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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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봉창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32년 일본 도쿄에서 순국했다. 193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입하여 한인애국단에 소속되었고, 같은 해 12월 일본으로 건너가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일본 쇼와 천황에게 수류탄을 투척하는 사쿠라다몬 의거를 감행했다. 거사 실패 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순국했으며, 그의 의거는 침체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알리고 윤봉길 의거에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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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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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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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봉창 |
출생일 | 1900년 8월 10일 |
출생지 | 한성부 용산구 효창동 (현재 서울특별시 용산구) |
사망일 | 1932년 10월 10일 |
사망지 |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우시고메구 이치가야 형무소 |
사망 원인 | 교수형 |
안장지 | 효창공원 |
훈장 | 건국훈장 대통령장 (2등급) |
한국어 이름 | 이봉창 |
한자 이름 | 李奉昌 |
로마자 표기 | I Bongchang |
일본어 이름 | りほうしょう (리호쇼) / イボンチャン (이본찬) |
인물 정보 | |
별칭 |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 아사야마 쇼이치(浅山昌一), 마쓰이 가즈오(松井一夫), 마쓰바라 가즈오(松原一夫), 기노시타 후지마사(木下藤昌), 기노시타 쇼(木下昌) |
직업 | 토공, 상인, 독립운동가 |
종교 | 불교 |
영향 받은 인물 | 김구 |
본관 | 전주 이씨 |
가족 | 이은임 (조카딸), 이범태 (친형), 이봉준 (이복 동생), 이종태 (이복 동생) |
부모 | 아버지 이진규, 어머니 밀양 손씨, 서모 2명 |
학력 | |
학력 | 일본 간사이 공업학교 야간학부 중퇴 |
명예 졸업 | 1989년 서울재동초등학교 명예 졸업, 1992년 서울문창초등학교 명예 졸업 |
독립운동 | |
소속 단체 | 한국독립당 당무위원, 한인애국단 사무위원 |
주요 활동 | 이봉창 의거 |
훈장 | 건국훈장 대통령장 (1962년)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재판 정보 | |
죄목 | 대역죄 |
유죄 판결일 | 1932년 9월 30일 |
형벌 | 사형 (교수형) |
2. 생애
이봉창은 1900년 대한제국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와 청년기에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특히 조선총독부 철도국 근무 시절 일본인과의 차별 대우를 경험했다. 더 나은 삶을 찾아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일본어)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며 일본인 행세를 하기도 했으나, 그곳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었다. 특히 1928년 히로히토 천황 즉위식 참관 중 겪은 부당한 체포는 그가 민족의식을 깨닫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1930년 12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2. 1. 생애 초기
1900년 8월 10일 대한제국 한성부 용산방 원정2정목(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에서 아버지 이진규(李鎭奎, 다른 이름 이진구(李鎭球))와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9] 형으로는 노동자로 활동한 이범태(李範泰)가 있었다.[2] 아버지 이진규에게는 두 명의 첩이 있었으며, 서모 주간난(朱干蘭)에게서 이복동생 이봉준과 이종태가 태어났다. 그는 한성부에서 태어나 잠시 경기도 수원에서 유아기를 보냈고, 이후 충청남도 공주와 전라북도 전주 등지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선대는 경기도 수원에 거주했으며, 아버지 이진규의 생업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김구의 『도왜실기』에는 아버지가 농업에 종사하던 중류층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철도 부설로 토지를 강제 수용당하고 서울로 이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9][10] 그러나 이봉창 본인은 예심 조서에서 아버지가 선대의 재산에 의존하지 않고 건축청부업과 우차운반업으로 자산을 모은 신흥 자본가였다고 진술했다.[30][11] 아버지 이진규는 1930년 사망했으며, 형 이범태와 조카딸들은 해방 직후에도 생존해 있었다.
2. 1. 1. 청소년기
8세 때부터 금정에 있는 서당에서 3년간 한문을 배운 뒤, 1910년 천도교에서 세운 문창소학교(文昌小學敎)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제때 내지 못하고 늦게 입학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으나[29][30], 당시에는 서당 등에서 글을 배우다 소학교에 늦게 입학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아버지 이진구(李鎭球)가 가산을 탕진하고[30] 본처인 어머니를 버린 뒤 첩과 살면서 집안 형편이 크게 기울었기 때문에[11], 이봉창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10][11]1915년 학교 졸업 후 바로 생계를 위해[9] 경성부 원정 2정목(元町二丁目, 현 명동)에 있던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점 와다(和田) 위생당의 점원으로 취직해 1917년까지 일했다.[13] 이 시기인 14~15세 무렵 말라리아를 앓았고,[13] 그 후유증으로 얻은 관절염 때문에 환절기마다 관절 통증에 시달렸다.[13] 이후 용산구 한강통의 일본인 약사가 운영하는 무라타(村田) 약국으로 직장을 옮겼으나[12] 이듬해 그만두었다.[13]
1918년에는 조선총독부 철도국 용산역의 연결원으로 취직하여[13] 후에 전철수로 승진하기도 했으나,[13] 일본인 직원과의 임금 및 대우 차별에 불만을 느꼈고,[13] 점차 일에 흥미를 잃어 술과 도박에 빠지기도 했다.[13]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으나, 당시 이봉창은 독립운동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후일 술회했다.[13]
결국 1924년 4월, 관절염 악화를 이유로[14] 철도국을 그만두고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일본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1][2]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인 1924년 9월, 반일 운동 성향의 청년 단체인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하여 이끌기도 했다.[2]
2. 2. 청년기
이봉창의 청년기는 주로 상점 점원과 조선총독부 철도국의 견습생으로 일하며 보낸 시기였다. 1915년부터 약 3년간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점과 약국에서 점원으로 일했으며,[13][12] 1918년에는 용산역의 기차운전 견습생이 되었다.그러나 철도국에서는 일본인 직원과 조선인 직원 간의 노골적인 차별 대우를 겪어야 했다. 봉급, 상여금, 승진 등 모든 면에서 불이익을 당했으며, 이는 그에게 큰 실망과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경험은 당시 조선인들이 겪었던 부당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한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운동의 의미를 깊이 인식하지 못했고, 정치나 독립운동에는 큰 관심이 없는 상태였다. 결국 철도국 내 차별에 염증을 느껴 1919년 견습생직을 그만두었다.
