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릭파판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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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릭파판 해전은 1942년 1월, 일본군이 네덜란드령 보르네오 발릭파판을 점령하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발릭파판은 전략적 요충지로, 일본군은 이곳의 정유 시설을 확보하려 했다. 네덜란드군은 시설 파괴 후 게릴라전을 계획했으나, 일본군의 예상보다 빠른 공격으로 인해 실패했다. 미 해군은 일본 수송선단을 공격했으나, 목표 달성에는 미흡했다. 일본군은 발릭파판을 점령하고 정유 시설을 복구하여 자원 확보에 성공했다. 이 전투는 미국 해군의 동남아시아 수상전 승리라는 의의를 가지며, 일본군에게는 전략적 이점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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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릭파판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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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분쟁 | 발릭파판 해전 (1942년) |
전체 |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전역 |
날짜 | 1942년 1월 23일 – 1942년 1월 25일 (연합군 공습은 1월 30일까지 계속됨) |
장소 |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발릭파판 |
결과 | 일본군의 상륙 성공 연합군의 전술적 해상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네덜란드 |
지휘관 | |
지휘관 1 | 코르넬리스 판 덴 호헨반트 폴 H. 탤벗 |
지휘관 2 | 시즈오 사카구치 니시무라 쇼지 |
병력 규모 | |
병력 1 | 약 1,100명 |
병력 2 | 약 6,600명 |
피해 규모 | |
피해 1 | 병력 탈영 또는 항복 (200명만 대피) 구축함 1척 경미한 손상 잠수함 1척 심각한 손상 |
피해 2 | 보병 47명 사망 최소 121명의 해군 사망 수송선 5척 침몰 수송선 2척 손상 초계정 1척 대파 수상기 모함 1척 손상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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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전 정보 | |
해전 이름 | 바리쿠파판 해전 (バリクパパン沖海戦) |
작전 | 남방 작전 |
시기 | 1942년 1월 24일 |
장소 | 보르네오섬 발릭파판 해역 |
결과 | 연합군의 승리 |
일본 해군 전력 | |
일본 해군 전력 | 경순양함 1척 구축함 9척 소형 함정 10척 수송선 16척 |
지휘관 | 니시무라 쇼지 소장 |
연합군 전력 | |
연합군 전력 | 구축함 4척 잠수함 2척 항공기 9기 |
지휘관 | 폴 H. 탤벗 중령 |
일본군 피해 | |
일본군 피해 | 수송선 5척 침몰 초계정 1척 대파 후 포기 수송선 2척 손상 |
연합군 피해 | |
연합군 피해 | 잠수함 1척 대파 구축함 1척 소파 |
2. 배경
1942년 1월 23일 밤부터 1월 24일 새벽까지 보르네오 섬의 유전지대 발릭파판을 점령하려는 일본군 수송선단과 이를 호위하는 제4수뢰전대(사령관 니시무라 쇼지 소장)를 연합군 구축함과 잠수함이 습격하면서 발릭파판 해전이 벌어졌다.[74][75][76]
일본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발릭파판을 전략적, 전술적 요충지로 판단했다.[4][5] 발릭파판의 정유 시설은 일본의 석유 생산에 필수적이었고, 보르네오 내부 유전에 접근하기 위해서도 발릭파판 점령이 필요했다. 또한, 남부 보르네오와 자바 섬 점령에 필요한 항구와 망가르 비행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일본의 공격에 대비하여 1924년 6개 보병 여단을 배치하는 등 방어를 강화했다.[1] 1933년에는 증원군이 파견되기도 했지만, 이후 발릭파판 주둔군은 단일 보병 대대로 축소되었다.[1]
타라칸 점령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자, 일본군은 발릭파판 점령 계획을 앞당겼다.[4] 일본군은 정유 시설을 온전히 확보하려 했지만, 네덜란드군은 이미 시설 파괴를 시작한 뒤였다.
2. 1. 전략적 중요성
발릭파판은 전쟁 전 보르네오에서 네덜란드 경제 활동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시내에는 원유 처리 공장 2개, 파라핀 및 윤활유 공장, 크래킹 공장, 황산 공장, 정유 공장, 주석 및 드럼 공장, 그리고 여러 작업장이 있었다.[1] 가장 중요한 것은 발릭파판이 타라칸의 8배에 달하는 석유 저장 탱크를 갖춘 정유소를 보유하고 있었고, 전쟁 전까지 최대 7,000명의 현지 노동자와 100명의 유럽인 고용인을 고용하여 연간 최대 100만ton의 석유를 생산했다는 점이다.[2][3]일본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정복하려는 계획에서 발릭파판은 전략적, 전술적 중요성을 모두 지녔다. 전략적으로, 발릭파판의 정유소는 일본의 자체 석유 생산에 필수적이었다. 발릭파판을 점령함으로써 일본은 보르네오 내부에 있는 대규모 유전에 직접 접근할 수 있었다. 전술적으로, 이 도시에는 남부 보르네오 점령과 자바 자체를 장악하는 데 중요한 항구와 비행장(망가르)이 있었다.[4][5]
2. 2. 네덜란드군의 방어 계획
발릭파판은 전쟁 전 보르네오에서 네덜란드 경제 활동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시내에는 원유 처리 공장, 파라핀 및 윤활유 공장, 크래킹 공장, 황산 공장, 정유 공장, 주석 및 드럼 공장, 그리고 여러 작업장 등이 있었다.[1] 특히 타라칸의 8배에 달하는 석유 저장 탱크를 갖춘 정유소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전쟁 전까지 최대 7,000명의 현지 노동자와 100명의 유럽인을 고용하여 연간 최대 100만 톤의 석유를 생산했다.[2][3]네덜란드는 일본의 군사적 공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시설 보호를 위해 방어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발릭파판 유전, 셈보자, 상가 상가(사마린다는 추가 3개 여단 지원) 유전을 방어하기 위해 6개 보병 여단이 배치되었다. 1933년 태평양의 긴장이 고조되자 대대 본부와 2개 중대가 발릭파판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4개월 후 증원군은 자바로 돌아갔고 이후 발릭파판 주둔군은 단일 보병 대대로 축소되었다.[1]
일본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정복하려는 계획에서 발릭파판은 전략적, 전술적 중요성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전략적으로 발릭파판의 정유소는 일본의 자체 석유 생산에 필수적이었고, 발릭파판을 점령함으로써 일본은 보르네오 내부에 있는 대규모 유전에 직접 접근할 수 있었다. 전술적으로는 남부 보르네오 점령과 자바 자체를 장악하는 데 중요한 항구와 비행장(망가르)이 있었다.[4][5]
발릭파판 주둔 네덜란드군은 도시, 특히 유전 시설을 기습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고 시설 파괴에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도시가 적의 손에 넘어갈 것으로 보이면, 병력은 내륙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해야 했다. 시설 파괴를 위해 네덜란드 폭파 부대는 발릭파판과 삼보자(Sambodja)에 각각 3시간과 8시간을 배정했으나, 폭파 훈련 결과 적절하게 파괴하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나타났다.[9]
방어 준비를 위해 반 덴 후겐반트(van den Hoogenband)는 망가르 비행장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클란다산(Klandasan)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두 번째 방어선은 무선 기지(Radio position)를 둘러쌌으며, 세 번째 방어선(Rapak position)은 게릴라전을 위해 내륙으로 퇴각하는 병력을 엄호하도록 건설되었다.[9]
적의 상륙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 해군(Koninklijke Marine) 기뢰 부설함인 ''고우덴 레우(Gouden Leeuw)'', ''엘란드 드부아(Eland Dubois)'' 및 ''수메네프(Soemenep)''는 1939년 9월부터 1941년 12월까지 발릭파판 만으로 접근하는 해역에 290개의 기뢰를 부설했다.[10]
게릴라전을 준비하기 위해 반 덴 후겐반트는 발릭파판에서 약 6~9km 떨어진 곳에 약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를 설치했다. 타라칸 함락 직후, 그는 발릭파판 민간인을 이 대피소로 대피시켰다. 또한, 게릴라전 기간 동안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와인 강(Wain River)과 멘타위르(Mentawir)의 유류 펌프장 근처와 도시에서 10km 간격으로 강둑에 식량 창고를 건설했다.[11][12]
2. 3. 일본군의 공격 계획
1942년 1월 10일, 보르네오의 타라칸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어서 발릭파판 상륙 작전을 시작했다. 1월 21일 저녁, 니시무라 쇼지 소장이 지휘하는 제1호위대(제4수뢰전대 기함)와 수송선단 36척이 타라칸을 출발했다.[128][129]제1호위대는 경순양함 1척(나카), 구축함 9척(무라사메, 유다치, 하루사메, 사미다레, 아사구모, 나츠구모, 미네구모, 우미카제, 카와카제), 소해정 4척, 구잠정 3척, 경비정 3척, 그리고 수송선 16척(쓰루가마루, 리파루르마루, 니쇼마루, 에히메마루, 아사히야마마루, 니세마루, 구마카와마루, 스마노우라마루, 하바나마루, 한코마루, 세무마루, 쿠레타케마루, 킨야스야마마루, 후지카게마루, 다쓰노카미마루, 미나미야마루)으로 구성되었다.
일본군은 발릭파판섬의 정유 시설을 온전히 확보하려 했으나,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130]
1월 22일, 선단은 마카사르 해협에 진입했지만, 타라칸섬의 제23항공전대로부터 강우로 인해 22일과 23일에는 비행장을 사용할 수 없어 전투기 엄호가 불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제24구축대(우미카제, 카와카제)는 별동대로 먼저 출발했다. 1월 23일 저녁, 쌍발 폭격기 9기와 경폭격기 4기의 공습으로 해군 운송선 '다쓰노카미마루'가 손상되었다.[131] 구축함 '카와카제'는 적 잠수함을 탐지하여 폭뢰 공격을 실시했고, 한 시간 넘게 공습이 이어졌다.[131] 19시 30분, '미나미야마루'가 네덜란드군의 B-10 폭격기 공격으로 피탄되어 휘발유에 불이 붙어 선체를 포기했다.[131][132] 승무원들은 구축함 '미네구모'에 구조되었다.[133] 밤이 되어 선단은 발릭파판 정박지에 도착했고, 제2구축함대(무라사메, 하루사메, 사미다레, 유다치)가 정박지 소해를 실시했다.[131]
1월 24일, 제1호위대는 정박지 경계 진형으로 전환 중이었고, 제2구축함대는 정박지 남쪽 몇 해리 떨어진 곳에서 소해색을 설치하고 있었다.[131] 제4수뢰전대 기함(경순양함) '나카'는 '쓰루가마루' 남서쪽 약 1km 지점에 정박해 있었는데, 00시 35분경 어뢰정(실제로는 네덜란드 잠수함 K-18)을 발견하고 어뢰를 피했지만, 이 어뢰가 '쓰루가마루'에 명중하여 침몰했다.[134][135] 니시무라 쇼지 사령관은 제30소해 부대에 구조를 명령하고, 제9구축대, 제31구잠대, 초계정, 제11소해대에 각각 선단 주변 경계를 지시했다.[131] '나카'는 정박지 동쪽 5km 부근에서 경계를 실시했고, 제9구축대에 계속 명령을 내렸다.[131] 제2구축함대는 '나카', '아사구모', '나츠구모', '미네구모'와 함께 외부를 순찰했다. 오전 1시 40분, 1차 상륙 부대가 출발했다.
