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1·4 후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4 후퇴는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3차 공세로 인해 유엔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한 사건이다. 중공군의 한국 전쟁 참전 배경에는, 1950년 6월 27일 미국이 타이완 해협에 해군을 급파하고, 10월 2일 한국군이 38선을 통과하자 소련이 중공군 개입을 승인한 상황이 있었다.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은 38선에 배치된 한국군을 공격하여 서울을 점령했고, 유엔군은 1월 4일 서울에서 철수했다. 이로 인해 유엔군의 사기는 저하되었지만, 매튜 B. 리지웨이의 지휘 아래 유엔군은 반격을 준비했다. 중공군은 승리했으나 소모가 심했고, 유엔군은 중공군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태국이 참가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 폭찹힐 전투
    폭찹힐 전투는 한국 전쟁 휴전 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미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이 해발 300m의 고지인 폭찹힐을 두고 두 차례에 걸쳐 치열하게 격돌한 고지전으로, 휴전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소모전의 양상을 보이며 막대한 인명 피해를 발생시켰다.
  • 튀르키예가 참가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 청천강 전투
    청천강 전투는 한국 전쟁 중 1950년 11월 청천강 유역에서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중국의 개입으로 유엔군이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며 전황을 공산군 측에 유리하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 튀르키예가 참가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 선더볼트 작전
    선더볼트 작전은 1951년 1월, 중공군 개입으로 불리해진 전세를 뒤집기 위해 유엔군이 서울 수복을 목표로 실시한 반격 작전이다.
  • 1951년 1월 - 국민방위군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은 한국 전쟁 중 창설된 국민방위군에서 부정부패와 부실 운영으로 9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드러내고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어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요구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1951년 1월 - 의정부 전투 (1951년)
    1951년 1월 초 한국 전쟁 중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유엔군이 북한에서 철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의정부 전투에서 제27영연방여단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중공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며 미국 제8군의 철수를 엄호했지만, 결국 서울은 중공군에게 점령당했다.
1·4 후퇴 - [전쟁]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중국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을 축하하는 모습
중국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을 축하하는 모습
기본 정보
분쟁 명칭제3차 서울 전투
부분 전쟁한국 전쟁
다른 명칭1·4 후퇴
제3차 전역 서선 (중국어)
중국 신정 공세 (영어: Chinese New Year's Offensive)
날짜1950년 12월 31일 – 1951년 1월 7일 (약 1주일)
장소서울, 대한민국
결과중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승리 (전술적), 전략적 패배
교전 세력
연합군유엔군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태국
대한민국
공산군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연합군더글러스 맥아더
매슈 B. 리지웨이
이형근
백선엽
장도영
배질 오브리 코드
토머스 브로디
크리앙크라이 아타난
공산군마오쩌둥
펑더화이
한셴추
리권무
부대 규모
연합군136,525명
12,269명
미상
제8군
제1군단
제1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제27보병여단
제9군단
제6보병사단
제24보병사단
제29보병여단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21보병연대
제3군단
제2보병사단
제5보병사단
공산군~170,000명
제13 군
조선인민군
제1군단
제38 군단
제112사단
제113사단
제114사단
제39 군단
제115사단
제116사단
제117사단
제40 군단
제118사단
제119사단
제120사단
제42 군단
제124사단
제125사단
제126사단
제50 군단
제148사단
제149사단
제150사단
제66 군단
제196사단
제197사단
제198사단
피해 규모
연합군481명
300명
9명
미상
공산군~5,800명
~2,700명

2. 배경

1950년 말, 중국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유엔군의 북진 이후 북한이 유엔의 통제 하에 놓이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 인민지원군(PVA)은 11월 25일 중·조 국경 근처에서 유엔군을 상대로 제2차 공세를 개시했다.[5] 그 결과, 청천강 전투장진호 전투에서 유엔군은 1950년 12월 북한에서 철수해야 했고, 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KPA)은 북한의 상당 부분을 탈환했다. 한국 서부 전선에서 미 제8군은 청천강에서 참담한 패배를 겪은 후, 임진강까지 후퇴하여 한국의 수도인 서울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제8군은 가능한 한 오랫동안 서울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유엔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유엔군이 압도될 경우 부산 교두보까지 일련의 철수를 계획했다. 월튼 워커 제8군 사령관은 12월 23일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이 12월 26일 제8군 사령관직을 맡았다. 유엔에서는 미국과 중국 간의 적대 행위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12월 11일 중국에 38도선에서의 휴전을 제안했다.

인민지원군은 이전 전투로 인해 전력이 약화되었고, 병력의 거의 40%가 전투 불능 상태였지만, 유엔군에 대한 예상치 못한 승리는 중국 지도부에게 인민지원군의 무적성을 확신시켰다. 청천강에서 제8군을 상대로 인민지원군 제13군이 승리한 직후,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김일성 북한 수상의 권고에 따라 유엔군에 대한 또 다른 공세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맥아더의 계획과 유엔 휴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마오쩌둥은 유엔의 한반도 철수가 임박했다고 믿었다. 중국의 물류 수송 문제로 인민지원군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마오쩌둥은 여전히 인민지원군 제13군에게 "제3차 공세"로 명명된 침공을 명령했다. 1950년 12월 23일, 저우언라이 중국 외교부장은 유엔 휴전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면서, 모든 유엔군에게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2. 1. 중공군 개입 과정

1950년 6월 27일, 조선인민군의 남침 이틀 후이자 중공군 개입 3개월 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중화민국을 보호하기 위해 타이완 해협으로 미 해군 제7함대를 급파하였다.[16] 7월 1일, 저우언라이는 미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이미 묵덴 지역에 12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켜 놓았으며, 자국의 군대는 북한군으로 가장해 전투에 참가할 것이라고 언급했다.[16] 8월 4일, 마오쩌둥은 소련 정치국에 중화인민의용군의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전쟁에 개입할 것임을 보고하였다. 8월 20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UN에 "한국은 중국의 이웃나라이므로...중국인은 한반도 상황에 개입해야만 한다."는 내용을 통보하였으며, 중립국 외교관을 통해 "중국의 안전을 위하여 UN의 한국전 개입을 방해할 것"이라고 미국에도 통보하였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UN을 협박하기 위한 뻔한 시도"로 결론 내렸다.

1950년 10월 2일, 한국군이 38선을 통과한 다음 날, 소련 정치국은 중공군 개입을 승인하였고, 후에 중공군은 미군 폭격기가 북한을 향하던 중 중공의 영공을 침범하였기 때문이라 주장하였다. 9월, 모스크바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는 스탈린에게 군사 및 물자 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지체함에 따라 마오쩌둥도 예정을 변경하여 한국전 개입을 1950년 10월 13일에서 19일로 연기하였다. 소련군은 공중 엄호를 서방 공군과의 전쟁 경험을 위한 전선에서 100km 이상의 거리에서만 허용하였으나, 이용된 미그-15s기는 UN의 제공권에 큰 위협을 가하였다.

