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르네 주르당 드 뢰네
1. 개요
베르나르르네 주르당 드 뢰네는 바스티유 감옥 사령관으로, 1740년 바스티유 감옥에서 태어났다. 1776년 바스티유 감옥 사령관이 되었으며, 1789년 바스티유 습격 당시 항복 후 살해당했다. 그는 수감자들을 인도적으로 대했으며, 바스티유 습격 당시 군사적 무능함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뢰네는 두 명의 아내를 통해 세 명의 딸을 두었으며, 그의 살해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등 문학 작품에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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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위 | 로네 후작 |
|---|---|
| 출생명 | 베르나르-르네 주르당 |
| 출생일 | 1740년 4월 9일 |
| 출생지 | 바스티유, 파리 |
| 사망일 | 1789년 7월 14일 (49세) |
| 사망지 | 그레브 광장, 파리 |
| 배우자 | 우르슬 필리프 주느비에브 테레즈 르 부르시에 |
| 자녀 | 아드리엔 르네 우르슬 카트린 주느비에브 샤를로트 가브리엘 우르슬 |
| 아버지 | 르네 주르당 드 로네 |
| 어머니 | 샤를로트 르네 오브리 다르망빌 |
| 직함 | 바스티유 감옥 총독 |
|---|---|
| 임기 시작 | 1776년 10월 |
| 임기 종료 | 1789년 7월 14일 |
| 이전 | 앙투안-조제프 드 쥐밀락 |
| 이후 | 프랑스 혁명 중 폐지 프로스페르 술레스 (임시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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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습격 -
혁명 기념일
혁명 기념일은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알린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기념하며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프랑스의 국경일로, 매년 7월 14일에 불꽃놀이와 군사 퍼레이드 등의 행사가 전국적으로 개최된다. -
프랑스의 살해된 사람 -
자크 아멜
자크 아멜은 1930년에 태어나 2016년에 사망한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사제로, 이슬람 국가 추종자들에게 살해당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다. -
프랑스의 살해된 사람 -
마리 트랭티냥
프랑스 배우 마리 트랭티냥은 배우 장루이 트랭티냥과 영화 감독 나딘 트랭티냥 사이에서 태어나 아역 데뷔 후 《여인들의 사건》, 《퐁네프의 연인들》 등에서 활약했으나 2003년 남자친구의 폭행으로 사망했다. -
프랑스의 후작 -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은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의 군사이자 기술자로서 요새 건축과 공성전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도시 계획 및 행정 개혁에도 참여하여 프랑스 사회 발전에 기여했고, 그가 건설한 요새 중 12곳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프랑스의 후작 -
잔앙투아네트 푸아송 드 퐁파두르 여후작
잔앙투아네트 푸아송 드 퐁파두르 여후작은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은 애첩으로서 뛰어난 예술적 안목과 정치적 감각으로 프랑스 궁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사치스러운 생활과 정치적 개입에 대한 비판 또한 존재하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2. 1789년 이전의 생애
베르나르르네 조르당 드 로네 후작은 1740년 4월 8일과 9일 사이 밤, 그의 아버지가 총독으로 있던 바스티유 감옥에서 태어났다. 8세에 국왕 근위 총사대의 명예직을 받았고, 이후 프랑스 근위대에 입대하여 군 경력을 쌓았다.
1776년, 그는 앙시앵 레짐 하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전임자로부터 바스티유 감옥 총독직을 일종의 투자 형태로 매입하여 쥐미야크(Jumilhac)의 뒤를 이었다. 총독으로서 그의 재임 기간은 대체로 평온했으나, 1778년 루이 16세의 딸 출생을 기념하는 축포 발사에 실패하거나 1785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주요 인물인 루이 드 로앙 추기경과 잔 드 라 모트 발루아를 수감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그는 특히 다루기 어려웠던 잔 드 라 모트 발루아를 포함한 두 수감자 모두에게 정중하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개인적으로는 1777년까지 노르망디의 브르토니에르(Bretonnière) 봉건 영주였으며, 바스티유 감옥 인근 생 앙투안 거리에 여러 주택을 소유하고 임대하기도 했다.
