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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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립운동가는 특정 국가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독립운동은 내전이나 독립 전쟁의 형태로 나타나며, 식민지나 종속국에서는 무장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는 식민지 혁명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독립운동가들은 각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성격과 사상을 가지고 활동했으며, 북미, 중남미, 인도, 몽골,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서아시아, 동유럽, 한국 등 전 세계적으로 존재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제국에 맞서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었으며, 다양한 이념과 정치적 지향을 가진 개인과 단체들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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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유형 | 직업 |
분야 | 정치 사회 문화 군사 |
활동 | |
목표 | 국가 독립 자유 평등 |
방법 | 저항 시위 투쟁 외교 교육 무장 투쟁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마하트마 간디 넬슨 만델라 김구 안중근 유관순 |
국가별 독립운동가 | |
한국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
인도 | 인도의 독립운동가 |
아일랜드 |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 |
베트남 |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
알제리 | 알제리의 독립운동가 |
미국 | 미국의 독립운동가 |
필리핀 |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
기념 | |
기념일 | 독립기념일 해방기념일 |
기념 장소 | 기념관 기념비 묘역 |
지도 | |
기본 정보 | |
유형 | 직업 |
분야 | 정치 사회 문화 군사 |
활동 | |
목표 | 국가 독립 자유 평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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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미국의 독립운동가 |
필리핀 |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
기념 | |
기념일 | 독립기념일 해방기념일 |
기념 장소 | 기념관 기념비 묘역 |
2. 독립운동의 배경
독립운동은 특정 지역을 지배하는 기존 국가(또는 중앙정부)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흔히 내전이나 독립 전쟁의 형태로 나타난다. 많은 경우, 일정한 영역에 다양한 민족·종교에 따른 여러 집단이 섞여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해당 지역 주민 중에서도 독립(및 자치 강화)에 찬성하는 자(지역에서 다수파가 되는 자)와 반대하는 자(소수파가 되는 자) 간의 대립이 발생한다. 중앙과 언어와 습관이 다른 지방이 독립을 추구하는 것을 분리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식민지·종속국에서의 독립운동은 주로 무장투쟁을 통해 본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식민지혁명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각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성격과 사상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등장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건국의 아버지가 되기도 했다.
3. 세계의 독립운동가
3. 1. 북미의 독립운동가
각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성격과 사상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등장했으며, 그중 일부는 건국의 아버지가 되었다. 북미에서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 존 애덤스(John Adams), 존 핸콕(John Hancock),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타데우시 코슈추슈코/Tadeusz Kościuszkopl, 장 밥티스트 드 라파예트(Marie-Joseph Paul Yves Roch Gilbert du Motier, marquis de Lafayette), 한스 악셀 폰 페르센(Hans Axel von Fersen) 등이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3. 2. 중남미의 독립운동가
리베르타도레스로 불리는 중남미의 독립운동가들은 각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성격과 사상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건국의 아버지가 되었다.3. 3.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분할에 반대한 독립운동가였다. 찬드라 보스도 인도의 독립운동가이다.
3. 4. 몽골의 독립운동가
3. 4. 1. 외몽골의 독립운동가
3. 4. 2. 내몽골의 독립운동가
덕왕(德王)
바보자브(Babu Jab)
3. 5. 동남아시아의 독립운동가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vi, 베트남)는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다. 호치민(Hồ Chí Minhvi, 베트남) 역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다. 아웅산(Aung San)은 미얀마의 독립운동가이며, 수카르노(Sukarno)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가이다.
3. 6. 아프리카·서아시아의 독립운동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터키)와 아흐메드 벤 벨라(알제리)는 아프리카 및 서아시아 지역의 독립운동가이다.
3. 7. 동유럽의 독립운동가
폴란드의 유제프 필수츠키는 동유럽 지역의 독립운동가이다.