1950년 10월 8일, 미군의 38선 이북으로 진군한 다음 날,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해방군 북방지역군에게 중화인민의용군 휘하로 편입하여 한국을 침공할 것을 명령하였다. 중공인민의용군은 야간진군과 오전 5시 30분 이전까지 전개된 대공 위장술, 그리고 이어진 주간 진군 팀의 다음 야영지 수색은 미 항공 수색의 의용군 포착을 어렵게 하였다. 주간 진군 동안 항공기가 포착되면 사라질 때까지 병사들은 미동을 정지한 채 있도록 하였고, 그러한 전략은 3사단을 만주의 안퉁에서 한국전쟁 지역까지 460km를 19일 동안 이동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하였고, 반면 산악지대를 행군로로 선택한 다른 사단은 18일 동안 29km를 행군하는 데 그쳤다.

10월 중순에 저우언라이는 소련을 비밀리에 방문하고 모스크바에서 전문을 타전하였는데, 이 전문에는 “스탈린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조선 파병 반대 결의에 이의를 표명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었다.[17] 10월 하순, 저우언라이가 모스크바에서 타전한 전문을 접수한 이후 중공 지도부에서는 한국전쟁 참전 여부에 관해 논란이 있었다. 가오강은 10월 25일 회의에서 자신이 중공군의 조선 파병을 반대하는 저우언라이와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고 언급하였다. 결정적 순간에 가오강은 펑더화이에게 미국이 조선 전역을 점령할 경우 중공과 국제 정세 전반에 야기될 위험을 설명하고 펑더화이를 설득하여 마오쩌둥에게 즉각적인 조선 파병을 공동 건의키로 합의했다.[18]

1950년 10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 웨이크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중공군이 개입하기에는 이미 늦어 침공 가능성이 적다고 의사를 밝혔고, 중공군은 만주에 30만, 압록강변에 10~12만 5천 명의 군이 포진해 있으며 그중 반 정도가 압록강을 넘어 남진할 수도 있으나, "공중 지원 없이 그들이 평양으로 진격할 경우 대패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10월 24일, 중공 정부가 개최한 '민주적 정당' 지도자들과의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조선은 중국의 문턱으로, 일본 제국이 조선 강점 이후 조선을 중국 침공의 교두보로 이용했음을 들어 미국의 조선 장악을 용인할 수 없다고 연설하였다. 또한 소련으로서는 조선의 사태에 개입할 당위성이 현재로서는 없으나, 중공과 소련 간에는 우호 및 상호 원조 조약이 체결돼 있으므로 만약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는 경우 소련은 조약상 중공에 대한 의무를 이행할 것이라고 말했다.[19] 10월 25~26일, 중국 인민지원군은 북조선에서 한국군의 1개 대대를 궤멸시켰으며 이는 중공군의 한반도 내 첫 번째 전투 행위였다.[20]

두 번의 작은 충돌 후, 1950년 11월 1일 북한 진영 깊숙이에서 첫 번째 대규모 미-중 전투가 벌어졌다. 수천의 인민의용군이 곳곳에 산재한 UN 지휘 부대를 북쪽, 북서쪽, 서쪽 3개 방향에서 삼자창 전법으로 포위, 공격하여 방어 태세의 측면을 괴멸시켰다. (운산 전투) 11월 말, 서부 진영 청천강 유역에서 인민의용군은 몇몇 한국군 사단과 남아있던 UN군의 측면을 괴멸시켰고 UN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터키 여단이 중국 국경의 군우리에서 방어에 성공함에 따라 미 8군은 퇴각로를 확보하였고 중화인민의용군의 진격을 4일간 늦출 수 있었다. 동부 진영의 함경남도 개마고원장진호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삼지창 전법에 익숙하지 못했던 미 제7보병사단의 연대 전투단(3,000명)과 미 제1해병사단이 5군단의 지원 사격하에 겨우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는 10배에 달하던 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으로 미군 측이 15,000명의 사상자를 낸 전투이다.

초창기의 전방 인민의용군은 중화기나 승무원 탑승의 경기갑이 전혀 없었으나 빠르게 그들의 이러한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일반적으로 사용된 전법은 50명 규모의 소대에서 200명 규모의 중대 등 작은 규모의 부대를 침투시켜 여러 분대로 나눈 후, 한 분대가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는 사이 남은 분대는 전방과 측면을 합동 공격하는 것이었다. 방어 세력이 결국 패하여 후퇴할 때까지 전방위 공격을 집중함과 동시에 측면으로 몰래 이동하여 같은 전법을 반복하였다.

첫 번째 대공세 국면에서는 경험이 풍부한 경보병이 박격포 이상의 중장비의 도움 없이 공격을 주도하였고, 이들 중공군은 수십 년 동안 중일전쟁과 국민당과의 내전을 통해 잘 훈련된 모습을 보였으며 야간 기습에 특히 뛰어났고 무엇보다도 군사 위장에 능통하였다. 순찰대는 UN군의 위치 추적에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이들 부대의 후면으로 이동, 퇴각로를 차단한 후 삼지창 전법으로 전방위 대공세를 가하는데 뛰어났다. 또한 하치 시키라 불리는 전법도 구사하였는데, 이는 V자 진형을 구축하여 적군을 진형 가운데로 끌어들인 후, V자의 입구를 막아 퇴각로를 차단, V자 좌우 측면이 적군을 포위, 섬멸하는 전법이었다. 이러한 전법은 온정 전투, 운산 전투 그리고 초산 전투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1월 말, 인민의용군은 UN 지휘 본부를 북동부 북한에서 38선 이남까지 밀어냈다. 북한으로의 진격 때보다 빠르게 퇴각한 UN군은 북한 동부 해안에 위치한 흥남시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고조를 기다렸다. 1950년 12월, 193척 분량의 UN군과 물자(군인 105,004명, 민간인 98,000명, 차량 17,500대, 물자 350,000톤)가 탈출하여 부산에 정박하였고, 1950년 12월 16일, 트루먼 대통령은 대통령 성명으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1951년 1월, 중화인민의용군과 북한 인민군은 제3단계 공세(중공군 동계 대공세)에 들어가 UN군을 비밀리에 포위, 공격하는 야간 전술을 펼쳤다. 공격에는 요란한 나팔과 징이 동원되어 작전 전달과 적군을 혼란시키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전법을 처음 목격한 UN군은 중공군 동계 작전에 압도되어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중공군에 빼앗기게 되었다.

3. 전개

1950년 12월 말,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유엔군38선 이남으로 후퇴하게 되었는데, 이를 1·4 후퇴라고 한다.

3. 1. 유엔군의 방어 전략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한강을 경계로 대략 남북으로 나뉜다. 38선에서 약 56.3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14]. 1·4 후퇴 당시 유엔군은 한반도 서해안의 임진강 하구에서 중부의 춘천시까지 이르는 38선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 국도 제33호선한탄강에서 38선을 따라 남하하여 의정부시를 지나 서울로 이어지는 주요 경로로, 예로부터 침략로로 사용되었다. 임진강을 건너 문산읍고양시를 거쳐 서울과 개성시를 연결하는 도로도 있었다. 또한 춘천을 지나 북동쪽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도로도 존재했다. 당시 한국의 겨울은 최저 기온이 -20°C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날씨였으며, 이로 인해 임진강과 한탄강의 대부분 도하 지점이 얼어붙어 중공군의 공격에 큰 장애물이 사라졌다[6].