2.1. 출생과 초기 경력
베르나르르네 조르당 드 로네 후작은 1740년 4월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는 밤, 당시 그의 아버지가 총독으로 있던 바스티유 감옥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친위대 머스킷병(mousquetaires du roi)의 명예직을 받았고, 이후 평시에는 파리에 주둔하는 프랑스 근위 연대(gardes-françaises)에 입대했다.
1776년, 드 로네는 쥐미약 공작(M. de Jumilhac)의 뒤를 이어 바스티유 감옥 총독이 되었다. 이는 앙시앵 레짐 시기 고위직 관례에 따라, 일종의 투자 형태로 전임자로부터 총독직을 사들인 것이었다.
그가 총독직을 수행한 13년은 대체로 평온했으나, 1778년 12월 19일에는 루이 16세 국왕의 딸 마담 로얄의 출생을 축하하는 바스티유 감옥의 대포 발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전해진다. 1785년 8월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주요 인물인 추기경 루이 드 로앙과 잔 드 라 모트 발루아의 수감을 책임졌다. 특히 잔 드 라 모트 발루아는 다루기 어려운 수감자였음에도, 드 로네는 두 사람 모두에게 예의 바르고 사려 깊게 대했다고 평가받는다.
1777년까지 그는 노르망디의 브르토니에르(Bretonnière) 봉건 영주(세뇨르)이기도 했다. 또한 바스티유 감옥 근처의 생 앙투안 거리에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하고 임대했다.
2.2. 바스티유 감옥 총독
베르나르르네 조르당 드 로네는 1740년 4월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는 밤, 그의 아버지가 총독으로 있던 바스티유 감옥에서 태어났다. 8세에 국왕 근위 총사대 명예직을 받았고, 이후 평시에는 파리에 주둔하던 프랑스 근위대에 입대했다.
1776년, 드 로네는 쥐미야크의 뒤를 이어 바스티유 감옥 총독이 되었다. 당시 앙시앵 레짐 하의 다른 많은 고위직처럼, 그는 일종의 투자로 전임자로부터 총독직을 사들였다.
그가 총독으로 재임한 13년 동안 큰 사건은 드물었으나, 1778년 12월 19일에는 루이 16세의 딸 출생을 축하하는 대포 발사에 실패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전해진다. 1785년 8월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주요 인물인 추기경 루이 드 로앙과 잔 드 라 모트 발루아를 수감하여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특히 잔 드 라 모트 발루아는 다루기 어려운 수감자였음에도, 드 로네는 두 사람 모두에게 예의 바르고 사려 깊게 대했다고 평가받는다.
1777년까지 그는 노르망디 지방 브르토니에르의 봉건 영주였으며, 바스티유 감옥 인근의 생 앙투안 거리에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하고 임대하기도 했다.
3. 바스티유 습격과 죽음 (1789년 7월 14일)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총독 드 뢰네는 혁명 군중의 항복 요구를 거부했다. 협상이 지연되는 사이 군중 일부가 요새 안뜰로 진입하자 수비대는 경고 후 발포했고, 군중은 이를 배신으로 간주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약 4시간의 전투 끝에 군중 측은 1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방어 측 피해는 사망 1명, 부상 3명에 그쳤다. 그러나 요새 내 물과 식량 부족으로 드 뢰네는 결국 항복을 결정했다.
항복 후 드 뢰네는 체포되어 오텔 드 빌로 이송될 예정이었으나, 도중에 격분한 군중에게 붙잡혀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군인 피에르-오귀스탱 율랭의 호송 시도는 실패했으며, 드 뢰네는 칼, 검, 총검 등으로 반복해서 찔리고 총에 맞았다. 시청 근처에서 "이제 그만! 죽여줘!"라고 외친 후 데노라는 실업 중인 요리사에게 사타구니를 걷어차여 숨졌다고 전해진다. 그의 머리는 정육점 주인 마티외 주브 조르당이 잘라 창 끝에 꽂아 거리를 행진했으며, 다음 날 센 강에 버려졌다.
