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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유럽 피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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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범유럽 피크닉은 1989년 8월 19일 헝가리 쇼프론에서 열린 행사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이 일시적으로 개방되면서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행사는 헝가리 야당, 오토 폰 합스부르크, 헝가리 개혁파 정치인 임레 포즈가이 등이 주도했으며, 헝가리의 국경 개방과 동독 시민들의 탈출을 묵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범유럽 피크닉 이후 헝가리의 국경 개방 결정은 동독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결국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의 중요한 도화선이 되었다. 이 사건은 냉전 종식과 유럽 통합의 상징으로 평가받으며, 현재까지 다양한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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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유럽 피크닉
지도 정보
행사 정보
이름범유럽 피크닉
로마자 표기Paneuropäisches Picknick (독일어), Páneurópai piknik (헝가리어)
날짜1989년 8월 19일
장소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 쇼프론 인근
주최범유럽 연합
참여자동독 주민, 서독 주민, 오스트리아 주민, 헝가리 주민
결과국경 개방, 동독 주민 대규모 탈출, 베를린 장벽 붕괴의 시발점
배경
당시 상황냉전 시기,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주의 정권 몰락 직전, 동독 주민들의 서독으로의 탈출 시도 증가
국경 개방 이유미하일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 정책, 헝가리의 개혁 정책, 오스트리아-헝가리 간의 관계 개선
상세 내용
주요 사건헝가리 국경 경비대가 동독 주민들이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것을 허용, 수백 명의 동독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
영향철의 장막의 상징적인 붕괴,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 운동 가속화, 독일 통일의 촉매제
관련 인물오토 폰 합스부르크, 미하일 고르바초프
평가
역사적 중요성동구권 몰락과 냉전 종식의 중요한 계기 중 하나로 평가됨
현대적 의미자유와 민주주의의 승리, 유럽 통합의 상징으로 기억됨

2. 배경

1989년, 중부 유럽은 긴장 상태였다. 동구권 국가 국민들은 독재 정부 아래에서 민주 선거, 언론 자유,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 철의 장막과 체코슬로바키아 및 동독 국경은 삼엄하게 경비되었지만, 헝가리는 개혁 지향적인 접근을 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정책에 힘입어 헝가리 지도부는 변화(페레스트로이카)를 받아들였다. 비정부기구와 정당들은 민주적 다당제로의 전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해, 여러 중부 유럽 국가에서 정치 체제 변화 합의를 위한 원탁 회의가 열렸다. 2월 바르샤바에서 논의가 시작되었고, 4월 4일 폴란드 원탁 협상이 체결되어 연대가 합법화되고 6월 4일 의회 선거가 예정되었다. 연대의 승리는 예상을 뛰어넘었다.[20]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아들 카를 폰 합스부르크(Karl von Habsburg)가 이끄는 범유럽 연합 오스트리아 지부는 동구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공산주의 체제를 약화시킬 방법을 찾았다. 범유럽 연합은 중부 및 동유럽의 반대파와 자유 운동을 지원했고,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발트 국가들의 정치 행사에 참여했다. 그러나 서구와 동구 여론 모두 동구 공산주의 구조가 곧 해체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철의 장막은 1989년 8월까지 엄격하게 경비되었다.[21][22]

헝가리 국가보안국 자료에 따르면, 1989년 7월 10일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제안으로 국경에서 행사가 계획되었다. 그는 7월 31일 헝가리 비밀 정보부에 행사 준비를 알렸다. 동독 국가보안부(슈타지)는 범유럽 피크닉 정보를 가졌지만, 반응하지 않았고 버려진 차량 귀환 수송을 조직했다.[7]

2. 1. 동구권의 민주화 운동

1980년대 후반, 폴란드헝가리에서는 민주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민주화를 모색했고, 동방 사회주의 국가의 맹주인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고르바초프에 의해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었다.[20] 그러나 동독에서는 당 국가 평의회 의장 에리히 호네커가 슈타지(국가보안성)를 이용하여 국민을 단속했다. 동독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만이 국가 정체성이었고, 정치 민주화나 시장 경제 도입 등 개혁으로 서독과 차이를 없애는 것은 국가 존재 이유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여 동유럽의 개혁에 저항했다. 1988년 소련 잡지 '스푸트니크' 조차 발매 금지하고 언론 통제를 강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9년 5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개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동독 시민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개혁파가 민주화를 진행하던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국경 철조망 유지비가 재정을 압박했다. 헝가리는 1988년 해외 여행을 자유화했고, 국경 불법 월경은 1년에 헝가리인은 10명, 외국인(주로 동독과 루마니아)은 200~250명 정도여서 철조망 유지비에 많은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없었다. 1989년 3월 3일, 헝가리 총리는 고르바초프에게 "유용성이 다하고, 불법으로 서쪽 탈출하려는 동독과 루마니아 시민을 막는 데만 쓰인다"고 설명했고, 고르바초프는 "우리는 창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라며 암묵 동의했다.

5월 2일,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선 철조망 철거를 시작했다.[66] 다음 날, 동독 SED 정치국 회의에서 호네커는 "이 헝가리 놈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라고 소리쳤다. 당시 동독에서 서방 여행은 허가되지 않았지만,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망명할 수 있게 되면서 베를린 장벽 건설까지 계속된 두뇌 유출이 재개될 위험이 있었다. 동독 지도부는 헝가리 행동을 비난했지만, 소련 외무장관은 "그것은 동독과 헝가리 문제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답했다.

호네커 우려대로, 많은 동독 시민이 서독 망명을 원했다. 시민들은 경제 상황 불만뿐 아니라, 현 지도부가 다른 동방 국가와 비교해 정치 개혁 등에서 뒤처진 것에 불만이었다. 여름 휴가를 명목으로 헝가리 여행 허가서를 가지고 출국해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으로 향했지만, 국경 통행은 헝가리 여권 소지자만 허가되었고, 동독 시민이 허가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결국 국경 부근에 동독 시민들이 체류했고, 여름이 끝날 무렵 국경 부근 캠핑장에 약 10만 명의 동독인이 모였다.

이때 동베를린의 서독 상주 대표부에도 100명이 넘는 동독 시민이 몰려들어 8월 8일 건물이 봉쇄되었다. 8월 10일 부다페스트, 22일 프라하의 서독 대사관도 같은 이유로 봉쇄되었다.