이에 앞서 연합군 ABDA 함대 사령부(사령관 토마스 C. 하트)는 일본군의 다음 목표를 발릭파판으로 예상하고 타라칸 해에서 마카사르 해협 남부에 미 잠수함 6척과 네덜란드 잠수함 2척을 배치했다. 수상 함대도 파견했지만, 항공 지원이 없어 일본군 수송선단을 발견하지 못하고 연료 보급을 위해 귀환해야 했다.
발릭파판은 전쟁 전 보르네오에서 네덜란드 경제 활동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시내에는 여러 정유 관련 시설과 작업장이 있었다.[1] 발릭파판은 타라칸의 8배에 달하는 석유 저장 탱크를 갖춘 정유소를 보유했고, 전쟁 전까지 많은 노동자와 고용인을 고용하여 연간 최대 100만 톤의 석유를 생산했다.[2][3]
네덜란드는 일본의 공격 가능성을 고려하여 1924년에 6개 보병 여단을 배치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1933년에는 대대 본부와 2개 중대가 파견되었으나, 이후 발릭파판 주둔군은 단일 보병 대대로 축소되었다.[1]
일본에게 발릭파판은 전략적, 전술적 중요성을 모두 지녔다. 발릭파판의 정유소는 일본의 자체 석유 생산에 필수적이었고, 발릭파판 점령은 보르네오 내부의 유전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발릭파판에는 남부 보르네오 점령과 자바 장악에 중요한 항구와 비행장(망가르)이 있었다.[4][5]
타라칸 점령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자, 일본군은 발릭파판 점령 날짜를 앞당겼다. 그들의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4]
# 적을 섬멸하고 정유 시설 파괴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 점령 후 비행장은 자바 침공에 사용될 것이다.
# 주력 부대는 비행장 근처에 상륙하여 즉시 점령한다. 부대의 일부는 항구 아래 강을 따라 은밀히 이동하여 적 후방을 기습하고, 정유 시설 파괴를 최대한 막는다.
# 발릭파판 점령 후 상가상가 유전 지역을 소탕하고 확보한다.
# 발릭파판을 남부 보르네오 군정의 중심지로 만들 준비를 한다.
타라칸 비행장 준비 지연으로 인해 발릭파판 상륙은 1월 21일에서 1월 24일로 연기되었다. 이 연기로도 타라칸 비행장을 수송기에 사용할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여 공수 부대를 이용한 발릭파판 공격 계획은 폐기되었다.[13][14]
일본은 네덜란드 방어군이 발릭파판의 유전을 파괴하려 한다고 우려하여, 정유소를 파괴할 경우 방어군과 민간인 모두에게 보복이 가해질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네덜란드 전쟁 포로들을 석방할 계획을 세웠다.[4]
일본군은 네덜란드군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하기 위해 게라르트 레오나르트 레인더호프 대위, 시몬 데 발 중령, 헨드리쿠스 콜레인의 아들인 안톤 콜레인 대위를 투입했다. 1월 16일, 그들은 인도네시아인 선장과 세 명의 일본어 통역관[4]과 함께 ''파르지팔''호를 타고 발릭파판으로 향했다.
네덜란드 해군 항공대(MLD) 소속 도르니에 Do 24 수상 비행기 두 대가 1월 19일 ''파르지팔''을 발견했다. 콜레인은 일본 국기를 찢고, 레인더호프는 네덜란드 국기를 흔들었다. 도르니에기는 다음 날 돌아와 콜레인과 레인더호프를 태워 발릭파판으로 날아가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반 덴 호겐반트는 즉시 발릭파판의 모든 유정, 정유소 및 항만 시설 파괴 명령을 내렸다. 파괴는 1월 18일에 이미 시작되었다. 루이즈 유전에서는 유정 튜브를 해체하고 TNT로 케이싱 스트링을 파괴했다.[18]
발릭파판 자체에서는 증류기와 증기 보일러를 파괴했고, 약 1일 반 정도가 걸렸다. 그 후, 지역 전체와 항구 자체에서 시설 파괴가 계속되었다. 휘발유 드럼에 불을 붙여 기름을 태우고, 공장을 폭파했으며, 파라핀 왁스 공장, 포장된 윤활유 드럼 창고, 염수 펌프장 등이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되었다. 판단사리 공장의 주석 공장도 불태워졌다. 파괴 작업은 실험실, 탱크 농장 및 발전소 파괴로 끝났고, 연쇄 폭발로 도시 전체의 창문이 산산조각났다.[19] 1월 20일 밤, 파괴로 인한 화재는 100 km 이상 떨어진 곳에서도 보였다.[20]
1월 21일 17:00, 일본의 침공 함대는 타라칸을 출발하여 발릭파판으로 향했다. 같은 날 MLD 도르니에기가 함대를 발견했지만, 악천후로 인해 추적할 수 없었다. 다음날, 미국 해군 잠수함들이 함대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네덜란드 잠수함 ''K-XIV''와 ''K-XVIII''도 합류했다. ''Sturgeon''은 호송선에 여러 척의 어뢰를 발사했지만, 피해는 확인되지 않았다.[25][26][27]
1월 23일, 미국 PBY 카탈리나 수상 비행기가 함대를 발견하고 추적했다. 네덜란드 Martin B-10 폭격기(총 19대)가 함대를 공격했다. 3차 공격에서 네덜란드 비행기는 가와카제와 수송선 ''다쓰노카미마루''에 경미한 피해를 입히고 수송선 ''Nana Maru''를 격침시켰다. 마틴 폭격기 1대가 격추되었다.[28][29]
이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22:30에 일본군은 발릭파판에 상륙을 시작했다. 1월 24일 01:40에 사카구치 시즈오 장군의 부대가 상륙정에 탑승하여 해변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30]
1942년 1월 10일부터 12일까지 보르네오섬타라칸을 공략한 일본군은[77][80], 이어서 보르네오섬의 발릭파판에 상륙 작전을 개시하였다. 발릭파판 공략 작전은 일본 해군 (란인 부대, 지휘관 다카하시 이사미)과 일본 육군 (제56사단 사카구치 지대)의 합동 작전이었다.[77][76]
그러나 타라칸에서는 기뢰의 소해에 시간이 걸리고, 점령한 비행장도 불량하여 발릭파판에 대한 공정 작전은 단념하게 되었다.[76][81] 발릭파판 상륙 예정일은 20일부터 24일로 연기되었다.[75][77][81] 한편, 일본군은 발릭파판 공략과 병행하여 술라웨시섬 남부의 켄다리 공략과 세람섬암본 공략을 수행하게 되었다.[75][82] 켄다리 공략은 일본 해군 단독 작전으로, 동방 공략 부대 (제5전대 사령관 다카기 다케오, 제2수뢰전대 사령관 다나카 라이조)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75]
1월 21일 저녁, 제4수뢰전대를 기간으로 하는 제1호위대 (지휘관 니시무라 쇼지/제4수뢰전대 사령관)와 수송선단 16척 (육군 8척, 해군 8척)[83]은 타라칸을 출격했다.[84][85] 선단은 8노트로 남하를 시작했다.
발릭파판의 정유소를 무사히 확보하기 위해 코만도 작전이 실시되었으나,[81][86] 이것은 실패했다.[87]
22일, 선단은 마카사르 해협에 들어섰으나, 타라칸의 제23항공전대로부터 "강우로 인해 22일, 23일 비행장 사용 불가, 전투기 엄호 불가"라는 연락을 받았다.[88] 제1호위대 중 제24구축대의 구축함 2척 (우시오, 하마카제)은 도중부터 별동대 (하바나마루, 한코마루)를 호위하며 선행했다.[83][89]
1월 23일 새벽, 미군 잠수함 스터전은 "우시오"에 어뢰 4발을 발사했으나 명중하지 않고, 폭뢰로 반격당했다.[73]
같은 날 저녁,[90] 쌍발 폭격기 9기·경폭격기 4기의 공습을 받아 해군 운송선 "다쓰노카미마루"가 손상되었다.[83][91] 이어서 구축함 "하마카제"가 적 잠수함을 탐지하여 폭뢰 공격을 실시하고, 동시에 한 시간 이상에 걸친 공습을 받았다.[91]
19시 30분, "미나미야마루" (제11항공함대용 연료 탑재)[83]가 네덜란드군의 B-10 폭격기의 공격을 받아 피탄 염상, 적재된 가솔린에 불이 붙어 선체 포기되었다.[91][92] 승무원은 "미네구모"에 수용되었다.[93]
밤이 되자 선단은 발릭파판 정박지에 도착, 제2구축대의 구축함 4척 (무라사메, 하루사메, 사미다레, 유다치)이 정박지 소해를 실시했다.[91]
1월 24일 날짜 변경 시, 제1호위대는 정박지 경계 진형으로 이행하고 있었으나, 제2구축대는 정박지 남방 수 해리에서 소해색을 양수하고 있었다.[91] 제4수뢰전대 기함/경순 "나카"는 제1정박지의 "쓰루가마루" 남서쪽 약 1km에 정박해 있었는데, 00시 35분 전후에 어뢰정[94] (실제로는 네덜란드 잠수함 K-18)을 발견, 어뢰 자취를 확인하고 함수를 간신히 회피했으나, 이 어뢰가 "쓰루가마루"에 명중했다.[73][95] 어뢰 명중으로 인해 "쓰루가마루"는 침몰했다.[83]
니시무라 쇼지 사령관은 제30소해대 (제17, 제18호 소해정)에 구조를 명하고, 제9구축대 (아사구모, 미네구모, 나쓰구모)는 선단 동방 3km를, 제31구잠대는 선단 서방을, 초계정은 선단 남방을, 제11소해대는 선단 북방을, 각각 경계하도록 명했다.[91] "나카"는 정박지 동방 5km 부근을 행동하며 경계를 실시하고, 제9구축대에 속행을 명했다.[91] 제2구축대는 4척 (나카, 아사구모, 나쓰구모, 미네구모)의 더 바깥을 초계하고 있었다.[91]
오전 1시 40분, 제1차 상륙 부대 (구메 대대, 야마모토 연대 주력)가 대발동정 (대발 10척, 소발 10척)을 타고 출발, 오전 2시 40분에 상륙에 성공했다.[83]
3. 전투 서열
일본군 - 사카구치 부대 (지휘관: 사카구치 시즈오 소장)[6] | |||
---|---|---|---|
기습 부대 | 비행장 점령 부대 | 돌격 부대 | 기타 부대 |
일본군 - 서부 공격 부대 (지휘관: 니시무라 쇼지 소장, 순양함 나카 탑승)[7] | ||
---|---|---|
제4구축대 | 항공대 | 기지 부대 |
네덜란드군 - 발릭파판 주둔군 (제6 KNIL 보병대대, 지휘관: 코르넬리스 판 덴 호겐반트 중령)[8] | ||
---|---|---|
보병 | 포병 | 기타 부대 |
미국군 - 제59구축함전대 (사령관: 폴 H. 탤벗)[115] |
---|
- 네덜란드군: 잠수함 2척
3. 1. 일본군
1942년 1월 10일 보르네오의 타라칸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보르네오 발릭파판에 상륙 작전을 시작했다. 1월 21일 저녁, 니시무라 쇼지 소장이 지휘하는 제1호위대와 수송선단 36척이 타라칸을 출발했다.[128][129]제1호위대의 주요 함선은 다음과 같다.
