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장사 아미타괘불도 및 복장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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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법장사 아미타괘불도 및 복장유물은 1923년 고산 축연이 수화승을 맡아 제작한 불화로, 19세기 불화의 화풍을 보여준다. 자월, 학송, 덕주 등이 참여하여 경성부 숭인동 감로암에 봉안되었으며, 발원문과 화기, 복장주머니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복장유물로는 복장주머니 2개, 발원문, 약초, 오곡, 오향, 광물, 사리, 진언 등이 발견되었으며, 발원문을 통해 시주와 화주, 제작 시기 등을 알 수 있다. 인물의 형태가 정제되고 색채가 안정되어 예술성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으며, 학술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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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작 배경 및 봉안
이 괘불도는 1923년, 고산 축연이 수화승(首畵僧)을 맡아 다른 화승들과 함께 제작하여 당시 경성부 숭인동의 감로암(甘露庵)에 봉안했던 작품이다.[1] 그림 하단의 화기(畵記)와 함께 발견된 발원문(發願文), 그리고 괘불 상단에 매달린 복장주머니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제작 당시의 상황과 참여자, 봉안처 등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1] 특히 복장주머니에서 나온 발원문을 통해 화기에는 기록되지 않은 시주자와 화주(化主)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다.[1] 이처럼 제작 관련 기록과 유물이 잘 보존되어 있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서울·경기 지역 불교 미술을 이끌었던 고산 축연의 활동과 당시 불화 제작 양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1]
2. 1. 제작 주체
이 괘불도는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화승 고산 축연(古山竺演)이 1923년에 책임 화승(수화승, 首畵僧)을 맡아 제작했다.[1] 당시 고산 축연은 자월(慈月), 학송(鶴松), 덕주(德柱) 등 다른 화승들을 이끌고 이 괘불도를 완성하여 서울 숭인동에 있던 감로암(甘露庵)에 봉안하였다.[1]그림 하단 테두리 중앙에 남아 있는 화기(畵記)와 복장 주머니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제작에 참여한 여러 인물과 시주자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화기에는 제작 연대(불기 2950년, 서기 1923년 계해년 12월 15일 점안)와 함께 제작을 총괄하고 지원한 인물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으며, 발원문에서는 화기에 나타나지 않은 시주(施主)와 화주(化主)의 이름이 확인된다.[1]
이 괘불도는 고산 축연의 완숙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화기와 발원문이 온전히 남아 있어 제작 배경과 참여 인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1]
2. 2. 봉안 장소
그림 하단 테두리 중앙부에 남아 있는 화기() 내용으로 보아 이 괘불도는 1923년 고산 축연이 수화승()을 맡아 자월(), 학송(), 덕주()를 거느리고 조성한 뒤 경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 숭인동 감로암()에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1] 이와 함께 좌변() 상단에 ''이라 명기된 묵서명과, 우변() 상단의 ''이라는 묵서명을 볼 수 있다.[1]3. 도상 및 양식 특징
이 괘불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화승 고산 축연(古山竺演)이 1923년에 수화승(首畵僧)을 맡아 자월(慈月), 학송(鶴松), 덕주(德柱)와 함께 조성하여 경성부 숭인동 감로암(甘露庵)에 봉안했던 불화이다.[1]