2. 2. 동독의 상황

1980년대 후반,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민주화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했다. 그러나 동독에서는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SED) 서기장 겸 국가 평의회 의장인 호네커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하여 슈타지(국가보안성)를 이용해 국민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었다.[66] 분단 국가였던 동독에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국가 정체성의 핵심이었고, 정치 민주화나 시장 경제 도입과 같은 개혁은 서독과의 차이를 없애 국가 존재 이유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호네커 등은 동유럽에 불어오는 개혁의 물결에 저항했다.[67] 1988년에는 소련 잡지인 Спутник|스푸트니크ru조차 발매 금지 처분을 내리고 언론 통제를 강화했다.[68]

이러한 상황에서 1989년 5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동독 시민들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2. 3. 헝가리의 국경 개방

1980년대 후반, 헝가리에서는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300km에 이르는 가시 철조망 유지비가 재정에 부담이 되고 있었다. 헝가리는 1988년에 이미 해외 여행을 자유화했기 때문에, 철조망 유지비에 많은 비용을 지출할 필요가 없었다. 1989년 3월 3일, 헝가리의 네메트 총리는 고르바초프와 회담하여 철조망의 유용성이 다했다고 설명했고, 고르바초프는 암묵적으로 동의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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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선 철조망 철거를 시작했다.[24][25][26][27] 이는 철의 장막에 구멍을 뚫는 첫 사례였다. 6월 27일에는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모크와 헝가리 외무장관 호른이 국경 울타리를 자르는 상징적인 행사를 거행했다.[24][25][26][27]

이러한 상황에서, 동독 시민들은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망명하려 했다.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이 개방되었다고 해도, 통행이 허가되는 것은 헝가리 여권 소지자뿐이었지만, 많은 동독 시민들이 국경 부근에 몰려들었다.

8월 22일, 헝가리 국경 경비대가 동독인을 사살한 사건을 계기로, 네메트 수상은 국경 개방을 결단했다. 8월 25일, 네메트 수상과 호른 외무장관은 서독을 방문하여 수상, 겐셔 외무장관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 네메트 수상은 헝가리 내 동독 난민의 자유로운 출국을 허용하겠다고 제안하고, 9월 중순까지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할 준비가 있다고 밝혔다. 콜 수상은 감사를 표하고 난민 수용 대책을 약속했다.

9월 10일, 네메트 정권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관리 중단과 완전 개방을 결정했다. 헝가리 국내에 머물던 동독 시민들은 즉시 국경으로 이동했고, 11일 0시를 기해 국경이 개방되어 동독 시민들이 출국했다. 오스트리아는 동독 시민을 비자 없이 통과시키는 협정을 서독과 맺고 있었고, 동독 시민들은 서독으로 이동했다.

3. 범유럽 피크닉

1989년 8월 19일, 헝가리 쇼프론에서 헝가리의 민주화 단체들과 오스트리아의 범유럽 연합이 주최한 '범유럽 피크닉'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을 일시적으로 개방하여, 동독 시민들이 서방으로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0월 혁명으로 헝가리 공산당 정부가 붕괴되자, 피크닉에 참가한 동독 주민 수백 명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탈출했다.[42][43][44][45] 이는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범유럽 피크닉의 중심 인물이었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


이 행사는 헝가리 민주 포럼, 자유민주동맹, 피데스, 독립 소작농, 농업 노동자 및 시민당 등 헝가리 야당 4개 정당이 주최했다.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의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헝가리 국무장관 겸 개혁가인 임레 포즈가이가 후원했다.

당시 동독은 엄격한 여행 허가제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헝가리까지는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많은 동독 시민들은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를 통해 서독으로 망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이 개방되자, 수많은 동독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1989년 6월 20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위 계승자이자 유럽 의회 의원이었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데브레첸 대학교에서 국경 없는 유럽에 대해 연설했다. 그의 연설 후, 헝가리 민주 포럼(MDF) 당 대표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에서 피크닉을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23]

1989년 8월 19일 오후 3시, 국경 검문소가 개방되자 동독 시민들은 오스트리아로 달려갔다. 헝가리 국경 경비대는 개입하지 않았고, 당시 국경 최고 책임자였던 아르파드 벨라는 이들의 탈출을 묵인했다. 그날 하루 동안 661명의 동독인이 국경을 넘었다.[42][43][44][45]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는 이 사건에 대해 "하브스부르크가 폴란드 국경까지 팜플렛을 배포하여 동독 휴가객들을 피크닉에 초대했고, 그들은 선물, 음식, 독일 마르크를 받고 서독으로 가도록 설득당했다"고 비난했다.[50][39][51] 동독 폴리트뷰로는 이 사건을 논의했지만, 실질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52][53]

헝가리 정부는 서부 국경 순찰을 강화했지만, 더 많은 동독인들이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로 몰려들었다. 이후 헝가리 정부는 동독 시민들을 비밀리에 지원하고, 8월 25일 서독과의 비밀 회담을 통해 동독 난민의 자유로운 출국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9월 10일,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완전히 개방했고, 수많은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범유럽 피크닉은 동독 정권의 붕괴와 베를린 장벽 붕괴, 그리고 독일 통일에 기여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3. 1. 계획 및 준비

1989년 여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자 합스부르크 가 당주였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데브레첸 대학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 후 만찬에서 헝가리 민주 포럼(MDF) 데브레첸 지역 활동가 메사로슈 페렌츠는 헝가리가 철의 장막에서 해방된 것을 축하하며 농담을 던졌고, 참석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중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 지대에서 모닥불을 피워 바비큐 파티를 열고, 헝가리인과 오스트리아인이 국경 펜스를 둘러싸고 음식을 교환하며 유럽의 동서를 분단하는 펜스가 지리와 역사를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보여주자는 안이 나왔다.