2. 2. 1. 상점 종업원 생활
1915년 이봉창은 원정 2정목에 있던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점 和田衛生堂|와다세이도일본어 제과점의 점원이 되어 1917년까지 일했다.[13] 당시 와다세이도 제과점의 급료는 식사 제공에 월 7~8원이었다. 제과점에서 일하는 동안 말라리아를 앓았고, 이로 인해 생긴 관절염 때문에 이후 환절기마다 관절 통증으로 고생했다.[13]1917년 월급이 적다고 생각하여, 약사 무라타 시게가쓰(村田柳一)가 운영하는 한강로 16번지의 村田薬局|무라타 약국일본어 점원으로 이직했다.[12][13] 이곳에서는 숙식을 제공하고 월급 10원 외에 판매 실적에 따른 보너스를 지급하여 월 수입은 13~14원이 되었다. 그러나 약품 매입 방식의 문제와 주문한 품목이 없어 판매하지 못하는 상황 등으로 인해 1918년 약국을 그만두었다.[13]
2. 2. 2. 철도 견습생 생활
1918년 조선총독부 철도국 소속 용산역에서 만선철도(滿鮮鐵道) 기차운전 견습생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입사 1년이 지난 1919년 초부터 송금, 봉급, 상여금, 승급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직원 간의 노골적인 차별 대우를 겪게 되었다.도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서 작성한 상신서(上申書)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 직원은 1년에서 1년 반 만에 용인(傭人)에서 용원(傭員)으로 쉽게 승급했지만, 조선인 직원은 아무리 성실히 근무해도 전철수(轉撤手)로 승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는 "하여간 倭놈의 남근에서 떨어져야 한다."는 말이 조선인들 사이에서 유행어처럼 돌았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가령 저능아로 태어나도 일본인이기만 하면..."이라는 의미로, 능력과 무관하게 일본인이기만 하면 승진하는 현실을 비꼬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는 약간 저능해 보이는 일본인 연결수(連結手)조차 순서에 따라 승급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술회했다. 또한, 1년에 두 번 있는 상여금 지급이나 승급에서도 차별을 받자 조선인 직원들은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으며, 이봉창 자신보다 늦게 들어와 일을 가르쳐주었던 일본인들이 먼저 전철수나 조차계(燥車係) 견습이 되어 오히려 그들의 밑에서 일하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고 토로했다.
처음에는 이러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에 대해 "상대는 일본인이다. 나는 내가 조선인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설혹 억울하게 내던져지고 차인다 하더라도 말없이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체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냉정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줄이나 인맥으로 승진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 여기며 침착하게 대응하고자 했다. 하지만 차별이 계속되자 점차 의욕을 잃고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으며, 술과 도박에 빠져 400~500원의 빚을 지기도 했다. 특히 자신보다 늦게 입사한 일본인 직원이 더 높은 호봉과 급여를 받는 것을 보며 차별 대우에 대한 분노가 커졌다. 훗날 1932년 2월 9일 일본 경찰 신문조서에서도 그는 "조선인은 내지인(일본인)과 비교할 때 승급률도 낮고 상여금 액수도 적을 뿐 아니라 용원으로 절대로 승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기량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1년이나 1년 반 늦게 들어온 일본인에게 잇달아 추월당해 마지막에는 가르쳐 주었던 자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기 때문에 싫증이 났던 것입니다."라고 진술했다.
한편,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이봉창은 비폭력적인 반일 시위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운동의 배경이나 의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고 큰 관심도 두지 않았다. 훗날 1932년 9월 16일 첫 공판에서 관선 변호사 야마구치 사타마사(山口貞昌)가 3.1 운동에 대한 소감을 묻자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고 답했을 정도로, 청년기에는 반일 의식이나 독립운동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결국 철도국 내 일본인 직원과 조선인 직원에 대한 차별 대우에 염증을 느껴 1919년 4월 14일 견습생직을 그만두었다.