함종 | 척수 | 함명 |
---|---|---|
경순양함 | 1 | 나카 |
구축함 | 9 | 무라사메, 유다치, 하루사메, 사미다레, 아사구모, 나쓰구모, 미네구모, 우미카제, 가와카제 |
소해정 | 4 | - |
구잠정 | 3 | - |
경비정 | 3 | - |
수송선 | 16 | 쓰루마루, 리파루르마루, 니쇼마루, 에히메마루, 아사히야마마루, 니세마루, 구마카와마루, 스마노우라마루, 하바나마루, 한코마루, 세무마루, 쿠레타케마루, 킨야스야마루, 후지카게마루, 다쓰노카미마루, 미나미야마루 |
1월 22일 선단은 마카사르 해협에 들어갔지만, 타라칸섬의 제23항공전대로부터 강우로 인해 22일과 23일 비행장 사용이 불가하여 전투기 엄호를 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제24구축대(우미카제, 가와카제)는 별동대로 먼저 출발했다. 1월 23일 저녁, 일본군 수송선단은 공습을 받았고, ‘다쓰노카미마루’가 손상을 입었다. 구축함 ‘가와카제’는 잠수함을 탐지하고 폭뢰 공격을 실시했으며, ‘미나미야마루’는 피탄되어 선체가 포기되었다.[131][132]
1월 24일, 제1호위대는 정박지 경계 진형으로 전환 중이었고, 제2구축함대는 정박지 남쪽에서 소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카’는 어뢰정을 발견하고 회피 기동을 펼쳤으나, 어뢰가 ‘쓰루마루’에 명중하여 침몰했다.[134][135] 이후 ‘나카’와 제9구축대는 경계 임무를 수행했고, 1차 상륙 부대가 출발했다.
서부 공격 부대는 니시무라 쇼지 소장이 지휘했으며, 기함은 ''나카''였다.[7]
제4 구축대 | 항공대 | 기지 부대 |
---|---|---|
란령 부대는 제3함대 사령장관 다카하시 이보 해군 중장이 지휘했다.[115]
제2근거지 부대는 히로세 스에토 소장이 지휘했다.[120]
- 부설함 - 이쓰쿠시마, 와카타카
- 제21잠수대
제1항공부대는 산요마루 함장이 지휘했다.[122]
- 모함 - 특설 수상기 모함 산요마루, 사누키마루
- 호위 부대 - 제39호 초계정 외
3. 1. 1. 지상군
사카구치 부대(지휘관: 사카구치 시즈오 소장)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6]기습 부대 | 비행장 점령 부대 | 돌격 부대 | 기타 부대 |
---|---|---|---|
3. 1. 2. 해군
1942년 1월 10일 보르네오의 타라칸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어 보르네오 발릭파판에 상륙 작전을 시작했다. 1월 21일 저녁, 제1호위대(지휘관 니시무라 쇼지 소장 / 제4수뢰전대 사령관 : 제4수뢰전대 기간)와 수송선단 36척으로 구성되어 타라칸을 출발했다.[128][129] 발릭파판섬의 정유를 무사히 손에 넣기 위해 작전을 실행했지만,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130]일본 해군 제1호위대의 주요 함선은 다음과 같다.
함종 | 척수 | 함명 |
---|---|---|
경순양함 | 1 | 나카 |
구축함 | 9 | 무라사메, 유다치, 하루사메, 사미다레, 아사구모, 나쓰구모, 미네구모, 우미카제, 가와카제 |
소해정 | 4 | |
구잠정 | 3 | |
경비정 | 3 | |
수송선 | 16 | 쓰루마루, 리파루르마루, 니쇼마루, 에히메마루, 아사히야마마루, 니세마루, 구마카와마루, 스마노우라마루, 하바나마루, 한코마루, 세무마루, 쿠레타케마루, 킨야스야마루, 후지카게마루, 다쓰노카미마루, 미나미야마루 |
1월 22일 선단은 마카사르 해협에 들어갔지만 타라칸섬의 제23항공전대에서 “강우 때문에 22일, 23일 비행장 사용이 불가하여 전투기 엄호를 할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 제24구축대(우미카제, 가와카제)는 별동대로 먼저 출발했다. 1월 23일 저녁, 쌍발 폭격기 9기, 경폭격기 4기의 공습을 받은 해군 운송 선박 ‘다쓰노카미마루’가 손상을 입었다.[131] 이어 구축함 ‘가와카제’가 적 잠수함을 탐지해 폭뢰 공격을 실시하는 동시에 한 시간 넘게 공습을 받았다.[131] 19시 30분 ‘미나미야마루’가 네덜란드군의 B-10 폭격기의 공격에 피탄되어 싣고 있던 휘발유에서 불이 났기 때문에 선체를 포기했다.[131][132] 승무원들은 구축함 ‘미네구모’에 수용되었다.[133] 밤이 되어 선단은 발릭파판 정박지에 도착하였고, 제2구축함대(무라사메, 하루사메, 사미다레, 유다치)가 정박지 소해를 실시했다.[131]
1월 24일 날짜 변경시 제1호위대는 정박지 경계 진형으로 전환하고 있었지만, 제2구축함대는 정박지 남쪽 몇 해리 떨어진 곳에서 소해삭을 설치하고 있었다.[131] 제4수뢰전대 기함(경순양함) ‘나카’는 첫 정박지인 ‘쓰루마루’ 남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정박해 있었는데, 00시 35분 전후에 어뢰정(실제로 네덜란드 잠수함 K-18)을 발견하고, 뢰적을 인지하고 함수를 간신히 피했지만, 이 어뢰가 ‘쓰루마루’에 명중되어 ‘쓰루마루’는 침몰되고 말았다.[134][135] 니시무라 사령관은 제30소해 부대(제17, 제18호 소해정)에 구조를 명령하고, 제9구축대(아사구모, 미네구모, 나쓰구모)는 선단 동쪽 3km를, 제31구잠대는 선단 서쪽을, 초계정은 선단 남쪽을, 제11소해대는 호송선단 북쪽을 각각 경계하도록 명령했다.[131] ‘나카’는 정박지 동쪽 5km 부근으로 나가 경계를 했고, 제9구축대에 계속 명령을 내렸다.[131] 제2구축함대는 ‘나카’, ‘아사구모’, ‘나쓰구모’, ‘미네구모’가 외부를 순찰하고 있었다. 오전 1시 40분 1차 상륙 부대가 출발했다.
서부 공격 부대는 니시무라 쇼지 소장이 지휘했으며, 순양함 ''나카''에 탑승했다.[7]
제4 구축대 | 항공대 | 기지 부대 |
---|---|---|
일본군이 상륙정에 탑승하여 발릭파판으로 향했을 때, 네덜란드 왕립 해군 잠수함 HNLMS ''K-XVIII'', 카렐 A.J. 반 웰 그로네벨트 중령의 지휘 하에, 발릭파판 침공 호송대와 접촉했다. 00시 35분, 반 웰 그로네벨트는 자신이 "1,400톤 구축함"이라고 보고한 함선에 어뢰 3발을 발사했는데, 실제로는 ''나카''였다. 모든 어뢰가 ''나카''를 빗나가자, 잠수함은 또 다른 어뢰를 발사하여 00시 40분에서 00시 45분 사이에 수송선 ''쓰루가 마루''에 명중시켜 침몰시켰고, 사카구치 부대의 승무원 1명과 병사 39명이 사망했다.[36][37][38]
''나카''와 제4구축함 전대가 ''K-XVIII''을 추적하기 위해 호송대를 떠나자, 그들은 이제 방어받지 않는 수송선 호송대를 공격할 수 있도록 미국 제59구축함 사단의 길을 열었다.