이 이야기는 만찬을 고조시켰지만, 당시에는 파티 자리에서의 농담으로 여겨졌다. 메사로슈가 만찬 10일 후 민주 포럼 회의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꺼냈을 때도 많은 참석자들은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필레프 마리아라는 여성이 본격적으로 실행할 것을 제안했고, 두 사람은 준비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먼저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MSZMP)의 개혁파 정치국원이었던 포즈가이 임레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오토는 이를 수락했고, 포즈가이도 흔쾌히 승낙했다. 이후 네메트 미클로시 총리와 함께 이들은 "피크닉을 단순한 피크닉이 아니라, 훨씬 더 큰 사건으로 만들자"고 결정했다. 이미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했던 그들은 헝가리가 공산권에서 이탈하는 것을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네메트 총리는 훗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안고 있는 동독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습니다"라고 말하며, 동독 정부가 시민의 해외 이주를 제한하고 있는 것에 어느 정도 타격을 주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음을 시사했다.[23]

네메트와 포즈가이는 은밀하게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헝가리 내무부 지휘하의 치안 조직은 내무장관 호르바트 이슈트반이 개혁파였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었지만, 동독의 슈타지(헝가리 국내에도 구성원을 파견하고 있었다)와 MSZMP의 보수파가 이끄는 준군사조직 등에 방해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29]

헝가리 국가보안국 자료에 따르면, 1989년 7월 10일 오토 합스부르크의 제안에 따라 국경에서 행사가 계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1989년 7월 31일 헝가리 국내 비밀 정보부에 이 행사 준비에 대해 알렸다. 동독 국가보안부(헝가리에 있는 슈타지의 존재) 작전반은 범유럽 피크닉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요원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슈타지는 버려진 차량의 귀환 수송을 조직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7]

MDF는 지역 조직(지역 허가, 벤치 및 무대, 음식)을 맡았고 전단지를 디자인했다. 또한, 국경과 피크닉 장소로 가는 방법을 보여주는 스케치도 제공했다. MDF는 헝가리어 전단지를 헝가리에, 독일어 전단지를 오스트리아에 배포했다. 칼 폰 합스부르크의 지휘 아래 있던 오스트리아 팬유럽 연합은 소프론 근처 국경 근처 피크닉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독일어 전단지를 헝가리에 수천 장 배포했다. 라디오 프라이에스 유로파도 이 행사에 주목했다.[30] 이 행사의 광고 문구는 "해체하고 가져가세요"였으며, 모든 방문객은 철조망을 자르고 가져갈 수 있었다.[31][32][33]

3. 2. 전개

1989년, 헝가리에서 10월 혁명으로 헝가리 공산당 정부가 무너지자, 범유럽 피크닉에 참가했던 동독 주민 수백 명이 개방된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탈출했다. 이 사건으로 범유럽 피크닉은 중단되었다.[42][43][44][45]

이 정치 집회에는 서독 망명을 요구하는 13,000여 명의 동독 시민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망명했으며, 이는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당시 동독은 여행 허가제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헝가리까지는 비밀경찰의 감시 없이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많은 동독 시민들은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를 통해 서독으로 가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이 개방되었어도, 헝가리 여권을 가진 사람만 통행이 허용되었고 동독 시민의 통행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1989년 8월 초,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 지대에는 국경 개방을 요구하는 동독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1989년부터 헝가리 정부는 데브레첸 근처 헝가리-루마니아 국경을 넘은 루마니아 시민들을 위한 난민 수용소를 개설했다. 1989년 초여름, 3만~4만 명이 헝가리에서 망명을 신청했다. 헝가리는 난민의 지위에 관한 국제연합 협약(CRSR)에 서명했다.

헝가리의 재정 상황은 어려웠다. 네메트 미클로슈 총리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통제를 유지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1989년 6월 27일,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알로이스 모크와 헝가리 외무장관 율라 호른은 국경 울타리를 자르는 상징적인 행사를 거행했다.[24][25][26][27]

1989년 여름, 발라톤 호수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독인들이 헝가리에 머물렀다. 동독 내무장관 프리드리히 디켈은 헝가리로의 여행 기회를 제한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슈타지 수장 에리히 밀케는 이를 거부했다.[28]

1989년 6월 20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위 계승자이자 유럽 의회 의원이었던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데브레첸 대학교에서 국경 없는 유럽에 대해 연설했다. 그의 연설 후, 헝가리 민주 포럼(MDF) 당 대표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에서 피크닉을 제안했다.[23]

MDF는 지역 피데스와 MDF 그룹의 지지를 받아 참가자들을 모집하고 장소를 찾았다. 피크닉 장소는 소프론의 브라티슬라바 도로였다. 이 모임은 국경 초원에서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의 비공식적인 만남으로 계획되었다. 국경 검문소를 3시간 동안 개방하여 양국 시민들이 국경 없는 유럽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주최측은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MSzMP)의 임레 포즈가이를 후원자로 초청했다.

전 총리 네메트 미클로슈는 이 피크닉이 헝가리 정부가 동독 관광객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고 설명했다.[23]

범유럽 피크닉에 대한 최초의 정보는 1989년 7월 10일 헝가리 국가 안전부의 기록에 나타난다. 헝가리 내부 반응 방어는 1989년 7월 31일에 상급자에게 소프론의 범유럽 피크닉에 대해 알렸다.[29]

MDF는 지역 조직을 맡았고 전단지를 디자인했다. 오스트리아 팬유럽 연합은 소프론 근처 국경 근처 피크닉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독일어 전단지를 헝가리에 수천 장 배포했다. 라디오 프라이에스 유로파도 이 행사에 주목했다. 이 행사의 광고 문구는 "해체하고 가져가세요"였다.[31][32][33] 동독 비밀 경찰 슈타지는 1989년 8월 11일 부다페스트 주재 동독 대사의 보고서를 통해 계획된 피크닉과 국경 개방에 대해 경고를 받았지만, 아무런 대응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37]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이 합의한 상징적인 제스처로, 오스트리아 상크트 마르가레텐 임 부르겐란트에서 헝가리 쇼프론쾨히다로 이어지는 도로의 국경 검문소가 1989년 8월 19일 3시간 동안 개방될 예정이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딸인 발부르가 폰 합스부르크를 통해 피크닉에 참석하여 인사를 전했다. 헝가리 작가이자 반체제 인사인 죄르지 콘라드도 연설을 했다. 많은 참가자들은 이전 국경 시스템의 울타리에서 약 1km 정도를 잘라냈다. 이 상징적인 철거 행사는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38][39][40][41][15]

1989년 8월 19일 오후 3시 직전, 동독 시민 20~30명이 국경 검문소에 도착했다. 문이 부서지자 대부분 젊은 동독 시민들은 오스트리아 측으로 달려갔다. 피크닉과 국경의 “상징적인” 개방 동안 난민들은 세 차례에 걸쳐 철의 장막을 넘었다. 이는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동독에서 일어난 가장 큰 난민 이동이었다. 헝가리 국경 경비대는 발생하는 대규모 탈출에 대해 차분하게 대응했고 개입하지 않았다. 당시 국경 최고 책임자였던 아르파드 벨라는 이에 크게 기여했다. 수천 명의 동독 시민들이 국경이 정말로 열렸는지 확신하지 못해 국경을 넘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국경을 넘은 사람은 661명에 불과했다.[42][43][44][45]

