내각제2기 내각
임기 시작1956년 5월 11일
임기 종료1959년 8월 31일
수상김일성
전임김익선
후임직위 폐지
직책농업상
내각제1기 내각
임기 시작1952년 11월 29일
임기 종료1954년 3월 23일
수상김일성
전임직위 신설
후임김일

2. 생애

박문규는 1906년에 태어나 1925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법문학부에 진학했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1931년 모교 조교로 있으면서 성대반제운동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44년 여운형이 이끌던 건국동맹에 가입하여 맹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기획부장,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위원을 지냈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장을 거쳐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월북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1948년 9월 9일 농림상에 발탁되었다.[3] 이후 1957년 9월 20일 국가검열상, 1959년 지방행정상, 1962년 내무상, 1970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다.

2. 1. 학자로서의 삶

1925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동 대학 법문학부에 진학, 1929년 졸업하였다. 1931년 모교인 경성제국대학 조교로 재직 중 성대반제운동사건(城大反帝運動事件)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조선 말기 경제적 토지 조사 사업을 분석하는 등 농업 관련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1]

2. 1. 1. 경성제국대학 시절

1925년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이 대학 법과에 진학했다. 1927년 입학 동기인 이강국, 최용달과 함께 학내 서클 '경제연구회'에 참여하여 조선 경제, 특히 농업 경제 연구에 몰두했다. 1929년 대학 졸업 후 강사로 재직하며 연구를 계속하던 중, 1931년 성대항일결사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조사를 받았다.[1]

조선 말기 경제적 토지 조사 사업을 분석하며, 봉건 사회에서 이미 토지의 봉건적 소유에서 현대적 소유의 싹을 보았지만,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요구에 따라 실시된 토지 조사 사업(1910~1918)에 의해 조선에 확립되었다고 묘사했다. 1931년 경성제국대학 조교로 재직 중 성대항일결사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1]

2. 1. 2. 성대반제운동사건

1925년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동 대학 법과에 진학했다. 1927년 입학 동기인 이강국, 최용달과 함께 학내 서클 '경제연구회'에 참여하여 조선 경제, 특히 농업 경제 연구에 몰두했다. 1929년 대학 졸업 후 강사로 재직하며 연구를 계속하던 중, 1931년 성대항일결사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조사를 받았다.[1]

이후 경성제국대학 조교로 재직 중 다시 성대항일결사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1]

2. 2. 해방 후 정치 활동

1945년 8·15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기획부장에 선임되었고, 9월 건준이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으로 개편되자 중앙위원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말 남조선로동당이 창당되자 1948년 8월 월북하기 직전까지 남로당 중앙위원으로 있었다.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허헌 등과 월북하였다.[3]

2. 2. 1.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활동

8·15 광복 직후 고려대학교 상임위원으로 임명되었지만,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기획위원장과 조선인민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1] 이후 1946년 2월 결성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선전부장, 부위원장, 상무위원, 토지 농업 문제 연구원, 식량 연구원으로 활동했다.[1]

1945년 11월부터 1946년 5월까지 그는 「토지 농업 문제에 관한 보고서」, 「농민 운동의 행동 강령」, 「토지 문제의 공동 해결」, 「반민주당의 토지 정책」, 「민주주의와 토지 개혁」 등 토지 문제와 관련된 보고서를 조선인민위원회를 통해 발표했다.[1]

2. 2. 2. 조선인민공화국 참여

8·15 광복 직후 박문규는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기획위원장과 조선인민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1] 그는 1945년 11월 "토지 농업 문제에 관한 보고서", "농민 운동의 행동 강령"을 준비했고,[1] 1946년에는 3월 "토지 문제의 공동 해결",[1] 4월 "반민주당의 토지 정책",[1] 5월 "민주주의와 토지 개혁" 등의 보고서를 조선인민위원회에서 준비했다.[1]

2. 2. 3. 남조선로동당 활동

8·15 광복 직후 고려대학교 상임위원으로 임명되었지만,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기획위원장과 조선인민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46년 2월 결성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선전부장, 부위원장, 상무위원, 토지 농업 문제 연구원, 식량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8월, 남조선로동당 중앙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북한 정권 수립 직전에 월북했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수립된 후, 선출되어 단원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으며, 북한 내각에서 농림상(農林相한국어)을 역임했다.[2]

2. 3. 북한 정권 수립 참여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사진. 박문규는 농림상으로, 제3열 오른쪽에서 첫 번째에 있다.


1945년 8․15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기획부장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위원을 지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장을 거쳐, 같은 해 말 남조선로동당 창당 후 1948년 8월 월북 직전까지 남로당 중앙위원으로 있었다.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허헌 등과 함께 월북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과 함께 농림상에 발탁되었고(1948년 9월 9일)[3], 이후 1957년 9월 20일 국가검열상, 1959년 지방행정상, 1962년 내무상을 역임했다.

