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보셀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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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로보셀로 전투는 1991년 5월 2일 크로아티아 부코바르 근처 보로보셀로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이다. 1990년 크로아티아의 독립 선언 이후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간의 민족적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크로아티아 경찰과 세르비아 민병대 간의 교전으로 크로아티아 경찰 12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크로아티아의 독립 요구를 더욱 강화시켰으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개입과 부코바르 전투로 이어지는 등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주요 분기점 중 하나가 되었다. 전투 이후 추모비 훼손 및 전쟁 범죄 관련 재판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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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보셀로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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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및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일부 |
날짜 | 1991년 5월 2일 |
장소 | 크로아티아 보로보셀로 |
결과 | SAO 크라이나 및 흰 독수리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SAO 크라이나 |
지휘관 | |
지휘관 1 | 부카신 쇼슈코차닌 보이슬라브 셰셸 |
지휘관 2 | 요시프 자야 요시프 레이흘키르 |
참여 부대 | |
부대 1 | 크라이나 방위군 보로보셀로 방위군 크라이나 민병대 두샨 강자 흰 독수리 |
부대 2 | 크로아티아 경찰 |
병력 규모 | |
병력 1 | 미상 |
병력 2 | 경찰관 18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1명 사망 4명 부상 |
사상자 2 | 12명 사망 22명 부상 2명 포로 |
기타 정보 | |
![]() | |
관련 명칭 | (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 |
2. 배경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열린 1990년 크로아티아 총선거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이 압승하면서 세르브인과 크로아트인 사이의 민족 갈등이 악화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TO)의 무기들을 압수하였다. 1990년 8월 17일, 이러한 민족 간 긴장은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들의 대대적인 반란으로 격화되었다. 이 반란은 크닌(스플리트에서 동북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도시) 인근 달마티아 고원의 세르브계 다수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동슬라보니아 등지에서 일어났다.
보로보셀로 전투는 크로아티아 경찰과 세르비아 민병대 양측에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며, 특히 일부 크로아티아 경찰 시신이 훼손된 채 발견되어 민족 간 증오심을 극대화했다. 이 사건은 크로아티아 내에서 즉각적인 독립 선언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에 대한 보복 요구를 촉발했으나,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은 전면전을 피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사건 이후 양측의 적대감은 더욱 깊어졌고, 유고 인민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민족 간 무력 충돌은 부코바르 전투로 이어지며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전투 이후에도 사건 현장에 세워진 추모비가 반복적으로 훼손되는 등 갈등이 지속되었으며, 관련자 일부는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처벌받았다.
1990년 7월, 지역 세르브인들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추진하는 크로아티아의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에 반대하기 위해 세르비아 국가위원회를 설립하였다. 크닌 출신의 치과의사인 밀란 바비치가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크닌 경찰서장 밀란 마르티치는 여러 준군사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 두 사람은 크로아티아 내 세르브인 다수 거주 지역을 통합하여 자칭 독립국인 크라이나 세르비아인 자치주(SAO 크라이나)를 세우고, 이 지역의 정치 및 군사 지도자가 되었다. 1991년 3월, 세르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은 SAO 크라이나 당국은 세르브인이 밀집한 크로아티아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계 저항 세력과 크로아티아 특수경찰 사이에 파크라츠 충돌이 발생했으며, 이는 유혈 사태 없이 끝났으나 이후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에서는 양측의 충돌로 첫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1991년 초 크로아티아는 정규군 병력이 없었다. 국방력 강화를 위해 크로아티아는 경찰 인력을 약 2만 명으로 증강하였다. 이 중 가장 핵심적인 전력은 12개 대대, 3천 명 병력으로 구성되어 군사 조직 형태로 편성된 크로아티아 특수경찰이었다. 또한, 크로아티아 각지에는 16개 대대와 10개 중대로 구성된 9천 명에서 1만 명 규모의 지역 예비경찰 조직이 있었으나, 이들은 무기가 부족한 상태였다.
3. 전조
1991년, 세르비아 맞은편 다뉴브강 우안에 위치한 보로보셀로 마을은 부코바르 자치구의 일부였다. 부코바르 시 자체는 인구의 47.2%가 크로아티아인, 32.2%가 세르비아인으로 민족이 혼합된 곳이었지만, 이 지역의 작은 정착촌들은 대체로 한 민족이 우세한 경향을 보였다. 14곳은 크로아티아인이, 10곳(보로보셀로 포함)은 세르비아인이, 2곳은 루테니아인이 다수였으며, 나머지 2곳만 민족이 혼합되어 있었다.
민족 간 긴장이 악화되는 가운데, 보로보셀로는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 바로 다음 날인 1991년 4월 1일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이틀 후인 4월 3일, 부코바르에 주둔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부대는 전투 준비 태세를 최고 수준으로 격상하였다. 이른 봄, 크로아티아 측과 세르비아 측은 크로아티아 경찰이 현지 세르비아 당국의 명시적인 동의 없이는 보로보셀로에 들어가지 않기로 합의했다.
