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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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정기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896년 전라북도 부안에서 출생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이끌었으며, 이후 일본 군사시설 파괴 시도, 일본 천황 암살 계획, 하야카와수력발전소 파괴 시도 등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4년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에 참여했고, 1932년에는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하여 흑색공포단을 결성했다. 1933년 상하이 육삼정에서 일본 공사 암살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34년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으며, 현재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그의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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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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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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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백정기 |
한국어 이름 | 백정기 |
한자 이름 | 白貞基 |
로마자 표기 | Baek Jeonggi |
매큔-라이샤워 표기 | Paek Chŏnggi |
아호 | 구파 (鷗波) |
자 | 용선 (溶善) |
출생일 | 1896년 1월 19일 |
출생지 | 조선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
사망일 | 1934년 6월 5일 |
사망지 | 일본 나가사키 |
묘지 | 효창공원 |
묘지 좌표 | 37°32′42″N 126°57′40″E |
활동 시기 | 1919년–1933년 |
소속 단체 | |
조직 | 한국 무정부주의자 연맹 흑색공포단 |
사상 | 무정부주의, 한국 독립운동 |
활동 | |
직업 | 독립운동가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가족 | |
배우자 | 조팔락 (曺八洛) |
부모 | 아버지 백남일(白南一), 어머니 윤문옥(尹文玉) |
형사 정보 | |
죄목 | 반란죄 |
유죄 판결 | 1933년 11월 |
형벌 | 무기징역 |
상태 | 옥사 |
기타 | |
수상 |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관련 인물 |
2. 생애
백정기는 1896년 1월 19일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현재 부안읍 신운리)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8] 1902년 7세때 정읍군 영원면 갈선리(현재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했다. 한문을 공부하였고, 19세 때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1919년 8월부터 일본인 및 일본 군사시설에 대한 공격 활동에 참여했다. 3.1운동이 있었던 그해에는 서울·인천 등의 군사시설 파괴를 시도하다가 실패해, 2년 뒤 일제 경찰에 붙들렸다. 다행히 이때는 가짜 이름과 주소를 둘러댄 뒤 방면됐다.
그 후 각지를 몰래 다니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1924년에는 일본에 침투해 하야카와수력발전소 공사장 파괴를 시도하다가 발각돼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또 1924년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고 도쿄에 갔으나 실패하였다. 같은 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다. 1924년 상하이로 가서 우당 이회영, 화암 정현섭, 우근 유자명, 회관 이을규, 우관 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는 데 참가하여, 조선 대표로 출석하였다고 우관문존년보에 기록되어 있다.[8] 그리고 기관지인 정의공보를 비밀리에 발행하였는데, 그 잡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9] 민족주의나 공산주의 계열이 아닌 아나키스트의 입장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었으나 유자명 등 여러 아나키스트 동지로부터 후원을 받아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약 1년간 공동병실에서 요양생활을 하여 완치되었다.[8]
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하여 흑색공포단(BTP)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강화하여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당시에 구파 의사도 동일한 시도를 준비했었으나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실패하였다.[8]
1933년 3월 상하이 훙커우(虹口)에서 정현섭, 원심창, 이강훈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암살하려고 모의하다가 육삼정(六三亭)에서 체포되었다. 유명한 육삼정 의거다.
백정기와 원심창·이강훈은 1933년 3월 17일 중국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중·일 양국의 정계·군부 요인들과 함께 상하이의 일본 요정인 육삼정(六三亭)에서 연회를 벌인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 행사장에 타격을 가할 목적으로 이들은 연회장 습격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 뒤 현장에 가서 준비를 완료했다. 하지만 습격 직전에 역습을 받아 현장에서 체포됐다.[10]
당시 상해 일본 총영사 보고문에서 일본 경찰의 세밀한 사전 체포계획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컨대 아마 의거가 사전에 누군가에게 누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8] 이후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나가사키 법원에서 백정기 의사와 원심창은 무기징역을,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았다.[11] 백정기 의사는 구마모토 현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34년 6월 5일에 지병으로 옥사한다.