네메트 총리는 1989년에 “하루 종일 사무실에 있었는데, 매우 초조했습니다. 다행히 소련 대사가 문을 두드리거나 모스크바에서 전화가 오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23]

600명이 넘는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했고, 많은 사람들이 국경에 차를 남겨두었다.[46] 동유럽 주민들은 철의 장막이 일부 무너졌고,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으며, 동쪽 정부들이 권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47][48][49]

1989년 여름 통제력을 상실한 에리히 호네커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는 《데일리 미러》에 대해 "하브스부르크는 폴란드 국경까지 팜플렛을 배포하여 동독 휴가객들을 피크닉에 초대했습니다. 그들이 피크닉에 왔을 때, 그들은 선물, 음식, 독일 마르크를 받고 서독으로 가도록 설득당했습니다."라고 말했다.[50][39][51]

동독 폴리트뷰로에서 합스부르크와 포즈가이의 팬유럽 피크닉은 드물게 논의된 주제 중 하나였다. "적의 반혁명과 그 최전선 보도가 작용하고 있다", "동독은 전투의 탑이다"와 같은 슬로건이 만들어졌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52][53]

부다페스트와 발라톤 호수 주변에서는 수천 명의 동독인들이 국경을 넘는 것을 주저했다. 며칠 동안 헝가리 정부는 서부 국경을 순찰하는 경비대 수를 늘렸고, 상대적으로 소수의 난민만이 서쪽에 도달했다. 1989년 8월 23일 서독 방송국 ZDF 직원이 계획한 또 다른 피크닉은 헝가리 보안 당국에 의해 국경에서 저지되었다.[54]

범유럽 피크닉은 헝가리 야당 4개 정당, 즉 헝가리 민주 포럼, 자유민주동맹, 피데스, 그리고 독립 소작농, 농업 노동자 및 시민당이 주최했다. 후원자는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의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헝가리 국무장관 겸 개혁가인 임레 포즈가이였다.

헝가리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주 포럼과 다른 민주화 세력들은 동독인들을 국경을 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크닉"이라는 형태가 된 것은 가벼운 농담이 계기였다. 1989년 여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자 합스부르크 가 당주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데브레첸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날 오토를 환영하는 만찬에서 데브레첸에 거주하는 민주 포럼 활동가 메사로슈 페렌츠가 헝가리가 철의 장막에서 해방된 것을 축하하며 농담을 했는데,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 중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 지대에서 모닥불을 피워 바비큐 파티를 열고, 헝가리인과 오스트리아인이 국경 펜스를 둘러싸고 음식을 교환하자는 안이 나왔다.

메사로슈가 만찬 10일 후 민주 포럼 회의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했을 때도 많은 참석자들은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필레프 마리아라는 여성은 이것을 본격적으로 실행할 것을 제안했고, 두 사람은 준비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먼저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MSzMP)의 개혁파로서 민주화를 주도하고 있던 포주가이 임레 정치국원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오토는 이를 수락했고, 포주가이도 이 지원 요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이후 네메트 수상과 함께 "그 피크닉을 단순한 피크닉이 아니라, 훨씬 더 큰 사건으로 만들자"고 결정했다.

네메트는 후에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안고 있는 동독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습니다"라고 말했고, 동독 정부가 시민의 해외 이주를 제한하고 있는 것에 타격을 주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네메트와 포주가이는 은밀하게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헝가리 내무장관 호르바트 이슈트반이 개혁파였기 때문에 헝가리 내무부 지휘하의 치안 조직은 신뢰할 수 있었지만, 동독의 슈타지(헝가리 국내에도 구성원을 파견하고 있었다)와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MSzMP) 보수파가 이끄는 준군사조직 등에 방해받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1989년 8월 19일,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 지대에 속하는 죄프뢰에서 범유럽 피크닉이 열렸다. 죄프뢰는 삼면이 오스트리아에 둘러싸여 있어 비교적 오스트리아로 탈출하기 쉬웠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이 집회는 공적 행사와 민간 행사를 동시에 진행했다. 먼저 공식 이벤트가 오후 2시경부터 시작되어 죄프뢰에서 주최자들의 기자 회견이 열렸다. 그 후 민간 주최 피크닉이 열리는 곳까지 관계자와 취재진은 버스로 이동했지만, 개최지에는 오스트리아 측에서 예상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주최자조차 접근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한편, 포주가이가 준비한 버스가 죄프뢰 교외의 호텔과 캠핑장에서 동독 시민을 태워 피크닉 개최지까지 실어 날랐다. 버스에는 동독 시민이 쇄도했고, 헝가리 측과 서독 영사관 직원이 유도했다. 동독 시민 중에는 이미 서독이 준비한 여권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오스트리아 측에는 버스가 여러 대 준비되어 있었다. 이것은 오스트리아 측 잔크트 마르가레텐 시장이 서독 정부의 요청을 받아 준비한 것이었고, 그날 안에 서독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집회의 명목은 "유럽의 미래를 생각하는 집회"였다. 회장에서는 브라스 밴드가 연주하고, 음식과 맥주가 제공되었고, 티롤 민요와 헝가리 민요에 맞춰 사람들이 춤을 추었다. 헝가리 국경 경비대는 1킬로미터 이내에 접근하지 않도록 지시받았다.

오후 3시, 국경 검문소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거기에 동독 시민을 태운 버스가 도착하여 사람들을 내리기 시작하자, 동독 시민들은 국경을 향해 달려갔다. 국경 검문소의 게이트는 활짝 열리고 동독 시민들은 뛰어서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헝가리 국경 검문소의 국경 관리관은 동독 시민들에게 등을 돌리고, 입국하는 오스트리아인의 여권을 세심하게 검사했다. 오스트리아인 여행객들은 그 광경을 보고 크게 웃으며, 동독 시민들이 통과하기 쉽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네메트는 수상 집무실에 설치된 특별 연락 회선을 이용하여 현장 상황을 모니터링했지만, 피크닉의 성공을 보고 안도했다.

그날 안에 잇따라 동독 시민이 도착하여 661명이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 8월에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를 경유하여 스스로 국경을 넘은 사람들은 3000명에 달했다.