2. 3. 일본 체류
1925년 11월, 이봉창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형 이범태와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1][2] 그는 그곳에서 제철소 노동자로 일하며 일본인 가정에 의탁했고, 일본인처럼 보이기 위해 '''기노시타 쇼이치'''(木下昌一일본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었지만, 점차 일본 환경에 적응하며 생활했다.[1]1928년 11월, 히로히토 천황의 즉위식을 보기 위해 교토로 갔다가 한글 편지를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11일간 구금되는 일을 겪었다.[1] 이 차별적 경험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일본인으로 동화되려 했던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가 한국인임을 깊이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1]
이후 독립운동에 대한 생각을 품었으나,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잠시 접어두었다. 1929년에는 도쿄로 이주하여 비누 도매상 등 임시직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여전히 차별적인 현실과 불안정한 생활에 부딪혔다.[1] 이 과정에서 동포가 겪는 차별을 목격하며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다.[1]
결국 그는 일본인 행세를 그만두고 한국인으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930년 12월 6일, 그는 오사카 지코(築港)에서 배를 타고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지였던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1]
2. 3. 1. 오사카 생활
보통학교 졸업 후 가게 점원, 철도 운전 견습생 등으로 일하다 1919년 이후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31] 1925년에는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하고, 마침 철도국을 그만둔 일본인 지인 후지하타(藤幡)가 조선인 식모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카딸 이은임을 주선했다. 그는 이은임의 급료를 가불받아 자신의 일본행 여비로 삼았고,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이은임, 후지하타와 함께 배편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 도착했다. 오사카에서 이은임을 후지하타에게 인계한 뒤, 자신은 그곳에 남아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32][13]오사카에서 생활하며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일본어)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15] 이후 일본인으로 행세하며 노동과 장사 등에 종사했고, 일본인처럼 보이기 위해 옷과 언어 습관을 바꾸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소개하는 등 일본인과 같은 생활 방식을 따랐다.
1926년 2월 오사카의 가스 회사에 잡역부로 취직했는데,[14] 이때 회사의 경리와 직원들이 조선 이름은 발음하기 어렵다며 부르기 쉬운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라고 권유하자[15] 본격적으로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3월,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간사이 공업학교(關西公業學敎) 야간학부에 입학했으나, 4개월 만에 중퇴했다.
그해 9월 각기병에 걸려 오사카 시립 자혜병원(현 오사카 시립 홍제원)에 입원했고,[14] 퇴원 후 12월에는 과거 무라타 약국 점원 시절 알게 된 일본인 지인 니시마스 지로의 도움으로 효고현 기노사키에 있는 그의 집에서 요양했다.[13]
1927년 5월 다시 오사카로 돌아와 가스 회사에 복직하려 했으나, 병가 중에 이미 해고된 상태라 거절당했다.[13] 이후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 부두에서 일용직 항만 노동자로 일하며 짐을 나르는 등 고된 노동을 이어갔다.[13] 이후에도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건강 문제 등으로 정규직을 얻기는 어려웠다.
2. 3. 2. 불심 검문과 체포
1928년 히로히토 천황의 즉위식을 보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오사카에서 교토로 이동했다.[1] 그는 스스로를 '신일본인'이라 여기며 천황의 얼굴을 직접 보고자 했으나,[1] 교토에서 예상치 못한 일을 겪게 된다. 조선에서 온, 한문이 섞인 한글 편지를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토 고조(五條) 경찰서에 체포되어 11일 동안 유치되었다가 풀려난 것이다.[1]당시 그는 스미토모 신동소(住友伸銅所) 아마가사키(尼崎) 출장소의 인부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 이후 동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아 위축되었다고 술회했다.[1] 이 경험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단순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민족적 차별을 받고 검속된 것에 대해 그는 깊은 울분을 느꼈으며, "왜 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일까" 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신일본인'이라는 허울뿐인 정체성을 버리고 자신이 진정한 한국인임을 깨달았다.[1]
본명인 이봉창 대신 기노시타 쇼이치(木下昌一)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며 일본인 행세를 해야만 했던 현실에 그는 자괴감을 느꼈다. 그는 마음속으로 본명을 당당히 사용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갈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차별과 울분 속에서 그는 조국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고, 이것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 그는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했으며, 조선 독립을 위해서는 천황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2. 3. 3. 일본 정탐 활동
1928년 11월, 히로히토 천황 즉위식을 보기 위해 교토에 갔다가 단지 한글 편지를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11일간 구금되는 차별을 겪었다.[1][13][14] 이 사건은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인처럼 행동해도 결국 조선인으로 차별받는 현실에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후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13]1929년 2월부터 9월까지 오사카시의 한 비누 도매상에서 일했다. 이때는 일본인 행세를 하며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蔵)'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5] 그러나 수금한 매상금 100원을 가지고 도쿄로 달아났다.[13] 이후 도쿄 교바시구의 카코우(坂口) 해산물 도매점에서 점원으로 일했으나, 동업자와의 경쟁에 싫증을 느껴 친구 집에서 지내거나 유흥가를 전전하는 등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그만두었다.[13] 그 뒤, 오오키 가방점의 외판원으로 취직하여 1930년 7월부터 11월까지 일했지만, 판매 대금 240원을 탕진하고 다시 일을 그만두었다.[13][14]
1930년, 30세의 미혼이었던 이봉창은 일본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일본의 실정을 파악하고 정탐하는 데 힘썼다.[31] 1931년에는 나고야에서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으나, 친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회복했다. 그 친구는 이봉창에게 일본인의 사위가 되어 안정적인 삶을 살 것을 권유했지만, 이봉창은 이를 거절하고 다시 도쿄, 오사카 등지를 방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일본인의 말투와 몸짓을 자연스럽게 흉내 내는 능력을 익혔는데, 이는 이후 활동에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33]
3. 의거
1930년 12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이봉창은 중화민국 상하이로 건너가 1931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를 만났다. 처음에는 일본 밀정으로 의심받기도 했으나, 그의 진심과 의지를 확인한 김구는 그를 한인애국단에 가입시키고 히로히토 천황 암살 의거를 맡겼다.
