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진갑
1. 개요
변진갑은 전라남도 장성 출신의 정치인으로,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향교 직원으로 근무했다. 해방 후 독립촉성단을 결성하고 초대 장성읍장을 역임했으며,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회 농림분과위원장으로 농촌 문제와 공무원 기율 개혁에 힘썼으며, 잠사법 제정 과정에서 거액의 로비를 거절한 일화가 있다. 정계 은퇴 후 고향에서 노인들에게 지팡이를 만들어 주는 일을 하다가 1977년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변승기이며, 사위는 이준범, 외손자는 이재갑이다.
| 로마자 표기 | Byeon Jin-gap |
|---|---|
| 출생 | 1885년 |
| 사망 | 1951년 |
| 직업 | 대한민국의 정치인 |
| 주요 이력 | 초대, 제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장성공립보통학교 교사 장성약업조합 이사 장성농공은행 은행장 |
|---|
| 배우자 | 숙부인 변이중의 딸 |
|---|---|
| 아들 | 변동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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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 변씨 -
변이중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변이중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7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 임진왜란 때 소모사로 의병 모집과 군량 조달에 힘썼으며 화차 제작을 주도하여 권율 장군을 지원했고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 장성 봉암서원에 제향되었다. -
황주 변씨 -
변희봉
변희봉은 1965년 MBC 탤런트로 데뷔하여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약하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준 대한민국의 배우로, 특히 영화 《괴물》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으며 2023년 췌장암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김웅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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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정진석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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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법학전문학교 동문 -
이종성 (1924년)
이종성은 충남방적을 설립하여 국내 최대 섬유류 제조업체로 성장시키고 1억불 수출탑을 수상하는 등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기여했으며, 국회의원과 청운여고, 혜전대학, 청운대학교 등의 설립을 통해 교육 사업에도 헌신한 기업인이자 교육자, 정치인이다. -
경성법학전문학교 동문 -
태완선
태완선은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의 관료, 정치인, 기업인으로, 국회의원,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 경제기획원 장관, 건설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경제 개발에 참여했고, 대한석탄공사 사장, 한국종합제철 사장, 대한중석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2. 생애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장성읍장을 지냈다. 헌정동지회 대표간사, 자유당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제2대, 제3대,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시절, 국회 농림분과위원장으로서 농촌 문제 및 공무원 기율 개혁을 위한 법률 제정에 힘썼으며,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법안도 상정했다. 특히 양잠 농가를 지키기 위해 "잠사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거액의 로비를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정계 은퇴 후에는 고향에서 노인들에게 대나무 지팡이를 만들어 주며 여생을 보내다가 1977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균세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자 전 대한매일신보 주간, 전 장성군 군수 서리인 변승기이다. 아들은 3명, 손자는 17명이 있으며, 이 중 8명은 교육직 또는 행정직 공무원이 되었다. 사위는 이준범 전 고려대학교 총장이며, 외손자는 이재갑 (공무원)한국어 전 고용노동부 장관이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안평리 황주 변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경성법학전문학교 (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후, 경성에 머무르지 않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 향교 직원으로 광복까지 근무하였다. 해방 후 독립촉성단을 결성하고 초대 장성읍장을 역임했다.
2.2. 해방 전후 활동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전라남도장성군으로 돌아가 향교 직원으로 광복 때까지 근무했다. 해방 후 독립촉성단을 결성하고 초대 장성읍장을 역임했으며, 1950년 제2대 총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다. 3선 의원 생활 중 조봉암, 신익희 등 개혁적인 인물들과 교류했으며, 국회 농림분과위원장으로서 쌀 생산, 양잠 등 농촌 문제 및 공무원 기율 개혁을 위한 법률 제정에 힘썼고, 중혼을 금지하는 법안과 간통죄로 양쪽을 처벌하는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법안도 상정했다. 특히 잠사는 한국의 중요한 수출 품목이었던 1950년대, 양잠 농가를 지키기 위해 "잠사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잠사 수출업자가 법안 처리를 1년 늦추는 조건으로 3000이라는 거액의 로비를 변진갑에게 제시했지만, 변진갑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외 대한잠사회와 헌정동지회를 결성하고 헌정동지회 대표 간사, 자유당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2.3. 정치 활동
경성법학전문학교 (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후, 경성에 머무르지 않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 향교 직원으로 광복까지 근무했다. 해방 후 독립촉성단을 결성하고 초대 장성읍장을 역임했으며, 1950년 제2대 총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다. 3선 의원 생활 중 조봉암, 신익희 등 개혁적인 인물들과 교류했으며, 국회 농림분과위원장으로서 쌀 생산, 양잠 등 농촌 문제 및 공무원 기율 개혁을 위한 법률 제정에 힘썼고, 중혼을 금지하는 법안과 간통죄로 양쪽을 처벌하는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법안도 상정했다. 특히 잠사는 한국의 중요한 수출 품목이었던 1950년대, 양잠 농가를 지키기 위해 "잠사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잠사 수출업자가 법안 처리를 1년 늦추는 조건으로 3000이라는 거액의 로비를 변진갑에게 제시했지만, 변진갑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외 대한잠사회와 헌정동지회를 결성하고 헌정동지회 대표 간사, 자유당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2.4. 은퇴 이후
정계 은퇴 후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 노인들에게 대나무 지팡이를 만들어 주는 일을 했다. 1977년 장성읍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