4월 14일 보로보셀로에서 정치 집회가 열렸으며, 이달 말에 이르러 상황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당시 집회 연사였던 세르비아 급진당(SRS) 대표 보이슬라브 셰셸, 세르비아 국회 의원 밀란 파로슈키, 세르비아 종교 및 디아스포라부 장관 스탄코 치비얀 등은 모든 세르비아인을 단일 국가로 통합하는 대세르비아 건설을 주장하며 민족주의 감정을 부추겼다. 이들은 일주일 후 오시예크 북쪽의 야고드냐크 마을에서 비슷한 연설을 하며 반대하는 크로아티아인을 살해해야 한다는 공개적인 요구까지 하였다.
또한, 4월 중순 현지 민병대 사령관 부카신 쇼슈코차닌의 요청으로 흰 독수리 준군사 조직원들이 보로보셀로에 도착했다. 이들 준군사 조직원들은 세르비아 내무부로부터 직접 무장하거나, 세르비아 당국의 승인하에 SAO 크라이나와 연계된 민병대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았다. 1991년 4월 말까지 보로보셀로의 흰 독수리에는 세르비아 국가재건당과 연계된 두샨 더 마이티 준군사 조직의 전투원들도 합류하였다.
4월 말, 보로보셀로 외곽의 크로아티아 측 진지에서 마을을 향해 아름브루스트 로켓이 발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린다. 일부에서는 보로보셀로 외곽의 바리케이드 역할을 하던 농업 기계를 향해 여러 발이 발사되었다고 주장한다. 다른 주장으로는 민족 간 긴장을 고조시키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3발의 로켓이 마을을 향해 발사되었다고 한다. 로켓 중 하나는 주택에 명중했고, 다른 하나는 불발된 채 들판에 떨어졌다. 이 공격으로 인한 사상자는 없었다. 이후 라디오-텔레비전 베오그라드는 로켓 발사 장면 사진을 공개하며 이를 크로아티아 측의 공격 증거라고 주장했고, 이는 민족 간의 긴장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로켓은 오시예크 경찰서장 요시프 레이흘키르(나중에 크로아티아 비정규군에게 살해됨)가 이끌었던 한 무리에 의해 발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크로아티아 내무부 장관이었던 요시프 볼코바츠는 이후 이 그룹에 당시 크로아티아 국방부 차관이었던 고이코 슈샤크, 브라니미르 글라바시, 비체 부코예비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슈샤크는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그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한편, 당시 내무부 예비군 사령관이었던 니콜라 야만은 자신이 이 작전을 주도했으며, 슈샤크, 글라바시, 부코예비치의 연루를 부인했다. 야만은 이 작전이 레이흘키르와 함께 계획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4. 전개
1991년 5월 1일 저녁, 크로아티아 경찰 4명이 독단적으로 마을에 게양된 유고슬라비아의 국기를 크로아티아의 국기로 교체하기 위해 보로보셀로로 진입하였다. 이 시도는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경찰관 2명은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으며, 다른 2명은 발과 머리에 각각 경미한 부상을 입고 도주하였다. 크로아티아 내무부는 당시 경찰관들이 달과 보로보셀로를 잇는 도로를 순찰 중이었다고 밝혔다.
이 경찰관들은 오시예크 경찰서 소속이었으나, 부코바르 지역 관할권을 가진 빈코브치 경찰청은 부코바르 경찰서에 현지 민병대 지휘관 부카신 쇼슈코차닌에게 연락하라고 지시했다. 부코바르 경찰서는 5월 2일 오전 4시 30분경 쇼슈코차닌에게 연락했으나, 그는 아는 바가 없다고 답했다. 오전 9시경 빈코브치 경찰서장 요시프 자야가 직접 통화했을 때도 같은 대답을 들었다. 30분 후, 오시예크 경찰서장 요시프 레이흘키르가 쇼슈코차닌과 접촉하자 그는 사건 발생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경찰이 먼저 지역 주민에게 총을 쏴 1명이 부상했다고 주장했다. 레이흘키르는 포로로 잡힌 경찰관 2명의 석방을 확보하지 못했다.
레이흘키르와 자야는 보로보셀로에 추가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쇼슈코차닌은 경찰관들이 백기를 들고 오면 안전 통행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20명에서 30명 규모의 추가 경찰 병력이 보로보셀로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백기를 들고 접근했지만, 준군사조직 및 지역 민병대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이에 오시예크와 빈코브치에서 약 150명의 경찰관이 버스를 타고 증원군으로 추가 파견되었다. 빈코브치에서 파견된 병력은 보로보셀로에 진입하여 매복 공격을 받았으나, 달을 거쳐 오시예크에서 파견된 지원군은 보로보셀로 북쪽의 검문소에 막혀 마을 안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총격전은 오후 2시 30분까지 이어졌고, 달에서 유고 인민군(JNA) 소속 장갑 수송차량(APC) 7대가 마을로 이동해왔다. 한편, 보로보셀로 바로 남쪽의 보로보 나셀레를 통해 진입하려던 다른 JNA 장갑차 행렬은 크로아티아 여성 주민들이 막아서면서 진입이 저지되었다.