4. 한국의 독립운동
한국의 독립운동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제국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었다.[1]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전후로 배일운동과 의병항쟁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형성되었으며, 애국계몽운동 등을 통해 민족의 근대적 역량을 길러 국권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1] 1919년 3.1 운동은 독립운동의 큰 전환점이 되었으며, 1945년 광복 때까지 국내외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1] 독립운동가들은 양반 출신뿐만 아니라 상민 이하의 신분 출신자도 많았다.[2]
4. 1. 개항 이후의 독립운동
4. 2.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4. 3. 이념적 분단과 독립운동의 다양성
한국의 독립운동은 단일한 이념이나 노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념과 정치적 지향을 가진 개인과 단체들이 참여한 복합적인 과정이었다.[1] 1876년 강화도조약 전후로 일제침략이 시작된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 전후까지 일제의 단계적 침략에 대한 각종 배일운동과 의병항쟁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형성되었다.[1]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1919년 3.1 운동 사이에 있었던 의병전쟁과 민족의 근대적 역량을 길러 국권을 찾으려는 애국계몽운동 등의 방향과 이념이 정립되면서 성장해 갔다.[1]
대일항쟁(對日抗爭期)에 참여했던 모든 운동가들이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1] 일제 합병 직후 중심점이 사라졌던 조선인들은 각 개인마다 서로 다른 정치적, 경제적 목적 아래 일제항쟁에 뛰어들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국민당,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대한인동지회, 여운형의 신한청년단,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 다양한 독립운동 단체들이 존재했다. 이외에도 중국 팔로군에 연계되어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대종교 계통에서 시작된 북로군정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이던 한국광복군, 암살 목적으로 창단된 한인애국단 등등 조선 독립이라는 공통된 목표 아래 서로 다른 정치이념과 권력집단으로 구성된 여러 독립운동군들이 존재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이념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동북항일연군 출신의 김일성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상해 임시 정부 출신의 이승만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민국으로 분단되었다.[1]
4. 4. 광복 이후의 상황
대일항쟁(對日抗爭期)에 참여했던 모든 운동가들이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일제 합병 직후 중심점이 사라졌던 조선인들은 각 개인마다 서로 다른 정치적, 경제적 목적 아래 일제항쟁에 뛰어들었다. 한국독립당에서 갈라져 김구를 중심으로 모인 한국국민당, 미국 대한인국민회에서 갈라져 이승만을 중심으로 모인 대한인동지회, 중국 팔로군에 연계되어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대종교 계통에서 시작된 북로군정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이던 한국광복군, 중도 사회주의자였던 여운형의 신한청년단,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암살 목적으로 창단된 한인애국단 등등 조선 독립이라는 공통된 목표 아래 서로 다른 정치이념과 권력집단으로 구성된 여러 독립운동군들이 존재하였다.결론적으로 조선인 출신 독립운동가 세력들은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서로의 이념적 차이를 넘지 못하고 파벌로 나뉘어 싸우다 결국 동북항일연군 출신의 김일성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상해 임시 정부 출신의 이승만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민국으로 갈라지게 된다.
4. 4. 1. 친일 세력의 복귀와 반민특위
1945년 광복 직후 군정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 정치인들은 미군의 친일 정책 추진과 신생 국가의 정치적 안정을 이유로 일제 시절 친일 지주들과 동맹을 맺고, 일제 순사 출신들을 경찰과 검찰에 대거 복직시켰다.[3][4][5] 미군정은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를 해임했지만, 친일파 조선인 출신 고관들은 행정고문으로 등용하여 식민지 통치기구를 이용했다. 이러한 미군정의 현상 유지 정책은 독립국가 수립을 열망하던 한국인들과 자주 충돌하였다.[4]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한국인들의 자생적 기구들을 부인하며 일제 식민지기 한인 경찰관들을 중심으로 경찰력을 복원했다. 경위 이상 고위직의 경우 일제하 경찰 경력자 비율은 80%를 상회했다.[4]친미반공국가 수립이라는 미국의 정책으로 인해, 친일 경찰, 군, 행정 관리들이 중용되었다. 미국의 국익과 이승만의 반공주의, 장기집권 욕망이 결합하여 친일파 청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6]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의 아들 김정육은 이승만이 친일파를 등용한 이유가 국방, 반공, 치안 기술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거짓이라고 비판했다.[20]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공포된 후, 노덕술, 장경근 등 친일 경찰 세력들은 반민특위 위원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3][21] 친일 세력은 탑골공원과 반민특위 본부에서 특위 해체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고, 유령 단체들은 국회 앞에서 특위 요원들을 헐뜯고 체포된 반민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21] 1948년 8월 26일에는 '행동위원' 명의로 반민법 철회를 요구하는 삐라가 살포되기도 했다.[3]