드 뢰네 외에도 바스티유 수비대 장교 3명과 퇴역 군인 2명이 군중에게 린치를 당했고, 스위스 용병 2명은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비대원들은 공격에 가담했던 프랑스 근위병의 보호 아래 군중을 지나 호송되었고 결국 풀려났다.
3.1. 바스티유 습격 배경
(프랑스 혁명 박물관)
바스티유 감옥의 상설 수비대는 드 뢰네의 지휘 아래 있었으며, 정규군 복무에는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약 80명의 상이군인(앵발리드의 연금 수급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 이틀 전인 7월 12일, 이 수비대는 살리-사마드 연대 소속 스위스 척탄병 30여 명으로 증강되었다.
습격 당일 일찍 앵발리드 총독 Charles François de Virot de Sombreuil프랑스어는 혁명 군중의 요구를 수락했지만, 드 뢰네는 달랐다. 그는 요새 항복과 지하에 보관된 무기 및 화약 인도를 거부했다. 드 뢰네는 공격받지 않는 한 발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오텔 드 빌에서 온 두 명의 대표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참을성을 잃은 군중 일부는 도개교를 고정하는 사슬을 끊고 요새의 외부 안뜰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수비대는 경고를 외친 후 발포했다. 요새를 포위한 군중은 이를 드 뢰네의 배신 행위로 간주했다. 이어진 전투는 약 4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엄폐물 없이 노출된 군중 측에서는 약 1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총안이나 성벽 뒤에서 방어하던 수비대는 사망자 1명과 부상자 3명만을 냈다.
바스티유 내부에는 수원지가 없고 식량 공급도 제한적이었기에, 드 뢰네는 요새 내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도개교 틈으로 전달한 메모를 통해, 만약 조건이 거부된다면 요새 전체와 주변 지역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드 뢰네의 조건은 거부되었지만, 그는 결국 항복했다. 이는 수비대원들이 그가 화약이 보관된 지하실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오후 5시경, 요새에서의 발포가 멈추고 도개교가 갑자기 내려졌다.
드 뢰네는 체포되어 그의 칼과 지휘봉을 빼앗겼다. 반란 지도자 중 한 명이자 훗날 장군이 되는 피에르-오귀스탱 율랭이 그를 오텔 드 빌로 이송하려 했다. 그러나 이송 도중 분노한 군중이 드 뢰네를 격렬하게 공격하고 구타했으며, 결국 칼, 검, 총검 등으로 반복해서 찌르고 총을 쏘아 살해했다. 오텔 드 빌 근처에서 학대받고 자포자기한 드 뢰네가 "이제 그만! 죽여줘!"라고 외치고 실업 중인 요리사 데노에게 사타구니를 걷어차인 후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드 뢰네가 살해된 후, 정육점 주인 마티외 주브 조르당이 그의 머리를 잘랐다. 잘린 머리는 창 끝에 꽂혀 몇 시간 동안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다음 날 센 강에 던져졌다.
바스티유 수비대 장교 3명과 퇴역 군인 2명도 린치를 당했고, 스위스 용병 2명은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비대원들은 공격에 가담했던 프랑스 근위병의 보호 아래 군중을 지나 호송되었고 결국 풀려났다.
3.2. 방어 준비
바스티유의 상설 수비대는 드 로네의 지휘 아래 있었으며, 정규군 복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진 약 82명의 상이군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스티유 습격 이틀 전인 7월 12일, 이들은 살리-사마드 연대 소속 스위스 척탄병 32명으로 증강되었다.
솜브뢰유 앵발리드 총독이 그날 일찍 민중의 요구를 수락한 것과는 달리, 드 로네는 요새를 넘겨주고 지하에 보관된 무기와 화약을 인도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그는 공격받지 않는 한 발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오텔 드 빌에서 온 두 명의 대표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다.
3.3. 협상과 충돌
(프랑스 혁명 박물관)
바스티유의 상설 수비대는 드 뢰네 휘하의, 정규군 복무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약 82명의 상이군인(베테랑 군인 연금 수혜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스티유 습격 이틀 전인 7월 12일, 이들은 살리-사마드 연대 소속 스위스 척탄병 32명으로 증원되었다.
