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골병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백골병단은 1951년 1·4 후퇴 이후 조선인민군에 대한 정보 수집을 위해 창설된 대한민국 육군 유격 부대이다. 채명신 중령의 지휘 아래 700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북한군으로 위장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첩보 활동을 수행했다. 주요 작전으로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길원팔 중장 등 고위 간부 13명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작전 중 많은 사상자를 냈다. 백골병단은 임시 군번으로 인해 전역 후 불이익을 겪었으며, 2010년에 전역 신고를 마쳤다. 강원도 인제군에는 백골병단 전적비가 건립되어 전사자들을 기리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한국 전쟁에 참전한 대한민국의 대대 -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6.25 전쟁 중 육군사관학교 생도와 제7보병사단 병력으로 구성되어 불암산을 근거지로 서울 북방 등지에서 활동한 유격대였으며, 지역 사회의 지원을 받았으나 1951년 9월 수도사령부 수송대 공격을 마지막으로 활동이 종료되었다. - 반공주의 유격대 -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6.25 전쟁 중 육군사관학교 생도와 제7보병사단 병력으로 구성되어 불암산을 근거지로 서울 북방 등지에서 활동한 유격대였으며, 지역 사회의 지원을 받았으나 1951년 9월 수도사령부 수송대 공격을 마지막으로 활동이 종료되었다. - 대한민국 육군의 보병대대 - 제7기동군단 강습대대
제7기동군단 강습대대는 대한민국 육군 제7기동군단 예하 부대로, 강습 작전을 수행하며, 제1강습대대와 제2강습대대로 구성되어 있다. - 대한민국 육군의 보병대대 -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6.25 전쟁 중 육군사관학교 생도와 제7보병사단 병력으로 구성되어 불암산을 근거지로 서울 북방 등지에서 활동한 유격대였으며, 지역 사회의 지원을 받았으나 1951년 9월 수도사령부 수송대 공격을 마지막으로 활동이 종료되었다.
백골병단 | |
---|---|
기본 정보 | |
이름 | 육군본부 직할 결사대 "백골병단" |
활동 기간 | 1951년 1월 ~ 3월 30일 |
병과 | 보병 |
종류 | 경보병 |
역할 | 게릴라, 유격대 |
규모 | 대대, 647명 |
명령 체계 | 육군 본부 |
참전 | 한국 전쟁 |
지휘관 | |
지휘관 | 중령 채명신 |
2. 역사
1·4 후퇴 이후 조선인민군 후방 정보 수집 및 교란을 위해 육군 본부는 특수 유격 부대 창설을 결정했다. 학도병 등을 포함한 700여 명을 선발, 훈련시켜 3개 보병연대를 편성하고 1951년 초 적 후방으로 침투시켰다. 작전 효율성을 위해 이들 3개 연대는 채명신 중령의 통합 지휘 아래 백골병단(白骨兵團)으로 명명되어 활동했다. 백골병단은 1951년 3월 말까지 강원도 등 적 후방 지역에서 활동하며 조선인민유격대 고위 간부 생포 등 전과를 올렸으나, 단원 절반 이상이 전사하는 큰 희생을 치렀다.[1] 1951년 3월 말 귀환 후 일부 생존 대원은 다른 유격 부대에 합류했다. 유격대 특성상 임시 군번만 부여받아 정식 기록이 없어 전후 복무 경력 인정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2010년 생존 대원들이 명예 전역식을 가졌다.
2. 1. 창설 배경
1951년 1·4 후퇴를 겪으면서 대한민국 육군 본부는 조선인민군에 대한 정보 수집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따라 보충대에 있던 애국 청년, 학도병, 경찰관, 부대 낙오 장병 등 약 700명을 선발하여 정보학교에서 특별 훈련을 시켰다. 훈련을 마친 이들은 제11, 12, 13보병연대로 편성되었다.편성된 3개 연대는 대구광역시를 거점으로 각기 다른 날짜에 적 후방 침투 작전을 개시했다. 가장 먼저 채명신 중령이 이끄는 제11연대가 1951년 1월 31일, 조선인민군으로 위장하고 강원도 영월과 평창군 지역으로 침투했다. 이어서 2월 4일에는 제12연대가, 2월 11일에는 제13연대가 각각 중부 산악 지대로 침투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각 연대의 활약상이 보고되자, 육군 본부는 작전의 효율성을 높이고 부대 간 상호 협조를 원활히 하기 위해 3개 연대를 통합 지휘하기로 결정했다. 통합 부대 지휘관으로는 제11연대를 이끌었던 채명신 중령이 임명되었다. 채명신 중령은 자신이 지휘하게 된 이 통합 유격 부대에 백골병단(白骨兵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살아 돌아오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명칭이었다.