이승만은 김상덕에게 노덕술 등 악질 친일 경찰의 석방을 요구하며 감투를 제안했지만, 김상덕은 이를 거절했다.[20][3][21] 결국 이승만은 공권력을 동원하여 1949년 6월 6일 특위 본부를 습격했고, 특위가 구속한 친일 경찰과 연행된 특경대원들을 교환 석방했다.[21] 이후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하고, 반민법 공소시효 단축 개정안이 제안되면서 반민특위는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21]
1950년 4월 18일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친일 경찰 노덕술 등은 테러 전문가 백민태를 고용하여 암살을 모의했고, 박흥식이 자금을 공급했다.[3]
4. 4. 2. 통일 정부 수립 노력과 좌절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 결정은 한반도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분열을 초래했고,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세력은 반탁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8] 조선일보와 우익 한민당의 입장을 대변했던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고 왜곡 보도하여 반탁 운동을 더욱 격화시키는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6][8]
1948년 4월 19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은 5.10 남한 단독선거를 저지하고 통일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전조선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는 김구, 김규식 및 김일성, 김두봉 등 남북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였으나, 남북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1948년 5월 10일 총선은 좌우대결 속에서 임시정부 주요 요인들이 불참한 가운데 치러졌다. 그 결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인물보다 일제하 행정관료, 판사, 금융조합 종사자가 많았고,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한 사람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미군정 관리나 민주의원, 입법의원 및 청년단체에서 활동한 우익 성향의 인물들이었다.[9][10][11]
선거인 등록 과정에서도 경찰, 청년단체, 행정기관 등에 의한 압력 및 강압적 수단이 동원되었다. 한국여론협회가 4월 12일 서울 충무로와 종로에서 행인 1,262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자발적 등록은 9%, 등록을 강요당한 자가 91%라고 발표하였는데, 공보부는 조사의 공정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6][12]


1948년 4월 5일부터 10일까지 전국 각도와 주요 도시를 시찰한 유엔위원단은 투표자 등록 부정행위로 미곡배급통장을 발급하는 지방행정 사무실에서 등록을 실시하고, 미곡배급통장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하여 강제등록을 시키며, 경찰 및 청년단체가 등록을 강제한다는 등의 불평을 접수했지만 구체적 증거는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밝혔다.[14]
유엔임시위원단 위원장 야심 머기(시리아 대표)는 "(남한은) 경찰국가일 뿐만 아니라 선거 지지파들이 경찰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또 지방당국을 조정하여 완벽하게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남한에서 자유선거를 치르기 위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15]
당시 미군정은 선거기간에 경찰력을 보충하여 좌익의 선거 방해를 막고 향토를 방위한다는 목적 아래 향보단을 조직하였다. 향보단은 딘(William F. Dean) 군정장관의 명령으로 경무부장의 지시에 의해 각 경찰지서 단위로 설치되었는데, 만 18세 이상 55세 이하 남자로 구성되었으며 우익 청년단원들이 대부분 이에 소속되었다.[6][16] 위원장 야심 머기 또한 "투표소 둘레나 안에서 향보단원을 발견했다. 어떤 투표소엔 경찰이 투표소 안에 있었다. 어떤 투표소는 (투표의) 비밀이 결여됐다"고 전했다.[17]
군정측의 선거 결과보고서 역시 “등록 및 선거하도록 하는 협박 및 폭력이 전혀 없었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라고 하여 압력과 강제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6][18]
1948년 6월까지는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도 대한민국의 태극기와 애국가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협상이 실패로 끝나자 북측은 남한의 5.10 총선거로 구성된 대한민국 제헌 국회를 비법적 조직체로 규정하며, 이후 북한 정권 수립을 앞두었던 7월 8일 '북조선 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애국가와 태극기를 폐지하기로 결의한다.[19]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혼란 상황에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남한측 독립운동가 출신들과 반민특위 의원들이 북으로 납치되거나 남한 경찰들에 의해 살해당한다(보도연맹 학살 사건 참조). 이러한 정황을 토대로 북한 측이 남북협상에 임했던 목적이 진정한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총선을 방해하기 위한 대남 공작 차원일 뿐이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한편 정통성 및 정당성이 부족했던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남쪽에 있던 통합 임시정부 출신들을 대거 북으로 납치/포섭하여 공산국가 수립의 정당성을 노렸다는 주장도 있다. 6.25 전쟁 중 남한의 극우 정치단체들이 전쟁 난리통을 이용하여 이승만 정권에 비협조적인 정치인들을 일부러 북한측에 넘겼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20]