1931년 12월 12일,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입단하여 김구로부터 자금과 수류탄 2개를 받았다. 12월 17일 일본으로 출발하여 12월 19일 고베에 도착, 이후 도쿄로 이동하여 거사 기회를 엿보았다.[9] 그는 1932년 1월 8일 도쿄 교외 요요기 훈련장에서 열리는 육군 관병식에 천황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날을 거사일로 정했다.[1]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관병식을 마치고 궁성으로 돌아가던 히로히토 천황의 행렬을 도쿄 사쿠라다몬 부근에서 기다렸다가 수류탄을 투척했다.[16] 그는 천황이 탄 어가를 정확히 식별하지 못해 이치키 기토쿠로 궁내대신이 탄 두 번째 마차를 향해 던졌고, 수류탄은 천황이 탄 세 번째 마차로부터 약 32m 떨어진 곳에서 폭발했다.[17] 이 폭발로 근위병 1명과 말 2마리가 부상했지만,[9] 천황 암살에는 실패했다. 이봉창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봉창은 같은 해 9월 30일 대심원에서 대역죄로 사형 판결을 선고받았고,[18]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19]
3. 1.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
1925년 11월, 이봉창은 형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1][2] 제철소 등에서 일하며 일본식 이름 木下昌一|기노시타 쇼이치jpn를 사용했다. 일본인으로 살아가려 했으나 차별을 겪으며 민족의식을 키웠다.[1] 특히 1928년 히로히토 천황 즉위식 때 교토에서 부당하게 구금된 경험은 그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일본 내 여러 지역을 거치며 생활하던 그는 1930년 12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상하이로 향했다.[1] 12월 10일 상하이에 도착하여[1][2]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 나섰고, 1931년 초 상해대한교민단 사무실에서 김구를 만나게 되었다.[1] 처음에는 일본어가 능숙하고 행색이 달라 밀정으로 의심받기도 했으나,[3][1] 김구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진심을 인정받았다. 이봉창은 자신의 삶을 독립운동에 바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고, 이에 감명받은 김구는 그를 받아들여 히로히토 천황 암살 거사를 함께 준비하게 되었다.[1] 이로써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원이 되어 본격적인 독립운동 활동을 시작했다.
3. 1. 1. 의심과 김구와의 만남
1931년 1월 중순 상하이에 도착하였다.[34] 생계를 위해 상하이의 명선철공소에 입사했으나, 임금이 너무 낮아 자주 결근하다가 그만두었다.그 뒤 상하이에서 수소문 끝에 1931년 1월,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신처 주소를 전달받고 바로 그곳으로 찾아갔다. 밤중에 허름한 차림으로 찾아온 이봉창은 일본어가 섞인 한국어를 사용했고, 행색이 수상해 보였다. 당시 2층에서 비밀회의 중이던 임시정부 요인들은 그를 일본 밀정으로 의심하여 들여보내지 않으려 했다. 이봉창이 들여보내 달라고 간청하자 요인들은 더욱 그를 의심했다.[35]
특히 그가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일본식 옷에 게다(일본 나막신)를 신고 다녔던 점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들에게는 매우 거슬리는 부분이었다. 임정 요인들은 그를 '왜늙은이'라 부르며 일단 경계했다.[35]
1931년 초, 이봉창은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밀리에 지원하던 상해대한교민단(SKRA) 사무실을 방문하여 임시정부 가입 의사를 밝혔다.[1][2] 그러나 그는 무심코 임시정부를 가리키는 일본식 용어인 '가정부(假政府)'[1]를 사용하여 스파이라는 의심을 더욱 받게 되었다.[3][1] 이때 소란을 듣고 내려온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인 김구는 가명을 사용하여 자신을 소개했다. 이봉창은 자신의 이야기를 설명했지만, 김구 역시 그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김구는 명확한 답변을 피하고 다음 날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1]
며칠 후, 이봉창은 국수와 술을 사 들고 다시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곳에 있던 몇몇 한국인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중, 그는 큰 소리로 "일본 천황을 죽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인데, 왜 독립운동가들이 아직 그 일을 실행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사람들은 회의적이고 냉담하게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왜 지금까지 죽이지 못했겠소?"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봉창은 "예전에 도쿄에 있을 때, 천황이 하야마[1]를 방문한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구경하러 갔습니다. 천황이 바로 내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만약 내게 총이나 폭탄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답했다.[1]
2층에서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김구는 이봉창이 의거를 실행할 만한 인물임을 직감했다. 김구는 그날 저녁 이봉창이 머무는 곳으로 찾아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았다.[1]
"제 나이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다시 서른한 살을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반생 동안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으로는 인생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기 위해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로 왔습니다."[1]
김구는 이 대화에 깊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고, 이봉창과 함께 거사를 추진하기로 결심했다고 훗날 회고록에 적었다.[1]