앵발리드 총독 샤를 프랑수아 드 비로 드 솜브뢰유가 그날 일찍 혁명가들의 요구를 수락한 것과 달리, 드 뢰네는 감옥 요새를 항복하고 지하에 보관된 무기와 화약을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공격받지 않는 한 발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파리 시청에서 온 두 명의 대표와 협상하려 했지만 논의는 길어졌다. 참을성이 없어진 군중의 일부는 도개교를 고정하는 사슬을 끊고 요새의 외부 안뜰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경고를 외친 후, 수비대는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요새를 포위한 군중은 이를 드 뢰네의 배신으로 해석했다. 이어진 전투는 약 4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노출된 군중 측에서는 약 1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총안이나 성벽을 활용하여 방어한 수비대 측은 사망자 1명과 부상자 3명만 발생했다.
바스티유 내에는 물 공급원이 없고 식량 공급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드 뢰네는 요새 내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도개교의 구멍을 통해 전달된 메모에서, 만약 이 조건이 거부될 경우 요새 전체와 주변 지역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드 뢰네의 조건은 거부되었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복했다. 이는 수비대원들이 그가 화약이 보관된 지하실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오후 5시경, 요새에서의 발포가 중단되었고 도개교가 갑자기 내려졌다.
드 뢰네는 체포되었고, 그의 칼과 지휘봉을 빼앗겼다. 그는 반란 지도자 중 한 명이자 훗날 장군이 되는 군인 피에르-오귀스탱 율랭에 의해 오텔 드 빌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는 길에 분노한 군중이 드 뢰네를 공격하고 구타했으며, 결국 칼, 검, 총검으로 반복해서 찌르고 한 차례 총을 쏘아 살해했다. 실제 살해는 오텔 드 빌 근처에서 일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절망하고 학대받던 드 뢰네가 "그만! 죽게 해줘!"라고 외치고 실업 중인 요리사 데스노에게 사타구니를 걷어차인 후였다고 한다.
그가 살해된 후, 드 뢰네의 머리는 정육점 주인 마티외 주브 조르당이 잘랐다. 그의 머리는 창 끝에 꽂혀 몇 시간 동안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다음 날 센 강에 던져졌다.
바스티유의 상설 수비대 장교 3명과 퇴역 군인 2명도 군중에게 린치를 당했고, 스위스 용병 2명은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방어자들은 공격에 가담했던 프랑스 근위병에 의해 폭도들로부터 보호받으며 호송되었고, 결국 풀려났다.
3.4. 항복과 죽음
(프랑스 혁명 박물관).
솜브뢰유 총독이 혁명가들의 요구를 수락한 것과 달리, 드 뢰네는 바스티유 감옥 요새와 그 안에 보관된 무기 및 화약의 인도를 거부했다. 그는 공격받지 않는 한 발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오텔 드 빌에서 온 두 명의 대표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논의는 지연되었다. 참을성을 잃은 군중 일부는 도개교의 사슬을 끊고 요새의 외부 안뜰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수비대는 경고 후 발포했으며, 포위자들은 이를 드 뢰네의 배신으로 간주했다. 이어진 전투는 약 4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군중 측에서는 약 1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방어 측은 총안과 성벽 뒤에서 엄호 사격을 하여 사망자 1명과 부상자 3명만을 기록했다.
바스티유 내부에 물 공급원이 없고 식량 공급이 제한되자, 드 뢰네는 요새 내 인원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도개교의 구멍을 통해 전달한 메모에서, 조건이 거부될 경우 요새 전체와 주변 지역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드 뢰네의 조건은 거부되었지만, 그는 결국 항복했다. 이는 수비대원들이 그가 화약 저장고로 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오후 5시경, 요새에서의 발포가 중단되고 도개교가 내려졌다.
드 뢰네는 체포되어 칼과 지휘봉을 빼앗겼다. 그는 반란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미래의 장군이 될 군인 피에르-오귀스탱 율랭에 의해 오텔 드 빌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동 중 분노한 군중이 그를 공격하고 구타했으며, 결국 칼, 검, 총검으로 여러 차례 찔리고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텔 드 빌 근처에서 학대받던 드 뢰네가 "그만! 죽게 해줘!"라고 외치며 실업 상태의 요리사 데스노에게 사타구니를 걷어차인 후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가 살해된 후, 정육점 주인 마티외 주브 조르당이 그의 머리를 잘랐다. 잘린 머리는 창 끝에 꽂혀 몇 시간 동안 거리를 행진하다가 다음 날 센 강에 던져졌다.