4. 4. 3. 민중의 반발과 정치적 암투
해방 후 즉시 독립을 원하던 민중의 바람과 달리,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제시된 신탁통치안은 좌우익 간 권력 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는 곧 신탁 통치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좌우익 대립은 심화되었고, 결국 분단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2]1948년 5월 10일, 이승만 정권은 통일 국가 수립 약속을 어기고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반도 분단을 기정사실화했다.[23]
1949년 10월 반민특위 해체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와 정치 동맹을 맺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김구 암살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국회 프락치사건. 세 가지는 친일세력의 친위 쿠데타였다"고 주장한다.[3]
미군정과 남한 정부의 친일 행적과 분단 정책은 민중의 분노를 일으켰고, 대구 10.1 사건,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사건 등 무장 항쟁으로 이어졌다.[24]
|섬네일|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 안치된 김구]]

1946년 좌우합작운동 실패와 정치적 암투 속에서, 여운형, 김구, 조봉암 등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의문의 암살을 당하면서 정치적 혼란은 가중되었다. 특히 1949년 6월 26일 김구 암살은 반민특위 본부 습격 20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여운형의 측근 백남운과 고경흠[25]은 월북했고, 여운형 추종자들은 남로당에 흡수되어 미군정과 이승만에 적대적인 활동을 했다.[24]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 박상희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 출신으로 대구 10.1 사건때 사망했다.[26]
반민특위 위원이었던 곽상훈은 6.25 전쟁 당시 이승만 축출 및 장면 대통령 추대 계획을 세웠으나, 부산 정치 파동으로 무산되었다.[27]
1948년 1월 9일 UN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28]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서울에 온 후, 2.7 사건, 제주 4.3 사건, 남북협상 연석회의, 혁명의용군 사건, 여수·순천 사건 등 남한 전역에서 반정부 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29]
여수시는 1948년 사건들이 남북협상 실패와 함께, 이승만과 김성수 타도라는 공동 목표를 가졌고, 흥사단 출신 최능진, 김구, 김규식 등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공산주의 반란보다는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투쟁, 즉 신탁통치 반대 운동의 연장선으로 해석한다.[30]
4. 4. 4. 이념 갈등과 '빨갱이' 프레임
반민특위의 해체 이후 한반도에서는 좌익과 우익의 충돌이 더욱 격화되었다. 매국과 애국을 가르는 기준이 '친일파냐 아니냐'에서 '좌익이냐 아니냐'로 바뀌었다.[31]현재 대한민국에서 쓰는 ‘빨갱이’라는 용어는 항일 유격대원을 지칭하는 파르티잔(빨치산, partisan영어)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항일 유격대원 가운데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많았고, 거기서 이어져 6.25 전쟁 때 공산당 유격대원도 빨치산으로 부르게 됐다.[32][33]
해방정국에서, ‘빨갱이’는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에 씌우는 주술로 쓰였다. 친일파 청산을 거론해도, 외세 배격을 주장해도 ‘빨갱이’라는 굴레가 씌워져 탄압받고 죽임을 당했다. 김구도 이러한 프레임에서 자유로울수 없었다.[32]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남쪽에 있는 좌익세력들이 인민군에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만으로 보도연맹원 사살 명령을 내렸다. 보도연맹은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을 ‘보호’하고 ‘지도’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만든 조직이었으나, 좌익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가입하게 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군인과 경찰은 보도연맹원을 끌어다 총살하거나 수장했다.[34]
2009년 진실화해위는 1947년 8월부터 1950년 9월까지 국민보도연맹원과 부역협의자 등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국군, 경찰, 헌병대, CIC, 해군 등에 의해 민간인들이 희생 당했다고 밝혔다. 당시 희생자들은 빨치산에게 협조했다거나 보리공출 항의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재판 없이 총살당했다.[35]