5. 여파
5. 1. 사상자
매복 공격으로 크로아티아 경찰 12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부상을 입었다. 포로로 붙잡혔던 경찰관 2명은 다뉴브강을 건너 노비사드로 이송되었으나, 5월 2일 저녁 석방되어 오시예크로 귀환하였다.
세르비아 민병대 측에서는 발레보 출신의 민병대원 보이슬라브 밀리치 1명이 사망하였고, 다른 민병대원 4명이 부상을 입었다.
보로보셀로에서 사망한 크로아티아 경찰 중 일부는 시신의 귀가 잘리고 눈이 도려내졌으며 목이 베인 채 발견되는 등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이러한 잔혹 행위는 민족 간의 증오심을 더욱 부추기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5. 2. 무장 충돌의 악화
보로보셀로에서의 충돌 이후 투지만 대통령의 참모들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즉각적인 독립 선언과, 크로아티아인들이 사실상 세르비아의 편으로 간주하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에 대한 보복 공격을 주장하였다. 5월 3일, 투지만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사실상 전쟁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국제 사회가 폭력 행위를 멈추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크로아티아의 역사학자 다보르 마리얀에 따르면, 투지만 대통령이 유고 인민군에 대한 보복 공격을 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당시 반역에 가까운 비겁한 행위로 비난받았으며, 이로 인해 마르틴 슈페겔 국방부 장관이 사임하는 등 비판 여론이 거셌다. 그러나 이 결정은 훗날 유고슬라비아 해군 제독 브란코 마물라가 인정한 것처럼, 크로아티아가 전쟁에 대비하는 데 매우 필요한 시간을 벌어준 중요한 결정이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보로보셀로 사건은 크로아티아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크로아티아의 언론들은 세르비아인을 악마화하며 민족 갈등을 더욱 부추겼다. 세르비아인들은 집단적으로 "체트니크", "테러리스트", "크로아티아의 적"으로 불렸고, 마찬가지로 크로아티아인들은 "우스타샤", "세르비아인의 적"으로 불리며 상호 적대감이 깊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면전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해결의 희망은 점차 사라졌고, 양측 모두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5월 8일에서 9일 사이, 유고슬라비아 연방 대통령직은 보로보셀로 사건을 논의하고 유고 인민군의 추가 개입 요청을 심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회의에는 유고슬라비아 내 모든 공화국 대통령직이 참석했으며, 크로아티아 지도부는 민족 간 긴장이 고조된 지역에 유고 인민군을 배치하는 것을 허용했다. 5월 9일, 연방 정부 대표단과 크로아티아 정부 대표단이 부코바르에서 만났지만, 연방 대표단만 보로보셀로를 방문했고 크로아티아 측은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을 거부한다"며 방문하지 않았다.
보로보셀로 충돌에 대응하여 유고 인민군은 오시예크의 제12 프롤레타리아 기계화 여단 일부와 스렘스카미트로비차에 주둔한 제453 기계화 여단의 제1 기계화 대대를 부코바르 지역으로 재배치했다. 동시에 제36 기계화 여단의 제2 기계화 대대가 수보티차에서 빈코브치로 이동했다. 그러나 유고 인민군의 주둔에도 불구하고 민족 간 교전은 계속되었고, 결국 8월 말 부코바르 전투로 이어지며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5. 3. 추모 논란 및 기소
1996년에서 1998년 사이 에르두트 협정에 따라 크로아티아로 행정권이 넘어가기 전, 유엔의 과도통치기구인 유엔 동슬라보니아, 바라냐 및 서시르미움 잠정통치기구(UNTAES)가 임시로 관리하던 시기에 크로아티아 비정부 기구 세 곳이 보로보셀로 입구 공유지에 추모비를 세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괴되었다. 2002년에는 마을 중앙에 새로운 추모비가 세워졌지만, 이 역시 완공 직후 파괴되었다. 2012년에는 보로보셀로 전투로 사망한 크로아티아 경찰관 12명의 이름이 적힌 새로운 명판이 있는 추모비가 세워졌으나, 이 추모비 역시 훼손 및 파괴의 대상이 되었다. 지역 내 세르브계 정치인들은 추모비 파괴 행위를 비판하면서도, 일부는 추모비가 1991년 보로보셀로에 있었던 세르브계 군사를 "세르브인 테러리스트"로 규정하여 세르브인 소수 민족에게 불쾌감을 주고 사회 전체가 유죄로 낙인찍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2012년 2월, 크로아티아 오시예크 지방법원은 당시 포로로 잡힌 경찰관 2명을 학대한 혐의로 밀란 마린코비치에게 전쟁 범죄 유죄 판결을 내리고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2014년 항소심에서 마린코비치의 형량은 3년으로 감경되었다. 경찰관 학대와 관련하여 추가로 4명의 남성이 기소되었으나, 이들은 크로아티아 외 다른 나라에 거주하고 있어 크로아티아 사법부의 기소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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