바스티유 수비대의 장교 3명과 퇴역 군인 2명도 린치를 당했으며, 스위스 용병 2명은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비대원들은 공격에 가담했던 프랑스 근위병에 의해 군중으로부터 보호받아 호송되었고, 결국 풀려났다.
4. 평가와 논란
드 뢰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전임자들보다 수감자를 인도적으로 대했다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바스티유 감옥 습격 당시 보여준 군사적 능력 부족과 우유부단함에 대한 비판 또한 존재한다. 당시 군사적 책임자들도 그의 능력에 대해 우려를 표한 기록이 있다.
개인적으로 드 뢰네는 두 명의 아내와 세 명의 딸을 두었으며, 그의 형제 자손 중 일부는 러시아에 정착하기도 했다. 그의 최후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와 힐러리 맨텔의 소설 "A Place of Greater Safety" 등 문학 작품에서도 묘사되었다.
4.1. 성격과 통치 방식
역사 작가 사이먼 샤마는 드 뢰네를 "비교적 성실하지만 다소 침울한" 혹은 "까다로운 면이 있었지만, 꽤 양심적이었다"고 평가하며 전임자들보다 수감자들을 더 인도적으로 대했다고 보았다. 반면, 바스티유 감옥 습격 직전에 다른 감옥으로 이감되었던 사드 후작은 드 뢰네를 "할아버지가 하인이었던 소위 후작"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 드 뢰네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스위스 용병 부대를 지휘했던 루이 드 플뤼 중위는 드 뢰네가 군사적 재능이 부족하고 경험이 없으며 우유부단했다고 비난했다. 드 플뤼는 이러한 문제점들이 바스티유 습격 이전에 이미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드 플뤼의 보고서는 연대 기록부에 보존되었다. 당시 군사 장관이었던 빅토르 프랑수아 드 브로이 공작 역시 1789년 7월 5일 자 기록에서 "바스티유에 관한 우려의 두 가지 요인이 있는데, 지휘관 (드 뢰네)과 그 수비대의 실태이다"라고 적으며 드 뢰네의 능력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냈다.
다만, 드 플뤼 중위의 보고서는 드 뢰네에게 다소 공정하지 못했을 수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파리와 그 주변에 집결한 왕실 군대를 지휘하던 상급 장교들이 효과적인 지원을 제공하지 못하면서 드 뢰네가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4.2. 군사적 능력 부족 논란
역사 작가 사이먼 샤마는 드 로네를 전임자들보다 수감자들을 더 인도적으로 대했던 인물로, "비교적 성실하지만 다소 침울한" 또는 "까다로운 면이 있었지만, 꽤 양심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바스티유 습격 직전에 다른 감옥으로 이감된 사드 후작은 드 로네를 "할아버지가 하인이었던 소위 후작"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따른다. 드 로네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스위스 용병 부대를 지휘했던 루이 드 플뤼 중위는 훗날 자신의 상관이었던 드 로네가 군사적으로 무능하고 경험이 부족했으며, 특히 바스티유 습격 이전에 이미 우유부단함을 보였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플뤼 중위의 이러한 평가는 당시 파리 주변에 집결했던 왕실 군대를 지휘하던 고위 장교들이 드 로네에게 효과적인 지원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드 로네가 처했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면 다소 공정하지 못하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89년 소요 사태 진압을 총괄했던 국방부 장관 빅토르 프랑수아 드 브로이 공작은 7월 5일자 기록에서 "바스티유와 관련된 두 가지 불안의 근원은 사령관(드 로네)의 인물과 그곳의 수비대 성격"이라고 지적하며 드 로네의 능력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5. 가족 관계
뢰네는 두 명의 아내를 통해 세 명의 딸을 두었다. 그의 형제의 후손 중 일부는 러시아에 정착했다(자세한 내용은 보리스 들로네 및 바딤 들로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