그날의 헝가리 텔레비전은 피크닉 상황을 보도했지만, 600명 이상의 동독인이 탈출한 것에는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호네커는 담낭염으로 요양 생활에 들어가 있었고, 동독 지도부는 효과적인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치안 문제 담당 서기로 정권 2인자로 여겨지던 에곤 크렌츠는 8월 11일, 호네커에게 출국자 수를 보고하고, 국민의 대량 출국 문제를 당의 정치국에서 논의하도록 건의했다. 그러나 호네커는 "그래서 어떻게 할 작정인가. 왜 출국자 통계를 내는가. 그게 무슨 상관인가. 벽을 쌓기 전에 도망친 놈들은 훨씬 더 많았다"라고 말하며 크렌츠의 건의를 무시하고, 크렌츠에게 장기 휴가를 명령하여 정권 중추에서 멀리했다.

서독 텔레비전의 중계 영상으로 피크닉 상황을 본 호네커는 동독 주재 헝가리 특명전권대사에게 격렬하게 항의하며 동독 시민을 강제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헝가리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이미 때는 늦었다. 이 중계 영상이 방영된 후 동독에서는 누구나 출국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만, 초기에 국경 부근에 머물렀던 동독 시민 대부분은 동독 당국의 계략이 아닌가 의심했고, 피크닉이 끝난 시점에 대부분이 헝가리 측에 남아 있었다.

이후에도 국경이 열려 있다고 오해한 더 많은 동독 시민들이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로 몰려들어 부다페스트프라하의 서독 대사관 주변에도 넘쳐났다. 이는 헝가리에게도 중대한 문제였고, 개혁파 네메트 정권은 국내 보수파의 압박과 동독으로부터의 송환 요구, 그리고 소련의 동향을 보면서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나 소련으로부터는 특별히 큰 불만이 없었다. 네메트는 후에 "소련의 허용 한도를 시험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라고 말했다.

헝가리 정부는 확보한 동독 시민들을 부다페스트의 크리스트 교회(주그리겟 교회)에 은밀히 모았으며, 뒷마당에 많은 텐트가 쳐져 1000명이 넘는 동독 시민들이 텐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뒷마당에 면한 창문에서 서독 대사관 직원들이 은밀히 서독 여권을 만들고 있었다.[67]

8월 22일, 전날 밤 국경 부근에서 국경을 넘으려던 동독인이 헝가리 국경 경비대에 사살된 것을 계기로 네메트 수상은 국경을 여는 것밖에 없다고 결단했다. 8월 25일, 헝가리의 네메트 수상과 호른 외무장관은 서독을 방문, 수상, 겐셔 외무장관과 비밀리에 4자 회담을 가졌다. 네메트 수상은 헝가리 내 동독 난민에 대해 인도적 이유로 자유롭게 출국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고 제안하고, 9월 중순까지 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할 준비가 있다면서, 그 대가로 서독에 동독 시민 10만 명에서 15만 명을 보내고, 그들이 입국할 수 있도록 시설 등의 대책을 부탁하고 싶다고 했다. 이 제안을 받은 콜 수상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 난민 수용 센터와 그 수송 수단을 서둘러 준비할 것을 약속했다. 처음에는 콜과 겐셔 모두 얼마나 믿어야 할지 의심했다. 호네커 정권에 철퇴를 내리는 것과 같은 것이었고, 이야기가 너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 경과를 설명하고, 더 이상 미루면 국경 경비병에게 동독 시민이 사살되는 사건이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하여 이 이야기를 믿게 되었다. "소련은?"이라고 겐셔가 묻자, "아니, 모릅니다. 여러분이 준비가 끝났다고 연락을 받은 후 연락하겠습니다."라고 네메트는 대답했다. 후에 네메트는 콜이 이때 눈물을 글썽이며, "네메트 수상. 독일 국민은 여러분과 헝가리의 용기를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말했다.

이날 밤, 콜 수상은 소련의 고르바초프에게 전화하여 고르바초프의 진의를 듣고, 고르바초프는 "헝가리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다"[68]라고 대답하며 이 난민 처리 해결 방안을 묵인할 것을 전했다. 헝가리의 이 결단과 서독의 수용, 고르바초프의 묵인은 철의 장막의 불가역적인 제거와 헝가리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 탈퇴를 의미했다.

8월 31일, 헝가리의 호른 외무장관은 베를린에서 동독의 피셔 외무장관과 회담하고, 동독으로 귀국하는 국민을 처벌하지 않을 것, 서쪽으로의 이주 신청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호른은 또한 "15만 명 이상의 동독인이 발라톤 호 주변에서 캠프를 하고 있으며, 귀국하려 하지 않는다. 헝가리는 동독과의 관계를 해치고 싶지 않지만, 이러한 '비인도적인' 상태를 방치할 수 없다"고 말하며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완전히 개방할 의향이라고 밝혔다. 양자 협정에 따라 난민 송환을 요구했던 피셔 외무장관은 "그것은 배신이다. 너희들에게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동독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 가맹국 외무장관 회의를 제안하여 헝가리에 압력을 가하려 했지만, 폴란드는 거부했고, 소련도 불참하여, 소련을 편에 들지 않으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9월 10일, 네메트 정권이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관리 중단과 완전 개방을 결정한다. 저녁에 네메트 수상이 TV로 공식 발표하자, 국내에 머물렀던 동독 시민들은 즉시 국민차 트라반트를 타고 국경까지 이동하여 11일 0시를 기해 동독과의 협정[69]을 파기하고 국경을 개방하여 국내에 있는 동독 시민들을 출국시켰다. 오스트리아 측은 동독 시민을 비자 없이 국내를 통과시키는 협정을 서독과 맺고 있었고, 동독 시민들은 준비된 수십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서독 영내에 들어선 직후 파사우에 건설된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민 센터로 이동했다.

에곤 크렌츠(오른쪽, 1989년 9월 20일)


다음 날 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헝가리의 대응을 비난했지만, 호네커가 요양 중이어서 부재했기 때문에 결국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헝가리에 대한 어떤 보복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정치국원들 사이에서도 시민들의 유출이 계속되면서 동독의 존립이 위태로워지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지만, 결국 그 문제가 논의되지도 않았다. 그 사이에도 동독 내에서는 의사, 전철 및 버스 운전사, 고등 교육을 받은 젊은 노동자 등이 속속 탈출하여 동독 곳곳에서 교통기관 운행 중단, 의료 붕괴, 공장 폐쇄 등 사회적 혼란이 발생했다. 프라하의 서독 대사관에서는 9월 이후 매일 100명 이상의 동독 사람들이 울타리를 넘어 몰려들었고, 9월 말에는 그 수가 4000명에 달했다. 이 국경 개방으로 9월 말까지 약 3만 명이 오스트리아로 탈출했다.