전체적으로 상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아미타삼존을, 하단에는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를 배치하는 구도를 보여준다.[1] 적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고 청색을 일부 사용하는 색감은 전형적인 19세기 불화의 특징을 계승하고 있으나, 고산 축연의 다른 작품들, 특히 서울 안양암 아미타괘불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9호)와 비교했을 때 인물의 형태가 더욱 정제되고 안정적이며 색채의 조화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1] 이는 고산 축연의 완숙한 기량이 잘 드러난 부분으로, 세련된 필선과 적절한 입체감 표현으로 높은 예술성을 보여준다.[1]
또한, 그림 하단의 화기(畵記)와 별도로 발견된 복장주머니 속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조성 시기, 화사, 봉안처는 물론 시주자와 화주까지 명확히 알 수 있다. 특히 복장주머니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매우 드문 예로, 함께 발견된 복장 유물들과 더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1]
3. 1. 도상
이 괘불도의 상단부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단에는 사자를 탄 문수동자상과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상이 자리하고 있다.[1]상단 중앙의 본존불상은 아미타불상으로,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하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길게 내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 본존불 왼쪽(향하여 오른쪽)의 협시보살상은 관세음보살로, 화불(化佛)이 모셔진 보관을 쓰고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淨甁)을 받들고 있다. 오른쪽(향하여 왼쪽)의 협시보살상은 대세지보살로, 머리에 정병이 놓인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연꽃가지를 받쳐 들었다.[1]
삼존상 모두 법의(法衣)는 금색 선으로 둥근 무늬가 장식된 붉은색 대의(大衣)를 입고 있다. 얼굴은 턱 부분이 둥글고 이목구비가 단정하여 원만한 인상을 준다. 피부는 가루 금(金)에 아교를 섞은 금니(金泥)로 칠하여 삼존상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1]
하단 왼쪽의 문수동자상은 갈기가 풍성한 청사자(靑獅子) 위에 걸터앉아 연꽃가지를 받쳐 들고 있으며, 오른쪽의 보현동자상 역시 문수동자상과 같은 자세로 이빨이 여섯 개 달린 육아백상(六牙白象) 위에 앉아 있다.[1]
그림 하단 테두리 중앙부에는 화기(畵記)가 남아 있으며, 좌우 상단에는 각각 '불기이천구백오십년계해십이월봉안 화사 문고산(佛紀二千九百五十年癸亥十二月奉安 畵師 文古山)'과 '원결서방토만연대가재상도두정(願結西方土萬緣大家齋上渡頭程)'이라는 묵서명이 쓰여 있다. 상단부 테두리에는 범자(梵字)가 쓰인 둥근 무늬 17개가 둘러져 있다.[1]
색조는 붉은색과 녹색 위주이며, 푸른색은 일부 사용되었다. 이는 같은 화승인 고산 축연(古山竺演)이 그린 서울 안양암 아미타괘불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9호)보다 푸른색 사용이 적은 특징을 보인다. 전반적으로 고산 축연의 다른 작품보다 세련된 필선으로 인물의 형태와 입체감을 잘 표현했으며, 특히 서울 안양암 아미타괘불도와 비교했을 때 인물 형태가 더 정제되고 비례와 색채가 조화로워 예술성이 돋보이는 수작으로 평가받는다.[1]
3. 2. 양식
이 괘불은 1923년 고산 축연이 수화승(首畵僧)을 맡아 자월(慈月), 학송(鶴松), 덕주(德柱)와 함께 조성하여 경성부 숭인동 감로암(甘露庵)에 봉안한 불화이다.[1] 전반적인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며, 테두리 일부에 훼손과 좀이 슨 흔적이 보인다.[1]화면은 상단과 하단으로 나뉘는데, 상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배치한 아미타삼존불이 자리한다. 하단에는 청사자를 탄 문수동자(文殊童子)와 흰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普賢童子)가 마주보고 있다.[1]