1950년 12월 22일, 미 제8군은 38선 부근에서 전선을 안정시켰다. 월턴 워커는 사망 직전 미 제1군단, 제9군단, 대한민국 육군 제3군단을 38선에 배치하여 서울 방어를 맡겼다. 제1군단과 제9군단은 각각 임진강과 한탄강을, 제3군단은 춘천 주변 지역을 방어했다. 제1군단과 제9군단의 경계는 국도 제33호선이었으며, 서쪽은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동쪽은 제6사단이 방어했다.

1950년 말, 대한민국 육군은 약 45,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여 대부분의 부대가 훈련받지 못한 신병으로 구성되었다. 미국 육군 참모총장 조셉 로턴 콜린스는 전선 시찰 후 대한민국 육군이 전초 임무에만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한편, 제8군은 이전 패배로 사기가 저하되었고, 많은 병사들이 한국에서의 철수를 예상했다. 제8군의 전투 의지 부족과 중공군에 대한 정보 부족은 중공군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했다. 12월 27일, 매슈 리지웨이는 제1군단과 제9군단에게 고양시에서 의정부시까지 교두보선(Bridgehead Line)을 구축하여 유엔군의 서울 철수 시 한강 도하를 엄호하도록 지시했다.

중공군 역시 승리 이후 보급 문제와 피로에 시달렸다. 12월 7일,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마오쩌둥에게 부대 재보급, 휴식, 재편성이 시급하다는 전보를 보냈다. 중공군의 병참 시스템은 인민전쟁 이론에 기반하였으나, 38선 부근 주민들의 협조를 얻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중공군은 기아와 겨울옷 부족에 시달렸다.

펑더화이의 우려에 따라 마오쩌둥은 제3차 공세의 범위를 제한하고, 대한민국 육군을 38선 부근에 묶어두어 최대한 큰 피해를 입히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마오쩌둥은 유엔군 부대가 대한민국 육군 부대 사이에 배치되어 지원이 어렵다는 점을 파악하고, 인민해방군 제13군에게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제6보병사단, 제3군단을 격멸하도록 명령했다. 펑더화이는 제38집단군, 제39집단군, 제40집단군, 제50집단군을 제1보병사단과 제6보병사단 앞에, 제42집단군, 제66집단군을 제3군단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공세 시작일은 보름달 아래 야간 기습과 유엔군 병사들의 경계 태세 완화를 고려하여 12월 31일로 결정되었다. 리지웨이 역시 같은 이유로 12월 31일에 중공군의 공세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마오쩌둥은 38선에서 대한민국 육군을 격멸하면 유엔군의 반격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믿고, 전투 후 모든 중국군 부대를 전선에서 철수시켜 휴식과 재편성을 약속했다.

3. 2. 중공군의 공세 (1950년 12월 31일 ~ 1951년 1월 4일)

1950년 12월 31일 저녁, 중공군 제13군은 38선에 배치된 대한민국 국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임진강한탄강 일대에서 중공군 제38군, 제39군, 제40군, 제50군은 대한민국 제1사단을 궤멸시키고 대한민국 제6사단을 격퇴시켰다.[1] 춘천 지역에서는 중공군 제42군과 제66군이 대한민국 제3군단을 전면적인 후퇴로 몰아넣었다.[2] 1951년 1월 1일까지 38선의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자[3] 매슈 리지웨이는 1월 3일 서울 철수를 명령했다.[4]

38선에서 파란색 선을 향해 여러 개의 빨간색 화살표가 겹쳐져 있는 지도
중공군 제3차 춘계 공세 지도


1950년 12월 15일까지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은 적성면으로 후퇴했고,[5][6] 우익에는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이 동두천시 북쪽, 한탄강 남쪽 강변에 위치해 있었다.[7]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은 제11연대와 제12연대를, 제6보병사단은 제7연대와 제19연대를 배치하여 각각 임진강과 한탄강의 33번 국도를 방어했다.[8][9]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제15연대와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 제2연대는 예비대로 후방에 배치되었다.[10][11] 대한민국군은 방어선을 강화하고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벙커, 철조망 장애물 및 지뢰밭을 건설했다.[12]

중공군은 공세를 위해 한 달 이상을 준비했다.[13] 중공군 제39군 예하 부대는 대한민국군 방어에 대한 상세한 정찰을 수행했고,[14] 지휘관, 공병 및 포병 장교들이 대한민국군 진지를 철저히 분석했다.[15] 특별 훈련을 받은 공격 및 공병 부대로 구성된 중공군 "돌격" 부대도 조직되었다.[16] 중공군 포병 부대는 유엔군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100문의 포를 투입할 수 있었다.[17] 12월 22일, 중공군 최고 사령부는 제3차 춘계 공세의 시작을 알리는 작전 명령을 내렸다.[18] 중공군 제39군과 제50군은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을, 제38군과 제40군은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을 격멸하는 임무를 맡았다.[19]

리지웨이의 예측에 따라 대한민국 육군 본부는 12월 31일 해 질 무렵 모든 부대에 경계 태세를 강화하라고 명령했지만,[20] 많은 병사들이 신년 축하 행사로 술에 취하거나 추위를 피하기 위해 보초를 이탈했다. 중공군 포병 부대는 12월 31일 16시 30분에 대한민국군 진지에 포격을 시작했다. 첫 번째 공격은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에 가해졌는데, 중공군 제39군은 대한민국 육군 제12연대의 측면을 최대의 기습 공격 지점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중공군 제116사단과 제117사단이 대한민국 육군 제12연대의 양 측면을 강타했다. 대한민국 육군 제12연대는 방심한 상태에서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고, 몇 시간 만에 부대는 궤멸되었으며, 미국 제9야전포병대대 1개 포대가 중공군에게 탈취되었다. 중공군은 도주하는 대한민국군 병사들을 엄호하며 포격 한 발 없이 대한민국 육군 제15연대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백선엽 준장은 사단의 후방 지원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 대대를 편성했지만, 중공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1월 1일 아침까지 대한민국 육군 제11연대만 온전하게 남아 있었고,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은 1월 2일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중공군 병력의 대부분은 실수로 미국 제19보병연대, 제24보병사단을 공격했고, 잘못된 정보로 인해 여러 지뢰밭을 통과하게 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중공군은 미군 제19보병연대를 밀어냈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의 우익이 노출되었다. 중공군은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의 양 측면에서 남쪽으로 진격하여 사단을 포위하려 했다. 새해 전날 자정 무렵,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은 전면적인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은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의 일부 병력을 요격했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군은 산길을 이용하여 중공군 진지를 침투하여 포위망에서 탈출했다. 리지웨이는 1월 1일 아침 전선을 시찰하려 했지만, 서울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무장하지 않은 채 도망치는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의 잔존 병력과 마주쳤다. 리지웨이가 후퇴를 막으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남쪽으로 계속 도주했다. 이승만의 개인적인 개입이 있은 후에야 사단은 마침내 후퇴를 멈추었다. 1월 1일 밤, 임진강과 한탄강의 유엔군 방어선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중공군은 유엔군 영토로 약 14.48km 진격했다. 중공군은 1월 2일 진격을 멈췄다.

