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무
1. 개요
배무는 후한 영제 때 출사하여 상서령까지 오른 인물이다. 초평 4년(193년) 헌제의 명으로 죄수 200명을 사면했는데, 이각은 배무를 비난했지만 헌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안 2년(197년) 이각을 토벌하여 열후에 봉해졌으며, 건안 19년(214년)에는 헌제의 명을 받아 조조에게 금새 등을 하사했다. 배무의 아들 배잠, 배준, 배관, 배집, 배휘는 각각 위나라와 촉한에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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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배씨 -
배송지
배송지는 동진과 유송 시대의 인물로, 진수의 《삼국지》에 대한 방대한 주석 작업인 '배송지주'를 완성하여 《삼국지》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정치적 역량도 발휘하며 역사 연구에 기여했다. -
하동 배씨 -
배수 (서진)
배수는 위나라와 서진 시대의 관료이자 지리학자로, 사마소의 신임을 얻어 서진 건국에 기여했으며, 지도 제작의 기본 원칙인 제도육체를 정립하고 《우공지역도》를 제작하여 중국 지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
한나라의 외교관 -
반초
반초는 후한 시대의 군인이자 외교관으로,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서역 경영에 크게 기여하고 실크로드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
한나라의 외교관 -
장건
장건은 한나라의 외교관이자 탐험가로, 한무제의 명을 받아 흉노 견제를 위한 대월지 동맹을 추진하며 서역에 파견되어 실크로드 개척의 계기를 마련하고 중국과 서역의 교류를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
후한의 정치인 -
사일
사일은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 초 교주 지역에서 활동하며 정궁을 보좌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합포 태수를 역임했으나, 손권에게 귀순 후 사휘의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며 격변기의 사씨 가문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
후한의 정치인 -
응창
응창은 후한 말기에서 삼국시대 초기에 활동한 문장가이자 건안칠자의 일원으로, 조조에게 발탁되어 관직 생활을 했으며 조비의 총애를 받았으나 역병으로 요절하여 조비의 안타까움을 샀고, 그의 문학적 재능은 조비와 조식에게 인정받았으며 동생 응거와 아들 응정 또한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2. 생애
명문가 출신으로, 영제 대에 출사하여 현령, 태수, 상서를 역임하였고 상서령에까지 올랐다.
초평 4년(193년) 5월, 큰비가 20일 가량이나 내렸다. 황제는 시어사 배무를 시켜 죄가 가벼운 자 2백 명을 사면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각의 무고로 잡힌 자도 있었다. 이각은 이에 대하여 황제에게 상주하였다.
황제가 답하였다.
건안 2년(197년) 10월, 알자복야 배무는 단외를 필두로 하여 관중(關中)의 장수들을 거느렸고, 이각을 토벌하여 그 삼족을 멸하였다. 이 공적으로 열후에 봉해져 양길평후(陽吉平侯)가 되었다.
건안 19년(214년) 3월, 천자는 위공(魏公)의 위계를 제후왕보다 위로 두는 한편 붉은 끈이 달린 금새(金璽)와 원유관(遠遊冠)을 하사하였다. 이에 좌중랑장 · 양선정후(楊宣亭侯)인 배무를 지절로 하여 위공에게 전달하였다.
부친 배엽은 병주 자사·도료장군을 지냈다.
2.1. 출사 및 관직 생활
명문가 출신으로, 영제 대에 출사하여 현령(縣令) · 군수(郡守) · 상서(尙書)를 역임하였고 상서령(尙書令)에까지 올랐다.
초평 4년(193년) 5월, 큰비가 20일 가량이나 내려 황제가 시어사(侍御史) 배무를 시켜 죄가 가벼운 자 2백 명을 사면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각의 무고로 잡힌 자도 있었다. 이각은 이에 대하여 황제에게 배무가 멋대로 죄수를 풀어주고 나쁜 무리와 결탁했을 것이라며 배무를 붙잡아야 한다고 상주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칙명에 따라 은택을 베풀고 죄가 가벼운 자를 풀어주는 것은 하늘의 뜻에도 맞다며 한쪽은 사면해주는데 한쪽은 죄를 묻는 것은 불가하다며 들어주지 않았다.
건안 2년(197년) 10월, 알자복야(謁者僕射) 배무는 단외(段煨)를 필두로 하여 관중(關中)의 장수들을 거느렸고, 이각을 토벌하여 그 삼족을 멸하였다. 이 공적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져 양길평후(陽吉平侯)가 되었다.