본존인 아미타불은 왼손을 가슴 앞으로 올려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하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길게 내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 본존의 왼쪽(향하여 오른쪽)에 위치한 관세음보살은 화불(化佛)이 모셔진 보관을 쓰고 있으며,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淨甁)을 받들고 있다. 오른쪽(향하여 왼쪽)의 대세지보살은 정병이 놓인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연꽃 가지를 받쳐 들고 있다.[1] 삼존상 모두 금색 선으로 둥근 무늬가 장식된 붉은색 대의(大衣)를 입고 있다. 얼굴은 턱이 각지지 않은 둥근 형태이며,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표현되어 원만한 인상을 준다. 피부는 가루 금(粉金)에 아교를 섞은 금니(金泥)로 칠하여 삼존상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1]
하단 왼쪽의 문수동자는 갈기가 풍성한 청사자(靑獅子) 위에 걸터앉아 연꽃 가지를 들고 있으며, 오른쪽의 보현동자 역시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육아백상, 六牙白象) 위에 문수동자와 동일한 자세로 앉아 있다.[1]
색조는 적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청색이 일부 첨가되어 전형적인 19세기 불화의 양식을 보여준다.[1] 같은 화승인 고산 축연이 그린 안양암 아미타괘불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9호)와 비교하면 청색 사용이 적고, 인물 형태가 더욱 정제되어 전반적으로 안정되고 조화로운 느낌을 준다.[1] 고산 축연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 세련된 필선으로 인물의 형태를 구현하고 입체감을 적절히 표현하여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1]
그림 하단 테두리 중앙에는 화기(畵記)가 남아 있어, 1923년 고산 축연이 수화승으로서 자월, 학송, 덕주 등을 이끌고 조성하여 경성부 숭인동 감로암에 봉안했음을 알 수 있다.[1] 또한, 좌우 상단에는 각각 '불기이천구백오십년계해십이월봉안 화사 문고산(佛紀二千九百五十年癸亥十二月奉安 畵師 文古山)'과 '원결서방토만연대가재상도두정(願結西方土萬緣大家齋上渡頭程)'이라는 묵서명이 있으며, 상단 테두리에는 범자(梵字)가 쓰인 둥근 무늬 17개가 둘러져 있다.[1]
괘불 상단 축 양쪽에는 복장주머니 2개가 매달려 있는데, 이는 매우 드문 예이다. 각 주머니는 전체 높이 59.2cm, 지름 26.2cm 크기로, 항아리 모양 몸체에 꽃 모양 뚜껑과 적색, 청색, 황색의 띠 장식이 있다.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한 개의 주머니 안에서는 비단에 쓴 발원문(發願文)을 비롯하여 일체여래전신사리보협진언(一切如來全身舍利寶篋眞言), 약초(藥草), 오곡(五穀) 등의 복장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발원문을 통해 화기에는 기록되지 않은 시주(施主)와 화주(化主)의 이름이 확인되었다.[1]
이 괘불화는 조성 시기, 화사, 봉안처, 시주자, 화주 등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발원문과 화기가 온전히 남아 있고, 희귀한 복장주머니까지 거의 완전한 형태로 갖추고 있어 학술적 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 비록 1923년에 조성되었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서울 및 경기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고산 축연의 완숙기 화풍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추정된다. 특히 안양암 아미타괘불도보다 인물 형태가 더 정제되고 비례가 적절하며 색채가 조화로워 예술성이 돋보이는 수작으로 평가된다.[1]