이행규 거제시의원은 "당시 정보국장(장도영)과 정보과 중위(김종필)의 진술에 따르면, 학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인물은 육군 본부 특무대의 김창룡이라고 한다"며 "김창룡은 이승만의 오른팔로 정보국의 의견을 무시할 정도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CIC는 독자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미군의 군에 예속되어 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립적이었다"며 "공식명령 계통을 뛰어 넘어 이승만, 김창룡 간의 직접적인 명령으로써 학살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고 전해하고 있다"고 밝였다.[35]
반민특위 위원 김철호의 아들 김용민씨는 6.25 전쟁때 지방의 친일출신들이 아버지를 빨갱이로 몰아 죽였다고 주장한다.[20][31] 우익에 가까웠던 김철호를 빨갱이로 몰아 처형한 것은 친일파가 애국자로 거듭나는 전략이었다.[36]
4. 5. 북한의 독립운동가
각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성격과 사상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등장했으며, 그중 일부는 건국의 아버지가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립운동가 분류를 참고할 수 있다.조선의 독립운동가로는 김일성이 있다.
4. 6. 남한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손병희, 이승훈 등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들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초기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나, 친일파 중용, 독재, 부정선거 등으로 비판받는다.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나,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막지 못하고 암살당했다. 여운형은 중도좌파 독립운동가로서 좌우합작을 추진했으나 암살당했다. 조만식, 김일성은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끌었으며, 김일성은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다.5. 독립을 쟁취한 나라의 독립운동가
각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성격과 사상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등장했다. 그중 일부는 건국의 아버지가 되었다.
- 북미의 독립운동가
- * 조지 워싱턴
- * 토마스 제퍼슨
- * 벤저민 프랭클린
- * 새뮤얼 애덤스
- * 존 애덤스
- * 존 핸콕
- * 토머스 페인
- * 패트릭 헨리
- * 타데우시 코슈추슈코
- * 장 밥티스트 드 라파예트/Marie-Joseph Paul Yves Roch Gilbert du Motier, marquis de Lafayette프랑스어
- * 한스 악셀 폰 페르센/Hans Axel von Fersensv
- 중남미의 독립운동가
- * 투팍 아마루 2세 (페루)
- * 투팍 카타리 (볼리비아)
- * 투생 루베르튀르 (아이티)
- * 장 자크 데살린/Jean-Jacques Dessalines프랑스어 (아이티)
- * 페드로 도밍고 무리요 (볼리비아)
- * 마누엘 벨그라노 (아르헨티나)
- *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파라과이)
- * 마테오 푸마카와 (페루)
- * 시몬 볼리바르 (베네수엘라、콜롬비아、에콰도르、페루、볼리비아)
- *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
- * (우루과이、아르헨티나)
- * 호세 데 산마르틴 (아르헨티나、칠레、페루)
- *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칠레)
- * 후안 파블로 두아르테/Juan Pablo Duarte영어 (도미니카 공화국)
- * 줌비 도스 팔마레스/Zumbi dos Palmarespt (브라질)
- * 티라덴치스/Tiradentes영어 (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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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란시스코 모라산 (중앙아메리카)
- * 윌리엄 램포트
- *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 (멕시코)
- *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이 파본/José María Morelos y Pavónes (멕시코)
- * 과달루페 빅토리아
- *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 (멕시코)
- * 호세 마르티 (쿠바)
- * 에릭 윌리엄스 (트리니다드 토바고)
- 몽골(외몽골)의 독립운동가
- * 담딘 수흐바토르
- * 도르지남보
- * 소린 담잔
- * 호르로그인 초이발산
- * 엘베그도르지 린치노/Elbegdorj Rinchino영어
- 동남아시아의 독립운동가
- *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vi
- * 호치민/Hồ Chí Minhvi
- * 아웅산
- * 수카르노
- 아프리카・서아시아의 독립운동가
-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 * 아흐메드 벤 벨라 (알제리)
- 동유럽의 독립운동가
- * 유제프 필수츠키 (폴란드)
5. 1. 동티모르
동티모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샤나나 구스망이 있다. 그는 결국 동티모르의 독립을 쟁취하였다.5. 2. 파키스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한 이슬람권 독립운동가들과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을 주장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6. 독립운동이 진행 중인 나라의 독립운동가
각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한 성격과 사상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등장했다.