건안 19년(214년) 3월, 천자는 위공(魏公)의 위계를 제후왕보다 위로 두는 한편 붉은 끈이 달린 금새(金璽)와 원유관(遠遊冠)을 하사하였다. 이에 좌중랑장(左中郞將) · 양선정후(楊宣亭侯)인 배무를 지절(持節)로 하여 위공에게 전달하였다.
부친 배엽은 병주 자사·도료장군을 지냈다.
2.2. 이각과의 갈등과 헌제 옹호
배무는 명문가 출신으로, 영제 때 출사하여 현령(縣令) · 군수(郡守) · 상서(尙書)를 역임하였고 상서령(尙書令)에까지 올랐다.
초평 4년(193년) 5월, 큰비가 20일 가량이나 내리자 헌제의 명을 받아 죄가 가벼운 자 200명을 사면하였다. 그 중에는 이각의 무고로 잡힌 자도 있었다. 이각은 이에 대하여 황제에게 상주하였다.
황제가 답하였다.
건안 2년(197년) 10월, 알자복야(謁者僕射) 배무는 단외를 필두로 하여 관중(關中)의 장수들을 거느렸고, 이각을 토벌하여 그 삼족을 멸하였다. 이 공적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져 양길평후(陽吉平侯)가 되었다.
건안 19년(214년) 3월, 헌제의 칙사로서 좌중랑장(左中郞將) · 양선정후(楊宣亭侯)였던 배무는 지절(持節)로써 위공(魏公)에게 위계를 제후왕보다 위로하고 붉은 끈이 달린 금새(金璽)와 원유관(遠遊冠)을 하사하였다.
2.3. 이각 토벌 및 공적
배무는 명문가 출신으로, 영제 때 출사하여 현령(縣令) · 군수(郡守) · 상서(尙書)를 역임하였고 상서령(尙書令)에까지 올랐다.
초평 4년(193년) 5월, 큰비가 20일 가량이나 내려 황제는 시어사(侍御史) 배무를 시켜 죄가 가벼운 자 2백 명을 사면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각의 무고로 잡힌 자도 있었다. 이각은 이에 대하여 황제에게 상주하였다.
황제가 답하였다.
건안 2년(197년) 10월, 알자복야(謁者僕射) 배무는 단외를 필두로 하여 관중(關中)의 장수들을 거느렸고, 이각을 토벌하여 그 삼족을 멸하였다. 이 공적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져 양길평후(陽吉平侯)가 되었다.
건안 19년(214년) 3월, 천자는 위공(魏公)의 위계를 제후왕보다 위로 두는 한편 붉은 끈이 달린 금새(金璽)와 원유관(遠遊冠)을 하사하였다. 이에 좌중랑장(左中郞將) · 양선정후(楊宣亭侯)인 배무를 지절(持節)로 하여 위공에게 전달하였다.
2.4. 조조에게 금새 하사
배무는 영제 시대에 출사하여 현령, 태수, 상서를 역임했고, 관위는 상서령에까지 올랐다. 초평 4년(193년), 시어사로서 헌제의 명을 받아 옥에 갇힌 200여 명을 석방했는데, 그 중에는 이각에 의해 갇힌 자도 있었다. 이각은 배무가 함부로 죄수를 석방했다며 체포하려 했으나, 헌제는 따르지 않았다.
건안 3년(198년), 알자복야로서 단외 등 관중의 여러 장수를 이끌고 이각을 토벌하여 삼족을 멸했다. 그 공로로 열후에 봉해졌다. 건안 19년(214년), 좌 중랑장, 양선정후로서 헌제의 칙사로 위공 조조에게 금새, 적불, 원유관을 수여했다.
3. 가계
『산서통지』에는 배무의 다섯 아들의 이름과 업적이 기술되어 있다.
* 배잠은 위나라의 광록대부·청양정후였다. 어머니의 신분이 낮았고, 배잠 자신도 세세한 행실을 지키지 않는 성격이라 배무에게 경시되었다。
* 배준은 십여 세 때 촉중의 장사로 부임하는 누이를 보내려다 전란에 휘말려 귀향하지 못하고, 촉한의 광록훈이 되었다.。
* 배관은 상서령을 지냈으며 중권배씨의 조상이다.
* 배집은 후한 헌제 시기에 공부상서가 되었으며 동권배씨의 조상이다.
* 배휘는 위나라의 기주 자사·난릉무공으로 서권배씨의 조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