4. 세부 묘사
법장사 소장 괘불도는 1923년 고산 축연이 책임을 맡아 그린 아미타불 괘불도이다. 상축에 2개의 복장 주머니〔腹藏囊〕가 있으며, 테두리 일부에 훼손이 보이고 좀이 슬었으나 전반적인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1]
그림의 상단부에는 아미타삼존불이, 하단에는 사자와 코끼리를 탄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중국어과 보현동자상普賢童子像중국어이 자리하고 있다.[1] 그림 하단 테두리 중앙부에 남아 있는 화기(畵記) 내용은 다음과 같다.[1]
이 화기를 통해 이 괘불도는 1923년 고산 축연(古山竺演)이 수화승(首畵僧)을 맡아 자월(慈月), 학송(鶴松), 덕주(德柱)를 거느리고 조성한 뒤 경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 숭인동 감로암(甘露庵)에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1]
이와 함께 좌변(향하여 오른쪽) 상단에는 '불기이천구백오십년계해십이월봉안 화사 문고산(佛紀二千九百五十年癸亥十二月奉安 畵師 文古山)'이라는 묵서명이, 우변(향하여 왼쪽) 상단에는 '원결서방토만연대가재상도두정(願結西方土萬緣大家齋上渡頭程)'이라는 묵서명이 있다. 상단부 테두리에는 범자(梵字)가 쓰인 둥근무늬 17개가 둘러져 있다.[1]
상축 양쪽에 매달려 있는 2개의 복장주머니는 전체 높이 59.2cm, 지름 26.2cm 크기이다. 항아리 모양 몸체에 꽃 모양 뚜껑부와 적·청·황색의 띠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개의 복장주머니에서는 비단에 쓴 발원문(發願文)을 비롯하여 일체여래전신사리보협진언(一切如來全身舍利寶篋眞言), 약초(藥草), 오곡(五穀) 등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복장품 중 발원문 기록을 통해 화기에는 보이지 않던 시주(施主)와 화주(化主)가 파악되었다.[1] 발원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괘불화는 조성 시기와 화사, 봉안처, 시주와 화주 등을 밝혀주는 발원문과 화기가 온전히 남아 있고, 예가 드문 복장주머니 또한 거의 완전한 형태로 구비되어 있어 학술적으로 자료적 가치가 크다.[1] 비록 조성 시기는 1923년이지만, 19~20세기에 서울 경기지역에서 활동했던 고산 축연의 완숙기 때의 불화로 추정된다.[1]
4. 1. 아미타삼존불
이 그림의 상단부에는 아미타삼존불이 배치되어 있다. 하단에는 사자와 코끼리를 탄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중국어과 보현동자상普賢童子像중국어이 자리하고 있다.[1]상단 중앙의 본존불상은 아미타불로서 왼손을 가슴 앞으로 올려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하였으며,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길게 내렸다. 본존불을 중심으로 왼쪽(향하여 오른쪽)에 자리한 협시보살상은 관세음보살로서 화불化佛중국어이 안치된 보관을 쓰고 버들가지가 꽂혀있는 정병을 받들고 있다. 오른쪽(향하여 왼쪽)에 배치된 협시보살상은 대세지보살로 머리에 정병이 안치된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연꽃가지를 받쳐 들었다.[1]
삼존상 모두 법의法衣중국어는 금선의 둥근무늬가 장식된 적색 대의를 착용하였다. 얼굴은 턱이 각지지 않은 둥글어진 형태에 이목구비의 표현이 단정하여 원만한 인상이다. 피부 빛깔은 가루 금(粉金)에 아교를 섞은 금니金泥중국어를 사용하여 처리함으로써 삼존상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낸다.[1]
색조는 적색과 녹색 위주에 청색이 일부 사용되어 전형적인 19세기 불화풍을 보여준다. 동일 화승인 고산 축연이 그린 안양암 아미타괘불도와 비교하면 청색 사용이 적고, 인물의 형태가 더 정제되고 비례가 적절하며 색채가 조화로워 안정감과 예술성이 돋보인다.[1] 고산 축연의 다른 작품들보다 세련된 필선으로 인물의 형태를 구현하고 입체감을 적절히 표현하여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1]
4. 2. 문수동자 및 보현동자