백골병단은 창설 초기부터 유격 부대라는 특수한 성격 때문에 정식 군번 대신 임시 군번을 부여받았다. 이는 당시 급박한 전황 속 조치였으나, 결과적으로 부대원들의 정식 군 복무 기록이 남지 않는 원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백골병단 생존자들은 전후 복무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등 여러 불이익을 겪기도 했다.[1]
2. 2. 주요 작전 및 성과
1·4 후퇴 이후 육군 본부는 조선인민군에 대한 정보 수집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보충대에 있던 애국 청년, 학도병, 경찰관, 부대 낙오 장병 등 약 700명을 선발하여 정보학교에서 특수 훈련을 시켰다. 이들은 제11, 12, 13보병연대로 편성되었다.3개 연대는 대구광역시에서 출발하여 각기 다른 시점에 적 후방으로 침투했다. 1951년 1월 31일, 채명신 중령이 이끄는 제11연대가 북한군으로 위장하여 강원도 영월과 평창 지역으로 가장 먼저 침투했다. 이어 2월 4일에는 제12연대가, 2월 11일에는 제13연대가 중부 산악 지대로 침투했다. 각 연대의 활약상이 보고되자 육군 본부는 작전의 효율성과 협조를 위해 3개 연대를 통합 지휘하도록 했고, 채명신 중령이 통합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채명신 중령은 이 통합 부대를 '백골병단'이라 명명했다.
백골병단은 1951년 3월 말까지 북한 강원도 일대의 적 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유격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3월 18일에는 강원도 인제군 필례 마을에서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자 인민군 중앙당 제5지대장이었던 길원팔 중장과 참모장 강칠성 대좌 등 적 고위 간부 13명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1]
364명의 백골병단 대원이 전사한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는 이들을 기리기 위한 "백골병단 전적비"가 1990년에 건립되었다. 매년 이 전적비 앞에서 전사한 대원들을 위한 추모제가 열린다.[2]
[1]
뉴스
6·25 노병들 '59년 만의 전역식'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14-02-01
길원팔 중장 생포 당시, 백골병단은 인민군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채명신 중령은 자신의 고향인 평안도 사투리를 사용하며 '중앙당에서 검열 나왔다'고 속여 길 중장을 안심시킨 뒤 생포했다. 채 중령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귀순을 권유하자, 길 중장은 이를 거절하며 두 가지를 청했다. 하나는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하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데리고 있던 10살 소년(전쟁 고아)을 채 중령의 아들로 입적시켜 교육해 달라는 것이었다. 채 중령은 두 요청을 모두 수락했고, 길 중장은 권총으로 자결했다. 채 중령은 약속대로 소년을 자신의 막내 동생 호적에 올려 친동생처럼 양육했으며, 이 소년은 훗날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수가 되었다.
이처럼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작전 과정에서 백골병단은 창설 단원 647명 중 절반이 넘는 364명이 전사하는 큰 희생을 치렀다.[1]
1951년 3월 30일, 백골병단은 제7사단 수색대와 접촉하여 무사히 귀환했다. 이후 4월에 TF 커크랜드(후에 TF 스캔논, 제3유격보병연대로 개칭)가 창설되자 백골병단 생존자 중 일부가 자원하여 합류했다.
그러나 유격대라는 특수성 때문에 창설 당시 임시 군번만 부여받고 정식 기록이 남지 않아, 작전 종료 후 복귀한 대원들은 군 복무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등 불이익을 겪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2010년 6월 25일 6·25전쟁 당시 급박한 상황으로 인해 전역식을 치르지 못했던 백골병단 생존자 26명이 계룡대 연병장에서 명예로운 전역 신고를 할 수 있었다.
3. 전적비
참조
[2]
웹인용
백골병단전적비
http://www.doopedia.[...]
두산백과
2014-02-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