3. 1. 2. 한인애국단 가입
1930년 12월 10일, 이봉창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1][2] 처음에는 경제적 안정을 찾으려 했으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던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치를 수소문했다. 그는 당시 임시정부의 비밀 사무소 역할을 하던 상해대한교민단의 위치를 알아내 1931년 초 사무실을 방문했다.[1]사무실을 찾아간 이봉창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입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나, 무심코 임시정부를 일본식 용어인 '가정부(假政府)'라고 부르는 바람에 일본의 밀정으로 의심받았다.[3][1] 이때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인 김구가 소란을 듣고 내려와 이봉창과 처음 대면했다. 김구는 가명을 사용하며 자신을 소개했고, 이봉창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역시 그를 의심하며 다음 날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1] 임시정부 내 다른 사람들도 이봉창을 경계하여 김구에게 그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권유하기도 했다.[36]
며칠 후, 이봉창은 국수와 술을 사 들고 다시 사무실을 방문했다. 술자리가 벌어지자 그는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일본 천황을 죽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인데, 왜 독립운동가들이 아직 그 일을 실행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다.[1] 주변 사람들은 회의적이고 냉담하게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왜 지금까지 죽이지 못했겠소?"라고 답했다.[1] 이에 이봉창은 과거 도쿄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 "예전에 도쿄에 있을 때, 천황이 가나가와현 하야마를 방문한다고 해서 구경하러 갔습니다. 천황이 바로 내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만약 내게 총이나 폭탄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1][37]
2층에서 이 대화를 엿듣고 있던 김구는 이봉창이 거사를 실행할 만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그날 저녁 김구는 이봉창이 머무는 곳을 찾아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1]
> "제 나이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다시 서른한 살을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반생 동안 방랑생활에서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으로는 인생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기 위해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해로 왔습니다."[1]
김구는 이 말에 깊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고, 이봉창에게 거사를 맡기기로 결심했다.[1] 이봉창은 김구의 지시에 따라 비밀리에 훈련을 받으면서 계속 일본인 행세를 하기로 했다. 그는 이전에 오사카 등지에서 생활하며 사용했던 일본식 이름 木下昌一|기노시타 쇼이치jpn를 계속 사용하며 일본인으로 위장했다.[1] 김구의 도움으로 대장간에서 일자리를 구해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1]
이후 두 사람은 여러 차례 만나 폭탄 거사를 계획했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는 재정난과 내부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무기 확보에 시간이 걸렸다. 1931년 5월, 이봉창은 김구에게 정식으로 조직에 가입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나, 김구는 당시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가입이 큰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 무렵 만주에서 일어난 만포산 사건은 일본이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는 사건이었는데, 이는 김구가 보다 체계적이고 비밀스러운 활동을 위한 조직, 즉 한인애국단을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1]
이봉창과 김구는 이후 접선 횟수를 석 달에 한 번 정도로 줄이며 비밀리에 만남을 이어갔다. 이봉창은 만날 때마다 음식과 술을 가져왔고, 때로는 만취하여 일본 노래를 부르거나 일본인처럼 차려입어 주변의 의심을 사기도 했다. 임시정부 사람들은 김구에게 일본인과 구별하기 어려운 이봉창을 중용한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지만, 김구는 매번 그를 변호했다. 1931년 11월, 마침내 거사에 사용할 폭탄이 준비되었다.[1] 이로써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의 제1호 단원이 되어 히로히토 천황 암살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3. 1. 3. 출발 직전
거사 준비는 1931년 11월에 완료되었다.[1] 12월 13일, 김구와 이봉창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의 집을 방문했다. 그곳에는 한인애국단의 깃발과 두 개의 수류탄이 준비되어 있었다.[1][2] 이봉창은 다음과 같이 선서했다.[1]> 나는 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선서 후 김구와 함께 수류탄을 들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1]
12월 15일, 김구는 이봉창에게 두 개의 수류탄을 건네며 사용법을 설명해주었다. 그날 저녁 이봉창은 김구에게 감사를 표하며, 자신의 낡은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큰돈을 맡겨준 것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그는 독립운동에 대한 헌신을 공개적으로 다짐하는 송별회를 열어달라고 요청했으나, 김구는 거절했다. 이봉창이 체포될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묻자, 김구는 선서식 때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고문을 견디고 침묵을 지킬 것을 당부했다. 최악의 경우, 김구 자신에 대한 정보만 공유하도록 허락했다.[1] 이후 며칠 동안 그들은 출발 준비를 했다.[1]