괘불도의 아래쪽 부분에는 문수동자와 보현동자가 그려져 있다.[1] 왼쪽(그림을 보는 사람 기준 오른쪽)에는 문수동자가 풍성한 갈기를 가진 청사자를 타고 걸터앉아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1] 오른쪽(그림을 보는 사람 기준 왼쪽)에는 보현동자가 있는데, 문수동자와 같은 자세로 이빨이 여섯 개 달린 흰 코끼리(육아백상)를 타고 앉아 있다.[1]5. 복장유물
괘불도 상축 양쪽에는 복장 유물을 넣은 주머니 2개가 매달려 있다.[1] 이 복장 주머니 안에서는 비단에 쓴 발원문을 비롯하여 각종 진언, 약초, 오곡 등이 발견되었다.[1] 발견된 유물, 특히 발원문을 통해 그림 하단의 화기(畵記)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시주와 화주 등 괘불 제작 관련 중요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1] 이 복장 유물과 주머니는 제작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예가 드물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학술적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1]
5. 1. 복장주머니
괘불도 상단 축 양쪽에 매달려 있는 2개의 복장 주머니는 전체 높이 59.2cm, 지름 26.2cm 크기이다.[1] 항아리 모양 몸체에 꽃 모양 뚜껑이 있으며, 적색, 청색, 황색의 띠 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1]
한 개의 복장주머니에서는 비단에 쓴 발원문을 비롯하여 일체여래전신사리보협진언, 약초, 오곡 등이 발견되었다.[1] 발견된 복장품 가운데 발원문 기록을 통해, 그림 하단의 화기(畵記)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시주(施主)와 화주(化主)가 누구인지 파악되었다.[1]


이 복장주머니는 예가 드물고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학술적으로 자료적 가치가 크다.[1]
5. 2. 발견된 유물
상축 양쪽에 매달려 있는 전체 59.2cm 지름 26.2cm 크기의 2개의 복장주머니는 항아리 모양 몸체에 꽃 모양 뚜껑부와 적·청·황색의 띠 장식으로 이루어졌다.[1] 한 개의 복장주머니에서는 비단에 쓴 발원문(發願文)을 비롯하여 일체여래전신사리보협진언(一切如來全身舍利寶篋眞言), 약초(藥草), 오곡(五穀) 등이 발견되었다.[1] 발견된 복장품 가운데 발원문 기록을 통해 화기(畵記)에는 보이지 않던 시주(施主)와 화주(化主)가 파악되었다.[1]:화기(畵記)[1]
::緣化秩 都監 李 潭 奉安于京城府崇仁洞
::證師 羅晴湖 別座 張璟敏 佛紀二千九百五十年癸亥
::誦呪 李錦雨 供司 徐信道 十二月十五日點眼
::金魚 文古山 別供 李信佛心
::崔慈月 內都監 林晦雲
::千德柱 外別座 金璟峰
::持殿 金虎山 書記 申禪晧
::奉茶 崔正燮 波水 黃自淵
::鐘頭 裵禪根
::金正煥
:발원문(發願文)[1]
::願 文
::京城府崇仁洞緣化所秩
::證明 羅晴湖
::金魚 文古山
::都監 李 潭
::別座 張璟敏
::持殿 金虎山
::施主 申氏功德心
::化主 安氏普明佛
::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我等與衆生 皆共成佛道
::佛紀二千九百五十年癸亥十二月十五日
6. 화기 및 발원문
이 괘불은 그림 하단 테두리 중앙부와 좌우변 상단에 화기(畵記)가 남아 있으며, 상축 양쪽에는 복장주머니 2개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매달려 있다.[1] 화기에는 1923년(불기 2950년) 고산 축연(古山竺演)을 비롯한 화승들이 괘불을 조성하여 경성부 숭인동 감로암(甘露庵)에 봉안한 사실과 참여 인물들의 역할이 기록되어 있다.[1] 또한, 복장주머니 중 하나에서는 비단에 쓴 발원문(發願文)과 함께 일체여래전신사리보협진언(一切如來全身舍利寶篋眞言), 약초, 오곡 등이 발견되었다.[1] 이 발원문을 통해 화기에는 기록되지 않은 시주(施主)와 화주(化主)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1] 이처럼 조성 시기와 화사, 봉안처, 시주, 화주 등을 명확히 알 수 있는 화기와 발원문, 그리고 복장주머니가 온전히 남아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1]
6. 1. 화기