토마스 하트 제독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은 1월 20일 티모르 쿠팡 만에서 출항한 타격대(제5기동부대(TF) 5)를 소집했다. 윌리엄 글래스포드 제독과 폴 탤벗의 지휘 하에, 이 부대는 순양함 ''보이스''와 ''마블헤드'', 구축함 ''존 D. 포드'', ''포프'', ''패럿'', ''폴 존스'', ''필스버리'', ''벌머''로 구성되었다. 글래스포드는 전체 지휘관으로 활동했으며, 탤벗은 구축함을 지휘했다.[39][40]
당시, ''마블헤드''는 터빈 한 대만 작동하여 속도가 15노트로 제한되었다. 1월 21일, ''보이스''는 사페 해협의 켈라파 섬 근처의 지도에 없는 암초에 부딪혀 배의 좌현 용골에 120피트 길이의 구멍이 생겼다. ''마블헤드''와 함께 두 순양함은 ''벌머''와 ''필스버리''의 호위를 받으며 와워라다 만으로 후퇴해야 했다. 거기에서 ''보이스''와 ''필스버리''는 칠라잡으로 향했고, ''마블헤드''와 ''벌머''는 수라바야로 향했다. 탤벗 사령관 휘하의 나머지 구축함 4척은 발릭파판으로 향했다.[41]
기습 효과를 유지하기 위해 탤벗은 구축함에게 그날 밤 주요 공격 무기로 어뢰를 사용하고, 소진되었을 때만 함포를 발사하도록 명령했다. ''나나 마루''의 불타는 잔해와 발릭파판의 불길을 따라, 제5기동부대는 1월 24일 자정 직후 마카사르 해협으로 진입했다. 02시 35분, 그들은 순양함 ''나카''와 4척의 구축함의 경로로 돌진했다. 구축함 중 하나가 도전을 신호했지만, 탤벗의 함선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자신들을 아군 함선이라고 생각하고, 일본 구축함은 경보를 울리지 않고 제5기동부대를 통과했다.[42]
10분 후, 탤벗은 일본 수송선단을 발견했는데, 그 앞의 불타는 유전의 불길에 의해 실루엣이 드러났으며, 3척의 초계정, 4척의 기뢰 제거함, 4척의 잠수함 추격함이 호위하고 있었다. 02시 57분, ''W-15''가 구축함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나카''로 생각했다. ''패럿''은 ''존 D. 포드''와 ''폴 존스''에 이어 기뢰 제거함을 향해 총 7발의 어뢰를 발사했지만, 엉뚱한 각도로 인해 모두 빗나갔다. 수송선단의 북쪽 끝에 도달했을 때, 패럿은 03시 00분에 어뢰 3발을 발사하여 ''수마노우라 마루''에 명중시켜 대규모 폭발을 일으켜 배를 침몰시켰는데, 당시 이 배는 깊이차지뢰와 기뢰를 싣고 있었다.[43][44]
곧, ''W-15''는 니시무라 제독에게 수송선단이 공격받고 있음을 알렸다. 경보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 함선이 닻에 침투할 수 있다고 믿지 않고, 공격이 ''K-XVIII''에서 온 것이라고 추정했다. 새로 발생한 혼란 속에서, ''포프'', ''패럿''과 ''폴 존스''는 03시 06분에 총 10발의 어뢰를 발사했는데, 그 중 하나가 ''타쓰가미 마루''에 명중했다. 전날 네덜란드의 공습으로 인한 피해와 더불어, 탄약이 실린 배는 폭발하여 30분 후에 침몰했다. 탤벗은 03시 14분, 제5기동부대를 남쪽으로 돌려 선단의 남쪽 끝을 공격하려 했다.[45]
5분 후, ''포프''와 ''패럿''은 구축함이라고 생각한 함선을 향해 어뢰 5발을 발사했지만, 실제로는 초계정 ''P-37''이었다. 전 제1차 세계 대전 구축함은 어뢰 3발을 맞고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승무원 35명이 사망했다. ''존 D. 포드''와 ''폴 존스''는 ''구레타케 마루''에 대한 공격을 이어갔지만, 처음 두 발의 어뢰를 피할 수 있었다. 폴 존스에서 발사된 두 번째 어뢰가 선체 중앙에 명중했고 수송선은 곧 침몰했다. ''포프'', ''패럿'', 그리고 ''폴 존스''는 탤벗에게 그들이 모든 어뢰를 사용했다고 신호를 보냈고, 그는 그들에게 4인치 함포로 수송선을 공격하도록 허가했다.[46][47]
그러나 이때, 제5기동부대의 편대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존 D. 포드''는 03시 35분에 북서쪽으로 항로를 변경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포프''가 뒤따랐다. ''존 D. 포드''는 ''쓰루가 마루''의 잔해에 마지막 어뢰 2발을 발사한 다음, 동시에 ''구마가와 마루''와 ''아사히산 마루''를 공격했다. 4인치 함포와 50구경 기관총의 포탄이 두 배를 관통하여 ''구마가와 마루''에서 승무원 6명이 사망하고 ''아사히산 마루''에서 5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안, 포탄이 03시 47분에 ''존 D. 포드''의 후방에 명중하여 승무원 4명이 부상을 입었다. 얕은 물에 좌초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구축함 사령관인 제이콥 D. 쿠퍼 중령은 좌현으로 돌아서 나머지 제5기동부대를 따라잡기 위해 방향을 돌렸는데, 이들은 이미 발릭파판 만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존 D. 포드''는 06시 42분에서야 나머지 제5기동부대를 따라잡았고, 탤벗은 구축함에 신호 깃발을 게양하라고 명령했다: 훌륭하다.[46][48]
그 무렵, 니시무라 제독과 제4전대는 ''K-XVIII''을 추격하며 6~7km(3~4마일) 떨어진 곳에서 헛수고를 하고 있었다. 그는 05시 20분에서야 제9구축함 전대에 제5기동부대의 탈출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미국 함선의 위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니시무라는 결국 제9전대의 구축함에게 이전 임무를 재개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기함 ''나카''가 수송선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닻에 들어갔을 때, 제9사단과 분리되어 혼자 수송선 부대에 합류했다.[49][50]
란령 부대의 지휘관은 제3함대 사령장관 다카하시 이보 해군 중장이었다. (다바오 소재)[115]
서방 공략 부대의 제1호위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117][118]
- * 제4수뢰전대 - 경순양함 나카[119]
- * 제2구축대 (제4수뢰전대) - 구축함 무라사메, 유다치, 하루사메, 고사메
- * 제9구축대 (제4수뢰전대) - 구축함 아사구모, 나쓰구모, 미네구모
- * 제24구축대 제1소대 (제4수뢰전대)[116] - 구축함 우미카제, 에카제
- * 초계정 3척 - 제36호 초계정, 제37호 초계정, 제38호 초계정
- * 제31잠수대 (제2근거지 부대 소속, 히로세 소장 진출 후에는 원대 복귀 예정)[120]
- * 제11기뢰제거대 (제2근거지 부대 소속, 히로세 소장 진출 후에는 원대 복귀 예정)[120]
- * 수송선/선대 구분[121]
- ** 제1분대 - 쓰루가마루, 리파풀루마루[연대장], 닛쇼마루, 에히메마루, 아사히야마마루[해군], 닛테이마루[해군], 구마가와마루, 스마노우라마루[해군]
- ** 제2분대 - 하바나마루, 한코우마루, 테이류마루[지대장], 고추쿠마루, 긴야마마루[해군], 후지에이마루[해군], 타츠가미마루[해군], 난아마루[해군]
제2근거지 부대는 제2근거지대 사령관 히로세 스에토 소장이 지휘했다. [1월 24일 타라칸 발, 26일 발릭파판 진출 예정][120]
- * 부설함 - 이쓰쿠시마, 와카타카
- * 제21잠수대
제1항공부대는 산요마루 함장이 지휘했다.[122]
- * 모함 - 특설 수상기 모함 산요마루, 사누키마루 (2척의 발릭파판 도착은, 야전 종료 후 26일)
- * 호위 부대 - 제39호 초계정 외
3. 2. 네덜란드군
연합군 ABDA 함대 사령부(사령관 토마스 C. 하트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는 일본군의 다음 목표를 발릭파판으로 예상하고 타라칸 해에서 마카사르 해협 남부에 미 잠수함 6척과 네덜란드 잠수함 2척을 배치했다. 이어 수상 함대를 파견했지만, 항공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 수송선단을 발견하지 못하고 연료 보급을 위해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8]발릭파판 주둔 네덜란드군은 코르넬리스 판 덴 호겐반트 중령이 지휘하는 제6 KNIL 보병대대로,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8]
발릭파판 주둔군 (제6 KNIL 보병대대, 지휘관: 코르넬리스 판 덴 호겐반트 중령) | ||
---|---|---|
보병 | 포병 | 기타 부대 |
style="width: 250px" | | style="width: 300px" | |
3. 3. 미군
토마스 C. 하트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이 이끄는 연합군 ABDA 함대 사령부는 일본군의 다음 목표를 발릭파판으로 예상하고, 타라칸 해에서 마카사르 해협 남부에 미 잠수함 6척과 네덜란드 잠수함 2척을 배치했다. 이후 수상 함대를 파견했지만, 항공 지원이 없어 일본군 수송선단을 발견하지 못하고 연료 보급을 위해 귀환해야 했다.[115]폴 H. 탤벗이 지휘하는 제59 구축함 전대는 다음과 같다:[115]
함명 |
---|
USS 존 D. 포드 |
USS 패럿 |
USS 폴 존스 |
USS 포프 |
- 네덜란드군: 잠수함 2척
4. 전투 경과
1942년 1월 10일 보르네오의 타라칸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어서 보르네오 발릭파판에 상륙 작전을 시작했다. 1월 21일 저녁, 니시무라 쇼지 소장이 지휘하는 제1호위대와 수송선단 36척이 타라칸을 출발했다.[128][129] 제1호위대는 경순양함 나카와 9척의 구축함(무라사메, 유다치, 하루사메, 사미다레, 아사구모, 나츠구모, 미네구모, 우미카제, 카와카제), 소해정 4척, 구잠정 3척, 경비정 3척, 그리고 16척의 수송선(쓰루마루, 리파루르마루, 니쇼마루, 에히메마루, 아사히야마루, 니세마루, 구마카와마루, 스마노우라마루, 하바나마루, 한코마루, 세무마루, 쿠레타케마루, 킨야스야마루, 후지카게마루, 다쓰노카미마루, 미나미야마루)으로 구성되었다.
발릭파판섬의 정유 시설을 확보하려던 일본군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130]
1월 22일, 선단은 마카사르 해협에 진입했지만, 타라칸섬의 제23항공전대로부터 "강우로 인해 22일과 23일 비행장 사용이 불가능하여 전투기 엄호를 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제24구축대(우미카제, 카와카제)는 별동대로 먼저 출발했다. 1월 23일 저녁, 일본군은 공습을 받아 해군 운송선 '다쓰노카미마루'가 손상을 입었다.[131] 구축함 '카와카제'는 적 잠수함을 탐지해 폭뢰 공격을 실시하는 동시에 한 시간 넘게 공습을 받았다.[131] 19시 30분, '미나미야마루'가 네덜란드군의 B-10 폭격기의 공격을 받아 싣고 있던 휘발유에 불이 붙어 선체를 포기했다.[131][132] 승무원들은 구축함 '미네구모'에 수용되었다.[133] 밤이 되어 선단은 발릭파판 정박지에 도착하였고, 제2구축함대(무라사메, 하루사메, 사미다레, 유다치)가 정박지 소해를 실시했다.[131]
1월 24일 자정, 제1호위대는 정박지 경계 진형으로 전환하고 있었지만, 제2구축함대는 정박지 남쪽 몇 해리 떨어진 곳에서 소해색을 설치하고 있었다.[131] 00시 35분 경, 경순양함 '나카'는 어뢰정(실제로는 네덜란드 잠수함 K-18)을 발견하고 어뢰를 피했지만, 이 어뢰가 '쓰루마루'에 명중하여 침몰했다.[134][135] 니시무라 사령관은 구조 명령을 내리고, 각 함대에 경계를 명했다.[131] 오전 1시 40분, 1차 상륙 부대가 출발했다.