마침내 출발일인 12월 17일이 되었다.[1][2] 두 사람은 아침 8시 30분에 일어나 식사를 한 후, 마지막으로 함께 사진을 찍기로 했다. 사진을 찍는 동안 이봉창은 김구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고 "영원한 쾌락을 향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양인이 희열한 안색을 띠고 사진을 찍읍시다."라고 말했다. 이에 감동한 김구는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고, 이봉창은 부두로 향하는 택시에 올랐다.[1]
3. 1. 4. 일본 도착
1931년 12월 17일[39] 상하이를 떠나 고베행 히카와 마루(日香丸)에 승선했다. 배는 12월 19일 오후 8시에 고베에 도착했고, 이봉창은 그곳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1]이후 오사카로 이동했으며, 이때 일본에 있는 자신의 통장에서 일부 재산을 인출하여 고급 요리집에서 식사하고 유곽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12월 22일에는 도쿄에 도착했다.[1]
도쿄 도착 후, 12월 28일 또는 29일에 도쿄 아사히 신문(東京朝日新聞)에서 1932년 1월 8일 요요기 공원에서 열리는 군사 퍼레이드(관병식)에 히로히토 천황이 참석한다는 기사를 보았다.[1] 이를 통해 거사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1932년 1월 6일, 공격 계획을 세운 뒤 짧은 회고록을 작성했으나 곧 무의미하다 느껴 식당 쓰레기통에 버렸다. 거사 장소에 사탕 상자로 위장한 수류탄을 미리 숨겨두는 방법도 고려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1] 1월 7일에는 요요기 공원 일대의 경비가 삼엄하다고 판단하여 남쪽으로 이동,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의 한 매춘 업소에서 저녁 시간을 보냈다.[1]
3. 2. 투탄과 최후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사쿠라다몬 부근에서 육군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의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하였다.[16][17] 비록 천황 암살에는 실패하였으나, 이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일 투쟁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봉창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다.[9]체포된 이봉창은 같은 해 9월 30일 대심원에서 대역죄로 사형 판결을 선고받았고,[18]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19] 이봉창 의거의 자세한 과정과 재판 및 순국에 대한 내용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상세히 다룬다.
3. 2. 1. 사쿠라다몬 의거


1930년 12월, 이봉창은 새로운 각오로 중화민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는 철공소 기술공이나 민항구의 축음기 가게 점원으로 일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1931년 1월 찾아갔다. 당시 막 결성된 한국인애국단의 비밀 회의가 열리고 있었는데, 일본인처럼 차려입고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그를 일본 밀정으로 의심하여 쫓아냈다. 그러나 김구는 오히려 그가 잠입 정보원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발탁했다. 주변의 의심 속에서 열린 연회에서 이봉창은 술에 취해 일본 천황을 처단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고, 이 일이 계기가 되어 훗날 천황 암살 계획의 실행자로 결정되었다.
1931년 12월 12일, 이봉창은 한국인애국단에 정식으로 입단했다. 그는 김구로부터 자금 300USD와 무기인 수류탄 2개를 받아, 12월 17일 히카와마루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12월 19일 효고현 고베시에 도착한 그는 오사카시를 거쳐 12월 22일 도쿄에 도착하여 아사쿠사 마쓰키요정의 오와리야 여관에 묵었다.[9] 그러나 도쿄에서 유흥으로 자금을 탕진하여 상하이에 전보를 쳐 100JPY를 추가로 받기도 했다.[13] 그는 끊임없이 거사 기회를 엿보던 중, 12월 28일자 도쿄 아사히 신문에서 이듬해 1932년 1월 8일에 도쿄 교외 요요기 훈련장(현 요요기 공원)에서 육군 관병식이 열리고 히로히토 천황이 참석한다는 기사를 보고 이날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심했다.[1]
거사 이틀 전인 1월 6일, 그는 짧은 회고록을 썼다가 무의미하다 느껴 버렸고, 수류탄을 숨길 계획도 세웠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는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로 이동하여 7일 저녁을 보내기도 했다.[1]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관병식을 마치고 궁성으로 돌아가던 히로히토 천황의 행렬을 사쿠라다몬 부근에서 기다렸다. 그는 우연히 얻은 헌병 중장 오바 전규의 명함을 이용해 경비망을 통과하려 했으나[16], 아카사카 부근에서 대기하던 중 이치키 식당에서 사케를 마시는 사이 행렬이 지나가 버렸다. 그는 급히 택시를 타고 미야케자카의 육군 참모본부 앞에서 내려 경시청 정문까지 달려가 참배객들 사이에 섞였다.[16]
이봉창은 여러 대의 어가 중 어느 마차에 천황이 탔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첫 번째 마차를 보낸 뒤, 이치키 기토쿠로 궁내대신이 탄 두 번째 마차를 향해 수류탄 한 개를 던졌다. 실제 히로히토는 세 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고, 수류탄은 천황이 탄 마차로부터 약 32m 떨어진 곳에서 폭발했다.[17] 수류탄의 위력이 약해 히로히토는 무사했고, 마차 안에서 폭발 소리만 들었을 뿐이었다. 이 폭발로 두 번째 마차에 일부 파편 자국이 남았고, 근위기병 1명과 말 2마리가 부상을 입었다.[9] 이봉창은 즉시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의거는 실패로 돌아갔다.
