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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르네 주르당 드 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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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르나르르네 주르당 드 뢰네는 바스티유 감옥 사령관으로, 1740년 바스티유 감옥에서 태어났다. 1776년 바스티유 감옥 사령관이 되었으며, 1789년 바스티유 습격 당시 항복 후 살해당했다. 그는 수감자들을 인도적으로 대했으며, 바스티유 습격 당시 군사적 무능함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뢰네는 두 명의 아내를 통해 세 명의 딸을 두었으며, 그의 살해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등 문학 작품에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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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르네 주르당 드 뢰네
기본 정보
베르나르-르네 주르당 드 로네 초상화 (1740-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총독
베르나르-르네 주르당 드 로네 초상화, 바스티유 감옥 총독 (추정)
작위로네 후작
출생명베르나르-르네 주르당
출생일1740년 4월 9일
출생지바스티유, 파리
사망일1789년 7월 14일 (49세)
사망지그레브 광장, 파리
배우자우르슬 필리프
주느비에브 테레즈 르 부르시에
자녀아드리엔 르네 우르슬
카트린 주느비에브
샤를로트 가브리엘 우르슬
아버지르네 주르당 드 로네
어머니샤를로트 르네 오브리 다르망빌
직책
직함바스티유 감옥 총독
임기 시작1776년 10월
임기 종료1789년 7월 14일
이전앙투안-조제프 드 쥐밀락
이후프랑스 혁명 중 폐지
프로스페르 술레스 (임시 총독)

2. 1789년 이전의 생애

베르나르르네 조르당 드 로네 후작은 1740년 4월 8일과 9일 사이 밤, 그의 아버지가 총독으로 있던 바스티유 감옥에서 태어났다. 8세에 국왕 근위 총사대의 명예직을 받았고, 이후 프랑스 근위대에 입대하여 군 경력을 쌓았다.

1776년, 그는 앙시앵 레짐 하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전임자로부터 바스티유 감옥 총독직을 일종의 투자 형태로 매입하여 쥐미야크(Jumilhac)의 뒤를 이었다.[1][2] 총독으로서 그의 재임 기간은 대체로 평온했으나, 1778년 루이 16세의 딸 출생을 기념하는 축포 발사에 실패하거나 1785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주요 인물인 루이 드 로앙 추기경과 잔 드 라 모트 발루아를 수감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그는 특히 다루기 어려웠던 잔 드 라 모트 발루아를 포함한 두 수감자 모두에게 정중하게 대했다고 전해진다.[3][18]

개인적으로는 1777년까지 노르망디의 브르토니에르(Bretonnière) 봉건 영주였으며, 바스티유 감옥 인근 생 앙투안 거리에 여러 주택을 소유하고 임대하기도 했다.

2. 1. 출생과 초기 경력

베르나르르네 조르당 드 로네 후작은 1740년 4월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는 밤, 당시 그의 아버지가 총독으로 있던 바스티유 감옥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친위대 머스킷병(mousquetaires du roi)의 명예직을 받았고, 이후 평시에는 파리에 주둔하는 프랑스 근위 연대(gardes-françaises)에 입대했다.

1776년, 드 로네는 쥐미약 공작(M. de Jumilhac)의 뒤를 이어 바스티유 감옥 총독이 되었다. 이는 앙시앵 레짐 시기 고위직 관례에 따라, 일종의 투자 형태로 전임자로부터 총독직을 사들인 것이었다.[1][2]

그가 총독직을 수행한 13년은 대체로 평온했으나, 1778년 12월 19일에는 루이 16세 국왕의 딸 마담 로얄의 출생을 축하하는 바스티유 감옥의 대포 발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전해진다. 1785년 8월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주요 인물인 추기경 루이 드 로앙과 잔 드 라 모트 발루아의 수감을 책임졌다. 특히 잔 드 라 모트 발루아는 다루기 어려운 수감자였음에도, 드 로네는 두 사람 모두에게 예의 바르고 사려 깊게 대했다고 평가받는다.[3][18]

1777년까지 그는 노르망디의 브르토니에르(Bretonnière) 봉건 영주(세뇨르)이기도 했다. 또한 바스티유 감옥 근처의 생 앙투안 거리에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하고 임대했다.

2. 2. 바스티유 감옥 총독

베르나르르네 조르당 드 로네는 1740년 4월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는 밤, 그의 아버지가 총독으로 있던 바스티유 감옥에서 태어났다. 8세에 국왕 근위 총사대 명예직을 받았고, 이후 평시에는 파리에 주둔하던 프랑스 근위대에 입대했다.