이에 앞서 연합군 ABDA 함대 사령부(사령관 토마스 C. 하트)는 일본군의 다음 목표를 발릭파판으로 예상하고 타라칸 해에서 마카사르 해협 남부에 미 잠수함 6척과 네덜란드 잠수함 2척을 배치했다. 이어 수상 함대를 파견했지만, 항공 지원이 없어 일본군 수송선단을 발견하지 못하고 연료 보급을 위해 귀환해야 했다.
1월 24일 새벽, 미국 함대는 27노트로 발릭파판 앞바다에 침입, 일본군 수송선단을 공격했다.[73][97] 일본군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4. 1. 네덜란드군의 유전 시설 파괴 (1월 16일 - 20일)
네덜란드는 일본의 군사적 공격 가능성에 대비하여 1924년부터 발릭파판 유전, 셈보자, 상가 상가 유전을 방어하기 위해 6개 보병 여단을 배치하는 등 방어를 강화하기 시작했다.[1] 1933년에는 태평양 지역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대대 본부와 2개 중대가 발릭파판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4개월 후 자바로 복귀했고, 이후 발릭파판 주둔군은 단일 보병 대대로 축소되었다.[1]발릭파판 주둔 네덜란드군은 도시, 특히 유전 시설을 기습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고 시설 파괴에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도시가 함락될 경우, 병력은 내륙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해야 했다. 네덜란드 폭파 부대는 발릭파판과 삼보자(Sambodja) 시설 파괴에 각각 3시간과 8시간을 배정했지만, 훈련 결과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9]
반 덴 후겐반트는 방어 준비를 위해 망가르 비행장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클란다산(Klandasan)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또한 무선 기지 주변에 두 번째 방어선을, 게릴라전을 위해 내륙으로 퇴각하는 병력을 엄호하기 위해 세 번째 방어선(Rapak position)을 건설했다.[9]
적의 상륙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 해군(Koninklijke Marine) 기뢰 부설함인 ''고우덴 레우'', ''엘란드 드부아'' 및 ''수메네프''는 1939년 9월부터 1941년 12월까지 발릭파판 만 접근 해역에 290개의 기뢰를 부설했다.[10]
반 덴 후겐반트는 게릴라전을 대비하여 발릭파판에서 약 6~9km 떨어진 곳에 약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를 설치하고, 타라칸 함락 직후 발릭파판 민간인을 대피시켰다. 또한, 와인 강과 멘타위르의 유류 펌프장 근처와 도시에서 10km 간격으로 강둑에 식량 창고를 건설하여 게릴라전 중 병력을 지원하려 했다.[11][12]
1월 16일, 사카구치는 타라칸 수비대 사령관 참모장이었던 게라르드 레오나르트 레인더호프 대위, 시몬 데 발 중령, 바타프세 석유 회사(BPM) 타라칸 지점장이자 KNIL 예비군이며 전 네덜란드 총리인 헨드리쿠스 콜레인의 아들인 안톤 콜레인 대위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들은 인도네시아인 선장 및 3명의 일본어 통역관[4]과 함께 노획한 BPM 모터 스쿠너 ''파르지팔''을 타고 발릭파판으로 향했다.
1월 19일, 네덜란드 해군 항공대(MLD) 소속 도르니에 Do 24 수상 비행기 두 대가 일본 국기를 게양한 ''파르지팔''을 발견했다. 콜레인과 레인더호프는 일본군을 제압하거나 속였고[17], 콜레인은 일본 국기를 찢고 레인더호프는 네덜란드 국기를 흔들었다. 도르니에기는 다음 날 돌아와 콜레인과 레인더호프를 발릭파판으로 이송하여 최후통첩을 반 덴 호겐반트에게 전달했다.
반 덴 호겐반트는 즉시 발릭파판의 모든 유정, 정유소 및 항만 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파괴는 1월 18일에 이미 시작되었다. 발릭파판 북쪽 루이즈 유전에서는 유정 튜브를 해체하여 15m 깊이로 잘라낸 후 펌프 플런저, 액세서리 로드, 볼트, 너트, 드릴 비트 등을 구멍에 떨어뜨리고 TNT 4조각으로 케이싱 스트링을 파괴했다. 며칠 안에 "모든 모터, 펌프, 발전기 및 터빈이 폭파되었다."[18]
발릭파판에서는 증류기와 증기 보일러를 먼저 파괴하는데 약 1일 반이 걸렸다. 증류기 껍질을 무너뜨리는데 약 30시간의 "강력한 불쏘시개"가 필요했고, 이후 5~8시간 동안 보일러를 파괴했다. 그 후 지역 전체와 항구 시설 파괴가 이어졌다. 휘발유 드럼에 불을 붙여 기름을 태워 수로를 둘러싸 항구에 불을 질렀고, 공장, 파라핀 왁스 공장, 포장된 윤활유 드럼 창고, 염수 펌프장 등이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되었다. 판단사리 공장의 주석 공장도 불태워졌다. 실험실, 탱크 농장, 발전소 파괴를 끝으로 연쇄 폭발로 도시 전체의 창문이 산산조각났다.[19] 1월 20일 밤, 파괴로 인한 화재는 1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도 보였다.[20]
4. 2. 일본군의 상륙 (1월 23일 - 24일)
1942년 1월 21일 저녁, 니시무라 쇼지 소장이 지휘하는 제1호위대(제4수뢰전대 기함)와 수송선단 36척은 타라칸섬을 출발했다.[128][129] 제1호위대는 경순양함 나카와 구축함 9척(무라사메, 유다치, 하루사메, 사미다레, 아사구모, 나츠구모, 미네구모, 우미카제, 카와카제), 소해정 4척, 구잠정 3척, 경비정 3척, 그리고 수송선 16척(쓰루마루, 리파루르마루, 니쇼마루, 에히메마루, 아사히야마루, 니세마루, 구마카와마루, 스마노우라마루, 하바나마루, 한코마루, 세무마루, 쿠레타케마루, 킨야스야마루, 후지카게마루, 다쓰노카미마루, 미나미야마루)으로 구성되었다.1월 22일, 선단은 마카사르 해협에 진입했지만, 타라칸섬의 제23항공전대로부터 "강우 때문에 22일, 23일 비행장 사용이 불가하여 전투기 엄호를 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제24구축대(우미카제, 카와카제)는 별동대로 먼저 출발했다.
1월 23일 저녁, 일본군은 공습을 받아 해군 운송선 '다쓰노카미마루'가 손상을 입었다.[131] 구축함 '카와카제'는 적 잠수함을 탐지해 폭뢰 공격을 실시하는 동시에 한 시간 넘게 공습을 받았다.[131] 19시 30분, '미나미야마루'가 네덜란드군의 B-10 폭격기의 공격을 받아 싣고 있던 휘발유에 불이 붙어 선체를 포기했다.[131][132] 승무원들은 구축함 '미네구모'에 수용되었다.[133] 밤이 되어 선단은 발릭파판 정박지에 도착하였고, 제2구축함대(무라사메, 하루사메, 사미다레, 유다치)가 정박지 소해를 실시했다.[131]
1월 24일 자정, 제1호위대는 정박지 경계 진형으로 전환하고 있었지만, 제2구축함대는 정박지 남쪽 몇 해리 떨어진 곳에서 소해색을 설치하고 있었다.[131] 00시 35분 경, 경순양함 '나카'는 어뢰정(실제로는 네덜란드 잠수함 K-18)을 발견하고 어뢰를 피했지만, 이 어뢰가 '쓰루마루'에 명중하여 침몰했다.[134][135] 니시무라 사령관은 구조 명령을 내리고, 각 함대에 경계를 명했다.[131] 오전 1시 40분, 1차 상륙 부대가 출발했다.
타라칸 점령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자, 일본군은 발릭파판 점령 날짜를 앞당겼다. 일본군의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4]