원주 제1차·제2차 전투

전투 초기에 대한민국 육군 제3군단은 미 제9군단의 미 제24보병사단 동쪽에 위치하여, 가평과 춘천 북쪽의 38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4개 사단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육군 제3군단은 제2보병사단을 가평 북쪽 언덕에 군단의 좌익으로 배치했고, 제5보병사단은 춘천에서 군단의 중앙을 방어했다. 추운 겨울은 대한민국 방어군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고, 폭설은 건설을 방해하고 얼어붙은 도로는 식량과 탄약 보급을 제한했다. 북한 게릴라 또한 이 지역에서 활동하며 대한민국 육군 제3군단의 후방에 심각한 혼란을 야기했다.

중공군의 제3차 공세 작전 명령은 제42군과 제66군이 대한민국 제2보병사단과 제5보병사단을 섬멸하여 춘천과 서울 사이의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중국 인민해방군 좌익을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지시에 따라 두 중공군 군은 새해 전날 자정 직후 신속하게 공격을 시작했다. 중공군 제124사단은 먼저 대한민국 제2보병사단의 측면을 돌파한 다음, 사단의 퇴각로를 차단했다. 포위된 대한민국 제2보병사단의 제17연대와 제32연대는 혼란 속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 제66군이 대한민국 제5보병사단의 전선을 압박하는 가운데, 중공군 제124사단은 이후 동쪽으로 진격하여 후방에서 대한민국 제5보병사단의 퇴각로를 차단했다. 이 기동으로 대한민국 제5보병사단의 제36연대는 곧 중공군에 포위되었고, 산길을 이용하여 중공군 전선을 침투함으로써 탈출해야 했다. 1월 1일까지 대한민국 육군 제3군단은 제2보병사단 및 제5보병사단과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제3군단의 나머지 부대는 원주로 후퇴했다. 1월 5일, 중공군 제42군과 제66군은 조선인민군 제2군단과 제5군단에 의해 교체되었고, 조선인민군은 원주를 향해 별도의 공세를 시작했다.

3. 3. 유엔군의 철수

1950년 12월, 청천강 전투장진호 전투에서 공산군의 예상치 못한 강력한 반격에 한국군과 미군은 38선 이북에서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했다. 12월 4일, 대한민국 국군이 평양에서 철수했고, 이를 평양 철수 작전이라고 한다. 12월 6일, 인민군과 중공군이 평양을 재점령했다.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는데, 이를 흥남 철수라고 한다. 장진호 전투에서 간신히 탈출한 미국 제1해병사단도 12월 24일 흥남에서 철수했다.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 제13군이 38선에 배치된 대한민국 국군을 공격했다. 임진강한탄강 일대에서 중공군 제38군, 제39군, 제40군, 제50군이 대한민국 제1사단을 궤멸시키고 대한민국 제6사단을 격퇴시켰다.[1] 춘천 지역에서는 중공군 제42군과 제66군이 대한민국 제3군단을 후퇴시켰다.[2] 1951년 1월 1일, 38선 방어선이 붕괴되자[3] 매슈 리지웨이는 1월 3일 서울 철수를 명령했다.[4]

1950년 12월 15일,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은 적성면으로 후퇴했다.[5][6] 제1보병사단 우익에는 제6보병사단이 동두천시 북쪽, 한탄강 남쪽에 있었다.[7] 제1보병사단은 제11연대와 제12연대를 적성면 서쪽과 동쪽에 배치하여 임진강을 방어했고,[5] 제6보병사단은 제7연대와 제19연대를 도로 양쪽에 배치하여 한탄강의 33번 국도를 방어했다.[7] 제1보병사단 제15연대와 제6보병사단 제2연대는 예비대로 후방에 배치되었다.[5][7] 대한민국군은 벙커, 철조망, 지뢰밭을 건설하여 방어선을 강화했다.[8]

중공군은 한 달 이상 공세를 준비했다.[9] 중공군 제39군 예하 부대는 대한민국군 방어에 대한 정찰을 수행했고,[9] 지휘관, 공병, 포병 장교들이 대한민국군 진지를 분석했다.[10] 특별 훈련을 받은 공격 및 공병 부대로 구성된 중공군 "돌격" 부대가 임진강과 한탄강을 건너 공격을 주도했다.[11] 중공군 포병 부대는 유엔군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한센추는 100문의 포를 투입할 수 있었다.[12] 12월 22일, 중공군 최고 사령부는 제3차 춘계 공세 작전 명령을 내렸다.[13] 제39군과 제50군은 제1보병사단을, 제38군과 제40군은 제6보병사단을 격멸하는 임무를 맡았다.[14]

리지웨이의 예측에 따라 대한민국 육군 본부는 12월 31일 경계 태세를 강화했지만,[15] 많은 병사들이 신년 축하 행사로 술에 취하거나 추위를 피하기 위해 보초를 이탈했다.[16][17] 중공군 포병 부대는 12월 31일 16시 30분에 대한민국군 진지에 포격을 시작했다.[18] 첫 공격은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에 가해졌는데, 이 부대가 제1, 제6보병사단의 경계선이자 미국 제1군단과 제9군단의 경계선에 있었기 때문이다.[19][20] 제12연대 측면 강변이 공격하기 어려운 절벽이라 대부분 중앙을 방어했다. 중공군 제39군은 제12연대 측면을 기습 공격 지점으로 결정했다. 제12연대 중앙에 대한 기만 공격 후, 제116사단과 제117사단이 제12연대 양 측면을 강타했다.[19] 제12연대는 방심하여 저항하지 못했고, 몇 시간 만에 궤멸되었으며, 미국 제9야전포병대대 1개 포대가 중공군에게 탈취되었다. 중공군은 제15연대 방어선을 돌파했다. 백선엽 준장은 지원 병력을 동원했지만, 중공군 진격을 막지 못했다.[20] 1월 1일 아침, 제11연대만 남았고, 제1보병사단은 1월 2일에 철수했다.

그러나 제6보병사단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원래 계획은 제38군과 제40군이 제6보병사단 제19연대 우익을 공격하는 것이었지만, 대부분 실수로 제19연대 동쪽에 있던 미국 제19보병연대, 제24보병사단을 공격했다. 잘못된 정보로 중공군은 지뢰밭을 통과하며 피해를 입었다. 중공군은 미군 제19보병연대를 밀어냈고, 제6보병사단 우익이 노출되었다. 제1보병사단 이탈과 제24보병사단 방어선 돌파로, 중공군은 제6보병사단 양 측면에서 남쪽으로 진격하여 포위하려 했다. 새해 전날 자정, 제6보병사단은 후퇴했다. 중공군은 일부 병력을 요격했지만, 대부분 산길을 이용하여 중공군 진지를 침투하여 탈출했다. 리지웨이는 1월 1일 아침 전선을 시찰하려 했지만, 서울 근처에서 무장하지 않은 채 도망치는 제6보병사단 잔존 병력과 마주쳤다. 리지웨이가 후퇴를 막으려 했지만, 사단은 남쪽으로 도주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개입 후에야 사단은 후퇴를 멈추었다. 1월 1일 밤, 임진강과 한탄강의 유엔군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중공군은 유엔군 영토로 약 14.48km 진격했다. 중공군은 1월 2일 진격을 멈췄다.