2. 3. 1. 농림상 재임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수립된 후, 북한 내각에서 농림상(農林相)을 역임했다.[2]

2. 3. 2. 기타 주요 직책 역임

1956년 4월 박문규는 국가검열상을, 1959년에는 지방행정상을 역임했으며, 1962년에는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2]

2. 3. 3. 조선로동당 중앙위원 활동

박문규는 1948년 8월 북한 정권 수립 직전까지 남조선 로동당의 중앙 위원으로 활동했다.[2]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수립된 후에는 단원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북한 내각에서 농림상을 역임했다.[2] 1956년 4월에는 국가 검열상을, 1959년에는 지방 행정상을 역임했으며, 1962년에는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6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재선되었고, 1970년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3. 연구 업적 및 평가

박문규는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조선 경제, 특히 농업 경제와 토지 문제 연구에 깊이 관여했으며, 광복 이후 조선인민위원회에서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고, 1946년 『조선 토지 문제 연구』를 발간했다.[1]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기획부장,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위원,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 1948년 8월 월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농림상에 발탁되었다.[3] 이후 국가검열상, 지방행정상, 내무상, 1970년 노동당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다.

3. 1. 학문적 업적

박문규는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조선 경제, 특히 농업 경제와 토지 문제 연구에 깊이 관여했다. 1927년 대학 내 '경제연구회'에서 이강국, 최용달과 함께 연구를 진행했으며, 조선 말기 토지 조사 사업을 분석하여 봉건 사회에서 근대적 소유로의 이행 과정을 탐구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요구에 따라 실시된 토지 조사 사업(1910~1918)이 조선의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1]

광복 이후에는 조선인민위원회에서 토지 농업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1946년 10월에는 『조선 토지 문제 연구』를 발간하여 학문적 업적을 집대성했다.[1]

3. 1. 1. 토지 문제 연구

1925년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동 대학 법과에 진학했다. 1927년 입학 동기인 이강국과 최용달과 함께 학내 서클 '경제연구회'에 참여하여 조선 경제, 특히 농업 경제 연구에 몰두했다.[1]

그는 농업 관련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 그는 조선 말기의 경제적 토지 조사 사업을 분석하며, 봉건 사회가 이미 토지의 봉건적 소유에서 현대적 소유의 싹을 보았지만,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요구에 따라 실시된 토지 조사 사업(1910~1918)에 의해 조선에 확립되었다고 묘사했다.[1]

1946년 10월, 박문규는 『조선 토지 문제 연구』를 발간했다. 이 책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로 발표되었던 이전의 토지 조사 사업에 관한 논문이 실렸다.[1]

그는 1945년 11월 「토지 농업 문제에 관한 보고서」, 「농민 운동의 행동 강령」, 1946년 3월 「토지 문제의 공동 해결」, 4월 「반민주당의 토지 정책」, 같은 해 5월 「민주주의와 토지 개혁」 등 조선인민위원회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참여했다.[1]

3. 1. 2. 농업 정책 연구

박문규는 1927년 경성제국대학 학내 서클 '경제연구회'에서 이강국, 최용달과 함께 조선 경제, 특히 농업 경제 연구에 몰두했다.[1] 그는 조선 말기의 경제적 토지 조사 사업을 분석하며, 봉건 사회에서 이미 현대적 토지 소유의 싹이 보였지만,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요구에 따라 실시된 토지 조사 사업(1910~1918)에 의해 조선에 확립되었다고 묘사했다.[1]

광복 직후, 그는 1945년 11월 조선인민위원회에서 「토지 농업 문제에 관한 보고서」, 「농민 운동의 행동 강령」, 1946년 3월 「토지 문제의 공동 해결」, 4월 「반민주당의 토지 정책」, 5월 「민주주의와 토지 개혁」 등 농업 정책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참여했다. 1946년 10월에는 『조선 토지 문제 연구』를 발간했는데, 이 책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로 발표되었던 토지 조사 사업에 관한 논문이 실렸다.[1]

3. 2. 정치적 활동에 대한 평가

박문규는 8·15 광복 직후 고려대학교 상임위원을 지냈으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기획위원장, 조선인민중앙위원회 위원장 등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46년 2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선전부장, 부위원장, 상무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토지 농업 문제 연구원과 식량 연구원으로도 일했다. 같은 해 10월 『조선 토지 문제 연구』를 펴냈다.[2]

1945년 11월부터 1946년 5월까지 토지 문제와 농민 운동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1948년 8월 남조선로동당 중앙 위원을 거쳐, 같은 해 9월 북한 정권 수립 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북한 내각에서 농림상을 시작으로[2] 국가 검열상, 지방 행정상,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6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고, 1970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3. 2. 1. 긍정적 평가

박문규는 일제강점기부터 항일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8·15 광복 이후에는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등에서 활동하며 통일된 민족 국가 수립에 힘썼다. 특히 토지 문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북한 내각에서 농림상을 역임하며 농업 정책을 주도하였다.[2]

북한 정권 수립 초기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국가 검열상, 지방 행정상,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북한 사회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또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3. 2. 2. 비판적 평가

박문규는 남조선로동당 중앙 위원과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여러 장관직을 역임하는 등 북한 체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북한 체제를 옹호하고 남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히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점 등은 그가 북한 체제 유지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준다.[2]

참조

[1] 문서 박문규(朴文奎) http://encykorea.aks[...]
[2] 뉴스 Completion of the Kim Il Sung Cabinet https://newslibrary.[...] Kyunghyang Newspaper 1948-09-11
[3] 뉴스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48-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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