2. 1. 초기 생애 및 독립운동
백정기(白貞基)는 1896년 1월 19일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현 부안읍 신운리)에서 태어나, 1902년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하여 성장했다.[8] 한문을 공부하고 19세에 서울로 상경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항일운동을 주도했다.[8] 같은 해 일본 군사시설 파괴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2년 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가짜 이름과 주소를 사용하여 방면되었다.이후 각지를 다니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 1924년 일본 하야카와수력발전소 파괴를 시도하다 발각되어 베이징으로 돌아갔다.[8] 같은 해 도쿄에서 일본 천황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24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하고, 상하이에서 이회영, 정현섭, 유자명 등과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8] 기관지 정의공보를 비밀리에 발행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9] 1929년부터 1930년까지 폐결핵으로 투병했으나, 유자명 등 동지들의 후원으로 건강을 회복했다.[8]
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혁명자연맹을 흑색공포단(BTP)으로 개칭하고 대일 투쟁을 전개했다.[5] 1933년 3월 상하이 훙커우(虹口)에서 정현섭, 원심창, 이강훈 등과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유길명을 암살하려다 육삼정에서 체포되었다(육삼정 의거).[10] 당시 일본 총영사 보고문에 따르면, 의거가 사전에 누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8] 나가사키로 이송된 백정기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11] 1934년 6월 5일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2. 2. 아나키즘 활동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백정기는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항일운동을 이끌었다.[8] 1919년 8월부터 일본인 및 일본 군사시설에 대한 공격 활동에 참여했으며, 서울·인천 등지에서 군사시설 파괴를 시도하다 실패했다.[8] 이후 각지를 몰래 다니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였고, 1924년에는 일본에 침투해 하야카와수력발전소 공사장 파괴를 시도하다가 발각돼 베이징으로 돌아갔다.[8] 같은 해 일본 천황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8]1924년 상하이로 간 백정기는 이회영, 정현섭, 유자명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고 조선 대표로 참여하였다.[8] 기관지 정의공보를 비밀리에 발행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9] 1929년부터 1930년까지 폐결핵으로 투병 생활을 하였으나, 유자명 등 동지들의 후원으로 완치되었다.[8]
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하고 흑색공포단(BTP)으로 개칭하여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8] 1933년 3월 상하이 훙커우(虹口)에서 정현섭, 원심창, 이강훈 등과 함께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유길명을 암살하려고 모의하다가 육삼정(六三亭)에서 체포되었다.[10] 이는 유명한 육삼정 의거로, 당시 상해 일본 총영사 보고문에 따르면 의거가 사전에 누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8]
나가사키로 이송된 백정기는 나가사키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11] 원심창도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고,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았다.[11] 백정기는 구마모토 현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34년 6월 5일에 옥사하였다.[8]
2. 3. 육삼정 의거와 최후
백정기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항일운동을 이끌었다.[8] 1924년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고 도쿄에 갔으나 실패하였고, 같은 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다.[8] 1924년 상하이로 가서 우당 이회영, 화암 정현섭, 우근 유자명, 회관 이을규, 우관 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는 데 참가하여, 조선 대표로 출석하였다.[8]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하여 흑색공포단(BTP)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강화하여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5]
1933년 3월 상하이 훙커우(虹口)에서 정현섭, 원심창, 이강훈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암살하려고 모의하다가 육삼정(六三亭)에서 체포되었다.[10] 당시 상해 일본 총영사 보고문에서 일본 경찰의 세밀한 사전 체포계획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컨대 아마 의거가 사전에 누군가에게 누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8] 이후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나가사키 법원에서 백정기 의사와 원심창은 무기징역을,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았다.[11] 백정기 의사는 구마모토 현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34년 6월 5일에 지병으로 옥사한다.[8]
3. 사후
1946년 박열, 이강훈 등 아나키스트계 독립 운동가들이 주도하여 '3의사국민장봉장위원회'를 발족, 일본으로부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골을 회수하여 7월 6일 국민장을 실시하였다.[12] 1946년 7월 7일 자 <동아일보> 등에 보도된 것처럼 백정기·이봉창·윤봉길 세 의사의 장례식이 최초의 국민장이다.[12] 5만여명의 사람들이 참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조기를 계양하고, 휴업을 하고, 부조금을 갹출하는등의 방식으로 애도를 표했다.[12] 남한 정치세력들도 좌우의 입장 차를 버리고 거족적 행사에 동참했다.[12] 현재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12]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그가 1925년 상하이에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고, 상하이 총파업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에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고 소개한다.
1934년 7월 31일, 흑석신문(흑석신문)은 백정기가 "인간 해방의 최전선에 선 반역자"였다고 하며 그를 추모하는 기사를 실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항복이후, 한국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백정기의 유해는 한국으로 송환되어 이봉창과 윤봉길과 함께 삼의사묘에 합장되었다. 백정기의 묘비에는 그가 죽기 전 남긴 유언이 적혀 있다.
{{blockquote|두어 달 후에는 살아 있지 못할 것 같습니다.
슬프지만 동포 여러분, 제 죽음에 낙담하지 마십시오.
제가 죽더라도 이러한 이상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며,
여러분은 그것이 결실을 맺는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스스로를 돌보고 감옥에서 나온 후에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조국의 독립과 명예를 위해 계속 노력하십시오.
제 삶에서 유일한 죄책감과 후회는
어머니에게 효도하지 못한 것입니다.