원주 제1차·제2차 전투

전투 초기, 제3군단은 미 제9군단 미 제24보병사단 동쪽에 위치하여, 가평과 춘천 북쪽 38선을 방어했다. 4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3군단은 제2보병사단을 가평 북쪽 언덕에 군단 좌익으로, 제5보병사단은 춘천에서 군단 중앙을 방어했다. 추운 겨울은 대한민국 방어군에게 어려움을 주었고, 폭설은 건설을 방해하고 얼어붙은 도로는 식량, 탄약 보급을 제한했다. 북한 게릴라가 이 지역에서 활동하며 제3군단 후방에 혼란을 야기했다.

중공군 제3차 공세 작전 명령은 제42군과 제66군이 제2보병사단과 제5보병사단을 섬멸하여 춘천과 서울 사이 도로를 차단함으로써 중국 인민해방군 좌익을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지시에 따라 두 중공군은 새해 전날 자정 직후 공격했다. 중공군 제124사단은 먼저 제2보병사단 측면을 돌파한 다음, 사단 퇴각로를 차단했다. 포위된 제2보병사단 제17연대와 제32연대는 혼란 속에 후퇴했다. 제66군이 제5보병사단 전선을 압박하는 가운데, 제124사단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후방에서 제5보병사단 퇴각로를 차단했다. 이 기동으로 제5보병사단 제36연대는 중공군에 포위되었고, 산길을 이용하여 중공군 전선을 침투하여 탈출했다. 1월 1일, 제3군단은 제2보병사단 및 제5보병사단과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제3군단 나머지 부대는 원주로 후퇴했다. 1월 5일, 중공군 제42군과 제66군은 조선인민군 제2군단과 제5군단에 의해 교체되었고, 조선인민군은 원주를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눈 덮인 땅에 거꾸로 놓인 전차
코퍼 부대의 격파된 크롬웰 전차


중국군이 독립문으로 진격하고 있다.


중공군(PVA)의 38선 공격 후, 리지웨이는 중공군이 춘천에서의 돌파구를 이용하여 제8군을 포위할 것을 우려했다.[4] 그는 중공군 공세에 대항할 유엔군 부대 능력을 신뢰하지 못했다.[4] 1월 3일 아침, 미 제1군단 및 제9군단 지휘관인 프랭크 W. 밀번 소장 및 존 B. 쿨터 소장과 협의 후, 리지웨이는 서울 철수를 명령했다. 38선에서 유엔군 방어가 붕괴되면서, 1월 1일부터 후퇴가 시작되었다. 1월 1일 09:00에 밀번은 미 제1군단에 '교두보선'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미 제1군단 제25보병사단은 고양 서쪽에, 미 제1군단 영국 제29독립보병여단은 동쪽에 참호를 팠다. 제1군단 동쪽에서 쿨터는 영국-호주 제27영연방여단이 후방을 엄호하면서 14:00에 미 제9군단 철수를 명령했다. 일부 중공군 부대는 의정부에서 제6보병사단을 공격하는 동안 제27영연방여단 제3대대, 왕립 호주 연대 (3 RAR)를 포위했지만, 이 대대는 4명 부상자와 함께 탈출했다. 1월 1일 자정까지 미 제9군단 제24보병사단이 의정부 남쪽 '교두보선'에 도달했고, 제27영연방여단은 예비대로 제9군단 후방으로 이동했다.

중공군은 서울을 포위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철수 명령은 펑더화이를 놀라게 했다. 1월 3일 아침, 펑더화이는 중공군 제13군에 서울 방향으로 공격하여 후퇴하는 유엔군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미 제24, 제25보병사단과 영국 제29보병여단은 곧 중공군 공격을 받았다. 미 제9군단 지역에서 중공군 제38군이 미군이 철수하려 할 때 미 제24보병사단을 공격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사단 좌익에 있던 미 제19보병연대는 의정부 주변에서 중공군과 육박전을 벌였다. 중공군은 공격 중 미 제19보병연대 E중대와 G중대를 돌파했지만, 곧 미군 포격과 공습으로 700명 사상자를 냈다. 중공군 압박에 직면하여 제27영연방여단은 미 제9군단 후퇴를 엄호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미 제24사단이 1월 3일 밤 서울에서 철수한 후, 제27영연방여단은 1월 4일 아침 한강을 건넜고, 07:40까지 미 제9군단 전체가 서울을 떠났다.

미 제24보병사단 좌익에서 미 제1군단 영국 제29보병여단은 전투 전체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에서 제29보병여단 첫 작전에서, 여단은 '교두보선' 고양 동쪽 지역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로열 얼스터 소총대 제1대대(1RUR)는 여단 좌익을, 로열 노섬벌랜드 퓨질리어스 제1대대(1RNF)는 여단 우익에 배치되었다.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와 제21로열 태국 연대는 포병 지원과 함께 여단 후방을 엄호했다. 1월 3일 04:00에 1RUR은 처음으로 중공군 제50군 제149사단과 접촉했다. 중공군은 1RUR의 B중대와 D중대를 기습하여 돌파했지만, 1RUR의 C. A. H. B. 블레이크 소령 반격으로 아침까지 대대 위치를 회복했다. 1RUR이 공격받는 동안, 중공군은 영국군 점령 산봉우리 사이 방어되지 않은 계곡을 이용하여 1RNF 진지에 침투했다. 1RNF 전체는 곧 저격수 사격을 받았고 중공군은 1RNF의 Y중대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반복했다. 1RNF 위치 회복을 위해 제29보병여단 토마스 브로디 준장은 1RNF의 W중대를 4대 처칠 전차와 함께 증원군으로 보냈다. 증원군은 기관총과 박격포 사격을 받았지만, 처칠 전차의 공격으로 중공군 저항은 무너졌다. 살아남은 중공군 병사들은 4.2인치 박격포와 25파운더 야포 포격 아래 도망갔다. 전투 후 제29보병여단은 최소 16명 사망, 45명 부상, 3명 실종되었고, 1RNF 진지 내에서 200명 중공군 사망자가 발견되었다.

카메라 앞에서 경비병의 호위를 받는 남성 그룹
중국군에게 포로로 잡힌 영국 제29보병여단 병사들


영국 제29보병여단과 중공군 제149사단이 고양 동쪽에서 싸우는 동안, 미 제1군단 미 제25보병사단은 제29보병여단 좌익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철수 계획은 중공군이 유엔군 후방 지역에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 제25보병사단과 영국 제29보병여단 간 조율된 철수를 요구했지만, 전투로 인해 미국과 영국 부대 간 조율이 불가능해졌다. 미 제27보병연대가 미 제1군단 후위 부대를 형성한 후, 제25보병사단과 제29보병여단은 1월 3일 15:00에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5보병사단은 어려움 없이 후퇴했지만, 제29보병여단 철수는 21:30에 어둠이 내린 후에야 시작되었다. 미군 후위 부대와 영국군 부대 사이 도로가 열리자, 중공군 제149사단 제446연대가 유엔군 후방 지역에 침투하여 1RUR과 제8왕립 아일랜드 후사르 코퍼 부대에 매복을 설정했다. 1RUR과 코퍼 부대는 곧 대부분 무장하지 않은 중국군 병사들에게 압도당했다. 중공군은 코퍼 부대 크롬웰 전차에 묶음 수류탄과 벵갈로어 어뢰를 사용하여 불을 질렀다. 백병전에서, 1RUR 병사 100명이 J.K.H. 쇼 소령 지휘 하에 매복에서 탈출했지만, 1RUR 블레이크 소령과 코퍼 부대 D. 애슬리-코퍼 대위는 전사했고, 다른 영국군 병사 208명이 실종되었으며, 대부분 중공군에 포로로 잡혔다. 미 제27보병연대는 포위된 영국군 병사 구출을 시도했지만, 브로디는 불필요한 손실을 막기 위해 구출을 중단시켰다.