1776년, 드 로네는 쥐미야크의 뒤를 이어 바스티유 감옥 총독이 되었다. 당시 앙시앵 레짐 하의 다른 많은 고위직처럼, 그는 일종의 투자로 전임자로부터 총독직을 사들였다.[1][2]

그가 총독으로 재임한 13년 동안 큰 사건은 드물었으나, 1778년 12월 19일에는 루이 16세의 딸 출생을 축하하는 대포 발사에 실패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전해진다. 1785년 8월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주요 인물인 추기경 루이 드 로앙과 잔 드 라 모트 발루아를 수감하여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특히 잔 드 라 모트 발루아는 다루기 어려운 수감자였음에도, 드 로네는 두 사람 모두에게 예의 바르고 사려 깊게 대했다고 평가받는다.[3][18]

1777년까지 그는 노르망디 지방 브르토니에르의 봉건 영주였으며, 바스티유 감옥 인근의 생 앙투안 거리에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하고 임대하기도 했다.

3. 바스티유 습격과 죽음 (1789년 7월 14일)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총독 드 뢰네는 혁명 군중의 항복 요구를 거부했다.[4][19] 협상이 지연되는 사이 군중 일부가 요새 안뜰로 진입하자 수비대는 경고 후 발포했고,[5][20] 군중은 이를 배신으로 간주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6][7][8][9][21][22][23][24] 약 4시간의 전투 끝에 군중 측은 1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방어 측 피해는 사망 1명, 부상 3명에 그쳤다.[10][25] 그러나 요새 내 물과 식량 부족으로 드 뢰네는 결국 항복을 결정했다.[11][26]

항복 후 드 뢰네는 체포되어 오텔 드 빌로 이송될 예정이었으나, 도중에 격분한 군중에게 붙잡혀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군인 피에르-오귀스탱 율랭의 호송 시도는 실패했으며, 드 뢰네는 칼, 검, 총검 등으로 반복해서 찔리고 총에 맞았다. 시청 근처에서 "이제 그만! 죽여줘!"라고 외친 후 데노라는 실업 중인 요리사에게 사타구니를 걷어차여 숨졌다고 전해진다. 그의 머리는 정육점 주인 마티외 주브 조르당이 잘라 창 끝에 꽂아 거리를 행진했으며, 다음 날 센 강에 버려졌다.[13][28]

드 뢰네 외에도 바스티유 수비대 장교 3명과 퇴역 군인 2명이 군중에게 린치를 당했고, 스위스 용병 2명은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비대원들은 공격에 가담했던 프랑스 근위병의 보호 아래 군중을 지나 호송되었고 결국 풀려났다.[8]

3. 1. 바스티유 습격 배경

(프랑스 혁명 박물관)]]

바스티유 감옥의 상설 수비대는 드 뢰네의 지휘 아래 있었으며, 정규군 복무에는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약 80명의 상이군인(앵발리드의 연금 수급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 이틀 전인 7월 12일, 이 수비대는 살리-사마드 연대 소속 스위스 척탄병 30여 명으로 증강되었다.

습격 당일 일찍 앵발리드 총독 Charles François de Virot de Sombreuil|샤를 프랑수아 드 비로 드 솜브뢰유fra는 혁명 군중의 요구를 수락했지만, 드 뢰네는 달랐다. 그는 요새 항복과 지하에 보관된 무기 및 화약 인도를 거부했다.[4][19] 드 뢰네는 공격받지 않는 한 발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오텔 드 빌에서 온 두 명의 대표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참을성을 잃은 군중 일부는 도개교를 고정하는 사슬을 끊고 요새의 외부 안뜰로 진입하기 시작했다.[5][20]

1789년 판화로, 참수된 파리 시장 플레셀과 드 뢰네의 머리가 창에 꽂혀 있다. 캡션은 "이것이 우리가 배신자에게 복수하는 방법이다"라고 적혀 있다.


수비대는 경고를 외친 후 발포했다.[4][5][6][7][8][9][21][22][23][24] 요새를 포위한 군중은 이를 드 뢰네의 배신 행위로 간주했다.[6][7][8][9] 이어진 전투는 약 4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엄폐물 없이 노출된 군중 측에서는 약 1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총안이나 성벽 뒤에서 방어하던 수비대는 사망자 1명과 부상자 3명만을 냈다.[10][25]

바스티유 내부에는 수원지가 없고 식량 공급도 제한적이었기에, 드 뢰네는 요새 내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하기로 결정했다.[11][26] 그는 도개교 틈으로 전달한 메모를 통해, 만약 조건이 거부된다면 요새 전체와 주변 지역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12][27] 드 뢰네의 조건은 거부되었지만, 그는 결국 항복했다. 이는 수비대원들이 그가 화약이 보관된 지하실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오후 5시경, 요새에서의 발포가 멈추고 도개교가 갑자기 내려졌다.[11][26]