그림 하단 테두리 중앙 부분에 남아 있는 화기(畵記)를 통해, 이 괘불도는 1923년(불기 2950년 계해년)에 고산 축연(古山竺演)이 수화승(首畵僧)을 맡아 자월(慈月), 학송(鶴松), 덕주(德柱)와 함께 제작하여 경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 숭인동 감로암(甘露庵)에 봉안했음을 알 수 있다.[1]또한, 괘불의 좌우변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묵서명이 남아 있다.[1]
- 좌변(향하여 오른쪽): '불기이천구백오십년계해십이월봉안 화사 문고산(佛紀二千九百五十年癸亥十二月奉安 畵師 文古山)'
- 우변(향하여 왼쪽): '원결서방토만연대가재상도두정(願結西方土萬緣大家齋上渡頭程)'
함께 발견된 복장 유물 중 발원문(發願文) 기록을 통해서는, 화기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시주(施主)와 화주(化主)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1]
화기와 발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기(畵記)'''[1]
:緣化秩 都監 李 潭 奉安于京城府崇仁洞
:證師 羅晴湖 別座 張璟敏 佛紀二千九百五十年癸亥
:誦呪 李錦雨 供司 徐信道 十二月十五日點眼
:金魚 文古山 別供 李信佛心
:崔慈月 內都監 林晦雲
:千德柱 外別座 金璟峰
:持殿 金虎山 書記 申禪晧
:奉茶 崔正燮 波水 黃自淵
:鐘頭 裵禪根
:金正煥
'''발원문(發願文)'''[1]
:願 文
:京城府崇仁洞緣化所秩
:證明 羅晴湖
:金魚 文古山
:都監 李 潭
:別座 張璟敏
:持殿 金虎山
:施主 申氏功德心
:化主 安氏普明佛
: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我等與衆生 皆共成佛道
:佛紀二千九百五十年癸亥十二月十五日
6. 2. 발원문
괘불도 상축 양쪽에는 전체 59.2cm, 지름 26.2cm 크기의 복장주머니 2개가 매달려 있다. 이 주머니는 항아리 모양 몸체에 꽃 모양 뚜껑부가 있으며, 적·청·황색의 띠 장식이 둘러져 있다.[1] 한 개의 복장주머니에서는 비단에 쓴 발원문(發願文)을 비롯하여 일체여래전신사리보협진언(一切如來全身舍利寶篋眞言), 약초(藥草), 오곡(五穀) 등이 발견되었다. 이 발원문 기록을 통해 화기(畵記)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시주(施主)와 화주(化主)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1]7. 의의 및 평가
법장사 아미타괘불도는 19~20세기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고산 축연(古山竺演)이 1923년 수화승(首畵僧)을 맡아 자월(慈月), 학송(鶴松), 덕주(德柱)와 함께 조성하여 서울 숭인동 감로암(甘露庵)에 봉안했던 불화이다.[1]
이 괘불도는 발원문과 화기(畵記)가 온전히 남아 있어 조성 시기, 화사(畵師), 봉안처, 시주(施主), 화주(化主) 등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매우 드문 형태인 복장주머니가 거의 완전한 형태로 구비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발원문을 비롯한 복장품들이 발견되어 학술적 가치를 더한다.[1]
화풍은 적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고 청색을 일부 첨가하여 전형적인 19세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특히 고산 축연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인물의 형태가 더욱 정제되고 안정감이 있으며, 색채의 조화가 뛰어나 예술성이 높게 평가된다. 동일 화승이 그린 서울 안양암 아미타괘불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9호)보다 인물 형태가 더 정제되고 비례가 적절하며 색채가 조화롭다는 특징이 있다. 세련된 필선과 적절한 입체감 표현 역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1]
비록 조성 시기는 1923년이지만, 19~20세기 서울·경기 지역 불화 연구 및 고산 축연의 완숙기 화풍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테두리 일부에 훼손이 있고 좀이 슬었으나 전반적인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며, 예술성과 학술적 가치를 모두 갖춘 수작(秀作)으로 인정받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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