체포 직후 이봉창은 처음에는 김구의 존재를 부인했으나, 나중에 이를 시인하고 김구의 지시를 받았음을 진술했다. 같은 해 9월 30일, 대심원(재판장 와니 사다키치)에서 대역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는 판결 당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이를 받아들였다.[18] 10월 10일 새벽, 도요타마 형무소에서 사형 집행 시설이 있는 이치가야 형무소로 이감되어[19] 같은 날 오전 9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3. 2. 2. 투옥과 최후
의거 직후 도쿄의 경찰서에 형법 제73조(대역죄) 위반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곧 도요타마 형무소(豊多摩刑務所)로 이감되었다. 도요타마 형무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1932년 1월 8일 경시청에서, 6월에는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수감 중에는 불교 서적을 읽기도 했다.1932년 9월 16일 도쿄 대법원에서 제1차 공판이 열렸고, 같은 해 9월 30일 오전 9시 15분, 대심원(재판장 와니 사다키치)은 350명의 경찰이 삼엄하게 경비하는 가운데 이봉창에게 대역죄로 사형 판결을 선고했다.[43][18] 이 재판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사형 선고 직후에도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염주를 손에 쥔 채 판사석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등 담담하게 판결을 받아들였다.[18]
같은 해 10월 10일 새벽, 수감 중이던 도요타마 형무소에서 사형 집행 시설이 있는 이치가야 형무소로 이감되었고,[19] 당일 오전 9시에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당시 그는 미혼으로, 향년 32세였다.
3. 3. 사후

이봉창의 의거는 비록 목표 달성에 실패했지만, 이후 윤봉길 의거의 성공에 영향을 주었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연이은 의거는 침체기에 빠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국제 사회에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해외 한인 교민 사회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의거는 당시 일본 사회에도 큰 충격을 주어,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이 총사퇴를 선언했다가 쇼와 천황의 만류로 철회하는 등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20] 중국에서는 당시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영향으로 현지 언론들이 이 사건을 호의적으로 보도했으며, 이는 일중 관계를 더욱 악화시켜 제1차 상하이 사변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21]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일본에서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찾아 1946년 대한민국으로 봉환했다. 유해는 서울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안장되었으며, 이 묘역은 삼의사묘(三義士墓)로 불린다.[4][5] 김구는 이봉창 의사가 처형된 날, 한인애국단 전체 단원에게 단식을 명하며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44] 효창공원에는 수류탄을 던지는 순간을 형상화한 이봉창 의사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4][5]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봉창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6]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천황의 행차에 그것도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세계에 과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인정받고 있다.[45]
이후에도 이봉창 의사를 기리는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1992년에는 서거 6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었고, 한국의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그의 의거가 소개되어 있다.[22] 독립기념관에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효창공원은 대한민국 지정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1999년 4월 16일에는 방한한 일본 자유당 당수 오자와 이치로가 효창공원을 찾아 삼의사묘에 참배하기도 했다.[23] '이봉창 의사 기념사업회'가 정기적으로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으며,[24][25] 2019년에는 이봉창 의사가 1931년 작성한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 등이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26][27]
4. 논란과 의혹
이봉창의 의거와 관련하여 여러 논란과 의혹이 있다. 체포 후 심문 과정에서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는 듯한 발언을 남겨 논란이 되었으며,[46] 이는 김구의 부추김과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설명한 부분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일본에서의 조선인 차별 경험이 의거의 주요 동기였다는 주장[40]도 제기된다. 한편,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할 당시 그의 행색과 일본어 사용 등으로 인해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그를 의심했던 정황이 있으며,[35][46] 심지어 한인애국단 간부가 그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 자전거 절도를 지시했다는 주장[46]도 있다.
4. 1. 반성 논란
체포 직후 이루어진 심문 과정에서 이봉창은 자신의 의거에 대해 반성하는 듯한 취지의 발언을 남겨 논란이 되었다. 그는 심문에서 자신이 불교 사상에도 심취해 있었음을 언급하며, 김구로부터 부추김을 받아 "난폭한 짓"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46]다음은 관련 심문 기록의 일부이다.
- '''[문]''' 피고인은 올해 1월 8일의 흉행을 현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 '''[답]''' 나는 형무소에 수용된 후 불교 이야기를 듣거나 불교 책을 읽거나 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한 결과 나의 사상은 내가 사바 세계에 있을 때와 아주 다르게 변했습니다. 나는 김구(김구)로부터 부추김을 받아 결국 그런 마음이 생겨 천황 폐하에 대해 난폭한 짓을 했습니다만 오늘에는 굳이 김구를 원망하지는 않으나 그 사람의 부추김에 놀아난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나의 어리석음으로 엄청난 짓을 해 참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46]
이처럼 그는 자신의 행위를 김구의 부추김과 "나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책임을 돌리는 듯한 발언을 남겼다.[46]
4. 2. 차별대우 문제
1932년 1월 11일 도요다마 형무소에서 열린 2차 재판에서 이봉창은 자신이 일본인들에게 받은 차별대우가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 원인이라고 밝혔다. 그는 진술에서 1925년 처음 일본에 왔을 때는 일본 황실이나 정부에 대해 불만이 없었으나, 1928년 일왕 즉위식을 보기 위해 친구들과 오사카에서 교토로 갔을 때 단지 한글 편지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교토 오조(五條)경찰서에 11일간 구금되었다고 말했다.[40]이봉창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차별을 받는 것에 분개했다고 밝혔다. 당시 스미토 신동소 아마가사키 출장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검속당한 이후 동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듯한 느낌에 위축되었고, 단순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민족적 차별을 받은 것에 큰 울분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이 일로 그는 세상이 싫어지고 왜 조선인으로 태어났는지 후회하는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이후 조선인임이 알려지지 않도록 일본 이름을 사용하고 조선에는 편지도 보내지 않는 등 일본인 행세를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본명을 당당하게 사용하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40]