드 뢰네는 체포되어 그의 칼과 지휘봉을 빼앗겼다. 반란 지도자 중 한 명이자 훗날 장군이 되는 피에르-오귀스탱 율랭이 그를 오텔 드 빌로 이송하려 했다. 그러나 이송 도중 분노한 군중이 드 뢰네를 격렬하게 공격하고 구타했으며, 결국 칼, 검, 총검 등으로 반복해서 찌르고 총을 쏘아 살해했다. 오텔 드 빌 근처에서 학대받고 자포자기한 드 뢰네가 "이제 그만! 죽여줘!"라고 외치고 실업 중인 요리사 데노에게 사타구니를 걷어차인 후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드 뢰네가 살해된 후, 정육점 주인 마티외 주브 조르당이 그의 머리를 잘랐다. 잘린 머리는 창 끝에 꽂혀 몇 시간 동안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다음 날 센 강에 던져졌다.[13][28]

바스티유 수비대 장교 3명과 퇴역 군인 2명도 린치를 당했고, 스위스 용병 2명은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비대원들은 공격에 가담했던 프랑스 근위병의 보호 아래 군중을 지나 호송되었고 결국 풀려났다.[8]

3. 2. 방어 준비

바스티유의 상설 수비대는 드 로네의 지휘 아래 있었으며, 정규군 복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진 약 82명의 상이군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스티유 습격 이틀 전인 7월 12일, 이들은 살리-사마드 연대 소속 스위스 척탄병 32명으로 증강되었다.

솜브뢰유 앵발리드 총독이 그날 일찍 민중의 요구를 수락한 것과는 달리, 드 로네는 요새를 넘겨주고 지하에 보관된 무기와 화약을 인도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4][19] 그는 공격받지 않는 한 발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오텔 드 빌에서 온 두 명의 대표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다.[5]

3. 3. 협상과 충돌

(프랑스 혁명 박물관)]]

바스티유의 상설 수비대는 드 뢰네 휘하의, 정규군 복무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약 82명의 상이군인(베테랑 군인 연금 수혜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스티유 습격 이틀 전인 7월 12일, 이들은 살리-사마드 연대 소속 스위스 척탄병 32명으로 증원되었다.

앵발리드 총독 샤를 프랑수아 드 비로 드 솜브뢰유가 그날 일찍 혁명가들의 요구를 수락한 것과 달리, 드 뢰네는 감옥 요새를 항복하고 지하에 보관된 무기와 화약을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다.[4][19] 그는 공격받지 않는 한 발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파리 시청에서 온 두 명의 대표와 협상하려 했지만 논의는 길어졌다. 참을성이 없어진 군중의 일부는 도개교를 고정하는 사슬을 끊고 요새의 외부 안뜰로 진입하기 시작했다.[5]

경고를 외친 후, 수비대는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4][5][6][7][8][9][20][21][22][23][24] 요새를 포위한 군중은 이를 드 뢰네의 배신으로 해석했다.[6][7][8][9] 이어진 전투는 약 4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노출된 군중 측에서는 약 1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총안이나 성벽을 활용하여 방어한 수비대 측은 사망자 1명과 부상자 3명만 발생했다.[10][25]

바스티유 내에는 물 공급원이 없고 식량 공급도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드 뢰네는 요새 내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하기로 결정했다.[11][26] 그는 도개교의 구멍을 통해 전달된 메모에서, 만약 이 조건이 거부될 경우 요새 전체와 주변 지역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12][27] 드 뢰네의 조건은 거부되었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복했다. 이는 수비대원들이 그가 화약이 보관된 지하실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오후 5시경, 요새에서의 발포가 중단되었고 도개교가 갑자기 내려졌다.[11][26]

드 뢰네는 체포되었고, 그의 칼과 지휘봉을 빼앗겼다. 그는 반란 지도자 중 한 명이자 훗날 장군이 되는 군인 피에르-오귀스탱 율랭에 의해 오텔 드 빌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는 길에 분노한 군중이 드 뢰네를 공격하고 구타했으며, 결국 칼, 검, 총검으로 반복해서 찌르고 한 차례 총을 쏘아 살해했다. 실제 살해는 오텔 드 빌 근처에서 일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절망하고 학대받던 드 뢰네가 "그만! 죽게 해줘!"라고 외치고 실업 중인 요리사 데스노에게 사타구니를 걷어차인 후였다고 한다.