10월 3일, 동독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폐쇄했다. 이로써 동독 국민이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경유하여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탈출할 수 없게 된 동독 국민들은 불만을 체제 비판으로 전환시키기 시작했고,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시위(월요 시위)가 격화되었다. 호네커는 상황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10월 18일에 호네커는 사퇴했고, 마침내 1989년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르게 된다.

4. 결과

1989년 범유럽 피크닉은 동독-헝가리 국경에서 열린 정치 집회로, 헝가리에서 10월 혁명으로 헝가리 공산당 정부가 무너지자, 피크닉에 참가했던 수백 명의 동독 주민들이 개방된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탈출하면서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양국 합의하에 상징적인 제스처로, 1989년 8월 19일 오스트리아 (Sankt Margarethen im Burgenland)에서 헝가리 (Sopronkőhida)로 이어지는 도로의 국경 검문소를 3시간 동안 개방했다. (Otto von Habsburg)는 딸 (Walburga von Habsburg)를 통해 피크닉에 참석하여 인사를 전했고, 헝가리 작가이자 반체제 인사인 (György Konrád)도 연설했다. 많은 참가자들은 이전 국경 시스템의 울타리에서 약 1km 정도를 잘라냈는데, 이는 공식적으로 승인된 상징적인 철거 행사였다.[38][39][40][41][15]

오후 3시 직전, 국경 검문소에 도착한 20~30명의 동독 시민들을 시작으로, 문이 부서지자 많은 동독 시민들이 오스트리아 측으로 달려갔다. 피크닉과 국경의 “상징적인” 개방 동안 난민들은 세 차례에 걸쳐 철의 장막을 넘었다. 이는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동독에서 일어난 가장 큰 난민 이동이었다. 헝가리 국경 경비대는 대규모 탈출에 개입하지 않았고, 당시 국경 최고 책임자였던 (Árpád Bella)는 이에 크게 기여했다. 그날 국경을 넘은 사람은 661명이었다.[42][43][44][45]

네메트 총리는 1989년에[23] “하루 종일 사무실에 있었는데, 매우 초조했습니다. 다행히 소련 대사가 문을 두드리거나 모스크바에서 전화가 오지는 않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

600명이 넘는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했고, 많은 사람들이 국경에 차를 남겨두었다.[46] 언론 보도를 통해 동유럽 주민들은 철의 장막이 일부 무너졌고,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으며, 동쪽 정부들이 우유부단한 행동으로 인해 점점 권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47][48][49]

동독의 (Erich Honecker)는 《(Daily Mirror)》와의 인터뷰에서 "하브스부르크는 (Poland) 국경까지 팜플렛을 배포하여 동독 휴가객들을 피크닉에 초대했습니다. 그들이 피크닉에 왔을 때, 그들은 선물, 음식, (Deutsche Mark)를 받고 서독으로 가도록 설득당했습니다."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무력함을 드러냈다.[50][39][51]

동독 (Politburo)에서 이 사건이 논의되었지만, 호네커는 질병으로 결석했고 (Günter Mittag)이 회의를 주재했다. "적의 반혁명", "동독은 전투의 탑", "서구 언론에 최면에 걸려서는 안 된다" 등의 슬로건이 만들어졌지만, 실질적인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52][53]

부다페스트와 (Lake Balaton) 주변에서는 수천 명의 동독인들이 국경을 넘는 것을 주저했다. 헝가리 정부는 서부 국경 순찰을 강화했고, 1989년 8월 23일 서독 방송국 (ZDF) 직원이 계획한 또 다른 피크닉은 헝가리 보안 당국에 의해 저지되었다.[54]

범유럽 피크닉은 헝가리 야당 4개 정당(헝가리 민주 포럼, (Alliance of Free Democrats), 피데스, (Independent Smallholders, Agrarian Workers and Civic Party))이 주최했다. 후원자는 (Christian Social Union in Bavaria), (Otto von Habsburg), 헝가리 국무장관 겸 개혁가인 (Imre Pozsgay)였다. 헝가리 정부는 소풍 이후 국경 통제를 정상화했다.

8월 22일, 네메트는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을 만나 헝가리가 국경 상황을 처리할 것이며 고르바초프의 허락은 불필요하다고 확신시켰다. 콜은 고르바초프에게 전화하여 네메트의 결정을 알렸고, 고르바초프는 헝가리 총리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9월 11일, 헝가리는 국경을 개방했고 3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했다.[23]

1989년 서베를린 시장 발터 몸퍼는 베를린 장벽 붕괴를 예상하며, 범유럽 피크닉이 동독 사람들에게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국경을 넘을 기회를 제공했다고 언급했다.[3]

동독 정권이 헝가리 루트를 차단하려고 시도한 후, 수천 명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고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10월 17일 호네커는 국가 원수직에서 해임되었고, 11월 9일 서베를린의 문이 열렸다.[23] 실각 후 호네커는 오토 폰 합스부르크에 대해 "이 합스부르크가 내 관에 못을 박았다"고 말했다.[55]

4. 1. 동독의 혼란과 베를린 장벽 붕괴

범유럽 피크닉 이후, 동독 주민들의 서독 탈출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헝가리 정부는 국경 통제를 강화했지만, 많은 동독인들이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했다.[54] 헝가리 정부는 8월에만 6,923명을 국경에서 체포했는데, 그 중 80%인 5,527명이 동독인이었다.[23] 8월 21일에서 22일 밤 사이에는 바이마르 출신의 36세 동독인 Kurt-Werner Schulz|쿠르트-베르너 슐츠de가 헝가리 국경 수비대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23]

헝가리의 네메트 미클로시 총리는 8월 22일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와 비밀 회담을 갖고, 헝가리 내 동독 난민들을 동독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9월 중순까지 국경을 개방하여 자유롭게 출국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23] 콜 총리는 이에 감사를 표하고 난민 수용 시설과 수송 수단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헝가리는 9월 10일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했고, 3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했다.[23]

동독 정부는 헝가리의 대응을 비난했지만, 에리히 호네커가 요양 중이어서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23] 동독 내에서는 의사, 전철 및 버스 운전사 등 고학력 젊은 노동자들이 대거 탈출하면서 사회적 혼란이 발생했다.[23]

동독 정부는 10월 3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폐쇄했지만, 이는 오히려 동독 국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켜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민주화 시위(월요 시위)가 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23] 결국 10월 18일 호네커는 사퇴했고,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졌다.[23]

이 과정에서 소련은 서방을 자극하거나 헝가리에 제재를 가하는 대신 사실상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식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강조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호네커를 부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는 호네커 축출 공작의 계기가 되었다.