# 적을 섬멸하고 정유 시설 파괴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 점령 후 비행장은 자바 침공에 사용될 것이다.
# 주력 부대는 비행장 근처에 상륙하는 즉시 비행장을 점령한다. 동시에 일부 부대는 항구 아래 강을 따라 이동하여 적 후방을 기습하고, 정유 시설 파괴를 막는다.
# 발릭파판 점령 후 상가상가 유전 지역을 확보한다.
# 발릭파판을 남부 보르네오 군정의 중심지로 만들 준비를 한다.

타라칸 비행장 준비 지연으로 인해 발릭파판 상륙은 1월 21일에서 1월 24일로 연기되었고, 공수 부대를 이용한 공격 계획은 폐기되었다.[13][14] 일본은 네덜란드군이 유전을 파괴할 것을 우려하여, 파괴 시 보복을 경고하며 네덜란드 전쟁 포로들을 석방할 계획을 세웠다.[4]
1월 23일, 미군과 네덜란드군의 항공기와 잠수함이 일본 함대를 공격했다. 네덜란드 Martin B-10 폭격기는 가와카제와 수송선 ''Tatsugami Maru'', ''Nana Maru''에 피해를 입혔다.[28][29]
이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22시 30분에 일본군은 발릭파판 상륙을 시작했다.[30]
4. 3. 미 함대의 공격 (1월 24일)
토마스 하트 연합군 ABDA 함대 사령관은 일본군의 다음 목표를 발릭파판으로 예상하고 타라칸 해에서 마카사르 해협 남부에 미 잠수함 6척과 네덜란드 잠수함 2척을 배치했다. 이어 수상 함대를 파견했지만, 항공 지원이 없어 일본군 수송선단을 발견하지 못하고 연료 보급을 위해 귀환해야 했다.1월 20일, PBY 카탈리나 비행정은 보르네오 동해안 발릭파판 앞바다에서 일본군 수송 선단을 발견했다. ABDA 함대 사령부는 티모르 섬 쿠팡에서 보급 중이던 미국 해군 (윌리엄 A. 글래스포드 소장 지휘)의 경순양함 2척과 구축함 6척을 출격시켰다. 그러나 경순양함 보이시는 좌초 사고로 손상되었고, 경순양함 마블헤드도 기계 고장을 일으켰다.[73] 순양함 2척은 호위 구축함 2척과 함께 전열에서 이탈했고, 제59구축대 (폴 H. 탤벗 중령)의 클렘슨급 구축함 4척 ( 포프, 패럿, 폴 존스)만이 일본군 수송 선단을 공격할 수 있었다.[73][97]
일본군이 상륙정에 탑승하여 발릭파판으로 향했을 때, 네덜란드 해군 잠수함 K-XVIII (카렐 A.J. 반 웰 그로네벨트 중령 지휘)이 발릭파판 침공 호송대와 접촉했다. 1월 24일 0시 35분, 반 웰 그로네벨트는 자신이 "1,400톤 구축함"이라고 보고한 함선에 어뢰 3발을 발사했는데, 실제로는 나카였다. 어뢰가 모두 빗나가자, 잠수함은 다시 어뢰를 발사하여 0시 40분에서 0시 45분 사이에 수송선 ''쓰루가 마루''를 침몰시켰고, 사카구치 부대의 승무원 1명과 병사 39명이 사망했다.[36][37][38]
''나카''와 제4구축함 전대가 ''K-XVIII''을 추적하기 위해 호송대를 떠나자, 미 제59구축함 사단은 방어가 허술해진 수송선 호송대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하트 제독은 1월 20일 티모르 쿠팡 만에서 출항한 타격대 (제5기동부대(TF) 5)를 소집했다. 글래스포드 제독과 탤벗의 지휘 하에, 부대는 순양함 ''보이스''와 ''마블헤드'', 구축함 ''존 D. 포드'', ''포프'', ''패럿'', ''폴 존스'', ''필스버리'', ''벌머''로 구성되었다. 글래스포드는 전체 지휘관이었고, 탤벗은 구축함을 지휘했다.[39][40]
당시 ''마블헤드''는 터빈 한 대만 작동하여 속도가 15노트로 제한되었다. 1월 21일, ''보이스''는 사페 해협의 켈라파 섬 근처 지도에 없는 암초에 부딪혀 좌현 용골에 120피트 길이의 구멍이 생겼다. ''마블헤드''와 함께 두 순양함은 ''벌머''와 ''필스버리''의 호위를 받으며 와워라다 만으로 후퇴해야 했다. ''보이스''와 ''필스버리''는 칠라잡으로, ''마블헤드''와 ''벌머''는 수라바야로 향했다. 탤벗 사령관 휘하의 나머지 구축함 4척은 발릭파판으로 향했다.[41]
기습 효과를 위해 탤벗은 구축함에게 그날 밤 주요 공격 무기로 어뢰를 사용하고, 소진되었을 때만 함포를 발사하도록 명령했다. ''나나 마루''의 불타는 잔해와 발릭파판의 불길을 따라, 제5기동부대는 1월 24일 자정 직후 마카사르 해협으로 진입했다. 2시 35분, 순양함 ''나카''와 구축함 4척의 경로로 돌진했다. 구축함 중 하나가 도전을 신호했지만, 탤벗의 함선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자신들을 아군 함선이라고 생각하고, 일본 구축함은 경보를 울리지 않고 제5기동부대를 통과시켰다.[42]
10분 후, 탤벗은 일본 수송선단을 발견했는데, 불타는 유전의 불길에 의해 실루엣이 드러났으며, 초계정 3척, 기뢰 제거함 4척, 잠수함 추격함 4척이 호위하고 있었다. 2시 57분, ''W-15''가 구축함을 발견했지만, ''나카''로 생각했다. ''패럿''은 ''존 D. 포드''와 ''폴 존스''에 이어 기뢰 제거함을 향해 어뢰 7발을 발사했지만, 엉뚱한 각도로 모두 빗나갔다. 수송선단의 북쪽 끝에 도달했을 때, 패럿은 3시 00분에 어뢰 3발을 발사하여 ''수마노우라 마루''에 명중시켜 대규모 폭발을 일으켜 침몰시켰는데, 이 배는 깊이차지뢰와 기뢰를 싣고 있었다.[43][44]
곧, ''W-15''는 니시무라 제독에게 수송선단이 공격받고 있음을 알렸다. 경보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 함선이 닻에 침투할 수 있다고 믿지 않고, 공격이 ''K-XVIII''에서 온 것이라고 추정했다. 혼란 속에서, ''포프'', ''패럿'', ''폴 존스''는 3시 06분에 어뢰 10발을 발사했는데, 그 중 하나가 ''타쓰가미 마루''에 명중했다. 탄약이 실린 배는 전날 네덜란드의 공습으로 인한 피해와 더불어 폭발하여 30분 후에 침몰했다. 탤벗은 3시 14분, 제5기동부대를 남쪽으로 돌려 선단의 남쪽 끝을 공격하려 했다.[45]
5분 후, ''포프''와 ''패럿''은 구축함이라고 생각한 함선을 향해 어뢰 5발을 발사했지만, 실제로는 초계정 ''P-37''이었다. 전 1차 세계 대전 구축함은 어뢰 3발을 맞고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승무원 35명이 사망했다. ''존 D. 포드''와 ''폴 존스''는 ''구레타케 마루''를 공격했지만, 처음 두 발의 어뢰를 피했다. 폴 존스에서 발사된 두 번째 어뢰가 선체 중앙에 명중했고 수송선은 곧 침몰했다. ''포프'', ''패럿'', ''폴 존스''는 탤벗에게 어뢰를 모두 사용했다고 신호를 보냈고, 그는 4인치 함포로 수송선을 공격하도록 허가했다.[46][47]
이때, 제5기동부대의 편대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존 D. 포드''는 3시 35분에 북서쪽으로 항로를 변경했고, ''포프''가 뒤따랐다. ''존 D. 포드''는 ''쓰루가 마루''의 잔해에 마지막 어뢰 2발을 발사한 다음, ''구마가와 마루''와 ''아사히산 마루''를 공격했다. 4인치 함포와 50구경 기관총의 포탄이 두 배를 관통하여 ''구마가와 마루''에서 승무원 6명이 사망하고 ''아사히산 마루''에서 5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3시 47분에 포탄이 ''존 D. 포드''의 후방에 명중하여 승무원 4명이 부상을 입었다. 얕은 물에 좌초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구축함 사령관 제이콥 D. 쿠퍼 중령은 좌현으로 돌아서 나머지 제5기동부대를 따라잡기 위해 방향을 돌렸는데, 이들은 이미 발릭파판 만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존 D. 포드''는 6시 42분에서야 나머지 제5기동부대를 따라잡았고, 탤벗은 구축함에 신호 깃발을 게양하라고 명령했다: 훌륭하다.[46][48]
그 무렵, 니시무라 제독과 제4전대는 ''K-XVIII''을 추격하며 6~7km(3~4마일) 떨어진 곳에서 헛수고를 하고 있었다. 그는 5시 20분에서야 제9구축함 전대에 제5기동부대의 탈출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미국 함선의 위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니시무라는 결국 제9전대의 구축함에게 이전 임무를 재개하라고 명령했다. 기함 ''나카''가 수송선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닻에 들어갔을 때, 제9사단과 분리되어 혼자 수송선 부대에 합류했다.[49][50]
1월 24일 새벽, 미국 함대는 27노트로 발릭파판 앞바다에 침입했다.[73][97] 이미 달은 져 있었다.[98] 불타는 「난아마루」와 지상 시설의 매연 때문에 시계가 불량했고, 역광 때문에 연안에 정박 중인 일본군 수송 선단의 실루엣은 미 함대에 훤히 보였다.[83] 잠수함(K-18)의 습격으로부터 30분밖에 지나지 않았고 일본군 호위 부대는 경계망을 펼치고 있었지만, 적 수뢰 전대의 야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 함대는 일본 측에 발각되지 않고 선단에 접근, 제15호 기뢰정에 첫 어뢰를 발사했지만, 명중하지 않았다.[99] 오전 4시 25분, 선단 북동쪽을 초계하던 제15호 기뢰정은 남쪽에서 접근하는 4개 굴뚝의 함영을 「나카」로 오인했지만, 여러 척이었기 때문에 적 함대로 판단, 엇갈리는 틈에 뇌격을 가했지만 회피했다.[100] 일본군 호위 함정에서는 「적 순양함 출현」, 「적함은 아군함의 오인」, 「적 순양함 2척」, 「적 보인다」 등의 정보가 잇따라 들어왔다.