1월 4일 08:00에 영국 제29보병여단이 서울을 떠났을 때, 미 제27보병연대는 도시에 남아 있는 마지막 유엔군 전술 부대가 되었다. 서울 외곽에서 몇 차례 방어전을 치른 후, 제27보병연대는 1월 4일 14:00에 한강을 건넜다.

서울에서 피난하는 난민들이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고 있다.


리지웨이는 4일 정오경에 부대에게 'D선'으로 철수를 예상하라고 경고했으며, 모든 군단은 나란히 철수했다. 그동안 제1군단과 제9군단은 20:00에 한강 남쪽 약 9.66km 지점 중간 지점으로 후퇴하여 수원 남쪽 약 16.09km 지점에 비축된 공군 및 육군 보급품이 제거될 때까지 유지해야 했다. 리지웨이는 보급품이 24~36시간 이내에 처리될 것으로 예상했다. 리지웨이는 중간 이동 시작 시간을 제3군수사령부가 인천, ASCOM 시티, 김포 비행장 철수를 완료할 시간을 주기 위해 의도했다. 1월 3일 리지웨이는 제3군수사령관 존 G. 힐 대령에게 다음 날 정오에 인천에서의 항만 작전을 중단하라고 통보했다. 12월 초부터 항구와 비행장 지역 보급품을 점진적으로 줄인 덕분에 현물 재고가 적당한 수준으로 유지되었으므로 마감 시한은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제8군 참모 장교 일부 예비 재고 확보 지연, 유조선 부족, 장거리 철도 선로와 같은 품목에 적합한 선박 부족, 전선 부대에 지급될 탄약 과다 평가로 인해 힐은 지정된 시간까지 모든 재고를 제거하지 못했다. 리지웨이 정오 명령을 받은 밀번은 항구와 비행장이 있던 지역에서 힐에게 파괴반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철수한 후 즉시 파괴 계획을 실행하라고 지시했다. 인천에서의 후송은 4일 오후 조류를 통해 계속되었지만, 힐 주요 관심사는 비행장과 항만 시설을 중공군/북한군에게 쓸모 없게 만드는 데 집중되었다. 도로로 남쪽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던 모든 항만 부대는 힐이 밀번 지시를 받을 때쯤 떠났고, 육군 항공 엔지니어를 제외한 마지막 제5공군 부대는 김포에서 일본 새 기지로 날아갔다. 오후 동안 이 엔지니어들은 김포에 남아 있던 비행장 건물과 항공 휘발유 및 네이팜탄 드럼을 태웠고, 제8군 제82공병 유류 배급 중대 엔지니어는 인천과 김포 사이 4인치 및 6인치 파이프라인과 비행장 부스터 펌프 및 저장 탱크를 파괴했다. 제50공병 항만 건설 중대 소속 병사들은 18:00에 인천 항만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1개 부두와 월미도로 가는 둑길을 제외한 모든 주요 시설이 파괴되었다. 주요 목표는 황해 넓은 조수 간만 차이를 보상하여 인천을 주요 항구로 만들 수 있었던 조수 간만 차이 수문이었다. 월미도와 도시 자체에서의 해체는 5일 03:00에 완료되었다. 힐과 그의 잔여 병력은 한 시간 내에 배를 타고 부산으로 떠났다. 김포, ASCOM 시티, 인천에서 파괴된 보급품에는 약 160만 갤런 석유 제품, 9,300톤 공병 자재 및 탄약이 실린 12대 철도 차량이 포함되었다. 시간과 조류가 이 자재 파괴를 불가피하게 만들었을 수 있지만, 항만 시설에 대한 광범위한 피해는 완전히 정당화될 수 없었다. 적에게 항구 사용을 거부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타당했다; 반면에 유엔군 한국 수역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로 인해 인천 파괴는 무의미했다.

1월 4일 오후, 북한군 제1군단, 중공군 제38군 및 중공군 제50군이 서울에 진입했지만, 불타는 빈 도시뿐이었다. 대부분 민간인은 얼어붙은 한강을 통해 남쪽으로 도망가거나 인근 시골로 피난했다. 전투 전에 필수 인원으로 축소된 서울 대한민국 정부도 어려움 없이 도시를 떠났다. 북한군 소대는 13:00경 서울시청에 도착하여 북한기를 게양했다. 1월 5일, 펑더화이는 중공군 제50군과 북한군 제1군단에 김포와 인천을 점령하라고 명령하는 한편, 다른 모든 부대에게는 한강 북쪽 둑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 1월 7일까지 펑더화이는 병력 고갈과 인천 상륙 작전 재발을 막기 위해 제3차 공세를 중단했다.

I군단과 IX군단의 D선으로의 철수, 1951년 1월 4~7일


I군단과 IX군단은 힐(Hill)의 공병들이 아직 인천을 폭파하고 있는 동안 한강 남쪽 둑을 떠났기 때문에 힐은 항구 위에 자체 방어 시설을 설치해야 했다. 이 전초 기지에서는 교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밀번(Milburn)의 부대도 안양 1번 국도를 중심으로 진지를 이동하면서, 그리고 콜터(Coulter)의 부대도 한강과 북한강 합류 지점까지 중간선을 북동쪽으로 연장하면서 교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4일 늦은 오후, I군단과 IX군단이 수원 위의 진지로 철수하는 동안 리지웨이(Ridgway)는 5일 정오에 ''D선''으로의 철수를 명령했는데, 그는 그때까지 수원에 있는 보급품이 옮겨졌을 것으로 예상했다. 다섯 개 군단 모두 나란히 철수하여, 그 과정에서 적에게 최대한의 지연과 최대의 피해를 입히라는 리지웨이의 기본적인 요구 사항을 충족해야 했다. 리지웨이는 특히 밀번과 콜터에게 탱크를 방어 부대에 포함시키고 철수를 따라오는 중공군에게 반격을 가하도록 지시했다. 리지웨이는 5일 아침 수원과 도시 남쪽 비행장의 보급품을 정오까지 치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연을 만든 것은 단순히 물자의 양뿐만 아니라 서울 지역에서 온 약 10만 명의 절박한 피난민들이 수원 철도 차고에 몰려들어 기차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오전 중반, 리지웨이는 밀번에게 남은 수원 물자가 모두 수송될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콜터에게 I군단의 전방 진지의 동쪽 측면을 보호할 병력을 남겨두라고 무선으로 지시했다. 밀번은 리지웨이의 지시를 받아 25사단과 대한민국 1사단의 대부분을 안양 진지에 붙잡아 둘 수 있었고, 콜터는 대한민국 6사단에게 밀번의 동쪽 측면을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콜터는 대한민국 6사단이 ''D선''으로 출발한 지 한 시간 후에야 지시를 보냈고, 장(Chang) 장군은 오후 늦게야 그 지시를 받았다. 장 장군은 부대를 세우는 데 또 30분이 걸렸다. 그때 그의 부대는 수원의 거의 동쪽에 있었고, 콜터의 동의를 얻어 17번 국도를 따라 배치했다.