4. 2. 헝가리의 민주화

범유럽 피크닉의 성공은 헝가리의 민주화 세력에게 민주화를 추진할 더 큰 자신감을 주었다. 이미 일당독재를 포기했던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Magyar Szocialista Munkáspárt)은 1989년 10월 23일에 헝가리 사회당(Magyar Szocialista Párt)으로 개명하면서 공산주의 체제를 종식시켰다.

민주화를 달성했지만, 헝가리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네메트(Németh) 정권은 헝가리를 빠르게 유럽의 일원으로 복귀시키고 서방의 원조와 투자를 유치하려 했다. 그러나 범유럽 피크닉으로 인해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Československá socialistická republika),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Народна република България),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Republica Socialistă România)의 공산주의 정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면서, 헝가리가 먼저 개혁을 추진했다는 인상이 옅어졌고, 기대했던 유리한 조건을 얻지 못했다.[68]

4. 3.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

1989년 범유럽 피크닉은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헝가리에서 10월 혁명으로 헝가리 공산당 정부가 무너지자, 범유럽 피크닉에 참가했던 수백 명의 동독 주민들이 개방된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탈출했다.[38][39][40][41][15] 이는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동독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난민 이동이었다.[42][43][44][45]

600명이 넘는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했고, 언론 보도를 통해 동유럽 주민들은 철의 장막이 일부 무너졌으며,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고, 동쪽 정부들이 우유부단한 행동으로 인해 권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46][47][48][49]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데일리 미러와의 인터뷰에서 "하브스부르크는 폴란드 국경까지 팜플렛을 배포하여 동독 휴가객들을 피크닉에 초대했습니다. 그들이 피크닉에 왔을 때, 그들은 선물, 음식, 독일 마르크를 받고 서독으로 가도록 설득당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무력함을 드러냈다.[50][39][51]

8월 22일 헝가리 수상 미클로시 네메트는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의 비밀 회담에서 헝가리 내 동독 난민들을 동독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9월 중순까지 국경을 개방하여 모든 동독인들이 자유롭게 출국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23] 콜 총리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했고,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고르바초프는 헝가리 총리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하며 묵인 의사를 밝혔다.[23]

9월 10일 헝가리 정부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완전 개방하기로 결정했고, 다음 날 0시를 기해 동독과의 협정을 파기하고 동독 시민들을 출국시켰다.[69] 오스트리아는 서독과 협정을 맺고 동독 시민들을 비자 없이 통과시켰고, 이들은 서독 내 이민 센터로 이동했다.

동독 정권은 헝가리의 대응을 비난했지만, 에리히 호네커가 요양 중이어서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동독 내에서는 의사, 전철 및 버스 운전사 등 전문 인력의 탈출이 이어지면서 사회적 혼란이 발생했다. 10월 3일 동독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폐쇄했지만, 탈출할 수 없게 된 동독 국민들은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시위를 벌이며 체제 비판에 나섰다. 결국 10월 18일 호네커는 사퇴했고,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졌다.

범유럽 피크닉은 헝가리 민주화 세력에게 민주화를 추진할 자신감을 주었고, 유럽으로의 회귀 사상을 강화했다. 헝가리는 10월 23일 공산주의 체제를 종식시키고 헝가리 사회당으로 개명했다.

소련은 이 사건에 대해 서방을 자극하거나 헝가리에 제재를 가하는 대신 사실상 방관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식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강조하는 연설을 하며 호네커를 부정했고, 이는 귄터 샤보프스키 등 동독 지도부가 호네커를 축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5. 평가 및 기념

범유럽 피크닉은 냉전 종식과 유럽 통합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매년 8월 19일 국경에서 기념식이 열리며, 피크닉 장소는 여러 기념물들로 기념되고 있다.

계단과 사람들이 탈출하는 흰색 돌 기념비
멜로코 미클로시(Miklós Melocco)가 제작한 판유럽 피크닉 기념비


베를린 라이히스타크 건물에 있는 판유럽 피크닉 기념 명판


상공에서 촬영한 범유럽 피크닉 기념공원

  • 1996년 쇼프론 근처 페르터라코슈에는 조각가 가브리엘라 폰 합스부르크가 제작한 높이 약 10m의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상이 세워졌다. 이 조각상은 가시철조망을 형상화한 것으로, 멀리서 보면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 멜로코 미클로시(Miklós Melocco)가 제작한 기념비
  • 데브레첸 시의 종
  • 일본-헝가리 우호협회(Association of Japanese–Hungarian Friendship)의 탑
  • 1991년 주최측이 공개한 목조 기념비


2009년 동독에서 성장한 안젤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피크닉 2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여 헝가리인들의 용기와 예지에 감사를 표하며, "두 개의 노예 국가가 함께 노예의 벽을 허물었고…헝가리인들은 동독인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에 날개를 달아주었다"고 말했다.[57] 헝가리 대통령 솔욤 라슬로는 철의 장막을 넘으려고 목숨을 건 사람들을 기리는 흰색 대리석 기념비를 공개했고,[57] 스웨덴 외무장관 칼 빌트는 "우리는 열린 사회와 열린 마음, 그리고 현재의 경계 너머 다른 사람들에게 열린 유럽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57][58]

2019년 8월, 메르켈 총리와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은 30년 전에 일어났던 판유럽 피크닉과 베를린 장벽 붕괴에 대한 그 중요성을 상기했다.[59][60]

베를린 라이히스타크 건물 북동쪽 모퉁이에는 판유럽 피크닉을 기념하는 기념 명판이 있다. 사건 현장이었던 주변 지역은 “범유럽 피크닉 기념공원”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2001년 쇼프론을 포함한 페르테 호/네지시드르 호의 문화적 경관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때 이 공원 일대도 포함되었다.