미군 구축함 4척은 고속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존 D. 포드」, 「포프」, 「패럿」과 「폴 존스」로 분리되었다.[99] 오전 4시 30분에 특설 급설망함 「스마우라 마루」에 뇌격을 가해 격침시켰다.[100]
특설 급양함 「구마가와 마루」는 우현 후방에서 접근해 온 단함의 구축함(존 D. 포드)으로부터 약 10발의 명중탄을 받았지만, 반격하여 함미에 명중탄을 기록했다.[100] 「존 D. 포드」는 선단 사이를 항행하면서 「아사히마루」, 「후지카게마루」, 「고추쿠마루」를 공격하여, 4시 45분에 「고추쿠마루」에 어뢰를 명중시켜 격침시켰다.[100][99]
「스마우라 마루」를 격침시킨 2척(패럿, 폴 존스)은 오전 4시 35분에 「다쓰가미마루」에 뇌격을 가해 격침, 남쪽으로 이탈하던 중 제38호 초계정을 뇌격했지만 회피되었다.[100][99] 제38호 초계정의 좌현에 있던 「초계정 37호」(원 구축함 「능」)는, 우현에서 접근 중인 미 구축함 2척을 「나카」로 오인하고 있는 사이에 어뢰 1발이 우현 함미에 명중, 이어서 어뢰 2발이 좌현 선수와 함미에 명중했다.[100][99]
제36호 초계정은 오전 4시 50분에 북서쪽 약 2km에 「나카」와 비슷한 함영을 발견하고, 사격을 받았기 때문에 남쪽으로 전타, 「0500 적 순양함 4척을 발견, 선단의 남쪽」이라고 보고한다.[101] 이것은 이탈 중인 「패럿」과 「폴 존스」의 2척이었다.[99]
정박지에서 10~13km 동쪽을 항행 중인 경순양함 「나카」(니시무라 사령관)에 들어온 첫 적 정보 보고는, 오전 4시 40분에 제15호 기뢰정으로부터 전달된 「4개 굴뚝의 구축함 선단이 북쪽에 나타남(발신 오전 4시 20분)」이었다.[101][102] 니시무라 사령관은 연합국군 구축함의 공격을 눈치채지 못하고, 오전 4시 58분에 「적 잠수함, 어뢰정에 대해 경계를 엄히 하라」라고 하령한다.[101] 제36호 초계정의 「적 순양함 4척」 보고에 대해, 니시무라 사령관은 「지금의 순양함은 제2구축대의 오인이 아닌가」라고 되묻고, 제36호 초계정은 「지금의 순양함은 4개 굴뚝의 구축함의 오인이다」라고 응답했다.[101] 「나카」는 제9구축대를 이끌고 선단 북쪽에 위치해 있다고 추정된 적함을 공격하러 갔지만, 혼란 속에서 동대와 헤어졌다.[101] 일본군의 손해가 판명된 것은 오전 7시 이후이다.[103]
연합군 수뢰 전대의 습격에 의한 혼란을 틈타 네덜란드 잠수함 K-18은 재차 습격을 감행한다. 오전 6시 50분경, K-18은 구축정 12호를 뇌격하지만 어뢰는 함저를 통과, 구축정은 폭뢰 공격으로 K-18을 손상시켰다(일본군은 격침 확실로 보고).[104]
4. 4. 네덜란드군의 후퇴 (1월 24일 - 2월 6일)
발릭파판 주둔 네덜란드군은 도시와 유전 시설을 기습으로부터 방어하고 시설 파괴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도시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면, 병력은 내륙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해야 했다. 시설 파괴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9]방어 준비를 위해 반 덴 후겐반트는 망가르 비행장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클란다산(Klandasan)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또한 무선 기지를 둘러싼 두 번째 방어선과 게릴라전을 위한 내륙 퇴각 병력을 엄호하기 위한 세 번째 방어선(Rapak position)이 건설되었다.[9]
적의 상륙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 해군 (Koninklijke Marine) 기뢰 부설함인 ''고우덴 레우(Gouden Leeuw)'', ''엘란드 드부아(Eland Dubois)'' 및 ''수메네프(Soemenep)''는 1939년 9월부터 1941년 12월까지 발릭파판 만 접근 해역에 290개의 기뢰를 부설했다.[10]
게릴라전 준비를 위해 반 덴 후겐반트는 발릭파판에서 약 6~9km 떨어진 곳에 약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를 설치하고, 타라칸(Tarakan) 함락 직후 발릭파판 민간인을 대피시켰다. 또한, 게릴라전 기간 동안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와인 강(Wain River)과 멘타위르(Mentawir) 유류 펌프장 근처와 도시에서 10km 간격으로 강둑에 식량 창고를 건설했다.[11][12]
1942년 1월 중순부터 발릭파판에 남아 있던 BPM 직원과 민간인들은 공수 수송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ML-KNIL 소속의 록히드 로드스타 3대와 KNILM 소속의 DC-2 1대가 수라바야에 배치되어 보급 및 대피 비행을 수행했다. 수백 명의 피난민들이 망가르 비행장과 반자르마신 근처의 오린 비행장에서 수라바야로 수송되었다. 1월 20일부터는 수상 비행기를 통해서만 도시에서의 대피가 가능했다. BPM 및 KNIL 기술자들과 콜린과 레인더호프도 대피했다. 1월 20일 밤, 두 장교는 다른 피난민 25명과 함께 자바로 출발했다. BPM은 그루먼 거스를 보내 임직원을 대피시켰고, 마지막 대피는 1월 23일에 이루어졌다.[21][22]
같은 날 밤, MLD 역시 대피 작전을 시작하여, GVT.4 비행대의 도르니에 2대가 발릭파판과 수라바야를 오가며 비행했다. 이들은 도시 항구의 해군 사령관과 그의 부하들, 그리고 삼보자 유정 파괴팀을 대피시켰다. 1월 22일 다음 비행에는 도르니에 2대가 더 합류했지만, 와인강에 착륙하여 해체팀의 BPM 멤버 58명과 남은 MLD 지상 인원을 대피시킨 것은 2대뿐이었다. 악천후와 연료 문제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들은 수라바야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도르니에 2대 중 한 대는 악천후로 인해 돌아가야 했고, 다른 한 대는 수아이 와인에 착륙하려다 추락하여 폭발하면서, 5명의 비행 승무원 중 4명이 사망했다. 도시의 맹렬한 화재는 비행기들이 한 시간이나 떨어진 거리에서도 보일 정도로, 비행기들을 유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21][22][23]
나머지 해체팀, BPM 및 기타 회사에서 온 유럽인 87명과 인도네시아인 10명은 인도네시아인 140명의 짐꾼의 도움을 받아 반자르마신으로 행진했다. 일본군이 경로를 차단하자, 짐꾼들은 도망쳤고 팀은 각자 속도로 사마린다 II에 도달하기 위해 소규모 그룹으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가장 큰 그룹은 결국 2월 말에 비행장에 도착하여 자바로 대피했고, 다른 그룹은 네덜란드가 항복할 때인 3월 8일에 비행장에 도착했다. 나머지 소규모 그룹들 중, 몇몇은 "페라후" (배)를 사용하여 반자르마신에 도착했고, 두 그룹은 항복 후 자바에, 한 그룹은 롬복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살해된 사람들도 있었다. 총 87명의 유럽인 중 41명이 생존했다.[24]
자정 무렵, 반 덴 후겐반은 발릭파판 만에서 클란다산 방향으로 선박 이동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불타는 시설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연기로 인해 네덜란드 수색등은 앞쪽의 수면을 관찰하기 어려웠고, 이는 카나우지 습격 부대가 네덜란드 전선 뒤에 있는 와인 강으로 방해받지 않고 항해할 수 있게 했다. 네덜란드 순찰대는 곧 이 이동을 반 덴 후겐반에게 보고했고, 그는 제2중대에 네덜란드 120mm 포를 확보하도록 명령하고, 내륙 퇴각로에서 적군의 활동을 순찰하고 보고하기 위해 오버발바겐 장갑차를 보냈다. 24일 03시 30분, 습격 부대는 와인 강 입구에 들어섰고, 그곳에서 그들을 내륙으로 안내한 인도네시아 경찰관 두 명을 만났다.[31][32]
날이 밝자 제2중대는 카나우지가 발릭파판에 도달하여 퇴각로를 위협하는 것을 막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06시 30분, 반 덴 후겐반은 일본군이 방어선을 향해 동쪽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고, 07시에는 일본군이 클란다산 위치에 접근했다. 가용할 수 있는 예비병력이 거의 없었던 반 덴 후겐반은 클란다산 위치를 강화할지, 아니면 습격 부대를 돌파하여 내륙으로 퇴각할지 선택해야 했다. 파괴된 도시를 방어하는 데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반 덴 후겐반은 후자를 선택했다. 그는 반둥에 있는 일반 본부에 자신의 결정을 알리고, 병력에게 포, 수색등, 무선 기지국을 파괴하고 탈출을 위해 후방 방어를 강화하라고 명령했다.[31]
제2중대는 공격을 시작하여 와인 강 펌프장을 점령하고 유지하여 나머지 병력이 퇴각할 수 있도록 명령받았다. 반 덴 후겐반은 제2중대가 펌프장을 지켰고, 오버발바겐 순찰대가 일본군으로부터 퇴각로를 안전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09시, 그는 총 700명에 달하는 병력과 그 가족들을 약 100대의 트럭 및 기타 차량에 태웠다. 오버발바겐의 선두로 그들은 내륙으로의 돌파를 시작하여 바투함파르(바투 암파르)로 퇴각했다.[33]
카나우지의 부대는 17시 30분에 상륙했다. 25일, 습격 부대는 분열되어, 한 부대는 펌프장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고, 다른 부대는 발릭파판으로 진격했으며, 나머지 주력 부대는 바투 암파르와 발릭파판 사이의 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14시 40분, 주력 부대가 바투 암파르로 진격했을 때, 그들은 네덜란드군(제2중대 또는 반 덴 후겐반 부대의 일부)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아 내륙으로의 퇴각로를 효과적으로 차단했다.[32]
24일 02시 40분, 비행장 점령 및 공격 부대는 저항 없이 상륙했고, 날이 밝자 비행장과 다리를 점령했다. 반 덴 후겐반의 병력은 해안 도로의 다리를 파괴했지만, 야마모토의 병력은 밤이 되자 발릭파판 북쪽에 도달했다. 25일 04시, 공격 부대는 저항 없이 발릭파판에 진입했다. 밤이 되자, 습격 부대는 시내에 진입했을 때 공격 부대와 합류했고, 이로써 발릭파판은 일본의 손에 들어갔다.[35]

바투 암파르에 도착한 반 덴 호겐반트는 일본군이 펌프장으로 통하는 방어 지점을 점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부대는 이제 대피소를 거쳐 후퇴해야 했고, 그곳에는 수백 명의 여성과 어린이, 주로 인도네시아 군인의 가족들이 그의 대열에 합류했다. 1월 25일, 그들은 와인 강 펌프장이 이미 일본군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51]
그의 병력이 너무 지쳐 있다고 판단한 반 덴 호겐반트는 펌프장 공격을 자제하고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발릭파판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했는데, 그곳에서 식량을 구할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그들 중 일부는 대피소로 돌아갔고, 다른 사람들은 와인 강 주변의 ''캄풍''(마을)에 머물렀다. 나머지 500명의 병사들은 북쪽으로 후퇴를 계속했다.[52][53]