독립의 날이 온다면,
제 유해를 제 자유로운 조국의 어디든 땅에 묻어주시고,
제 무덤에 무궁화 한 송이를 놓아주십시오.}}
21세기에도 백정기의 묘소는 여전히 한국 독립 운동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1]
현재 그의 고향인 전라북도 정읍에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정읍시에서 29번 도로를 따라 15km정도 북쪽으로 올라간 위치에 있다. 이 사건에는 여러 동지들이 연루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옥사한 백정기만이 독립운동가이자 의사로 추앙받고 있으며, 백정기를 기리는 구파 백정기의사기념관이 있고, 묘지는 김구 등과 마찬가지로 효창공원에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무정부주의 운동이 좌파 활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
3. 1. 국민장과 추서
1946년 박열, 이강훈 등 아나키스트계 독립 운동가들이 3의사 유골 수습을 촉구하여 '3의사국민장봉장위원회'를 발족하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골을 일본으로부터 회수하여 7월 6일 국민장을 실시하였고, 현재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12] 한국 현대사에서 최초의 국민장은 이른바 삼의사 장례식이다.[12] 7월 7일 자 <동아일보> 등에 보도된 것처럼 실제로는 백정기·이봉창·윤봉길 세 의사의 장례식이 최초의 국민장이다.[12] 이 국민장은 미군정청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의 발의로 서울 효창공원에서 거행된 거족적 장례식이다. 5만 명이 장례식에 참석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조기 게양이나 휴업 또는 부조금 갹출 등으로 애도를 표시했다.[12] 남한 정치세력들도 이날만큼은 좌우의 입장 차를 버리고 거족적 행사에 동참했다.[12]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그의 활동을 소개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이후 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백정기의 유해는 한국으로 송환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1] 백정기는 이봉창과 윤봉길과 함께 삼의사묘에 합장되었다. 백정기의 묘비에는 그가 죽기 전 남긴 유언이 적혀 있다. 21세기에도 백정기의 묘소는 여전히 한국 독립 운동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1]
현재 그의 고향인 전라북도 정읍시에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정읍시에서 29번 도로를 따라 15km정도 북쪽으로 올라간 위치에 있다.
3. 2. 평가와 기념
1946년 박열, 이강훈 등 아나키스트계 독립 운동가들이 주도하여 '3의사국민장봉장위원회'를 발족, 일본으로부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골을 회수하여 7월 6일 국민장을 실시하였다.[12] 1946년 7월 7일 자 <동아일보> 등에 보도된 것처럼 백정기·이봉창·윤봉길 세 의사의 장례식이 최초의 국민장이다.[12] 5만여명의 사람들이 참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조기를 계양하고, 휴업을 하고, 부조금을 갹출하는등의 방식으로 애도를 표했다.[12] 남한 정치세력들도 좌우의 입장 차를 버리고 거족적 행사에 동참했다.[12] 현재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12]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그가 1925년 상하이에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고, 상하이 총파업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7년에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고 소개한다.
1934년 7월 31일, 흑석신문(흑석신문)은 백정기가 "인간 해방의 최전선에 선 반역자"였다고 하며 그를 추모하는 기사를 실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항복이후, 한국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백정기의 유해는 한국으로 송환되어 이봉창과 윤봉길과 함께 삼의사묘에 합장되었다. 백정기의 묘비에는 그가 죽기 전 남긴 유언이 적혀 있다.
{{blockquote|두어 달 후에는 살아 있지 못할 것 같습니다.
슬프지만 동포 여러분, 제 죽음에 낙담하지 마십시오.
제가 죽더라도 이러한 이상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며,
여러분은 그것이 결실을 맺는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스스로를 돌보고 감옥에서 나온 후에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조국의 독립과 명예를 위해 계속 노력하십시오.
제 삶에서 유일한 죄책감과 후회는
어머니에게 효도하지 못한 것입니다.
독립의 날이 온다면,
제 유해를 제 자유로운 조국의 어디든 땅에 묻어주시고,
제 무덤에 무궁화 한 송이를 놓아주십시오.}}
21세기에도 백정기의 묘소는 여전히 한국 독립 운동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1]
현재 그의 고향인 전라북도 정읍에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정읍시에서 29번 도로를 따라 15km정도 북쪽으로 올라간 위치에 있다. 이 사건에는 여러 동지들이 연루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옥사한 백정기만이 독립운동가이자 의사로 추앙받고 있으며, 백정기를 기리는 구파 백정기의사기념관이 있고, 묘지는 김구 등과 마찬가지로 효창공원에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무정부주의 운동이 좌파 활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
4. 관련 문화재
구파백정기의사고택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5. 미디어
참조
[1]
웹사이트
Koreans bow to heroes of the 1930s
https://www.latimes.[...]
2015-08-05
[2]
일반텍스트
[3]
일반텍스트
[4]
웹사이트
(25)수원 백씨(水原白氏)-316,535명
http://www.seoulecon[...]
2014-08-07
[5]
웹사이트
[투고]항일운동가 원심창선생과 상해육삼정의거를 기억하자
http://www.pttimes.c[...]
[6]
일반텍스트
[7]
일반텍스트
[8]
서적
항일 혁명가 구파 백정기 의사
국민문화연구소 출판부
[9]
서적
일제하 아나키즘운동의 전개
국학자료원
[10]
저널
이봉창·윤봉길과 어깨 나란히 했던 그 남자, 왜 잊혔을까
https://news.naver.c[...]
오마이뉴스
2019-06-05
[11]
웹인용
항일운동가 원심창선생과 상해육삼정의거를 기억하자
http://www.pttimes.c[...]
2009-10-09
[12]
서적
해방공간의 아나키스트
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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