5일 밤 동안 중공군 연대가 한강을 건너 영등포 동쪽에 집결했다. 그 연대의 정찰대는 1번 국도 동쪽의 언덕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하여 자정 전에 대한민국 1사단 전선을 정찰했지만, IX군단이 일찍이 열어 놓았던 취약한 동쪽 측면을 찾지 못했다. 6일 날이 밝자 백(Paik)의 전선 중앙에서 정찰대와의 접촉이 중공군 대대와 대한민국 11연대 3대대 사이의 일반적인 교전으로 발전했지만, 중공군이 대한민국군을 몰아내려는 시도는 정오에 완화되었고 오후 2시에 완전히 끝났다. 그때쯤 수원에서 보급품이 모두 치워졌고, 밀번과 콜터는 ''D선''을 향해 남쪽으로 계속 이동할 수 있었다. 두 군단은 7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그동안 제3사단 소속 15연대와 65연대 3대대가 경주에서 도착하여 I군단에 배속되었기 때문에 밀번은 상당한 예비군을 유지할 수 있었고, 서해안에서 평택과 안성까지 비교적 견고한 약 32.19km ''D선'' 전선을 조직할 수 있었다. 영국 제29여단과 태국 대대는 평택 바로 아래 1번 국도를 가로질러 맨 왼쪽을 지켰다. 제3사단은 1번과 17번 국도 사이의 언덕을 가로질러 구역을 점령했고, 소울(Soule) 장군은 15연대를 그곳에 배치했다. 이 중앙 진지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65연대 3대대와 25사단 35연대가 그 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결했다. 안성 위쪽에는 대한민국 1사단이 17번 국도를 가로질러 배치되어 있었다. 25사단의 나머지 병력과 터키 여단은 평택에서 약 20.92km 떨어진 천안에 군단 예비대로 배치되었다. 약간 더 긴 전선을 따라 북동쪽으로 기울어져 장호원리를 지나 한강까지 뻗어 있는 콜터는 대한민국 6사단, 영국 제27여단, 제24사단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배치했다. 전선 뒤 약 32.19km 지점에 있는 군단의 경계선과 맞닿은 1기병사단 병력은 현재 IX군단의 주요 보급로인 13번 국도의 충주에 군단 예비대로 배치되었다. 단양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알려진 게릴라의 공격으로부터 노선을 보호하기 위해 제5기병연대는 문경의 산길을 통해 충주에서 남쪽으로 도로 순찰을 시작했다.

밀번과 콜터가 ''D선''으로 이동한 방식에 리지웨이는 분개했다. "지금까지 보고된 바에 따르면," 그는 7일 두 군단 사령관에게 말했는데, "당신의 부대는 적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증거 없이, 그리고 상당한 지연도 없이 'D'선으로 철수했습니다. 사실, 일부 주요 부대가 접촉을 끊은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저는 즉각적인 확인 보고서를 원하며, 내용이 사실이라면 제 기본적인 지시를 따르지 않은 이유를 보고해주십시오."

4. 결과

1·4 후퇴의 결과, 유엔군 사상자는 적었지만,[8] 서울 3차 공세는 중공군에게 상당한 성공이었다. 이로 인해 유엔군의 사기는 전쟁 중 최저점으로 떨어졌다.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제8군의 성과에 매우 불만을 품고 유엔군의 사기와 전투력을 회복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9] 리지웨이가 제8군을 이끌면서 더글러스 맥아더는 유엔군이 한국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고, 1951년 1월 17일에 유엔 철수 계획은 폐기되었다.

한편, 유엔에서는 미국과 다른 유엔 회원국들이 중공군의 개입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처음에는 분열되었지만, 중공군이 유엔 휴전을 거부하자 곧 유엔 회원국들은 미국을 지지하게 되었고, 중공군을 침략자로 규탄하는 유엔 결의안이 1951년 2월 1일에 통과되었다. 역사학자 베빈 알렉산더는 중공군의 유엔 휴전 거부가 이전의 군사적 성공으로 얻은 국제적 위신에 손상을 입혔고, 이로 인해 중공군이 유엔에 가입하거나 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반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결국 38선에서 종전된 한국 전쟁은 중공과 북한 지도부의 한반도 전체에 공산주의를 수립하려는 결의 때문에 또 다른 2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끊임없는 전투로 지쳐 있었다. 중공군 부사령관 한셴추는 펑더화이에게 전투 사상자는 8,500명으로 적었지만, 열악한 보급과 피로가 제3차 공세 기간 동안 중공군의 주력에 큰 손실을 입혔다고 보고했다. 1950년 12월 15일에 개시된 미 극동 공군의 "차단 작전 제4호"는 중공군/북한군 보급로를 공격하여 중공군이 더 이상의 남쪽으로의 공세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유엔군이 완전히 사기가 저하되어 반격할 수 없다고 믿은 마오쩌둥은 마침내 중공군에게 최소 2~3개월의 휴식을 허용했고, 펑더화이와 다른 중공군 지휘관들은 1951년 봄에 결정적인 전투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 지휘관들을 놀라게 한 것은, 매슈 리지웨이와 제8군이 곧 1951년 1월 25일에 썬더볼트 작전으로 중공군에게 반격을 가한 것이었다.

5. 평가

1·4 후퇴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유엔군 사상자는 적었지만,[8] 서울 3차 공세는 중공군에게 상당한 성공이었고, 유엔군의 사기는 전쟁 중 최저점으로 떨어졌다.[8] 매슈 리지웨이제8군의 성과에 매우 불만을 품었고 유엔군의 사기와 전투력을 회복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리지웨이가 제8군을 이끌면서 더글러스 맥아더는 유엔군이 한국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고, 1월 17일에 유엔 철수 계획은 폐기되었다.