후퇴하는 동안 네덜란드군은 대부분의 식량 보급소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여 장비를 보충하고 식량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멘타위르와 세모이 사이의 도로에 도달해서야 노동 수용소에서 쌀 창고를 찾을 수 있었다. 2월 3일, 부대는 부아트 ''캄풍''에 도착하여 더 많은 식량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추가 정보를 얻었다. 지역 관계자들은 반 덴 호겐반트에게 일본군이 그날 사마린다 시를 점령했지만, 사마린다 II 비행장은 여전히 네덜란드군의 통제하에 있다고 알렸다.[52]
관리들의 조언에 따라 네덜란드군은 이제 코타 방군으로 후퇴했는데, 그곳에는 마하캄 강을 따라 사마린다 II로 데려갈 수 있는 수송선이 있었다. 부대의 환자들은 부아트에서 마하캄 강 하류로 나무 배(''페라후'')를 사용하여 직접 이동했다. 3일간의 행군 후, 반 덴 호겐반트와 200명의 병사들은 2월 5일 코타 방군에 도착하여 다음 날 사마린다 II에 도착했다. 2월 7일부터 8일까지 그들은 자바로 비행기로 이동했으며, 부대에서 일부 보병은 비행장을 방어하는 수비대를 강화하는 데 투입되었다.[52][53]
4. 5. 연합군의 공습 (1월 24일 - 30일)
1942년 1월 중순부터 발릭파판에 남아 있던 BPM 직원과 민간인들은 항공 수송을 통해 대피하기 시작했다. ML-KNIL 소속 록히드 로드스타 3대와 KNILM 소속 DC-2 1대가 수라바야에서 보급 및 대피 비행을 수행했다. 1월 20일부터는 수상 비행기를 통해서만 대피가 가능했으며, 해체 작업을 수행한 기술자들과 지휘관들도 대피했다.[21][22]MLD 역시 대피 작전을 시작하여, 도르니에 비행정 2대가 발릭파판과 수라바야를 오가며 해군 사령관, 부하들, 삼보자 유정 파괴팀을 대피시켰다. 악천후와 연료 문제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들은 수라바야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도르니에 비행정 2대 중 한 대는 악천후로 돌아가야 했고, 다른 한 대는 추락하여 폭발하면서 5명의 승무원 중 4명이 사망했다. 도시의 맹렬한 화재는 비행기들이 한 시간이나 떨어진 거리에서도 보일 정도로 비행기들을 유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21][22][23]
나머지 해체팀, BPM 및 기타 회사에서 온 유럽인 87명과 인도네시아인 10명은 140명의 인도네시아인 짐꾼의 도움을 받아 반자르마신으로 행진했다. 일본군이 경로를 차단하자 짐꾼들은 도망쳤고, 팀은 소규모 그룹으로 나뉘어 사마린다 II에 도달하려 했다. 가장 큰 그룹은 2월 말에 비행장에 도착하여 자바로 대피했고, 다른 그룹은 네덜란드가 항복할 때인 3월 8일에 도착했다. 일부는 배를 이용해 반자르마신, 자바, 롬복에 도착했으나,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살해된 사람들도 있었다. 총 87명의 유럽인 중 41명이 생존했다.[24]
발릭파판 점령 기간 중과 점령 이후, 주로 네덜란드 공군 소속의 ABDA 공군은 일본군을 약화시키거나 몰아내기 위해 사마린다 2 비행장에서 매일 공습을 감행했다. 1월 24일, 1차 공격은 오전 7시 15분에 시작되었다. 마틴 B-10 폭격기 10대와 버팔로 전투기 14대가 공격에 참여했다. 네덜란드 조종사들은 수송선 1척을 격침시키고 다른 1척을 손상시켰으며, 구축함 ''가와카제''를 공격했다고 주장했지만, 일본 측 보고에 따르면 단 한 척의 배도 손상되거나 격침되지 않았다.[54][55]
오전 8시경, 타라칸에서 출격한 일본 해군 제로 3대가 사마린다 2 비행장을 기총 소사했다. KNILM DC-3기가 피탄되었지만 정글에 불시착했다. 다야크족과 선교사가 나중에 그들을 구출했지만, BPM 피난민 중 한 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 비행장의 네덜란드 대공포화에 제로기 1대가 추락하여, 네덜란드군은 전투기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56]
오전 9시에서 9시 50분 사이에, 미국 7 및 19 폭격기 그룹 소속 B-17 플라잉 포트리스 8대가 정박 중인 선박을 공격했다. B-17기는 제로기 2대를 격추했지만, 폭격기 3대가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오후 늦게, 버팔로 14대와 마틴 B-10 10대가 일본군 부대 위치를 정찰하고 폭격했으나, 짙은 구름과 일본군의 대공 포화로 인해 공격은 명중하지 못했지만 미쓰비시 F1M '피트' 정찰기 2대를 격추했다.[57] 공격대가 오후 3시 30분에 착륙했을 때, 제로기 6대와 밥스 1대가 공습하여 마틴 B-10 3대를 파괴했다. 버팔로 3대가 전투기를 몰아내려 했지만, 제로기에 의해 2대가 격추되었다. 제로기 1대가 대공 포화로 심각한 손상을 입고 바다에 불시착했다.[58]
다음 날, 제1-VLG-I 비행대의 마틴 B-10 폭격기 9대가 투입되었다. 악천후로 인해 대형이 흩어졌고, 오전 8시에 폭격기들이 발릭파판에 도착했을 때 제로센 4대와 교전했다. 25분간의 공중전에서 제로센은 마틴 1대를 격추하고 3대를 손상시킨 반면, 폭격기의 방어 사격에 의해 1대가 손실되었다. 나머지 폭격기들은 반자르마신의 오엘린 비행장으로 이동했다.[59]
네덜란드군은 또한 버팔로 6대를 발릭파판 주변에 무장 정찰 임무로 보냈지만, 짙은 연무와 비로 인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버팔로가 오전 9시 30분경에 돌아오자마자, 27대의 미쓰비시 G4M '베티' 폭격기가 약 6400.80m 상공에서 사마린다 II를 폭격하여 활주로가 부분적으로 사용 불가능해졌고 버팔로 2대가 손상되었다. 오후 3시 30분에 제로센 4대와 밥스 1대가 비행장을 기총 소사하여 마틴 1대와 버팔로 1대를 파괴했다.[60]
미국은 B-17 8대를 파견하여 공격을 이어갔다. 악천후로 인해 4대가 돌아갔으며, 3대는 연료 부족으로 마두라 섬 해변에 비상 착륙했다. 나머지 B-17은 일본 제로센에 의해 요격되었다. B-17 방어는 제로센 2대를 격추했지만, B-17 1대가 심하게 손상되어 오엘린에 비상 착륙해야 했다. 이 공격들은 일본 함대에 어떠한 피해나 손실도 입히지 못했다.[61][35]
2일 후, 짙은 구름으로 인해 일본군과 연합군 모두 공격을 할 수 없었다. ML-KNIL은 1월 25일부터 27일 사이에 보르네오에서 대부분의 Martin-B10과 버팔로를 철수시켰다. 1월 26일, ABDAIR 사령부는 ML-KNIL과 USAAF의 제5폭격사령부에 발릭파판에 대한 폭격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고 명령했다. 27일, 제7폭격대와 제19폭격대는 6대의 플라잉 포트리스를 출격시켰다. 그 중 한 대는 악천후로 인해 돌아가야 했지만, 폭격기들은 수상기 모함 ''사누키 마루''에 명중탄을 기록하여, 마카사르 해협으로 후퇴하도록 만들었다.[62][63]
같은 시각, 타라칸에서 출격한 6대의 제로기와 1대의 밥스는 오일린의 마틴 B-10 함대를 공격했다. 네덜란드군이 공격기를 격추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마틴 6대가 모두 파괴되었다. 또한, 마틴 3대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ABDAIR은 미국의 중폭격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64]
이틀 후, B-17 플라잉 포트리스 5대가 일본 함대를 향해 다시 출격했다. 폭격기 중 한 대는 비행 도중 회항했고, 나머지 4대는 발릭파판 상공에서 13대의 제로센의 공격을 30분 동안 받았다. B-17 1대는 손상으로 인해 귀환 비행 중 추락했다. 미군은 제로센 6대를 격추했다고 믿었지만, 일본 기록은 제로센 1대만 격추되었고 다른 1대는 망가르 비행장에 착륙하면서 손상되었다고 기록했다.[65][66]
1월 30일, 제19폭격기군은 두 차례의 공습을 감행했지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낮에 B-17 3대가 수행한 첫 번째 공습은 실패했고, 그날 밤 늦게 LB-30 폭격기 2대가 공격을 가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야간 공격은 발릭파판 해전에서 일본 함대의 진격을 막으려는 연합군의 마지막 시도였다.[67]
5. 결과 및 영향
1942년 1월 26일, 사카구치 부대는 네덜란드 잔존 저항 세력을 소탕하고 망가르 비행장 건설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정유 시설 및 기타 지원 시설을 파괴했지만, 일본군은 유전을 수리하여 1942년 6월부터 1943년 8월까지 가동을 유지했다. 이후 연합군의 첫 공습이 시작되어 다시 폭격을 받았다. 발릭파판 정유소는 옥탄가가 높아 일본군의 남서 태평양 전역 작전을 지원하는 데 크게 활용되었다. 망가르 비행장은 1월 27일에 수리되었고, 다음 날 제23항공전대의 제로기 9대가 착륙하여 30일까지 비행장에 본부를 설치했다. 사카구치 부대는 주력을 배치하고 도시에 군정을 수립했다.[66][68]
사카구치 부대의 작전 손실은 육상에서 8명, 해상에서 39명(''쓰루가 마루'' 침몰 시)이 사망했다. 일본 해군은 적어도 121명의 해군 승무원이 사망했다.[69] 일본의 물적 손실은 다음과 같다:[70]
구분 | 선박명 | 비고 |
---|---|---|
침몰 | 나나 마루 | 항공 연료 |
침몰 | 쓰루가 마루 | 야전 포병 대대 본부, 야전 포병 1개 포대, 대공 포병 대대 본부, 대공 포병 1개 포대, 의료 부대 |
침몰 | 스마노우라 마루 | 지뢰 및 폭뢰 |
침몰 | 다쓰가미 마루 | 탄약 |
침몰 | 구레타케 마루 | 제3대대 본부, 제12중대, 제3기관총중대 |
심각하게 손상 | 초계정 P-37 | - |
심각하게 손상 | 아사히산 마루 | - |
약간 손상 | 구마가와 마루 | - |
약간 손상 | 사누키 마루 | - |
1,100명의 네덜란드 수비병 중 200명만이 2월 6일 사마린다 II에 도착했고, 그들 중 대다수는 자바로 대피했다.[52]
발릭파판 해전에서 미 제5기동부대는 어뢰 48발을 발사했지만, 12척의 수송선 중 4척만 격침시키고 7발의 명중탄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성공률 15%). 이러한 저조한 성과는 마크 15 어뢰의 신뢰성 부족이 주요 원인이었다.[71] 탈보트 사령관은 고속으로 수송선을 공격하여 어뢰의 정확도를 떨어뜨렸을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는 경험이 부족한 승무원에 의해 운영되었다.[72]
이 해전은 발릭파판 점령을 막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1898년 마닐라 만 해전 이후 미국 해군이 동남아시아에서 참여한 최초의 수상 교전이었다.[71] 이 전투의 성공은 미국인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으며, 네덜란드에게 그들의 동맹국이 전투를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렸다. 발릭파판은 1945년 7월 호주군이 이 도시를 해방할 때까지 일본의 통제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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