그가 살해된 후, 드 뢰네의 머리는 정육점 주인 마티외 주브 조르당이 잘랐다. 그의 머리는 창 끝에 꽂혀 몇 시간 동안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다음 날 센 강에 던져졌다.[13][28]

바스티유의 상설 수비대 장교 3명과 퇴역 군인 2명도 군중에게 린치를 당했고, 스위스 용병 2명은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방어자들은 공격에 가담했던 프랑스 근위병에 의해 폭도들로부터 보호받으며 호송되었고, 결국 풀려났다.[8]

3. 4. 항복과 죽음

(프랑스 혁명 박물관).]]

솜브뢰유 총독이 혁명가들의 요구를 수락한 것과 달리, 드 뢰네는 바스티유 감옥 요새와 그 안에 보관된 무기 및 화약의 인도를 거부했다.[4][19] 그는 공격받지 않는 한 발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오텔 드 빌에서 온 두 명의 대표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논의는 지연되었다.[5] 참을성을 잃은 군중 일부는 도개교의 사슬을 끊고 요새의 외부 안뜰로 진입하기 시작했다.[5]

수비대는 경고 후 발포했으며,[4][5][6][7][8][9][20][21][22][23][24] 포위자들은 이를 드 뢰네의 배신으로 간주했다.[6][7][8][9] 이어진 전투는 약 4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군중 측에서는 약 1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방어 측은 총안과 성벽 뒤에서 엄호 사격을 하여 사망자 1명과 부상자 3명만을 기록했다.[10][25]

바스티유 내부에 물 공급원이 없고 식량 공급이 제한되자, 드 뢰네는 요새 내 인원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항복하기로 결정했다.[11][26] 그는 도개교의 구멍을 통해 전달한 메모에서, 조건이 거부될 경우 요새 전체와 주변 지역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12][27] 드 뢰네의 조건은 거부되었지만, 그는 결국 항복했다. 이는 수비대원들이 그가 화약 저장고로 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오후 5시경, 요새에서의 발포가 중단되고 도개교가 내려졌다.[11][26]

드 뢰네는 체포되어 칼과 지휘봉을 빼앗겼다. 그는 반란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미래의 장군이 될 군인 피에르-오귀스탱 율랭에 의해 오텔 드 빌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동 중 분노한 군중이 그를 공격하고 구타했으며, 결국 칼, 검, 총검으로 여러 차례 찔리고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텔 드 빌 근처에서 학대받던 드 뢰네가 "그만! 죽게 해줘!"라고 외치며 실업 상태의 요리사 데스노에게 사타구니를 걷어차인 후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가 살해된 후, 정육점 주인 마티외 주브 조르당이 그의 머리를 잘랐다. 잘린 머리는 끝에 꽂혀 몇 시간 동안 거리를 행진하다가 다음 날 센 강에 던져졌다.[13][28]

바스티유 수비대의 장교 3명과 퇴역 군인 2명도 린치를 당했으며, 스위스 용병 2명은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비대원들은 공격에 가담했던 프랑스 근위병에 의해 군중으로부터 보호받아 호송되었고, 결국 풀려났다.[8]

4. 평가와 논란

드 뢰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전임자들보다 수감자를 인도적으로 대했다는 긍정적인 시각[14][29]도 있지만, 바스티유 감옥 습격 당시 보여준 군사적 능력 부족과 우유부단함에 대한 비판[15][16][30][31] 또한 존재한다. 당시 군사적 책임자들도 그의 능력에 대해 우려를 표한 기록이 있다.[17][32]

개인적으로 드 뢰네는 두 명의 아내와 세 명의 딸을 두었으며, 그의 형제 자손 중 일부는 러시아에 정착하기도 했다. 그의 최후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힐러리 맨텔의 소설 "A Place of Greater Safety" 등 문학 작품에서도 묘사되었다.

4. 1. 성격과 통치 방식

베르나르르네 드 로네


역사 작가 사이먼 샤마는 드 뢰네를 "비교적 성실하지만 다소 침울한"[14] 혹은 "까다로운 면이 있었지만, 꽤 양심적이었다"[29]고 평가하며 전임자들보다 수감자들을 더 인도적으로 대했다고 보았다. 반면, 바스티유 감옥 습격 직전에 다른 감옥으로 이감되었던 사드 후작은 드 뢰네를 "할아버지가 하인이었던 소위 후작"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14][29]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 드 뢰네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스위스 용병 부대를 지휘했던 루이 드 플뤼 중위는 드 뢰네가 군사적 재능이 부족하고 경험이 없으며 우유부단했다고 비난했다.[15][30] 드 플뤼는 이러한 문제점들이 바스티유 습격 이전에 이미 드러났다고 지적했다.[16][31] 드 플뤼의 보고서는 연대 기록부에 보존되었다. 당시 군사 장관이었던 빅토르 프랑수아 드 브로이 공작 역시 1789년 7월 5일 자 기록에서 "바스티유에 관한 우려의 두 가지 요인이 있는데, 지휘관 (드 뢰네)과 그 수비대의 실태이다"라고 적으며 드 뢰네의 능력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냈다.[17][32]