또한, 철도국 견습사원으로 근무할 당시에도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대우에 울분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1932년 1월 11일 진술에서 그는 "조선인과 내지인(일본인) 사이에 차별 대우가 있었다. 조선인은 내지인과 비교할 때 승급률도 낮고 상여금 액수도 적을 뿐 아니라 용원으로 절대로 승진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실력과 관계없이 1년 이상 늦게 들어온 일본인에게 계속 추월당해 결국 자신이 가르쳤던 사람 밑에서 일하게 되면서 일에 싫증을 느꼈다고도 밝혔다.[40]
이러한 지속적인 차별 경험은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조국인 조선을 일본에게서 독립시켜 다시 옛날과 같은 우리나라가 되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진술하며 독립운동의 동기를 명확히 했다.[40]
4. 3. 김구의 의심
1931년 1월 중순 상하이에 도착한 이봉창은[34]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신처의 주소를 전해 듣고 찾아갔다. 그러나 밤중에 찾아온 데다 일본어가 섞인 한국어를 사용하고, 일본식 옷에 게다(일본 나막신)를 신는 등 행색이 수상하다는 이유로 임시정부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를 들여보내려 하지 않았다.[35]특히 이봉창이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일본식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모습은 임정 요인들의 경계심을 샀다. 그들은 이봉창을 '왜늙은이'라 부르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35] 이봉창이 가까운 거리에서 일본 천황을 직접 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여러 차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뒤에야 임시정부 측은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었다.
하지만 김구는 의거 준비 과정에서 끝까지 이봉창에게 자신의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 이봉창은 체포 직후 경시청 신문 조서에서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진술했으며, 1932년 6월 27일 도쿄 지방재판소 예심 법정에서는 "민단 사람들은 그 사람을 백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만 실제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46]"라고 답하기도 했다.
4. 4. 민단 간부의 도둑질 사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이봉창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자전거 도둑질을 시켰다는 주장이 있다.[46] 이봉창이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민단 총무라고 밝힌 한 독립운동가가 그에게 자전거를 훔쳐 오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이봉창은 1932년 6월 27일 도쿄 지방재판소 예심판사 아키야마 다카히코(秋山高彦) 앞에서 열린 최후 변론에서 이 사실을 직접 진술했다. 그는 "나는 상하이에 간 뒤 얼마 안 되어 상하이에서 자전거 1대를 들치기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일은 말씀드리지 않았으므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민단의 총무인가 하는 조선인이 자전거를 들치기 해 오면 팔아 주겠다고 해 마침 돈도 곤란하던 때라 자전거 1대를 들치기하여 민단 사무소로 갖고 갔더니 중국인 종업원에게 그것을 팔아 오게 해 나에게는 중국화폐로 12, 3원을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46]
그는 민단 간부가 시키는 대로 자전거를 훔쳤지만, 다른 민단 관계자들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 그 간부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 일을 겪으며 이봉창은 자신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한인애국단으로부터 완전히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재판에서 "후에 이 일을 생각해 보니 나를 일본의 스파이라고 의심하여 시험해 본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라고 덧붙이며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46]
5. 평가
김구는 거사의 실패를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만일 자금의 제한을 받지 않아 더 성능 좋은 폭탄을 마련해 주었다면 윤봉길 의거 이전에 일왕을 성공적으로 사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51]
조동걸 교수는 이봉창 의거의 의의와 가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52]
- 인간주의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봉창은 가난한 노동자로서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평범한 삶 속에서 식민지 백성으로서 남모를 고뇌를 겪었고, 그럴수록 정직하게 살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중 민족 문제를 깊이 느끼고 일왕 저격을 결심하게 된다. 이는 어릴 때부터 민족을 외치며 영웅이 되려 했던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극히 평범한 인간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더욱이 영웅적인 거사를 마친 후에도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이처럼 이봉창은 식민지인으로서의 운명을 고심하다 의열 투쟁에 나섰으며, 그의 평범한 생애 자체에서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다.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 민족적 영웅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거창한 영웅주의를 내세운 경우들과는 다르다.
- 한인애국단 결성에 결정적이었다. 김구는 침체된 임시정부의 활로를 찾던 중 이봉창을 만났다.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의 제1호 단원으로 입단하여 '최선봉장'이 되었다.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한인애국단은 당시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의 활로를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봉창 의거는 한인애국단의 첫 번째 투쟁으로서 사실상의 출범식과 같았다. 이는 이후 항일 투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도 큰 도움을 주어 광복군 창설에도 영향을 미쳤다.
- 임시정부를 부활시켰다. 당시 임시정부는 내분과 어려운 여건으로 인해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재정적으로 어려워 집세조차 내기 힘들었고, 국내외 동포들의 지지도 잃어가며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구는 이봉창 의거를 계획하고 실행하게 했다. 이 의거는 무엇보다 임시정부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국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연이어 윤봉길 의거까지 성공하면서 국제적인 지원까지 얻게 되었고, 임시정부는 민족적 기반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은 임시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역사에 빛나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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