한편, 유엔에서는 미국과 다른 유엔 회원국들이 중공군의 개입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처음에는 분열되었지만, 중공군이 유엔 휴전을 거부하자 곧 유엔 회원국들은 미국을 지지하게 되었고, 중공군을 침략자로 규탄하는 유엔 결의안이 2월 1일에 통과되었다. 역사학자 베빈 알렉산더는, 중공군의 유엔 휴전 거부는 이전의 군사적 성공으로 얻은 국제적 위신에 손상을 입혔고, 이로 인해 중공군이 유엔에 가입하거나 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반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결국 38선에서 종전된 한국 전쟁은 중공과 북한 지도부의 한반도 전체에 공산주의를 수립하려는 결의 때문에 또 다른 2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끊임없는 전투로 지쳐 있었다. 중공군 부사령관 한센추는 펑더화이에게 전투 사상자는 8,500명으로 적었지만, 열악한 보급과 피로가 제3차 공세 기간 동안 중공군의 주력에 큰 손실을 입혔다고 보고했다. 1950년 12월 15일에 개시된 미 극동 공군의 "차단 작전 제4호"는 중공군/북한군 보급로를 공격하여 중공군이 더 이상의 남쪽으로의 공세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유엔군이 완전히 사기가 저하되어 반격할 수 없다고 믿은 마오쩌둥은 마침내 중공군에게 최소 2~3개월의 휴식을 허용했고, 펑더화이와 다른 중공군 지휘관들은 1951년 봄에 결정적인 전투를 계획하고 있었다. 중공군 당 위원회는 1월 8일에 휴식과 재편성 기간 동안의 과제에 관한 명령을 내렸으며, 중공군의 전쟁 목표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명령은 "중앙 문제는 전체 당과 군이 어려움을 극복하여... 전술과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다음 작전이 시작되면... 우리는 모든 적을 섬멸하고 모든 한국을 해방시킬 것이다."였다. 1월 14일 펑더화이에게 보낸 전보에서 마오쩌둥은 "근본적으로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봄에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9]

중공군 지휘관들을 놀라게 한 것은, 리지웨이와 제8군이 1951년 1월 25일에 썬더볼트 작전으로 중공군에게 반격을 가한 것이었다.

6. 관련 인물


  • 해리 S. 트루먼: 조선인민군의 남침 이틀 후이자 중공군 개입 3개월 전인 1950년 6월 27일,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미 해군 제7함대를 타이완 해협으로 급파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의 "중국의 안전을 위하여 UN의 한국전 개입을 방해할 것"이라는 경고를 "UN을 협박하기 위한 뻔한 시도"로 일축했다.[16]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중공군 개입 가능성이 적다고 밝혔다.[18]
  • 저우언라이: 1950년 7월 1일,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북한군으로 가장해 전투에 참가할 것이며, 이를 위해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이미 묵덴 지역에 12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고 언급했다.[16] 8월 20일 UN에 "한국은 중국의 이웃나라이므로...중국인은 한반도 상황에 개입해야만 한다."는 내용을 통보하고, 중립국 외교관을 통해 "중국의 안전을 위하여 UN의 한국전 개입을 방해할 것"이라고 미국에 통보했다.[16] 9월 스탈린에게 군사 및 물자 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지체했고 마오쩌둥은 한국전 개입을 1950년 10월 13일에서 19일로 연기했다. 10월 중순 소련을 비밀 방문하여 모스크바에서 타전한 전문에는 "스탈린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조선 파병 반대 결의에 이의를 표명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었다.[17] 10월 하순, 모스크바에서 타전한 전문을 접수한 이후 중공 지도부 내에서 한국전쟁 참전 여부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가오강은 10월 25일 회의에서 자신이 중공군의 조선 파병을 반대하는 저우언라이와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고 언급했다.[18]
  • 마오쩌둥: 1950년 8월 4일, 소련 정치국에 중화인민의용군의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전쟁에 개입할 것임을 보고했다. 1950년 10월 8일, 미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군한 다음 날, 중화인민해방군 북방지역군에게 중화인민의용군 휘하로 편입하여 한국을 침공할 것을 명령했다. 10월 24일, 중공 정부가 개최한 '민주적 정당' 지도자들과의 회의에서 조선은 중국의 문턱이며, 일본이 조선 강점 이후 조선을 중국 침공의 교두보로 이용했음을 들어 미국의 조선 장악을 용인할 수 없다고 연설했다. 또한, 소련은 조선 사태에 개입할 당위성이 현재 없으나, 중공과 소련 간 우호 및 상호 원조 조약이 체결되어 있으므로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는 경우 소련은 조약상 중공에 대한 의무를 이행할 것이라고 말했다.[19]
  • 이오시프 스탈린: 저우언라이는 외교와 개인적 노선을 동원해 스탈린에게 군사 및 물자 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지체했고 마오쩌둥은 한국전 개입을 1950년 10월 13일에서 19일로 연기했다. 소련군은 공중 엄호를 서방 공군과의 전쟁 경험을 위한 전선에서 100km 이상의 거리에서만 허용했다.[17]
  • 가오강: 10월 25일 회의에서 자신이 중공군의 조선 파병을 반대하는 저우언라이와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고 언급했다. 결정적 순간에 펑더화이에게 미국이 조선 전역을 점령할 경우 중공과 국제 정세 전반에 야기될 위험을 설명하고 펑더화이를 설득하여 마오쩌둥에게 즉각적인 조선 파병을 공동 건의했다.[18]
  • 펑더화이: 가오강펑더화이에게 미국이 조선 전역을 점령할 경우 중공과 국제 정세 전반에 야기될 위험을 설명하고 펑더화이를 설득하여 마오쩌둥에게 즉각적인 조선 파병을 공동 건의했다.[18]
  • 더글러스 맥아더: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중공군 개입 가능성은 적고, 중공군이 만주에 30만, 압록강변에 10~12만 5천 명의 군이 포진해 있으며 그중 반 정도가 압록강을 넘어 남진할 수도 있으나 "공중 지원 없이 그들이 평양으로 진격할 경우 대패할 것"이라고 단언했다.[18]

참조

[1] 문서 In Chinese military nomenclature, the term "Army" (军) means [[Corps]], while the term "Army Group" ({{lang|zh-Hans|集团军}}) means [[Field Army|Army]].
[2] 문서 "[[KATUSA]] number not included. See Appleman 1990, p. 40."
[3] 문서 This is the total casualty number of the US 24th and 25th Division from January 1 to January 15, 1951. See Ecker 2005, p. 74.
[4] 문서 The Eastern Sector is the [[First and Second Battles of Wonju]].
[5] 웹사이트 Korean War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2010-07-03
[6] 뉴스 Third Battle Of Seoul – Korean War http://www.worldatla[...] 2017-07-21
[7] 문서 Cooper Force was an ad hoc unit composed of the reconnaissance troops and six Cromwell tanks from the [[8th King's Royal Irish Hussars]]. See Farrar-Hockley 1990, p. 386.
[8] 문서 The extent of the South Korean losses is unknown due to the lack of records. See Appleman 1989, p. 403.
[9] 논문 "Mao Zedong's Erroneous Decision During the Korean War: China's Rejection of the UN Cease-fire Resolution in Early 1951"
[10] 문서 "[[KATUSA]] number not included. See Appleman 1990, p. 40."
[11] 문서 中国では、"軍"(军)は軍団を、 "集団軍" (集团军)は、野戦軍を意味する。
[12] 문서 This is the total casualty number of the US 24th and 25th Division from January 1 to January 15, 1951. See Ecker 2005, p. 74.
[13] 웹사이트 Korean War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2010-07-03
[14] 뉴스 Third Battle Of Seoul – Korean War http://www.worldatla[...] 2017-07-21
[15] 문서 The extent of the South Korean losses is unknown due to the lack of records. See Appleman 1989, p. 403.
[16] 뉴스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4>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4-07-24
[17] 뉴스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4>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4-07-24
[18] 뉴스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4>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4-07-24
[19] 뉴스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4>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4-07-24
[20] 뉴스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4>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4-07-2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