다만, 드 플뤼 중위의 보고서는 드 뢰네에게 다소 공정하지 못했을 수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파리와 그 주변에 집결한 왕실 군대를 지휘하던 상급 장교들이 효과적인 지원을 제공하지 못하면서 드 뢰네가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15]

4. 2. 군사적 능력 부족 논란



역사 작가 사이먼 샤마는 드 로네를 전임자들보다 수감자들을 더 인도적으로 대했던 인물로, "비교적 성실하지만 다소 침울한"[14] 또는 "까다로운 면이 있었지만, 꽤 양심적이었다"[29]고 평가했다. 반면, 바스티유 습격 직전에 다른 감옥으로 이감된 사드 후작은 드 로네를 "할아버지가 하인이었던 소위 후작"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14][29]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따른다. 드 로네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스위스 용병 부대를 지휘했던 루이 드 플뤼 중위는 훗날 자신의 상관이었던 드 로네가 군사적으로 무능하고 경험이 부족했으며, 특히 바스티유 습격 이전에 이미 우유부단함을 보였다고 비난했다.[15][16][30][31]

하지만 플뤼 중위의 이러한 평가는 당시 파리 주변에 집결했던 왕실 군대를 지휘하던 고위 장교들이 드 로네에게 효과적인 지원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드 로네가 처했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면 다소 공정하지 못하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89년 소요 사태 진압을 총괄했던 국방부 장관 빅토르 프랑수아 드 브로이 공작은 7월 5일자 기록에서 "바스티유와 관련된 두 가지 불안의 근원은 사령관(드 로네)의 인물과 그곳의 수비대 성격"이라고 지적하며 드 로네의 능력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17][32]

5. 가족 관계

뢰네는 두 명의 아내를 통해 세 명의 딸을 두었다. 그의 형제의 후손 중 일부는 러시아에 정착했다(자세한 내용은 보리스 들로네 및 바딤 들로네 참조).

6. 대중문화 속 묘사

드 뢰네가 살해당하는 장면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 (제2권 제21장)와 힐러리 맨텔의 소설 ''안전한 곳''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었다.[29]

참조

[1] 서적 Mémoires pour servir à l'histoire secrète du gouvernement Français La Bastille
[2] 문서
[3] 서적 How to Ruin a Queen
[4] 서적 A social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5] 웹사이트 Paris and the Politics of Revolution. At Liberty, Equality, Fraternity: Exploring the French Revolution, by Lynn Hunt and Jack Censer http://chnm.gmu.edu/[...] 2008-08-22
[6] 서적 Revolutionary Europe, 1783–1815
[7] 서적 The French Revolution and Napoleon
[8] 간행물 GEO EPOCHE Nr. 22 – 05/06 – Französische Revolution
[9] 서적 A Critical Dictionary of the French Revolution
[10] 서적 Citizens
[11] 서적 Citizens
[12] 서적 The Bastille: A History of a Symbol of Despotism and Freedom
[13] 서적 Fatal Purity: Robespierre and the French Revolution
[14] 서적 Citizens
[15] 문서
[16] 서적 La Bastille: Histoire Vraie D'une Prison Legendaire
[17] 서적 The Fall of the French Monarchy
[18] 서적 How to Ruin a Queen
[19] 서적 A social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20] 웹사이트 Paris and the Politics of Revolution. At Liberty, Equality, Fraternity: Exploring the French Revolution, by Lynn Hunt and Jack Censer http://chnm.gmu.edu/[...]
[21] 서적 Revolutionary Europe, 1783-1815
[22] 서적 The French Revolution and Napoleon
[23] 간행물 GEO EPOCHE Nr. 22 - 05/06 - Französische Revolution
[24] 서적 A Critical Dictionary of the French Revolution
[25] 서적 Citizens
[26] 서적 Citizens
[27] 서적 The Bastille: A History of a Symbol of Despotism and Freedom
[28] 서적 Fatal Purity: Robespierre and the French Revolution
[29] 서적 Citizens
[30] 문서
[31] 서적 La Bastille: Histoire Vraie D'une Prison Legendaire
[32] 서적 The Fall of the French Monarc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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