- 북미의 독립운동가
- * 조지 워싱턴
- * 토마스 제퍼슨
- * 벤저민 프랭클린
- * 새뮤얼 애덤스
- * 존 애덤스
- * 존 핸콕
- * 토머스 페인
- * 패트릭 헨리
- * 타데우시 코슈추슈코
- * 장 밥티스트 드 라파예트
- * 한스 악셀 폰 페르센
- 중남미의 독립운동가
- * 투팍 아마루 2세 (페루)
- * 투팍 카타리 (볼리비아)
- * 투생 루베르튀르 (아이티)
- * 장 자크 데살린 (아이티)
- * 페드로 도밍고 무리요 (볼리비아)
- * 마누엘 벨그라노 (아르헨티나)
- *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파라과이)
- * 마테오 푸마카와 (페루)
- * 시몬 볼리바르 (베네수엘라、콜롬비아、에콰도르、페루、볼리비아)
- *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
- * 호세 아르티가스/José Gervasio Artigas영어 (우루과이、아르헨티나)
- * 호세 데 산마르틴 (아르헨티나、칠레、페루)
- *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칠레)
- * 후안 파블로 두아르테/Juan Pablo Duarte영어 (도미니카 공화국)
- * 줌비 도스 팔마레스 (브라질)
- * 티라덴치스/Tiradentes영어 (브라질)
- * 조제 보니파시오 (브라질)
- * 프란시스코 모라산 (중앙아메리카)
- * 윌리엄 램포트
- *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 (멕시코)
- *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이 파본 (멕시코)
- * 과달루페 빅토리아
- *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 (멕시코)
- * 호세 마르티 (쿠바)
- * 에릭 윌리엄스 (트리니다드 토바고)
- 몽골(외몽골)의 독립운동가
- * 담딘 수흐바토르
- * 도르지남보
- * 소린 담잔
- * 호르로그인 초이발산
- * 엘베그도르지 린치노/Elbegdorj Rinchino영어
- 아프리카・서아시아의 독립운동가
-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 * 아흐메드 벤 벨라 (알제리)
- 동유럽의 독립운동가
- * 유제프 필수츠키 (폴란드)
6. 1. 카빈다
카빈다는 응고요 왕국이 1885년에 시물람부코 조약을 맺어 포르투갈에 통치권을 넘기면서 식민지가 되었다. 70여 년간 앙골라와 별개의 식민지로 통치되었으나, 1956년에 포르투갈 제국이 주민의 동의 없이 앙골라에 편입시켰다. 앙골라 독립 시 카빈다가 앙골라에 편입되자, 카빈다인들은 카빈다 공화국을 선포하고 항쟁을 이어가고 있다.6. 2. 서파푸아
베니 웬다는 서파푸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6. 3. 위구르
이 지역은 인종, 민족, 종교적으로 중국과 차이가 큰 곳으로, 주류 중국인은 인종적으로 동아시아인에 속하는 반면에 위구르족을 위시한 소수민족은 인종적으로 중앙아시아인이며 이슬람교를 믿는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부터 독립운동이 일기 시작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많은 망명자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위구르 독립운동가로 레비야 카디르가 있다.6. 4. 티베트
달라이 라마 14세는 강화된 자치권을 얻으면 중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일부 티베트인은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7. 타이완의 독립운동가
료원의와 진지웅은 타이완의 독립운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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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잡겠다는데 빨갱이로 몰아”- 김삼웅, 김상덕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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