5. 1. 역사적 의의

범유럽 피크닉은 냉전 종식과 유럽 통합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989년 8월 19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열린 이 행사는 동독 주민 수백 명이 서방으로 탈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이었다.[42][43][44][45]

당시 중부 유럽은 민주화 요구와 개혁 움직임이 활발했던 긴장된 상황이었다. 헝가리는 개혁 지향적인 접근을 통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고,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은 이러한 움직임을 더욱 가속화시켰다.[20] 이러한 배경에서 범유럽 연합 오스트리아 지부장 카를 폰 합스부르크는 동구권 국가들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21][22]

범유럽 피크닉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의 합의 하에 국경을 일시적으로 개방하는 행사였다. 이 행사에는 서독 망명을 요구하는 13,000여 명의 동독 시민들이 참여했다.[38][39][40][41][15] 행사 도중 동독 시민들은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탈출했고, 이는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동독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탈출이었다.[42][43][44][45] 헝가리 국경 경비대는 대규모 탈출에 개입하지 않았고, 당시 국경 최고 책임자였던 아르파드 벨라는 이에 크게 기여했다.

이 사건으로 600명이 넘는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했으며,[46] 언론 보도를 통해 동유럽 주민들은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47][48][49]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는 이 사건을 서방의 선동으로 비난했지만, 이미 동독 주민들은 그의 무력함을 인지하고 있었다.[50][39][51]

헝가리 정부는 동독 시민들의 탈출을 묵인하고, 서독과의 비밀 협상을 통해 국경 개방을 결정했다.[67] 1989년 9월 10일,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완전히 개방했고, 수많은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이동했다.

동독 정부는 헝가리의 대응을 비난했지만, 소련은 개입하지 않았다. 동독 내에서는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었고, 결국 호네커는 사퇴하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범유럽 피크닉은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독일 통일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냉전 종식에 기여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5. 2. 기념 사업



피크닉 장소는 멜로코 미클로시(Miklós Melocco)가 제작한 기념비, 데브레첸 시의 종, 일본-헝가리 우호협회(Association of Japanese–Hungarian Friendship)의 탑, 그리고 1991년 주최측이 공개한 목조 기념비로 기념되고 있다. 1996년에는 조각가 가브리엘라 폰 합스부르크(Gabriela von Habsburg)가 제작한 높이 약 10m의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상이 쇼프론 근처 페르터라코슈에 세워졌다. 이 조각상은 가시철조망을 형상화한 것으로, 멀리서 보면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다.

독일 재통일의 중요한 이정표로 여겨지는 판유럽 피크닉은 매년 8월 19일 국경에서 기념식이 열린다. 2009년 동독에서 성장한 안젤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피크닉 2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여 헝가리인들의 용기와 예지에 감사를 표하며, "두 개의 노예 국가가 함께 노예의 벽을 허물었고…헝가리인들은 동독인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에 날개를 달아주었다"고 말했다.[57] 헝가리 대통령 솔욤 라슬로는 철의 장막을 넘으려고 목숨을 건 사람들을 기리는 흰색 대리석 기념비를 공개했고,[57] 스웨덴 외무장관 칼 빌트는 "우리는 열린 사회와 열린 마음, 그리고 현재의 경계 너머 다른 사람들에게 열린 유럽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57][58]

2019년 8월, 메르켈 총리와 헝가리 총리 빅토르 오르반은 30년 전에 일어났던 판유럽 피크닉과 베를린 장벽 붕괴에 대한 그 중요성을 상기했다.[59][60]

베를린 라이히스타크 건물 북동쪽 모퉁이에는 판유럽 피크닉을 기념하는 기념 명판이 있다.

사건 현장이었던 주변 지역은 “범유럽 피크닉 기념공원”으로 보존되어 있다.

2001년 쇼프론을 포함한 페르테 호/네지시드르 호의 문화적 경관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여기에는 범유럽 피크닉 공원 일대도 포함되어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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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Als in Ungarn die Berliner Mauer fiel 2019-09-19
[3] 뉴스 "Wir sind so verblieben, dass er uns rechtzeitig Bescheid geben würde" https://www.tagesspi[...] 2019-11-09
[4] 뉴스 The picnic that opened the Iron Curtain 2019-08-17
[5] 뉴스 20 Jahre nach dem Mauerfall: "Der 19. August 1989 war ein Test Gorbatschows" https://www.faz.net/[...]
[6] 인터뷰 2019-06-25
[7] 서적 Das Vorspiel für die Grenzöffnung Budapest 2014
[8] 웹사이트 Páneurópai Piknik 25 évvel ezelőtt https://volksgruppen[...] 2014-08-19
[9] 뉴스 Die Berliner Mauer begann im Burgenland zu bröckeln 1999-08-16
[10] 뉴스 Paneuropäisches Picknick: Die Generalprobe für den Mauerfall 2014-08-09
[11] 웹사이트 Sommer 1989: Weil Gorbatschow es doch ernst meinte https://www.fr.de/ku[...] 2019-07-28
[12] 뉴스 DDR-Massenflucht: Ein Picknick hebt die Welt aus den Angeln 2018-08-16
[13] 뉴스 Der 19. August 1989 war ein Test für Gorbatschows 200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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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방송 1989 Magic Hour Films, First Hand Films 201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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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뉴스 Der "Ostblock" beginnt zu bröckeln 2014-05-02
[28] 서적 Die Einheit 2015
[29] 서적 Das Vorspiel für die Grenzöffnung Budapest 2014
[30] 뉴스 Die Berliner Mauer begann im Burgenland zu bröckeln; Paneuropäisches Picknick: Die Generalprobe für den Mauerfall; Und dann ging das Tor auf; "Ich dachte mir, das könnte der Beginn von etwas sein" 1999-08-16, 2014-08-09, 2014-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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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뉴스 Flucht beim Grenz-Picknick 1989. "Es hätte auch ein Blutbad werden können" Der Spiegel 2019-08-19
[39] 뉴스 Ein Picknick für die Freiheit Badische Zeitung 2019-08-19
[40] 뉴스 Einmal Ungarn – und nie mehr zurück Suttgarter Nachrichten 2014-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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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뉴스 Der Durchbruch Der Tagesspiegel 2014-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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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방송 ヨーロッパピクニック計画~こうしてベルリンの壁は崩壊した~ NHKスペシャル 1993
[68] 기타 ネーメトはいい指導者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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